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랑의 찬가 An anthem of love
소나타가 연주되었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7번. ‘폭풍’이라는 별명을 가진 곡답게 연주는 빠르게 오르내렸다.
엇갈린 손가락이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오갔다. 음계가 거대한 파도처럼 쌓였다.
음이 일제히 부서지면서 소리가 끊겼다.
나는 피아노 건반에서 손을 떼고 옆을 바라보았다.
‘왜 멈췄어?’
갑자기 나타나 옆자리에 앉은 유민이가 천진하게 웃었다.
‘형이 치는 피아노 소리 듣기 좋아.’
그 애는 칭찬에 스스럼이 없었다. 좋은 것은 좋다고 했다.
그게 부러웠었다.
‘나도 같이 쳐도 돼?’
유민이는 내 옆에 앉아 「젓가락 행진곡」을 연주했다. 파파파, 파파파, 미미미.
나중에는 무슨 곡인지도 모르게 엉망진창으로 건반을 치면서 우리 둘 다 웃었다.
유민이 웃음소리는 피아노 소리와 비슷했다.
미미미, 레레레.
곡조는 점차 복잡하게 바뀐다. 단조로 이어지는 음악은 퍼붓는 빗소리 같았다.
나는 다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유민이는 보이지 않는다.
날쌔게 돌아가는 손가락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새하얀 피아노 건반에 선홍색 지문이 찍혔다.
연주할수록 피아노가 더럽혀진다. 음이 날카로워졌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다.
일어나고 싶은데.
쾅.
찢어지는 소음과 함께 피아노 덮개가 손가락을 내리찍었다.
고통이 부러진 관절을 찧었다.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눈을 뜨자 방이 새하얗게 번뜩댔다. 섬광이 주변을 표백한다.
빛이 지나가자 소리가 찾아왔다. 여러 개의 건반을 내리찍으며 악기를 부수는 소리였다.
천둥이 그친 다음 나는 손가락을 확인했다.
약지에 살색 밴드가 감겨 있었다. 구부렸더니 찌르르한 통증이 일었다.
널찍한 침대가 낯설었다. 침실은 말끔하고, 대부분이 무채색이었다.
최사헌의 사무실과 비슷한 풍경이다. 빳빳한 시트를 손바닥으로 더듬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발바닥에서 격통이 내달렸다. 발바닥을 쇠뭉치로 내리치는 아픔이라 목 졸린 신음이 샜다.
잠깐 등을 둥글게 말고서 숨을 골랐다. 발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군데군데 밴 연분홍색 핏물이 보였다.
“당분간 걸으려고 하지 마요.”
언제 왔는지 침대 문가에 선 최사헌이 내 발을 턱으로 가리켰다.
“누가 맨발로 운전을 합니까.”
내가 신발도 신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미친놈 같았겠다.
“뭐가 웃겨서 웃어? 차는 카센터에 맡겼고, 발에 박힌 유리도 전부 뺐는지 모르겠길래 병원 예약했어요. 점심 지나고 데려다줄 사람이 올 겁니다.”
“미안해요.”
우산을 쓰고 나를 붙잡던 최사헌이 기억났다. 다짜고짜 새벽에 불러내더니 맨발로 횡설수설하는 인간을 보고 최사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귀찮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금방 돌아갈게요. 몇 시죠?”
“6시. 그리고, 점심에 병원 데려간다는 내 말은 듣지도 않았어요? 그 몸으로 어딜 갑니까.”
여전히 최사헌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고의가 아니라, 아픔과 한기 때문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잠깐 손 좀 빌려줄래요.”
나는 양팔을 감싸 안고서 입술을 떨었다. 소매가 한참 길었다. 아마 최사헌의 옷이리라.
“너무 추워서.”
집이 춥지는 않을 텐데 점점 더 추워졌다. 윗니와 아랫니가 쉴 새 없이 부딪혔다.
최사헌은 천장을 향해 고개를 꺾고서 뭐라고 중얼거리다 내게 다가왔다. 침대 옆에 걸터앉자 무게감이 그쪽으로 쏠렸다.
다치지 않은 손을 가져가 잡으려던 최사헌이 금세 방향을 바꾸어 상처가 있는 손을 감싸 쥐었다.
약지가 눌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손등만을 감싸는 손은 크고 따뜻했다.
그것만으로 한기가 줄어들 리 없을 텐데도 착각이 일었다.
나는 똑바로 앉아 있으려 애쓰기를 그만두고 최사헌에게 머리를 기대었다. 최사헌은 느리게 자세를 바꾸어 내가 자기 품에 기댈 수 있게 해 주었다.
“아까 가지가지 한다고 욕했죠.”
“손이 지독하게 많이 간다고 했습니다.”
“그런 소리 처음 들어…….”
친모와 살 때나, 아버지 집으로 들어와서나 내 최고의 장점은 귀찮지 않은 애라는 거였다.
유민이와 달리 나는 뭐든 알아서 했다. 절대 먼저 요구하지 않았고 내 보호자가 뭘 원하는지 알고자 애썼다.
유민이가 최의현과 약혼하고 나서도, 손위 형제로서 어서 결혼해 줄 작정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그 애의 인생에서 사라져 주려고 했다.
최사헌도 지금 내가 삶에서 비켜나 주기를 바라고 있겠지.
“곧 출근해야 해요.”
“응.”
그러나 최사헌의 품은 따뜻해서 기분 좋았다. 나는 아팠고, 지나치게 추웠다.
노곤한 잠기운이 몰려와 최사헌의 가슴에 더 편하게 머리를 기댔다. 출근 얘기에 언제 대답했냐는 듯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나를, 최사헌은 곤란한 티가 역력한 얼굴로 보았다.
“고양이가 무릎에 올라오면 왜들 발에 쥐가 나도록 움직이지도 못하는지 이제 알겠어.”
차분한 중저음이 언제 들어도 참 듣기 좋다고 생각하며 힘을 뺐다. 내가 체중을 한껏 실어도 최사헌은 넘어가기는커녕 가구라도 되는 양 단단히 나를 지탱했다.
“나 정말 가야 돼.”
최사헌이 내 손목을 문질렀다. 여전히 온몸을 늘어뜨리고 올려다보자 최사헌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이대로 버티면 언제 밀어낼지 궁금했으나, 그쯤 하고 상체를 세워 최사헌의 볼에 입 맞췄다. 씻은 지 얼마 안 됐는지 셰이빙 크림의 냄새가 났다.
놓아주었는데도 최사헌은 정말이지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자고 있어요. 점심에 깨우러 올 겁니다.”
한숨을 뱉으며 최사헌이 일어섰다. 따라 나가려 발을 내리자 칼날이 발을 쑤시는 듯했다. 나는 그의 등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최사헌이 사라지자 집 안은 물속 같은 고요에 잠겼다.
침대에서 최사헌의 냄새가 났다. 나는 커튼을 걷어 새벽하늘을 확인하고 눈을 감았다.
아직 빛이라기에는 어렴풋한 여명이 침대에 넘실거렸다.
기상 예보에서는 해가 뜨면 비가 그칠 것을 예고했었다.
* * *
길고 구불거리는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자는 자신을 지서희 팀장이라고 소개했다.
깍듯하면서도 사무적인 태도로 나를 대했고, 아마 알파였다.
고용인하고 고용주가 서로 닮았다. 지서희가 안내한 차조차 최사헌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일단 엑스레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도착하면 건강검진도 받아 보시죠.”
갑자기 고용주의 집에 나타난 사람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도 지서희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편안한 조수석에 기대고서 나는 안전벨트를 당겼다 놓으며 장난을 쳤다. 최사헌은 나한테 왜 이럴까.
정신이 들고 보니 새벽에 전화를 받아 주고, 집에 재워 준 게 모조리 의외였다.
춥다는 나를 안아 준 것도.
“최사헌 씨는 어떤 사람을 좋아해요?”
“……예?”
“궁금해서요. 이진주 씨 같은 타입인가.”
6개월인가 연애했다던데. 이진주는 시원스럽고, 거침없고, 자기주장이 확실한 미인이었다.
“이사님 사적인 취향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주 교과서적이다. 내가 고용주였더라면 이 대답을 듣고 만족했을 텐데.
“원래 그렇게 재미없게 대답해요?”
“죄송합니다.”
“제 이름 뭐게요.”
“예?”
“이름은 아나 해서. 백유성이에요.”
“성함은 이사님께 전달받았습니다.”
“이름만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잘생겼다거나 그런 얘기는?”
지서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나는 웃어 버렸다. 최사헌보다는 좀 건드리는 맛이 있다.
“지 팀장님 타입은 아니에요?”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에 든다는 뜻?”
“…….”
“마음에 드시면 이대로 병원 말고 놀러나 가도 좋은데.”
“업무 중입니다.”
“지금 나 귀찮아요?”
“…….”
“약간, 귀찮구나.”
운전석을 쳐다보면서 눈썹을 기울여 무너뜨렸다. 지서희의 눈길이 잠깐 나를 지나쳤다.
“그래도 많이 싫지는 않죠?”
“……물론입니다.”
“너무 싫어하지 마요.”
나 싫어하는 사람은 이미 너무 많으니까. 내가 나서서 귀찮게 건드리고 할 말은 아니지만. 이제 입을 다물어 주려 뒤통수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귀찮게 생각 안 합니다.”
묵묵히 운전하던 지서희가 말했다.
“……잘생기셨고요.”
머뭇거림을 지나쳐 붙은 말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최사헌과 닮았다.
* * *
발에 남은 유리 조각은 없었고, 봉합해야 하는 상처가 있어서 몇 바늘 꿰맸다.
의사는 처치가 잘돼 있다고 칭찬했다. 최사헌이 새벽에 나를 데리고 들어와 씻기고, 갈아입히고, 상처를 수습했을 장면을 생각하니 미처 빼지 못한 유리 조각이 혈관 속을 돌아다니는 느낌이었다.
“요즘 식사는 잘 하고 계세요?”
“네.”
“주로 어떤 거 드세요?”
“그냥 밥이요.”
“마지막 식단이?”
“……그냥 밥.”
무성의한 대답에 의사가 질책 어린 눈빛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역시 나는 의사랑 안 맞는다.
마지막으로 뭘 먹었는지 기억해 내려 한참 머리를 굴려야 했다.
유민이 장례식 이후로 언제 식사라고 부를 만한 걸 했는지도 긴가민가하다. 최사헌하고 먹은 분식? 금방 토해 내긴 했지만 식사로 쳐야 하나.
“영양이 부족하면 상처도 제때 안 아물어요. 식사 제대로 하세요.”
“네.”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의사가 의심스레 힐끔댔다. 그래도 추궁이 더 이어지지는 않았다.
“제일 최근에 히트 사이클이 언제였어요?”
“그건 왜 물어보세요?”
질문이 형질 문제로 바뀌자 절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원래 상태가 이렇게 불안정한가 해서요.”
“원래 그래요.”
대답을 듣고도 의사는 마우스를 움직이며 고개를 기우뚱했다.
“원래……는 아닌 것 같은데?”
미심쩍은 혼잣말을 나는 입 다물고 흘려 넘겼다.
“다니던 병원 따로 있어요? 검진은 정기적으로 받고 있죠?”
“거기까지는 신경 안 쓰셔도 괜찮아요.”
“백유성 씨, 형질이 강하게 발현된 사람들은 몸 관리에 잘 신경 써야 해요. 알아차리기 제일 쉬운 지표가 히트 사이클이니까 물어본 거고요.”
“네.”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그만인 내 반응에 의사가 입을 세모꼴로 오므리더니 다시 모니터를 확인했다.
“근래 임신 계획 있으세요?”
“…….”
“확인차 물어보는 겁니다. 있어요?”
발이 따끔했다. 무의식중에 힘주어 바닥을 디딘 듯했다. 나는 상처투성이 발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네.”
* * *
펜트하우스 층에 자리한 최사헌의 집은 거실이 필요 이상으로 넓었다. 가구가 몇 없어서 그래 보이는지 몰라도 아주 최소한의 구색만 갖추었다는 느낌이다.
생활공간이라기보다는 물건들이 잘 배치된 모델하우스에 가까워 보였는데, 그래서 거실에 놓인 그랜드피아노가 더 눈에 띄었다.
콘서트홀도 아니고 아파트 거실에 최고급 피아노 브랜드의 커스텀 모델이라니. 이 피아노 한 대가 웬만한 신축 빌라 값이다.
피아노 표면은 먼지 한 톨 없이 반질반질하게 닦여 있었고, 뚜껑을 열어 음계를 눌러 보자 최근에 조율한 듯 올바른 소리가 났다.
나는 이끌리듯 피아노 앞에 앉았다. 변명하자면 거실 한가운데서 노을빛을 한 몸에 받는 그랜드피아노가 나를 부른 것만 같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숨을 내쉬었다. 사방의 공기가 잔잔히 가라앉는 듯했다.
건반에 올라간 내 손은 곧이어 꿈에서 연주했던 곡을 재현했다. 처음에는 헛돌던 손가락이 금세 안정을 찾고 다른 건반으로 질주했다.
라르고에서 알레그로로, 1악장은 빠르게 진행된다. 음률은 먹구름이 낀 해변의 파도 같다.
두 손은 자주 빠르기를 바꾸며 서로 선율을 주고받는다. 하나가 베이스를 치면 하나가 그 위에서 노래하는 식이다.
2악장으로 접어들면 곡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부드럽게 변한다. 몸부림치던 물결은 잔잔해졌다가, 다시 노래한다.
2악장을 치다 말고 손을 멈췄다.
인기척이 느껴져서였다. 피아노에서 눈을 돌리자 어느새 거실에 선 최사헌이 보였다.
“피아노도 쳐요?”
최사헌이 다가와 피아노 뚜껑에 팔을 걸쳤다.
“언제 왔어요?”
“방금. 열중해서 연주하길래 훔쳐 듣고 있었죠. 「템페스트」?”
“맞아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
“좋아하는 곡이에요?”
“음…… 네.”
미적지근하게 대답한 나는 이내 피아노에서 손을 뗐다.
17번 소나타를 작곡할 당시의 베토벤은 청력을 잃어 가고 있었으며 연인 역시 잃은 후였다. 나는 언제나 이 곡에 어린 상실에 마음이 끌렸다.
다 옛날 일이지만.
“허락도 안 받고 연주해서 미안해요.”
“버릇이 없는 건지, 엄청나게 예의 바른 건지 도통 모를 사람이네.”
혼잣말처럼 뇌까린 최사헌이 내 옆에 걸터앉았다.
“이거, 최사헌 씨가 치는 피아노예요?”
“물려받은 거예요. 칠 줄은 아는데, 취미 수준이죠. 들어 보니까 그쪽은 취미 수준은 아닌 것 같던데.”
“치다 그만뒀어요.”
“왜?”
“그냥.”
“동생이 음대 아니었나?”
귀신처럼 눈치가 빠르다. 최사헌하고 있으면 속을 훤히 읽히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장례식 직후에는 그 애 생각만으로도 힘들었는데, 이제는 누가 유민이 얘기를 하면 반가울 정도다.
어머니나 아버지와는 죽은 동생 얘기를 할 만큼 막역한 사이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같이 유민이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유민이가 훨씬 잘 쳤어요.”
“그래서 그만뒀어요?”
어깨만 으쓱거리며 건반만 눌렀다. 물려받았다더니 관리를 얼마나 잘한 건지, 타감이 훌륭하다.
유민이는 나를 따라 피아노를 시작했다. 내가 피아노를 친 이유는 아버지가 입에 달고 살던 해신에 어울리는 교양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유민이와 달리 나는 그 집에 늦게 들어왔으므로 늘 배울 게 많았다. 내가 식사를 조용히 못 하는 건 어머니의 수치였고, 백부님 댁 애들과 달리 악기 하나 연주 못 하는 건 아버지의 수치였고, 성적이 낮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음악은 재능이라는 말도 있지만 유민이나 나나 천재적인 자질이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실상 대부분의 일은 꾸준한 노력으로 판가름 난다.
나는 유민이보다 열심이었다. 유민이와 나를 가르쳤던 음악 교사에 의하면 ‘그만두는 게 아까울 정도로 훨씬 더’ 잘 쳤다.
그래서 그만뒀다.
내가 훨씬 더 잘했으니까.
“그만두고는 뭘 했어요?”
의외의 질문이었다. 최사헌이 나에 관해 궁금해하다니 역시 이상한 느낌이다.
“경영학과 나왔어요.”
“음악 하는 동생과 달리 가업을 물려받으려고?”
유민이를 돕기 위해서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유민이는 아버지가 대표이사로 재임 중인 해신 화학에 입사할 예정이었다.
나도 함께 들어가 유민이를 보조해야 했다. 우리 형제가 최의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됐을 거다.
“글쎄요. 다 지나간 얘긴데. 그보다 최사헌 씨 연주도 듣고 싶어요.”
“이제 안 칩니다.”
“왜요?”
“그냥.”
아까 내가 했던 대답과 똑같은 답을 반복하더니, 복수했다는 듯 짓궂은 미소를 짓는 바람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뭐야, 유치하게.”
“한 곡 더 쳐 주기나 해요. 숙박비로.”
새벽에 저지른 짓이 있으니 싫다고도 못 하겠다.
사실 오랜만에 청중을 두고 연주하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그만둔 지 꽤 돼서 기억나는 곡 많이 없는데. 아무거나 칠게요.”
한창 칠 때는 외우는 악보도 제법 됐는데 지금은 가물가물하다.
정말 좋아해서 무수히 쳐 본 곡 정도만 기억난다.
건반을 누르자 첫 음이 다음 음으로 알아서 이끌어 주었다. 손가락이 가볍게 춤췄다.
몸에 새겨진 기억은 시간이 오래 지나도 금세 떠오른다.
“분명 아는 곡인데. 제목이 뭐였죠?”
집중해 연주를 듣던 최사헌이 문득 물었다.
아름다운 선율이 이어졌다. 나는 멈추지 않고 연주하며 비밀이라도 일러 주듯 조용히 그에게 곡 제목을 말해 주었다.
“「사랑의 찬가」.”
* * *
어릴 적에는 사이가 좋아 보이는 가족들이 앞을 스쳐 지나가면 한참 바라보는 습관이 있었다.
멀리서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울적해지곤 했다.
나는 너무 어려서 엄마의 기일을 잊어버렸고, 주위의 누구도 내게 다시는 엄마가 돌아가신 날짜를 알려 주지 않았다.
사실은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귀찮아져서 여기 두고 간 거고, 언젠가 자라면 만날 수 있다고.
아무 번호도 누르지 않은 전화기를 귀에 대고 엄마를 다시 만나면 뭐라고 얘기할지 연습했었다.
그런 상상이라도 안 하면 버틸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집에 들어오는 날이 적은 아버지는 내가 눈에 띄는 걸 싫어했다. 저택은 넓었지만 왜인지 몰라도 나는 너무 눈에 잘 띄었다.
어머니는 약을 자주 먹었다. 유민이는 나보다 더 어려서 나는 그 애가 옆에 있으면 좋으면서도 늘 조마조마했다.
가족을 그려 보라는 선생님의 요구에 한참을 우물쭈물하다 어설프게 넷을 그린 날에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그림을 보고 얼굴을 찡그릴까 걱정스러웠고, 어디 있을지 모를 엄마한테 미안해 종일 우울했었다.
그러나 미래의 가족에 관해 적어 가는 숙제는 아주 길게 쓸 수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아주 잘해 줄 것이다.
아주아주 잘해 줄 것이다.
아이가 생기면 매일 꼭 안아 주고 같이 잠들어 주겠다.
잊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할 거다.
그리고 절대 먼저 죽지 않고 그들과 오래오래 함께 살겠다.
하지만 어른이 되기까지는 너무 길었다.
아득히 길어서 나는 자라기 전에 이미 늙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렇잖아요. 유민이가 있는데 왜 계속 끼고 사냐는 거지. 애 생길 줄 알았으면 데리고 오기나 했겠어? 가만 보면 올케도 은근히 마음이 약하단 말이야. 사람이 좋은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둬요. 유성이 걔도 생각이 있으면 알아서 지 살길 찾아 나가겠지.’
‘그러다 염치없이 굴기라도 하면? 올케도 참, 유민이 생각은 안 하나 봐. 종달새 둥지에 들어온 뻐꾸기 새끼는 원래 있던 알을 깨 버린다잖아.’
자라기도 전에 죽어 가는 기분이었다.
들려오는 말소리를 곱씹으며 나는 정원의 나무 뒤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가을의 가든 파티장은 쌀쌀했다. 춥다던 유민이에게 내 카디건을 입히는 바람에 나는 반소매 차림이었다.
‘안 춥니?’
위에서 들리는 말에 고개를 올렸다. 양손을 주머니에 꿴 최사헌이 나를 보고 있었다.
대답도 바로 못 하는 내게 최사헌은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 주었다.
‘저런 말은 신경 쓰지 마. 아무것도 모르고 떠드는 사람들은 흔해.’
바보같이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했다. 알겠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정원에 마련된 조그만 무대에 불이 들어오면서 나뭇잎 사이로 조명이 내리쬐었다.
빛과 바람이 최사헌의 앞머리를 쓸었다. 숨 막히게 근사했다.
나가서 막 시작될 공연을 들을 차례였다. 일어서서 우물쭈물 재킷을 내미는 내게 최사헌은 고개를 저었다.
‘입고 있어.’
멀리서 누군가 최사헌을 찾았다. 최사헌은 큰 보폭으로 걸어 나갔다.
무대 앞에 마련된 자리에 앉으면서 나는 재킷이 주는 따뜻함에 젖어 있었다.
그때 나의 장래 희망은, 좋아하는 사람을 슬프게 하지 않는 사람.
눈물이 나게 다정한 사람.
외롭지 않은 사람.
그러니까, 내 어깨에 덮인 재킷 같은 사람이었다.
무대 위에 단발의 여자가 올라왔다. 마이크를 타고 여자의 자기소개가 울려 퍼진다.
친척들 손에 이끌려 온 유민이가 칭얼거리며 내 옆으로 왔다.
최사헌은 나보다 훨씬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언제든 유민이를 데리고 나갈 수 있게 가장자리에 앉았다.
반주가 깔리면서 여자가 노래하기 시작한다.
푸른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해도, 온 대지가 허물어져 버린다 해도,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 아무래도 좋아요.
하늘의 달을, 눈부신 보물을 훔치러 갈게요.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조국도 버리고, 친구도 버릴 거예요.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옛 샹송이 애절한 음색을 입고 정원을 메웠다.
유민이는 무료한 듯 발을 구르다, 내게 스스럼없이 머리를 기댔다.
‘지금 이거 뭐야?’
곡을 듣다 말고 유민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저 멀리 앉아 있는 남자의 말끔히 빗어 넘긴 머리카락과 약간 위를 향한 옆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랑의 찬가」.’
어깨를 감싼 재킷을 끌어당기자 좋은 향기가 물씬 났다.
무대를 내리쬐는 조명의 빛 알갱이가 속눈썹 사이에 뭉쳤다. 노래가 계속된다.
아름다웠다.
* * *
“병원에서 손가락은 왜 치료 안 받았어요.”
“까먹었는데요.”
피아노 좀 쳤다고 들뜨고 벗겨진 밴드를 최사헌은 신중히 떼어 냈다. 새삼 드러난 상처는 제법 가관이었다.
약지의 상처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왔다. 유리로 그어 댄 상처 옆에는 금속에 쓸리면서 난 멍이 반지처럼 동그랗게 이어져 있었다.
어쩌다 난 상처인지 짐작이 갈 법한데 최사헌은 묵묵하게 약만 발랐다.
“옛날에는요.”
나는 모아서 세운 무릎에 뺨을 기대면서 최사헌이 내 손가락에 새 밴드를 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좋은 사람하고 사랑에 빠져서 제대로 된 가족을 만들겠다고 생각했어요.”
최의현을 만나기 전의 일이다.
적어도 그날 일이 있기 전의 안이한 단꿈이었다.
“이진주 씨 좋아했어요?”
갑자기 나온 이름이 의외였는지 최사헌이 손을 멈췄다가 마저 밴드를 꼼꼼히 붙였다.
“맞선에서 만난 사람 중에 이 정도면 그냥 괜찮겠다 싶었던 사람들 있었죠?”
“응, 뭐.”
“우리 둘 다 서로 그런 사이였어요. 결혼은 조건이 맞아서 자연스럽게 얘기 나온 거고.”
“누구 좋아해 본 적 있어요?”
“아니.”
최사헌은 별로 생각하지도 않고 단호히 부정했다.
“첫사랑도 없다고요? 거짓말하지 마요.”
“난 영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채로 독일에 갔고, 그 시대에는 동양인이 거리를 걸어 다니기만 해도 쳐다보던 나라였어요.”
“……학교에서도요?”
내 질문에 최사헌이 고개를 까딱댔다.
“1년 후에는 베네치아에 갔고 다음 해에는 남프랑스에 있었죠. 좀 적응할 만하면 끊임없이 떠돌아다녔어요. 학교 애들은 날 이방인처럼 대했는데, 실제로 그 생각이 맞았고요.”
해외를 돌며 자랐다는 배경에 관한 이야기를 본인 입으로 하는 것을 듣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최사헌은 어디에서든 숭상받아 마땅해 보였으므로, 외로운 아이였을 적의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철들고는 실리콘밸리에서 내 사업을 시작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는 학업만 겨우 마치고 귀국해서 처음부터 다시 경영 수업을 받았어요. 회사에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누굴 좋아하고 말고 할 겨를이 있었을 것 같아요?”
더럽게 바빴네. 내 어린 시절 스케줄 정도는 최사헌 앞에서 명함도 못 내밀겠다.
“10초 만에 빠질 수도 있는 게 사랑이에요.”
“그거 영화 제목이에요?”
최사헌이 코웃음 쳤다.
최사헌은 대체로 뒷말이 나올 여지가 없게 친절하고, 그보다 조금만 깊이 파고들면 냉소를 드러냈다.
의외로 낭만과 거리가 먼 인간이라는 점은 잘 알겠다.
“난 있어요, 첫사랑.”
“아, 이쪽이 영화 제목인가 보군.”
심술궂은 이죽거림에도 나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첫눈에 반했는데 나한테는 너무 까마득한 사람이었어요.”
아마 그건 지금도 그렇겠지만.
간혹 최사헌과 행사에서 마주치면 심장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나는 최사헌이 내게 친절해서 좋아했던 것 같다.
내게 친절한 사람은 아주 드물었고 나는 좋아할 수 있는 사람에 목말라 있는 상태였다.
누가 내게 조금만, 아주 약간의 성의만 베풀어 주었더라도 좋아해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원래 첫사랑은 안 이루어진다잖아요.”
최사헌이 여전히 심술을 섞어 말했다.
“상관없어요.”
예나 지금이나 그랬다. 내 마음은 상관없다.
최사헌의 시선이 내게 머무는 게 느껴졌다.
“어차피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도 안 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받는다니, 그런 건 너무나도 아득해서…….
생각만으로 울어 버릴 것 같다.
“영화 같은 첫사랑 다음으로 좋아한 사람은 없어요? 의외로 잘 반하는 모양인데.”
“내 동생이요.”
“아니, 사랑 말이에요. 갑자기 논점을 벗어나네.”
“지금은 아무도 안 좋아해요.”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좋아했던 남자가 나를 향해 의심스럽다는 시선을 보내며 팔짱을 꼈다.
불현듯 그에게 고백하고 싶었다. 지금 철 지난 첫사랑을 털어놓으면 최사헌은 웃어 줄 것 같았다. 그래요, 첫사랑은 안 이루어지는 겁니다, 얘기하면서.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서, 나는 다른 고백을 했다.
“이제 나한테는 누구 좋아할 자격 같은 거 없거든요.”
아름다운 시간은 동생과 함께 화장터에서 불타 재가 된 지 오래다.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 * *
손님이 발을 들인 일이 거의 없던 집에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낯설다. 사헌이 잠옷 차림의 유성을 보다 이마를 싸쥐었다.
“당신 팔다리가 긴 걸 어쩌라고요.”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제 잠옷을 빌려줬더니 유성은 또 기장을 감당 못 하고 있었다. 소매를 열심히 접은 실크 가운은 금세 줄줄 흘러내렸다.
“이거 기성품 아니죠?”
“옷은 보통 맞추죠. 유성 씨도 그러지 않나?”
“난 길거리에서 사 입을 때도 있는데요. 하긴, 최사헌 씨는 일단 키가…… 아씨, 그냥 벗고 잘까?”
연신 가운을 걷어붙이다 말고 투덜거리는 유성을 향해 사헌이 눈썹을 치켰다.
“오늘은 내가 다른 방에서 자겠습니다. 집에 침대가 하나라.”
“혼자?”
유성이 되물었다.
“어떻게 집주인을 바닥에 재우고 나 혼자 침대에서 자요.”
“못 잘 건 뭡니까. 미국에서 살 땐 쥐랑 같이 침낭에서도 자 봤으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빨리 들어가기나 해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같이 자면 안 될까.”
“안 돼.”
“정말 아무 짓도 안 해요.”
“그거 좀……. 일부러 그러는 거지?”
눈썹을 불쌍하게 축 떨어뜨리는 유성을 보며 사헌이 크게 한숨 쉬었다.
“쥐랑도 잤으면서 나랑은 왜 못 자.”
이제는 생트집이었다. 사헌이 삐죽하게 나온 유성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하여간에 당해 낼 수가 없다.
* * *
“아무리 그래도 이게 뭐냐.”
침대 가운데에 높이 쌓인 베개를 무너뜨리며 유성이 툴툴댔다. 사헌이 팔을 뻗어 베개를 다시 쌓았다.
“애예요?”
“넘어오지 말고 자요.”
“아무 짓 안 한다고 했잖아요. 사람을 뭘로 보고.”
“틈만 나면 나 덮치겠다고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이요.”
“아니, 내가 무슨…….”
“만나기만 하면 키스하고, 자자고 조르고, 달려들어서 옷부터 벗기려고 들면서.”
“…….”
“자기나 해요. 소염제는 먹었어요?”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
유성이 홱 돌아눕더니 얼굴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참 어른스러운 반응이다. 사헌이 제 몫의 이불을 덮었다.
새벽 내도록 잠도 못 자고 출근해서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다고 무리했더니 머리가 통째로 욱신거린다.
그런데도 사헌은 쉽게 잠들지 못하고 유성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엉성하게 쌓은 베개 사이로 유성이 보인다.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본인이 한 말을 기억은 하고 있을까.
백유성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는 이가 누구인지는 뻔했다.
곁에서 보면서 놀랄 정도로 거센 적개심이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결혼을 피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있을 텐데. 단순히 최의현이 싫다는 게 아니라 왜 최의현을 싫어하게 됐는지, 이유가.
생각을 일부러 멈췄다.
얽혀서는 안 된다.
사헌의 머릿속에서 때마다 조언하는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늘 오후 비서실로 일정이 전달되었다. 내일 점심이면 조부가 고른 상대 중 하나를 만나러 가야 한다.
백유성은 올바른 선택지가 아니었다. 가진 문제가 너무 많다. 과하게 복잡하고, 지나치게 위험성이 높다.
“저기요.”
보이는 건 미동도 없는 뒷모습뿐이라 유성의 목소리는 허공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내일까지만 있다 가도 돼요?”
“멀쩡한 집 놔두고요.”
“집을 치워야 하는데, 내일 당장은 가기가 싫어서. 하루만 더 있고 싶어서요. 안 돼요?”
유성은 모르겠지만, 사헌은 집에 좀처럼 사람을 들이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지도 못할 정도로 바쁠 때나 이따금 사람을 써서 청소하는 정도였다.
일과 관련된 물건은 물론이고 사생활을 유추할 것도 집에 거의 두지 않았다. 사실 근 몇 년은 일 외의 생활이 없다고 봐야 옳겠지만.
집에 뒀던 중요한 파일이 통째로 유출되면서 경매에 실패한 이후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범인은 고모인 문경이었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조그맣게 덧붙이며 유성이 어깨를 말았다. 흘러내린 이불 위로 움츠린 어깨가 드러났다.
숨을 쉴 때마다 옆으로 누운 몸이 가만가만 오르내린다.
“마음대로 해요.”
사헌이 손가락을 구부려 허공을 건드렸다. 멀찍이 보이는 유성의 뒤통수에 검지 끝이 살짝 얹힌다.
목덜미를, 어깨를, 감춰진 등과 허리를, 사헌의 손끝이 건반을 쓸 듯이 훑으며 내려갔다.
* * *
최사헌은 아주 곤하게 잠들어 있다.
겹쳐 쌓인 베개에 턱을 괴고 나는 최사헌의 잠든 얼굴을 구경했다.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고개를 가까이 가져갔다. 속눈썹을 헤아릴 수도 있겠다.
속눈썹이 새카맣고 촘촘해서 눈매가 꼭 펜으로 그려 놓은 것만 같다. 눈가에 세세한 그림자가 졌다.
여명이 세련된 골격을 따라 오묘한 깊이를 만들어 주고 있다. 역시나 잘생겼고, 깨어 있을 때보다 어려 보인다.
잠든 이의 얼굴이란 왜 이리도 무구해 보이는가. 무방비해서 마음만 먹으면 금세 해칠 수 있을 것 같다.
최사헌의 목 부근에 손을 올리는데 갑자기 손목이 잡혔다.
“그것 봐.”
최사헌이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틈만 나면 덮치려고 호시탐탐.”
가느스름하게 열린 눈이 똑바로 나를 본다. 눈꺼풀이 벌어지고, 날카롭게 트인 눈매가 온전히 드러났다.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어.”
입 안이 말랐다. 그저 눈을 뜬 것뿐인데도.
“뭘 하려고 했는데?”
웃음기가 서린 입가가 오만해 보인다. 사실 최사헌은 내가 겪어 본 부잣집 도련님들처럼 건방을 떠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좀처럼 가시지 않는 저 여유로움이 흐트러뜨리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손을 가운 섶 안으로 넣자 최사헌이 움찔댔다.
따뜻한 살이 기분 좋다. 긴장한 근육의 감촉도. 가슴과 배를 지나 허벅지 사이로 내려갈수록 열기가 더해 간다.
갓 아침을 맞이한 육체는 몹시 건강했다.
마음에 든다는 듯 드로즈 위로 손바닥을 문질렀더니 최사헌이 뭐라고 소리를 냈다. 아마 욕인 것 같았다.
“안에만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백유성.”
최사헌이 날리는 경고장 따위는 상관없었다.
나는 베개를 밀쳐 버리고 최사헌의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체온으로 데워진 공기는 최사헌의 체취가 흠뻑 묻어났다.
어두운 이불 밑에서 감각에 의지해 드로즈를 벗겨 냈다. 이불 안이라 고개를 바짝 낮추고 있었는데, 튕기듯 나온 성기가 볼을 때리는 바람에 당혹스러운 숨이 터졌다.
“아…….”
살 냄새를 맡고 있으니 약간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알파 페로몬에 취하면 이런가. 알파가 주변에 오기만 해도 기겁하며 피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나른하게 들뜨는 느낌이 낯설었다.
성기 끝을 조심히 입에 무는 찰나에 이불이 확 걷혔다. 최사헌은 상체를 일으키고서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백유성.”
그르렁거림이 섞인 소리가 제법 섹시했다.
최사헌을 쳐다보면서 나는 그대로 성기를 삼켰다.
아래에 넣을 때도 무지막지하다고 생각했지만, 입에 넣는 건 또 느낌이 달랐다.
절반을 겨우 머금고 호흡을 골랐다. 코로 빠져나가는 숨이 점점 가빠졌다.
이 이상 내려가면 입술이 찢어질 것 같다.
두꺼운 귀두는 벌써 목구멍을 찌를 것만 같고, 억지로 용량 이상의 것을 욱여넣은 것처럼 입 안이 얼얼했다.
여기서 뱉기도 뭐 하고, 그렇다고 다 삼킬 엄두도 안 나고. 갈피를 못 잡고 멈춰 있는데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이 기어들었다.
“그만해. 잘하지도 못하면서.”
머리카락을 헤집는 손길과 더불어 살짝 흐트러진 목소리가 들렸다.
오기가 벌컥 일었다. 시선을 들어 최사헌을 노려보면서 끝까지 고개를 처박았다.
그야말로 우격다짐으로 어떻게 뿌리까지 입에 넣는 건 성공했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입술이 아프다. 찢어진 게 분명했다. 계속해 따끔거리는데 뱉어 낼 엄두도 안 났다.
입에 담긴 담았지만 뭘,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핥고 싶어도 이 상태에서 어떻게 혀를 움직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너는, 정말…….”
탄식이 아른아른 귓가를 간질였고, 동물이라도 어르듯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가락마저 귓바퀴로 내려왔다.
말랑한 귓불을 만지작대는 손길은 아주 부드러웠다. 방금 들은 목소리에는 탁한 흥분이 끼어 있었던 것 같은데 정작 동작에는 별로 조급해하는 기색이 없다.
얄미운 여유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흐트러진 건 나뿐이다.
“뱉어 봐.”
최사헌의 손끝이 내 턱 밑을 간지럽히며 밀어냈다. 이것마저 딱 어린 짐승 어르는 손길이라 거슬렸지만 불만을 표할 여유도 없었다.
최대한 이에 닿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고개를 뺐지만 아마 몇 번인가 앞니에 살이 긁힌 것 같았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쳐다본 최사헌의 얼굴은 여전히 미미하게 찌푸려진 채였다.
혼이라도 날 것 같아 지레 눈을 내리깔았다.
“……턱 아파.”
웅얼거리자 최사헌이 헛웃음을 흘리면서 침대 옆의 티슈를 뽑아 건넸다.
“뭘 했다고 턱이 아파.”
“아파. 입술도 찢어졌어요.”
“비긴 걸로 치죠. 당신도 내 입술 물어뜯어 놨었잖아.”
“별로 아파하지도 않았으면서. 비긴 걸로 안 할래. 웃지 마요. 다 그쪽이 커서 생긴 일이잖아요.”
티슈로 입을 닦으랴, 쏘아 보랴 나만 바빴다. 최사헌은 티슈에 가려진 내 입가를 살피는 중인 듯했다.
“입조심 안 하네. 아무래도 출근 전에 경찰서 가서 성추행으로 고발해야겠다. 콩밥 먹을 준비나 하고 있어.”
최사헌이 내 손을 내리게 하고 찢어진 입술을 유심히 보았다. 슬슬 뺨이 달아올랐다.
“심하진 않아. 그래도 약 발라야겠다. 일단 일어나요. 씻어야지.”
“입에서 이상한 맛 나.”
“그러니까, 양치도 하고.”
끝까지 애 취급이야. 어느새 정리된 최사헌의 속옷으로 눈이 갔다. 짙은 색이라 티는 덜 나지만 얼룩이 생겼고, 누가 봐도 확연히 부풀어 있다.
“아직 서 있어요.”
만져 보려고 했더니 최사헌이 바로 내 손을 붙잡아 되물렸다.
“백유성 씨, 진짜 성추행으로 고소당하고 싶어요? 앞으로 나한테 성적인 발언 금지합니다.”
“아무도 안 좋아했으면 섹스도 안 했어요?”
최사헌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눈을 흘겼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궁금해서 물은 거였다. 최사헌은 얼마나 해 봤을까.
“저번에 보니까 잘하던데.”
누구랑 했을까. 어떤 사이였을까. 하면서, 기분 좋았을까.
나는 그중에 몇 번째나 될까.
“주기 보내기 괜찮은 방법이기도 하고, 상호 합의가 있었으면 굳이 연애 감정 없이도 섹스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게 뭐가 그렇게 엄청난 일이라고.”
이 또한 어찌나 여유가 작작한 답변이신지. 하룻밤을 만족스럽고 깔끔하게 즐기고 돌아서는 최사헌이 쉽게 그려졌다.
“나랑 할 때도 아무 감정 없었어요?”
최사헌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일부러 감춰 버린 듯 표정을 읽기도 어려웠다. 맨 처음 사무실에서 최사헌을 만났을 때와 비슷했다.
“먼저 씻고 출근할 테니까 식사는 알아서, 아.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네. 나가서 먹어요.”
이어서 나온 말은 이전의 화제를 모조리 무시한 얘기였다. 아무 말도 못 들었다는 양 나가 버리는 등짝이 얄밉다.
“재수 없어.”
입술 끄트머리를 혀로 건드리자 바로 짜릿한 통증에 인상이 구겨졌다.
재수 없다. 나만 잘하지도 못하고.
나를 위해 마련된 칫솔은 흰색이어서 곧장 골라낼 수 있었다. 욕실은 역시나 무채색 일색이다.
박하 맛이 나는 입천장을 혀로 문지르면서 나가 보니 최사헌은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있었다.
“다녀오세요.”
현관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네는 나를 보면서 최사헌이 눈을 깜빡거렸다. 이건 무슨 놀이냐고 묻는 것 같아 최대한 뻔뻔스럽게 웃어 보였다.
허리에 팔이 감기면서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입술이 곧 맞닿았다.
높이를 맞추겠다고 뒤꿈치를 들자 어제 꿰맸던 발가락 근처의 상처가 쑤셨다. 티를 냈다고는 생각 안 했는데 최사헌은 알아챈 듯했다.
최사헌의 어깨가 한참 내려왔다. 목을 감아 당기자 고개가 더욱 굽혀진다.
마치 손아귀에 들어온 것만 같아 흡족했다. 뺨을 감싸 쥐고 마음껏 입 맞추자 최사헌이 내 입술 끝의 상처를 부드럽게 핥았다.
따가운 느낌이 어쩐지 기분 좋게 느껴졌다.
키스는 길었다. 지난번과 같은 셰이빙 크림 냄새가 났다. 이번에는 똑같은 치약 냄새도.
* * *
“진짜 아무것도 없네.”
도대체 냉장고를 왜 놓은 거지? 열어 본 냉장실 칸에는 있는 게 없었다.
냉동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냉장고를 안 쓰나 싶은데 서리 낀 곳도 없이 말끔하다는 사실이 소름 끼쳤다.
“쓰지도 않으면서 청소만 하나.”
정말 지독히 생활감이 없는 집이다. 아무리 깔끔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아까 보니 장식장에 양주도 몇 병 있는 것 같던데. 와인셀러도 있지 않았나. 술을 안주도 없이 마시나.
식욕이 도는 건 아니었지만 의사의 말이 신경 쓰였다. 걷는 것도 조심해야 하는 상태가 오래가면 곤란하다.
적당히 주스라도 위장에 넣어 보려고 했더니만,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다는 게 정말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을 줄이야.
정수기에서 찬물을 받아 삼키자 배 속이 서늘해졌다. 그나마 물은 있다.
나갈까 고민하는 차에 도어벨이 울렸다. 도어폰 모니터에 뜬 사람은 최사헌이 아니었다.
뜻밖의 등장에 나는 의아해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안녕하세요. 지서희 팀장입니다.”
안으로 들어온 지서희가 저번처럼 인사했다.
“왜 오셨어요?”
“이사님께 얘기 못 들으셨어요? 나가서 식사 챙겨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제 식사를요?”
그쪽 외에 여기 누가 있나요, 라고 말하듯 지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끄는 대로 주차장에 내려가는 내내 아리송했다. 두 번째로 타 보는 차에 올라타서도 의아함은 가시지 않았다.
“최사헌 씨는 원래 이래요?”
원래 아무나 자기 집에 들여서 재워 주고, 비서팀 팀장 붙여서 병원 데려다주고, 먹여 주나.
“자선사업이 인생 숙원 사업인 타입?”
“좋은 일 많이 하시기는 하죠.”
“팀장급한테 남 밥이나 챙기게 하는 거 짜증 나지 않아요?”
“제 업무 능력을 신뢰해 주시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그런가. 내가 최사헌 집에 있다는 사실이 새어 나가면 안 되니까 개중 제일 믿는 사람으로 붙인 건가.
그러면 아예 아무도 안 시키고 내버려 두면 되잖아. 역시 이상하다.
“점심, 최사헌 씨랑 같이 먹어도 돼요?”
반쯤은 충동적으로 나온 얘기였다. 최사헌한테 지금 드는 의문을 물어보고 싶기도 했다.
“이사님이 오늘 점심 일정이 따로 있으셔서요.”
일을 안 할 때보다는 할 때가 많은 최사헌에게 점심께에 일정이 있다는 소리는 특이할 게 없었지만, 지서희의 미적지근한 어조가 신경 쓰였다.
어릴 적부터 눈치를 살피며 사느라 좋아진 감이 찝찝한 경보를 울렸다.
“무슨 일정인데요?”
“…….”
“대외비라서 말씀 못 해 주시나.”
일 얘기였다면 두루뭉술하게 말해 주고 끝이었을 텐데 지서희는 차의 앞창만 보고 있었다.
지서희의 모호한 태도는 내가 최사헌과 무슨 사이인지 불확실해서일 거다. 최사헌이 타인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나만 의문스러운 게 아닐 테니까.
그렇다면 갑자기 상사의 집에서 같이 자는, 상사가 식사까지 챙기는 오메가한테 말하기 망설여지는 일정이 대체 뭘까.
“지 팀장님은 무슨 음식 좋아해요?”
“저요?”
“같이 먹는 거 아니었어요, 밥?”
“아닙니다. 저는 따로…….”
“같이 먹어요.”
다시 권하자 지서희가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식당에만 데려다 놓고 가실 거 아니면 사람 앞에 두고 혼자 먹는 것도 이상한데요. 바빠요?”
나는 더 말할 여지도 주지 않고 못을 박았다.
“지 팀장님이 좋아하는 거 먹어요. 내가 사 줄게요.”
* * *
“좋아해서 여기 온 거 아니죠.”
“아니요. 정말 좋아합니다.”
나는 지서희와 앞에 나온 접시를 번갈아 보았다. 허름한 기사 식당의 돼지고기 불백하고 어울리는 인상은 아닌데, 본인이 좋아한다면야.
“불편하시면 다른 데로 가셔도 됩니다.”
“저는 아무거나 잘 먹어요.”
“…….”
“그렇게 안 보여요?”
말은 안 했지만 어떻게 생각하는지 뻔히 보였다. 입에 안 맞으면 상째로 뒤집어엎을 것같이 생겼다는 소리는 여미림한테도 들었다.
실상은 배곯은 기억 덕에 못 먹는 게 없는 애였는데 말이다. 내가 지서희한테 인상이랑 메뉴가 어울리느니 마느니 할 처지가 아니었다.
“다른 일 많을 텐데 점심에도 모르는 애 밥이나 사 먹여야 하고, 귀찮겠네요.”
“아니요. 전혀요. 두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물을 따르고 수저를 놓고 있었더니 지서희가 나를 저지하려 했다. 나는 고집스레 지서희의 앞에 물잔을 밀어 주었다.
“최사헌 씨는 곧 결혼한다면서요.”
“……이사님이 그렇게 얘기하셨으면 그런 거겠죠.”
“나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선 엄청 많이 봤는데.”
지서희가 입을 다물었다.
“최 이사님이랑 무슨 사이인지 안 궁금하세요?”
이번에는 수저질마저 멈췄다. 먹던 밥이 다 얹힐 것만 같은 낯빛이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식사하는 사람 괴롭히는 게 미안하긴 해도, 나는 남한테 예의나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 않았다.
최사헌은 그럴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그냥 집에 일이 생겨서 최사헌 씨가 잠깐 재워 준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 쓰지 말라고요.”
“…….”
“최사헌 씨가 오늘 선 자리 나간다고 신경 쓸 사이는 아니니까.”
“……제가 착각해서 실례되는 행동 했다면 죄송합니다.”
정정이 없다는 건 긍정이나 다름없다.
신사업을 이끄느라 죽도록 바쁘시다더니, 맞선도 점심에 시간 쪼개 보는 모양이라는 생각에 입술이 비틀렸다.
“지 팀장님.”
“예.”
“저 갈 때는 혼자서 가도 될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지서희의 시선이 내 발치로 향했다. 다친 발을 걱정하는 것 같아서 조금 더 미안해졌다.
나는 당신이 걱정해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
“괜찮아요. 알아서 택시 타고 돌아갈게요. 갈 데가 있어서 그래요.”
식사는 평범하게 계속되었다. 내가 몇 마디 물으면 지서희가 저번처럼 딱딱하게 대답하는 식이었다.
바깥으로 나와 차를 타기 전 나는 지서희가 차에 오르기 전까지 잠시 떠다니는 구름을 구경했다.
오늘도 세상은 너무 평온하게 돌아가서 나만이 이 세계의 불청객처럼 느껴진다.
“저기요, 지 팀장님.”
담배를 꺼내 물고 지서희를 불렀다. 차 키를 찾던 지서희가 나를 돌아보았다.
“혹시 불 있어요?”
주머니에서 차 키 대신 라이터를 꺼낸 지서희가 다가와 라이터를 켜 주었다. 숨을 빨아들이자 담배 끝이 동그랗게 타들어 갔다.
“미안해요.”
“이런 걸 가지고요.”
“라이터 말고요. 지 팀장님은 좋은 사람 같아서요.”
연기 너머로 보이는 지서희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나는 유독 물질이 내 폐를 갉고 다니도록 놓아두다가 길게 숨을 뱉었다.
“그냥, 전 좋은 사람들한테는 다 미안하더라고요.”
그러니 최사헌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으면 했다.
나한테 잘해 주지 말았으면.
그런데, 다른 사람과 마주 앉아 자상할 최사헌을 상상하니 속이 찢기는 것 같았다. 담뱃불이 폐부로 옮겨붙은 듯 홧홧했다.
* * *
최사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번 모두 받지 않았다.
― 무슨 일입니까.
세 번째로 전화를 걸자 긴 신호음 끝에 통화가 연결됐다.
― 급한 일이에요?
“어디예요?”
―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요. 무슨 일 생겼습니까?
“어딘데요.”
― 대체…….
“회사?”
― ……밖입니다.
최사헌이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거짓말은 안 하네. 답다면 답다.
“예뻐요?”
― 백유성 씨, 선 넘지 말죠.
“쳐들어가서 행패 부린 것도 아닌데 무슨 선을 넘어요.”
― 계속 휴대폰 울리게 하는 바람에 일어나서 나오게 한 건 행패가 아닌가?
“난 어딜 것 같아요?”
― 얌전히 식사하고 들어가 있어요. 나도 전화 끊고 자리로 돌아가야 하니까.
“이해를 못 하겠어. 새벽에 달려온 사람 받아 주고, 재워 주면서 자기는 대단히 선을 지키고 있다는 것처럼 구는 거. 뭔데, 그게?”
도와준 사람한테 보따리도 내놓으라고 악을 쓰는 격이었다. 나도 안다.
하지만 분수를 지키라고 할 거였다면 안아 주지 말았어야지. 치미는 미움을 누를 수가 없다.
“불쌍해서 도와준 것뿐이니까 그건 괜찮은 거야?”
― 백유성, 적당히 하고 끊어.
“그럴 거면 키스하고 나가지 마. 이…… 씨발 새끼야.”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아 소리를 억지로 짜내야 했다. 떨리는 목이 짜증스러웠다.
“나쁜 새끼…….”
무릎 사이에 고개를 깊이 묻었다. 팔딱대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웠다.
끊었다고 착각할 정도로 오래 조용하던 수화기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 어딥니까, 지금.
나는 고개를 들어 여전히 유리 파편으로 난장판인 거실을 쏘아보았다.
파편의 모서리마다 햇빛이 날카롭게 고였다.
* * *
벨 소리가 울렸다. 한 번. 시간을 두고 두 번.
세 번째 벨이 울렸으나 나는 문을 열지 않았다. 현관은 다시 고요해졌다.
다시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주먹으로 문을 내리치는 소리였다.
“문, 안 열 겁니까.”
문틈으로 억눌린 음성이 새어 들어왔다.
잠금쇠를 여는 대신 다가가서 현관문에 이마를 댔다. 금속의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이마를 누른다.
탕, 탕.
이번에는 연달아 문을 두드려 댔다. 진동이 이마의 살갗을 타고 심장까지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잠금을 풀고 문을 밀자 머리카락이 약간 흐트러진 최사헌이 나타났다. 나는 문 틈새에서 가만히 그를 훔쳐보았다.
“왜 왔어요?”
“전화까지 해 놓고 그런 말을 해요?”
“선은 잘 보셨어요?”
최사헌의 오른쪽 눈가에 가느다란 선이 생겼다. 이제는 이 남자가 화났을 때의 표정을 속속들이 알 것만 같다.
“문이나 마저 열어요.”
“잘 봤냐고. 예뻤냐니까. 왜 대답 안 해?”
“문 앞에서 이러고 싶어?”
“못 할 건 뭔데?”
한숨 소리가 크게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게 목덜미가 빳빳하게 긴장했다.
“내가 뭘 하건 누굴 만나건, 백유성 씨가 간섭할 자격은 없어요. 아닙니까?”
한 자씩 내리꽂는 것만 같은 분명한 발음이었다. 언제나 저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차라리 못 알아듣고 싶다.
“내가 누구랑 결혼을 하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따귀를 맞은 듯 볼이 화끈거렸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상스러울 만큼 맹렬한 배신감 외에는.
그대로 뛰쳐나가 최사헌의 멱살을 붙잡았다. 거칠게 열린 현관문이 어딘가 부딪히며 소음을 냈다.
체중을 다 실어 달려들었는데도 최사헌은 밀릴 기미도 없었다. 울분이 솟구쳤다.
최사헌은 오히려 나를 집 안으로 몰아붙였다. 발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있어!”
파열음처럼 터져 나온 고함이 현관을 울린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떠밀렸다.
눈물이 고이는 것 같아 눈에 힘을 주었다. 일부러 최사헌을 보지 않으려 했다.
현관문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잠금쇠가 여러 번 헛돌았다. 나는 그 엇나간 자리만을 노려보았다.
최사헌이 내 턱을 쥐었다. 쳐다보라는 뜻인 줄 알면서도 고집을 피웠다.
“바쁜 사람 불러왔으면 진정하고, 얘기를 해. 뭘 원하는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제대로 쳐다보지 않자 최사헌이 아예 내 이마에 이마를 맞붙였다.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지금 최사헌과 마주 보면 영영 눈을 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며칠 같은 몇 초가 흐르고, 이마를 뭉개던 체온이 떨어져 나갔다. 눈을 뜨니 최사헌의 뒷모습이 보였다.
거실로 들어선 최사헌의 낯빛이 아연했다. 깨진 유리며 흐트러진 물건들을 하나도 치우지 않은 거실은 쓰레기장처럼 어수선했다.
“집 안 꼴은 엉망으로 두고, 도대체가.”
“무슨 상관이에요?”
나는 최사헌이 놓고 간 그대로 현관 벽에 기대서 쏘아붙였다.
“나한테 상관하지 말라고 했으면 그쪽도 나한테 신경 꺼야 공평하지.”
“그거랑 이게 같아? 애처럼 굴지 마.”
최사헌은 그치지 않고 분노했다. 그리 크지도 않은 음성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귀를 찌른다.
눈물이 기어이 넘쳤다.
운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 일부러 닦지도 않았는데 최사헌은 이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울지 마. 울어서 해결하려고 들지 말라고.”
높아지려는 언성을 억누르느라 불안정한 으르렁거림이 섞였다. 최사헌의 흉곽이 무질서하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그래서 우는 거 아니야…….”
떨리면서 잦아드는 말끝이 수치스러웠다. 울음을 참는 건 이골이 났어도 쉽게 그치는 방법은 몰랐다.
삼키려 애써도 흐느낌이 샜다. 끊이지 않고 고이는 눈물도, 떨리는 목도 죄다 싫었다.
발이 아팠다. 아까 몸싸움을 벌이면서 어딘가 상처가 터진 게 분명한데 내려다볼 엄두는 안 났다.
“가요.”
발바닥을 바닥에 짓이기듯 걸으면서 나는 최사헌에게로 갔다.
“전화해서 미안하니까 가라고요.”
어떻게든 피하지 않고 마주 본 최사헌의 눈은 섬광처럼 형형했다.
“똑똑히 들어. 나한테 아무리 달라붙어 봤자야. 난 당신하고 결혼 안 해. 나는…….”
열렬히 이어지던 최사헌의 말은 맺어지지 않았다. 무릎이 꺾이는 찰나에 최사헌이 내 등을 안았다.
상체가 닿았고, 그다음으로는 입술이 겹쳤다.
심장 박동이 맞부딪혔다가 뒤섞이며 헝클어졌다. 갈비뼈 밑이 죄다 멍들어 있는 것 같았다. 쓰리고, 아렸다.
눈물로 젖어 있는 목덜미를 최사헌의 입술이 닦으며 지나갔다. 옷자락 안으로 손이 들어왔고 나는 그냥, 최사헌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로 울었다.
“울지 마.”
최사헌이 속삭였다. 아까와 달리 애원조였다.
옆구리를 쓸며 올라간 손이 등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달래는 것 같았으나 더 울고 싶기만 했다.
이 남자가 절절매면서 나만 걱정하느라 아무것도 못 할 정도로.
만져지는 곳이 욱신댔다. 추위에 얼었던 살이 갑자기 더운 곳에서 풀어진 듯 간지러웠다.
분명히 주기는 지나갔는데 첫 히트 사이클을 맞았을 때와 비슷하게 곤혹스러운 느낌이 몰려왔다.
평소에는 인지도 못 하던 배 안쪽의 장기에서부터 욱신대는 열감이 도는 감각. 배로 예민해진 살갗은 무언가 닿기만 해도 애무로 해석했다.
나를 벽에 몰아넣은 최사헌이 내 아랫배를 느릿느릿 어루만졌다. 겨우 그것만으로 밑이 젖는 느낌이라 나도 모르게 끙끙대는 소리를 냈다.
최사헌의 손을 쥐고 허벅지 사이로 이끌었다. 최사헌이 내 바지를 끌어 내렸다.
벽에 뒤통수를 대며 최사헌이 더 쉽게 만질 수 있도록 다리를 벌렸다. 여전히 끔찍이도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민감해진 피부를 끊임없이 만지며 데워 주는 것만으로 온몸에 가벼운 소름이 올랐다. 아래를 헤집고 들어온 손가락이 속살을 벌렸다.
“당신 최악이야.”
뾰족한 비난에도 최사헌은 아까처럼 사납게 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어떻게 굴어도 감내할 사람처럼 순순히 나를 응시했다.
그게 짜릿할 만큼 좋았다.
어떻게 하면 이 남자가 내게 미치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반대가 된 것 같아 분했다.
아니, 아니다.
최사헌 따위 상관없다.
나는 그냥 이 남자를 이용하고 싶을 뿐이다.
최사헌의 옷에서 낯선 향기가 풍겼다. 지금은 희미하지만 얼마나 노골적으로 쏟아 냈는지 짐작이 갈 정도로 들척지근한 오메가 페로몬이다.
장미와 절인 체리 냄새가 난다. 나는 향기만으로 최사헌의 상대가 어떤 이였는지 그려 볼 수 있었다. 자신만만하고 밝고, 그늘 없이 자란 사람.
이진주 같은 사람이었겠지. 무슨 얘기를 했을까. 최사헌은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을까.
나는 신경질적으로 최사헌의 정장 겉옷을 벗겨 냈다. 셔츠를 잡아 뜯을 것처럼 벌리는 나를 최사헌은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넥타이와 재킷이 떨어지고, 와이셔츠 윗부분은 단추가 두 개는 떨어져 나갔다. 최사헌의 단정한 차림새를 망쳐 놓고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최사헌의 목에 매달려 이를 세우자 그가 낮게 신음했다. 그래도 떨쳐 내지는 않았다.
어디에 남겨야 가리기 어려울까. 고민하면서 살갗을 물었다. 한 번 더 침음이 뒤따랐다.
옷깃에 남아 있던 잔향이 내 체취로 덧씌워진다.
겨우 만족스러웠다.
“해 줘.”
발끝으로 최사헌의 발등을 비비면서 속삭였다. 정장 바지 아랫단을 들추고 복사뼈를 문지르니 최사헌은 괴로운 한숨과 함께 자신의 벨트를 풀었다.
성급한 삽입임은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둘 다 참을 상태가 아니라는 것도.
한쪽 다리를 잡고 지탱해 주면서 최사헌이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젖은 점막이 뻑뻑하게 마찰하는 느낌에 등허리를 타고 스파크가 튀었다.
눈앞이 하얗게 타들었다. 이 느낌이 좋았다.
쾌감이 눈자위에 고였다. 물기 탓에 시야가 가물거렸다.
나는 헐떡이는 최사헌을 끌어안고 그의 셔츠 섶에 볼을 비볐다. 여기에는 오로지 그와 내 체취뿐이었다.
최사헌이 누구와 만났는지 상관없다. 어떻게 생각했을지도.
상관없다, 정말로…….
* * *
녹초가 된 나를 최사헌은 그냥 안고만 있었다. 안아서 침대로 데려가 주는 동안 나는 최사헌의 목을 감고 그가 나를 들어 올리도록 뒀다.
잘 제련된 도구처럼 다듬어진 육체가 마음에 든다. 무슨 짓을 하든 잘 부서지지 않을 견고함이었다.
침대에 도착하고도 떨어지지 않고 기대 있음에도 최사헌은 꼼짝하지 않고 내 무게를 지탱했다.
편안했다.
“또 다른 사람하고 결혼하겠다고 하면 다시는 내 몸에 손도 못 대게 만들 거야.”
허리에 감긴 최사헌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꽉 잠긴 목소리는 여기저기 떨려 불안정했다.
“어떻게 하려고.”
위협에도 최사헌은 내 손을 맞잡으면서 달콤하게 물었다.
“잘라 버리든지…….”
손목뼈를 따라 손날을 긋자 최사헌이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냈다.
“죽여 버리든지.”
나를 응시하는 최사헌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좁혀 들었다.
“알았으니까 그만 울어.”
“뭘 알아.”
당신이 뭘 아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금세라도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말을 삼켰다.
정사가 끝나고도 이따금 눈물이 흘러내렸다. 헐거워진 수도가 제대로 잠기지 않고 물을 흘려보내는 것만 같았다.
최사헌이 또다시 세로로 물길이 생긴 내 뺨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렇게까지 최의현이 용서가 안 돼?”
무진 애를 써도 그치지 않던 눈물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눈자위에 고여 있던 눈물이 마지막으로 볼에 흘러내렸다.
나는 최사헌에게서 떨어져 바로 앉았다. 체온이 사라지자 바로 추웠다.
얼음을 통째로 삼킨 듯했다.
중요한 건 최사헌이나 내가 아니다. 최사헌이 누구와 선을 봤고, 상대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 아닌지가 아니다.
내가 흔들린 건 최사헌을 놓쳐서는 안 돼서다.
“그쪽이라면 용서가 되겠어요?”
“비꼬지 말아요. 계속 당신만 다치고 있잖아.”
“불쌍하면 도와주든가.”
가슴이 뻐근하도록 숨을 세게 쉬었다. 생각을 해. 최사헌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도록 둘 수 없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 그와 결혼해야 한다. 최의현을 용서할 수 없으니까.
“최사헌 씨는 내가, 사생아라 싫다는 거죠.”
시트를 내려다보고 있어 최사헌을 볼 수는 없었으나 나는 어쩐지 그가 몹시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상상했다.
“아이요.”
시선을 올리자 과연 굳어 버린 최사헌의 표정이 보였다.
“낳아서 당신한테 주겠다고 하면 나랑 결혼할래요?”
최사헌에게 필요한 거라면 이제 대강 안다.
“당신 고모처럼 아이만 있으면 최 회장한테 인정받는 건 문제없는 거잖아. 내 출신이 문제인 거면 결혼은 유지하지 않아도 돼요.”
구설에 오르지 않을 만한 더 반듯한 명찰이 필요한 거라면 비켜 줄 수 있다. 아이가 있다면, 이진주처럼 임신 계획은 없다는 사람하고 재혼하더라도 문제가 안 될 거다.
“내가 요구해서 이혼하는 걸로 해요. 위자료도 줄게요.”
깨끗한 이혼을 원한다면 난잡한 사생활이라도 만들어 바쳐 줄 용의가 있었다. 최사헌이 이 이혼에 조금도 잘못이 없어 보이도록.
“해신 화학 주식 160만 주, 디스플레이 지분 2.3%. 원래 유민이 이름으로 돼 있던 것들인데 거기까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백유성 씨.”
“범운은 전기차 사업에서는 후발 주자고, 경쟁력을 위한 배터리 자체 생산이 최사헌 씨 계획이잖아요. 예전에 배터리 셀 파우치 필름 제작에 성공해서 계열사 흑자 전환에 성공한 적 있었죠. 그 경험으로 신사업에도 배치된 거, 맞죠?”
시작된 말은 끊이지 않고 나왔다. 여러 번 연습하고 정리했던 얘기였는데 쉴 새 없이 뱉느라 난삽하게 들렸다.
“해신 화학은 리튬 이온 배터리 분야 연구로는 국내 선두고, 이미 배터리 셀 공급에도 국내외로 지분이 높아요. 협력하면…….”
“지금 이거 거래 얘깁니까?”
최사헌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나를 보는 눈초리가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웠다.
“나하고 하고 싶은 얘기가, 정말 그게 다예요?”
그럼 지금 당신하고 무슨 얘기를 해?
내가 당신한테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는데?
왜 우리한테 다른 대화가 가능할 것처럼 말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잖아. 사업. 그리고 차기 총수 자리에 가기 위해서 필요한 다른 거.”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들은 최사헌은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마 내 착각이었을 거다.
인정하기 싫지만 내 바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신 할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당신 피를 물려받은 자식.”
최문경이 최의현을 낳고 자기 자리를 얻었듯이.
“나랑 결혼만 하면 내가 다 줄 수 있다고.”
내가 가진 전부이기도 했다.
내 몸, 빌어먹을 형질, 구걸하고 모멸당하며 빌려 와야 할 유민이의 유산.
“이만하면 오늘 만난 맞선 상대보다는 어필이 됐을 것 같은데요. 이번 프레젠테이션은 마음에 들어요?”
최사헌이 듣기에 어떨지 몰라도 나는 내 전부를 걸었다. 다 줄 거다. 어차피 내게는, 필요도 없다.
“이게 다 최의현 때문입니까?”
나를 불쏘시개로 써서 한 사람을 불태울 수만 있다면.
“나랑 결혼할 거냐고요, 최사헌 씨.”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신경 줄이 팽팽히 당겨져 골통이 쑤셨다.
“이유를 알아야겠어.”
오히려 차분해진 태도로 최사헌이 나를 다그쳤다.
“무슨 계약인지도 제대로 파악 못 하고 협상 테이블에서 부르는 숫자만 듣고서 사인하는 멍청이는 아닙니다. 말해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의도가 뭔지.”
“최사헌 씨가 차기 총수가 되면 최의현은 기분이 엿 같아지겠죠. 나는 걔랑 결혼 안 해도 되고.”
“그게 다가 아니잖아. 왜 의현이한테 그렇게까지 집착합니까?”
“집착?”
“한 사람 때문에 인생까지 거는 걸 집착이라고 합니다, 보통은. 이 거래에서 의현이에 관한 거 말고 백유성 씨가 얻는 게 뭔데요.”
최사헌은 몰아붙이기를 그치지 않았다. 물러서지 않을 게 보였다.
얘기하려면 그날 밤부터 시작해야 했다.
갑작스럽게 열린 침실의 문, 내 어깨를 누르고 고개를 베개에 처박게 하던 최의현의 손, 습한 여름밤에 저질러진 부정을 고백해야 한다.
어떻게 말하란 말인가.
싫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실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고. 똑바로 저항했는지 잘 모르겠다고. 최의현이 그 밤 후에 말했듯 사실은 즐겼던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살갗을 따라 흐르던 땀의 감촉마저 소름 끼치게 생생한데, 가장 중요한 기억들만 뭉개져 있어 최악의 편집본만을 닳도록 돌려 봐야 했다.
“나하고 정말 거래하고 싶은 거라면, 말해요.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너덜거리는 필름의 재생 버튼이 눌린다.
“전부 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악몽은 지치지도 않고 찾아왔다.
* * *
기억을 돌이키면 가장 선명히 떠오르는 부분은 유민이의 눈이다.
언제나 따뜻하고 안전한 세계에서 보호받던 그 애의 얼굴에 균열이 이는 순간이, 내 살이 찢기는 것만 같던 통증보다 더 분명히 남았다.
어두운 틈으로 눈동자가 부릅뜨인다. 나를 지켜보고 있다.
채 닫히지 않은 문 사이로 우리를 발견한 한 쌍의 눈동자, 유민이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곧이어 뛰어가는 소리가 났다.
‘놔줘, 놔……. 유민이가…….’
잠시 멈췄던 움직임이 다시 거세게 치받았다. 눅눅하게 젖은 시트에서 몸이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시트를 쥐어뜯으며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백유민이 뭐?’
귓전에 떨어지는 음성이 소름 끼쳤다.
나는 여전히 최의현의 아래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고 행위가 그 후로 얼마나 더 이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몇 시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평생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도 최의현은 유민이의 약혼자였다.
취했고, 밤이 늦어 손님방에서 자고 간다고 했다. 우리는 동창이었으나 접점이 적었고, 가족 행사에서나 몇 번 함께한 서름서름한 관계였다. 나는 항상 최의현이 불편했었다.
유민이에게 내가 원한 일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었다. 최의현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인생은 대개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최의현의 어머니가 보낸 비서실장이 찾아와 지난밤 일을 덮기를 요구했다. 러트 탓에 일어난 사고라고 했다.
‘사장님께도 제가 잘 설명 드리겠습니다.’
비서실장은 간밤의 일이 흡사 안전사고라도 되는 양 사무적이었다.
‘동생분 명예도 얽혀 있는 일이니까요.’
나를 잠재웠던 것은 오로지 그 문장이었다. 아마 부모님에게도 잘 먹힌 설득이었을 거다.
사건에 관한 부모님의 묵인이 떨어진 후 나는 유민이와 함께 나와 살던 집을 떠났다. 유민이는 내가 짐을 싸서 나가는 날에도 단 한 번도 나와 마주치지 않았다.
최문경의 비서실장으로부터 치료비 명목으로 얼마를 받았다. 나는 온몸이 멍투성이였다. 붙잡히고, 억눌리고, 빨린 상처들이었다.
배가 아파서 하루에도 몇 번씩 욕실에 웅크려 울었던 것 같은데 기억은 희미하다.
며칠이 지났을 때 응급실에서 연락이 왔다. 유민이는 약물에 의한 쇼크로 정신을 잃은 채였다. 엑스터시 과다 복용 증상이라고 들었다.
‘합성 MDMA는 스테디라 어느 클럽에서나 많이 돌아. 유민이 어젯밤에 어디 있었는지 알아? 공급책은 알아봐 줄 수 있어. 근데 소용없을 거야. 못 팔게 해도 다른 루트 뚫으면 그만이라서.’
미림은 설명해 주면서도 난처해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알면 유민이를 말릴 수 있을 거라던 내 생각은 지나치게 순진했다.
‘본인이 알아서 끊어야지.’
‘약을 어떻게 알아서 끊어요.’
옆에서 아령으로 팔 운동을 하던 곽지경이 끼어들었다.
‘도리도리에 꼴아서 응급실 간 거라면서요. 클럽 드럭을 맛이 갈 만큼 했으면 처음 아닌 거예요. 이미 섞어서 쓰고 있을지도 모르고. 죽어도 못 끊어요.’
‘곽지경, 분위기 파악해라.’
‘임기주, 너나 빠져. 솔직히 말해 드리는 게 낫지. 형, 일단 약에 맛탱이 간 애들은 화타가 와도 못 구해요.’
곽지경이 아령을 아래로 내리며 다시 강조했다. 절대.
나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부모님 귀에 들어가게 하지 않으려 애는 썼지만 아버지가 아는 건 시간문제였다.
다시 약을 하게 둘 수는 없었다. 내 발로 다시 유민이와 함께 살던 집으로 들어가 감시역을 자처하며 일주일을 보냈다.
‘형이 어떻게 내 앞에 다시 나타나?’
유민이는 내게 치를 떨었다. 최의현은 그날 이후로 일방적인 파혼 통보를 하고서 유민이와 연락을 끊었다.
유민이 앞에서 나는 발작적으로 울리는 내 휴대폰을 숨겼다. 최의현은 차단해도 번호를 바꿔 가며 내게 계속 연락했다.
지도 교수님과 면담하느라 늦게 들어간 날이었다.
욕실 바닥에 유민이가 쓰러져 있었다.
창백하게 늘어진 유민이는 그대로 영영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다.
쓰러지지 않으려 벽을 짚었다. 더듬거리며 발을 디딘 욕실 바닥이 평소보다 미끄러웠다.
네발로 기어가지 않는 게 용한 수준이었다. 겨우 옆으로 가 유민이를 바로 눕히자 미동도 없던 어깨가 떨렸다.
‘형…….’
초점을 잃은 눈이 가늘게 뜨인 채로 나를 더듬었다.
‘응, 형이야.’
유민이가 나를 부를 때면 어떤 순간에건 대답해야 했다. 나는 유민이의 형이고, 보호자였다.
이 애가 날 필요로 한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했었다.
나한테 쓸모는 그 정도였으니까. 유민이라도 아끼지 않으면 뭘 하며 살아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도대체 왜, 살아 있는 건지.
유민이의 보드라운 뺨을 만지면서 똑같은 다짐을 했다. 이 애한테 필요하다면 뭐든지…….
유민이가 힘없이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약효 탓인지 눈가가 연신 떨렸다.
‘의현이 형.’
내 옷자락을 붙잡은 유민이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납작하게 누운 칼날이 갈비뼈 틈으로 들어오는 듯했다.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나는 뜨끔거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최의현이 내게 한 짓에도 불구하고 유민이는 이 순간에마저 최의현만을 찾고 있었다.
아직도 그 밤의 최의현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지는데.
나는 대학원에 휴학계를 내고 내겐 악몽 같은 유민이의 집에 아예 틀어박혔다. 부모님은 무언가 알아차린 듯했으나 내가 알아서 하겠거니 가만히 두는 눈치였다.
금단 증상에 시달리기 시작하자 유민이는 거의 짐승처럼 날뛰었다. 식은땀에 젖어 이불을 세 겹씩 두르고 벌벌 떨면서도 유민이는 또 최의현을 찾았다.
그래도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내가 더 잘하면.
갖은 애를 써 약을 끊은 지 한 달여가 되었을 때 유민이는 또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약에 취해서 방에 잠들어 있었다. 내가 새벽녘에 잠시 편의점을 다녀온 틈을 타서였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끊임없이 무너지는 도미노였다.
‘죽어도 못 끊어요.’
곽지경의 말이 가슴을 선뜩하게 만들었다.
이러다 정말 죽기라도 하면.
다음에 집에 들어갈 때는 숨을 쉬지 않는 유민이를 보게 될까 무서웠다.
잠시라도 유민이 곁을 떠나 있으면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고, 잠에 들면서도 조마조마했다. 나는 일주일이 넘도록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최의현, 잠깐 만날래?’
부재중전화 목록을 채운 번호에 전화를 걸면서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약속 장소에 나가느라 미림에게 대신 자취방에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오랜만에 나왔더니 공원이 온통 낯설었다.
일부러 자취방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는데도 생각은 온통 유민이에게 쏠려 있었다.
불안으로 속이 텁텁했다. 계속 유민이가 약에 취해 쓰러지는 모습만 떠올랐다.
그나마 그 상태가 아니었으면 최의현 앞에 설 엄두도 못 냈을 거다.
술에 취한 상태처럼 이성이 흐렸다.
‘유민이가 요즘, 많이 힘들어해. 네가 옆에 있어 주면 괜찮아질 것 같아서.’
말문을 열자 최의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나는 최의현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유민이랑 다시 만나 줘.’
한 글자씩 천천히 말하면서 숨을 몰아쉬지 않으려 애썼다. 그날 밤의 끔찍한 기억이 떠오르면 유민이를 생각했다.
최의현이 너무 가까웠다. 숨소리, 그림자, 존재감. 다 견디기 어려워 당장이라도 뒤돌아 뛰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새파랗게 질린 입술로 최의현을 찾던 유민이 생각이 나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백유민 때문에 이렇게까지 한다고? 머리가 나쁜 거냐, 등신인 거냐.’
글쎄, 둘 다일지도. 끓어오르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최의현이 언성을 높이는데도 공원 보도블록 사이를 기어 다니는 벌레들만이 내 시선을 끌었다.
‘내가 백유민이랑 만나도 아무렇지 않다고, 너는? 야! 나는……!’
‘부탁할게.’
악을 지르는 최의현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유민이는 하나밖에 없는 내 가족이야.’
유민이를 잃을 수는 없었다. 유민이가 원래 있어야 했던 안전한 세계로 그 애를 돌려보내 주어야 했다.
나를 찢어발긴 인간한테 빌어서라도.
‘네가 옆에서 유민이 잡아 줘. 나는 못 하니까.’
지금 유민이한테 필요한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후회하지 마, 백유성. 아니, 너 후회하게 될 거야.’
최의현은 나를 죽일 듯 노려보며 말했다.
그때 나는 뭐라고 말했던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었나?
죽도록 후회하고 또 후회하게 될 줄 모르고.
앞을 볼 줄도 모르면서 나는 왜 그토록 어리석었을까.
내게 따로 최의현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으나 유민이의 상태는 빠르게 안정되었다. 들뜬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유민이가 내가 권유했던 치료센터에 다니기로 한 후 겨우 내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최의현이 유민이와 같이 다니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파혼 얘기도 흐지부지됐다고.
최의현에게 부탁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나아지고 있었다.
최문경과는 그다음에 만났다.
김혜령 비서실장은 나를 전통 한옥을 표방한 찻집으로 데려갔다.
안쪽에 따로 튼 방 하나는 커다란 목제 탁자와 다기들로 차 있었다. 열린 덧문 안으로 정원이 보였다.
창가에 여유롭게 앉아 있던 최문경이 나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유민 씨 형이죠? 의현이 때문에 고생 많았다고 들었어요.’
고생. 나는 단어를 곱씹어 보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최문경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보이차 찻잎을 찻잔에 덜었다. 향기로울 찻잎의 냄새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의현이가 성격이 워낙 독불장군이라, 아직도 그쪽한테 폐가 많죠?’
유민이와 다시 만나면서도 최의현은 내게 연락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지긋지긋하게 끈질겼다.
‘의현이하고 유민 씨, 언제 식 올리게 될지 모르는데 일찍 자리 잡는 것도 좋지 않을까, 유성 씨도.’
내 찻잔에 세 번에 나누어 찻물을 따라 주며 최문경은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차가 우려지면서 검붉은 색채가 찻잔에 퍼져 나갔다.
모든 것이 격식 있었다. 그날 밤의 짐승 같은 난잡함이 정말 없던 일로 여겨질 정도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의현을 빼닮은 얼굴을 쳐다보면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도 좋은 생각 같았다.
그즈음에는 주기가 다가오면 전에 없이 심한 복통을 앓았고 평소보다 약을 많이 먹었다.
어머니는 취미로 유화를 그렸다. 작업실에 앉아 채색에 골몰할 때의 어머니는 유일하게 생동감이 넘쳤다.
‘생각해 봤는데요.’
작업실에 미처 들어가지 못하고 열린 문 앞에 서서 말을 꺼냈다. 어머니는 돌아보지 않고 유화 나이프를 놀렸다.
물감이 뭉텅이로 캔버스에 발린다. 기름 냄새가 독했다.
해외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전시를 열었던 어머니는 결혼하면서 모든 작품 활동을 그만두었다.
‘저도 이만 결혼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안정감이 있으면 좋겠더라고요.’
이젤 앞에 앉아 있던 어머니의 등이 멈췄다.
‘그래, 그럼.’
대답을 들으며 나는 캔버스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여러 조각으로 잘린 색이 서로 부딪히고 있었다.
언제나 남의 손으로 으깨지는 인생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내 삶에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위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어차피 사랑이나 행복 같은 것은 너무 멀어서, 조용히 살아가거나 혹은 조용히 죽어 갈 수 있다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작업실에 들른 이후 어머니는 내게 가야 할 자리들을 마련해 주었다.
호텔 라운지의 카페, 정원이 딸린 요릿집, 정해진 약속을 따라 나는 어디로든 돌아다녔다. 대학원은 자퇴했다.
만난 상대들은 이야기를 이어 가다가도 내가 내 것이랄 만한 건 전무한, 실속 없는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유성 씨는 오메가라 자식 계획에서 골머리 썩일 일은 없겠네요.’
그나마 좋은 반응이 그런 식이었다.
나는 내가 잘하고 있다고 믿었다. 유민이는 좋아지고 있었다. 곧 최의현과 유민이는 결혼할 테고, 언젠가는 나를 용서할 거다.
견디고, 견디고, 견뎠지만.
유민이는 죽었다.
내 전화를 받고, 최의현을 만나러 오다가, 약에 취해서.
나는 뭘 한 걸까.
무슨 짓을 해 버린 걸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백유성 씨.”
뺨이 붙잡혔다. 손가락 마디에 굳은살이 박인 손의 감촉이 나를 현실로 끌어낸다.
“숨 제대로 쉬어요.”
모르겠다.
어째서 나는 늘 애를 써도 엉망이 되는지.
움츠러드는 고개를 붙잡아 지탱하는 최사헌의 손을 감싸 쥐고 자꾸만 가쁘게 빠져나가는 숨을 다잡았다.
계속 숨을 쉬는데도 어지럽고 폐가 아팠다. 갑작스레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할딱대도 산소는 그저 지나쳐 나가기만 한다.
“내가 원하는 건 최의현이 비참해지는 것밖에 없어요. 필요하면 뭐든지 할 거예요, 나는. 당신은 그것만 알면 돼.”
뭐든지 하겠다. 속으로 다시 되뇌었다. 그 자식을 망칠 수만 있다면.
나한테 한 짓은 넘어갔더라도 유민이한테 그런 짓을 했으면, 잘못을 했으면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잖아.
“만약에…… 당신이 싫다고 하면…….”
최사헌의 손등을 쥔 손가락이 갈퀴처럼 구부러졌다. 최사헌은 유일한 구명줄이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더 나쁜 방법이 있다.
더 나쁜 길은 있다.
그리고 나는 부서지는 것 따위는 무섭지 않다.
조금도 두렵지 않다.
* * *
“당신이 싫다고 하면…….”
꺼질 듯 흔들리는 목소리가 끝내 사그라졌다.
사헌은 말을 잃는다.
유성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얼굴이 고약하리만치 창백했다.
제 손등을 긁는 그의 손가락이 차갑다. 마르고 상처 난 손가락은 뿌리치면 그대로 부러져 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으므로 사헌은 함부로 움직이지조차 못했다.
백유성은 틀린 선택지다.
사헌은 여전히 자신의 본능을 신뢰했다.
아이, 재산, 뭐든 그의 조건대로 맞추겠다는 편리성까지. 유성의 말대로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으나 이건 독이 든 잔이다.
겉으로 보이는 이익에만 눈이 멀어 손댔다가 실패한 경우를 여러 번 봤다.
“알았으니까 쉬어요.”
사헌이 유성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냈다. 과한 집념을 가진 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유성에게도 을씨년스러운 광기가 엿보였다.
문득 재빠른 피아노 연주가 들리는 듯했다. 불길하고 섬뜩한 소리였다. 우연조가 무서운 얼굴로 치던, 그 소리. 눈먼 증오.
비즈니스에서 중요한 건 숫자보다는 숫자를 만드는 사람이다. 백유성 같은 인간과 파트너가 되는 위험부담은 불에 섶을 지고 뛰어드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 제대로 대화할 상태가 아닌 것 같으니까, 일단은 쉬고 있어요.”
손목시계를 확인한 사헌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시간을 너무 썼다.
맞선 자리를 급하게 마무리 짓고 그대로 달려왔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행동이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난 일이 있어서 지금 당장 들어가야 합니다. 치울 사람 보낼 테니까 거실에는 손대지 말고.”
일어서려는 사헌을 유성이 붙잡았다. 딴에는 힘껏 붙잡은 듯 손마디가 온통 하얘질 정도인데도 조금만 세게 쳐내도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아슬아슬함이 사헌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유성의 입술이 힘없이 달싹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모양을 유심히 지켜보니, 사헌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좋습니다.”
대답하고 싶은 충동을 사헌은 끝내 억누르지 못했다.
얽히면 안 된다.
지금 이 자리에 올라오려고 평생을 썼다.
흙탕물이 첨벙대는 진흙에서 발을 빼내고 드디어 석등원에 들어섰다.
그러나 이제 곧이다. 조금만 더 참으면, 사헌은 모래와 이끼의 정원에 침을 뱉고 단단하고 마른 땅에 발을 디딜 수도 있었다.
힘이 빠졌는지 유성의 손이 사헌의 손목에서 조금씩 미끄러졌다. 조금만 기다리면 그대로 떨어져 내릴 것도 같다.
절실하다고 다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최의현은 이중, 삼중의 보호 속에서 누구보다 단단한 기반을 가지고 자란 인간이었다. 유성은 유성 자신만을 할퀴게 될 것이다.
사헌에게는 유성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는 모습이 보였다.
“하겠다고 한 겁니다, 결혼.”
사헌이 유성의 손을 붙잡아 끌어올렸다. 조금만 힘을 주면 깨져 나갈 듯 섬약한 손이었다.
사헌은 발밑이 부드럽게 꺼져 가는 감각을 느꼈다. 질척거리는 진흙이 이윽고 그의 발목을 삼켰다.
* * *
구두 안에서 발가락 끝을 움직여 보았다. 조금 욱신거렸는데 정신을 가다듬기에 좋은 정도였다.
빌딩에 걸어 들어오는 동안에는 긴장 때문인지 감각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구두 앞코에서 정면으로 시선을 들자 아버지가 보였다.
자신의 사무용 의자에 방만하게 기댄 아버지는 못마땅함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엄연히 호적상 자식인데도 방문 약속을 잡느라 애를 먹었다. 10분이면 된다고 거듭 우기고서야 비서실에서 약속을 잡아 주었다.
새삼스럽지도 않다. 덜 자랐던 때도, 심지어 유민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아버지가 나를 살갑게 대한 적은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거다.
“유민이 지분, 저 주세요.”
나는 곧장 준비해 온 말을 꺼냈다. 미움받을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거침이 없어진다.
안 그래도 불편하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는지 아버지의 이마에 핏줄이 불뚝하게 섰다.
“그냥 달라는 얘기 아니에요. 드릴 말씀 있어요.”
당장이라도 호통을 칠 기세라 빠르게 말을 덧댔으나 아버지는 그새 고개를 저었다.
“나가.”
“끝까지!”
아버지의 입에서 나가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나는 뒤질세라 언성을 높였다.
“제 얘기 끝까지 들으세요, 이번만큼은.”
전에 없던 일에 아버지는 분노보다 당혹이 앞선 듯했다.
“범운 정공 최사헌 상무이사하고 결혼할 생각입니다.”
틈을 타 해야만 하는 말을 했다. 당황으로 굳어 있던 아버지의 입매가 더디게 비틀렸다.
“누구랑, 뭘 해? 의현이를 두고?”
아버지는 드러내 놓고 나를 비웃었다.
예상했던 일이다. 상상했던 것보다 그리 나쁜 반응도 아니었다.
“범운 자동차, 이번에 전기차 사업 출범하고 동시에 진행 중인 자체 배터리 개발에 해신 화학도 본격적으로 협력하면요. 최사헌 상무는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총력전이에요. 범운 자동차 2차 배터리 공급사 선정 목록에 해신 화학도 들어가 있죠? 얻을 게 있을 겁니다.”
내가 늘어놓는 일 얘기에 아버지는 콧방귀만 뀌었을 뿐이다.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내 입에서 나와서일 테다.
“최문경이 최 상무 그대로 둘 것 같아?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 그 자식은 의현이 올라가면 나가리야, 나가리.”
늘 무시하며 나와는 말도 섞지 않으려던 아버지가 내 앞에서 이렇게 열을 내는 건 처음이었다. 좋은 징조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든 저는 이쪽 줄을 타 보려고요.”
“건방진 짓 하지 말고 얌전히 의현이 비위나 맞춰.”
“최종필 회장은 이미 자기 첫째 손주한테로 기운 모양이던데요.”
최 회장 이야기가 나오자 아버지의 안색이 변했다.
“뭘 알기나 하고 하는 소리야?”
“최 회장님한테 직접 여쭸거든요.”
아버지 얼굴을 보면서 얼빠져 보인다는 생각을 할 날이 오다니.
아침에 최종필 회장 측과 통화를 마쳤으니 거짓말은 아니다. 최사헌에게 스포트라이트가 가는 중인 것도, 맞는 말이었고.
“어차피 유민이 주셨던 지분이잖아요. 투자하세요.”
연습보다 오히려 어렵지 않았다. 나는 땀이 밴 손바닥을 말아 쥐어 감췄다.
마지막에는 미소를 지을 수 있을 정도였다.
“결혼 선물이라고 생각하셔도 좋고요.”
* * *
아버지와 만남을 끝내자 현기증이 몰려왔다. 발이 욱신대는 걸로 보아 상처가 성치 않을 것 같았으나 구두는 완벽히 내 발을 가려 주고 있었다.
나는 허리를 바로 세우고 걸었다. 비틀거려서는 안 된다.
특히나 이제부터 만날 사람 앞에서는.
호텔 최고층에 다다르자 엘리베이터가 조용히 열렸다.
축축한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떨리는 손을 한참 맞잡고 있다가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즈음에야 어깨를 폈다.
문에서 이어지는 거실 소파에 최종필이 앉아 있었다. 뾰족한 야자잎이 소파에 긴 발톱 자국 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는 서두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하며 그의 앞에 앉았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유성이라고 합니다.”
최종필 회장은 사진에서만큼이나 기골이 장대해 보였다. 말년에 접어든 노인인데 웬만한 젊은이들보다 풍채가 좋았다. 다만 눈 밑이 꺼져 안색이 나빠 보였는데, 그래도 오래간 기업 수장으로 살아온 이의 기백이 있었다.
나 정도는 쉽게 잡아먹을 듯한 기운 앞에 나는 숨죽였다. 실제로 최종필이 원한다면 나 하나 삶아 버리는 건 일도 아닐 거다.
“해신 화학 백 대표 아들이지?”
가만히 눈을 내리뜨는 나를 최종필이 위아래로 훑었다.
“의현이나 사헌이나, 왜 젊은 애들 둘이 정신을 못 차리고 놀아났는지 알겠네. 그래도 사헌이 녀석은 연애 놀음하고는 영 거리가 먼 줄 알았더니 그 녀석까지 주무르고. 재주가 좋아.”
“과찬이십니다. 손자분들이 워낙 훌륭하셔서, 사실 놀아난 건 제 쪽인데요.”
천연스럽게 받아치자 최종필의 두꺼운 눈썹이 꿈틀댔다.
“오늘 이렇게 찾아뵌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죽은 애 형하고 결혼한다는 것도 꼴불견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서 사촌 형하고 오메가 하나 두고 싸워? 못 볼 꼴이지.”
최종필은 듣지도 않고 내 말을 탁 잘랐다. 최문경이 떠올랐다. 최문경을 보면서는 최의현을 생각했었는데.
그 최문경도 이 사람을 무서워할까.
나는 최종필 회장은 무섭지 않다.
내가 무서운 건 실패하는 것뿐이다.
나한테는 이 판이 마지막이다. 다 걸었다.
“사헌 씨 아이 가졌습니다.”
이 말 역시 연습했던 것보다는 쉬웠다.
굴속의 호랑이처럼 형형하던 최종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최사헌의 말대로 무언가에 그토록 얽매이는 것은 집착이고, 집착은 곧 약점이다.
“이름은 회장님께서 지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무릎에 모았던 손을 아랫배로 당겨 올리면서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혔다. 그림자가 숙인 고개를 따라 둥그렇게 고였다.
* * *
― 사실입니까?
최사헌의 목소리는 드물게 탁했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서 나는 호텔 창문 너머에 시선을 던졌다.
최종필 회장과 만난 호텔에서 다른 약속을 잡았다. 아직 낫지 않은 발이 아쉽게도 오늘은 해치워야 할 일이 많았다.
“모르죠. 하기는 했으니까 운 좋았으면 생겼을 수도 있고.”
― 제정신이야?
최사헌의 음성이 더욱 낮게 가라앉았다. 수틀리면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누구들보다는 나았다.
― 이게 거짓말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야? 들통이라도 나면. 왜 이렇게 대책이 없지?
“그러니까 결혼을 서둘러야죠.”
최의현이나 최문경이 끼어들면 곤란하다. 최사헌의 승낙이 떨어졌으니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기정사실로 만드는 게 가장 중요했다.
최종필 회장에게 가는 방법이 가장 빠르고 확실했다.
위험부담 없는 사업은 없다. 큰 건일수록 더욱더.
“의현이랑 일 정리할 겸, 배부르기 전에 식부터 올리겠다고 하세요. 최사헌 씨까지 말 맞추면 검사지 들고 오라고 하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그래도 나도 허울은 해신 사람인데.”
혹시 사람을 붙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손을 써 두기는 했다.
“데리러 올 거예요? 알았어. 마음대로 해.”
통화를 마친 후 창을 등지자 의자에 걸터앉은 남자가 머리 뒤로 낀 손깍지를 풀고 자세를 고쳤다.
“사장님이 아시면 가만 안 있을 텐데, 이거.”
정기승이 뺨을 긁적댔다. 표준어를 구사하고 있었으나 말투에서는 간간이 호남 억양이 묻어 나왔다.
정기승 실장은 미림이 차린 흥신소의 실세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일이 정 실장의 손을 거쳐 처리되었다.
법망을 넘나드는 일에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원래는 미림의 아버지 밑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단다. 그때도 실장이었다.
미림이 독립하면서 따라 나왔는데 실상은 부모님 측에서 붙인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미림은 정기승이 자기 사람이 되었다고 철석같이 믿는 모양이나, 물러서서 제삼자의 입장으로 보면 뻔한 일이었다.
뒷짐을 지고 호텔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임기주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금세 눈을 내리깔았다.
임기주 역시 정기승이 데려온 직원이었다. 뜻밖에 곽지경은 정말로 손을 털고 온전히 미림의 밑에만 있다고 알고 있다.
“미림이는 알 필요 없어요.”
해외 도피라도 시켜 주겠다던 여미림은 내가 뭘 하든 결국에는 도와주었을 테지만, 그래서 더더욱 그 애는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정기승도 나와 의견이 같았다.
“아무튼, 부탁하신 밑 작업도 했고 물건도 가져왔습니다. 근데 이런 것들은 먹으면 몸 망가지는 거 순식간이에요.”
내가 형질을 바꾸려 구했던 약도 비슷한 종류였다. 멀쩡히 돌아가던 체내를 억지로 뒤흔들어 놓는 약물이니 부작용도 그만큼 될 거다.
일회성 효과를 위해 몸을 버리는 꼴이었다. 형질을 지우려 먹었던 약 역시 딱 한 번의 히트만 지나가게 해 주었다.
대가는 영원했다.
“상관없어요.”
서슴지 않고 대답하자 정기승이 턱을 모로 꺾었다.
들리는 대화가 불편한지 임기주는 모자챙을 만지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결국은 돈만 있으면 살 만한 세상 아닙니까. 누구나 인생 팍팍하다지만 유성 씨 정도면 배 안 곯으면서 살 만한 팔자인 것 같은데. 왜 사서 고생하시는지 모르겠네.”
나 역시 정기승의 말처럼 생각했었다. 적어도 어릴 때처럼 길바닥에서 얼어 죽을 걱정은 없지 않나.
주어진 대로 그냥저냥 흘러가며 죽은 듯 살아가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었다.
그걸로 괜찮으면 좋았을 텐데.
“정 실장님.”
“예.”
“돈만 받으면 뭐든 하세요?”
정기승의 눈초리가 차게 굳었다. 느물느물하게 웃고 있을 때는 잘 안 보였으나 웃음기를 걷어 내고 나면 남자는 척 보기도 꺼림칙한 뱀눈이었다.
“할 수 있는 건 하죠.”
아까의 싸늘한 인상이 거짓인 양 이내 정기승은 싱겁게 웃어 버렸다.
“사람도 죽여요?”
“뭐, 액수와 상대에 따라서.”
죽여 본 적 있냐고는 묻지 않았다.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알 것 같아서였다.
최의현을 죽여 주겠냐고도 하지 않았다. 나라에서 제일간다는 재벌 그룹의 손자를 청부 살인해 주겠냐고 물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모르긴 몰라도 건너건너 미림과 미림의 사무실 식구들을 통해 불법적인 지점에 겨우 발을 걸치는 나와 달리 최종필 회장이나 최문경은 자기가 수족처럼 쓸 수 있는 칼쯤은 여럿 쥐고 있을 거다.
반면에 내가 가진 거라고는 내 팔 두 개뿐이다.
“총도 구할 수 있어요?”
정기승과 임기주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꽂혔다.
영 생뚱맞은 질문을 다 들어 본다는 듯 나를 쳐다보던 정기승은 이내 목젖이 보일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리고 껄껄 웃었다. 마른 체구에서 나오는 성량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못 팔죠, 유성 씨한테는.”
흐흣, 웃음 끝을 얼버무리며 정기승이 상자를 내 쪽으로 밀었다.
“이거 잘 써 보십쇼. 사장님한테는 비밀로 해 주시고요.”
포도주색 새틴 상자를 열자 나란히 정렬된 주사기와 앰플이 드러났다. 투명한 액체가 차 있는 앰플을 하나 들어 올려 조명에 비추어 보았다.
* * *
저녁이 되어 만난 최사헌은 말끔한 얼굴이었다.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는 낯빛이라 전화로 들었던 가라앉은 말투가 착각이었나 생각될 정도였다.
“화 안 났어요?”
“안 났겠습니까.”
역시. 티를 안 내는 거지, 부처는 아니구나.
데리러 오겠다기에 한 소리 하려고 그러는 줄 알았더니, 최사헌은 내게 발은 괜찮은지 묻기만 했다.
무슨 소리를 퍼붓든 들어 주겠다고 다짐한 시간이 무색했다.
서둘러 최종필을 걸고넘어진 이유에는 최사헌이 결정을 뒤집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었다. 동정은 별로 오래가지 않으니까.
아직도 최사헌이 왜 내 손을 잡아 주었는지 다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내게 화를 내지 않는 이유도.
“뭐 어때요. 결혼한 후에는 들켜도 그만이고, 내가 속인 거 알아봤자 나만 상종 못 할 애로 보시겠죠. 근데 최사헌 씨가 나랑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고 애만 생기면 금방 헤어질 거잖아요.”
예상보다 온화한 차 안의 분위기가 이상해서 준비해 뒀던 소리를 허둥지둥 떠들었다.
일부러 가볍게 말했지만, 상종도 못 할 정도로 건방지고 덜된 애로만 보면 다행이다. 눈 똑바로 뜨고 속였다는 사실을 알면 그 성미에 가만히 둘지 의문이었다.
“어차피 애는 낳아 줄 거니까 꼭 속인 것도 아니지.”
못을 박듯 말했다. 아이만 잘 태어나면 만사 해결, 무책임한 소리였으나 일리 있는 얘기임은 최사헌도 부정 못 할 거다.
“당신이 회장님을 몰라서 하는 소리야. 백유성 씨 손으로 주무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무서워요?”
“예. 당신이 대책 없는 게요.”
“걱정하지 마요. 최사헌 씨한테 피해는 안 가게 할게요.”
“내 걱정이 아니라 당신 걱정을 하고 있는 겁니다.”
왜? 내가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인데?
최사헌이 나를 염려하는 것처럼 굴 때마다 묻고 싶어진다.
물음 밑바닥에 서린 기대감이 나를 소스라치게 했다. 뭘 원하는 거지. 멍청하게.
내가 최사헌에게 받기로 한 건 따로 있다. 걱정이나 염려, 살뜰한 애정 같은 게 아니라 다른 것. 좀 더 확실한 것이다.
“그러면 빨리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만들어야겠는데요.”
내 말에 담긴 뜻을 곧바로 알아차릴 정도로 머리가 좋은 최사헌은, 눈에 띌 정도로 운전대를 세게 잡았다.
“몇 주 차이 정도는 넘어갈 만하잖아요.”
기사에는 8개월 만에 태어났다고 기록된 최사헌처럼.
나는 무릎에 올린 가방에 손을 댔다. 각진 상자의 감촉이 손에 전해졌다.
* * *
주삿바늘을 앰플에 꽂고 피스톤을 당기자 액체가 빨려 올라갔다.
작은 물방울이 뾰족한 바늘에 맺혔다. 팔을 걷어 혈관을 찾느라 신경이 쏠렸다.
유민이를 간호할 때 몇 번 해 본 적 있는 일이라 다행이었다. 집에서 수액을 맞히느라 처음 주삿바늘을 찌르는 데 손이 얼마나 떨렸는지.
지금 찌르는 건 내 살갗이라 그때보다 빠르게 해치울 수 있었다.
주사기에 채워져 있던 액체가 모조리 혈관으로 주사되었다.
일회용 주삿바늘과 빈 앰플을 정리하고 있으니 주사를 찌른 곳에서부터 욱신거림이 올라왔다.
약물이 혈관을 돌면서 미열이 함께 솟았다.
하단전부터 골반 근처에 이르기까지 배 안쪽이 미지근하게 달아오른다. 근육에서 긴장이 야금야금 빠져나갔다.
길게 숨을 고르다 보면 몰려오는 열 기운이 익숙해졌다.
상자는 어디다 숨겨야 할까. 나는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뒤의 빌트인 옷장을 열자 목욕 가운과 최사헌의 슈트가 각을 맞추어 정렬되어 있다.
욕실과 붙은 드레스룸은 집 안의 다른 곳보다는 인간미가 있었다. 적어도 집주인의 손길은 느껴진다.
드레스룸은 제법 쓰는 것 같으니 오래 숨겨 두기는 어렵겠다. 최사헌이 약을 찾아내는 일만은 사양이었다.
일단은 여기 뒀다가 내일 최사헌이 출근한 후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듯싶었다.
금세 어디에 숨겨야 할지 감이 왔다.
* * *
“과보호 아니에요?”
침대 시트에 볼을 대고서 묻는 유성의 발음이 약간씩 뭉그러졌다. 예의를 차릴 때는 잘 훈련된 직업인처럼 척척 자세를 잡더니 지금은 한없이 풀어져 있다.
남의 침대에 드러누워 버린 유성을 흘깃 보며 사헌이 간이 테이블에 올려놓은 패드를 건드렸다. 페이지가 다음으로 넘어갔다.
“뭐가요.”
“당신 할아버지한테 말하자마자 다시 당신 집으로 데리고 온 거요.”
“의현이는 유성 씨 집에 심심하면 쳐들어가던데. 얘기 들으면 당연히 열받아서 들이받으러 갈 게 뻔한 상황에 거기 내버려 두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또 의현에게 무슨 짓이라도 당해서 울면서 빗길에 돌아다니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 정도로 그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본인도 몰랐던 파혼 소식을 들은 의현이 얌전히 있지는 않을 거다.
“나 걱정해요?”
유성이 어느새 일어나 사헌의 어깨에 뺨을 붙였다.
“결혼할 사람인데 걱정하죠, 보통은.”
그냥 걱정한다고 답해 줄 수도 있는데 괘씸해서 꼬아 말하게 된다.
흐으음. 생각하는 듯하던 유성이 사헌의 패드를 건드렸다. 페이지가 휙휙 넘어갔다.
“내가 회장님한테 거짓말하는 바람에 당신 열받게 만들어도?”
손가락이 좌에서 우로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결국 제안서 마지막 페이지가 나타나자 사헌이 유성의 손에서 패드를 빼앗았다.
“이미 저지른 일을 어쩌겠어. 당신이 얌전히 있을 거라고 기대한 내 잘못이지.”
아마도 유성과의 만남이 끝난 직후, 사헌은 최 회장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쏟아지는 고함을 묵묵히 들으며 미간만 주물렀다. 일곱 살 때였다면 놀라서 딸꾹질이라도 했을지 모르나 30대의 최사헌은 노인의 역정 정도는 수월히 받아넘길 수 있었다.
사촌 간에 낯부끄럽게 이게 무슨 꼴이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최 회장은, 마지막에는 첫 증손주에 관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존재를 알지도 못했고 아마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을 아이 때문에 혼이 났다가 칭찬을 들었다가, 정신이 없었다.
잠깐 눈을 뗐더니 난리가 난 집 안과 거기 말쑥하게 앉아 털을 고르는 반려동물을 보는 주인의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방금 하던 짓도 그렇고.
조금만 믿고 맡겼어도 사헌 선에서 더 조용히 추진할 수 있었다. 고모와 의현은 반발했겠으나 그쯤 무시하고 진행할 능력은 사헌에게도 있다.
전면에 나서면 쉽게 다친다. 당연한 얘기다.
안 그래도 비난을 몰아받기 좋은 위치니 더 조심히 구는 게 좋을 텐데.
자신을 믿지 않는 거다. 무리해 가며 서두르는 것만 봐도 무슨 생각인지 알겠다.
아닌 체하면서 경계가 극심하다.
어렵지 않게 사헌은 유성의 경계심을 눈치챘으며, 이해했다.
최사헌 역시 세상 모든 것을 경계하곤 했었으므로.
사헌이 새 붕대가 감긴 유성의 발을 확인했다. 말끔한 섬유로 덮여 있으니 상처가 어떤지 육안으로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
“목욕을 좀 길게 하는 것 같던데.”
사헌이 꺼낸 말에 유성이 멈칫했다.
“상처는 괜찮습니까?”
물이 닿으면 안 되니 씻는 걸 돕겠다는 사헌의 제안을 유성은 단박에 거절했다. 새삼 부끄럼을 탈 것 같지는 않았는데 의외다.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게 있지 않나, 지금은.”
유성의 손이 사헌의 무릎을 덮었다.
무릎뼈를 짚은 검지와 중지가 서로 엇갈리며 허벅지로 나아갔다. 사헌은 유성의 손가락이 사뿐사뿐한 동작으로 자신의 사타구니에 기어드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루라도 빨리 둘이서 만들어야 할 게 있는데요.”
“…….”
“또 싫다고 하게요?”
아예 사헌의 무릎에 올라탄 유성이 익숙하게 목에 팔을 걸었다.
“이젠 핑계도 없잖아.”
유성의 입가에 나긋한 미소가 걸렸다.
사헌은 유성을 밀어내지도, 끌어당기지도 않고 응시했다. 개의치 않고 유성이 먼저 사헌의 목에 입 맞췄다.
입술은 보드랍고 뜨겁다. 입술뿐 아니라 유성의 모든 것이.
끝이 치켜 올라가 화려한 눈매는 무표정하게 있으면 쌀쌀맞아 보였다. 그런데도 전체적으로 눈동자가 크고 물기가 그렁그렁해서 상반되는 인상을 함께 주었다.
이런 식으로 의현을 이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달래기보다 울려 보고 싶어지는 얼굴이다.
언젠가 깨물어 놓은 사헌의 목에 입술을 비비면서 유성이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었다. 아직 남아 있는 잇자국이 기꺼운 듯했다.
사헌이 놀고 있던 손으로 유성의 뺨을 붙잡았다. 아래로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가 위로 뜨여 사헌을 비춘다.
홀리는 기분이다.
이목구비 각자가 대단한 미인형이 아닌데 조화를 이루는 얼굴이 있는가 하면, 깎아 놓은 듯 첫인상부터 백화요란한 생김새도 있는 법이다.
유성은 어딜 보나 후자였다.
“뭐야. 왜 쳐다보기만 해요.”
“예쁘길래.”
“무슨…….”
“내가 생각보다 얼굴에 약했나 싶어서.”
대단한 미인이라는 생각은 전에도 했지만…… 뭔가, 오늘따라 더.
“뭐지.”
중얼대며 사헌이 유성을 품으로 당겨 안았다. 맞닿는 살의 체온이 평소보다 높다.
“혹시 열나요?”
“아니.”
준비한 듯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이 묘하게 의심스러웠다.
뭔가 다른데. 뭘까.
비를 심하게 맞은 데다 상처도 있으니 후유증이 있는 걸까.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 사이 유성이 사헌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오래된 피아노를 우아하게 연주하던 손가락은 보기 좋게 길쭉했다. 약지의 불그스름한 상처들이 눈에 띈다.
“정 내가 걱정되면 회장님을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어요, 최사헌 씨.”
드러난 사헌의 가슴팍을 도닥도닥 두드리면서 유성이 눈매를 아래로 접었다. 의도가 뻔하고, 사헌이 좋아하는 눈웃음이었다.
“또 기분 좋게 해 줘.”
버티기에는 이미 늦었다. 사헌이 테이블의 패드를 껐다.
* * *
백유성에게 경험이 별로 없으리라는 추측을 하기란 간단했다. 조금만 닿아 봐도 알 수 있다.
유성의 굳은 종아리를 넓게 편 손바닥으로 주무르며 사헌이 얌전히 몸을 맡기고 누운 유성을 주시했다.
하자고 실컷 뺨을 비빌 때는 언제고 막상 시작하자마자 굳어 버리는 건 뭘까.
이전에는 단순히 서툴러서라고 여겼는데, 이제는 미심쩍었다.
그저 경험 부족이라기에는 이따금 보이는 반응이 석연치 않았다.
“무서워요?”
사헌이 유성의 무릎 밑을 간질였다. 긴장에 차 새근거리던 유성이 발로 사헌의 복부를 밀었다.
“크기 자랑이에요?”
“실없는 소리로 넘기려고 들지 말고. 무섭냐고.”
유성이 자신만만하게 도리질을 쳤다. 연신 빠르고 세차게 오르내리는 가슴만 아니었어도 넘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벗기고 좀 만진 것뿐인데 벌써 이러는 연유를 알기 힘들었다.
흥분과는 달랐다. 달아오른 뺨이나 한껏 예민한 반응을 보면 흥분도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이건 겁을 집어먹은 데 가까웠다.
“혹시 나랑 했던 게 처음이에요?”
“……그만하고 빨리 하던 거나 하면 안 돼요?”
“백유성 씨는 좋은 섹스를 위해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요?”
“침대에서 심리상담 하려고 들지 말고 닥치는 거요.”
“내 생각에는, 상대의 상태를 주의 깊게 알아차리는 거요.”
혼자 취해서 달려들어 봐야 의미가 없다. 말마따나 넣고 사정하는 거야 쉽지만.
“안 무서워. 처음도 아니야.”
사헌의 배에 얹은 발에 더 힘을 주어 밀어 대면서 유성이 삐죽하게 말했다.
“처음 아니야?”
“…….”
침묵이 묘했다.
“그럼 내가 만지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들어요?”
유성의 발목을 낚아 자신의 허리 옆으로 당기며 사헌이 몸을 숙였다.
자연히 상체가 서로 가까워졌다. 유성이 대답하지 않았기에 사헌은 하던 대로 유성의 옆구리를 쓸어 주며 가슴에 입 맞췄다.
빗장뼈 밑에서 시작해 오르내리는 가슴을 입술로 문지른다. 도드라진 돌기를 물자 유성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할딱댔다.
아파하거나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오히려 지나치리만큼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겹쳐진 하체를 지그시 누르자 유성이 뒤통수를 시트에 비벼 댔다. 쾌감과는 별개인 양 조금만 삽입에 가까워지면 흠칫거리는 양상은 여전했다.
백유성을 알 수가 없다.
“그냥 해…….”
생각하느라 가슴을 빨다 멈춘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유성이 사헌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으며 종알댔다.
“처박고 싸기나 하면 되잖아.”
사헌의 머리카락을 움켜 고개를 들게 유도하며 유성이 소곤거렸다. 반 정도 감긴 눈이 나른했다.
뭐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눈매가 촉촉하다. 끝에 물이 맺혀 있는 것처럼 보여, 건드리면 눈물이라도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저 얼굴로 천박한 소릴 지껄여 대니, 아랫도리가 무섭도록 달아올랐다. 사헌이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백유성, 너 앞으로 예쁜 말만 써.”
갑자기 나온 하대에 유성이 멍하게 눈을 깜빡댔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어린애다. 조금만 맹하니 독기를 빼도 애티가 났다.
사헌이 엄지와 검지로 유성의 양 볼을 잡았다. 별로 없는 볼살이 보조개처럼 눌렸다.
“내 앞에서 성질부린다고 말 험하게 하지 마. 알겠어?”
일부러 목소리를 내리깔자 유성이 눈을 굴렸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다.
“말버릇 고쳐. 알았어, 몰랐어.”
“짜증 나…….”
유성이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베개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더니 그대로 고개를 틀어 마찰 탓에 붉어진 콧잔등을 찡그리며 사헌을 노려보았다.
“너도 나한테 욕하면 되잖아.”
축축한 눈으로 째려보면서 한다는 소리가 저 모양이다.
불리해지면 버릇 나쁜 도련님처럼 군다, 꼭.
저게 최사헌에게 기가 막히게 먹혀들어 갈 걸 아는 사람처럼.
“최사헌 씨는 고상한 신사분이라서 차마 그런 말은 입에 담을 수도 없으시…….”
“내가 너랑 씹이나 뜨자고 이러고 있어?”
유성의 입술이 그대로 벌어진 채로 멈췄다.
입술 사이로 분홍색 혀가 어른거린다.
아연한 얼굴조차 야하게 보였다. 사헌의 눈에만 유독 그런지, 남들한테도 그렇게 보일지 궁금했다.
전시회장에서 있던 일을 생각하면 후자일 것 같은데.
그 생각을 하니 괜히 열이 치받았다.
“교복 입은 애들도 아니고 상스러운 소리 하면 기분이 좋아져? 내 앞에서 욕하지 마.”
열심히 노려보는 유성의 얼굴에 대고 사헌이 고압적으로 물었다.
“알았냐고 물어봤습니다, 백유성 씨.”
“……고.”
“뭐라고?”
“알았는데 씹은 언제 뜨냐고요.”
부지런히 입술을 벌리면서 한다는 말의 내용이란.
절대 안 지지. 사헌이 미간을 찡그리며 유성의 등에 상체를 겹쳐 눌렀다.
체구 탓에 쉽게 제압당한 유성이 힉, 숨을 들이켰다.
날씬한 등이 바짝 긴장하면서 날개뼈가 옴죽거렸다. 목덜미에 확 불그스름한 물이 드는 게 눈에 띄었다.
그다지 세게 누른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뭐만 하면 움츠러드니까 무섭냐고 물었던 거다.
사헌이 유성의 목에서부터 날갯죽지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입 맞췄다.
입술이 닿는 순간에는 놀라는 것 같더니, 입맞춤이 이어지자 호흡이 점차 안정되었다.
“다치게 안 해.”
속삭이며 사헌이 유성의 고개를 돌리게 했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피부가 약한지, 유성은 울면 눈언저리에서 시작해 이마까지 온통 붉어졌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
“겁먹지 마.”
손등으로 자신의 눈가를 마구 비비며 유성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피부가 까지는 게 아닐까 싶게 동작이 거칠다. 사헌이 유성의 손을 조심히 붙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새빨개진 살갗 위로 눈만 동그랗다.
열로 따끈해진 살을 사헌이 자신의 손을 얹어 식혔다. 눈 밑에 사헌의 손길이 닿자 유성이 찡그리듯 눈을 감았다.
백유성은 문제가 많고, 까다롭고, 사랑스럽다.
사랑스럽다, 는 부분에서 느껴지는 불쾌할 정도의 간지러움이 꽤 흥미로웠으므로 사헌은 유성의 찌푸린 얼굴을 보며 그 느낌을 곱씹어 보았다.
사헌이 유성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맛보다 좀 더 깊이 머금자 자연히 타액이 섞였다.
이번에는 달래려고 한 입맞춤이 아니었다. 충동이었다.
말랑하고 작은 혀를 빨고 입 안의 점막을 녹일 듯 문지르며 감촉을 음미하고 싶었다.
“으응…….”
키스가 길어지자 유성의 목 안쪽에서 비음이 비어져 나왔다.
키스에 열중한 틈을 타 사헌이 유성의 배꼽 아래로 손을 움직였다. 배를 만져 주다 허벅지까지 내려가자 따라오듯 허리가 달싹댔다.
조르는 건지, 피하고 싶은 건지 가늠하느라 사헌은 체온이 제법 오른 살갗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기만 했다.
유성의 다리가 사헌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붕대가 감긴 뒤꿈치가 등허리를 압박하자 거슬거슬한 감촉이 자극으로 느껴졌다.
아래가 충분히 이완됐는지 손가락으로 만져 확인하는 동안에도 사헌은 유성의 표정을 주의 깊게 보았다.
벌어지는 감각이 불편한지 종종 미간을 구기긴 했어도 초반처럼 거부감을 억지로 참는 기색은 없었다.
단지 손으로 하는 애무가 길어질수록 초조해하는 듯해, 사헌은 유성이 재촉하기 전에 키스로 일찌감치 입을 막았다.
일부러 산소가 부족해 머리가 몽롱해질 때까지 길게 키스하면 사헌의 어깻죽지를 붙잡던 손길이 느슨해졌다.
다루기 어려운 타입이긴 하다. 벌써 넘칠 정도로 젖어 끈적거리는 구멍을 중지와 약지로 벌려 놓으며 사헌이 생각했다.
물기가 손가락 사이까지 흘러내렸다. 곧 시트가 젖겠다.
쉽게 느끼고, 민감하고. 섹스에 있어 조건이 좋은 몸이지만 너무 예민해서 반대로 문제다.
조금만 잘못 만져도 긴장해 버리는 데다 싫어도 티를 안 내려고 드니까. 본인이 뭘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는 모양이고.
“빨리…… 아…….”
유성이 힘 빠진 손으로 사헌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이번에는 얼른 끝내자는 의미는 아닌 듯했다. 녹녹하게 풀어진 아래의 점막을 깊은 데까지 문지르자 유성이 사헌의 팔을 붙잡고 고개를 움츠렸다.
“언, 제까지…….”
“손가락으로만 쑤실 거냐고?”
두껍고 긴 중지를 끝까지 밀어 넣은 채로 잘게 흔들자 점막이 살갗을 조여 물며 부대꼈다.
“아, 아…… 읏…….”
고개부터 넘어가는 유성의 반응만으로 느끼는 곳을 제대로 눌러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진득대는 물기가 연한 점막을 적셔 속살이 온통 진득거렸다.
“응, 읏, 아, 하윽…….”
가벼운 절정이 유성을 무르녹게 하는 순간을 사헌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찰랑거리던 쾌감이 흘러넘치면서 백유성을 휩쓸어 가는 순간을.
관자놀이를 타고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유성은 눈이 부신 듯 자꾸만 힘주어 눈을 깜빡댔다.
아래는 질질 흐른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였다. 사헌이 손가락을 빼내자 손목까지 애액이 맺혔다.
“괜찮아.”
아직 정신이 없어 보이는 유성을 달래며 사헌이 끈적대는 구멍에 귀두를 눌렀다.
실컷 녹아든 내벽이 성기를 빨아들이는 모양새였다. 끈질긴 애무에 대한 보상으로는 차고 넘친다.
벌써 몰려오는 아뜩한 사정감을 내리누르느라 사헌이 숨을 크게 쉬었다. 잘 짜인 등이 근육을 강조했다.
참지 않으면 넣자마자 몰아붙이고 말 것 같았다. 일단 이성의 끈을 놓치면 유성이 겁을 집어먹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게 분명했다.
속으로 숫자를 세어 가며 속도를 늦추어 삽입했다. 그런데도 자극이 셌는지 다 넣기도 전에 유성은 눈썹을 온통 구기고 끙끙거렸다.
달콤한 신음이었다. 이미 이지가 흐려진 유성은 쾌감에 본능으로 반응했다.
사헌의 등을 안고서 조금이라도 더 달라붙으려 애쓰며 허리를 붙여 왔다. 성기가 빠져나가자 안타까운 소리를 흘렸다.
시트 위로 감미로운 향이 끓는다. 시럽 통에 빠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사헌이 적당히 더디게 움직였다.
“앗, 아…… 윽, 흣!”
신음이 끊길 듯 이어졌다. 힘에 부쳐 하는 기색이 역력해지자 사헌이 보다 움직임을 늦췄다.
밑으로는 머리가 돌아 버릴 정도로 뜨겁게 빨아 대면서 조금만 세게 치받아 대도 못 견뎌 하니, 인내심 테스트라도 받는 기분이다.
시트를 움킨 사헌의 손등에 새파란 핏줄이 돋았다. 그래도, 이제는 이 안에 끝까지 박아 넣고 사정할 수 있다.
억지로 물고 있던 재갈이 풀어졌을 때 느낄 만한 해방감이 머리를 달군다.
원초적인 욕정이 몸을 꿰었다. 몇 번이고 혼자 달하느라 아래를 조이다 흐느적거리며 몸을 늘어뜨리는 유성을 잘 살핀 사헌이 다 빼낸 성기를 완전히 박아 넣었다.
뿌리까지 들어가는 순간 유성이 허리를 띄우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렸다.
크다거나 배가 부르다거나, 아무튼 그런 식의 얘기 같았다. 도발할 목적조차 없이 뭉그러진 의식 속에서 솔직하게 지껄이는 말.
잘 녹은 속살이 다치지 않을 것을 확신했기에 사헌은 연이어 박아 넣었다.
“윽, 읏, 천천, 아, 아, 천천히…… 왜, 아…….”
“지금은 천천히, 윽, 못 해.”
“아니, 야, 으흑……!”
정신없이 구는 유성을 중간중간 달래며 사헌이 계속해 움직였다.
뒤채는 유성을 꽉 안으며 삽입하자 아랫배가 온통 조여들었다. 유성의 몸에서 나긋하게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낄 즈음 안에서 성기가 부풀었다.
교미 상대를 철저히 수정시키기 위한 알파의 노팅이었다. 성기 중간이 둥글게 부풀며 결절을 만들었다.
노팅하는 순간 유성이 완전히 호흡을 멈췄다.
아랫배에 올려놓은 손을 더듬더듬 말아 쥐면서 눈까지 감더니, 벌벌 떨며 숨을 난폭하게 마셨다.
이건 어딜 보나 쇼크 반응이다.
이제는 그만둘 수도 없는데. 사헌이 열기에 젖어 헐떡였다.
참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안에서 부풀었으니 빼내려다가는 오히려 다친다.
사정이 끝나도 결절은 한동안 풀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이어져 있는 방법뿐이다.
“숨, 못 쉬겠어요?”
“괜찮, 으니, 까, 아, 그냥…….”
뭐가 괜찮다는 거야.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있으면서.
사헌이 과호흡이 이어지는 유성의 입술에 입 맞췄다. 일부러 숨을 들이마시지 못하도록 키스하자 유성이 괴롭게 목을 울렸다.
입술을 떼어 산소를 마시게 해 주고, 다시 키스하기를 반복하자 들썩이던 가슴이 조금씩 진정되어 갔다.
정말로 지독하게 손이 많이 간다.
놀라운 건 그게 싫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유성을 까탈스럽다고 분류하면서도 그간 사헌은 한 번도 언짢음을 느끼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여러 번 입 맞추느라 녹녹해진 입술을 어루만지며 사헌이 물었다.
왜 이러는지 궁금하다. 신경이 쓰인다. 백유성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속된 감정은 그랬다.
유성이 이럴 때마다, 어찌할 수 없이 마음이 쓰인다. 휘말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다가도.
팔로 눈가를 가린 채 유성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팔뚝에 남은 불그스름한 흔적이 사헌의 시선을 붙잡았다. 주사 자국이었다.
병원에서 맞은 건가. 마음에 걸렸지만 당장 붙잡고 묻기엔 유성은 이미 무언가에 몰린 채였다.
“그만. 다치겠다.”
이번에도 눈가의 얇은 피부가 상할 것을 염려한 사헌이 유성의 팔을 잡아 내렸다.
“……나한테 너무, 친절하게 해 줄 필요 없어요.”
유성이 웅얼거렸다. 주의를 쏟아야 간신히 들릴 만한 소리였다.
온 신경을 유성에게로 몰아 두고 있었던 탓에, 사헌은 유성의 갈라지고 흔들리는 음성을 모조리 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침착한 대꾸와 다르게 사헌의 속은 어지러웠다.
백유성에게는 대체 저가 모르는 비밀이 얼마나 있는 걸까.
“우리가 서로 자고 싶어서 자는 사이도 아니잖아.”
빠르게 말을 뱉은 유성이 입술을 감쳐물었다.
아직도 배 속에는 부풀어 오른 성기를 품고 있는 주제에. 달아오른 살을 맞대어 놓고서.
“그럼 우린 뭔데?”
사헌이 단조롭게 뱉은 말에 유성이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 속눈썹이 무수히 떨렸다.
“그냥…… 거래.”
최의현을 사이에 둔?
목구멍까지 솟구친 물음을 사헌이 어금니로 씹어 넘겼다. 침대의 공기가 탁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