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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117/161)

117화

[젠장.]

구역질이 치미는 듯 이안이 제 목을 움켜쥐었다. 독이 너무 진해 방독면으로도 완전히 막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건 나와 마찬가지일 텐데도, 이안이 빠르게 움직이더니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아냈다. 유년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더니 보지 않고도 길을 아는 모양이었다.

“누구냐!”

그러나 지하실에는 이미 선점 중인 놈들이 있었다.

방독면을 쓴 괴한들이 이안을 돌아보더니 칼을 빼 들었다.

이안은 당황하지도 않은 듯, 뽑아 놓았던 단검을 물 흐르듯 휘둘렀다.

처음으로 휘두른 단검이 가장 앞에 있던 괴한의 목울대를 찔렀다. 괴한은 비명 질러 도움을 청하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두 번째로 휘두른 칼날은 그다음 괴한의 방독면을 가격했다.

“컥, 컥!”

방독면을 잃은 괴한이 털썩 무릎 꿇고는 격렬히 기침했다.

몇 초 후, 괴한이 입가에서 보랏빛 거품을 흘리며 쓰러졌다.

“쥐새끼가 어디서 감히!”

마지막 남은 괴한이 노성을 터뜨리며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이안이 아직 두 번째 괴한에게서 뒤돌아서기도 전이었다.

“뒤!”

쨍한 외침이 지하실을 울렸다.

‘어?’

나는 깜짝 놀라 내 목을 붙잡았다.

방금, 진짜로 소리가 나간 것 같은데?

“이 계집은 또 뭐야?!”

괴한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외쳤다.

동시에 이안 역시 내 쪽을 돌아보았다.

순간 온몸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이안의 푸른 시선이 나를 정확히 직시했으니까.

‘내가, 보여?’

이안의 입술이 움직였다.

“뭐야, 당신은.”

“왜 내가 보이…… 캑, 캑!”

횡설수설하던 나는 순간 목을 부여잡곤 쓰러졌다. 철퍼덕, 소리와 함께 부딪힌 무릎이 깨질 듯 아파 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픈 건 목구멍이었다. 목이 타는 듯 따갑고 쓰라렸다.

공기를 마실 때마다 증상은 더욱더 심해졌다. 유령 같았던 몸이 실체화됨과 동시에 독까지 통하게 된 것 같았다.

“컥, 허억!”

[뭐 하는 여자지?]

서궁에 들어온 순간부터 내내 무기질 같던 이안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감정이 깃들었다. 당혹과 황당함이라는 감정이었다.

‘됐으니까 일단 살려 줘!’

지금 내 정체가 중요하냐, 사람이 죽어 가는데!

목을 부여잡으며 나는 속으로나마 간절히 외쳤다.

갑자기 나타난 내가 물론 수상하기 그지없겠지만 일단 살려 달란 말이야!

‘예나 지금이나 냉혈한 같은 인간아!’

내 마음의 소리가 전해졌는지, 이안이 첫 번째 괴한의 방독면을 벗기더니 내게 던졌다.

황급히 얼굴에 덮어 쓰자, 다행히 그것만으로도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다.

“허억…… 허억.”

나는 땅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운 채 숨을 몰아쉬었다. 날카로웠던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감각에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이 여잔 무슨…….]

이안의 속마음이 다시 한번 머릿속을 울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일단 나를 적이 아니라고 간주한 것 같았다.

“짐덩이를 메고 왔군, 이안 황자.”

“내 짐이 아니다.”

차갑게 선을 그은 이안이 이어 말했다.

“그보다 네놈들은 누구지. 목적은 폐하인가?”

“아비가 걱정되나 보군?”

괴한이 픽 웃음을 흘렸다.

앞선 제 두 동료가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걸 봤으면서도 괴한에게선 여유가 엿보였다. 여태까지의 놈들보다는 비교가 힘들 만큼 강한 놈인 게 분명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황자. 그분은 이미 편히 잠드시도록 돕고 온 참이니까.”

“……뭐?”

이안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괴한이 빙글빙글 미소 지었다.

“비유를 못 알아듣나? 이미 죽었다고, 그 늙은이. 그러니 더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

‘선황 폐하께서는 이미 돌아가신…… 시점이었구나.’

나는 불안한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안의 표정은 석상처럼 딱딱히 굳어 있었다.

[불가능하다.]

그의 생각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언뜻 듣기엔 언제나처럼 동요 없는 목소리였지만, 나는 구분할 수 있었다. 저 목소리에 분명 뚜렷한 혼란이 배어 있다는 걸.

[아바마마 곁에는 늘 호위하고 있는 암영대가 있어. 제국 최고의 실력자들로만 구성된…… ]

“혹시 그 그림자 부대를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황제 직속 호위 부대, 이름이 암영대던가?”

이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괴한이 비웃었다.

“그놈들은 오늘 하루 수도에 없어.”

“기만도 그쯤 되니 우습군.”

이안이 차갑게 웃었다.

“황제 직속 호위 부대가, 황제 아닌 누굴 호위하러 나섰다는 거지. 적당히 말 되는 거짓말을 꾸미는 정도의 성의는 보였어야지.”

“영 말이 안 되는 건 아닐 텐데. 황제까진 아니지만, 가장 황제에 가까운 존재의 부탁이라면?”

“……?”

“황제 곁을 잠시 떠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안 그런가, 황자?”

이안의 표정이 순간 돌처럼 굳었다.

“무슨 개소리야.”

“뭐, 힌트도 너무 많이 주니까 재미없군.”

괴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시간도 슬슬 다 끌었고 말이야.”

‘시간?’

불안이 엄습해 온 순간이었다.

지하실 계단 위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왜 연락이 없어. 슬슬 마법진도 다 준비됐을- 흡.”

또 다른 놈이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이번엔 마법사용 로브를 치렁치렁 걸친 녀석이었다.

아직 아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한가로이 내려오던 놈은, 이안이 들이댄 단도에 목울대를 베일 뻔했다.

“뭐…… 뭐야, 이건?”

“사실대로 대답하면 지금 찌르진 않겠다.”

이안이 지독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선 지금 어디에 있지?”

“아, 아직 모, 모르는 건가?”

마법사는 태연한 체하고 싶은 것 같았으나, 목에 단도가 드리워진 탓에 목소리가 못내 떨려 왔다.

괴한은 제 동료가 위협당하고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어. 그런데 안 믿더군.”

“히, 히힉. 못 믿는 거겠지. 우리가 황제를 죽였다는 걸!”

마법사의 눈이 희열에 번쩍였다.

이를 악문 이안이 단도를 더 바짝 들이댔다.

“한 번만 더, 허튼소릴 지껄였다간.”

“허튼소리가 아냐! 진짜 못 믿는군! 하긴, 못 믿을 만하긴 하지만 말야.”

흥분과 희열이 공포를 이겼는지 마법사가 시시덕댔다.

이안의 눈빛에 순간 불꽃이 튀었다.

‘위험해.’

지금의 이안은 내가 봐 온 중 가장 평정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위태로운 불안감이 심장을 덮쳤다.

그 순간이었다.

투쾅!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뭔가가 나와 이안을 덮쳤다.

“흐악!”

깜짝 놀란 내가 허우적댔지만, 그럴수록 나를 덮친 무언가는 내 몸을 더 옭아맬 뿐이었다.

‘이건, 그물?’

거대한 그물이 나와 이안을 가두고 있었다.

“잡았다. 제대로 잡았어!”

계단에서 또다시 누군가가 내려왔다. 그물총을 어깨에 맨 남자였다. 괴한이 핀잔했다.

“이제야 오나? 귀도 더럽게 어두운 놈들이군.”

“소리까지 차단하는 결계의 바깥쪽이었으니, 어쩔 수 없잖아. 그나저나 뭐야, 이건. 월척인가?”

그물로 다가온 남자가 그물 속에서 이안의 은색 머리칼을 잡아챘다.

“아니, 이거. 내 눈이 제대로 일하고 있는 거 맞나? 둘째 황자잖아?”

머리채를 휘어잡힌 이안이 푸르게 불타는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안의 몸이 그물 속에서 거칠게 움직였지만, 그물을 벗어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이쿠. 힘 빼지 마시죠, 황자님. 강력한 마법으로 특수 제작된 그물이라 일단 잡히면 절대로 못 빠져나오니까.”

“폐하를, 어떻게 했어.”

“야, 대답해 주지 마. 아무리 말해도 안 믿을 테니까.”

괴한이 낄낄거렸다.

그물총을 든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지? 결계 마법이 이중, 삼중으로 쳐져 있었을 텐데?”

“성력 때문이겠지. 워낙 괴물 같으신 둘째 황자님이니 성력 보유량도 어마어마하지 않겠나? 그게 마력을 차단한 거지.”

“정말 징그러울 만큼 대단한 그릇이군.”

괴한과 그물총 든 남자, 마법사가 한가로이 토론을 벌였다. 그 여유에 구역질이 나왔다.

노려보는 내 눈빛을 눈치챘는지 남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 여자는 뭐지. 둘째 황자가 데려온 전투 병력인가?”

“모르겠군. 터무니없이 약하던데.”

괴한이 알쏭달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눈속임 아니야?”

“그럴지도 몰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새 갑자기 나타났거든. 뭐, 정체가 뭐든 아무래도 상관없지. 저 안에 잡힌 이상 둘 다 살아 있는 시체나 다름없으니까.”

괴한이 킥 웃곤 어깨를 으쓱였다.

“마법진이 슬슬 완성될 때가 됐을 텐데?”

“그래. 이제 작동만 하면 될 거다. 그렇게 되면-”

마법사가 턱을 쓰다듬으며 씩 미소 지었다.

“이 예쁜 궁전은 통째로 재가 되어 날아가는 거지.”

‘이 자식들…….’

그제야 깨달음이 내 머리를 덮쳤다.

이 공간은 경비가 그리 철저하지 않았다.

아무리 이안이 저 나이에 이미 소드 마스터에 근접한 실력자라고 해도, 소년 한 명이 단신으로 경비 병력을 돌파하고 건물 안으로 잠입하는 데에 너무 쉽게 성공했었다.

‘그랬던 이유가 있는 거였어.’

이미 이 장소에서 해야 할 일을 다 마쳤기 때문에, 더 이상 철저히 궁을 지켜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이 장소를 날려 버리는 것뿐이니까.

“이 분 남았다.”

마법사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함께 천장을 바라본 나는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천장 가득히 붉은 빛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우린 이만 나가자고.”

“황자는?”

“뭐, 업고 나가기라도 하게? 저 눈 좀 봐라. 데리고 나가는 순간 어떻게든 우릴 다 죽여 버릴걸.”

“그래. 여기서 궁전과 함께 박살 나게 두는 편이 좋아.”

“하긴. 이미 황족 시해죄는 저질렀으니, 두 명째 황족을 죽인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겠지!”

낄낄대며 말한 괴한이 휘파람을 불곤 제 짐을 챙겼다.

“자, 얼른 나가자고!”

“일 분 삼십 초 남았다!”

세 놈이 지하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물 속에 이안과 단둘이 남겨진 채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우리, 진짜 여기서 죽는 거야?’

아니, 아니다.

이곳은 이안의 기억 속. 내가 아는 이안은 멀쩡히 살아 있으니, 여기서 이안이 죽을 리가 없었다.

‘잠깐. 그럼 나는?!’

관전자에 불과했어야 할 내 존재는 어느 순간부터 실체화되어 있었다. 이유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이 순간의 나는 이 세계 속에 살아 있었다.

그럼 나는 여기서 죽는 거 아니야?

‘말도 안 돼! 살려 줘!’

망할 마탑주!

나는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마법을 도대체 어떻게 설계했기에 내가 남의 과거 속에서 죽어야 하는데!’

“이봐.”

그때 낮게 긁는 듯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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