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소야곡 Serenade (5/8)

5. 소야곡 Serenade

노리쇠가 회전하며 약실을 잠근다.

장전이 끝나자 의현이 한쪽 눈을 감고 소총에 달린 가늠자에 시선을 집중했다.

선수용 공기소총처럼 라이플 손잡이는 주인에 맞추어 깎여 있었다. 의현이 방아쇠를 당겼다.

격발음이 터졌다.

탄환에 맞으면서 표적으로 세워져 있던 판자가 아래로 떨어졌다.

“씨발! 똑바로 세우라고 했지.”

의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격장 옆에서 대기 중이던 고용인이 죄송하다고 외쳤지만 의현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의현이 머무르고 있는 사격장은 본래도 의현이 수시로 전세를 내던 곳이었다.

“뭐야.”

다른 손님은 들어올 수 없어야 하건만, 입구에서 등장한 불청객을 보며 의현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올 거면 오신다고 말을 하지. 몇 발 쏘러 오셨어요? 같이 하실래요?”

“언제까지 이럴 거니.”

문경이 의현을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

청평호 별장에 다녀온 후 의현은 제대로 출근도 하지 않았다. 오늘도 사격장에 처박혀 총질만 하고 있다는 소식이 문경의 인내심을 기어이 바닥내 버린 모양이었다.

의현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조준 자세를 잡는 데 집중했다. 이미 쓰러진 표적을 노리느라 총구가 아래로 기울었다.

“걔 정도 되는 애는 많아. 심지어 걔도 알더라.”

방아쇠에 손가락을 거는 찰나 뒤에서 문경이 말을 시작했다.

“넌 할아버지가 골라 주는 애하고 결혼해. 싫으면 저번처럼 약혼이라도. 그러면 네가 사헌이보다 앞서는 거야.”

퍽이나. 의현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연달아 터졌다.

표적이 무너졌는데도 의현의 조준은 한결같았다. 악착같이 떨어진 표적물을 쏘자 나무로 된 판자가 반동으로 덜걱거렸다.

남아 있던 스무 발을 모조리 쏴 판자가 너덜너덜해지도록 구멍을 내고 나서야 의현은 만족스레 저격 자세를 풀었다.

문경은 여전히 같은 곳에 서서 의현을 보고 있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후려치고 싶을 거다.

“난 엄마가 그렇게 나 등신 취급하면서 얘기할 때가 제일 좆같애.”

예나 지금이나 모자란 새끼 취급. 문경이 최의현이 아니라 최사헌을 낳았더라면 사헌도, 문경도 완벽한 삶을 누렸을 테지만, 불행하게도 최문경은 의현을 낳았고 최사헌은 싸구려한테서 태어났다.

인생이란 엿 같은 거다. 의현이 아직도 뜨거운 총신을 어깨에서 내렸다.

“필요해서 낳아 놨으면 책임을 져야지.”

의현은 총에서 손을 떼지 않고서 건들건들하게 문경을 돌아보았다.

“남들은 키워 놨으니까 부모가 자식더러 부양하라고 그런다더라고. 근데 난 내가 우리 최문경 사장님 키운 거나 마찬가지 아니야?”

누구 말마따나 글러 먹은 말본새였다. 문경의 눈매가 일그러지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의현은 끊임없이 지껄였다.

“제발 내가 얌전히 회장님 말 잘 듣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지. 먹으라면 먹고 싸라면 싸면서. 하, 씨. 아줌마. 개를 길러도 그렇게는 안 자라요.”

차라리 개였으면 목줄이라도 매서 가둬 놨을지도. 아직 덜 자란 의현을 다루었던 방식 그대로.

화를 참느라 질린 안색의 문경이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의현이 바닥에 총열을 내렸다. 총기를 다루는 태도가 시종일관 장난스러웠다.

“사고 난 날, 백유민한테 약 내가 줬어.”

의현은 똑같이 천연하고 부주의한 태도로 고백했다.

장전된 총구는 금세라도 폭발할 듯 흙바닥을 향해 함부로 걸쳐져 있었다.

“최의현!”

카랑카랑한 고함이 총성처럼 귀를 찢었다. 시끄럽게. 의현이 아랫입술을 핥았다.

“너, 무슨 생각이야.”

눈을 부릅뜬 문경이 의현의 가슴팍을 검지로 찔렀다.

“말했잖아. 백유성 때문이라니까.”

의현의 심드렁한 대꾸에 문경이 치를 떨었다.

유민의 장례 후 유성과 결혼하겠다던 계획도 본래 문경의 성미대로라면 허용할 리 없었다.

정돈된 손톱이 가슴을 뚫을 듯 찔러 대는데도 의현은 피식거리기만 했다. 우리 최문경 사장님, 어렵게 낳은 아들이 미친놈만 아니었어도 참 완벽한 인생 사실 뻔했는데.

“좀 지나면 어련히 나한테 오겠거니 싶었는데, 나는 죽어라 피해 다니면서 날마다 맞선 자리 드나들기 바쁜 꼴이 보기 싫어서. 백유성 건드리기에는 백유민만 한 게 없으니까. 근데 약 먹고 달리다 죽을 줄은 몰랐지, 나도.”

“이 얘기 또 누가 알아.”

부릅뜬 문경의 눈이 튀어나올 듯했다.

빡치셨네, 우리 사장님. 의현이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김 실장님, 나. 그리고 이제 엄마.”

세 손가락이 펴지고 한동안 멈춰 있던 손에 네 번째 손가락이 더해졌다.

“유성이한테도 얘기할까 생각 중.”

“미쳤어?”

문경이 의현에게로 바싹 다가섰다.

“해신 화학 대표 외자식이었어! 알게 되면 그 집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니?”

외자식이란 물론, 백유민을 가리킨다. 오직 백유민만을.

자식 장사가 몸에 배었으니, 돈 안 되는 인간은 숫자로 치지도 않지. 의현이 총을 들어 올렸다.

총을 든 팔이 크게 움직이자 문경이 주춤했다.

“내가 전에 얘기했지? 백유성만 갖고 나면 얌전히 살 거라고. 하나밖에 없는 자식 날려 버리기 싫으면 엄마도 잘 선택해.”

의현이 공기소총을 한 바퀴 돌렸다. 위험천만한 묘기였다.

“우린 사업파트너잖아.”

처참히 일그러진 문경의 얼굴을 보면서 의현이 유쾌하게 웃었다.

날 리가 없는 화약과 피 냄새가 맡아지는 것만 같았다.

* * *

“오늘 병원에 가기로 했어요.”

거실에 파르스름한 새벽빛이 비쳤다. 동이 트기 전에 출근하는 최사헌을 배웅하려 나도 일찌감치 일어났다.

실은 거의 못 잤다.

눈을 감으면 호수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라 잘 수가 없었다. 유민이가 생각났다.

살아 있는 악몽이 수면의 욕구를 단박에 쫓아 보냈다. 뻑뻑한 눈꺼풀을 깜빡이며 나는 피로에 잠겨 최사헌의 출근 준비를 지켜보았다.

맑은 정신이었더라면 그 추태를 보이고 최사헌 앞에 멀쩡히 있지도 못했을 거다.

“박연이 회장님이 잡아 주신 예약이에요.”

조모의 이름이 나오자 아이와 관련한 일임을 추측했는지 최사헌이 넥타이를 매다 멈췄다.

“연락해서 취소하겠습니다.”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최사헌은 더 토를 달지 않고 침묵했다. 방금 내 말로 인해 박연이가 내 거짓말을 묵인하겠다는 무언의 약속이 오갔으리라는 것도 알았을 거다.

“백유성 씨가 하는 일 중에는 내가 모르는 일이 참 많네요. 내 결혼에 관련된 일인데도.”

“바쁘잖아요. 오늘도 청주 내려간다면서요. 출근 안 해요?”

나는 최사헌의 넥타이를 다시 매 주었다. 최사헌과 잘 어울리는 검푸른 색 넥타이가 단정하게 매듭지어졌다.

넥타이 위에는 지난밤을 비몽사몽으로 보낸 나 못지않게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 있었다. 가라앉은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최사헌은 탄식이 나올 정도로 잘난 인간이었다. 박명이 깃든 이목구비가 신화의 삽화 같다.

“눈 뗀 사이에 무슨 짓을 벌일지 걱정돼서 발길이 떨어져야 말입니다.”

“……아무 짓도 안 해요.”

“약은 내가 폐기하겠습니다.”

최사헌이 어젯밤 찾아낸 상자를 흔들고 가방에 넣었다. 고생하며 손에 넣은 물건이었으나 설득할 기운도 안 생겼다.

지금 최사헌을 보면 내가 말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한 번 구했으니 두 번 못 구할 것도 없다.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을 거라고 약속해요.”

순간 혹시 내가 소리 내서 말했나 싶었다. 최사헌이 눈으로 대답을 채근했다.

“어떤 일이요.”

“나 몰래 혼자서 일 벌이는 짓.”

당신은 모르는 게 나아.

곧바로 그렇게 답해 버릴 뻔했다.

“무슨 일이든, 나한테 상의해요. 알고 있어야 나중에 일이 틀어져도 수습할 거 아닙니까.”

“최사헌 씨가 수습할 일 없게 할게요. 최사헌 씨가 하는 일에 방해는 안 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든 최사헌 씨는 몰랐던 걸로 할 거고.”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답답한 한숨을 들으면서도 나는 계속 최사헌의 의도를 모르는 척했다.

“나한테 지금 필요한 게 뭔 줄 알아요?”

나는 최사헌의 얘기에 응해 주는 대신에 그의 손을 붙잡았다. 넥타이를 매기 전에 벌써 시계를 찬 손이 보기 좋게 크다.

최사헌의 손을 쥐고 만지작거리다 그의 낯빛을 살폈다. 손바닥 안쪽의 오목한 부분을 엄지로 살금살금 문지르자 최사헌의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나가기 전에 잠깐 정도는 시간 낼 수 있잖아요.”

손가락 사이의 무른 살을 더듬으니 손가락이 덫처럼 구부러지면서 내 손을 움켜쥐었다.

나는 맞잡은 손을 입가로 끌어가 입 맞췄다. 볼록하게 도드라진 손등의 뼈마다 보란 듯 입술을 누르자, 최사헌이 짧은 신음을 내며 손을 거둬 갔다.

“아픈 사람 붙잡고 그런 짓은 안 합니다.”

“나한테는 지금 이게 제일 중요해요.”

어제 그토록 한심한 꼴을 내보이고, 출근 직전인 사람한테 섹스를 구걸해야 할 정도로.

“할 수 있으면 해 주세요.”

당장 옷이라도 벗을 듯 내 잠옷 단추에 손을 댔다. 옷깃 사이로 박히는 최사헌의 시선이 느껴졌다.

“정말 나한테 뭔가 해 주고 싶으면, 도와 달라고요. 최사헌 씨 몸으로.”

모욕이 될 수도 있는 말임을 알면서 뱉었다.

어젯밤 최사헌이 건넸던 말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망가지지 말라고. 그렇지만 나는 사실 당신이 위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다. 이 거래가 끝나고 나면 옆에 둘 필요도 없는 인간이었다.

최사헌은 화내지 않았다.

“뭐가 불안한지 알아요. 하지만 만일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이 걱정하는 문제는 없을 겁니다. 무슨 짓을 해서든 이 결혼에 차질 없도록 하겠습니다.”

흐트러짐 없이 나를 직시하면서 최사헌은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못 지킬 말 하는 거 아닙니다.”

모든 말이 약속이었다.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고 나한테 의지해요.”

나는 호되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굳은 채 빠른 숨만 쉬었다.

그렇지만 왜? 당신이 그럴 이유가 없는데.

아이는 최사헌에게도 중요한 협상 카드였다. 그게 아니면 굳이 나하고 결혼할 필요가 없다. 그럴 거라면 최사헌에게 나는 필요가 없었다.

내가 최사헌의 얘기를 의아해할 타당성은 충분했다.

그리고 최사헌의 말은 모든 의문을 무시하고 믿어 버리고 싶을 만큼 달콤했다.

“일 생기면 연락해요.”

조용하기만 한 내게 최사헌이 나직이 말하며 현관으로 갔다.

“보고 싶어도, 해도 되고요.”

문이 열리며 현관이 밝아졌다. 최사헌이 바깥으로 사라지면서 현관은 다시 익숙한 그림자에 잠긴다.

나는 제때 그를 배웅하지 못하고 문이 잠기고 나서야 비로소 문 앞에 섰다.

맨발로 디딘 현관 바닥이 차가웠다. 문에 등을 기대자 극심한 졸음이 나를 끌어내렸다.

살면서 나한테 이렇게 말해 준 사람이 있었나. 닫힌 현관문에 기대앉아서 나는 생의 모든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늘 궁금했다.

나를 지켜 줄 사람이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기꺼이 손을 잡아 주면서도 나의 연약함을 경멸하지 않을 사람이.

눈자위를 손바닥으로 누르자 오색의 점들이 어둠 속에서 반짝이며 점멸했다.

정말이지, 단숨에 믿고만 싶을 정도로 너무 좋아서, 가슴이 아팠다. 최사헌의 손이 내 심장을 직접 붙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좋다. 훗날에 배반당해도 좋으니 지금은 믿고만 싶을 정도로…….

신발장에 붙은 거울이 나를 비추었다. 나는 한순간 거기서 나와 똑같이 웅크려 있는 유민이를 본다.

이제는 더 살아갈 생도 남지 않은 나의 형제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지켜 줘야만 했던 내 동생은.

차라리 눈 감아 버리고 싶었으나 나는 끝내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잠들지 않아도 삶은 악몽이었다.

* * *

깨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역시 현실이 꿈보다 나쁘다.

이것도 최사헌이 수습할 수 있는 일일까.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강렬한 백열등 불빛이 닫힌 눈꺼풀 아래 잔상으로 남아 번뜩였다.

살아남을 궁리를 해야 하는데 나는 또 최사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

병원 직원이 내게 친절히 질문했다.

“예, 괜찮아요.”

병원 VIP 전용 대기실은 쾌적했다. 독실에, 클래식 음악과 다과까지 마련되어 있다.

최사헌이 출근하고 난 후 예정대로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도착했다. 거기까지는 불편할 게 없었다.

여기서 거슬리는 거라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뿐이다.

병원 주차장에서 대기 중이던 김혜령 실장은, 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운전기사에게서 나를 넘겨받았다.

바뀐 건 내 수행원뿐만이 아니었다.

“원장님이 진료 봐 주시기로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어디까지 하나 봤더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원장님이요? 아니요. 오늘 예약은 다른 선생님이신데요.”

외래의 소개와 진료가 어떻게 진행될지를 설명하던 병원 직원이 당황한 듯 나를 살폈다.

최문경이 한 일이다. 보란 듯 김혜령 실장을 보낸 것만 봐도.

통속적인 드라마처럼 뻔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진료실 입구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저기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의사가 당연히 임신한 오메가라고 생각하며 진료한 환자 배 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지금의 상황 역시 전혀 예상도 못 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최악을 거듭 가정해 왔다.

최종필의 귀에만 들어가지 않는다면 박연이가 최문경을 설득할 수도 있을 거다. 조금만 애를 쓰면 파혼까지 갈 일은 없다. 최문경과 타협을 시도할 수도 있다.

그리고, 최사헌도 있다.

무슨 일이 있든 자기가 수습해 주겠다던 약속을, 나는 감추어 둔 사탕을 빨듯 머금어 보았다.

휴대폰을 꺼내 일부러 최사헌의 번호를 한 자씩 눌렀다. 열한 자리를 또박또박 누르는 손끝에 힘이 실렸다.

지잉.

진동이 울렸다. 액정에 최사헌의 번호 대신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할 얘기 있으니 언제 집에 들러]

어머니가 보낸 메시지였다. 방금까지 복잡하던 머리가 단숨에 멈췄다.

어머니가 먼저 연락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유민이 유산 얘기야]

무슨 용건일지 궁금해할 겨를도 없었다. 이어서 온 문자가 나를 바닥으로 처박았다.

액정에 비치는 내 모습 뒤로 녹아내린 유화처럼 얼굴이 뭉개진 유민이가 보였다.

한순간의 환각이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등으로 눌렀다. 생각을 해. 주문처럼 되뇌었던 말이 이제 성가셨다.

이 덫에서 빠져나가고 나서, 시간을 끈 다음, 그다음에는.

있지도 않은 아이를 구실 삼아 최사헌과 결혼한 다음에는.

당연히 최의현이 떠올라야 할 텐데, 복수심으로 달아올라야 할 심장은 잠잠했다. 나는 살갗이 쓰릴 정도로 세게 마른세수했다.

생이 그저 너저분하고 끈적거린다.

다 포기하고 없어져 버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만 들어가시겠어요?”

병원 직원이 나를 불렀다.

옆에는 김혜령 실장이 지켜보고 있었다. 내 인생이 구렁텅이로 처박히던 날에 보았던 저 여자의 눈빛을 기억한다.

동정도, 경멸도 없는 메마른 눈동자. 지금도 그랬다.

나는 휩쓸리듯이 진료실로 들어섰다.

발치가 약하게 흔들리는 느낌이 났다. 물 위의 뱃전을 걷는 것 같았다.

* * *

사헌이 옆에서 눈치를 살피는 공장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서로 올라온 폐기 과정 시행해 보고, 다시 확인하죠.”

그새 이마에 땀이 뱄다. 잠깐 숨을 돌릴 생각으로 독실로 향하면서 사헌이 뻐근한 목덜미를 주물렀다.

공장 증설이 계속 문제였다.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파견한 태스크포스와 현지의 마찰이 예상한 것보다 거셌다. 폴란드 정부에서는 폐기물 처리가 개선되지 않으면 약속했던 지원을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쉽게 풀리는 일이 없다. 그러나 이 상황에 사헌의 신경을 사로잡고 있는 문제는 공장이 아니었다.

무슨 일을 하건 가시처럼 머리를 찌르는 생각은 따로 있었다.

한 사람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주머니에 쑤셔 넣어 둔 휴대폰이 웅웅 울렸다. 그치지 않는 걸로 보아 전화다.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사헌이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통화가 연결되었건만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잡음 같은 숨소리만 간혹 스피커에 번졌다.

“여보세요?”

― …….

“유성 씨?”

― ……해 준다고 했죠?

겨우 대답이 들렸다. 그나마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를 조그만 소리였다.

“뭐라고요?”

― 일이 틀어지면, 수습해 준다고 했잖아요.

유성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다. 사헌은 찬물을 삼킨 듯 얼어붙었다.

“무슨 일이에요. 진정하고 말해 봐요.”

유성은 다시 조용했다. 통화가 끊기지 않았는지 액정을 확인한 사헌이 유성을 얼렀다.

“무슨 일이든 내가 해결할 테니까 안심하고 말해요.”

침착하게 타이르면서도 온갖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헝클었다. 잠깐 눈을 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 5주요.

대뜸 튀어나온 말에 사헌이 휴대폰을 부술 듯 움켰다. 곤두섰던 촉각이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무슨 소립니까, 그게.”

― 5주라고요.

“유성 씨, 혹시…….”

― 임신이요.

토해 내다시피 말한 유성이 가쁜 숨을 골랐다. 훌쩍거림이 언뜻 들린 것도 같았다.

― 이제 어떻게 해야 돼요?

* * *

길모퉁이에서 형광색 옷을 입은 미화원이 낙엽을 쓸고 있다. 빨간색, 노란색, 갈색 이파리들이 바닥에 작은 언덕을 이루었다.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에서 팔랑대며 단풍잎이 떨어졌다. 나는 나뭇잎에 맞을까 무서워 나무로부터 떨어져 앉았다.

벤치는 다 가로수를 곁에 두고 있었다. 멀쩡히 빈 벤치를 두고 바닥에 무릎을 모아 쪼그려 앉고서도 그게 딱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생각은 전부 다른 곳에 쏠렸다. 김 실장의 미약한 당황과 흐릿하게 찍힌 태아 기관을 설명해 주던 의사, 발바닥부터 붕 떠오른 듯 아무런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던 기억.

반드시 낳아 주리라던 장담과 달리 막상 흐릿하게 보이는 태아 기관을 확인하자 토기가 치밀었다.

어디인지 알지도 못하는 곳까지 내 발로 왔다.

최사헌이 말한 대로 집착에 떠밀려서.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아직은 티도 나지 않는 배를 감싸고 있자니 윗배가 땅겼다. 익숙한 복통조차 겁이 났다.

발치가 다 녹아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병원을 나온 후부터 모든 길이 기분 나쁘게 물컹거렸다. 걷기만 해도 발이 빠졌다.

나는 일부러 어딘지도 모를 곳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취한 듯 몽롱했다. 생각을 하려고 하면 폭풍처럼 들이닥칠 것들이 싫었다.

저 멀리서 최사헌이 보도블록을 밟으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최사헌이 보이면서부터 시야가 서서히 밝아졌다. 카메라의 초점이 제대로 맞춰지는 것처럼 풍경이 또렷하게 보인다.

흐느적대던 세상이 단단히 굳어지면서 모서리를 되찾았다.

아직 한참 멀리 있는데도 눈이 마주쳤다.

단풍으로 어지러운 거리에서 최사헌은 홀로 분명했다.

“아이는 잘 자라고 있대요.”

최사헌이 내 앞으로 오자마자 나는 허둥지둥 할 말부터 했다.

청주 공장에서 당장 올라오겠다는 최사헌의 답변을 듣고서도 쭉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건강한, 건가 봐요? 아직,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지금부터 5주간이 발달에 중요한 시기라고 했어요.”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도, 어디서 얘기를 끊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어서 말이 자꾸 덩어리졌다.

“그런데 못 할 것 같아요.”

기어이 그 말까지 나오고 말았다.

“나는 못 할 것 같아요. 안 될 거 같아요. 앞으로 중요한 시기라고 했는데.”

“유성 씨.”

“분명히 내가 또 망칠 것 같아요.”

“백유성 씨.”

최사헌이 재차 나를 불렀다. 차분하고 흔들림 없는 부름에 겨우 입이 멈췄다.

“유성 씨는 괜찮아요?”

순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아무 말도 못 하는 내게 최사헌이 찬찬히 반복해서 얘기했다.

“아이는 괜찮다니까 다행인데, 유성 씨는요.”

다시 나온 말을 듣고도 나는 최사헌이 뭐라고 했는지 곱씹어야 했다. 괜찮냐고?

병원에서 나온 이후로 지금껏 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괜찮나? 최사헌의 질문을 되뇌면서 바닥에 깔린 잎사귀를 헤아렸다. 어지럽게 바닥을 덮은 나뭇잎은 오가는 발에 밟혀서 뭉개지고 질척거렸다.

“모르겠어요…….”

대답이 흐리터분한 숨과 함께 빠져나왔다. 구제의 여지가 없는 멍청이가 된 기분이다.

“왜 여기 앉아 있었어요?”

최사헌이 내 앞에 똑같이 무릎을 굽혀 앉으며 물었다.

“낙엽이 무서워서요.”

내 말을 귀로 듣고 나서야 얼마나 이상한 소리인지 깨달았다. 발치에 깔린 나뭇잎들은 어떤 것에도 상처 주지 못할 만큼 부드러웠다.

최사헌의 머리맡에 드리운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최사헌은 부는 바람을 따라 우리 곁까지 날아온 나뭇잎을 붙잡았다.

내게 닿기 전에 치워 주었다.

“바람이 차네. 같이 들어가요.”

최사헌이 정장 재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쳤다. 그는 기억도 못 하는 예전에 내게 해 주었던 것과 똑같이.

나는 혹시라도 재킷이 날아갈까 붙잡았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손마디가 욱신거렸다.

“태어나지 말걸 그랬다고 생각하면 어떡해요?”

내가 전에 그랬듯이.

지금 그런 것처럼.

“나 때문에 태어났는데, 원망하게 되면 어떡해요?”

내가 너무 엉망진창이라서 무서웠다.

“5주 차 태아가 나중에 인생에 회의를 느낄 것까지 걱정해요?”

최사헌은 일부러 농담처럼 가볍게 말했다. 배려가 너무도 잘 느껴져 오히려 아팠다.

긴 시간 얼어붙어 있던 살갗이 갑자기 따뜻한 곳에 놓이면 간지럽고 따갑듯이, 아팠다.

“일단은 닥친 일부터 생각하죠. 태아가 계속 건강하게 자라려면 유성 씨 몸부터 챙겨야 하니까, 집에 들어가서 마저 얘기해요. 집이 싫으면 다른 데라도.”

잎이 많이 떨어져 헐거워진 나뭇잎들 틈새로 비친 볕이 최사헌을 밝혔다.

모서리가 여럿인 빛이 최사헌의 가슴을 타고 굴러떨어졌다.

“안 싫어요.”

겨우 그 정도 대답밖에는 못 하는 내가 싫었다.

“그래요. 다행이네.”

최사헌이 먼저 일어나 내 손을 붙잡았다. 꽉 잡은 손이 위로 딸려 올라가면서 묘한 상승감이 들었다.

놀이기구를 타서 갑작스레 위로 오를 때의 떨림과 울렁거림이었다.

“조심히 일어나요.”

최사헌의 뒤로는 아직도 색색으로 물든 단풍잎이 떨어졌다.

미처 쓸지 못한 단풍잎이 바닥에 별처럼 떨어져 있다. 붉은색과 노란색이 그러데이션을 만들었다.

“자, 이러면 괜찮죠.”

어깨에 걸쳐 뒀던 재킷을 내 머리 위로 끌어올리면서 최사헌이 나를 이끌었다.

바람마다 나무는 체머리를 흔들었고 최사헌은 무수히 떨어지는 낙엽을 피해 걸어 주었다.

샛노란 잎이 환각처럼 시야를 물들이며 떨어진다.

세상의 색채는 너무나도 다양했고 내게는 나를 보살피는 사람이 있었다.

어쩐지, 이 세상에 처음으로 발을 디뎌 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융단처럼 깔린 단풍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최사헌과 함께.

“온도 올릴 테니까 물부터 마셔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최사헌은 내 겉옷을 벗겨 주었다. 식탁에 앉혀져 따뜻하게 데워진 머그잔을 만지자 차게 굳었던 손에 감각이 속속 돌아왔다.

집 안은 따뜻했다.

바깥이 얼마나 추웠는지 비로소 실감이 났다.

미지근한 물을 마시자 배 속이 데워졌다. 최사헌은 내가 잔을 다 비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했다.

“일곱 살 전에 어머니하고 있었냐고 물어봤죠.”

잠시 되씹어 본 뒤에야 최사헌이 내가 분식집에서 했던 얘기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말을 꺼낸 나도 잊고 있던 얘기였다.

“유성 씨하고 반대로 나는 그때 기억이 잘 안 나요.”

과거를 되짚어 보는 자 특유의 곰곰한 고민이 최사헌의 얼굴을 흐트러트렸다.

“대신 그 후는 전부 다,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리고 달갑지 않은 기억에 잠식당할 때의 괴로움이 연이어 최사헌의 미간을 치고 지나갔다.

“우연조 씨는 원래 아팠어요. 몸도 약했고, 마음도 건강한 사람은 아니었고요.”

암암리에 퍼져 있던 얘기였다. 소문은 우연조의 신경증을 실패한 결혼 탓으로 돌렸다.

“결혼에 기대가 컸는데 알다시피 잘 안 됐죠. 그 사람은, 좋게 말해도 어린애 보호자로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이어지는 얘기를 들으며 나는 최사헌의 유년을 상상했다.

이전에 내가 그리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어린 최사헌을 둘러싸고 있던 완벽하고 품위 있는 세상은 부서져 잔해만을 남겼다.

고작 녹슨 철골만 남은 도시에서 어린 최사헌이 걷고 있다.

부서진 주택들 사이로 똑바로 보이는 건 윤기가 흐르는 그랜드 피아노와 우연조의 등뿐이었다.

“왜 더 이상 피아노는 안 치냐고 물어봤잖습니까. 아직도 궁금해요?”

나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에 관한 거라면 뭐든 알고 싶다.

“거래하죠.”

“……무슨 거래요?”

“내가 왜 엉망인지 알려 주면, 백유성 씨도 뭐가 그렇게 무서운지 말해 줘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나를 위한 회유책임을 최사헌은 숨기지도 않았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 최사헌이 손을 내밀었다.

“난 백유성 씨 거래에 응했었는데, 어때요.”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사헌이 내 손을 잡아 주었던 그때처럼 나도, 최사헌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 * *

기분이 좋은 날에는 바흐의 「커피 칸타타」.

지루할 때는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왈츠」.

몸이 안 좋은 날은 라흐마니노프의 「프렐류드」.

그리고 아침에 거실에서 「그레고리 성가」가 들리면 사헌은 몸을 사렸다.

최악은 모차르트 「레퀴엠」이 연주되는 날이었다.

우연조는 컨디션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놀라운 점은 기분이 좋을 때의 우연조가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우연조는 재기발랄했고 아는 게 많았다. 사헌에게 독일어 단어의 어원을 가르쳐 주고, 코코뱅을 만들어 주고, 베토벤의 곡을 함께 쳐 주었다.

어린 시절 최사헌의 성취가 우연조의 덕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아이들은 원래 주변의 영향을 받는 법이다.

우연조의 기분은 파리의 날씨처럼 변덕스러웠으며, 좋은 날보다는 나쁜 날이 훨씬 많았다.

음산한 음률이 집 안을 떠도는 날이면 우연조는 신경질적으로 걸어 다니면서 분풀이를 할 타이밍을 찾아다니곤 했다.

분풀이의 대상은 보통 사헌이었다. 필연적으로 그랬다.

우연조는 사헌을 꼴도 보기 싫어하다가도 사헌이 시야에서 벗어나면 견디지 못했다.

최사헌의 말대로 우연조는 아픈 사람이었다.

가끔, 평소보다도 상태가 더 나빠지면…….

최사헌은 손목시계를 풀어서 손목의 흰 흉터를 보여 주었다.

대부분은 해외에서 지냈으나 집안 행사가 있는 날에는 우연조도, 사헌도 한국으로 들어와야 했다.

그게 최종필 회장이 말하는 ‘가족 된 도리’였다.

한국에 있을 때의 우연조는 늘 저기압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출국할 때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줄곧.

사건은 사헌의 생일 파티에서 벌어졌다.

그날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우연조가 매끈하게 정리된 부엌과 가든 파티장을 거닐다 단숨에 누군가를 알아보았을 때.

만일 이 모든 일을 교향곡으로 비유한다면 거기가 바로 시작을 알리는 지휘였을 거다.

운명이 지휘봉을 세차게 휘두르고, 숨죽여 기다리던 악기들이 연주에 돌입하는 순간.

파티에는 이소선이 있었다.

아버지의 읍소와 조모의 허락이 있었다고 들었다.

비록 고용인이나 다름없는 취급이라 할지라도 이소선은 정원에 들어서기를 허락받았다.

성장한 아들을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쁨에 들떠 있던 여자였다. 그 순정한 얼굴이 우연조의 마지막 이성을 톱질했다.

‘돌아가라고 해.’

사헌의 소맷자락을 붙잡은 채로 우연조가 속삭였다.

‘돌려보내, 저 여자.’

안 그래도 말랐던 우연조는 컨디션이 떨어지면 살집이랄 게 완전히 사라졌고, 골격이 그대로 드러난 얼굴은 그림자마저 강한 대비를 이루었다.

우연조가 말라 갈수록 사헌은 잉크로 덧칠한 선을 떠올리곤 했었다. 긋고, 긋고, 다시 긋자 종이에 뭉텅이로 밴 잉크가 찢어지기 시작할 즈음.

당시의 우연조는 그랬다.

‘네 아버지한테 말해. 돌려보내라고.’

꺼진 눈자위에서 새파랗게 이글거리던 눈빛이란. 순간적인 오싹함이 사헌을 긴장시켰다.

무슨 일인가 벌어지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평소 같은 히스테리라고 치부하고 넘겨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러나 일의 전조란 모두 뒤에 가서야 선명해진다.

사헌은 이소선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제는 남보다 서먹한 아버지에게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그저 이 모든 막중한 피로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고작 10대의 최사헌에게 자신의 생일이 갖는 의미란 평소보다 더욱 피곤한 날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는 달력에서 아예 닦아 내고 싶은 날이 된다.

사건은 점심이 지나갈 무렵에 일어났다.

정원과 통유리를 사이에 둔 공간에는 긴 직사각형 식탁에 핑거푸드와 음료가 세팅되어 있었다.

드나들며 식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부엌에서 사람들이 오갔다.

이소선은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 누구도 제대로 아는 척하지 않는 껄끄러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소선은 여전히 뺨이 장밋빛이었다.

부엌에서 막 빠져나와 건물 벽에 기대어 있던 우연조의 시선이 이소선에게 가 닿았다.

사헌은 우연조의 근처에 있었다. 우연조의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때 주변을 지키는 일은 사헌의 몫이었다.

‘죽여 버리고 싶어.’

조용한 읊조림이 귀에 닿은 순간 사헌이 움직임을 멈췄다. 우연조를 돌아보기까지 시간이 두 배는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세라믹 식칼이 우연조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칼을 든 우연조가 이소선을 향해 걸어갔다. 프리마 발레리나처럼 절도마저 느껴지는 당당한 걸음이었다.

무작정 달려드는 우연조를 사헌은 미처 막지 못했다.

이소선을 대신해 찔리는 정도가 사헌의 최선이었다.

파열음이 들렸다.

사헌의 등에 밀린 식탁이 덜컹대면서 쌓아 놓았던 샴페인 잔이 균형을 잃고 떨어졌다.

새하얀 식탁보와 아름다운 접시들, 화병이 무너져 날카로운 소음을 연쇄했다.

날붙이가 살을 꿰뚫고 들어오던 감각을 기억한다.

근육이 잘리고 뼈를 긁힐 때의 기묘한 열감.

함께 엎어지는 바람에 칼을 휘둘러 오는 이의 체중이 칼에 온전히 실렸다. 날이 살을 푹 쑤시는 찰나에는 우연조조차 놀란 듯 눈을 홉떴다.

손목을 뚫고 나온 삐죽한 칼날이 사헌의 가슴을 찔렀다.

부러진 칼날이 흉부에 박혔다. 깨진 칼자루를 들고 우연조는 사헌을 초점 나간 눈으로 응시했다.

주변의 소음이 일시에 꺼졌다가, 저 멀리에서 비명이 들렸다.

찢긴 셔츠에 피가 질척하게 퍼져 나갔다.

쇼크로 인한 어지럼증이 사헌을 주저앉혔다. 더듬어 쥔 테이블보가 사헌과 함께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순백의 천에 새빨간 피가 스몄다.

시야가 돌면서 천장이 보였다. 컥, 목에 걸린 숨을 토하며 사헌이 바닥을 더듬거렸다.

소란 속에서 사헌의 가까이 남아 있는 사람은 단 하나뿐이었다.

흡사 차에 치인 짐승이 숨을 거둘지 궁금해하는 아이처럼 우연조는 사헌을 관찰했다.

어쩌면 기대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새빨갛게 칠해진 천에 누워 사헌은 시간을 견뎠다.

죽어 가는 시간을.

그건 숨 쉰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막연히 살아갈 때나 매일 세포를 키우고 버리며 자라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피는 흘러나가 체온을 떨어뜨리고, 호흡은 입술 바깥에서 사그라진다.

의료인이 도착하기까지 1년은 걸린 것 같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럴 리 없었지만 사헌은 그날 자신이 죽을 거라고 확신했었다.

살아남는다는 건 기억을 가지는 일이다.

살아 있음은 곧 죽지 않았다는 뜻이고, 나를 죽이지 못한 상처는 남은 생을 함께한다.

상처는 삶을 변형시킨다.

우연조가 일으킨 사건은 전에도 그랬듯 조용히 덮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사헌은 우연조와 함께 돌아갈 터였고 앞으로도 함께 살 거다.

머리를 덮고 있던 천장이 순식간에 걷혀 나가는 기분을, 사헌은 느꼈다.

세상은 지금껏 그가 인지하고 있던 공간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안전하지 않다.

무엇도 당연하지 않았다. 주변은 위험천만했으며, 그를 보호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때 최사헌은 팔의 실밥을 갓 제거한 상태였다. 손가락이 제대로 구부러질 때까지 1년의 시간이 걸렸다.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우연조는 다시는 칸타타를 연주하지 않았다.

이미 나빠진 것이 더 나빠지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최사헌이 하버드대 문리학부의 신입생이 되었을 때 우연조는 간병인을 수십 차례 갈아 치우고 있었다.

매일같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사헌은 무엇이 우연조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는지 생각했다.

어머니의 순진한 미소? 그러나 내 어머니는 가진 것 없는 세탁소집의 딸이었다. 그나마도 성년 이전에 모두 잃었다.

당신에게는 사랑하는 부모가, 지위와 재산이, 음악과 여행이 있었다.

손목에 자리한 흰 금처럼 남아 버린 경멸을 사헌은 문득 알아차렸다.

기이한 복수심.

그때 우연조가 그랬듯 죽어 가는 여자를 가만히 구경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한평생 폭군처럼 사헌의 삶을 지배해 온 사람이 무력하게 사그라지는 광경은 과연 어떨까.

그것은 사헌조차 제게 존재하는지 몰랐던 살의였다.

아침이면 피아노 건반을 부서질 듯 내리치는 소리에 깼다. 더는 화음이 되지 못하는 소음이 거실을 날카롭게 찢었다.

목쉰 음성으로 가곡을 부르다 말고 우연조가 울부짖었다.

우연조는 스스로 망가져 가고 있었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것으로 매일같이 자신의 손목을 난자하고 있었다.

침실 문가에 기대어 광폭한 연주를 듣던 사헌이 귀를 막았다.

저런 것은 늪이다.

발을 디뎌 봐야 함께 익사할 따름이다.

캐리어에 간소한 짐을 꾸려 나가기까지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뉴욕의 집값은 비쌌고 본래 사헌의 재정은 우연조의 통제하에 있었으므로 여차하면 길바닥에서 잘지도 모를 정도로 빈곤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최사헌은 보스턴에 셋방을 구했고, 하버드대에서 장학금을 받았다. 우연조가 죽을 때까지 그 여자를 거의 보지 않았다.

“우연조 씨의 사망 이후에 우태영 회장님한테 처음으로 연락을 받았습니다.”

우태영은 딸의 장례 준비에 최사헌을 관여시키지 않았다. 철저한 남으로 대했다.

“딸 유언장에 제 몫이 남아 있었다고요.”

최사헌이 고갯짓으로 거실의 그랜드 피아노를 가리켰다.

“그게 저 피아노예요.”

“저것뿐이에요?”

예상컨대 우연조가 가진 TY 지분만 해도 만만치 않았을 터다. 호적상일 뿐이지만 최사헌은 우연조의 유일한 직계였다.

거기 비하면 억대를 호가하는 그랜드 피아노 정도는 바닷속의 소금 한 알이었다. 한국까지 가져오는 비용을 계산하면 처치가 어려운 짐이거나.

“저것뿐이에요.”

고작 저것.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머그잔만 움켜쥐었다.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우연조 씨는…… 어머니는 자주 내 탓이라고 했어요.”

우연조가 최사헌과 함께 있을 때 더 무슨 짓을 했는지 최사헌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 것 같다.

아침마다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을 들으며 최사헌이 무슨 기분으로 잠에서 깼을지.

왜 우연조와 살기 이전의 기억은 제대로 남지도 않게 되었는지. 우연조와의 삶은 어쩌다 그만큼 선명하게 팽창했는지.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내 탓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남의 손에 휘둘린 것 외에 내 잘못은 없으니까.”

최사헌은 흔들림 없이 단단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사람 잘못에 휘말리지 말아요. 원래 다들 남 탓이라고 하고 싶어 해요.”

최사헌의 저 얼굴을 가지고 싶다.

나는 끄트머리부터 벌벌 떨리는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제발 자기 자신을 지켜요, 백유성 씨.”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익숙한 통증이었다.

내 방에 최의현이 다녀간 여름밤 이후로 내 손바닥 안쪽에는 손톱이 만들어 놓은 손금 같은 흉터들이 생겼고, 하도 이를 악무는 바람에 입 안쪽 살에 질긴 선이 만들어졌었다.

“함부로 쓰지 말아요, 백유성 씨를.”

최사헌이 내 손등을 감쌌다.

“나는 나를 지키고 싶었어요. 다시는 휘둘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날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최사헌의 말이 무겁게, 무겁게 떨어진다.

“대단한 야망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게 아니에요. 그냥, 생존이었던 거지.”

“…….”

“시시하죠?”

방금 뱉은 이야기들의 무게 따위는 별것 아니라는 듯 최사헌은 가볍게 웃는다.

“내 인생에 제일 큰 비밀은 이제 다 얘기했어요.”

나는 더욱 힘주어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이제 파고들 곳도 남지 않았다. 얼얼한 아픔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번엔 유성 씨 차롑니다.”

이제 피할 수 없는 내 차례였다.

“싫어하지 않는다고 약속해요.”

노력해도 최사헌처럼 말할 수는 없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비집고 나올 듯 목이 떨리고 발음이 뭉개졌다.

“나한테는 실망해도 되니까 이 애는 미워하지 마요.”

그게 나의 최선이었다. 내가 미움받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럴 만한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이 애는 아무 잘못이 없다.

“약속할게요.”

최사헌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웃었다.

그건 안심시키기 위한 미소였다.

“나한테는 나를 지켜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당신한테는 해 주고 싶어요. 안전하다고 느끼게.”

최사헌이 고개 숙여 시선을 마주쳤다. 들으면서도 나는 내가 무슨 말을 듣는지 의심했다. 꼭 주문이라도 외우는 것 같았다.

혹은 내가 어릴 적 잠자리에서 몰래 외웠던 기도문 같다.

“내가 지켜 줄게요.”

뼈마디가 아플 정도로 있는 힘껏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이 조금씩 헐거워졌다.

“그게 내 마음입니다.”

자신이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그러나 지극히 바랐던 것을 남에게 주고자 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지 마.

계속해 중얼거렸다. 더 생각하지 마. 틀린 답을 떠올리지 마.

그러나 생애 무엇도 내 마음처럼 되지 않았듯 이번에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이 남자가, 이 견고하고 눈부신 남자가, 어쩌면, 나를 좋아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고.

희망은 곰팡이처럼 피었다. 숨이 기도를 타고 내려간 폐가 간지러웠다. 심장이 안에서 가슴을 두들겨 패 댔다.

언젠가는 이 희망이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할 것이었다.

유민이에 대한 속죄를 위해 쓰여야 할 나 따위를 이 병이 먼저 태워 버릴 거다.

“울지 마요.”

그러나, 그러나…….

“당신이 울면 정말 어떻게 해 줘야 할지 모르겠어. 뭐든 해 주고 싶은데……. 괴로워.”

나의 첫사랑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렇게 따뜻했다.

여전히 나의 장래, 희망이었다.

창밖으로 우수수 색색의 잎이 날린다.

무섭도록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 * *

<삼삼 흥신소>

출입구 상단에 큼직하게 적힌 사무실 간판을 보던 기주가 쩝, 입맛을 다시며 점퍼를 벗었다.

검은색 점퍼 등판에도 새빨간 글씨로 ‘33’이 박혀 있다. 아무리 무당이 찍어 준 숫자라지만 이렇게 할 것까지 있나 싶을 정도였다.

기주가 책상에 내던진 점퍼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사무실로 복귀하는 동안 기주를 심란하게 만든 문자가 액정에 떠올랐다.

[최문경 사장하고 여명에서 오후 3시]

― 발신자 정기승 실장님

문자를 확인한 기주가 물고 있던 아이스크림 막대를 깨물었다. 납작한 나무 막대가 작신작신 쪼개졌다.

“너 그러다 좆 된다.”

불현듯 들려온 소리에 기주가 소스라치며 의자를 돌렸다.

“씨발, 깜짝이야!”

기주의 뒤에 바짝 붙어서 서 있던 곽지경이 손을 흔들었다. 무엇이든 휘두를 것을 붙잡으려 주변을 더듬던 기주가 겨우 어깨에 힘을 뺐다.

“뭘 놀라기까지. 정 실장님 시다 노릇 아직도 하냐?”

“뭔 상관. 제발 나한테 신경 끄셔.”

“이따가 범운 사장 만나러 가지.”

지경의 말에 기주가 찔끔 입을 닫았다. 가끔 보면 곽지경의 정보력은 놀라울 정도다.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나.

“그런 거물이랑 얽혀서 뭔 짓을 하려고 그런대, 실장님은.”

“나 같은 하꼬가 뭘 알아. 까라면 걍 까는 거지.”

“그러니까 조심하라는 거야. 꼬리 뗄 일 생기면 어딜 보나 네가 꼬리니까.”

곽지경은 참으로 싹수없는 조언자였다. 재수 없을 만큼 맞는 말만 하는 놈이기도 했다.

“저번에 정 실장님이랑 유성이 형 만났냐?”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대화는 기승과 유성이 하고, 기주는 뒤로 빠져서 망이나 보는 행색이었으나 만나기는 했다. 그날을 떠올린 기주가 찝찝하게 입맛을 다셨다.

“야, 청음에서 아직도 총 팔아?”

청음은 여미림 사장의 아버지가 이끄는 기업이었다. 정확히는 기업의 탈을 쓰고 있을 뿐인 건달들 집합소다.

청음 얘기를 꺼내자 지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온 지 오래된 사람한테 그걸 왜 물어. 알아도 네가 알지, 내가 알아?”

“나도 본사 뜬 지 한참인데 어떻게 아냐. 너랑 나랑 비교가 돼? 나는 기껏해야 시다바리고, 너는 지부장 동생인데.”

“연 끊고 호적 팠는데 동생은 무슨.”

지경이 콧방귀를 뀌었다.

“본사에서는 진행 안 하겠지. 우리 나올 즈음에 벌써 뱉으려고 각 재고 있었잖아. 그래도 개고생하면서 뚫은 루트가 있는데 그걸 버리진 않았을 거고, 계열사에 물려 놓지 않았겠어?”

그렇겠지. 기주가 속으로 수긍했다. 지경이 지금 한 얘기가 정론이었다.

“왜. 범운 사장이 총 구해?”

“잔챙이도 아니고 그런 대어가 총을 왜 구해. 칼 잡는 애 따로 쓰면 모를까.”

“근데 총 얘긴 왜 꺼냈어.”

지경의 물음에 기주가 입만 뻐끔댔다.

호텔 룸에서 봤던 유성이 잊히지 않았다. 사람도 죽이냐고 묻더니, 이내 총기도 취급하냐는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지고는 웃어 버리던 유성의 표정이.

이런 바닥에서 일하면서 목숨줄 붙잡고 있으려면 촉이 제일이다.

그 순간 촉이 싸했단 말이다.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냥 넘겨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주의 나쁜 예감은 대개 맞았다.

“누나, 너 그러다가 진짜 한 방에 간다. 우리 사장님이 모르실 것 같지?”

“남이사. 가든 말든. 시끄러워.”

기주가 거칠게 쏘아붙이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야. 진짜 조심해, 임기주!”

등 뒤로 퍼지는 지경의 외침을 들으면서 기주가 뛰듯 계단을 내려갔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님은 기주도 알았다.

영 찜찜하다.

유성이 집요하게 범운 관련 자료를 찾아다녔다는 사실은 기주도 알았다.

미림은 유성이 왜 그러는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유성이 범운의 상무이사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만 알음알음 들려왔을 뿐이다.

그러니 범운 관련 인사한테 일을 맡게 된다면, 유성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잖는가.

기주가 불안하게 세워 둔 차의 운전석에 올라탔다.

여명은 예약제로 돌아가는 일식집이었다. 전번에도 기승과 몇 번 동석했었다.

기승이 약속 장소를 그곳으로 잡았다는 건, 흥신소 일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기승은 지금 삼삼 흥신소의 정 실장이 아니라 불법 기업체 청음의 정기승 실장으로서 일하고 있는 거였다.

“이거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대체.”

기주가 욕설을 뇌까리며 예약된 방으로 들어섰다.

이미 한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기승이 기주를 향해 짧게 손을 흔들었다.

“금방 올 거야.”

“넵.”

기주가 기승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평소에 잡는 방과 달리 가게 안에서도 아예 떨어진 독채였다. 시선을 돌리면 일본식 정원이 보였다.

“근데 오늘 무슨 얘기 하는 겁니까?”

기주가 묻자 기승은 비뚤어진 미소만 흘렸다. 또 저런다. 기주가 내심 욕을 퍼부었다.

대답은 안 하고 의미심장한 웃음만 짓고 그만이다. 덕분에 작전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뭐 하는지도 몰랐던 적이 왕왕 있다.

기승이 기주를 끼고 다니는 이유는 그래도 기주가 불평하지 않아서다. 까라면 까니까.

즉, 이번 일도 그런 종류의 일이리라는 예상이 가능했다.

꼬랑지한테는 직전까지 말도 안 할 정도로 보안이 중요한, 새면 안 될 일.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년의 여성이 옆에 다른 사람을 대동하고 등장했다.

저게 최문경 사장이란 말이지.

맵시 있게 차려입은 문경을 기주가 슬쩍 쳐다보았다. 도로 시선을 거두려는 순간, 문경의 옆에 자리한 비서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존나 무섭네. 눈깔 보소. 기주가 자연스럽게 도로 고개를 아래로 박았다. 사이즈 보니까 칼 좀 잡았겠는데?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그런 인상이었다. 기주가 어릴 적부터 무수히 보아 온 밑바닥 인간들하고 느낌이 겹쳤다.

곧이어 직원들이 신선한 해산물이 차려진 접시를 날랐다.

가이세키의 첫 코스를 끝내기도 전에 기주의 귀를 사로잡는 얘기가 나왔다. 문경이 백유성의 이름을 꺼낸 순간부터 기주는 음식을 삼키지 못했다.

널찍한 먹색 접시에 살이 발린 도미가 나왔다. 뾰족한 뼈와 반투명한 살점만 저며진 생선이 섬뜩하게 보였다.

기승과 문경이 회를 씹었다. 해체된 생선 살이 부서지고 삼켜진다.

기주가 눈을 내리깔았다. 희미한 토기가 올라왔다.

예고 없이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차가운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기주가 고개를 들었다. 역광을 맞은 새카만 그림자가 문가에 걸쳐져 있었다.

* * *

살이 무르고 뼈가 덜 자란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 온몸이 다 물러지는 기분이 든다.

유민이는 아주 귀여운 아기였다.

나가면 다들 쳐다볼 정도로 귀여웠다. 낯도 잘 가리지 않고 방실방실 웃는 모습이 누구에게나 호감을 샀다.

그 애는 평생을 사랑스럽게 살았다.

친형제가 아님을 알게 되고도 유민이는 내게 무람없이 웃어 주고는 했다.

나는 그 애의 그런 면이 부럽고도 무서웠다.

난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 애의 피아노 연주회에서 관객석에 앉아 손뼉을 치면서 단 한 순간도 미워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약에 취해 거실에 뱉어 놓은 토사물을 치우면서,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나.

어쩌면 내 그런 끔찍한 속내를 유민이는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그게 매 순간 두려웠다.

한밤중의 공원에서 최의현을 불러 놓고 ‘유민이를 부탁한다’고 말하면서, 내가 해방감을 느꼈다는 사실이.

최의현과 함께하는 게 유민이에게 나쁜 일임은 뻔했다. 나는 이미 최의현이 유민이를 어떻게 대하는지 알고 있었다. 최의현이 어떤 인간인지도.

그런데도 유민이가 원한다는 핑계로 최의현에게 유민이를 떠맡겼다.

차가 굉음과 함께 거리에서 나동그라지고, 아스팔트에 유민이의 피가 흐를 때…… 알고 있었다.

기어이 내가 그 애를 죽였다는 걸.

언제나 노력했다. 유민이를 흠 없이 사랑하고자 했다. 진심으로 그저 그 애를 위하고 싶었다.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모두가 원하는 대로 그 애의 철저한 부속품으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때로는 내게 안기는 그 애가 족쇄처럼 무거워서, 아무것도 모르는 미소가 무서워서. 내 삶이 앞으로도 그 애를 위해 썰리고 부서지고 으깨지리라 생각하다 보면 더럭 막막해졌다.

정말로 가끔, 가끔은.

없어져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사모님이 지금은 작업실에 계세요.”

그런데 어떻게 내 탓이 아닐 수 있겠는가.

“저 왔다고 전해 주시겠어요.”

나는 머플러를 풀며 본가의 저택 안을 둘러보았다. 약속 시간에 맞춰 왔는데도 나를 맞이한 건 고용인뿐이었다.

“안 그래도 아까 말씀드렸는데.”

고용인이 난처하게 눈을 굴렸다.

“요즘 작업하실 때는 집중하시느라 다른 데 신경을 통 못 쓰시네요.”

고용인의 서름서름한 태도에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반응도 제대로 하지 않는 어머니에게 말을 건네고 싶지 않다는 의중이 풍겨 나왔다. 못내 꺼림칙해하는 느낌도.

“직접 가 보시겠어요?”

흉부에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 방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나는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네, 그러죠.”

그러나 가야 했다.

어머니가 나를 불렀으니까.

침실 못지않게 널찍한 작업실에는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그림이 가득했다.

바닥에 세워 둔 것들은 물론이고, 벽에 고정해 걸어 놓은 캔버스화까지 있었다.

왜 고용인이 여기 들르기를 꺼렸는지 이해가 갔다.

정신없이 빽빽한 그림들 가운데에 어머니는 앉아 있었다.

유화 냄새 탓에 눈이 매울 정도인데 어머니는 늘 앉던 자리에서 계속 팔을 움직였다.

넋을 잃을 뻔하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언제까지 지켜볼 수는 없었다.

“저 왔어요.”

겨우 소리를 내자 어머니의 움직임이 멈췄다.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겁이 났다. 이제부터 해야 할 모든 대화가.

상실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

내가 최의현을 좇으려 발버둥 치고 있을 때 어머니도 나름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던 거다.

나는 커다란 캔버스 안에서 어렵지 않게 비명을 듣는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주먹을 쥔 손이 허벅지 옆에서 덜덜 떨렸다.

어머니가 등을 돌리는 순간 이젤에 놓인 그림이 제대로 보였다.

유민이였다.

명확한 이목구비를 갖춘 유민이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숨을 멈춘다.

“작업, 중이신 건 알았는데, 갑자기 들어와서 죄송해요.”

목이 메어 말이 한 번에 나오지 않았다. 유민이가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계를 쳐다본 어머니가 짧게 신음했다.

“요즘 시간을 자꾸 잊네. 나야말로 미안하다. 기다렸니?”

“아뇨. 저는, 괜찮아요.”

혀가 뻣뻣하게 굳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도 무슨 말이든 해야만 했다. 유민이의 그림을 앞에 두고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 건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하실 말씀 있으시다면서요.”

“유민이 지분 말이야.”

“네.”

“전부 네 앞으로 돌려 두는 게 좋겠다 싶어서.”

어머니가 지분 처리를 하고 있음은 알고 있었는데도 새삼스럽게 놀랐다. 오자마자 고함을 지르며 내 탓을 하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왜요?”

아직도 어머니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원체 무슨 마음인지 알 수 없었던 사람이지만 이번 일은 진심으로 의외였다.

“유민이라면 그러고 싶어 했을 것 같았어.”

그 애가 정말 그랬을까요.

혀에서 맴도는 말을 삼켰다. 입맛이 쓰디썼다.

“난 있잖니.”

물감이 묻은 앞치마를 벗으면서 어머니가 자신이 그리고 있던 그림을 흘깃 보았다. 유민이를 그린 유화는 거의 완성 단계였다.

“사실은 처음 그 애를 낳고 나서는 전부 막막했어. 걘 너무 작고 종일 활기가 넘쳐서, 눈만 떼면 뛰어다녔고 눈이 마주치면 말을 걸었지. 나한테는 감당이 안 되는 애였어. 나는 그냥 이 집에서 조용히, 조용히만 살고 싶었는데.”

귀를 기울여야만 제대로 들리는 소곤거림이 방을 떠돌았다.

“생길 줄도 몰랐는걸.”

눈을 내리뜨면서 어머니가 아주 조그맣게 뇌까렸다.

문득 배에 손이 갔다. 약까지 쓰면서 계획한 임신이었는데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는 머리가 새하얘졌었다.

“그래서 걘 늘 나보다 널 더 따랐지. 널 따라서 피아노를 치고, 웃고, 네가 안아 줘야만 잠들고. 네가 하는 건 모조리 같이 해야만 만족했어.”

그랬다. 유민이는 나 때문에 음악가가 되기로 할 정도로 나를 따랐다.

나를 믿었다.

최의현에게 왜 그가 다시 약혼을 유지하기로 했는지 들을 때도 나를 믿고 있었을 거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어머니는 나지막이 고백했다.

속이 저미듯 아팠다.

“난 그 애가 무서웠거든.”

어머니의 시선은 이제 내가 아니라 벽에 걸린 그림들을 향해 있었다.

색채의 난립이었다. 제대로 된 형체를 갖춘 그림은 유민이를 그린 것 하나뿐이었다.

“내가 낳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그래도…… 더 안아 줬으면 좋았을 텐데.”

비스듬히 떨어진 어머니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에 가까웠으나 사위를 메운 색채들이 표정이 되어 주었다.

반짝이는 물기가 어머니의 뺨을 무심히 가로질렀다. 어머니가 도로 나를 향해 고개를 세웠다.

“네 아버지 얘기는 신경 쓰지 마. 유민이 이름으로 돼 있던 것들은 이제 다 네 거야.”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않았다.

좋은 일은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았다. 나는 마땅한 질책만을 염두에 두고 이 자리에 왔다.

유민이를 죽인 건 너라고. 그러니 네가 다 책임져야만 한다고. 너는 자격이 없다고.

너는 그 애를 가질 자격이 없고, 최사헌을 가질 자격이 없고, 가족을 이룰 자격 같은 건 더더욱, 더더욱이나 없다고.

너 같은 건.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저는…….”

나는 횡설수설 지껄이며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린시드와 테레빈 기름의 냄새가 구강에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용서할 수가 없어요.”

최의현을.

저를.

폐가 제대로 부풀지 못하고 자꾸만 공기를 다시 뱉어 냈다. 숨 가쁜 나와 달리 어머니는 여전히 적막하도록 고요했다.

마르다 만 눈물이 어머니의 뺨 한쪽을 번들대게 했다.

“너한테 있었던 일, 모른 척해서 미안해.”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목이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난 그냥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살면서 항상 그랬어. 모든 일에.”

괜찮다고 해야 했다.

이해한다고 말하려고 했다. 아니요.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저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요. 전 괜찮아요. 뭐가 괜찮냐면, 그냥 다. 그냥 전부. 전 정말 다 괜찮은데…….

“결혼 축하한다.”

이어진 어머니의 말이 헝클어진 생각을 가위로 끊어 냈다.

“잘 살았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어머니가 캔버스 옆의 서랍을 열었다. 포장된 상자를 들고 다가오는 어머니를 나는 조마조마하게 맞이했다.

발이 자꾸만 뒤로 물러서려고 해 안간힘으로 버텨야만 했다.

“이거, 결혼 선물이야.”

어머니가 내 앞에서 상자를 열었다.

“예식 이후에 줄 건 따로 있는데 이건 내 손으로 주려고 골랐어.”

검은 벽조목으로 깎은 염주에는 유려한 붓글씨로 경전이 새겨져 있었다. 어머니를 따라 절에 드나든 기억이 있었으므로 나는 몇몇 구절을 알아보았다.

“가지고 있으면 오래 산다고 하더라.”

[살아서는 질병의 고통 없이 장수하고 죽어서는 극락정토에 도달하기를.]

한 자씩 새겨진 글자를 더듬으며 어머니가 염주 알을 한 바퀴 굴리고는 내 손목에 채웠다.

화끈한 기운이 눈언저리로 끼쳤다. 나는 울지 않으려 입 안의 살을 모질게 깨물었다.

“이건 아이한테 줘.”

이어서 나온 상자에는 오색 실로 짠 팔찌가 들어 있었다.

[아프지 않고 오래 살기를.]

그것은 유민이가 갖지 못한 것이었고, 그런데도 어머니가 지금 나와 아이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만 가 봐도 돼. 할 말은 다 했어.”

어머니는 이전의 대화가 없던 일인 듯 건조하게 말했다. 어릴 적에는 이러면 나한테 화가 난 거라고 착각하곤 했었다.

나는 안녕히 계시라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황망히 고개만 숙였다. 작업실을 빠져나간 지 얼마 안 되어 뒤에서 어머니가 다시 나를 불렀다.

“잠시만.”

심장이 덜컹댔다. 아직도 지금까지 들은 말은 전부 거짓말이고, 당장이라도 질책을 당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하나만 부탁할 게 있어서.”

나를 붙잡고서 어머니는 빠르게 말했다.

“유민이가 너 피아노 그만두고 늘 아쉬워했었어. 네가 치는 피아노 소리가 제일 좋았다면서.”

기억한다. 유민이는 내가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다른 놀이를 하다가도 잽싸게 달려와 내 옆에 앉았다.

“다음 기일에 미사가 있어. 한 번 쳐 줄래?”

나한테 그럴 자격이 있을까.

“……그럴게요, 꼭.”

여전히 의심하면서도 나는 약속했다.

혹시나, 하는 희망이 다시 나의 폐부를 불사르고 있었다.

간신히 비틀거리지 않고 대문을 걸어 나와,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돌자마자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무렇게나 찾아 들어온 골목은 좁고 어두워서 숨기 좋았다. 어깨를 말고 숨을 몰아쉬는 차에 옆에서 발소리가 크게 들렸다.

“무슨 일 있어요?”

익숙한 목소리를 듣자 치밀던 울음이 사그라들었다.

“여기 어떻게…….”

나는 멍청해 보일 게 분명한 표정으로 망연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울기 직전이라 코가 알알했고, 입은 어느새 벌어져 닫힐 줄 몰랐다.

지금 골목 벽을 짚은 채 내게로 몸을 숙이고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최사헌이었다.

상상도 못 했던 인물이라 혹시 환각이라도 보나 싶어졌다.

“보이길래요. 혹시라도 놓칠까 봐 뛰어왔네.”

“보였다고요?”

“이쪽으로 오는 길이었거든요.”

들을수록 모를 얘기다. 멍해진 내게 최사헌이 다시 설명했다.

“오늘 집에 들른다길래 걱정돼서 와 봤습니다. 어머님께 인사도 드릴 겸.”

“그걸 기억했어요?”

“못 할 이유가 있습니까. 오길 잘했네.”

“당신은 항상 어떻게 이렇게 나타나. 어이없어…….”

“타이밍 좋았다는 말로 듣겠습니다. 집에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은 거예요?”

“아니에요.”

“아니면 왜. 혹시 백유민 씨 지분 관련으로 문제 있는 거면, 굳이 무리할 필요 없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말없이 고개만 젓자 최사헌은 좁은 골목을 굳이 비집고 들어와 내 옆에 앉았다. 덩치도 산만 한 사람이.

“말해 봐요. 또 나도 무슨 일 있었는지 얘기해야 말해 줄래요?”

“무슨 일 있었는데요.”

“일했지, 난.”

재미도 없고 어처구니도 없는 대답이건만, 최사헌이 했다고 듣기 좋은 건 무슨 조화일까.

“이거요.”

대뜸 손목을 내밀자 최사헌이 잘그락대는 염주를 더듬었다.

“팔찌?”

“내 결혼 선물이에요.”

“어머니가 주셨어요? 잘됐네.”

어조가 묘했다. 옆을 돌아보자 최사헌은 모호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이제 최사헌이 언짢아하는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

“마음에 안 들어요?”

최사헌의 입매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 부모님이 마음에 안 들어. 당신은 이런 선물하고 말 몇 마디에 다 용서했을지 몰라도. 아니, 애초에 미워하지도 않았던 것 같지만.”

“……미울 일 없었으니까.”

미워할 자격이 없었으니까, 나한테는.

최사헌은 여전히 미소를 걸친 채 나를 응시했다. 웃음기가 스민 눈동자가 안에 비친 나를 가두듯 좁아진다.

“백유성 씨는 너무 착해서 탈이에요.”

착한 사람은 복수심 때문에 남을 속이지는 않을 텐데. 그래도 최사헌이 나한테 착하다고 말해 주는 게 싫지 않아서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당신은 너무 마음이 약해. 모든 일에 책임감을 느끼지. 좀 뻔뻔해질 필요가 있어요.”

히트 사이클을 맞았으면서 친하지도 않은 남자의 사무실에 들이닥친 정도면 충분히 뻔뻔했다고 생각한다.

최사헌은 나를 실제보다 더 좋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더 선하고, 더 연하고, 더 아름답게.

이번에도 정정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싫지 않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요. 이제부터는 훌륭한 파렴치한으로서, 내가 지켜 줄 테니까.”

“그게 뭐예요.”

뜬금없는 선언이라 웃음이 나왔다. 최사헌하고 있으면 웃을 일이 많다.

“별로 파렴치한 같지는 않은데. 엄청 고지식한 신사면 모를까.”

“당신은 내 좋은 부분만 봤으니까.”

최사헌이 슬쩍 고개를 기울이자 그림자가 한쪽으로 쏟아졌다.

“당신이 상상도 못 할 만큼 비겁하고 지독할 때도 있어.”

안 그래도 선이 날카로운 얼굴이 먹빛 그림자를 빨아들이자 강렬한 콘트라스트가 만들어졌다. 만일 이게 악당의 얼굴이라면 나는 기꺼이 불의에 마음을 팔 준비가 되어 있다.

“정말로?”

“정말로.”

“섹시할 것 같아.”

내 솔직한 감상을 들은 최사헌이 목을 젖히고 웃음을 터뜨렸다. 도드라지는 울대뼈가 섹시했다. 최사헌은 하는 짓마다 대체로 섹시한 편이다.

“안 그래.”

“나중에 꼭 보여 줘요.”

“하더라도 유성 씨는 모르게 할 겁니다.”

“나도 보고 싶은데. 비겁하고 지독한 최사헌.”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안 보여 주고 싶은 모습이에요.”

앞에 나온 말 때문에 이전까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모조리 잊혔다.

나는 시멘트로 다져진 길 아무 데나 시선을 내던졌다.

좋아하냐고 되묻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대신에 손목의 염주를 한 알씩 돌렸다. 무량수불, 무량수불. 절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면서.

극락에는 가지 못해도 좋다. 나는 어차피 번뇌가 많아 정토에는 도달할 수 없다.

“이 팔찌에 새겨진 거, 『장수경』이에요.”

“오래 살라고?”

“응.”

대답하며 최사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시야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최사헌은 묵묵히 내 무게를 받쳐 주었다. 곧 뺨에 미지근한 손바닥이 감겼다.

끌어당기는 손길에 저항하지 않고 턱을 들었다. 눈을 감자 와 닿는 입술이 한층 생생하게 느껴졌다.

지저분한 골목일 뿐인데 지금 내게 이보다 낭만적인 장소는 없을 것만 같았다. 살면서 이토록 좋은 골목을 지나 본 적이 없다.

이제 막 알게 된 세상의 길목들은 환하고 풍경이 좋았다.

최사헌이 나를 더 세게 안았다. 나는 최사헌의 목덜미에 서슴지 않고 팔을 감는다. 손목의 염주가 잘각댔다. 마음이 요동쳤다.

살고 싶었다.

어쩌면 사는 동안 처음으로.

* * *

파도가 인다.

물결마다 흰 포말이 바르르 끓어오른다. 짭조름한 공기를 빨아들이며 사헌은 계속 걸었다.

울퉁불퉁한 갯바위 한구석에 낡은 점퍼가 날리고 있다. 홀로 앉은 등을 확인한 사헌이 발길을 멈췄다.

“전 아직도 가끔씩 궁금해져요.”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사헌이 둑 한쪽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가 우연조 씨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고.”

사헌의 바로 옆에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노인이 앉아 있었다. 새치가 섞여 회색이 도는 수염이 노인의 인상을 지저분하게 덧칠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던 노인은 사헌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검푸른 바다만을 바라보았다. 잔잔한 파도가 바위 밑을 쓸면서 지나갔다.

“제 아버지 탓을 하기엔 10대부터 상태가 심했다고 들었거든요.”

알은체도 하지 않는 노인의 옆에서 사헌은 계속해 말을 이어 갔다.

“가족력인 건지.”

“네놈을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자식이 들여보내 줬냐?”

더는 참지 못하고 노인이 불퉁하게 쏘아붙였다.

노인이 돌아본 뒤쪽에는 낚시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몇 서성이고 있었다. 하릴없이 갯바위 부근을 돌아다니는 낚시꾼으로 보이지만 전부 경호업체 직원들이다.

“어쨌든 호적상으로는 손주인데 어쩌겠어요. 죄 없는 사람들 잡지 마세요. 아, 곧 물리겠네요.”

사헌이 우태영 회장의 낚싯대 근처를 가리키며 말했다.

“피아노 말입니다.”

우연조의 유품을 입에 올리는 순간 우태영이 들고 있던 낚싯대가 크게 요동쳤다.

“저한테 사 가세요.”

낚싯대가 흔들리는데도 릴을 감을 기미도 없이 태영은 사헌을 쏘아보고만 있었다. 이내 벌어진 입 안에서 유독 뾰족한 송곳니가 빛났다.

“망나니 같은 놈.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거친 욕설을 쏟는 태영을 사헌은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지난한 과거사를 털어놓는 중에 유성에게는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우태영과 우연조, 사헌의 관계는 많이 생략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우태영이 딸의 피아노를 원했다는 것. 사헌이 일부러 그것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랬다.

“이제야 팔 마음이 들었다고?”

범보다는 뱀을 연상케 하는 찢어진 눈매가 사헌을 노렸다.

갖은 추잡스러운 짓을 마다하지 않고 기업을 끌고 온 우태영에게서 더러는 눈빛만으로도 스산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고들 했으나, 사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예, 이제야. 그러니까 저한테서 사 가세요.”

“용돈이라도 필요하냐? 잘나간다는 말은 다 헛말이었나, 여기까지 와서 피아노나 팔…….”

“최문경 사장이 경영권 맡은 화진 의류, THE 백화점, 호텔 아큐인까지.”

심상히 이어지는 얘기에 태영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남의 걸 어떻게 팔겠다는 거야.”

“범운을 쪼갤 겁니다.”

“허!”

“당기시죠. 놓치겠어요.”

건방지게 누구한테 이래라저래라냐고 투덜거리면서도 태영은 힘차게 줄을 감았다.

퍼덕거리는 날생선이 바닥에 내던져졌다. 물방울이 튀어 올라 사헌의 턱에 튀었다.

묵직한 참돔이 지느러미로 땅을 때렸다. 사헌이 익숙하게 맨손으로 생선을 잡아채 바늘을 빼고 양동이에 집어넣었다.

참돔은 사헌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려 쉬지 않고 퍼드덕거렸지만 저항은 무용했다. 부려 놓은 짐에서 생수를 꺼내 손을 씻는 사헌을 태영은 기막힌 얼굴로 쳐다보았다.

“제정신이 아니구만.”

미친놈. 계속 이어지는 욕설에도 사헌은 미끼가 물리기를 기다리는 낚시꾼처럼 태연했다.

“너같이 정신 나간 놈을 후계자로 생각하면서 최종필이는 발 뻗고 잘 자던? 나 같으면 여름밤에도 모골이 송연해서 깰 건데, 늙고서 감이 다 떨어졌나.”

“제 제안에 흥미는 있으신 거죠.”

“쓸개 빠진 놈.”

뭐라고만 하면 욕이다. 익숙했다. 태영의 공격적인 태도는 사헌과 처음 만난 무렵부터 줄곧 이어져 왔다.

하물며 첫 만남은 딸의 장례 미사였는데도.

갓 스물 초입의 사헌에게도 태영은 똑같이 괴팍스러웠다.

사헌은 어느 정도 태영의 적의를 이해했으며, 얼마쯤은 평생이 지나도 이해 못 할 인물이라고 여겼다.

“너란 놈은 처음 봤을 때부터 인상이 싸해서는,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놈이었어.”

“제가요.”

“그래, 네놈 자식이. 구렁이 같은 놈.”

태영이 이를 갈았다.

‘피아노는 그냥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겨우 스물을 넘긴 사헌의 애티 나는 얼굴을 앞에 두고 당시의 태영은 황망함을 숨기지 못했다.

‘유언 내용이니까요.’

와락 일그러지는 태영의 흉흉한 기세를 보고도 사헌은 무심했다. 1년 반을 난방도 들지 않는 창고에서 지내느라 사헌은 지금보다 여위었었다.

습기가 심한 날이면 아직도 손가락이 완전히 펴지지 않았다.

‘너한테는 쓸모도 없는 걸 왜.’

그야 당신한테는 필요하니까.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태영은 아마도 사헌의 의중을 읽었으리라.

흥분하는 그를 보좌진이 말리는 동안 사헌은 저 무덤 같은 피아노를 짊어지고 살 생각으로 피로했다.

우연조와 우태영은 닮았다.

특히 쓸데없으리만큼 적개심이 넘치며 파괴적인 면모가.

그러니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휘두를 칼로 적합하다.

“네 몫도 빠지는 건데 왜? 가만히 있으면 목구멍에 다 쑤셔 넣어 줄 텐데. 야, 진규야! 이거 가서 회 떠 와라.”

태영의 부름에 뒤에서 어슬렁거리던 남자가 재빨리 뛰어와 양동이를 받아 갔다. 아직도 안에서 참돔이 펄떡거리며 몸체를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제가 올라가는 거, 최문경 사장이 보고만 있진 않을 겁니다.”

“붙어서 이길 자신이 없어?”

“이겨도 결과가 제 마음에 들 것 같지 않아서요.”

“핑계는.”

“어쨌든 이기긴 할 겁니다.”

“이기고 쪼개겠다는 거면 더 정신 나간 소리야. 이기긴 어떻게 이길 건데?”

“TY에서 지원하시죠.”

사헌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시계를 차지 않은 손목에 새하얀 금이 두드러졌다.

“갚으세요, 빚.”

흉터가 매끈하게 빛났다. 태영의 미간 사이에 상처만큼이나 깊은 골이 팼다.

사각으로 각진 턱 근육이 세차게 울럭거렸다. 그 순간 태영이 갑자기 낚싯대로 후려치려 들더라도 사헌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태영은 다시 시큰둥한 얼굴로 돌아왔다. 뼈가 불거지도록 억세게 낚싯대를 움키고 있는 태영의 손등을 사헌이 흘깃 일별했다.

“지 팀장은?”

“다른 일 중입니다.”

“아쉽게 됐구만.”

“지서희 씨 자주 찾으시네요.”

“너보다 얼굴 보고 있기 훨씬 나으니까. 너 경호하려고 붙었던 양반이 어디 다른 일을 하러 갔냐?”

“다른 사람 지키러요.”

“누구.”

“있습니다, 저보다 중요한 사람.”

“얼씨구.”

태영이 기찬 한숨을 토했다.

“너 연애하냐?”

“저 결혼합니다.”

사헌의 대답은 명료했다. 태영이 질린 듯 고개를 흔들었다.

“결혼 때문에 이래? 사촌 두 놈이서 치정에 미쳤다는 얘기가 영 헛소문은 아니었구만. 너무 섣불러.”

“언젠가 할 일인데 앞당긴다고 달라질 거 없습니다.”

“달라질 게 왜 없어. 기반도 다 못 다지고 달려들 작정을 하니까 나한테까지 와서 도와주십사 고개 숙이고 있는 거 아니냐?”

“고개는 안 숙였습니다.”

“네 그 정신 나간 생각, 네 아비는 알아?”

“아버지도 결국 범운 사람이에요.”

최문경은 결국에 최종필의 딸이다. 사헌을 꼭대기에 올리더라도 최 회장은 가족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며, 이를 용납하지도 않으리라.

그렇게도 사랑한다던 아내를 끝끝내 범운으로 데리고 돌아온 아버지 역시, 별수 없는 범운 인간이었다.

“너는 아니고?”

태영의 뾰족한 물음에 사헌이 입매를 당겼다.

“실리콘밸리에서 사업 매각하고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했던 생각이 있습니다.”

“무슨 생각. 나 혼자서 지지리 삽질하며 땅 파는 것보다는 역시 남이 해 둔 거 받아먹는 게 낫다?”

“댐을 무너뜨리려면 안에서 깨는 게 빠르다.”

어린 최사헌을 제멋대로 끌어냈던 것처럼 최종필 회장은 미국에서 사헌을 귀국시키려 들 때도 거침없었다.

분노에 앞서 사헌이 느꼈던 감정은 의아함이었다. 저 사람한테는 내가 아직도 덜 여문 어린애처럼 보이는 건가.

아무 짓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하나?

자기 둥지로 끌어들이고 있으면서도.

최종필의 무방비함이 사헌의 삶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죄책감도, 생각도 없는 태도가.

“저는 원한은 잘 안 잊거든요.”

생존을 위해 범운에 들어왔다는 말의 절반은 맞고, 나머지 반은 틀리다.

적당히, 조용히 살아갈 생각이었다면 미국에서 맨손으로 시작했던 일을 계속해 나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연조 마지막에 보러 오지도 않은 거냐.”

“갔었어요.”

“곧 죽을 사람이 용서해 달라고 했으면 알겠단 말 한마디 정도는 해 줬어야지.”

“그래야 합니까.”

용서는 당한 이의 권리 아닌가.

사헌은 오히려 유성의 쉬운 용서를 신기하게 여겼다. 유성의 부모가 제 부모였더라면 사헌은 끝까지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렇듯이.

“후레자식. 연조가 너를 얼마나!”

“저도 할 만큼은 했어요.”

부들부들 떨리는 태영의 눈가를 바라보며 사헌은 똑바로 이야기했다.

대학 시절, 사헌은 중국의 사상가가 남긴 말을 일기에 여러 번 베껴 썼다. 고독하던 시절이었다.

그들이 나를 얼마든지 증오하게 두겠다. 나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우연조도, 우태영도, 내 핏줄들도.

그리고 지금은 무엇보다 최의현을.

유성이 부서지지 않게 하려면 한 발 일찍 움직여야 했다.

유성보다 먼저 최의현을 망쳐야 한다.

“그러니까 진정하고 일단 낚은 거나 드시죠.”

사헌이 뒤를 향해 눈짓했다.

소반을 받쳐 들고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남자가 슬그머니 그들 주변으로 다가왔다.

소반에는 초장과 간장, 먹음직스럽게 썰린 생선 살이 가지런하게 담겨 있었다.

태영이 씩씩거리던 숨을 터뜨리듯 뱉어 버리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횟감이 한둘씩 사라졌다.

“최문경이하고 걔 아들놈은 어쩔 건데.”

반투명한 횟감이 나무젓가락 사이에서 파들파들 흔들렸다.

“글쎄요.”

사헌은 얄팍한 횟감을 입에 넣고 오래 씹었다. 솜씨 좋게 회를 뜬 생선 살은 잔가시 하나 없었다.

“죽여 버릴까 봐요.”

음식물이 식도로 넘어가면서 울대뼈가 사납게 움직였다. 어느덧 거칠어진 동해의 파도를 사헌은 숨죽여 응시했다.

프랑스의 속담처럼, 복수는 차갑게 먹어야 가장 맛있다.

그리고 하나 더. 할 수 있다면 날것으로 먹어야 한다. 아직 팔딱댈 것처럼 싱싱한 것으로.

* * *

도저히 못 먹겠다.

“못 먹겠어요?”

최사헌이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어지간히 얼굴이 엉망이기는 한가 보다.

펼쳐진 도시락 내용물은 별로 특이하지도 않았다. 밥과 육류, 나물 반찬. 그런데 비린내가 나서 입에 댈 수가 없었다.

“차로 오래 오느라 멀미하나.”

“……좀 치워 주세요.”

평생 입맛이 까다로웠던 적이 없는데 오늘은 왜 이러지. 물잔을 입에 댔다가 훅 퍼지는 비린내에 고스란히 물렸다.

설마 이게 그 입덧이라는 건가. 입덧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껄끄러운 불안감이 몰려왔다.

“물도 못 마시겠어?”

“……비려.”

울적하게 답하는 내 앞에서 최사헌은 본인이 더 어쩔 줄 몰라 했다.

“다른 생수 사 올게. 주스나 차는? 임신 중에도 보리차는 괜찮다고 하던데요.”

“그냥 안 마실래요.”

도저히 넘길 자신이 없었다. 주스라는 말만 들었는데도 입이 시었다.

“집에 있는 게 나았겠어요? 지금이라도 쉬고 올라갈래요? 아니면 근처 호텔에라도 가 있든지.”

내 표정을 살피던 최사헌의 조심스러운 제안에도 나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최사헌이 뭘 걱정하는지는 안다. 공장은 멀쩡한 도시락 앞에서도 토기로 안색이 창백해지는 사람이 있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수습해 준다면서요.”

“그러긴 했는데.”

“그 수습이 옆에서 안 떨어지겠다는 소리일 줄은 몰랐어요?”

“……공장까지 같이 내려와서 사서 고생할 줄은 몰랐죠.”

최사헌은 바빴다.

이제 막 임신을 알아차린 배우자를 옆에서 돌봐 줄 시간이라곤 일주일에 하루 정도 쥐어짤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무척 바빴다.

그리고 나는 하루로는 부족했다.

“주변에 없으면 불안하단 말이야.”

내 몸속에 애가 있다는 건 공포 그 자체였다.

괴담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불길한 전조만 이어지다 끝에는 끔찍한 결말이 나는.

“정말 여기서 기다려도 괜찮겠어요?”

“연락하면 10분 내로 달려올 수 있는 거리에 있을 거라니까요.”

물론 여기서 달려오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최사헌이다.

애한테 문제가 생기면 최사헌이 어떻게든 할 거다. 그 믿음이라도 없으면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다.

“일 열심히 하고 빨리 돌아와요. 최대한 빨리.”

대놓고 닦달하자 최사헌이 흘리듯 웃었다. 꼭 몹시 귀여운 거라도 본 양 온화한 미소라서 목구멍이 간지러워졌다.

“쉬고 있어요.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얘기하고요.”

최사헌이 나가자 나만 남았다.

아니, 나하고 아이만.

5주 남짓이면 이제 겨우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시기라는데. 팔도 없고, 다리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는 때다.

그러니 생명체라고 부르기에도 모호한 감이 있었다. 내 생각에는 그렇다.

머리로는 아직 분열된 세포 정도란 걸 알지만, 무서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둥글게 몸을 말고서 나는 모아 세운 무릎 사이로 머리를 숨겼다. 차단된 시야가 답답하면서 안락했다.

“넌 분명 나를 미워하게 될 거야.”

요즘은 나도 모르게 애한테 말을 걸게 된다. 아직 청각 기관이 발달하지 않아서 들리지도 않을 텐데.

나사 빠진 사람처럼 시시한 생각을 늘어놓으며 팔로 무릎을 감쌌다. 배를 보호하고 있으면 안정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최사헌은 괜찮은 사람이야.”

일하는 데로 따라가겠다는 고집을 피우는 내게 최사헌은 그다지 난처해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편하게 갈 수 있도록 차를 살피고 도착한 후에도 바로 일하러 가는 대신 내 안부를 보살폈다.

내가 보기에도 지금 난 이상했다. 한 군데 망가진 기계처럼 굴고 있는데, 최사헌은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대하지 않는다.

“아마 좋은 아버지가 될 거야.”

나는 듣지 못할 아이에게 속삭였다.

그 사람은 널 상처입히지 않을 거야.

내가 알아.

그 사람은 나를 다치게 하지 않거든.

“그러니까 너도 나보다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말소리가 사그라지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나도 모르게 소파 등받이가 흔들릴 정도로 움츠러들었다.

처음 본 남자가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아, 그, 상무님 약혼자분, 맞으시죠.”

남자가 먼저 내게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일그러진 얼굴이 벌그죽죽했다.

“그으……. 근처 지나가다가 사, 상무님 여기 계시나 하고요. 누구 있나 싶어서 열어 봤는데, 예.”

“어디 아프세요?”

여기는 왜 들어왔나 싶어 말을 들어 보려고 했는데 더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얼굴은 시뻘게져서는 땀범벅에, 하는 말마다 알아듣기도 힘들게 횡설수설이다. 남자는 아파도 크게 아파 보였다.

“아, 아니, 아뇨…….”

헐떡대는 숨소리가 아까보다 커졌다. 문득 머리에서 경고등이 깜빡였다.

알파 페로몬이 느껴졌다.

상대의 페로몬을 느낌과 동시에 오싹한 한기가 살갗을 타고 내려왔다.

왜지.

뭐지. 나는 소파를 더듬거리며 붙잡을 만한 것을 찾았다.

손가락이 저렸다. 방어 태세에 들어간 몸이 혈류를 손끝까지 밀어 보냈다.

남자가 비틀거리며 내 쪽으로 발을 디디는 찰나에 누군가 남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지 팀장님?”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남자의 뒤에 선 지서희는 전에 없이 살벌한 표정이었다. 평소와 비슷한 무표정인데도 그랬다.

“이만 나가 보셔도 됩니다.”

지서희가 냉기가 풀풀 날리는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저게 바로 전장에 서 본 군인의 눈빛인가 싶을 정도였다.

“아……!”

꼭 최면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남자가 빠르게 눈을 껌뻑거렸다.

“예, 시, 시시, 실례했습니다!”

남자가 허둥지둥 자리를 뜨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지서희는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 팀장님은 언제 여기까지 오셨어요?”

“상무님께 아침에 연락받았습니다. 그보다, 유성 씨.”

지서희는 나와 미묘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문을 닫지도 않고 문가에만 서서 들어오지도 않으려고 들었다.

“지금 억제제는 못 드시는 거죠?”

“……아.”

그 말을 듣고 나니 바보처럼 입이 벌어졌다.

방금 무슨 상황이었는지 이해가 가려고 한다.

아까부터 밀려온 비정상적인 느낌들이 무엇인지 감이 잡혔다. 그렇지만 그럴 리가 없는데.

“혹시 저 지금 히트 사이클이에요?”

내가 묻고도 어이가 없는 질문이었다. 지서희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 * *

“대체 몸에 무슨 짓을 하셨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아니요.”

털어놔야 함을 알면서도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공장 의무실을 차지하고 앉은 가운 차림의 남자가 무테안경을 고쳐 썼다. 안경알 너머로 눈동자가 차갑게 번득였다.

흰 가운을 걸친 의사의 손에는 약식 채혈 키트가 들려 있었다.

“한마디로 개판.”

이어서 나오는 결론도 눈빛만큼이나 차디찼다.

“호르몬이고 뭐고 개판이에요. 임신 중에 히트 사이클이 온다니 환자분이 듣기에도 정상은 아니죠?”

“……네.”

최사헌이 소환해 준 범운의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거침없는 입담의 소유자였다.

가운에 파란 실로 수놓아진 길인혁, 세 글자가 선명했다.

“지금은 운 좋게 주기 증상이 별로 심하지 않나 본데, 복불복이에요. 원래 히트 사이클이 불규칙했다고 하셨죠? 앞으로도 똑같습니다. 강도, 빈도, 기간, 전부 불규칙할 테니까 뽑기 운이 잘 돌길 비십쇼.”

들을수록 가슴이 답답했다. 몸이 엉망인 건 알고 있었으나 지금은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혹시 애한테 지장이 있나요?”

“있죠, 당연히.”

나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 반응을 본 길인혁이 한숨 쉬었다.

“조심하셔야 돼요. 병원 자주 가시고. 최근 진단 내용 확인해 보니 그래도 지금 발달상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아무튼 임신 중에 억제제는 못 써요.”

“네.”

“네, 가 아니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야 할 타이밍인 것 같은데요.”

“…….”

“사이클을 억제제도 없이 어떻게 버티시려고요.”

참아 볼 생각이었다. 내가 답을 망설이자 길인혁이 답답한 듯 숨을 푹 쉬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잔소리가 쏟아질 타이밍에 안으로 들어온 최사헌이 목인사를 했다.

“죄송할 것까지야. 상무님은 워낙 바쁘신 분 아닙니까.”

길인혁은 손을 들어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틀림없이 최사헌이 고용주일 텐데. 원래 말투가 저런 사람인가. 혹시 빈정거리는 건가 헷갈렸다. 최사헌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으로 내 옆자리에 앉았다.

“어디까지 얘기하셨죠?”

최사헌의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양 길인혁이 다시 안경을 올렸다.

“잠자리는 자주 합니까?”

“…….”

“…….”

“다 큰 어른들이 왜 이래? 했으니까 애가 생겼을 거 아니에요. 초기니까 지금은 안 할 거고, 원래 자주 해요?”

“임신 확인 전에는 규칙적으로 했습니다.”

최사헌은 담담히 말하는데 듣는 내 귀가 타올랐다.

“아까 환자분한테도 말씀드렸는데 약은 못 써요. 웬만한 약으로 잡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요.”

“그럼 그냥 제가 참고 지내면…….”

“참긴 뭘 참아요. 그런다고 되겠어요?”

그간 쌓은 업이 있어서 혼날 때마다 기가 죽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약을 퍼부어 댄 건 나인데 애가 잘못된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몰래 입술을 감쳐물며 배를 더듬었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잠자리 계속 가지세요.”

길인혁은 상쾌하리만치 거침없이 진단을 내렸다.

“……초기인데요?”

“예, 12주까지는 삽입은 피하세요.”

7주. 옆에서 최사헌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에 저절로 열이 올랐다.

“오럴 섹스도 안 하시는 게 좋고요. 청결에 각별히 주의하시고 나중에 삽입하더라도 콘돔은 필히 착용하셔야 합니다. 복부 압박 조심하시고 이상 증세가 있으면 즉시 중단하세요.”

혼나는 것도 아닌데 자꾸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의사한테 조언을 듣는 중인데 왜 최사헌과의 지난 섹스가 떠오르고 난리인지.

“본래 주기는 파트너하고 보내는 게 안정적이에요. 옆에 있는데 썩힐 필요 없잖습니까?”

“사헌 씨가 바빠서요…….”

“아, 그럼 다른 알파라도 구하시든지.”

“길인혁 선생.”

가만히 듣고만 있던 최사헌이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말 가려서 하라고? 알겠습니다.”

곧장 숙이기는 했으나, 여전히 태도는 건들건들했다. 최종필 회장한테도 저럴까. 어쩌다 범운 주치의가 됐는지 궁금한 인물이다.

“최 상무님, 배우자분 잘 돌봐 주세요. 보아하니 건강 챙기는 데는 능력이 영 없는 분인가 본데.”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미소 짓는 최사헌의 답변은 칼 같았고, 거기에 같으면서도 영판 다른 웃음으로 응수하는 길인혁은 방패 수준이었다.

“알아서 하지 말고 더 듣고 가세요, 둘 다.”

* * *

역시 나는 의사하고 잘 안 맞나 보다.

이제는 하다 하다 의사 선생님께 성생활 지도를 받을 줄이야.

“괜찮아요?”

그것도 최사헌이랑 같이.

옆에 앉은 최사헌을 곁눈질하자 최사헌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태연히 나를 돌아보았다.

불려 온 주치의가 떠난 의무실은 왠지 너무 조용하게 느껴졌다. 단둘만 있는 게 쑥스러울 일도 아닌데 아까 들은 진단 내용이 내용인지라 아직도 최사헌처럼 여상한 얼굴을 할 수가 없다.

“괜찮고 말고 할 게 있습니까?”

“아니, 민망하잖아요.”

“의사한테 섹스 얘기 듣는 게 민망해요?”

“안 민망해요?”

“저쪽은 직업인데요. 나한테 들이댈 때는 가차 없더니. 왜 의사한테는 수줍게 굽니까?”

“그거랑 그거랑은 다르니……까.”

“왜 순진한 도련님처럼 굴지?”

경고도 하지 않고 최사헌이 내 코앞까지 고개를 숙였다. 무게중심이 바뀌면서 천으로 된 긴 소파가 조그맣게 삐걱댔다.

심장이 귓전에서 북을 친다.

다 벗고 뒹굴다 애까지 만든 사이인데 고작 쳐다보는 것만으로.

“히트 사이클이라더니.”

“…….”

“정말 지독하게 다네.”

내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최사헌이 조그맣게 목을 울렸다.

“이래서 날벌레가 꼬였구나.”

귓속에서부터 찌르르, 이제는 익숙해진 전율이 일었다.

꼭 침대에서 최사헌에게 만져질 때 같았다.

“지 팀장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아까 일이 있었다고요.”

“……별일 아니었어요.”

“글쎄.”

최사헌이 냉소했다.

“길인혁 선생이 드물게도 완벽한 베타라 다행이죠.”

그제야 나는 길인혁이 그 숙일 줄 모르는 뻣뻣한 태도로도 어떻게 범운의 주치의 자리를 얻었는지 이해했다. 형질에 좌우되지 않는 체질은 의료인으로서 귀한 자질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부른 거예요, 사실.”

최사헌의 손가락이 내 목덜미에 얹혔다. 간지러운 건지, 소름이 끼치는 건지 모를 감촉이 최사헌의 손끝을 따라 파도처럼 일었다.

“이런 거 남한테 맡게 하고 싶지 않아서.”

손길에서 드러난 독점욕이 혈관을 덥혔다. 피가 마구잡이로 돌았다.

최사헌이 쪼듯 입을 맞췄다. 녹을 듯 달콤한 키스였다. 나는 이미 고온에 노출된 사탕처럼 끈적거렸다.

“여기 아직 공장, 안인데.”

의무실 침대가 바로 뒤에 있다.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는 그렇구나 싶었는데, 지금은 미치도록 신경 쓰였다.

“저번에는 휴게실에서 잘도 달려들더니. 왜 이렇게 새삼 부끄럼을 타?”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미소를 지으면서 최사헌이 눈가를 가늘게 접었다. 발끝이 다시 찌릿찌릿했다.

최사헌이 내는 특유의 향기, 알파 페로몬의 풍부하고 육감적인 향이 쏟아져 내렸다.

내가 비틀댈 것을 미리 안 듯 최사헌이 내 허리를 받쳐 안았다.

허벅지 사이가 덜덜 떨렸다. 당장이라도 무릎이 꺾일 것만 같았다.

최사헌의 고개는 이미 내게 가까웠다.

키스할 것 같아.

마른침이 넘어갔지만 최사헌은 그저 나를 안고 있을 뿐이었다.

“나 괴롭히지 마.”

말꼬리가 조금 떨렸다. 어쩌면 많이.

내 나지막한 호소에 최사헌의 눈매가 느리게 풀어졌다.

“그래, 알았어.”

믿을 수 없을 만큼 상냥하게 웃는다.

직접 전류를 가져다 댄 듯 심장이 찌릿찌릿했다.

“놔줘.”

가슴팍을 슬그머니 밀어내자 최사헌은 느리게 팔을 풀어 주었다.

“혼자서 설 수 있겠어요?”

나는 고개만 주억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온 얼굴이 화끈거렸다.

오히려 이전이 나았다. 최사헌이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때도 안 벗겨진 애처럼 모든 게 부끄러웠다.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가야죠. 그래도 한 시간 정도는 여유 있습니다.”

한 시간? 식사라도 하자는 건가 싶어 최사헌을 보자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최사헌은, 내게서 줄곧 눈을 떼지 않고 있었던 거다.

“사이클 끝날 때까지 배우자가 안정시켜 주라고 하잖습니까.”

최사헌은 무슨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 * *

“이럴 줄 알았으면 호텔로 가자고 나서는 게 아니었는데.”

최사헌이 탄식했다.

“내 탓 하는 거예요?”

뒷좌석에 불편하게 구겨진 채로 쏘아보자 최사헌이 고개를 저으면서 내 자세를 고쳐 주었다. 끌어안고는 자기 허벅지에 올라타게 했다.

벌써 지독하게 좋은 냄새가 났다. 살갗이 끈적거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짙은 알파 페로몬이 공기 중에 넘실거렸다.

넓다고만 생각했던 차 안은 비좁았다. 우리는 단둘이었다.

시내의 번듯한 호텔로 가던 차는 외진 강변도로에 급히 정차했다.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설명하기 힘들다. 최사헌이 먼저 못 참은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세워 달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우리 둘이 공범인 건 확실했다.

“예쁜 것 말고는 잘못한 게 없는데 어떻게 당신 탓을 하겠어?”

“와, 이제는 그런 말도 아무렇지 않게 막 하네.”

야유해도 최사헌은 얄밉도록 여유롭게 움직였다. 옷 속에 손을 넣어 옆구리를 찬찬히 쓸어 올리다 가슴을 아프지 않게 움킨다. 짧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예민하게 도드라진 유두를 슬그머니 더듬으면서 최사헌이 내 안색을 살폈다. 고작 그 정도에 녹아내렸다는 사실을 들키는 게 싫어 입술을 깨물고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박았다.

“아파?”

간지럽게 유륜을 쓰다듬는 손길은 애만 태웠다. 차라리 아팠으면 싶을 정도였다.

“언제까지, 만지기만, 할 거예요…….”

할딱대며 묻자 최사헌이 아까보다도 도톰해진 유륜을 세게 집었다. 임신으로 더 예민해진 탓인지 곧장 찌릿한 쾌감이 가슴에 뭉쳤다.

“만지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은데?”

귀여워하는 기색이라 때려 주고 싶어졌다. 알파 페로몬에 푹 젖은 몸이 흐늘흐늘 녹아내리고 있지만 않았더라도 그렇게 해 줬을 거다.

허벅지 안쪽에 연신 힘이 들어갔다. 몸 안쪽에서부터 젖는 느낌이 생생해서 슬슬 속옷이 걱정스러워졌다.

“아니야. 부족해…….”

소곤거림에 최사헌이 가슴을 아플 정도로 세게 잡았다. 민감한 살이 쥐어짜이자 눈물이 찔끔 났다. 그것조차 금세 쾌감으로 변한다.

상의가 구겨졌다. 방금까지 만지작거렸던 곳에 입술이 닿았다. 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돌기에 닿는 순간 쾌감이 배 안쪽을 지그시 눌렀다.

나도 모르게 아랫배로 손이 갔다. 배 속이 홧홧했다. 최사헌이 가슴을 빨다 말고 목을 울려 웃었다.

“빨아 주기만 해도 좋아?”

대답하는 대신에 어깨를 밀어냈지만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절로 튼튼하다는 감상이 드는 감촉이 신기해 다시 밀어 봤다. 최사헌은 그저 귀엽다는 표정이었다.

“조심하라고 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민망함을 떨치고자 중얼거렸더니, 최사헌이 보란 듯 제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았다.

모양 좋은 입술에서 젖은 손가락이 빠져나왔다. 타액으로 번들대는 손가락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배가 조여들었다.

“허리 조금만.”

안아 주는 팔을 따라 기대자 최사헌은 한 손만으로도 솜씨 좋게 버클을 땄다. 목에 팔을 두르자 바지가 허벅지 아래까지 내려갔다. 속옷이 끌려 내려온다고 생각했을 때 엉덩이 골을 적시며 긴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이미 젖어 있던 구멍이 느리게 벌어진다. 이물감에 급히 숨을 들이켰다.

손가락이 조심스레 왕복한다. 질척하게 흘러나온 체액이 점막과 손가락에 엉기면서 소리를 냈다. 귓가에 덩달아 열이 쏠렸다.

어디까지 들어올지만 집중하고 있던 차에 가슴을 물려 흠칫했다. 소스라치는 내 등을 껴안아 달래면서 최사헌이 가슴팍에 자잘한 입맞춤을 끼얹었다.

긴장이 풀어지자 본격적으로 둘로 늘어난 손가락이 안을 쑤셨다. 점막이 문질러지며 밀렸다. 숨이 헝클어졌다. 온통 물소리뿐이다. 그리고 헐떡임.

깊이 들어오는 게 버겁다고 느끼다가도 안달이 났다. 허벅지를 타고 미적지근한 액이 흘러내렸다.

이럴 때 매달릴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다. 최사헌의 가슴팍에 뺨을 비비면서 무작정 졸랐다.

“아…… 이런, 거 말고.”

“더 해 줬으면 좋겠어?”

“……응.”

“의사 선생님한테 혼나요.”

짓궂게 달래는 말이 문득 짜증스러웠다. 입으로는 애 어르듯 하면서 평소의 단정함을 벗고 성적인 긴장감을 드러낸 표정이, 거슬릴 정도로 섹시하다.

처음 최사헌에게 찾아갔던 때가 떠올랐다. 히트 사이클에 돌입한 오메가를 앞에 두고, 이래 봤자 손끝도 안 댈 거라고 하던 최사헌의 모습이.

공연히 서러워졌다. 노려보자 최사헌이 난처한 미소와 함께 입 맞췄다.

흐트러진 숨과 혈색이 도는 얼굴만 봐도, 아니, 공격적으로 끓는 알파 페로몬만으로도 최사헌이 겪는 욕정이 증명된다.

“넣어, 하, 아…… 줘…….”

귓가에 속삭이자 최사헌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팼다. 이 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넣어 주고 있잖아.”

“아니, 응, 흐윽…….”

“아니야?”

“이거 말, 아, 말고.”

“미치겠네.”

정말 미칠 지경인 게 누군데. 애가 탈 정도로만 건드리는 통에 이성이 너덜너덜하게 닳았다.

바라는 건 이보다 훨씬 난폭하고 절대적인 쾌감이었다. 단번에 꿰뚫고 안을 짓이겨 주는 감각. 눈이 글썽거렸다.

눈가에 스치듯 입술이 와 닿더니 곧장 키스로 이어졌다. 숨 막히게 혀가 엉키면서 입구까지 빠진 손가락이 손등에 걸리도록 쑤셔졌다.

신음이 목구멍으로 먹힌다. 응, 비음만 웅얼대며 울렸다. 목 뒤에 손톱을 세워 긁어도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섬약한 절정이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밀려오는 쾌락을 부정하고 싶어 몸서리쳤지만 나를 감싼 팔만이 더 조여들었다. 애달프고 달콤한 덫이었다.

* * *

“……이상해.”

나는 눈가를 가린 팔을 한참 만에 걷어 냈다.

아직도 온몸에 열기가 남아 있다. 달구어진 쇠가 서서히 식어 가듯 잔열을 꺼트릴 시간이 필요했다.

“밖에서 보였을까?”

차창을 톡, 두드리며 묻자 최사헌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흥분이 나른하게 깔린 얼굴이 야했다.

“안정시켜 준다더니.”

눈도 흘기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질책하는 것치고 지나치게 반짝이는 눈빛을 들킬 것이었다.

“그래서 호텔은 갈 거예요?”

질문하자 최사헌이 입술을 적셨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듯했다. 아까까지 내 몸을 핥았던 혀가 선정적으로 보였다.

곧 최사헌이 시계를 보는 것만 봐도 대답은 알 수 있었다.

“미안합니다. 일정이 빡빡해서.”

“일은 중요하죠.”

타박하거나 비꼴 생각은 없었는데 최사헌은 마음에 걸리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거기까지 가면 정말 못 참을 것 같거든.”

“됐어요. 나도 이제 안 조를 거니까.”

“또 해 달라고 울 거면서.”

“……아니거든요.”

언제 미안해했냐는 듯 최사헌은 능청스럽게 굴었다. 도망가고 싶기도, 좋기도 했다.

짙게 선팅된 창문에 하얀 것이 내려앉았다. 눈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갈대의 솜털이었다.

“내려도 돼요? 잠깐이면 되는데. 걷고 싶어.”

조금만 걸으면 갈대밭이었다. 요즘 시대에 갈대밭에 숨어서 정사라니.

“어차피 차 환기도 해야 하니까.”

수긍이 떨어지자 나는 바로 문을 열고 내려섰다. 강변에 갈대가 우거져 있었다.

씨앗이 터진 갈대들은 보풀이 잔뜩 인 낡은 천처럼 흔들렸고, 그럴 때마다 황금빛 햇살이 솜털을 더욱 밝게 물들였다.

“안 추워요?”

“응.”

“귀가 빨간데? 내 코트 걸쳐요.”

“그러는 최사헌 씨는 안 추워요?”

“안 춥게 안아 줄래?”

나보다 훨씬 덩치 크고 어른스러운 남자가 팔까지 벌리며 귀여운 소리를 하고 있으니 웃음이 나왔다.

너울거리는 금빛 융단이 강물의 윤슬과 함께 반짝인다.

알맞게 서늘한 바람이 볼을 문지르며 지나갔다.

최사헌과 함께 보는 세상은 왜 이토록 아름다울까.

다른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까지 환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나도 다른 이들의 영원히 살고 싶다던 소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고 걸을까?”

온몸으로 안았는데도 최사헌이 더 커서 내가 안긴 모습이었다. 강변의 산책로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최사헌이 쾌활하게 제안했다.

“되게 닭살 돋고 낯부끄럽다. 싫어요.”

“좋으면서.”

최사헌은 나를 손쉽게 읽어 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챘다. 이제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편했다.

이대로 살아가도 되지 않을까.

나약하고 간악한 속살거림이 심장을 적셨다. 최사헌이 심어 놓은 희망은 이미 오장을 갉으며 전신에 퍼져 가고 있었다.

나는 최사헌의 등에 둘렀던 팔을 서서히 풀었다.

요즘은 이상하리만치 최의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들었다가도 최의현 꿈을 꾸는 바람에 깨어나 또 다른 악몽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희미하게 남아 있는 약지의 흉터를 만져 보았다. 반지를 빼려다 남은 흉터는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손목의 염주로 손가락을 옮겼다.

염주가 잘각잘각 돌아간다. 무량수불. 입속으로 그 말을 되뇌는 일이 버릇이 됐다.

속으로, 혹은 입 밖으로 아이에게 말을 거는 게 버릇이 되었듯이.

넌 어떤 사람이 될까.

최사헌을 닮았으면 좋겠어.

나는 아주 조금만 닮았으면 해.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나와 닮은 발가락을 가지고 태어난다면, 부디 네가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허락된다면.

나도 너를 지키고 싶어.

지키고 싶다니. 아무것도 지킨 적 없는 주제에.

문득 조그만 손이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섬찟한 예감에 사로잡혀 나는 우거진 갈대숲을 응시했다.

흔들리는 갈대 사이에 누군가 서 있었다.

강이 핏빛 노을로 물들어 스멀스멀 배를 깔고 기어 오고 있었다.

“유성 씨, 듣고 있어요? 어디 보고 있어.”

최사헌의 말은 바람처럼 나를 지나쳤다.

새빨간 손처럼 보이는 것이 갈대를 젖혔다.

나는 홀린 듯 그곳을 응시했다. 두려워하면서.

“백유성.”

유민이가 보일 거라 생각했다.

“내가 해 줄게.”

갑작스레 눈가가 어둠으로 덮였다.

최사헌의 손바닥이 내 눈가를 감쌌다. 손가락 틈으로 샌 빛이 붉게 반질거렸다. 빛이 통과한 살과 피의 색이다.

“조금만 기다려요. 당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 내가 대신해 줄게. 당신 동생 기일 미사에 갈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최사헌이 만들어 준 그림자 속에서 나는 내 모든 고백을 듣고 최사헌이 지었던 표정을 떠올린다. 그 강렬한 어둠의 대비. 어금니가 악물린 턱에 가늘게 패이던 흠.

쏟아 내는 대신 안으로 벼리고 가두던 최사헌의 분노를.

그리고 그가 화를 내서 난 기뻤다.

“그러니까 당신은 좀 쉬면 안 될까.”

이 얼마나 부드러운 암흑인가.

“나도 당신하고 살고 싶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오래오래.”

“…….”

“우리 아이하고도.”

우리.

입술만 달싹여 흉내 내 보았다.

발음이 좋다.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최사헌이 가둬 놓은 어둠과 그 틈새의 빛이 눈꺼풀 틈을 유영했다.

“내가 원하는 건 뭐든 해 주겠다면서요.”

보이지 않아도 입 맞추는 입술의 온도는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이 최의현보다 나를 더 많이 생각했으면 좋겠어.”

최의현 생각 같은 것, 지금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나랑 살고 싶어 하면 좋겠어.”

사랑의 반대편에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 복수의 반대말은 용서가 아니라 무심일 수도 있나.

죽음의 반대편에는 삶이, 충만하고 빛나는 삶이 있을까.

“나도.”

최사헌에게 소곤거리며 나는 스스로 눈을 감았다.

손목의 염주가 잘그락잘그락 움직였다.

미움도, 살의도, 번뇌도 다 내려놓을 수 있다면, 나도 극락정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 * *

염주를 돌릴 때마다 한자가 하나씩 돌아간다. 수레바퀴처럼 돌고, 다시 돌았다.

『장수경』에서,

악마 파순은 소년의 모습으로 부처님 앞에 나아가 게송한다.

‘늘 중생들을 핍박하면서도 인세에서 오래도록 살 수 있고, 혼미하고 마음이 방일해도 죽음으로 향하지 않는다.’

이에 부처께서는 악마를 알아보시고 게송을 설하셨다.

‘늘 중생을 핍박하고 악하게 굴면 세상에 태어나 수명이 매우 짧으리니. 열심히 닦고 정진하되 불에 타는 머리를 구원하듯 하라.

구도를 잠시라도 게을리하지 말라.

죽음의 악마가 갑자기 닥쳐오리라.’

* * *

아직 사위가 어둑한 새벽이었다.

눌러쓴 모자를 고치며 남자가 정원을 둘러보았다.

정원의 수풀들은 평소처럼 과묵했다. 정원사의 옆으로 잎새들이 꺼멓게 늘어졌다.

날이 제법 쌀쌀하건만 가장 볕이 잘 드는 곳에 심은 장미는 이때껏 만개 중이었다. 장미 덤불에서 꽃향기가 진동했다.

전지가위를 들자 금속의 묵직함이 정원사의 팔을 긴장시켰다.

순간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스산한 바람이 그림자와 함께 불었다.

정원사가 소스라치며 팔에 힘을 주었다.

무거운 가위가 장미의 모가지를 잘랐다. 아직 덜 핀 꽃이 싹둑 잘려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시커먼 그림자는 태연히 정원을 지나쳐 갔다. 언뜻 비치는 이목구비로 그의 정체를 가늠한 정원사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어디 가십니까, 도련님?”

밤도깨비라도 나타난 줄 알았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으며 정원사가 목을 가다듬었다.

의현은 멈추지 않고 바깥에 세워 둔 차를 향해 걸었다.

육중한 SUV 차량 앞에 도달한 의현이 하아, 새하얀 입김을 뿜어냈다. 흐려진 차창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자 뿌드득, 소리가 듣기 싫게 울렸다.

닦아 낸 유리창에 의현이 비친다.

습기가 닦이며 지저분하게 남은 빗금들이 의현의 얼굴에 얼룩을 만들었다.

“도련님?”

부름이 이어지자 의현이 멈췄다. 유리창 속 너저분한 의현은 서늘한 무표정이었다. 날이 잘 갈린 쇠같이.

“사냥이요.”

뒤돌아보며 의현은 웃었다. 어깨에 걸쳐 멘 길쭉한 가방이 흔들렸다.

정원사는 의아하게 입을 벌리고 서 있다가 뒤늦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의현은 이미 정원사를 보고 있지 않았다.

컴컴한 하늘 한구석에 박명이 어렸다.

일출이 다가온다.

새까만 새 떼가 무리를 지어 전깃줄 너머로 날아갔다.

꺽꺽.

어디선가 비명처럼 새가 울었다.

새벽의 도로는 검푸른 수면처럼 어두웠다. 의현의 차가 고속도로를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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