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린?”
“성녀님?”
“아이고, 저희가 가져오겠습니다. 뭐가 필요하신지 말씀만 하세요.”
이안과 기사들이 나를 불렀으나 내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홀린 듯 주인장이 나간 주방의 쪽문을 향해 걸었다.
“망할 새끼. 잘 걸렸다. 저번에 리키 형님 코를 개박살 냈었지?”
“형님 코가 완전 비뚤어졌다고. 알아? 건방진 새끼, 네놈 반반한 코도 이번 기회에 아주 작살을 내주마.”
열린 문 너머로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이 쓰러진 누군가를 걷어차고 있는 게 보였다.
“아이고, 이놈들아. 이놈들아! 이 못된 놈들! 썩 꺼지지 못해!”
“할아범은 빠져!”
주인장이 용감하게 달려들었으나, 한 녀석의 발차기에 배를 맞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으억!”
“아, 씨…… 여긴 안 되겠다. 야, 얘 끌고 와. 덜 시끄러운 데서 버릇을 고쳐 놔야겠어.”
“어이, 쥐새끼. 이 팔찌인지 걸레 조각인지 갖고 싶으면 따라와!”
나는 남자들 사이에서 구타당하고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발자국과 먼지로 엉망인데도, 소년의 형형한 눈빛만은 선명했다.
『성녀님은 사랑을 몰라』의 남자주인공, 엘리엇의 외양 묘사와 똑같았다.
누군가 팔찌를 흔들며 소년을 도발하자, 소년의 눈에 새빨간 분노가 타올랐다.
‘저런 쓰레기 같은 놈들.’
드디어 원작 남주를 만났다는 희열도 잠시.
나는 주방 화로에서 달궈지고 있던 부지깽이를 잡아채 쪽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무슨 짓들이야, 쓰레기들아!”
저 팔찌는 엘리엇이 유일하게 간직한 어머니와의 추억이었다.
작중 엘리엇이 저 팔찌를 들여다보며 얼마나 많은 위로를 얻었는지 알기에 더 참을 수 없었다.
‘아이고, 기구한 내 엘리엇. 활자로만 보다가 직접 두 눈으로 보니까 더 가엾잖아.’
“이, 이 여잔 뭐야?”
“미…… 미친 여자다.”
살벌하게 부지깽이를 휘두르며 달려들자 불량배들도 순간 멈칫했다.
“너희들이야말로 미쳤지. 얼마나 약하고 초라한 놈들이면 한 명 상대로 여럿이 덤벼? 아니, 이게 다 몇 명이야. 하나, 둘, 셋, 넷…….”
나는 손가락까지 짚어 가며 불량배들의 머릿수를 하나하나 세 주었다.
그때마다 불량배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여섯, 일곱. 세상에. 고작 한 명 상대를 못 해서 일곱 명이 뭉쳐? 진짜 어지간히도 별 볼 일 없구나, 너희들.”
“누가 별 볼 일 없다는 거야?”
“이 여자가 진짜 미쳤나!”
불량배들이 울컥하며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중 한 놈은 쓰러진 엘리엇의 뒷덜미를 질질 끌었다.
“젠장! 오늘따라 왜 이렇게 방해꾼이 많아. 넌 이리 와, 쥐새끼. 오늘 아주 끝장을 보자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도록 해 주지.”
성한 곳 하나 없는 엘리엇이 질질 끌려가는 모습에 확 분노가 치밀었다.
“야! 거기 더벅머리! 그 애 내려놔. 안 놔? 너야말로 멀쩡한 뼈 하나 없이 다 또각또각 부러져 봐야―”
거기까지 말한 순간이었다.
기묘한 위화감이 성대를 감쌌다.
뭐지. 인큐버스 왕을 상대했을 때도 이 비슷한 느낌이 들었던 듯한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동시에, 뒤에서 불쑥 커다란 손이 나타나 내 입을 가로막았다.
“읍. 으읍?”
“아이린.”
등 뒤에서 한숨 같은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누군가를 저주하고 싶으면 차라리 날 부르십시오. 갑자기 뛰쳐나가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으으읍?”
“어떤 자가 당신의 성질을 건드렸습니까.”
“으읍. 읍읍!”
입을 떼 줘야 말을 하지!
나는 항의하는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안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건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지만, 갑자기 그로 인해 발언의 자유를 가로막히니 몹시 황당하고 억울했다.
이안은 내 눈빛을 읽었을 텐데도, 모른 척 손을 떼지 않은 채 불량배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 부인이 뼈를 부러뜨리고 싶어 한 놈이 누구냐.”
“다, 다…… 당신은 또 뭐야.”
“끼, 끼, 끼어들지 말라고!”
불량배들이 외쳤지만, 이미 목소리들은 염소처럼 떨리고 있었다.
저 살벌한 눈빛을 보고서도 두 다리로 서 있는 담력만큼은 칭찬해 주고 싶었다.
이안이 픽 웃음을 흘렸다.
“지금 나오면 팔 한쪽으로 넘어가 주지.”
“으으읍.”
“아, 모자랍니까? 그럼 다리 한쪽까지 더.”
이안이 읍읍 대는 날 내려다보더니 이상한 타협을 했다.
절대 농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나는 좀 질린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성기사단장 맞아?
“성녀님! 단장님!”
“무슨 일입니까!”
성기사들까지 뒤따라 달려 나왔다.
순식간에 비좁은 뒷골목이 꽉 찼다.
“싸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성녀님께 무례한 소리를 한 놈들이 이놈들입니까?”
“정의의 이름으로 너희를 용서치 않겠다!”
상황을 어떻게 이해한 건지, 성기사들이 분기탱천하여 외쳤다.
내버려 두면 검도 뽑아 들 기세였다.
나는 이안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이제 그만 놔 달라는 뜻이었다. 다행히 이안은 순순히 손을 뗐다.
드디어 입이 풀려난 나는 이안을 슬그머니 노려보았다.
“진짜 뭐예요. 다짜고짜 사람 입을 막질 않나.”
“성녀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자들이 성녀님께 무례를 저질렀습니까?”
술에 취한 성기사들이 평소보다 더 격앙된 어투로 외쳤다.
불량배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서, 성녀? 성녀라고 한 거 맞지?”
“그게 무슨 소리야? 성녀가 여길 왜 와?”
“잠깐만. 더 갑옷들…… 성기사단 갑옷 아냐?”
“서, 설마.”
드디어 상황 파악이 된 걸까.
불량배들의 눈에 두려움이 서리기 시작했다.
개중 몇몇은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며 도망을 시도했다.
어딜.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저는 오늘 가슴 아픈 광경을 목격했어요.”
성기사들과 불량배들의 시선이 몽땅 내게로 쏠렸다.
“장성한 사나이들이 한 소년을 둘러싸 집단 폭력을 행사하는 광경을요.”
“그게 정말입니까?”
“이런 썩을 놈들!”
성기사들의 눈이 홱 불량배들에게로 돌아갔다.
나는 정말 가슴이 아프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다 큰 이들이 단체로 약자를 폭행하는 모습이라니. 엘룬 신께서 설파하신 선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요. 읏, 충격받았더니 머리가…….”
“성녀님!”
“극악무도한 짓으로 성녀님의 마음을 어지럽히다니, 천벌을 받아라!”
박력은 물론 머릿수에서마저 밀리자, 그제야 불량배들이 꼬리를 말기 시작했다.
“아, 아닙니다. 무슨 말씀들이신지. 저분이 오해하신 겁니다, 예.”
“저희는 그냥 놀고 있는 거였다고요. 그렇지?”
엘리엇을 끌고 가던 놈이 엘리엇의 발을 꾹 밟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손님분들! 저놈들이 저 아일 때리고 협박했습니다요. 제가 다 봤습니다!”
나동그라져 있던 주인장이 간신히 몸을 추스르며 고했다.
추가 증인까지 가세하자 성기사들이 씨근덕거리며 날 돌아보았다.
“성녀님, 체포할까요?”
“이런 놈들한테는 본때를 보여 줘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불량배들을 가리켰다.
“정의가 뭔지 보여 줘요!”
“예!”
“한 놈도 튈 생각하지 마라, 이놈들!”
성기사들과 불량배들의 피 튀기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불량배들이 기를 쓰고 도망쳤지만,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 몽땅 손이 묶인 채 내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흑, 흑……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쇼. 저희가 실수했습니다.”
“실수?”
나는 지그시 불량배들을 노려보았다.
“애 하나를 단체로 끌고 가며 구타하고 협박한 건 실수가 아니야. 고의고, 범죄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성녀님.”
“게다가 감히 성녀님을 능멸하기까지 하다니, 이놈들. 성녀님, 교단 재판에 이놈들을 회부할까요?”
교단 재판이란 말에 불량배들이 파르르 떨더니 납작 엎드렸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나으리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내놔.”
나는 그들의 사과는 거들떠보지 않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불량배들이 멍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 애한테서 뺏은 팔찌, 내놓으라고.”
“아, 여, 여기 있습니다.”
한 놈이 허겁지겁 주머니에서 팔찌를 꺼냈다.
얼마나 굴린 건지 더러워지고, 지저분해진 팔찌를.
나는 한숨을 내쉬며 팔찌를 받아, 내내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지켜보던 엘리엇에게 건넸다.
“자. 받아요.”
“…….”
엘리엇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잔뜩 상처 입은 야생 동물 같은 눈빛.
이 아이가 여태 얼마나 갖은 고생 속에서 자라났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눈빛이었다.
“……감사합니다.”
끝이 갈라진 목소리로 엘리엇이 감사 인사를 했다.
“그 녀석들은 치안대에 보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성녀님!”
“절대 봐주지 말고 반드시 죗값만큼 치르게 해 달라 당부도 잊지 말아 주시고요.”
“명심하겠습니다!”
내게 경례한 성기사들이 불량배들을 질질 끌고 갔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성녀님! 한 번만!”
멀어지는 불량배들의 외침이 뒷골목 속으로 흐려져 갔다.
이제 남은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나는 살그머니 헛기침하곤 작업을 시작했다.
“흐흠, 그나저나.”
내 말에 엘리엇이 의문이 담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살벌했던 적안에 독기가 빠지니 꽤 무구해 보였다.
아, 귀엽기도 하지.
“아까 보니까, 흠. 골격이 남다른 것 같던데.”
“……네?”
“아니, 일곱 명이나 되는 남자들 상대로 한참을 버텼잖아요. 진짜 대단한 거 아닌가요? 그거.”
“그냥 깡으로…… 버텼습니다만.”
“와. 깡이 그 정도라니. 정말 대단해요. 그렇지 않나요?”
나는 당황한 엘리엇을 뒤로한 채 반짝반짝, 기대하는 눈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작중에서 엘리엇은 지나가던 성기사가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소드 마스터인 이안이라면 더더욱 그 기질을 쉽게 알아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 엘리엇을 키워 줬어야 할 성기사가 사망했으니, 이안에게 그 역할을 떠넘기는 게 내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안은 한쪽 눈썹만 들어 올릴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바심이 난 나는 더 과장해서 감탄하기 시작했다.
“이 팔뚝 좀 봐. 혹시 운동하세요?”
“네? 아뇨, 딱히…….”
“어머. 그런데 이 몸매라고요? 타고났다. 타고났어. 와, 허리선은 또 어떻고요. 운동이라곤 전혀 모르는 제가 봐도―”
“부인.”
응?
어쩐지 심상치 않은 이안의 목소리에 나는 멍하니 그를 돌아보았다.
이안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내 앞에서 외간 남자를 더듬고 있는 겁니까?”
“네? 제가 언제 더듬었…….”
지그시 나를 노려보는 눈빛에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안은 진심으로 불쾌해하는 기색을 온몸으로 내뿜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열 받은 모습에, 나는 새삼스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안이 그동안 나를 많이 봐주고 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