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그냥 일단 자리를 뜨는 걸로 하죠.”
하지만 셀리나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황후 폐하.”
황후에게 그렇게 말한 셀리나가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따라갔다.
테라스로 나서자, 차디찬 빗방울이 그녀를 적시기 시작했다.
셀리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무지개를 띄울 때의 감각을 기억하려는 듯, 두 주먹을 꼭 쥐고서.
그렇게 몇 초가 지났다.
“…….”
그리고 또, 몇 초가 더 지났다.
빗줄기는 변함없었다.
쏴아아, 무심히 내리는 빗방울이 셀리나의 몸을 적셨다.
“아무래도.”
저 뒤에서 황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능력이 많이 모자라기는 한 모양이로군. 그러다 감기에 걸리겠소. 이만 들어오시는 게 어떻겠소, 두 성녀 다.”
“푸흡…….”
“훗.”
아덴과 그의 무리가 대놓고 웃음을 참는 것이 보였다.
속에서 확, 열이 올라왔다.
‘다 큰 어른들이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비웃을 게 없어서 감히 우리 애를 비웃어?
애초에 어제 성녀로 발현한 애를 갑자기 비로 내몬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었다.
텃세도 이 정도면 괴롭힘이다. 마음 같아선 저 재수 없는 놈들에게 모두 따끔히 일침을 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나는 이마를 짚고 가볍게 휘청거렸다.
“읏…….”
“아이린 님?!”
셀리나가 화들짝 놀라 나를 부축했다.
“아, 죄송해요, 갑자기 머리가…… 으읏.”
나는 내게 다가와 준 셀리나에게 아예 기대 버렸다. 가엾은 셀리나가 허둥지둥거렸다.
“가, 갑자기 왜 이러시지. 괜찮으세요? 어서 치유사를 불러요. 제가 다녀올게요!”
“잠시만요…… 뭔가가.”
나는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 짓도 세 번째이니 조금은 요령이 생긴 것도 같았다.
“뭔가가…… 보이고 있어요.”
“네?!”
내가 예지하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는 셀리나가 기겁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서서히 뭔가를 깨닫곤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예지다.”
“아이린 님이 예지를 시작하셨다!”
모두, 심지어 황후까지도 숨죽인 채 나만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심혈을 기울여 비틀거렸다. 마치 뭔가 거대한 빛에 가로막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하아…… 하아.”
시달리듯 끙끙대던 내가, 마침내 해방된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마침내 해방된 것처럼’이 포인트였다. 이때의 표정을 위해 거울 앞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연습했던지.
긴장한 덕분인지 이마에 식은땀까지 송글송글 맺혔다. 그런 내게 수많은 시선이 쏠렸다.
“대체 뭘 보신 걸까요……!”
“또 엘룬 신께서 무언가를 보여 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쉿, 쉬잇! 성녀님께서 말씀하시려 하세요.”
모두 내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며 속닥거렸다.
기묘한 침묵이 장내에 내려앉았다. 나는 살짝 더 숨을 헐떡거리고는 입술을 열었다.
“……오늘.”
사람들이 약속한 듯 숨을 집어삼키고는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그들을 천천히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달이 지평선 너머로 저물기 전까지.”
최대한 추상적인 어휘들을 골라 가며.
어렸을 때 봤던 신화 만화책의 기억을 떠올리면, 다들 이런 식으로 예언하더라고.
하지만 중요한 대목에서는 노골적인 문장을 골랐다.
“누구도, 황궁을 나서선 안 됩니다.”
내 간단한 단언에 모두 놀란 눈치였다.
“황궁을……?”
“어째서일까요?”
“기묘한 예언이군요……!”
“성녀 아이린.”
황후가 굳은 얼굴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황궁에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이지?”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뒤이은 내 목소리에 모두 다시 한번 숨죽여 귀를 기울였다.
“오늘 밤, 가려져 있던 달이 마침내 구름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리라는 겁니다.”
비유로 가득한 내 말에 사람들이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황후만이 딱딱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모종의 찝찝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비유가 좀 노골적이었나?’
“성녀 아이린. 방금 그 말이 무슨 뜻-”
쾅!
그때, 거대한 폭파음이 궁을 울렸다.
“꺄아아악!”
“으아악!”
사색이 된 귀족들이 필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이게 무슨 소리죠!”
“죄송합니다.”
차가운 목소리가 혼란스러운 장내를 갈랐다.
모두 약속한 듯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다.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것을 느꼈다.
“저분은!”
“성기사단장님이잖아?”
이안을 알아본 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회장을 둘러본 이안이 말했다.
“마물이 나타나 진압 중입니다. 부디 대피해 주시죠.”
“마, 마물요?!”
“황궁에요?”
“꺄아아악!”
이안의 등장과 함께 아까보다도 더한 소란이 장내를 뒤덮었다.
이안의 푸른 눈동자가 인파 속에서 나를 찾아내어 직시했다.
그 눈빛이 뜻하는 바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슬쩍 시계를 돌아보았다.
‘약속 시간보다…….’
여덟 시 정각보다 오 분이 빠른 시각이었다.
‘조금 이르네.’
역시 지각은 못 하는 성격다웠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황후가 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무슨 일이긴 무슨 일이야. 나는 당황한 척하면서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은 몰랐을 것이다. 심지어는 오늘 행사를 주최한 황후까지도 몰랐겠지. 사실 진짜 무도회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는 걸.
“폐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신가!”
“황후 폐하, 어서 이리로 오십시오.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황후가 근위 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서둘러 대피했다.
다른 귀족들 역시 허둥거리며 달아나기 바빴다.
“어서 달아나요! 우리 마차는 어디 있죠!”
“잠깐, 잠깐. 그런데 아이린 님께서 황궁을 떠나지 말라고 예지하지 않으셨소?!”
“마, 맞아요. 그렇게 말씀하셨죠!”
“황궁을 떠나면 더 큰 재앙에 휘말릴 거라는 예지 아니었을까요!”
“맙소사, 지금 그나마 황궁이 안전한 건가!”
“대체 황궁 밖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착하게도 귀족들은 내가 방금 늘어놓았던 예지를 기억해 내었다.
그간의 전적 덕에 내 예지는 사람들에게 강한 신뢰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순식간에 귀족들은, 황궁 바깥은 더한 아비규환일 것이며 그나마 안전한 황궁 안에 숨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혀 틀린 추리지만, 일단은 모두 말을 들어 줘서 고맙네.’
일이 끝나기 전, 여기 자리한 귀족들은 황궁 안에 머물러 줘야 했다.
‘구름에 가려진 달’, 즉. 묵혀져 있던 진실을 모두 목도하기 전까지는.
“셀리나 양.”
대혼란 속에서 나는 셀리나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몸을 피해야겠어요.”
“아, 아이린 님. 이안 님 말씀이 사실일까요? 황궁에 마물에 나타났다니……!”
“이안 님이 허튼소릴 하지 않는다는 건 셀리나 양도 알잖아요.”
너무 놀라 휘청거리면서도, 그 말에 셀리나가 내가 내민 손을 붙들었다.
“아이린 님. 이쪽입니다.”
어디선가 나타난 루시안이 나를 안내했다.
나는 빠르게 어둠을 틈타 황궁 복도로 나섰다.
“셀리나 양을 잘 부탁해요.”
루시안이 데려온 또 다른 성기사에게 부탁하자, 기사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린 님! 어딜 가시려고요?”
“셀리나 양, 내 말 잘 들어요. 저 기사님만 따라 대피해 있어야 해요. 알겠죠?”
“아, 아이린 님은요. 같이 가시는 게 아닌가요?”
나는 대답 대신 기사를 돌아보았다. 기사가 정중한 태도로 셀리나를 안내했다.
“아이린 님!”
셀리나의 다급한 외침을 뒤로하고 나는 루시안을 돌아보았다.
현재 귀족들이 아우성을 치며 도망친 덕에, 이쪽 복도에는 우리밖엔 남아 있지 않았다.
“움직일까요?”
“네.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탑주님께서도 와 계시고요.”
“좋아요.”
우당탕, 쾅!
짧게 대화하는 와중에도 굉음이 계속해서 울렸다.
마물이 나타났다는 이안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마 이 굉음의 정체는 그 마물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소리겠지.
‘이안, 조안 경…… 괜찮겠지.’
괜찮을 거다.
이안이 감당하지도 못할 마물을 끌고 왔을 리가 없으니까.
저 밖에서 사람들을 아비규환으로 몰아넣은 마물은, 다름 아닌 이안 본인이 데려온 놈이었다.
‘성기사단장이 할 만한 짓은 아니긴 한데.’
마물을 데려오자는 파격적인 아이디어는 내가 제안한 것이었다.
확실하게 사람들의 이목을 앗아갈 만한 게 마물밖엔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마침 대성당 지하에는 성기사들이 마물에 대처하기 위해 포획해 둔 녀석들이 몇 마리 있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성기사들이 우왕좌왕하는 귀족들을 인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평범하게 예복을 입고 무도회에 참석하고 있던 성기사들이 순식간에 완연한 무인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물론 그중엔 조안 경 같은, 이안에게 미리 귀족들을 유인할 방향을 지시받은 이들도 함께 있었다.
“아이린 님, 저흰 이제 이동하죠.”
루시안이 시계를 쳐다보곤 나를 안내했다.
황궁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살짝 긴장한 채 루시안의 뒤를 따라갔다.
구중궁궐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만큼 황궁은 거대하고 복잡했다.
아름다운 정원과 궁전들을 헤치며, 십 분 정도 움직였을까.
살짝 벅차오는 숨을 고르며 내가 물었다.
“얼마나 더 남았죠?”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목적지는, 황궁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이곳입니다! 아이린 님.”
나는 도착한 장소를 멍하니 둘러보았다.
정원으로 둘러싸인 작은 궁전은, 잘 가꿔져 있었다면 굉장히 정갈하고 사랑스러웠을 것 같은 공간이었다.
이곳저곳 타다 만 잔해들이 보였다.
불에 반쯤 연소된 아기용 그네라거나, 작은 놀이터라거나.
그런 흔적들이 이 장소를 더 스산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여기가, 폐궁.’
선대 황제가 한가로운 여가 시간을 주로 보낸 곳임과 동시에, 이안이 유년 시절을 보낸 궁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