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161)

116화

현재 내 머릿속은 이안의 기억과 일부 동화되어 있는 듯했다. 나는 혼란을 금치 못하며 이안의 기억을 열심히 뒤져 보았다.

‘지금 이건…… 아카데미에 재학 중일 때의 이안인가?’

낯선 기억들을 더듬어 본 끝에 나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나는 지금 학창 시절의 소년 이안 몸에 들어와 있는 모양이었다.

‘이안도 학교에 다녔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그 사람도 정해진 시간에 등교하고, 선생님 밑에서 수업을 들을 때가 있었다니.

‘그건 그렇고…… 나 계속 이렇게 끌려다녀야 하는 거야?’

내 의지도 아닌데 몸이 마구 뒤흔들리고 있으니 멀미가 너무 나서 죽을 것 같았다.

기억을 들여다보기로 했을 땐 관전자의 입장이 될 줄 알았지, 이렇게 직접 이안 그 자체가 될 줄은 몰랐다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안이 어디론가 풀썩 내려앉았다. 근무 서고 있는 기사 둘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안의 몸이 기사들의 등 뒤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조용히,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사람이 아니라 마치 야생 짐승 같았다.

기사들의 바로 뒤까지 다가간 이안이 기사 한 명의 등을 쿡 찔렀다.

“안녕, 하인츠 경.”

“허, 허업.”

하인츠 경이라고 불린 기사가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이안 전하?!”

“근무 중인가 봐?”

“하아아. 아니, 아카데미에 계셔야 하실 분이 어떻게…….”

하인츠 경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예에. 개미 한 마리 지나다니지 못하게 경계 근무 중이었습니다만…… 어째 전하께서는 개미보다도 발소리가 없으시군요.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배웠어.”

이안의 입꼬리가 씩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암습 수업.”

“아이고. 요즘 아카데미에서는 그런 것도 가르칩니까? 황족에게 그런 잡기술을 알려 줘도 되는 겁니까?”

“하는 법을 알아야 대처하는 법도 안다고 하더군. 경에게도 한 수 알려 줄게.”

“정말 감사하군요.”

투덜거리듯 대답한 하인츠 경이 이어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전하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폐하께 이르지는 말아 주십쇼. 아시잖습니까? 저 전장에서 나고 자란 거. 웬만한 인기척에는 고양이보다 예민합니다. 전하께서 괴물 같으신 거라고요.”

“상관에게 괴물이라니. 기강이 아주 흐트러졌는데?”

“송구하지만 전하, 군 서열로는 제가 아직 전하의 상관입니다.”

이안은 픽 웃으며 하인츠 경과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하인츠 경이라는 사람은 아무래도 이안과 꽤 친한 사이인 듯했다.

그 모습을 보니 기분이 어쩐지 묘해졌다.

내가 아는 이안은, 그나마 루시안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신뢰를 내주지 않는 사람이다.

날 때부터 그런 사람인 줄로만 생각했었는데, 어렸을 때는 친하게 지내는 어른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럴 때도 있었구나.’

이안이 가볍게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서. 두 분 폐하께선 어디 계시지?”

“황후 폐하께선 오늘 오후 올렌 백작 부인, 샤르네 남작 부인과 티타임 약속이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딱 지금쯤이겠군요.”

“아바마마께선?”

“황제 폐하께선 지금 서궁에 계시고요.”

황제 폐하.

그 이름에 내 심장이 덜컥였다.

시간대를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는 모양이었다. 이 시간대에서, 선황은 아직 살아 있었다.

내 동요와 달리 이안의 목소리는 여상했다.

“또?”

“워낙 좋아하시는 장소이지 않습니까. 이안 전하께서 유년 시절을 주로 보내신 곳이기도 하고 말이지요.”

“그랬던가.”

“어휴, 기억 안 나십니까? 그때는 참 얼마나 귀여우셨는지. 한 번은 그네를 한 바퀴 돌면서 타겠다고 하시다가 거꾸로 뒤집어지셔서-”

“닥쳐. 그 이야길 얼마나 우려먹을 셈이야.”

단칼에 이야기를 잘라 낸 이안이 차가운 눈으로 하인츠 경을 노려보았다.

하인츠 경이 얼른 두 손을 들었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늙으니 했던 말 또 하는 것만 느는군요, 허허.”

“실없는 건 여전하군. 서궁으로 가겠다. 날 만난 건 비밀로 해, 둘 다.”

“아이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수행원도 없이 아카데미에서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기사가 되어선 무슨 수행원이야.”

이안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선 숨길 수 없는, 아니. 숨길 필요 없는 자신감과 자기 확신이 엿보였다.

하인츠 경이 펄쩍 뛰었다.

“그래도 이안 전하께선 아직 어리시다고요! 그 나이에 믿을 수 없는 성취를 이루시긴 했으나, 그래도 아직 보살핌이 필요하세요!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그러다 한번 그 높으신 코 다치실 일이 생길 거라고요. 그럼 저희 아랫것들만 죽어 나갑니다?”

“아아. 됐어. 난 간다, 그럼.”

“아니, 전하! 그렇게 담벼락을 넘으시면-”

하인츠 경의 비명을 무시하고 이안이 황실 담벼락을 다시금 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수록 잔소리만 는단 말야.]

머릿속에서 이안의 건방진 생각이 들렸다.

하인츠 경이 들으면 땅을 치고 울 만한 건방짐이었다.

‘그나저나, 또 이 곡예를 견뎌야 하는 거야?’

거침없이 황궁을 가로지르는 이안 때문에 다시금 멀미가 찾아왔다. 서커스 단원도 이렇게까지 몸을 자유자재로 부리진 않을 것 같았다.

‘으, 어지러워. 벗어나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시야가 빙글 돌았다.

‘어?’

나는 달라진 시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안이 보는 것만 볼 수 있었던 이전까지와 달리, 갑자기 내 시야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몸이 분리됐다?’

당황할 새도 없었다.

저 앞으로 담벼락을 마구 넘어 대는 이안의 뒷모습이 보였다.

‘잠깐만. 같이 가!’

나는 허둥지둥 이안의 뒤를 따라갔다.

담벼락에 닿은 순간, 신기하게도 몸이 그대로 통과되었다.

지금의 나는 아마 유령 같은 개념인 모양이었다.

담벼락을 마구잡이로 통과할 수 있게 되니 다행히 이안을 따라잡는 건 그럭저럭 가능해졌다.

유령 상태여도 숨은 찼기에, 나는 헉헉대며 필사적으로 이안의 뒷모습을 좇았다.

‘뭘 먹고 저렇게 날랜 거야!’

잔뜩 이안의 욕을 하며 간신히 따라잡아 가던 어느 순간.

마침내 이안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함께 멈춘 나는 정면을 바라보았다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여기는…….’

이안이 멈춘 곳은 한 소담스러운 궁전 앞이었다.

그 너머로는 더 이상 담벼락도, 정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우리가 황궁의 서쪽 끝, 즉 서궁까지 도달했다는 것을.

‘아까 보았던 장소와는 전혀 달라.’

현실 속 폐궁과 지금 이곳은 분명 같은 장소였다.

그러나 무너진 잔해와 잿빛 먼지로 지저분했던 그 폐궁은 이곳과 전혀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계절에 맞는 꽃으로 장식된 정원과, 깨끗이 잘 닦인 궁전의 외벽.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그런데 이안은 서궁으로 넘어가지 않고, 담벼락 위에 우뚝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왜 저러지?’

그런 의문을 가질 무렵이었다.

[누구지. 저자들은.]

머릿속을 이안의 목소리가 스쳤다. 몸이 분리되었어도 그의 생각은 아직 들리는 모양이었다.

[하나같이 모르는 얼굴들인데.]

슬쩍 돌아본 이안의 표정이 차디차게 굳어 있었다.

하인츠 경에게 불퉁하게 굴 때와는 전혀 다른, 마치 무기질 같은 차디참이었다.

나는 서궁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을 둘러보았다.

여태껏 지나왔던 궁들은 정문을 지키는 경비병이 대개 네다섯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곳은, 제일 변방에 위치한 곳인데도 어째서인지 경비병의 수가 가장 많았다.

대충 세어 보기만 해도 스무 명은 넘어 보였다.

[……이 냄새는.]

이안의 생각이 또다시 들려왔다.

냄새?

동시에 심장이 쿵, 쿵. 빠르게 뛰어 대기 시작했다.

이건 내 심장 박동이 아니었다. 생각이 그랬듯, 이안의 심장 박동이 마치 내 것처럼 공유되고 있었다.

[지독한…… 독향.]

서늘한 읊조림에 등골이 쭈뼛 솟았다. 이안의 심장 박동이 더 박차를 가했다.

[뭔가가 이상해.]

그런 생각이 들려온 바로 다음 순간, 이안의 몸이 쏜살처럼 튀어 나갔다.

너무나 빠른 약진이었기에 나는 한 박자 느리게 그의 움직임을 깨달았다.

‘안 돼!’

나는 허덕이며 이안의 뒤를 좇았다. 순식간에 그는 폐궁의 뒷문까지 접근해 있었다.

‘안 돼.’

이 기억이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이안을 보자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이안의 것과 거의 같은 속도로 공명할 만큼.

뒷문 역시 지키고 있는 병력이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정문보다는 수가 훨씬 적었다. 두 기사 모두 방독면처럼 생긴 것을 얼굴에 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뒷문 왼편에 선 기사에게 먼저 달려든 이안이 뒷목을 후려쳤다. 기사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바닥으로 쓰러졌다.

“넌…… 헉!”

오른편에 서 있던 기사가 이안을 발견하곤 눈을 부릅떴다.

품속에서 단도를 꺼낸 이안이 칼자루로 기사의 턱을 아래에서부터 올려 쳤다. 눈동자가 위로 돌아가며 기사가 제 동료처럼 풀썩 땅 위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장성한 기사 둘을 해치운 이안은, 곧장 궁 안으로 들어서려다 멈칫했다.

[젠장…… 독이.]

소맷자락으로 제 코를 가린 이안이 쓰러진 기사 중 한 명이 쓰고 있던 방독면을 벗겨 내 제 얼굴 위에 둘러썼다.

[황궁 소속 기사가 아니야.]

드러난 기사의 맨얼굴을 본 이안이 생각했다.기사의 뺨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황궁 기사라면 품위 유지 조항 때문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기랄. ……아바마마.]

이안이 신음하듯 읊조리고는 궁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황급히 안으로 따라 들어간 나는 당황해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궁의 내부는 온 사방에 보랏빛 연기가 자욱했다. 한 치 앞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