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오셨군요.”
여자의 목소리에 나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마법사 복장을 하고 있는 그녀는, 분명 한 번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당신은.”
“제 저택에서 뵌 적이 있죠? 멜로디 히아신스입니다.”
“아!”
리젤로의 측근이자, 리젤로가 종종 모습을 빌리곤 했던 그 사람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탑주님께선 어디 계시죠?”
“안에 계십니다. 복원 마법을 시전 중이시죠.”
“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잘되어 가고 있으려나.
마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기에, 지금 나로서는 리젤로의 천재성을 응원하는 방법밖엔 없었다.
“진척은 되어 가고 있나요?”
“다른 부분은 다 계획대로 순조로웠습니다.”
멜로디가 저쪽에 묶인 채로 무릎 꿇고 있는 근위 기사들을 눈짓했다. 폐궁을 지키던 기사들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복원 마법이…….”
말끝을 흐리는 멜로디를 보며 나는 불안을 직감했다.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지 않군요.”
“장소가 가진 기억이 너무 방대해서 그렇습니다.”
또다른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리젤로였다.
“이곳은 황궁이 아닙니까. 천 년 짜리 역사를 지닌 곳이다 보니 복원해야 할 기억을 찾는 것이 쉽지가 않군요. 지리적 특성을 생각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원작에서 이런 애로사항에 대해 본 적은 없었다.
그때는 아마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그런 여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만 충분히 들인다면 무슨 기억이든 복원해 낼 수 있을 겁니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리젤로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내 표정 역시 가라앉았다.
‘시간.’
그건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자원이었다.
“곧 황제군이 쳐들어올 거예요.”
지금은 마물로 시선을 분산시켜 놨지만, 언제까지고 황제의 눈을 가릴 순 없었다.
머지않아 폐궁이 뚫린 것이 들통날 테고, 그렇게 되면 전투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애써 반역 전쟁을 막은 이유가 없어지게 돼.’
“상관없습니다.”
그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돌아온 건지, 이안이 검을 늘어뜨린 채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물의 피를 먹은 검신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전투가 일어나야 한다면, 싸우면 됩니다. 어차피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이니.”
“안 돼요.”
나는 차디차게 이안의 말을 끊었다.
“말씀드렸잖아요. 그렇게 되면 이안 님, 죽을 수도 있다고.”
원작에서 이안이 살아남았던 건 그냥 운이 따랐던 것일 뿐이다.
이미 스토리 라인의 많은 것이 틀어졌는데, 그 운을 다시 한번 기대할 순 없었다.
“예지의 성녀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니 어쩔 수 없겠군요.”
리젤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빨리 말해 주세요!”
망할 놈의 마탑주.
방법이 있다면 진작 말할 것이지!
달려들 듯 외치자 마탑주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진정하세요. 저도 지금 생각난 참이라. 이 공간이 가진 기억을 기간별로 세분화해서, 가능성 높은 구간을 집중적으로 뒤져 본다면 훨씬 금방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
아주 그럴듯한 이야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컴퓨터 전체에 파일 검색을 하면 오래 걸리지만, 특정 폴더에서만 검색한다면 일 초 만에 결과가 나오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겠지?
“아주 멋진 아이디어예요. 그대로 실행하죠!”
“다만,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매개체?”
“이 장소에서 찾고자 하는 기억을 직접 경험한 분이 여기 계실까요?”
그렇게 말하며 리젤로가 이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 역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선황 폐하가 살해당했을 때, 이안이 그 자리에 있었을까?’
아마 그렇진 않을 터였다.
내가 알기로, 이안은 뒤늦게 아버지의 시체를 발견하고 사인을 밝혀 낸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안이 입술을 열었다.
“그렇다면 나를 매개로 쓰면 되겠군.”
“……!”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안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자기 아버지가 살해당하던 자리에……?’
금시초문이었다. 원작에 그런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내가 멍하니 쳐다보자, 이안이 한숨처럼 덧붙였다.
“그때의 기억은 대부분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니 가능할 겁니다.”
“…….”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제 아버지가 죽는 걸 봤다는 사람에게, 무어라 위로를 건네야 할까.
심지어 지금은 고운 위로의 말을 고를 때도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인 리젤로가 곧장 이안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이 성마석을 쥐고, 정신을 집중해 주십시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두 번째 복원 의식이 시작되었다.
성마석을 쥔 이안에게서 희미하게 푸른빛 마력이 일렁거렸다.
그 마력의 실은 리젤로와 이어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눈 감은 리젤로가 입술 속으로 무언가를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나는 숨죽인 채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번쩍 눈을 뜬 리젤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안 되겠군요.”
“네?”
당황한 내가 물었다.
“이안 님의 그 기억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 커서, 매개로 이용이 불가능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저 멀리서, 귀족들의 아우성이 들렸다.
아직은 남아 있는 마물이 귀족들과 더불어 황제를 확실히 잡아 두고 있는 모양이지만, 계속해서 지금 같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내가 거부감을?”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그렇게 오래된 기억인데.”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이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반응이 더 답답했다. 눈앞에서 부모를 잃은 기억은,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흐려지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리젤로의 반응 역시 나와 비슷했다.
“본인이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조차 모르다니. 글렀군요.”
“무슨 소리지?”
이안이 불쾌한 듯 되물었다.
리젤로는 어깨를 으쓱이곤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겠습니다. 무식한 방법이긴 하지만, 아까처럼 이 장소의 기억을 통째로 뒤지는 수밖에요. 시간은 좀 오래 걸리겠습니다만.”
“안 돼요.”
나는 단호히 말했다.
“벌써 시간이 꽤 지체됐어요. 더 끈다면 전투가 불가피해져요.”
“아이린.”
이안이 내 이름을 불렀다.
“말했듯, 난 상관없습니다. 오랫동안 대비해 온 일이기도 하고. 설령 다치더라도 그대 신변을 책임지지 못할 정도로 심한 꼴이 되진 않을 거라고 약속하죠.”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 신변 같은 걸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핀트를 잡지 못하는 이안에게 이상하리만큼 화가 났다.
“잠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초조히 중얼거렸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이안이 그 기억에 대해 갖고 있는 거부감이 원인이라면…….’
그 거부감을 없애 주는 게, 가장 간단한 해결책이겠지.
문제는 내가 카운슬러도 아니고 갑자기 이안의 어두운 유년 시절의 기억을 치료할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아니, 정말 없나?
문득 깨달음 하나가 뇌리를 파고들었다.
“테라피!”
“네?”
리젤로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는 계속해서 외쳤다.
“마탑에서 제공하는 서비스 중, 분명 테라피가 있죠? 그중 최면 테라피도 있을 텐데요!”
마탑은 돈만 주면 정말 무슨 서비스든 제공하는 곳.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심신 안정 테라피 서비스 역시 판매하고 있었다.
이쪽 세계의 최면 마법은 지구의 최면보다 훨씬 효능이 뛰어나고 즉각적이었다.
심지어 최면 마법 속에 들어 있을 때는 시간이 훨씬 느리게 흘러, 무의식에서 얼마를 보내든 현실 시각으로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들었다.
“아.”
리젤로가 멍한 눈을 했다.
“최면 마법을 이용한다면 기억에 배인 거부감도 완화해 볼 수 있겠군. 분명 가능하긴…… 합니다. 네. 가능해요.”
생각에 잠긴 듯 리젤로가 빠르게 중얼거렸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지…… 그런데, 타인의 기억에 들어가려면 그 사람과 심리적으로 가까운 상태여야만 합니다. 무의식에 침투하는 걸 우선 허락받아야 하죠.”
“이안 님.”
그 말에 나는 다급히 이안을 돌아보았다.
“제가 당신의 기억 속에 들어가게 해 주세요.”
“기억 속에? ……이게 대체 갑자기 무슨.”
“앞뒤 따지실 때가 아니에요. 일단 여기선 제 말대로 해 주세요.”
이안은 꽤 기가 막혀 보이는 얼굴이었다.
진심이냐는 듯 그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내 머릿속에 들어와 보겠다고?”
“네. 허락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하.”
이안이 짧게 헛웃음을 뱉었다.
황당하겠지. 알고 있었다. 기억은 사람의 가장 내밀한 부분 중 하나. 그런 곳을 타인에게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도록 허락한다는 건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닐 거다.
역시 거절하려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좋습니다.”
“……!”
“마음대로 해 보십시오.”
“감사합니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사용할게요!”
“……남의 기억을 물건처럼 말하진 말고.”
“정말 소중히 다룰게요. 약속이에요! 그럼 탑주님, 부탁드려요.”
리젤로를 돌아보자 그는 어느새 최면 마법 준비에 돌입하고 있는 중이었다.
새로운 흥밋거리를 발견한 듯 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주문은 별거 아닙니다. 성마석이 있으니 필요한 마력도 전부 조달되어 있고요. 그럼 바로 시작해 볼까요?”
이렇게 빨리 준비가 된다고?
다소 미심쩍었으나, 상대는 마탑주였다. 자신이 있으니 저렇게 말하는 거겠지. 이건 리젤로가 아닌, 리젤로라는 캐릭터를 창조한 원작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럼 시작해 주세요. 전 준비됐어요.”
“부인께선 준비가 다 되셨다고 하는군요. 남편께서는?”
“……이쪽도.”
이안은 여전히 떨떠름해 보이는 상태이기는 했다.
하지만 곧 리젤로의 요구에 따라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나 역시 그를 따라 눈을 감았다. 암흑이 찾아왔다.
그리고, 시야가 한 바퀴 빙글 돌았다.
* * *
[이게 뭐야.]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너무 쉽군.]
살짝 장난기 어린, 오만한 소년의 목소리.
낯선 목소리였으나 나는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 것 같았다.
‘이안?’
이건 어린 이안의 목소리였다.
지금 내 몸은, 아니. 이안의 몸은 담벼락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고 있었다. 잘 훈련된 도둑이 따로 없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황궁을 터는 게 이렇게까지 쉽다니.]
또 한 번, 낯익으면서도 낯선 소년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이안의 속마음인 것이 분명했다.
[아바마마께 언질을 드려야겠군.]
무료한 듯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퍼졌다. 소년 시절의 이안은 계속해서 황실의 담벼락을 넘었다. 야밤을 틈탄 도둑고양이처럼.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수많은 경비원 중 누구도 그의 침투를 눈치챈 이는 없었다.
‘머, 멀미 나.’
이안의 몸에 강제 탑승한 나만이 계속되는 움직임에 심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이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