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전주곡 Prelude
잠들어 있을 때는 천사가 따로 없다.
사헌은 기절하듯 잠든 유성의 이불을 고쳐 덮어 주었다. 눈 감고 있으니 그저 순해 보이기만 했다.
섹스가 끝나고 뒷정리 후에 지쳐 잠든 유성의 얼굴을 보는 일이 슬슬 익숙해져 간다.
이게 일상이 될 수도 있을까.
백유성과의 결혼. 스스로 내린 결정을 곱씹으며 사헌이 침대 밖으로 빠져나갔다.
냉장고 옆에는 조그만 정수기가 놓여 있다. 길쭉한 유리잔에 물이 차올랐다.
잔을 비우는데, 식탁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휴대폰이 사헌의 시선을 끌었다.
저러다 떨어지겠다. 사헌이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유성의 것인 듯했다.
전원 버튼을 눌러도 켜지지 않는 걸 보니 고장 났거나, 배터리가 나간 모양이다.
‘배터리가 다 나가서…….’
비가 쏟아지는 아파트 단지를 그를 찾아 미치도록 돌았던 기억이 어른거렸다.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안내음으로만 이어지는 시간이 생지옥이었다.
사헌이 콘센트에 꽂힌 케이블에 휴대폰을 연결했다.
몇 초 안 되어 휴대폰에 불이 들어왔다.
액정 한 귀퉁이에 진 얼룩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무슨 이런 휴대폰을 들고 다니지. 사헌이 휴대폰을 들어 올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끊겼던 진동은 사헌이 휴대폰을 잡자마자 다시 시작됐다.
켠 지 얼마나 됐다고. 사헌은 질린 얼굴로 액정에 뜬 최의현의 이름을 읽었다.
“여보세요.”
유성이 아닌 사헌이 전화를 받자 놀랐는지 수화기 너머에서 침묵이 흘렀다.
“이 시간에 무슨 볼일이야.”
― 백유성 바꿔.
이내 적의를 담은 말이 튀어나왔다. 너랑 백유성이 같이 있어? 의현의 경악이 한 음절마다 박혀 있었다.
“그 사람 지금 자.”
결혼할 사람끼리 같이 있는 게 뭐 놀랄 일이라고. 사헌이 헛웃음을 머금었다.
의현에게 아직도 유성은 자기 사람인 모양이다. 왜인지는 이해 못 하겠지만.
― 내가 바꾸라면 바꿔.
명령이 아주 익숙하다. 누가 누구한테. 사헌이 어둠 속에서 몸을 곧게 폈다. 눈에 띄는 장신은 혼자 거실에 멈춰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이 컸다.
“취했다, 너. 끊을게.”
― 최사헌, 돌았냐? 대체 백유성한테 왜 그러는 건데?
혹시 끊을세라 의현이 빠르게 쏘아붙였다.
― 좋아하기라도 해? 너 그런 인간 아니잖아.
좋아하냐고? 사헌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거실의 어둠을 주시하다 보면 가구들이 형체를 드러낸다.
그랜드피아노를 따라 달빛이 흘렀다.
우연조는 기분이 좋으면 피아노를 쳤다.
그래서, 사헌은 지금껏 피아노를 좋아해 본 적이 없다.
10초 만에 빠지는 사랑이라니. 지어낸 전설 같다.
“……해신 그룹 백 대표 아들이면 나쁜 조건은 아니지. 오메가기도 하고.”
느리게 이야기하면서도 사헌은 머릿속으로 자신의 말을 반박했다.
사생아라는 점까지 치면 그만한 조건은 널렸다. 오메가라는 점을 포함해도.
“백유성이 제시한 조건이 계산에 맞았어. 설명이 더 필요해?”
사실 백유성이 다른 이들보다 낫다고 할 만한 건 유통기한이 있다는 사실 정도였다.
뭐든 달라는 대로 주고 거래가 끝나면 사라져 주겠다. 유성의 조건을 되새기던 사헌이 묘한 위화감에 눈썹을 찡그렸다.
― 유성이는 너한테 뭐라고 하는데. 왜 너한테 간 건데? 너보다 내가 훨씬 낫잖아.
의현은 사헌이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본인이 더 낫다는 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 사헌이 웃음을 삼켰다.
저 끝도 없는 자만이란. 최의현이나, 고모나. 회장님이나.
“백유성이 나를 좋아하든 말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네가 상관할 바도 아니야.”
유성의 마음이라면 잘 알고 있다.
백유성은 최사헌과 거래하고 싶어 한다.
최의현 때문에.
증오는 강한 감정이다. 지금 유성의 마음이 어디로 더 쏠려 있는지 무게를 달아 보면, 확연히 의현을 가리킬 거다.
“언제까지 사춘기 애새끼처럼 굴래? 회장님이 승인하신 일이야. 징징댈 거면 그쪽에 해.”
전화를 끊으며 사헌은 가시지 않는 짜증을 느꼈다.
질투였다.
* * *
“나쁜 조건은 아니지. 오메가기도 하고. 백유성이 제시한 조건이 계산에 맞았어.”
졸음이 덜 가셔 흐리멍덩하던 정신이 억지로 깨끗해진다.
나는 벽에 가만히 기대어 최사헌의 말을 들었다.
일어나 보니 침대에는 나뿐이었다.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를 따라 침실을 나오자 최사헌이 내 이름을 읊었다. 통화 중인 듯했다.
“백유성이 나를 좋아하든 말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바랐던 대로였다.
최사헌이 나를 실컷 이용하고 돌아설 인간이었으면, 하지 않았나.
누가 내장을 실로 꽁꽁 동여맨 것 같았다. 양 끝에서 실을 팽팽히 잡아당기며 오장을 옭아맨 듯 속이 답답했다.
올라오는 구역질을 삼키려 입을 힘껏 틀어막았다. 집 안의 어둠이 일렁이며 나를 손가락질했다.
수백 번 다짐하고도 이토록 약한 나를.
지금 느끼는 슬픔의 원인은 확실했다.
내가 천하의 머저리라서다.
발소리를 죽여 침실로 돌아갔다. 한 걸음마다 발바닥이 쑤셨다.
시트의 감촉이 껄끄러웠다.
침대로 돌아오는 최사헌의 기척을 느끼면서 나는 벽만 노려보았다. 혹시라도 깨어 있는 걸 들킬까 호흡마저 조심스러웠다.
심장이 소란해서 애써 눈을 감아도 잠은 쉽게 찾아올 것 같지 않았다.
“잘 자.”
쿵쿵대는 심장 박동을 뚫고 최사헌의 목소리가 조용히 스며들었다.
깬 걸 아나 싶었는데,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고 가는 손길이 느껴졌다.
혹시라도 자는 사람을 방해할까 봐 가만한 손길과 음량을 듣고 알았다. 깨어 있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면 왜.
왜, 라고 속으로 반복해 읊조렸다. 도대체 당신은 나한테 왜.
* * *
― 그날 하루는 일정 모두 비우라는 회장님 전언이십니다.
기계로 녹음한 안내음처럼 높낮이 없이 흘러나오는 얘기에 사헌이 관자뼈를 엄지로 지근지근 눌렀다.
알겠다고 끊긴 했으나 닥친 일을 생각하니 골치가 아팠다.
최종필 회장이 대리인을 통해 유선으로 전달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주말에 가평 별장의 장원에서 오랜만에 가족끼리 모이는 자리를 갖겠다.
참석 인원은 회장 내외, 아래 딸린 자식 둘 일가가 끝이었다.
물론 사헌과 유성 때문에 잡힌 모임이다.
말로는 가족끼리만 하는 결혼 발표의 장이었고, 어차피 예식에서 서로 봐야 하는 사이인데 그러기 전에 만나 미리 마음을 풀라는 뜻이다.
회장님다운 결정이다. 통보인 것부터 명령인 것까지.
“싫으면 안 가도 됩니다.”
그러나 사헌은 뒤늦게 일어나 식탁으로 나와 앉은 유성에게 곧이곧대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회장이 귓전에 대고 을러대는 것이나 다름없는 전화를 받았음에도.
“회장님 말씀에 거역도 할 수 있어요?”
“애 핑계라도 대면 어떻게든 될 겁니다.”
뻔뻔한 사헌의 대답을 유성은 재미있어했다. 사헌이 최 회장을 거스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재미있는 건지도 몰랐다.
“아뇨. 가고 싶어요.”
유성은 뜻밖에 선선히 말했다.
“확실합니까?”
사헌이 재차 확인했다.
최의현이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을 리는 없다. 문경과 회장 부부가 동행하는 자리이니 정신 놓고 날뛰지는 못하겠으나, 유성과 맞대면시키기는 불안했다.
사헌의 내심과 달리 유성은 태연히 앉아 물만 홀짝대고 있었다.
“최사헌 씨 친어머니는 안 오세요?”
이 역시 예상하지 못한 화제였다.
“회장님 내외분들 앞에서는 비슷한 얘기도 꺼내지 마요.”
가평 별장에 모일 가족에서 사헌의 친어머니는 당연하게 빠져 있었다.
“그냥 아버지랑 같이 사는 거지, 집안에 없는 사람이에요.”
식모 취급조차 못 받는 사람이다. 회장 부부에게 사헌의 친모는 투명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따로 인사드리러 갈까요?”
“말했잖아요, 없는 사람이라고.”
사헌이 잘라 말했다.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살아요. 그게 유성 씨한테도 나을 겁니다.”
화제를 끊어 내고 나자 유성은 입을 다물었다. 말귀를 알아듣고 더 파고들지 않아 편했다.
추저분한 가족사는 되도록 떠들고 싶지 않다.
“오늘 오피스텔 정리하려고요.”
유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컵을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호텔 알아볼까요? 계속 이 집에 있을 수는 없잖아요.”
“예식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을 텐데, 굳이요.”
“나랑 있는 거 안 불편해요?”
집에서 먹고 자는 사람이 늘었다면 불편한 게 당연했다.
당연할 텐데도, 사헌은 유성의 존재에 별다른 거북함을 느끼지 않았다.
“난 불편한데.”
유성이 사헌을 앞질러 말했다. 장난스레 콧잔등에 세로 주름을 만드는 표정이 제법 새침하다.
“집에 뭐가 하나도 없어. 물하고 술밖에.”
보란 듯 유성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당연하게도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여기서 사는 거 맞아요?”
“집에 잘 안 들어와서. 채우고 싶으면 채워도 돼요. 냉장고뿐 아니라 집 안 다른 데도.”
“아무거나 사 와도 된다는 소리죠? 후회 안 하죠?”
뭘 위협하듯 눈까지 동그랗게 뜨고 따져 묻는지. 사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로 걸어갔다.
“지 팀장님하고 같이 가요.”
“팀장급인 비서를 그렇게 종일 붙여 줘도 되는 거예요? 일 안 해요?”
유성이 사헌을 따라 걸어왔다. 보폭 차이 탓인지 부엌에서 거실로 가는 짧은 이동에도 유성은 자꾸 뒤처졌다.
“비서? 지서희 팀장은 비서팀 소속 아닙니다.”
무슨 오해를 했는지 알 만했다. 사헌의 부정에 유성이 영문을 모르고 심각해졌다.
“비서가 아니면 어디 팀장인데요. 설마 실무 중인 사람을 빼돌린 건 아닐 거고.”
“경호팀이에요.”
“……지 팀장님이요?”
“예, 내 앞으로 된 경호팀 팀장입니다. 특전사 출신에, 유성 씨보다 나이도 훨씬 많아요.”
“……서른 정도 돼 보이던데?”
“서른일곱이니까 딱 열 살 차이네.”
“……특전사 출신이라고요?”
“특전사, 해병대. 가진 무술 단증만 몇 개더라?”
태권도, 합기도, 기억나는 대로 손가락을 접으며 헤아려 보던 사헌이 곧 포기하고 손을 내렸다.
“범운은 원래 경호 다 붙여요?”
“새삼스럽게. 다들 겉으로 티만 안 내지, 자체 경호팀이나 용역 정도는 붙이잖습니까. 해신도 운영 중일 텐데? 의현이 주변에 따라다니는 경호원들도 아마 봤을 거고.”
“걔가 성질이 하도 더러워서 특별 관리하는 줄 알았죠.”
유성의 중얼거림에 사헌이 웃음을 터뜨렸다.
“범운 회장님이 워낙 의전을 좋아하셔서요.”
사실 지서희 팀장과 사헌의 인연은 사헌의 개인 경호팀이 꾸려지기 전부터였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지 팀장님이랑 나랑 둘이 보낼 거면.”
말이 계속될 줄 알고 기다렸건만 모호한 곳에서 끊긴 문장은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에 유성은 행동으로 표현했다.
유성은 손바닥을 내밀며 사헌을 빤히 보고 있었다. 뭘 달라고 하는 것 같긴 한데.
“왜.”
“카드.”
유성이 손을 더 가까이 내밀었다.
야무지게 펼쳐진 네 손가락이 유성의 가슴을 쿡, 찔렀다.
“굳이 내 카드를?”
주기 싫은 게 아니라, 필요하지 않을 텐데 달라고 하니 의아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국내 굴지의 그룹 3세다. 아무리 지원이라고는 없는 깍두기라도 쇼핑하러 가면서 남의 카드를 빌릴 사정은 아닐 터였다.
“원래 이런 건 남의 카드로 긁어야 그림이 돼요.”
돌아온 대답은 참으로 납득이 가는 소리였다.
“최사헌 씨 영문 이름이 잘 보이는 걸로 줘요. 한도 제일 높은 걸로.”
조건도 많다. 사헌이 바로 머니 클립을 열어 꽂혀 있는 카드들을 훑었다.
“자요.”
세 장을 뽑아 건네자 유성이 카드를 한 장씩 살피더니 하나를 도로 내밀었다.
“이거 말고 블랙으로.”
“한도 제일 높은 걸로 달라며?”
“그냥 이 카드는 색깔이 마음에 안 들어.”
색깔까지. 유성의 푸념에 사헌이 픽 웃음을 흘렸다.
검은색으로 바꿔 주니 이제야 흡족하게 카드를 챙긴다.
“카드로 건물이라도 사 오게요?”
“그래도 돼요?”
유성이 부채꼴로 펼친 카드를 흔들었다.
입가를 가리며 샐쭉하게 눈을 내리기까지 하는 표정은 그저 허세의 일환일 터였다.
멋대로 구는 듯싶다가도 유성에게는 눈치 보는 아이처럼 극도로 예의 바른 면들이 있었으니까. 사헌은 그게 좀 귀엽다고 생각했다.
“당분간 집에 못 들어올 거예요. 본인 집이라고 생각하고 마음대로 놀아요.”
귀엽다는 감상 다음으로 따라오곤 하는 어리광 부리게 해 주고 싶다는 충동은, 무시하기로 했다.
“피아노 쳐도 돼요?”
“마음껏.”
사헌이 유성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버티고 있는 그랜드피아노를 쳐다보았다.
그간은 무덤처럼 조용하던 피아노였다. 어떤 의미로는 정말 무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조율한 지 얼마 안 됐죠? 다음 조율은 언제예요?”
“지금까지는 1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다음 조율까지 반년은 남았어요. 왜요? 필요해요?”
“아니요. 궁금해서.”
필요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조율 일정이 궁금했다고? 사헌의 의문을 알아차린 듯이 유성이 말을 이었다.
“치지도 않을 피아노를 왜 1년에 한 번씩 조율하면서 보관하고 있는지 궁금해서요.”
유성의 의문은 당연했다. 아무리 값비싸고 훌륭한 악기라도 연주하지 않을 거라면 무거운 짐짝에 지나지 않는다.
매사추세츠의 오래 묵은 햇빛을 받으며 피아노 앞에 걸터앉아 있던 여자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문득 혀에서 먼지의 맛이 났다.
“유품이라서.”
나쁜 기억은 오래도 살아남는다.
사헌은 꼬리를 무는 생각을 차단했다.
“나가 봐야겠네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
상념을 털어 내려 빠르게 현관에 선 사헌의 소매를 유성이 뒤에서 잡아당겼다.
“또 왜.”
“다녀오세요.”
반응하기도 전에 유성이 까치발을 들고 사헌에게 키스했다.
침대에서 엉키던 살갗만큼이나 보드랍고 달았다. 중독되기 쉬운 감각이었다.
몸을 숙여 높이를 맞춰 주며 사헌은 이것조차 습관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다.
그게 자신에게 좋은 일은 아니리라는 직감도.
* * *
“특전사.”
뜬금없이 튀어나온 단어에 지서희가 들고 있던 실크 스카프를 내려놓았다.
“경호원인 줄 몰랐어요.”
“그러신 것 같긴 했습니다.”
스카프를 도로 주워 들어 펼치며 지서희의 목 부근에 대 보자 지서희가 어색하게 목을 뺐다.
“특전사 출신이면 총도 쏠 줄 알겠네요.”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쏴 보고 싶었거든요. 가르쳐 주실래요?”
입대했었으면 쏠 수 있었을 텐데. 옛날과 달리 모병제도로 바뀌지 않았어도, 아마 형질 이상 문제 때문에 입대는 못 했겠지만.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자 지서희가 총구 부분인 내 검지를 감싸서 아래로 내렸다.
“생각보다 격발음이 커서요. 지금 사격장 출입은 삼가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지서희가 말리니 새삼 자각이 됐다. 나는 대외적으로 임신 초기였다.
입매를 삐죽거리며 스카프를 두고 벽에 걸린 시곗줄을 보러 걸음을 옮겼다. 지서희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나를 따라왔다.
“지 팀장님은 언제부터 최 상무님, 아니다. 그때는 상무 아니었겠구나. 아무튼 언제부터였어요?”
“한국 돌아오셔서부터 함께했습니다.”
“그때 개인 경호팀이 있었어요? 최사헌 씨, 일반 사원부터 입사한 걸로 아는데.”
“……저는 경호팀하고 별개로 경호 맡았습니다.”
머뭇거리다가도 지서희는 묻는 대로 곧잘 대답해 주었다.
역시 지서희는 최사헌과 가까운 사이인 듯했다.
밖으로 새면 곤란한 사생활을 맡기는 걸 보면 지서희는 최사헌에게 신뢰할 만한 인물이고, 오래 알고 지냈을 가능성이 컸다.
제대로 경영에 끼워 주지도 않았던 손자한테 곧장 경호를 붙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고 추측했는데, 방금 대답을 들으니 맞아떨어진 모양이다.
범운에서 경호를 붙이기 전이면 개인적으로 맡았던 건가.
“엄청 오래 알고 지냈네요.”
한국에 돌아왔을 무렵이면 최사헌이 20대일 때다. 얼추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옆에서 본 측근인 셈이었다.
“그런데, 저걸 정말 전부 사시려고요?”
지서희가 쳐다보는 방향에는 포장된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시계에 귀걸이 등으로 이루어진 장신구 탑에 방금 스카프가 추가된 참이다.
“당연히 사려고 골랐죠.”
우리 뒤를 조용히 따라오던 직원이 눈을 빛내며 계산을 위해 전자 패드를 가져왔다.
“지 팀장님, 이 중에 아무거나 한 장만 뽑아 봐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 카드 세 장을 펼쳐서 내밀었다. 지서희가 영 미심쩍은 얼굴로 하나를 짚었다.
“와, 잘 뽑았네. 최사헌 씨 카드예요.”
“그럼 다른 두 장은…….”
“최사헌 씨 카드요.”
“…….”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일시불로 계산해 주세요.”
* * *
“왜요?”
시선이 느껴져 걷다 말고 옆을 보았다. 지서희는 고개를 젓고 차 문을 열었다.
“아닙니다.”
“남의 카드 긁고 다니는 게 저렇게 신날까 싶어서?”
손끝으로 카드 모서리를 튕겨 보았다. 금색으로 찍힌 최사헌의 영문 이름이 흔들린다.
“해 봤어요? 엄청 신나던데.”
지서희는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 봤냐는 말의 답인지, 신난다는 부분에 반응한 건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열어 주는 대로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물건은 모두 배송으로 보냈으므로 신나게 사들인 시간이 무색하게 차는 왔을 때하고 똑같이 텅 비어 있었다.
“남의 돈 쓰는 거요. 물론 내 돈이 아니라서 좋은 것도 있지만, 그런 느낌이 있지 않아요? 어디 기댈 데가 있다는 기분이요.”
차가 출발하면서 멀어지는 건물을 보다 나는 다시 입을 뗐다.
사 주는 걸 입고 쓰는 것 외에는 내 돈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해신에 안 어울리는 군식구라는 힐난대로, 집안 돈이나 축내는 애로 보이는 게 제일 두려웠다.
생각해 보면 돈을 어떻게 썼건 취급은 비슷했을 거다.
나는 원래 아무 이유 없이 미운 애였으니 조금 더 손가락질받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집이 축날 만큼 쓰고 돌아다니게 뒀을 리도 없고.
그래도 그냥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집에서는 양말 한 짝도 남의 걸 빌려 신은 듯 불편했다.
최사헌이 아무렇게나 꺼내 주었던 세 장의 카드를 손아귀에서 굴려 봤다. 플라스틱 카드는 얄팍했다.
“보살펴지는 것 같아.”
이런 데서 위안을 받고 마는 나는 얼마나 굶주리고 모자란 인간인 걸까.
“이상해요?”
운전대를 쥐고 앞을 보느라 바쁜 지서희의 날카로운 턱선이 내 쪽으로 각도를 틀었다.
나는 지서희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고 있었다. 지서희가 최사헌의 측근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지서희가 최사헌을 닮아서.
“정말 그런 거 아닙니다. 오늘 사신 건 다 본인이 쓰시나 해서요. 아까 귀걸이도?”
“귀걸이는 지 팀장님 건데요.”
놀라서 사양하려는 지서희를 두고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내 말을 이어 갔다.
“나머지는 다 최사헌 씨 거. 아, 스카프는…… 최사헌 씨 어머니한테 드리면 최사헌 씨가 싫어할까요?”
역시 주제넘는다고 생각하려나. 가족 문제는 예민한 모양이라 건드리기 꺼려진다.
“……사모님은 좋아하실 겁니다.”
“최사헌 씨 어머니랑도 아는 사이세요?”
보통은 10년이나 같이 일했으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최사헌은 케이스가 특수하니까. 곧 결혼할 사람한테 자기 어머니는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라는 것만 봐도.
“예, 사모님은…….”
지서희는 망설이며 말을 끊었다. 이 말을 해도 되나, 가늠해 보듯이 지서희가 나를 주시한다.
“제 고용주시니까요.”
맥락을 파악하려 머리를 굴려 봤다. 한국에 오자마자 친어머니가 붙인 경호원.
감시는 아니겠고, 당시 최사헌한테 신변에 위협이 있었을 것 같지도 않고.
모정? 걱정치고 과한데. 최사헌의 주변 관계는 잘 짐작이 가지 않는다.
“최사헌 씨는 뭘 좋아해요?”
아직도 손에 쥐고 있던 카드 모서리를 만졌다. 납작한 플라스틱에는 고작 이름과 일련번호만 새겨져 있다.
내가 뭘 믿고 카드를 세 장이나 내줬을까 후회하며 땅을 치게 해 주고 싶었지만, 막상 내 걸 사려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를 위해 사는 법이라니, 역시 그런 건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최사헌을 위한 물건을 양껏 살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것도 모르겠다.
“오래 알고 지냈으니까 지 팀장님이 나보다 잘 알 것 같아서요. 나보다 나을 것 같아서.”
신호에 걸린 차가 정지했다. 지서희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나도 그 사람한테 뭔가 해 주고 싶은데 잘 몰라서. 나도, 좋아하는 사람한테 잘해 주고 싶은데. 내가 하면 뭐든 제대로 안 돼요.”
유민이를 잘 보살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최사헌이 내 조건에 만족해서 다행이다.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나는 자격도 없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의 마음에 보답할 능력도 없다.
* * *
와이셔츠는 다 구겨서 팔꿈치까지 걷어붙이고, 머리는 흐트러졌고, 정장 바지 아래 신은 운동화는 앞코가 지저분했다.
집에서도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만 보다가 흐트러진 최사헌을 보니 색달랐다.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용인까지 왔어요?”
나를 보고도 이해가 안 되는 듯 고개를 기울이던 최사헌이 물었다. 용인시에 있는 기술 연구소는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창마다 새하얀 불빛을 반짝였다.
“연구소에 있다길래요.”
“연구소까지 왜 왔냐는 말이었는데요.”
“최사헌 씨 보러 왔죠.”
“그러니까 이 시간에 왜, 연구소까지 와서 나를…….”
중얼거리다 말이 빙빙 돈다는 사실을 느꼈는지 최사헌이 마른세수했다. 보아하니 안 쉬고 종일 일하느라 머리가 안 돌아가는 모양새다.
지 팀장님 말대로네. 지금도 일하느라 정신없을 거라더니. 정신이 없어 보이는 건 확실하다.
연구소로, 공장으로 돌아다니느라 바빠서 오늘 내로는 본사로 안 돌아오실 거라는 비서의 말에 직접 연구소로 왔다.
최사헌도 내가 전화했다는 사실은 알 거다. 올 줄은 몰랐겠지만.
“이게 뭡니까?”
최사헌이 내가 내민 봉투를 보며 물었다.
“최사헌 씨 카드로 산 간식이랑 차요.”
“간식?”
“사실 내 카드로 산 거예요, 이건.”
나 줄 걸 내 카드로 샀냐는 핀잔 정도는 돌아올 줄 알았는데 최사헌은 봉투를 살피느라 바빠 보여 내 입으로 이실직고했다.
“저녁은 먹었는지, 밤에 업무 할 때는 뭐가 필요한지 모르겠길래. 자.”
봉투에 담은 간식과 차를 최사헌에게 주고, 남은 것도 마저 최사헌의 손에 쥐여 주었다.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이걸로 사 먹어.”
최사헌의 카드 세 장에, 내 카드를 더해 네 장을 건네자 두툼한 카드 뭉치를 받아 든 최사헌이 둔하게 눈을 깜빡였다.
“얼굴 봤으니까 갈게요. 집에 안 들어와도 잠은 좀 자요.”
원래도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상태 보니까 귀찮게 하면 안 되겠다.
돌아서려는 나를 뒤에서 최사헌이 붙잡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가서 같이 먹고 가요.”
최사헌의 손에서 내가 건넨 간식 봉투가 바스락거렸다.
* * *
테이블 하나에 소파 하나. 최사헌이 안내한 휴게실은 좁고 간소했다.
봉투 안에 들어 있던 케이크와 포크를 꺼내고서도 최사헌은 미지근해졌을 차만 들이켰다.
눈 밑이 아침에 봤을 때보다 푸르죽죽하다.
“매일 이렇게 일해요? 연구소 내려와서 쉬지도 않으면서?”
“매일은 아니고 바쁠 때만.”
“언제 안 바쁜데요?”
“…….”
“매일 이렇게 일하는구나.”
결론을 내리자 최사헌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 분기에 흑자 전환 앞두고 해외 공장 증설 논의 중이라서.”
“곧 범운 배터리가 들어간 전기차 첫 양산 시점이기도 하고요.”
“그래요, 그래서. 당분간은 바쁘겠죠.”
대답하는 표정에 피로가 무겁게 앉아 있다. 단 거라도 먹으면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케이크를 포크로 잘랐다.
“주말에 시간 빼려면 며칠은 밤도 새야 하고.”
케이크를 떠서 일 얘기를 하기 바쁜 그의 입가로 가져가자 최사헌이 가느스름한 눈으로 내가 쥔 포크를 쳐다보았다. 이건 또 뭐 하는 수작인가, 하는 눈이다.
“빨리, 아.”
재촉하면서 입술에 포크를 들이밀자 최사헌이 못 이긴 척 입을 벌렸다.
포슬포슬한 케이크 조각이 잘생긴 입술로 들어가 사라진다. 먹는 것도 깔끔하게 잘 먹는다. 떠먹여 주는 대로 받아먹고 있는데도 기묘한 품위가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히 가다듬어 놓았던 차림새와는 또 다른 섹시함이 있다고 해야 하나. 한참 보고만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말리는 사람도 없겠다, 나는 턱을 괴고 최사헌을 구경했다.
“왜 이렇게 열심히 해요?”
차를 마시느라 고개를 약간 치키고 있던 최사헌의 눈동자가 내게로 내려왔다. 액체를 삼키며 울대뼈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세상 사람들 다 열심히 살잖아요. 나도 그런 거죠. 살겠다고 하는 거지.”
목이 타는지, 최사헌은 말을 하고서도 잔을 내려놓지 않고 끝까지 비웠다.
기록된 최사헌의 이력은 빠짐없이 읽었다. 두어 번의 월반, 스물둘에 아이비리그 졸업, MBA 과정을 밟으면서도 일을 했다.
오랜 적자를 떠안은 계열사들을 맡아 되살리기까지 공장에서 먹고 자며 일했다는 얘기는 여러 매체의 기사에 올라와 있었다.
급격한 승진을 합리화할 겸 최사헌을 밀어 줄 겸 범운에서 여기저기 뿌린 기사일 테지만, 지금 최사헌의 모습을 보면 지어낸 얘기는 아니었다.
“평균보다는 열심히 했던데?”
“그 정도 하는 사람 많아요.”
“내가 봐 온 망나니들이 들으면 울겠네.”
대충 자리만 맡아 실무진이나 전문가한테 일은 떠넘기고 어영부영 해 먹는 꼴이라면 친척 모임에만 가도 널렸다. 하물며 내 아버지가 사고 치는 것도 꾸준히 봤다.
비슷한 기억을 떠올리는 중인지 최사헌의 입가에도 비틀어진 미소가 걸렸다.
“나한테 의도가 뭔지 물어봤었잖아요. 최사헌 씨는 왜 회장 후계가 되고 싶은데요? 돈?”
“말하기 싫어요.”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최사헌이 소파에 기댔다.
윗단추를 풀어 놓아 벌어진 와이셔츠 옷깃 사이로, 목과 어깨 사이에 붙여 놓은 살구색 밴드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물어 놓은 자리였다.
내 몫의 차는 있지도 않은데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왜요.”
“얘기하면 내가 생각보다 엉망인 걸 들키니까.”
생각도 못 하게 솔직한 대답이라 놀랐다.
“지금 이 꼴처럼.”
무방비하게 소파에 팔을 늘어뜨린 사헌이 느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섹스할 때 찡그리며 나를 내려다보던 얼굴과 겹친다.
“하나도 안 엉망이에요.”
“…….”
“죽이게 섹시하면 모를까.”
내 감상평을 들은 최사헌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으로 듣네. 진심인데.
“볼 거면 가까이 와서 구경하라고.”
옆자리에 올라간 최사헌의 손이 소파 가죽을 두드렸다.
내 눈빛이 노골적이기는 했나 보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최사헌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머리 아파요?”
아까부터 말하다 잠깐씩 좁아지는 미간이 마음 쓰였다. 최사헌의 이마를 짚자 미열이 느껴졌다.
“차가워서 기분 좋네.”
최사헌이 아예 눈을 감았다. 내가 오기 전까지 도대체 뭐가 오늘 이 남자를 이렇게 지치게 한 걸까.
“최의현이나 나나 다를 것도 없어요. 어디에 돌아 있느냐만 다른 거지.”
“달라요.”
당신하고 최의현은 완전히 달라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최사헌이 그 순간에 눈을 뜨는 바람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새카만 눈동자를 맞닥뜨리자 목이 메었다.
그래서 제 일조차 똑바로 못 하는 입술을 입 맞추는 데 썼다.
최사헌의 입술에서 생크림 맛이 났다. 키스를 가만히 받고 있던 최사헌이 갑자기 나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두껍고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고 당긴다. 아예 몸이 최사헌의 무릎 위로 딸려 올라갔다.
다리를 움직여 자리를 잡으면서도 나는 일이 돌아가는 속도에 미처 적응하지 못했다.
“여기서?”
문은 닫혔고 바깥으로 창문도 나지 않은 좁은 밀실이었으나 엄연히 최사헌의 직장이었다.
그간 고집스러우리만큼 고지식하게 굴던 남자가 달려드니 놀랄 수밖에.
“싫어?”
최사헌이 내 목덜미를 문지르며 물었다. 뜨뜻한 손바닥의 감촉이 잔털을 곤두서게 했다.
“난 좋아.”
그를 보며 분명히 대답해 주었다.
“좋아, 너무.”
최사헌이 뭐라고 입술을 움직이더니 내 옷을 벗겼다. 단추를 풀고 옷깃을 여는 동작이 급했다.
“유성 씨는 지금 태어나서 다행이네요.”
“왜요.”
“옛날이면 어디 갇혀 있었을 것 같아서…….”
치미는 자극 속에 방금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헤아리느라 머리가 열심히 돌았다.
그러고 나서야 그게 다소 돌아 버린 발언임을 알아차렸다. 방금 나더러 가둬 놓고 싶다고 한 건가.
“이게 최사헌 씨 취향이에요?”
하의를 무릎 바로 위까지 내리고서, 한쪽씩 발을 빼내는 동안 나는 최대한 느리게 움직였다. 더없이 집중해 나를 보는 최사헌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입 잘 막아요.”
최사헌의 손을 붙잡아 입가에 누르자 까슬한 감촉이 전해졌다.
“소리 낼지도 모르니까.”
중지를 입에 넣고 나니, 매끄럽고 단단한 손톱이 입천장을 스쳤다. 뼈마디가 두꺼운 손가락을 빨면서 나는 우습게도 흥분했다. 귀에 축축한 소리가 울렸다.
그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나를 보는 후텁지근한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드러나는 욕망에 아래가 달아올랐다.
최사헌도 날 원했으면 한다. 사랑 따윈 아닐지라도.
육욕이라도 좋다. 그거면 됐다.
손가락을 뱉어 내자마자 최사헌이 갑작스레 입 맞췄다. 숨 막히는 키스를 받아 내며 연이어 생각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신한테 잘해 주고 싶다고. 그럴 수만 있다면.
* * *
최사헌은 꼬박 다섯 번의 밤이 지나도록 집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집에 잘 안 들어온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사실 이게 내 집인가, 생각할 정도로.
그 외에 집에 드나든 사람은 최사헌의 옷을 가지러 온 비서 정도였다.
“오늘 많이 늦는대요?”
주말 모임도 혼자서 가는 중이다. 혼자라기에는 운전석에는 기사가, 옆에는 지서희가 타 있지만, 어쨌든 최사헌은 없다.
“그래도 점심 전에는 도착하신답니다.”
정신머리 없이 바빠 보이더니 모임 당일까지 격무에 시달리시는 중인 듯했다.
[일 때문에 오늘 늦을 겁니다. 차 보낼 테니까 타고 먼저 가 있어요.]
새벽 나절 문자를 남긴 내 약혼자는 그 후로 지금껏 연락 두절이었다.
소식이 없는 건 최사헌만이 아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문질렀다.
액정에 내 얼굴이 반사되었다. 초조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최의현도 며칠째 연락이 없다. 끈질기게 남기던 부재중전화도, 온갖 메시지도.
찝찝하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휴대폰에 커다란 글씨로 시간이 떴다. 마침 숫자가 바뀌었다.
감이 안 좋았다.
[얼마나 늦어요?]
일렬로 나란히 맞춰진 시계의 숫자를 핑계 삼아 나는 최사헌에게 보낼 문자를 썼다.
[보고 싶어]
문자에는 목소리가 담기지 않으니까, 그가 그저 그런 투정이나 수작으로 읽어 주기를 바라면서. 진심으로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 * *
“인근 공장 인수에 얼마나 들었는지 알고 있잖아요. 추가 증설 앞두고 보내는 TF인데 잡음 생기면 곤란합니다. 그래요, 폴란드 정부에서 이번에 문제 삼은 것도 슬러리 폐기물 처리니까…….”
통화를 계속하며 사헌이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긴장을 풀면 균형을 잃을 것 같다. 나흘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무리한 일정을 소화 중이니 못 쉬는 게 당연하다. 공장 증설 계획부터 공장 운영 개선을 위한 태스크포스 팀원들에 이르기까지 사헌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적당히 확인만 해도 될 걸 꼭 사서 일을 만든다는 불평도 왕왕 들려왔지만, 사헌은 결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여기는 적진이나 다름없다. 눈을 떼는 순간 어그러진다. 지금도 뒤통수를 노리는 총구가 그려졌다.
“상무님, 저, 사무실에 손님 와 계십니다.”
상무이사실로 들어가기 직전, 비서가 소리를 죽여 보고했다.
“손님?”
사헌이 휴대폰 스피커를 막고 되물었다. 비서가 대답하려 머뭇거렸으나 손님의 정체가 누구인지 벌써 짐작이 갔다.
사무실 문을 열자 사헌의 의자를 차지한 인영이 보였다.
의자가 빙글 돌아가면서 의현이 얼굴을 드러냈다.
“일하는 중이야. 급한 용건 아니면 나가.”
어떻게 들어왔냐고 물을 필요도 없다. 안 된다는 사람들 밀쳐 내고 들어와 앉았을 게 뻔하니. 사헌이 의현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의현은 아무 반응 없이 의자에 앉아 다리만 꼬았다. 적의 어린 눈빛은 양아치 노릇 하던 10대 때와 똑같다. 사헌이 혀끝을 찼다.
“바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사헌이 의현의 정면에 섰다.
“최의현, 가평 가 있어야 할 시간 아닌가?”
“그러는 우리 최 상무님도 똑같잖아?”
“난 일 문제야. 회장님도 알고 계시고. 넌?”
“너도 참 불쌍하다, 형.”
의현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바퀴가 달린 의자가 뒤로 밀려났다.
“좆 빠지게 일만 하다가 버려지게 생겼으니.”
책상에 놓인 사헌의 명패를 쓸면서 의현이 빈정댔다.
사헌은 대꾸하지 않았다. 도발이 우습지도 않다. 피로한 와중에 상대하기도 성가셔 관자놀이가 당겼다.
“여기 앉아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넌 아직도 그냥 주워 온 쓰레기야. 할아버지가 여전히 형네 엄마 식구 취급도 안 하는 것만 봐도 사이즈 나오지 않나?”
명패를 힘껏 움켜쥐느라 의현의 손가락 마디가 도드라졌다. 사헌은 의현의 손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형네 엄마가 집에 못 들일 쓰레기면, 당연히 형도 쓰레기인 거지.”
의현이 명패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묵직한 금속이 바닥에 부딪히면서 요란한 소음이 퍼졌다.
사헌은 주머니에 손을 꽂고서 떨어진 명패를 내려다보았다. 의현이 기세등등하게 미소 지었다.
“저, 상무님…….”
소음에 놀랐는지 노크와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별일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말아요.”
바깥을 향해 대꾸한 사헌이 무미건조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까지 어린애 패악질을 받아 줘야 하는 건지.
“다 했어? 더 남았니.”
“나는 네가 그렇게 침착한 척할 때가 제일 열받더라. 야, 잘난 척하지 마.”
“지금은 바빠서 그러는데, 나중에 와서 다시 해. 일주일 정도 후에 일정 잡아 줄게. 명패도 깨지기 쉬운 걸로 하나 사 놓고.”
“누굴 등신 취급해!”
의현이 책상에 팔을 휘둘렀다. 위에 놓여 있던 물건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바닥을 굴렀다.
“고모가 가정교육에는 소질이 별로 없으셨나 봐.”
허리를 굽힌 사헌이 발치로 던져진 만년필을 주워 들었다. 의현이 바로 사헌에게 달려들었다.
바로 머리를 치려고 휘둘러지는 주먹을 사헌이 팔을 세워 막았다. 팔뚝에 번지는 통증이 짜증스러웠다. 혈기가 넘치는 사촌 동생의 낯짝도.
“이제 그만해.”
사헌이 의현의 손목을 붙잡았다. 의현은 힘으로 버티며 사헌을 향해 눈을 치떴다.
“백유성은 네가 좋아서 너한테 간 게 아니라, 나 보라고 너랑 있는 거야. 나 때문에.”
여전히 유치하기 그지없는 수작질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헌의 미간에도 힘이 들어갔다.
“요즘 백유성이 무슨 짓 하고 다니는지는 알아?”
평정을 잃은 게 티가 난 모양이다. 기다렸다는 듯 물어뜯는 걸 보면.
사헌은 장난감의 관절을 찾자마자 눈을 빛내며 비틀어 대던 어린 최의현을 기억했다.
약점을 드러내면 빌미를 제공하는 거다. 사헌이 오래도록 몸으로 습득한 규칙이었다.
“정혼자가 어쩌고 하더니, 최 상무님은 정혼자가 사제 약물이나 사고 다니는 것도 몰라?”
약물이라는 말에 사헌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가 돌아왔다.
“누가 그래, 모른다고?”
사헌이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이번에는 의현이 당혹감을 드러냈다.
“그럼 알았다고?”
“유성 씨하고 내 문제야. 끼어들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해.”
“아는데 하게 놔둬? 그 약이 뭔지는 알아?”
알 리가. 존재도 방금 알았는데.
사헌을 주시하던 의현이 곧 조금 전의 기세를 되찾았다.
“넌 그냥 백유성한테 이용당하는 거야.”
평소라면 최의현한테 파악당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러나 피로가 무거웠고…… 하필 주제가 나빴다.
“애 가진 거 아니지?”
의현이 확신에 차 이기죽거렸다.
사헌은 지금 자신이 어떤 꼴인지 보이는 것만 같았다. 포커 패를 처음 쥐어 본 애송이처럼 초조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리라.
“의사한테 작업은 쳤나 보던데 당장 검사해 보면 알겠지. 결혼 전에 알게 되면 우리 회장님 반응이 볼만할 거야. 결혼까지 가지도 못할걸?”
신이 나서 떠들어 댄다. 정도를 모르고.
사헌이 의현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손아귀에 셔츠가 붙잡힌다.
순식간에 멱살을 잡힌 의현이 균형을 잃었다. 사헌이 의현을 책상에 내던지다시피 억눌렀다.
쾅, 소리가 울리도록 책상에 심하게 등을 부딪친 의현이 통증으로 눈썹을 움츠렸다.
“너, 백유성한테 무슨 짓 했어.”
무표정하게 의현을 내려다보며 사헌이 의현의 빗장뼈를 팔뚝으로 억눌렀다. 의현이 어깨를 들썩이며 발버둥 쳤지만 위에서 무게로 찍어 누르는 사헌을 뿌리치기는 역부족이었다.
“무슨 짓, 했지? 뭘 했길래 그 사람이…….”
자기 인생까지 걸어, 너한테.
사헌이 다음 말을 씹어 삼켰다.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목을 압박당하는 탓인지 의현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꺽꺽댔다. 사헌의 손에 들려 있던 만년필의 뚜껑이 의현의 울대를 짓눌렀다.
만년필의 촉이 의현의 목을 찌르는 상상을 했다. 뾰족한 펜촉이 경동맥을 찔러 들어가면서 뺨에 뜨뜻한 피가 튀는 장면을. 사헌의 눈이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애가 있든 없든, 나는 백유성하고 결혼해. 헛수고하지 마.”
“씨발, 이거 놓, 윽.”
“내가 넌 줄 알아? 개수작질에 다 성사된 결혼이 취소되게?”
숨이 닿으리만치 가까이 고개를 마주 대면서 사헌이 속삭였다. 새카만 눈동자가 정확히 의현을 노렸다.
“허윽…….”
점차 질리는 의현의 안색을 관찰하며 사헌은 버둥거리는 의현을 압박했다.
의현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갈 즈음 사헌이 팔을 거뒀다. 사헌이 물러서자 의현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쿨럭, 컥, 헉…… 미친 새끼.”
바닥에 주저앉은 의현이 목을 문지르며 헐떡댔다. 빠르게 오르내리는 등판을 보면서 사헌이 체온으로 달아오른 만년필 표면을 문질렀다.
“나가.”
의현을 내려다보는 사헌의 표정에는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공격성이 일렁였다.
“내 손으로 내보내 줘?”
앉아 있는 의현을 일으키기라도 할 듯 사헌이 팔을 뻗었다. 의현이 곧바로 사헌의 손을 쳐냈다.
“넌 백유성에 대해서, 좆도 몰라.”
죽일 듯 사헌을 노려보면서도 의현은 비틀비틀 일어섰다. 욕이라도 지껄일 듯 움찔대던 의현의 입술은 끝내 조용했다.
의현이 문을 열고 나가는 동안 사헌은 주머니에 꽂은 손을 마디가 아프도록 말아쥐고 있었다.
의현이 사라진 사무실은 난장판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잡동사니와 어지러운 책상을 보던 사헌이 책상에 걸터앉았다.
두통이 개떼처럼 몰려와 머리를 짓깨물었다. 당장 찬물에 머리라도 처박고 싶은 심경이다.
사헌은 쏟아지고 있을 연락을 확인하는 대신 사적인 용도로 쓰는 휴대폰을 들었다. 알람으로 빽빽한 비즈니스용 휴대폰과 달리 메인 화면부터 간소했다.
언제쯤 도착하냐는 아버지의 문자와 조모의 부재중전화가 남아 있다. 그리고 유성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얼마나 늦어요?]
문자는 한 통으로 끝이 아니었다.
[보고 싶어]
이어지는 글자를 읽으면서 사헌이 이마를 짚었다. 안 그래도 물기가 부족하던 눈이 시렸다.
“어쩌자는 거야.”
백유성. 이름을 신음처럼 토해 낸 사헌이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사헌의 구두가 흩어진 서류를 밟으며 희미한 자국을 남긴다.
서류는 사무실 문가까지 떨어져 있었다. 문 바로 근처의 서류는 의현의 발자국대로 귀퉁이가 구겨져 있다.
닫힌 문 너머로 의현은 왔던 길을 되밟아 나간다.
비틀대는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의현은 어딘지도 모를 곳을 노려보며 걸었다.
“좆같은 새끼.”
어디까지 잘난 척할 수 있나 보자. 마구잡이로 목을 문지르며 의현이 뇌까렸다. 목울대 아래에는 동그란 피멍이 어느새 짙었다.
복도 한편에 침을 뱉고서 걸어 나가는 의현의 얼굴은 수치와 분노로 얼룩져 있었다.
건물을 빠져나가 대기 중인 차의 뒷좌석에 오르며 의현이 유난히 세차게 문을 닫았다. 운전석에 자리한 기사는 새삼 놀라지도 않고서 의현을 돌아봤다.
“출발해요.”
“도련님, 그런데 성북동은 왜 가십니까?”
운전기사가 조심히 물었다. 일찍이 행선지를 일러줄 때는 아무 말 없더니. 의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가 가라면 가는 거지, 말이 많아.”
“아니, 그게……. 무슨 일로 최문혁 전무님 댁으로 가시나 해서. 사장님이 청평호 별장에서 기다리실 텐데요.”
기사가 진땀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구구절절 말이 많다. 엄마한테 보고해야 하니 털어놓으라고 하지 그냥. 의현이 비스듬히 다리를 꼬았다.
“오늘 우리 가족 모임이잖아요.”
계속해 쑤시는 울대의 멍 자국을 만지며 의현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오래간만에 모이는 건데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안 되죠.”
의현이 휴대폰 화면에 뜬 유성의 옆얼굴을 보며 말했다. 어디를 보는지 모를 유성의 옆모습은 초점이 흔들려 흐릿했다.
엄지로 액정을 지그시 누르자 유성의 얼굴이 확대되었다. 의현의 엄지 끝이 유성의 목을 짓이겼다.
* * *
가평 별장은 주택이라기보다는 성과 영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넓었다.
호수에는 선착장과 천으로 덮은 요트, 관리된 잔디밭에는 따로 실외 골프장과 캠핑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하를 포함해 5층의 건물은 기와를 올리고 단청을 써 본격적으로 한옥 느낌을 냈다.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를 오가며 고작 열 명 내외의 가족 행사를 준비 중인 사람들을 보고 있으려니 회장님이 의전을 좋아하신다던 최사헌의 말이 상기되었다. 그냥 한 말은 아니었나 보다.
“오셨습니까. 상무님은 늦으신다고 들었습니다. 먼저 들어가시죠.”
정장 차림의 중년 남자가 나를 안내하자 지서희는 내게 목 인사를 하고 비켜섰다.
이제부터는 나 혼자 들어가야 했다. 드넓은 풀밭은 흡사 중세의 장원을 연상케 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심겨 있는 나무들이 무거운 가지를 흔들었다.
“이렇게 또 보네.”
최문경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차려입은 점프슈트의 색은 경고등처럼 쨍했다.
나는 예의 바르게 고개 숙였다.
“의현이는 안 보이네요.”
“오는 길이야. 왜, 보고 싶니?”
“그럼요. 이제 가족 될 사람인데요.”
최대한 평소처럼 대답하자 최문경이 콧방귀를 뀌었다.
“결혼 앞두고서 남의 애 품어서 상황 어렵게 만들 정도로 답 없는 애라곤 생각 안 했는데. 하란 대로 말이나 잘 듣는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지.”
“저 말 잘 들어요. 이 자리도 회장님이 오라셔서 온 거예요.”
내 말을 들은 최문경이 아연히 인상을 구기는가 싶더니, 곧 미소를 되찾았다.
“원래는 이렇게 돼먹잖은 애였구나.”
하도 평이하게 말해서 칭찬이라도 받은 줄 알았다.
“출신이 어디 가겠어요.”
최문경에게 밥 먹듯 듣던 말을 읊었다. 나한테 더 떨어질 평가가 있었던가.
“사장님이 정확히 보셨던 거죠.”
“…….”
“얼마나 다행이에요. 제가 의현이하고 더 안 엮이는 게요.”
사실 최문경은 내가 마음에 안 차 죽을 지경일 터였다. 원래대로라면 진작 쳐내고도 남았다.
최의현이 미친 것처럼 굴지만 않았어도. 그 자식이 조금만 더 상식인이었더라도 최문경은 자기 아들을 위해 나 따위보다 훨씬 그럴싸한 기반을 마련해 주었을 거다.
“아, 어머니.”
최문경의 신경은 금세 내게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건물 입구에서 개량한복 차림의 노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노년 여성은 최종필 회장의 배우자였다. 박연이는 본인이 명예회장으로 재임한 교육재단과 문화재단 외에도 아직껏 영향력을 떨치는 사람이었다.
최문경이 자세를 고치더니, 노인에게로 걸어갔다. 내게 말을 걸 때와는 달리 미소가 싹싹했다.
“아버지는요?”
“아직 안이지. 문혁이하고 할 얘기가 많은가 보더라. 의현이는?”
“글쎄요. 사헌이하고 같이 올 참인가 봐요.”
최사헌이, 최의현하고? 둘이 사석에서 굳이 같이 다닐 이유가 있나.
최사헌은 타이밍 좋은 등장으로 최문경의 말을 몸소 반박했다. 아까 내가 타고 왔던 차가 섰던 곳으로 꺾어져 들어온 세단에서 최사헌이 내려섰다.
주변을 둘러보는 최사헌의 얼굴은 멀리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피로에 절어 있었다.
기사와 몇 마디 나누는 듯하던 최사헌이 나를 보면서 걸어왔다.
전에 없이 가라앉은 분위기에 위화감이 들었다. 최사헌은 마지막으로 봤던 날과 인상이 사뭇 달랐다.
“왔니? 의현이는?”
박연이는 자기 딸을 대하던 것보다도 살갑게 최사헌을 맞이했다. 최문혁을 설득해 사업 운영에 복귀시킨 것도 박연이였다는 자료를 읽은 바 있다.
자식 중에도 아픈 손가락은 따로 있는 법이라지만, 내리사랑이 손주한테까지 이어지는 건 놀랍다. 감정도 세습이 되나.
“아직 안 도착했습니까. 저보다 빨리 출발한 걸로 아는데요.”
둘이 만나거나, 적어도 얘기는 했다는 소린가.
사촌이니 못 그럴 것도 없겠지만, 석연치 않았다.
“바쁜 일이라도 있나 보네요.”
말을 잇는 최사헌의 태도는 묘하게 성의가 없었다. 정신이 다른 데 가 있는 사람 같다.
“바빴어요?”
잠은 제대로 잤나 싶어 물었는데, 나를 보는 최사헌의 눈빛이 낯설었다.
“끝나고 둘이서 얘기 좀 하죠.”
“무슨 얘기요?”
이렇게까지 말을 꺼냈다면 시답잖은 얘기는 아닐 터였다.
최사헌의 대답을 듣기 전에 새로운 손님이 입구에 도착했다.
알아볼 수 있다. 최의현의 차다.
“의현이 왔네.”
선뜻 반가워하는 노인과 달리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조용하게 차의 향방을 지켜보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최의현은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훑어보더니 내게서 시선을 멈췄다. 기어이 나를 찾아냈다.
최의현의 뒤에서 누군가 내리고 있었다.
중년의 여성은 멀리서 보기에도 키가 컸다. 명확한 이목구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최사헌의 친어머니가 틀림없다.
나는 어렵지 않게 최사헌의 가족 구성을 떠올렸다. 지금 최문혁과 사실혼 관계인 이소선이었다.
이소선이 보이자마자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 곁에 서 있던 최사헌에게서 조그마한 욕설이 들렸다.
최의현의 에스코트를 받아 잔디밭으로 발을 들인 이소선은 안색이 밝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새삼 시가에 엿이라도 먹이고 싶어 들어온 모양새는 아니었다.
“쟤 왜 여기에 있는 거니? 회장님은 아시는 거야?”
뒤에서 당황에 찬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들렸다면 최사헌의 귀에도 들렸을 텐데 최사헌은 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자신이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소선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궁전의 파티홀에서 갑자기 재투성이가 되어 버린 신데렐라 같다.
당장이라도 뒤돌아 달아나 버리고 싶은 표정인데 그러지도 못한다. 최의현은 이소선을 부축한 손아귀를 풀지 않았다.
도움을 줄 곳을 찾아 이소선의 시선이 서성대지만, 최문혁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시누이나 시모가 움직일 리도 없었다.
지금 가장 애매한 처지에 놓인 건 최사헌이었다. 어쨌든 최사헌은 저 여자와 관계없는 사이였다. 적어도 최종필 회장이 그린 세상에서는.
나는 이소선에게로 걸어갔다. 최의현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유성이라고 합니다.”
이소선은 내가 내민 손을 선뜻 잡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드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드님이라는 소리에 이소선의 눈빛이 흔들렸다. 최사헌과 달리 이쪽은 미련이며 모정이 넘쳐 보인다. 흔한 신파극이었다.
“네가 모시고 온 거야? 잘했네.”
최의현을 보면서 말하자 그가 어정쩡하게 표정을 굳혔다.
“잘하긴.”
최사헌이 내 뒤에서 말을 끊었다.
“하는 짓거리가 저속해서 못 봐 줄 지경인데.”
피로와 눅진눅진하게 섞여 뭉친 분노가 말끝에 덩어리져 떨어졌다. 그럴수록 최의현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왜요. 가족 행사라고 외숙모까지 챙기는 모습이 기특하잖아요.”
약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가족 행사를 난장 치겠다는 저 앞뒤 없는 실행력에.
“최 전무님하고 회장님은 안에서 얘기 중이시래. 금방 나오실 텐데 나오면 좋아하시겠다.”
덩달아 이 꼴을 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소린가. 태어나서 한 번도 주변의 눈치를 본 적이 없는 도련님은 과연 무섭다.
건물 안을 가리키는 시늉을 하며 뒤를 돌아보자 최문경이 심각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선 박연이 회장의 안색 역시 어두웠다.
“네가 이렇게 가족 생각하는 거 알면 오늘 자리 마련한 회장님도 그렇고, 최문혁 전무님은 또 얼마나 감동하시겠어.”
최의현이 뭐라고 건방진 대꾸를 하기 전에 나는 친절히 말을 이어 갔다.
“네가 모셔 왔다고, 내가 꼭 잘 말씀드릴게. 나는 가족 행사에 이렇게 정식으로 초대받은 건 처음이라서 긴장했는데, 네가 가족들 챙기는 모습 보니까…….”
말을 하다 말고 이소선을 부축한 최의현의 팔에 손을 얹자 그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역시 가족은 참 좋은 거구나 싶어. 회장님 말씀대로.”
말씨만 사근사근하다고 무슨 내용인지 못 알아들을 정도로 눈치가 부족한 사람은 이 중 아무도 없었다.
“할아버지하고 사이좋아졌나 보다, 백유성.”
“내가 어른들한테 잘하잖아.”
“최사헌이 그렇게 좋아?”
미친 새끼.
욕이 절로 나왔다. 최사헌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지금 눈을 피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최의현은 나를 꿰뚫을 듯 쳐다보았다.
“응, 좋아. 축하해 줘서 고마워.”
“축하한다고 한 적 없어.”
대답 하고는. 아주 막 나간다. 여기 있는 게 단둘뿐이라는 양 나만 보는 눈길이 지긋지긋했다.
“축하해 줘. 유성 씨 말대로 이제 한 가족인데.”
최사헌은 능숙하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늘 일, 고맙다.”
예리하게 벼려진 말이었다. 최의현이 바보가 아니라면 최사헌이 지금 임계점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거다.
나까지 입을 다물자 살얼음 같은 침묵이 우리 가운데에 서렸다.
“아무래도 이만 돌아가야겠다.”
줄곧 조용하던 이소선이 허둥지둥 최의현에게서 떨어졌다.
“급한 일이 있는데 깜빡 잊고 있었네.”
어색한 핑계였으나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말릴 주제가 아니었고, 남은 모두는 이소선이 있으면 불편해질 이들이다. 앞장서서 그를 데려온 최의현조차.
“아직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는데. 저 앞까지만이라도 배웅할게요.”
지금 가면 별장에 도착한 지 10여 분도 채 지나지 않고 돌아가는 셈이었다. 이런 취급을 당하는 이소선이 안쓰러웠고, 남 일 같지 않았다.
최사헌은 묵묵히 나와 함께 이소선의 곁에서 걸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둘 다 그만 들어가 봐. 택시 부르면 돼.”
주차된 차들 근처에 닿자마자 이소선이 우리에게 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최의현의 차를 타고 온 탓에 돌아갈 차편도 여의치 않은 듯했다.
“그럼 택시는 제가…….”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최사헌이 이소선의 팔을 감싸 쥐었다.
멀리에서는 박연이와 최문경이 우리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가시죠. 회장님 나오시기 전에.”
눌러 죽인 목소리에 배어 있는 감정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알 수 있는 건 최사헌이 이런 순간에 감정을 숨기는 일에 아주 능숙하다는 것 정도다.
“얌전히 있어요.”
최사헌이 나를 지나치며 당부했다.
내게 하는 말임을 알고 놀랐다. 요 며칠 이보다 더 얌전할 수 없이 살았는데.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며칠 동안 연락도 안 된 건 본인이면서.
항의할 틈도 없이 최사헌이 이소선과 함께 멀어졌다. 최사헌의 뒷모습이 멀어져 갈수록 속이 허전했다.
나는 최사헌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 갑자기 내 어깨를 짚을 때까지는.
붙잡는 손길을 따라 뒤돌아보자 바람이 뺨을 할퀴었다. 주위의 나무들이 을씨년스럽게 서로 부대꼈다.
* * *
“미안해, 정말.”
사과가 듣기 싫다. 사헌은 조수석에 앉은 여자의 가냘픈 옆선을 곁눈으로 보았다.
“나는, 네 결혼 준비 자리고 하니까…… 오늘 정도는 불러 주셨구나, 감사히 생각했지 뭐야.”
최의현이 떠든 소리겠지. 집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꾀어 왔는지 예상이 갔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정도 꾀임에 속아 넘어가다니.
‘성북동 사모님’은 언제 봐도 순진무구한 소녀 같다. 하기야 저 정도로 물러 터지지 않았다면 이제껏 이 모든 수모를 감내하며 아버지 옆에 있지도 않았으리라.
아들이 피 흘리는 모습을 보고도 앙갚음이나 분노가 아니라 경호를 붙일 생각부터 했던 사람이고, 할아버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자 정말로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으로 모정을 표현하던 사람이다.
우연조와는 완전히 정반대다.
그 사람과도.
“무척 미인이더라.”
유성의 얘기였다. 미인이라는 단어만 듣고도 유성을 연상하는 자신이 우스워 사헌이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인 거지?”
조심스러운 질문에 두통이 올라왔다. 어째서 당신은 아직도 이렇게 천진하게 굴지.
“그런 거 아니니까 백유성 씨한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도, 너랑 결혼할 사람인데…….”
“오래 안 갑니다, 결혼.”
매정하리만치 차가운 답변에 소선이 주춤했다.
“사헌아.”
운전대를 쥔 사헌의 손목께에 소선의 손가락이 감겼다. 손가락은 손목시계 아래의 흐릿한 흰색 금을 더듬으려 했다.
“엄마는 네가 걱정스러워.”
사헌이 운전대를 부서져라 쥐었다. 불티처럼 기억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그죽죽하게 튀어 올랐다.
세라믹 칼날이 손목의 뼈와 뼈 사이를 가르고 들어올 때의 감촉, 이제는 기억 속에서 왜곡되어 뼈 시린 전율로만 기억하는 순간.
‘내가 네 엄마야.’
‘알겠니?’
피아노 선율이 고막을 송곳처럼 쑤셔 댔다.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라디오가 재생되고 있음을 알리는 액정을 발견한 사헌이 내리치듯 버튼을 눌러 음악을 껐다.
소선이 놀라 사헌을 응시했다.
“10년도 더 된 일이에요. 언제까지 어린애였을 때 일에 붙잡혀 있지는 않아요, 저도.”
피아노 소리가 계속되었다.
사헌이 라디오를 확인했다. 화면은 꺼진 채였다.
음률이 차 내부를 가득 메웠다. 모차르트 레퀴엠의 「라크리모사」가 연주된다.
사헌은 앞만을 노려보았다.
‘죽여 버리고 싶어.’
우연조의 음성이 음산한 유령처럼 사헌의 곁에 내려앉았다. 사헌은 무덤에서 기어 나온 여자의 손가락뼈가 건반을 치듯 자신의 목덜미를 두드리는 감촉을 느꼈다.
금이 간 손가락뼈가 덜걱거리며 사헌을 붙잡았다.
“사헌아.”
소선의 걱정 어린 부름을 들었으나 사헌은 고개를 틀지 못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해골이 사헌의 어깨에 매달려 그를 노리고 있었다.
‘죄인은 심판받으리다.’
피아노를 치며 우연조가 라틴어로 노래한다. 위태로운 메조소프라노였다. 피아노와 성악을 함께 전공했다는 우연조는 마지막에 가서는 제대로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10여 년 전 보스턴의 안개에서 헤어 나오려 사헌이 액셀을 밟았다.
속도계가 올라갔다. 사헌은 무덤의 냄새를 맡았다.
펼쳐진 길은 보스턴 시가지가 아니라 청평리의 도로였다. 그러나 피아노는 계속해 뒤울리고, 우연조의 노랫소리가 이어진다.
‘주여, 안식을 주소서.’
* * *
다 같이 모이는 자리는 최사헌이 돌아올 때까지 미뤄졌다.
이소선의 방문이 귀에 들어갔는지 최문혁은 격앙된 표정으로 나왔다가 최 회장과 함께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혼자 낯선 건물을 떠돌기만 하지는 않았다.
나를 방으로 초대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걸 걸어 놓고 계시네요.”
벽면을 장식한 그림은 새빨간 물감으로 덮인 캔버스화였다.
어머니의 응접실에 걸려 있던 그림과 비슷했다.
예전에 어머니가 그린 그림이다.
“에너지가 있어. 계속 그렸으면 좋았을 텐데.”
내 뒤에서 박연이가 말을 받았다.
별장에 있는 박연이 명예회장의 독실은 한옥으로 된 집 표면과 달리 현대적이었다. 몇 개의 가구로만 이루어진 방에서 커다란 유화는 단연 눈에 띄었다.
“백 대표가 질색하지?”
박연이는 내 옆에 서서 어머니의 그림을 보았다.
“……취미로는 괜찮다고 하세요.”
큰아버지의 전폭적 지원 아래 갤러리를 확장한 큰어머니와 달리, 어머니는 미술을 그만뒀다. 아버지의 요구였다.
“아깝게 됐지.”
박연이가 그림 앞을 떠나 아일랜드 식탁 위의 포트를 만졌다.
“차 마시니?”
“네. 감사합니다.”
“화학 지분은 민서가 백 대표랑 얘기 끝났다던데.”
내 의붓어머니 이름이었다. 주민서. 교육재단 이사장의 둘째 딸이자, 지금은 대표님 아내라는 호칭만으로 모든 정체성이 정리되는 사람.
“어찌 됐든지 두 집안이 계속 같이 가게 됐으니 좋은 일이지.”
유민이와 최의현의 약혼도 박연이의 주선이었다.
어머니가 유민이의 약혼을 받아들인 건 놀랍지 않다.
하지만 나와 최사헌의 약혼을 용납한 건 놀라웠다. 일을 추진한다면 아버지가 할 거라 생각했다.
“아까는 놀랐겠어.”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찻잔이 내 앞에 놓였다. 차 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긴장 탓이다.
“의현이도 아직 참, 철이 없어.”
“그러게요.”
저따위 몰지각한 행동을 단지 철이 없다고 표현해 줄 가족들 사이에서 자란 덕분이 아닐까 싶지만.
어차피 저쪽도 모르고 하는 얘기는 아닐 거다.
서로 흠을 덮어 주기도 하는 게 가족 아니겠나.
“병원은 가 봤는지 모르겠다.”
나는 데인 혀를 입천장에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직접 방문은 안 했습니다.”
“예약 잡아 둘 테니 조만간 가 봐. 회장님이 궁금해하신다.”
“네, 그럴게요.”
“네가 먼저 연락했을 때는 놀랐는데.”
임신 사실을 속이기로 마음먹고 내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박연이였다.
“사헌이가 널 고른 이유가 있겠지. 걘 의현이하곤 달라. 보는 눈이 있어.”
누가 봐도 최문혁에게 힘을 실어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자, 내 의붓어머니 주민서에게 우호적인 상대.
박연이는 한때 화가로서의 주민서를 후원하던 사람이었다. 유민이를 범운의 후계자가 될 최의현과 이어 주려 한 것도 어머니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유민이 장례에도 많이 손을 거들었다고 들었다. 유민이가 잘못된 일에 죄책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걸까. 박연이는 내게 무르게 굴었다.
큰 그림을 봐야 한다.
소거법으로 최사헌 주변 인물을 헤아리다 보면 최사헌의 어린 시절을 누가 그토록 열심히 조작하며 짜 맞췄을지 예상이 갔다.
가족이라면, 가끔은 서로의 흠결을 덮어 주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혹시 회장님이 알면 뭐라고 하실까요.”
“그런 일은 일어나면 안 되지.”
박연이의 홑꺼풀 눈이 가느다랗게 찢어졌다.
“회장님은 워낙에 젊어서부터 대쪽 같은 분이야.”
이 집 식구들이 최종필 회장에 관해서 하는 얘기들은 한결같았다. 의전을 좋아하고, 혈연에 집착하고, 남들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싶어 하는 늙은 폭군이다.
자존심이 상하면 나 정도는 박살 낼 수 있는 위인이었다.
“똑똑한 애니까 잘 알아들을 거라 믿는다.”
박연이가 내 잔에 차를 더 따라 주었다. 나는 유순하게 찻잔을 감싸 쥐었다.
박연이는 내가 최종필 회장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털어놓는 건 나름의 도박이었다. 그리고, 도박은 성공했다.
어머니와 죽은 동생을 봐서. 대신 어디까지나 조력까지만.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우리 둘 다 암묵적으로 합의한 내용이었다.
혹시 최종필 회장에게 들키더라도 박연이나 최사헌은 몰랐던 일이어야 한다.
붉게 우러난 차가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썼다.
임신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이 거래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내 생존 관문이었다.
나는 내가 고른 벼랑 끝에 서 있었다.
* * *
주사기와 앰플이 세면대로 떨어졌다.
나는 급하게 앰플을 주워 들었다. 투명한 액체가 용기 안에서 찰랑였다.
여기까지 들고 오고 싶지는 않았지만 효과를 위해서는 엄격하게 사용 주기를 지켜야 하는 약물이었다.
닫힌 욕실 문을 확인하고 소매를 걷었다. 익숙하게 주사를 놓고 나니 바늘이 들어갔던 곳이 알알했다.
몇 초가 지나 급히 닥쳐오는 어지럼증에 세면대를 짚었다.
가슴이 뻑적지근하게 조였다. 제대로 숨을 쉬려 입을 벌리자 기침이 터졌다.
사용한 주사기와 앰플을 대충 가방에 쑤셔 넣고서 나는 비척거리며 침대로 걸어갔다.
“콜록…….”
목구멍을 타고 열이 훅 치솟으면서 머리가 빙글 돌았다.
쓰러질 것 같아 무릎에 고개를 묻고서 숨을 골랐다.
오한, 발열, 구토감과 감각 이상 정도는 흔한 부작용이라지만 오늘은 특히 심했다.
침대에 앉아 쉬어도 진정이 안 돼 결국은 메슥거리는 속을 달래려 건물 밖으로 나섰다.
찬 공기를 쐬자 구역감은 가라앉는 듯도 싶었으나, 머리뼈 안쪽이 달아오르는 듯한 감각은 흐려지지 않았다.
담배라도 피울 수 있으면 좋겠는데. 괜히 빈 주머니를 뒤적이며 건물 외벽에 기댔다.
이어지는 나무들을 보고 있으니 몹시 낯선 곳에 와 버린 기분이 들었다.
한 번도 와 본 적도, 오려고 생각한 적도 없는 곳.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더라. 아뜩했다.
왜 자꾸 이럴 때 최사헌이 생각날까.
“나와 있네?”
최사헌과 닮은 얼굴이 내 시야를 가렸다.
기습을 당한 동물처럼 근육이 먼저 긴장했다.
나는 느슨했던 등을 펴면서 주변을 먼저 확인했다. 당연하게도 나와 최의현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변 구경이나 하려고.”
“한가롭게 산책? 혼자서?”
“그러면 안 돼? 이제 자주 오게 될지도 모르는데.”
태연한 체하느라 발가락까지 곱아들었다. 최의현에게만은 몸 상태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안 될 거 없지. 근데 이 근처는 다 비슷비슷해서 재밌는 게 없어.”
주변으로 고개를 돌리며 최의현이 구두 앞코로 바닥을 쳤다.
사방에는 풀과 나무, 호수뿐이었다.
“보트 안 탈래?”
최의현이 방수천을 걷어 낸 보트를 가리켰다.
드넓게 이어지는 호수의 수면은 고요했다. 건너편 기슭은 산이었다.
“목적이 뭔데?”
설마 내가 덥석 가겠다고 나설 거라 생각지는 않았을 테고. 무슨 의도일까.
“폭행, 강간, 살해. 초대하는 목적이 셋 중에 뭔지 알려 주라.”
“너무하네? 남의 호의를?”
“네 호의는 그런 거잖아. 좋아하면 강간하고, 거슬리면 때리고.”
떨어져 나가 주기를 바라면서 있는 대로 날을 세우자 최의현의 입가가 실룩였다.
“배 속에 애 없는 거 다 까발리기 전에 나와.”
박연이에 이어 최의현까지.
순서를 바꿔서 공격했다면 타격이 있었을지도 모르건만 최의현은 타이밍이 나빴다.
떠보는 거라면 상대할 이유가 없었다. 대단한 약점이라도 잡은 듯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
“그게 협박이야? 진짜 재미없다, 최의현. 할 말 끝났으면 난 이만 들어갈게.”
“백유민.”
최의현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폭탄의 기폭 장치를 누르듯이.
“그날 백유민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 궁금해? 왜 나만 전시장으로 갔는지?”
휘말리면 안 된다.
그러나 나는 이미 물결치는 호수의 뱃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이 90도쯤 기울어지다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멀미가 일었다.
“네가 어떻게 내 앞에서 유민이 이름을 꺼내?”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차곡차곡 쌓던 계획을 밀쳐 넘어뜨리고 최의현을 호수에 처박아, 몸부림치며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타. 어차피 백유민 얘기는 둘이 있을 때나 할 수 있잖아.”
우습게도 맞는 얘기였다. 세상천지에 유민이에 관해 내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최의현 하나였다.
최의현과 다시 만날 무렵의 유민이는 나와 거의 만나지 않았다. 오직 최의현만이 그 시기의 유민이를 알고 있다.
“네 얘기를 했었어.”
“유민이가?”
“그래, 그날.”
“네가 지어낸 헛소리나 지껄일지 어떻게 알아.”
“내가 왜 그러겠어? 너도 알잖아, 유성아. 난 거짓말은 안 해.”
“…….”
“여기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른들은 안에 계시고, 주변은 죄다 별장 부지인데,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너라면…….”
“난 너한테 아무 짓도 못 해.”
못을 박는 어조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어쩌면 최의현은 자신이 정말로 내게 아무 해도 끼치지 못한다고 믿는지도 몰랐다.
자기가 나를 아낀다는 우스운 착각 중인지도.
“대화가 하고 싶은 것뿐이야.”
최의현이 내게 손을 뻗었다. 배를 뒤집고 죽은 물고기의 몸체처럼 흰 보트가 흔들렸다.
저녁노을을 머금은 호수가 불길하게 출렁인다. 곧 어둠이 날짐승처럼 닥쳐올 거다. 해가 짧아지는 계절이었다.
나는 불구덩이처럼 보이는 호수로 발을 디뎠다.
* * *
모터를 켠 보트가 물보라를 튀며 나아간다.
물 위에서 맞는 바람은 지상에서와 비교할 수 없이 차가웠다. 외투도 걸치지 않고 나오는 바람에 바람이 불 때마다 온몸이 떨렸다.
최의현 앞에서 벌벌 떨고 싶지 않아 안간힘을 썼으나 떨어지는 체온을 막을 수는 없었다.
호수 한가운데서 최의현이 모터를 껐다.
“추워?”
“…….”
“술이라도 한잔할래?”
보트에 실린 아이스박스를 연 최의현이 맥주병을 흔들었다.
“유민이 얘기나 해.”
나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두개골이 통째로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왜 그날 전시장에 너 혼자만 온 거야. 유민이는 어떻게 하고.”
최의현은 맥주병을 따느라 바빴다. 병따개 없이 세차게 손으로 돌리기만 했는데도 병뚜껑이 맥없이 떨어져 나갔다.
그 망설임 없이 우악스러운 손길을 보고 있기가 힘겨웠다.
“유민이가 왜 다시 약에 손을 댔어? 분명히 치료센터 들어가면서 끊었다고 했어. 가지고 있던 것도 내가 보는 앞에서 다 버렸다고. 언제부터 다시 했어? 넌 알고 있었어?”
단번에 이렇게 많이 말해서는 안 되는데. 이래서는 약점을 드러내는 거나 다름없는데. 생각과 달리 입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열 때문인지도 모른다. 머릿속의 조종석이 넘어가 버린 느낌이었다. 약 기운이 내 몸을 지휘했다.
“알면서 내버려 뒀어? 그날 유민이 전화는 왜 안 받았어.”
이미 질문이 아니라 힐난이었다. 열을 내는 나를 앞에 두고 최의현은 느물느물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최의현, 말해.”
다그침을 들으며 맥주를 목에 쏟아부은 최의현이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벌써 알코올 냄새가 났다.
“그날 백유민하고 헤어졌었어. 그래서 혼자서 간 거야.”
“헤어져……?”
“백유민이 자기하고 왜 만나는 거냐고 물어보길래 알려 줬거든. 네가 부탁해서 그런 거라고.”
최의현의 얘기에 무너졌을 유민이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나는 최의현이 유민이에게 어떤 식으로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얼마나 유민이를 비참하게 하곤 했는지.
“그 얘기를, 했어? 왜?”
“사실이잖아?”
최의현은 계속해 맥주를 마셨다. 병째로 들이켜느라 목을 젖히고도 시선은 내게로 향한 채였다.
“물어보길래 대답해 준 거야. 다 너 때문이었다고.”
나 때문이라고.
고백하건대, 장례 이후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유민이의 이목구비가 흐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최의현의 얘기를 들은 유민이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는 생생히 떠올랐다.
유민이가 슬퍼할 때의 얼굴만큼은 이토록 분명히 기억난다.
“넌 네가 백유민을 위해서 희생했다고 생각하지. 헌신이라고 생각하지?”
최의현이 내게로 붙어 앉았다. 무게중심을 따라 보트가 흔들렸다.
맥주 냄새가 비릿하게 끼쳤다.
“근데 결국 너를 위해서 그런 거야, 너는.”
최의현의 목소리는 멀리서 메아리치는 것처럼 들렸다.
귀가 웅웅 울린다.
“백유민한테 잘하는 것 말고는 네가 그 집구석에서 살아남을 방법이 없으니까.”
호수는 잔잔한데 왜 사위가 흔들리는 것만 같을까. 파도가 일어 보트를 뒤집어 버리는 광경이 계속해 떠올랐다.
왈칵 멀미가 일어 뱃전을 세게 쥐었다. 어느덧 젖어 있던 손가락 사이로 시린 바람이 파고들었다.
“날 이용한 것처럼 최사헌도 이용하는 거잖아.”
최사헌의 이름이 나오자 고개가 저절로 들렸다. 거슬리는 소음이 난다 했더니 내가 이를 부딪치는 소리였다.
“너 같은 인간을 누가 좋아해 줄 것 같아. 나 말고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최의현의 말보다 견디기 힘든 건 최의현이 맞다고 속삭이는 내 머릿속의 목소리였다.
나도 알고 있다.
내가 얼마나 비뚤어지고 텅 빈 인간인지.
“나 때문에 백유민이 죽었다고 생각해? 사실은 아니지? 백유성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최의현이 두 개로 나뉘어 보였다. 입을 다물고 있는 것 같은데도 말소리가 들린다.
정말 최의현이 하는 말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앞에 있는 건 최의현이 아니라 최의현의 거죽을 뒤집어쓴 악마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혹은.
“너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최의현의 얼굴은 이제 나로 보였다.
쪼개진 형상이 흔들릴 때마다 최의현의 얼굴이 백유성으로, 다시 최의현으로, 제멋대로 바뀐다.
“사실은, 백유민은 너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지?”
“닥쳐. 죽여 버리기 전에.”
악다문 잇새로 겨우 소리가 나왔다. 협박치고 볼썽사나웠다.
“죽이긴 뭘 죽여.”
최의현이 비식비식 웃음을 흘렸다.
“죽이고 싶은 건 내가 아니라 너 아니야?”
주변의 나무를 모조리 흔드는 바람이 호수를 지나갔다. 나뭇잎이 부대끼는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들린다.
생각하기 전에 팔이 먼저 움직였다. 최의현의 목을 조르려 했지만 저지당했다.
최의현이 내 양팔을 붙잡았다. 몸싸움을 벌이느라 보트가 흔들렸다.
“최사헌이 왜 널 받아 줬는지 몰라도, 그 인간한테 기대하지 마.”
나를 보트 바닥에 잡아 누르며 최의현이 지껄였다. 보트와 함께 요동치는 오감은 최사헌이라는 이름만 겨우 잡아냈다.
팔을 빼내려 애써도 손등만 긁혔다. 안압이 올라 눈알이 빠질 듯 뻐근했다.
이 복수심이 얼마나 비열하고 절박한 것인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목표라도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으니까.
“최사헌이 너를 좋아해 주기라도 할 것 같아? 너처럼 끔찍한 인간이 다른 사람한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아?”
스위치를 껐다 켜듯 최의현의 얼굴로, 내 얼굴로 바뀌어 가던 눈앞의 형상은 이제 유민이로 보였다.
흐리멍덩한 이목구비는 물감이 녹아내린 유화 같았다. 유민이의 얼굴이 일그러져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그 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매캐한 냄새가 났다. 사고가 났던 날 맡았던 기름의 냄새였다.
“살인자는 너야, 백유성.”
황혼이 내게로 쏟아졌다.
거꾸로 뒤집힌 호숫물처럼, 하늘이 액체처럼 쏟아져 내려 내게 달라붙었다.
철퍽, 철퍽.
핏덩이 같은 하늘이 떨어져 사방에서 으깨진다.
나는 물 위에서 익사하는 중이었다.
* * *
호수 가운데에 멈춰 선 보트에 두 그림자가 얽힌다.
멀리서 보고 있노라면 흡사 조명이 비추는 연극무대처럼 보인다.
사헌은 느티나무에 기대어 보트가 다시 느리게 돌아오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오래도록 서 있느라 전신의 근육이 다 뻣뻣해진 기분이었다.
보트가 선착장에 도달했다. 창백한 낯의 유성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보트가 제대로 멈추기도 전에 유성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금세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면서 유성이 호수 기슭에 발을 디뎠다.
사헌은 금세라도 그를 부축하러 나가려 드는 몸을 억지로 제자리에 붙잡아 두었다.
그사이 넋을 놓고 걷던 유성이 사헌을 발견하고 멈췄다. 유성의 고개가 느리게 들렸다.
느티나무 이파리의 그림자가 유성의 얼굴을 비질한다. 뾰족한 잿빛 음영이 유성의 이목구비에 다닥다닥 눌어붙었다.
곰팡이처럼 핀 그늘이 유성을 뒤덮었다.
사헌은 순간 내장을 훑고 지나가는 싸늘한 한기를 느꼈다.
“일찍 돌아왔네?”
유성의 뒤에서 최의현이 손을 흔들었다.
유성은 알맹이가 빠져나간 껍질처럼 조용했다. 사헌을 올려다보는 눈동자에는 황혼 속 붉은 구름이 징그럽게 뭉쳐서 흘러갔다.
호수는 잠잠했다. 바람도 불지 않는 호숫가는 누군가 그려 놓은 풍경화 같았다.
* * *
방으로 데려오고 나서도 유성은 계속 넋이 나가 보였다.
정신이 다른 데 가 있다는 표현이 꼭 맞아떨어진다.
언제나 자신의 동생이나 최의현 따위에 얼마쯤 혼이 팔려 있는 사람이긴 했지만, 지금은 아닌 척할 여유도 없는 모양이었다.
“물가를 이 차림으로 다녔습니까.”
끝내 사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파에 어정쩡하게 앉아 있던 유성이 뒤늦게 반응했다. 덧옷도 걸치지 않은 얇은 옷차림이 전부였다.
“오래 나가 있을 생각이 아니었어요.”
중얼거리며 소맷자락만 만지작대는 모습이 추워 보인다.
너무 춥다고, 제 침대에서 이불을 감싸고도 덜덜 떨던 그날 새벽녘의 모습이 겹쳤다.
“잘 바래다 드렸어요?”
다음에 올 말을 한참 궁리하는 듯하던 유성이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다.
“예.”
대답은 냉랭하리만치 간단했다. 장단 맞춰 줄 기분이 아니었다.
사헌이 담요처럼 쓰는 숄을 가져와 유성의 어깨에 둘렀다. 손부터 발까지 꽁꽁 얼어 끄트머리가 죄다 발갰다.
“왜 안 물어봐요?”
모아 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유성이 중얼거렸다.
“뭘 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 물어봐요?”
“물어보면 대답은 할 겁니까?”
유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예상한 결과였다.
“최의현 얘기만 나와도 숨이 넘어가는 사람한테 뭘 물어보겠습니까.”
불쾌한 심사를 끝내 숨길 수가 없었다. 어디서 흠씬 두들겨 맞고 오기라도 한 듯 넋이 나간 모습을 보다 보니 화가 치밀었다.
“……화났어요?”
“예.”
“……많이?”
한껏 소심한 속삭임에 사헌이 눈살을 찌푸렸다. 또 수작이라고 생각했건만 유성은 정말로 무서워하는 얼굴이었다.
화났다는 대답을 들으면 우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풀이 꺾인 낯을 보노라면 하루 내도록 위장이 타도록 끓던 분노가 절로 그 기세를 늦췄다.
내가 백유성한테 빌어먹게 약하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사헌은 자신을 비웃었다.
“돌아가서 얘기하죠. 어른들 계시는 데서 말고.”
숄을 마저 여며 주고 돌아서는 사헌을 유성이 붙잡았다.
“왜.”
제 폴로 티셔츠의 옷자락을 쥔 유성의 손을 보며 사헌이 멈춰 섰다. 이대로 한 발이라도 내디디면 금세 떨어져 나갈 손길이었으나 사헌은 이번에도 붙잡히고 만다.
“식사까지 아직 시간 있잖아요.”
더 옷자락을 당겨도 사헌이 숙여 주지 않자 유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거리가 가까워졌다. 오메가 페로몬의 달착지근한 향기가 그나마 남아 있는 둘의 틈새를 메운다.
그 말뜻을 알아차린 사헌이 유성의 어깨를 부드럽게 밀었다.
“우리가 발정 난 개들도 아니고…….”
“나는 맞는데요.”
유성이 사헌의 목에 입술을 붙이며 소곤거렸다.
“발정 난 개.”
보드라운 입술이 목울대 바로 밑에서 움직인다. 난봉꾼을 자처하며 유성이 더욱 밀착했다. 맞붙은 가슴에서 심장 박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얇은 옷은 아래의 몸 선을 쉽게 드러냈다. 살결에서 미치도록 좋은 냄새가 난다.
“당신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올 때마다 기가 차. 알아?”
날을 세우고 말하면서도 사헌은 유성의 어깨에 얹힌 손을 더 아래로 내리고 만다.
“더 못 견디겠는 건 내가 이 수작질에 꼭 넘어간다는 사실이야.”
분명 육탄전은 그만두자고 충고했던 것 같은데. 유성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하긴, 필승패를 쥐고 있는데 상대가 말린다고 쓰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예외 없이.”
으르렁거리며, 사헌이 유성을 끌어당겼다.
품으로 끌려들어 가는 유성의 눈이 반짝였다. 즐거워 보인다. 사헌이 유성의 귓가에 입 맞췄다. 속에서 불꽃이 일었다.
백유성에게 있어 최사헌을 흥분시키는 건 한없이 쉬운 일로만 보였다.
그저 눈짓 한 번, 끌어당기는 손길 한 번이면 온몸이 달아올랐다. 발정 난 개는 누가 보나 사헌이었다.
당장 침대로 엎어질 듯 뒤엉키던 육신이 갑자기 멈췄다. 유성이 욕정으로 탁해진 눈동자를 의아한 듯 깜빡였다.
어머니가 차에서 말했듯, 그리고 모두가 사헌에게 한마디씩 속삭였듯이, 백유성은 지독한 미인이었고 그래서 유독했다.
“백유성 씨, 솔직하게 말해 봐요.”
“응?”
대답하는 틈에도 감겨 오는 유성의 체온은 뜨거웠다. 너무도 뜨거워서, 사헌은 빠르게 이상을 눈치챘다.
“아파요?”
잠깐 시간을 끌던 유성이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 일색이다. 열이 이렇게 나는데 아프지 않다니. 지금 제 몸 상태가 가늠도 안 되는 건지.
이 와중에도 오메가 페로몬의 진득거리는 단내가 괴로웠다. 깊이 공기를 들이마신 사헌이 입 안의 살을 씹었다.
당장 이 여린 몸을 열고 쑤셔 박는 상상이 치밀었다. 이전에 했듯이. 더는 목이 마르지 않을 때까지.
진짜 짐승이라도 된 기분이다. 자괴감을 억누르며 사헌이 유성에게서 몸을 떼어 냈다.
“몸 상태 안 좋아서 저녁 같이 못 한다고 얘기하고 올 테니까 누워 있어요.”
“안 아프다니까.”
“지금 온몸이 불덩이야, 당신.”
“괜찮아요. 그보다…….”
“괜찮다는 말 좀 그만해.”
단호히 끊어 내자 유성은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사헌을 보았다.
어쩐지 그 망연한 시선을 견딜 수 없어 사헌이 거칠게 옷을 추슬렀다.
“욕실 씁니다.”
욕실 문을 닫고 나자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오려 했다. 숨어서 손으로 가라앉혀야 할 판이었다.
손바닥에 남은 유성의 열기가 사헌을 몰아붙였다. 아마 백유성은, 단순히 앓고 있는 게 아니다.
지금 유성의 증상을 보면 떠오르는 게 있다.
다 자란 오메가가 저렇게까지 형질이 날뛰는 일은, 인위적으로 형질을 건드릴 때나 벌어진다.
신경이 예리하게 돋아난다. 대체 뒤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눈에 닿지 않는 데서 또 무슨 무모한 짓을.
집중해야 하는데. 흥분이 생각을 자꾸 뭉갰다. 뭘 했다고. 고작 끌어안고 살 냄새를 조금 맡았을 뿐이건만 바지가 불편할 정도로 발기했다.
환장할 노릇이다. 그렇다고 이 꼴로 회장님 내외 앞에 나갈 수도 없으니.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리는 금속성의 소음이 이어졌다. 손바닥을 넓게 펴 흔들면서 사헌은 유성을 생각했다.
하얗고 달콤한 살갗. 물기를 머금어 촉촉한 눈매. 말랑한 입술과 혀.
그처럼 유독한 인간에게 사로잡히는 것만큼 어리석은 선택은 없을 테지만, 사헌은 계속 생각했다. 백유성을.
이미 불가피해진 욕망이었다. 교통사고를 골라서 당하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악운을 지나칠 수 있다면 누구나 회피하고자 하겠으나 마음대로 피할 수 있다면 사고가 아닐 것이다.
벌어진 허벅지 안쪽의 살이 붉게 물들어 있던 광경을 떠올린다. 울음기를 섞어, 최사헌 씨, 라고 부르던 목소리.
사헌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관자놀이를 지나는 핏줄이 팔딱거렸다.
비린 내음이 욕실에 감돌았다. 사헌이 숨을 골랐다.
잠시 후 세면대에서 손을 씻던 사헌의 시선이 무심코 욕실 한 귀퉁이로 향했다.
거기에는 유성이 가져온 가방이 놓여 있었다.
미처 다 잠기지 않은 지퍼 안쪽에 무언가 반짝였다.
가방을 연 사헌이 헛헛한 웃음을 터뜨렸다.
유독 진하게 맡아지던 달콤한 페로몬의 정체를 이제 알겠다.
주사기를 확인한 사헌의 잇새로 뭉개진 욕설이 살벌하게 흘러나왔다.
* * *
다들 식당에 계신다는 안내를 받고 별장 식당으로 향했건만,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최종필 회장의 옆에 앉은 박연이가 사헌에게 눈짓했다. 빈자리를 보아하니 문혁이 빠져 있었다.
사헌이 낮게 침음했다. 어떻게 됐는지 짐작이 갔다.
어머니가 받은 수모에 화를 내던 아버지가 열을 내다 자리를 떴으리라.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타이밍이 안 좋았다. 이미 문혁이 박차고 나가는 바람에 최 회장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유성 씨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저녁 식사는 저만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말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헌이 이미 식탁에 앉아 있던 최 회장의 맞은편에 섰다.
진줏빛 테이블보를 두른 직사각형의 흑단 식탁은 왕의 좌우로 늘어선 신하들을 연상시켰다. 최 회장이 앉아 있는 자리만 봐도 그랬다.
“어른들 처음 뵙는 자리에서 아프다고 쏙 빠지는 건 어디서 배워 먹은 버르장머리냐?”
최 회장이 곧장 불퉁하게 성을 냈다.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니고, 식사는 또 할 수 있잖습니까.”
“저 하나 소개하자고 바쁜 사람들 둘러앉혔는데 빠지는 게 말이 돼?”
“사헌아, 얘. 일단 앉아서 얘기해.”
언성이 높아지자 박연이가 사헌을 만류했다. 사헌은 앉지 않았다. 조모의 충고대로 앉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세를 낮추지 않고 최 회장을 내려 보았다.
“그러면 환자 앉혀 놓고 식사해야 만족하시겠어요?”
말대꾸가 두 번을 넘어서자 최 회장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사헌 씨, 할아버님한테 그게 무슨 말이에요.”
금세라도 폭발할 듯 팽팽한 분위기에, 갑자기 식당에 나타난 유성은 어느덧 옷을 갈아입고 태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직도 안색이 백지장 같은데 웃는 얼굴만은 감쪽같다. 누워 있으라고 했더니 기어이. 사헌이 불만을 삼켰다.
“초기라서…… 사헌 씨가 걱정을 과하게 했나 본데, 괜찮습니다.”
유성이 배를 감싸며 말하자 최 회장의 표정이 비로소 누그러졌다.
“조심해야 할 때기는 하지. 정말 괜찮은 게야? 너 먹인다고 우리 주방장이 신경 많이 썼다.”
아직 음식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최 회장은 벌써 유세였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렇게 불러 주시고, 소개해 주시는 것도요.”
자리에 앉으며 유성은 듣기 좋은 말로만 떠들었다.
“이렇게 마음 써 주시는 증조할아버지를 둬서 태어날 애도 기뻐할 것 같아요. 나중에 말해 줘야겠네.”
사정을 아는 입장에서 듣기에는 실소가 나오는 소리였다.
“앉아요, 사헌 씨.”
아직도 선 채인 사헌을 향해 유성이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식사해야죠.”
활짝 웃는 유성을 보면서 사헌이 의자에 앉았다. 기분과 달리 몸에 밴 습관을 따르듯이 동작은 자연스러웠다.
길쭉한 원목 식탁을 사이에 두고 모두가 완벽한 모습으로 둘러앉아 있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불편함을 느끼며 사헌이 시선을 내렸다. 식탁 아래 숨긴 유성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 * *
“토할 것 같아요?”
사헌이 유성을 부축한 채로 현관문을 열었다. 어깨에 닿은 유성의 이마가 뜨겁다.
식사 중에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잘도 대답하더니, 별장을 나선 후부터 유성은 맥을 못 췄다. 태연한 체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다 쓴 사람처럼, 돌아오는 차에서도 죽은 듯 늘어져 있기만 했다.
“잠깐만 쉬면 돼요. 집에 오니까 괜찮아진 것 같……아.”
크게 휘청거리는 유성을 사헌이 다시 붙잡았다. 급하게 벗어 던진 구두가 현관에 흐트러졌다.
유성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투로 둔하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이마에 식은땀이 축축했다.
“의사 부르죠.”
“……아니요.”
늘어진 채로 사헌의 팔에 기대 있던 유성이 그를 밀어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쉬면 나아져요.”
여전히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거실로 위태롭게 걸어가는 유성을 사헌이 뒤따랐다.
소파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은 유성이 사헌을 보았다. 사헌은 일어선 채로 유성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약이에요.”
“…….”
사헌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유성이 눈을 굴렸다.
사헌이 들고 있던 유성의 가방을 거실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입구를 열고 가방을 기울이자 안에 든 물건이 쏟아져 나왔다.
“이거.”
비어 있는 앰플 껍데기를 꺼내 보여 주자 유성이 입술을 축였다. 마른 입술에 거스러미가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어떤 약인지 말해요. 의사 부르기 전에 미리 알아야 입 막기도 쉬우니까.”
변명거리를 찾듯이 유성의 입술이 벙긋거렸다. 뭍에 나와 산소가 부족한 물고기 같기도 했다.
“말해. 숨기려고 드는 거 모르는 척해 주기도 질렸어.”
“비타민 같은 거라고 해서 그냥, 딱 한 번……. 그게 다예요.”
“그만.”
사헌이 유성의 말을 잘랐다. 평소보다 가라앉은 음성은 그 자체로 위협적이었다.
“도대체 왜 나한테까지 거짓말을 합니까?”
“최사헌 씨가 뭔데요?”
따지기보다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힘이 없는 어조라 더 열이 치받았다.
왜 화가 나는지도 모르면서, 혹은 화가 나는 이유를 애써 무시하면서 사헌이 거실을 빠져나갔다.
“뭐 해요?”
“나머지 약 찾습니다.”
안 찾으면 앞에서는 속이고 뒤에서는 뭔지도 모를 약이나 쓰다 또 쓰러질 것 같아서. 사헌이 나머지 말을 어금니로 으깼다.
말릴 힘도 없는지 유성은 따라오지 않았다.
침실 문을 열어젖힌 사헌은 서랍이란 서랍은 모조리 열었다. 이불을 치우고 매트리스까지 끌어내는 사헌의 팔에 근육이 곤두섰다.
주로 쓰는 침실부터 캐비닛 하나 두지 않은 작은 방들까지, 미친 사람처럼 온 집을 뒤집어엎었는데도 나온 거라곤 잡기 몇이 전부였다.
집에는 가구도, 물건도 많지 않았다. 오피스텔의 짐을 어디로 뺐는지 몰라도 유성은 이 집에 짐이라고 할 만한 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사헌이 드레스룸의 슬라이드 도어를 열었다. 걸려 있는 옷들은 가지런했고 모든 것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무리 크지 않은 상자라 해도 이렇게 감쪽같이 숨기는 게 가능한가 싶을 지경이었다. 집이 아니라 다른 데 두지 않고서야…….
걸린 옷을 한쪽으로 밀어젖히던 사헌이 순간 멈췄다.
깨달음이 머릿속을 밝혔다.
사헌이 거실로 돌아가 소파에 걸터앉아 있는 유성을 지나쳤다.
거실의 가운데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의 뚜껑은 잘 닫혀 있었다.
피아노 뚜껑을 열자 유성이 흠칫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헌의 시선이 뚜껑으로 감춰져 있던 피아노 프레임에 내리꽂혔다.
납작한 상자가 프레임 위에 놓여 있다.
사헌이 새틴으로 감싸인 상자를 열었다.
투명한 앰플과 주사기 자리가 눈에 띈다. 안에 일렬로 놓인 앰플은 이미 서너 개가 비어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속이고 있었던 건지. 사헌이 상자를 닫고 거실을 가로질렀다.
쓰레기통에 상자를 처박으려던 사헌이 옆을 돌아봤다. 손이 잡힌 탓이었다.
“그러지 마요. 어렵게 구했는데.”
사헌의 손목을 양손으로 감싸며 유성이 속삭였다.
사헌의 손가락 마디가 구부러지면서 새틴 상자가 귀퉁이부터 우그러졌다. 화를 쏟아 내지 않으려 애쓰느라 내장이 지글지글 끓었다.
“형질 변환용 약물이에요.”
유성이 나지막하게 털어놓았다.
“……뭐라고?”
“베타가 오메가가 되려고 할 때 쓰는 약이요.”
구태여 풀어 말해 주는 건 대답을 피하고 싶어 하는 짓이었다. 이제는 사헌도 유성에 관해 어지간히 알아 가는 중이었다.
구겨진 상자를 소파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사헌이 유성과 마주 섰다.
“오메가잖아요.”
“오메가 변환용 약물 투약 시기의 부작용은 발열, 두통, 잦고 갑작스러운 히트 사이클…… 수정 확률의 증가도 있고요.”
차례로 나오던 부작용 목록의 마지막에 이르자 사헌의 인상이 구겨졌다.
“임신 때문에 썼다는 겁니까.”
“네.”
“겨우 그것 때문에 영영 몸이 망가질 수도 있는 짓을 했다고요.”
사헌이 유성에게 팔을 뻗었다. 당장 유성을 낚아챌 듯 올라간 손이 우뚝 멈추더니 지그시 주먹을 말아 쥐었다.
“대체 뭡니까, 당신.”
지금 손대면 지나치게 세게 움켜 버릴 것 같았다. 유성은 스치지도 않고 떨어진 사헌의 손길을 불안하게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생각이냐고 물었어.”
사헌의 음성은 음산하도록 낮았다. 내뱉는 음절마다 한계라고 써 붙인 것같이. 유성이 흠칫, 떨었다.
“……으니까.”
너무 조그마해서 제대로 들리지 않는 대답이었다.
“상관없으니까.”
아주 느리게 유성이 다시 사헌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볼이 흠뻑 젖어 있었다.
“나도……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어.”
유성이 주춤거리며 사헌에게서 물러났다.
“최의현한테 왜 집착하냐고 했죠. 말 못 해요. 당신한테는 말 못 해요……. 왜냐면…….”
뒷걸음질 치던 유성의 등에 피아노가 걸렸다. 순간 얻어맞기라도 한 양 유성이 상체를 움츠렸다.
“당신한테는 미움받기 싫어…….”
조율이 잘못되어 덜걱대는 피아노 건반이 내는 소리 같았다.
일순 사헌은 유성이 깨져 있다고 생각했다. 금이 간 악기가 제대로 된 소리를 내지 못하듯이.
“내가, 유민이한테 무,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되면, 당신도, 나를 싫어하게 될 거야.”
띄엄띄엄 이어지던 말이 급작스레 빨라졌다. 들이켠 숨이 문장 아무 곳에서나 뱉어져 나왔다.
급하게 숨을 마시면서도 유성은 산소가 모자란 듯 헉헉댔다. 둥글게 굽은 상체가 들썩였다.
“백유성.”
사헌이 유성의 얼굴을 확인했다. 사헌을 쳐다보는 유성의 눈은 초점이 흐렸다. 텅 빈 갈색 눈동자가 가물가물하게 무너졌다.
과호흡 증세다. 사헌이 유성의 입술에 입술을 붙였다.
이어진 입술 틈으로 숨이 오간다. 무분별하게 쏟아져 나오는 숨을 빨아 마시자 유성이 사헌의 가슴에 올린 손을 꼭 말아 쥐었다.
“나만 없었으면 돼.”
눈을 감고서 유성이 중얼거렸다.
물기조차 걷혀 나가 퍼석거리는 음성이었다.
견디지 못하고, 사헌이 유성을 끌어안았다.
아플 정도로 힘껏 끌어안긴 채 유성은 크게 숨을 쉬었다. 열로 인해 팽창하는 유리처럼 등이 부푼다.
유성은 금세라도 부서져 나갈 것 같았다. 금이 간 곳부터 터져 나가면서 원형조차 남지 않게 될 것만 같았다.
결혼하겠다는 대답과 함께 유성의 손을 붙잡았던 날 예감했던 것처럼.
“백유성 씨.”
“…….”
“망가지지 말아요.”
어찌할 수 없이,
사헌은 깨닫는다.
실수라고 여기면서도 거듭 이 손을 잡고야 말았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시작점은 어디였을까. 그늘에 숨어 담뱃불을 댕기던 모습이 유난히 눈에 박히던 게 문제였을까.
필사적이면서도 서툰 모습들이 마음을 움직였나. 그리고 유성이 드물게 평온한 모습을 보이곤 할 때. 사헌은 유성의 풀어진 입매나 긴장을 잃고 느슨히 떨어지는 어깨의 모양 따위가 좋았다.
언제까지고 바라보고 싶었다.
“이미 망가졌으면?”
사헌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유성에게서 자그마한 소곤거림이 샜다.
“안 그래, 당신.”
사헌이 유성의 머리카락 사이에 입술을 묻었다.
이어서, 사헌은 습관 같은 복기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도 깨닫는다. 패배의 요인을 알아보아야 무엇 할 것인가.
이미 승부는 났다.
유성을 떨쳐 내기란 불가능했다.
저 망령 같은 피아노가 기어이 한국까지 따라와 지금 사헌의 옆에 있듯이. 최사헌은 마음에 박힌 것들을 도무지 거둬 낼 줄 몰랐다.
사헌이 유성의 등을 쓸어내렸다.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계속해서.
사헌의 가슴에 이마를 묻고서 유성이 흐느낌처럼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 유성은 사헌의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터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