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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7)화 (17/154)

17.

“그래서…… 절 멀리하셨군요. 기분 나쁘셨을 텐데 죄송해요.”

얼마 후, 안정을 되찾은 루가르가 소심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고개 드세요. 저 기분 나쁘지 않아요. 루가르 님은 그저 명령받아 임무를 수행하신 것뿐인데요. 폐하께서 제게 감시를 붙인 것도 충분히 납득 가능한 일이에요.”

이미 자신을 속인 값은 충분히 치렀다. 귀여운 모습을 많이 구경했으니까.

“그, 그래도…… 제가 계속 곁에 있으면 불편하실 거예요. 내일부터는 시녀를 바꿔드릴게요. 전 아무래도 시녀 일이 처음이다 보니 미숙한 점이 많아서, 플로라 님을 제대로 돕지 못했어요.”

그래도 루가르는 여전히 마음이 찜찜한지 미안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플로라가 단호히 말했다.

“저는 이대로도 좋아요. 루가르 님.”

“…….”

“이왕 들킨 김에 이제 몰래 감시하지 말고, 대놓고 감시하는 건 어떠세요?”

루가르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네? 저어…… 그럼 제가 싫지 않단 말씀이세요?”

“네. 그러니 괜찮으시다면 계속해주세요. 시중도 지금처럼 꼭 필요한 일만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도……!”

“아, 혹시 루가르 님께 부담일까요?”

“아니요!”

루가르가 일 초의 고민도 없이 대답한 탓에 이번엔 플로라가 당황했다.

“사실 저 이 일에 흥미를 느꼈던 참이에요!”

“……네?”

루가르가 두 손을 꼭 모은 채 눈을 반짝였다.

“지난번 플로라 님께 드레스를 입혀드리면서 느꼈어요. 제 손으로 누군가를 예쁘게 꾸며드릴 수 있다는 게 행복했어요!”

“…….”

“계속 맡겨 주신다면 앞으로도 잘해보고 싶어요. 필요한 일만 말고, 제대로요!”

그저 불필요한 시중을 받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래서 루가르가 필요했다.

근데 대화가 왜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지……?

“그게 아니라, 저는 시중이 필요 없…….”

“사실은 제가 어제 머리를 예쁘게 땋는 법도 배워왔거든요. 괜찮으시다면 목욕 후에 한 번 만져드려도 될까요?”

확실히 이상한 방향이다. 꼭 해보고 싶다는 의지가 강렬한 그녀의 눈빛에 말려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분명히 말려들었다.

그날 밤에는 머리를 한쪽으로 곱게 땋은 채로 잠들었으니 말이다.

* * *

이 소식을 전달받은 시몬은 배를 잡고 웃었다.

감시의 목적도 있지만, 플로라를 시험하기 위해 근위대 기사를 넣은 것도 없지 않았다.

<웃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폐하. 이번 위장은 루가르의 실수도 있긴 했지만, 웬만한 기사였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가? 눈썰미도 좋지.”

에르네는 여전히 플로라를 경계하고 있었다.

하기야,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상대에게 마음을 여는 것만큼 미련한 일도 없었다.

한데 그 미련한 길을 구태여 걷고 있는 자신은 대체 뭐란 말인가.

시몬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지난 대련 이후에도 말씀드렸듯, 움직임은 암살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행동이 민첩하고 공격은 정확하게 급소와 약점만 찾아 노렸어요. 아마 근거리에서는 단검을 더 잘 쓸 겁니다.>

작은 몸집은 민첩함을 더했고, 매서운 눈은 기어코 약점을 찾아내려 했다.

에르네는 잠시 그녀와 대련했던 때를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상 실력으로만 보면 근위대 대장으로서 탐내야 할 인재였다.

하지만 꺼림칙한 부분이 많으니, 정보가 확실해질 때까진 적이었다.

그것도 아주 위험한 적.

왜 하네칸에 남겠다고 해놓고도 정보를 밝히지 않는 것인지.

그 여자가 숨기고 있는 것이 무언지 알아야 했다.

<일단 적국의 첩자 위주로 정보를 수집해보려 합니다만, 진짜 이름을 걸고 활동하진 않았을 테니 조금 시일이 걸릴 듯합니다.>

“루가르 경은 계속 거기 둘 생각이야?”

<이미 정체를 들킨 마당에 계속 두는 건 위험합니다. 루가르가 해야 할 일도 아니고요.>

“본인이 원하는데도?”

<네. 그래도 안 됩니다.>

“왜? 플로라가 루가르 경을 죽이기라도 할까 봐?”

<……아직은 신뢰할 수 없는 여자니까요.>

에르네의 반응은 단호했다.

시몬이 흐음, 하고 짧게 숨을 내쉬었다.

“곧 제국 기사단 테스트야. 합격하면 숙소로 방을 옮겨야겠지. 그때까지만 두는 게 어떻겠어? 루가르 경도 원하잖아.”

<…….>

“대놓고 감시해달라는데 못할 건 뭐야?”

<……폐하. 이미 그 여자를 성에 들인 것만으로도 위험은 충분히 감수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더해서 좋을 것은 없습니다.>

“부하가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직접 하든지. 이제 와 다른 시녀를 배정하긴 불안하잖아. 밖에선 귀족들이 두 눈이 시뻘게져서 내가 왜 플로라를 데려왔는지, 대체 누군지 알아내려 하고 있을 텐데. 아무렴 작은 정보라도 나보다 먼저 알면…… 그거 너무 재미없잖아. 내가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 양보하면서 공들이는 일인데.”

<…….>

“이 마도구 출처가 어디인지 알아냈어?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잖아.”

시몬이 사각형의 투명한 패치를 손에 들고 흔들었다.

플로라를 처음 만난 날, 신원이 불분명한 괴한들 몸에 부착되어 있던 것이었다.

피가 묻어 굴곡지지 않았더라면 영영 발견하지 못했을 마도구였다.

이것이 결계를 흩트려 놓았다. 실로 영악한 물건이었다.

“심지어는 네이라도 몰라. 근데 플로라는 알 거야. 이게 어디서 만들어진 건지. 알아내야 해. 그러려면 일단 쥐구멍으로도 도망 못 치게 해야 하고. 그러니 에르네, 마음을 좀 더 너그럽게 써봐.”

<…….>

“넌 루가르 경을 아직도 그리 못 믿겠어? 그 애도 벌써 근위대로 들어온 게 몇 년인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믿지 않는 사람을 부하로 들이지 않습니다.>

“그래? 근데 왜 내 눈엔 네가 루가르 경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일까.”

<…….>

“그 애가 플로라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어. 보고 느낀 것이 있으니, 남겠다고 판단했을 거야. 한 번 믿어봐.”

시몬의 타이르는 듯한 말에 에르네는 침묵을 지켰다.

에르네의 표정에 잔뜩 먹구름이 낀 것을 보며 시몬이 남몰래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 * *

루가르와 진솔한 대화를 하고 난 이후에는 그녀를 대하는 게 좀 더 편해졌다.

루가르도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어 그런지 말하는 게 한결 편해 보였다.

필요한 일만 하지 않고, 제대로 시녀로 일해보고 싶다더니 그녀는 정말 본격적이었다.

매일 플로라에게 다른 머리 모양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했고, 또 괜찮다고 해도 들은 체도 않고 시중을 드는 경우도 허다해졌다.

그런 루가르에게 항상 그녀에게 말려드는 쪽은 플로라였다.

오늘도 ‘대놓고 감시’를 해야 한다며 꾸역꾸역 욕실에 따라 들어왔다.

목욕을 할 때마다 루가르는 항상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그리고 부드러운 솔로 살결을 문지를 때는 아프지 않느냐고 꼭 물었다.

플로라는 그녀의 조심스러운 태도가 자신의 피부 때문이리란 걸 알고 있었다.

“왜 묻지 않아요?”

“……네?”

“몸에 난 상처요. 왜 이렇게 된 건지. 매번 궁금해 죽겠다는 눈을 하고 있으면서 한 번도 묻질 않으시네요.”

“그거야…… 플로라 님께 분명 안 좋은 기억일 테니 그렇죠. 실례잖아요.”

“…….”

“제게도 안 좋은 기억이 있어요. 그걸 누가 콕 집어서 물어보면 속이 울렁거리고 기분이 울적해지더라고요.”

“…….”

“혹시 제가 잘못 짚었나요? 물어보면 말해주실 건가요?”

“아니요.”

“피이. 거봐요. 어차피 말도 안 해주실 거면서.”

루가르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플로라의 팔을 문지르는 것에 집중했다.

딱히 보려고 하지 않아도 눈에 밟혔다.

유려하게 뻗은 목선을 지나고 나면 온통 상처투성인 몸이었으니 실례인 줄 알면서도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상처들을 볼 때마다 궁금했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인지.

그녀의 몸은 마치 살덩어리가 조각조각 이어 붙여진 것처럼 보였다.

아마 전장을 십 년간 쉴 새 없이 누비고 다니던 사람의 몸보다도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단순히 칼에 찔리거나 베인 상처뿐만이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깊게 찢은 흔적 또한 가슴에서부터 배꼽 위까지 길게 나 있었다.

아직 부족한 실력이어도, 칼에 베인 자국이 어떻게 남는지 정도는 안다.

상처만 봐도 그녀에게 전장이 아닌, 별개의 어두운 일이 있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묻지 못했다.

대장은 그녀가 제 정체를 감추고 있는 위험한 사람이니 가까이하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했지만, 직접 겪어본 바로는 달랐다.

플로라는 위험한 사람이 아니었다. 굳이 수상한 점을 꼽자면 그저 딱 하나. 이 상처였다.

하지만 그녀가 숨기고 있는 것이 이 상처들과 연관이 있다면 차라리 말하지 않길 바라기도 했다.

이건 말 그대로 상처였으니까.

상처를 억지로 들추고 꺼내는 것만큼 지옥인 일은 없었다.

상처를 마주 볼 힘이 생겼을 때, 캐묻지 않아도 모든 걸 말해주지 않을까.

루가르는 근위대에 들어온 지 벌써 일 년이 넘어가지만, 여전히 자신의 상처에 대해 남에게 말하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당신은 해야 한다고 강요할 순 없었다.

시몬 폐하도 닦달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그녀의 마음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대장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루가르는 시몬 폐하와 같은 생각이었다.

공들여 기다리는 쪽. 그래서 이곳에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플로라를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묻지 않아 주셔서 감사해요. 루가르 님은 마음이 깊은 사람 같아요.”

침묵 끝에 플로라는 루가르에게 조심히 제 마음을 전했다.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건, 그녀에게도 노력이자 도전이었다.

살면서 누구에게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들이었다. 따뜻한 사람이라느니, 마음 깊은 사람이라느니.

직접 들어보니 알 것 같았다. 어색하더라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상대의 마음을 기분 좋게 만드는지. 그래서 플로라도 노력하는 중이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시고, 감사한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시녀라면 응당 모시는 분의 마음 정도는 잘 헤아릴 줄 알아야죠!”

무거운 분위기를 벗어나려는 루가르의 장난스러운 말에 플로라가 쿡쿡 웃었다.

“여긴 정말 좋은 사람들뿐이에요.”

그동안 걸어온 삶이 부끄러울 정도로.

플로라는 느른하게 몸을 뻗으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욕조 안에 받아진 물이 가볍게 찰랑거렸다.

“플로라 님도 좋은 분이에요. 제가 보기엔 그래요.”

루가르의 말이 기분 좋게 귓가를 맴돌았다.

* * *

어느덧 기사단 테스트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루가르가 머리를 높게 묶어주며 신이 난 듯 말했다.

“성이 워낙 넓어서 길을 잃으실 수도 있는데…… 제가 같이 가드릴까요?”

“괜찮아요.”

“저는 대놓고 플로라 님을 감시해야…….”

“루가르 님.”

“정말 안 돼요?”

“성의 시녀를 데리고 가면 모두의 시선을 받고, 참 좋겠네요.”

루가르가 피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참, 폐하께서 추천장은 챙겨주셨나요?”

“추천장은 제가 거절했어요.”

“……네? 어째서요? 괜찮으시겠어요?”

설마 테스트에 합격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기야 실력을 제대로 보여준 적도 없으니,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

“글쎄요. 괜찮을지는 모르겠네요. 그래도 추천장으로 입단하는 건 싫어요. 폐하의 추천장은 너무 대놓고 낙하산이잖아요.”

“……수도 아카데미 출신이 아니라면 시험에 합격해도 멸시받을 거예요. 그리고 남들보다 월등하지 않으면, 신분만 보고 탈락시키는 경우도 있어요.”

시몬, 이런 말은 해주지 않았잖아요.

그런 것까지는 생각 못 했던 터라, 플로라는 루가르의 말에 잠시 당황했다.

“그리고 기사단 텃세가 얼마나 심한데요. 폐하의 추천장으로 처음부터 콧대를 확 꺾어야 했는데!”

플로라는 루가르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텃세 같은 건 걱정 없었다.

이미 그 바닥에서 평생을 굴러오다 빠져나왔으니까.

“그럼 루가르 님이 지켜주시면 되겠네요. 물론 다른 기사단이지만, 선배님은 선배님이니까.”

“……아, 서, 선배님이요?”

화르르.

플로라가 농담처럼 던진 말에 루가르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말 하지 말라면서, 곧 다시 한번 불러주면 안 되겠냐고 했다.

플로라가 재차 ‘선배님.’하고 말을 내뱉자 루가르가 발을 동동 굴렀다.

저 귀여운 모습을 감상하고 있자니 다시 긴장이 좀 풀렸다.

“제가 꼭 지켜드릴게요! 꼭 합격해주세요!”

이렇게 된 거, 대충 말고 제대로 봐야겠다.

남들보다 월등하지 않으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플로라는 결의를 다지며 시몬이 준 검을 챙겨 들었다.

검에 박힌 흑요석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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