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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54/161)

54화

“이, 이안 님. 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요.”

나는 일단 이안을 진정시키기로 했으나, 그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이안이 엘리엇을 위아래로 훑었다. 백화점 카탈로그라도 구경하듯 품평하는 눈빛이었다.

그러고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이 꼬마도 전 애인과 닮은 겁니까?”

“꼬마가 아닙니다만.”

그의 말에 나보다 먼저 엘리엇이 발끈해선 미간을 좁혔다.

이안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몇 살이지?”

“……올해로 열여덟입니다.”

“꼬마네.”

이안이 비스듬히 웃었다.

눈 씻고 봐도 그 모습에서는 신의 신실한 사도, 성기사단장의 면모가 보이진 않았다.

불량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엘리엇은 한순간 기가 꺾인 것 같았다.

그러나 제가 괜히 주인공 해 먹은 게 아님을 증명하듯 소년은 굴하지 않았다.

“법적으로 성년입니다. 저와 별로 나이 차이도 안 나 보이는 나리께 꼬마라고 불릴 나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내 나이 반도 안 먹은 녀석이 입은 살았군.”

반은 무슨.

나는 이안이 뻔뻔히 제 나이를 뻥튀기하는 것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는 중요한 부분을 정정하기 위해 오른손을 들었다.

“저, 이안 님. 심각한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정정해도 될까요?”

“뭡니까.”

“저분한테 저, 그런 의미로 관심 있는 거 아니에요. 제 사심 없는 눈빛 어딜 보고 그런 얼토당토않은 오핼 하신 거예요!”

그냥 오래 책 속에서만 지켜보던 동생 같은 녀석을 실제로 본 기분에 좀 뭉클해졌을 뿐인데, 더듬다니.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그럼 왜 외간 남자 몸매 칭찬을 입이 닳도록 한 겁니까.”

“닳도록 안 했거든요!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한 것뿐이죠. 그러지 말고 이안 님도 한번 보세요. 정말 뼈대가 완성되어 있으시다니까요?”

“완성?”

이안이 비뚤어진 헛웃음을 지었다.

“손가락만 대도 부러질 것 같은 저 나뭇가지 몸이 말입니까?”

“마, 말이 심하시잖아요!”

대놓고 사람을 품평하는 말투에 나는 화들짝 놀라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엘리엇이 빨갛게 불타는 눈으로 이안을 노려보았다.

“저 강합니다.”

“그래? 뒷골목 꼬마들을 전부 제패한 꼬마들의 왕인가 보군.”

“겨뤄 보시겠습니까?”

“상대를 가늠할 줄 모른다는 것부터가 애송이란 증거야.”

왜…….

나는 망연히 둘을 바라보았다.

왜 둘이 싸우고 있는 거지?

내 계획대로라면, 둘은 스승과 제자가 되어야 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인 엘리엇을 끌어 주는 게 이안이어야 했다.

이렇게 반항기 소년들처럼 싸우는 게 아니라!

‘엘리엇은 그렇다 쳐. 왜 당신까지 똑같은 수준으로 싸우고 있는 건데?’

나는 여전히 포도주 냄새를 풍기고 있는 이안을 기막히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설마, 취해 있는 건가?

‘이안을 어떻게 설득하지?’

나는 골똘히 고민에 잠겼다.

예지 카드를 또 꺼내 봐?

위험 부담은 있지만, 엘리엇을 수도로 데려가려면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 같긴 했다.

대거리하는 둘을 배경 처리한 채 몇 분 정도 고민에 빠져 있었을까.

“흐압!”

엘리엇의 기합 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눈앞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엘리엇이 이안 쪽을 향해 목도를 내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저 검은 대체 어디서 난 거야?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안 돼!”

하극상은 안 돼!

황급히 끼어들려던 나는 곧 멍하니 넋을 놓았다.

엘리엇이 내려친 건 이안이 아닌 허공이었다.

“어떻습니까?”

“평가할 가치도 없이 엉망인데.”

느슨하게 팔짱 낀 이안이 혹평했다.

엘리엇이 발끈해선 물었다.

“괜히 트집 잡으시는 거 아닙니까?”

“멍청하긴. 햇병아리는 발 각도만 봐도 티가 나지. 열 살짜리 말단 단원도 네가 애송이란 건 알아볼 거다.”

발 각도 같은 거 몰라도 시비 걸어오는 놈들 발로 차 주는 데엔 문제없었다며 엘리엇이 투덜거렸다.

이안이 코웃음을 흘렸다.

“그 건방진 기세는 좀 쓸 만하군.”

뭐야, 이건?

칭찬…… 인가? 나는 아리송한 기분에 멍하니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엘리엇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내게 이따위 검술을 보여 준다면 그땐 각오해라.”

응? 다음?

나는 얼른 이안에게 바싹 달라붙어 속닥거렸다.

“이안 님. 다음이라면 혹시…….”

“왜 기대하는 눈으로 봅니까.”

이안이 탐탁잖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 건가 싶어서요.”

“성당기사단 견습생으로 발탁해 보기로 했습니다.”

이안이 턱짓으로 엘리엇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인가요?”

내가 잠깐 넋 놓고 있는 사이 언제 대화가 그렇게까지 진전된 거야!

‘역시. 잘될 줄 알았어.’

엘리엇은 원작 주인공답게 재능 충만한 소년이었고, 이안 정도 되는 인물이 그걸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역시 이안 님께선 안목이 탁월하세요.”

“굉장히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요? 아뇨. 제가 기쁠 일이 뭐가 있나요. 그냥 저분께 기회가 생긴 게 보기 좋아서 그렇죠.”

“흐음.”

이안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날 쳐다봤지만, 나는 모른 척 해사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엘리엇에게 내일 아침 이 여관으로 찾아오라는 말을 남긴 이안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 단, 이 시간부로 성녀님께는 접근 금지다.”

이건 또 무슨 소리. 나는 황당한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엘리엇 역시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이안만이 뻔뻔히 엘리엇의 위치를 지적하며 말했다.

“반경 이 미터 안으론 금지야. 지금도 선을 넘었군.”

“……죄송합니다.”

똥 씹은 얼굴로 엘리엇이 내게서 몇 걸음 물러났다.

대체 이 인간이 오늘따라 왜 이러지.

왠지 남편의 괴팍한 성격에 내가 대신 사과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 * *

말똥말똥.

나는 어두운 천장을 고요히 노려보았다.

현재 나는 트란셀 최고의 숙박업소, 그중에서도 최고의 방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당연히 엄청나게 편안했다.

대성당의 내 방 침대만큼은 아니지만, 이서연의 자취방에 비하자면 시몬스고 에이스였다.

그런데도 잠이 안 왔다.

‘……나 혹시 숨소리가 너무 큰가?’

옆자리에 누워 있는 인간의 존재 때문에.

‘근데 이안은 왜 숨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지. ……살아 있는 거 맞지?’

한 침대에 남자와 누워 있다는 것이, 그것도 그 상대가 이안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몹시 심장 건강에 안 좋았다.

생각해 보면, 맨정신으로 이안과 한 침대에서 잠드는 건 처음이었다.

‘첫날밤은 너무 피곤해서 기절하듯 잠들었었고.’

그 뒤 곧바로 리칼리온으로 떠나는 바람에 이안과 한 침대를 쓸 일이 없었다.

그때 옆에서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불편합니까?”

나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굳혔다.

“아, 아뇨. 전혀요. 막 잠에 들려던 참이었는데 이안 님이 깨우셨어요.”

“역시 전 바닥에서 자겠습니다.”

“싫어요!”

이안이 몸을 일으키기에 나 역시 덩달아 반쯤 몸을 일으켰다.

“같이 자는 것에 익숙해지셔야죠. 대성당으로 돌아가면 계속 내내 한 침대 써야 한다는 거 이안 님도 아시잖아요?”

“글쎄. 그러다간 그대가 호흡 곤란으로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금 들어서.”

“……제 호흡이 어때서요? 전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괜한 말씀 마시고 다시 누워 주세요. 이안 님이 어색하신 걸 제게 덮어씌우시는 건 아닌가요?”

어둠 속에서도 이안이 내게 황당한 눈길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하긴, 이안 님은 여성과 함께 누워 있어 본 적이 없으시겠죠. 신경 쓰이시는 것도 이해해요.”

“전혀. 극한의 전장에선 남녀 상관없이 한 구역에서 잠들기도 합니다.”

시답잖은 소릴 들었다는 듯 이안이 말했다.

“그러니까 즉 전시 상황이 아닐 땐 경험이 전혀 없으시단 거잖아요?”

“…….”

이안이 말없이 천장만을 노려보았다.

그럼 그렇지.

나는 도도히 어깨를 으쓱였다.

“알겠어요, 배려해 드릴게요. 제가 좀 더 구석에서 자죠, 뭐. 그러니까 바닥에서 자겠단 소린 하지 마세요.”

이불을 끌고 꾸물대며 침대 가장자리로 이동하려던 때였다.

덥석, 커다란 손이 내 팔을 쥐었다.

“또 굴러떨어지겠습니다.”

“…….”

순간 심장이 뚝 멎었다.

팔에 닿은 이안의 체온이 너무 뜨거워서, 온몸으로 잔열이 퍼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냥 그것뿐인데, 고작 팔이 닿은 것뿐인데.

이렇게 놀라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다. 알고 있는데도 이미 굳은 몸이 돌아오진 않았다.

이안이 이런 내 반응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순간 우리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아.”

이안의 손가락이 굳은 것이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난 그저, 그대가 지난밤에 세 번이나 떨어졌던 게 기억나서.”

“아니에요. 제가 죄송해요.”

“뭐가 말입니까?”

“그, 그냥. 죄송해요.”

다급히 사과가 오간 뒤, 방은 또다시 정적에 잠겼다.

각자 침대 끄트머리에 누운 채 우리는 그 정적을 공유했다.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이유는 단지 이안의 존재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펜던트.’

오늘은 이안과의 두 번째 밤.

동시에, 나인의 명령을 따를 두 번째 기회였다.

‘펜던트를 꺼내 놓으면, 자연스레 세상은 원작의 흐름대로 흘러가겠지.’

이안은 사술에 물들 것이고, 최종 보스가 된 그를 처치한 주인공 커플은 세계에 평화를 돌려놓을 터였다.

나는 원작의 마지막 문구를 기억했다.

그래. 세계는 행복한 엔딩을 맞을 터였다. 이안의 비극만 제외하면.

‘하지만…….’

나는 한숨과 함께 인정했다.

이안의 비극 위에 세워지는 해피 엔딩은 보고 싶지 않다.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망할 놈의 K-정.’

고작 두 달도 안 되는 시간인데, 그새 나는 이안에게 꽤나 정이 들어버리고 만 걸까.

나는 천장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들렸다.

나인의 명령을 무시한다면, 그들은 아마 날 죽이려 들 거다.

쓸모없어진 장난감을 폐기하듯이.

나는 아직 나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내 한 몸의 안전만 생각한다면, 나는 지금 펜던트를 꺼내야 했다.

여러모로 그게 맞았다. 이 세계의 이물질이나 마찬가지인 나란 존재가 흐름을 어지럽히는 건 월권이었다.

‘그런데도, 왜.’

고작 펜던트를 꺼내 놓기만 하면 되는, 그 쉬운 일이 이렇게나 망설여지는 건지.

그때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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