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폭풍 Tempest
다시 눈을 떴을 때 최사헌은 없었다.
있을 거라고 기대도 안 했지만. 어기적거리며 나가자 식탁에 범용 억제제와 죽이 놓여 있었다.
[몸 챙겨요.]
반듯한 글씨로 쓰인 메모 내용은 네 글자가 전부였다.
신경 써 주는 건 여기까지, 그런 단호함 같기도 했다.
“재수 없어.”
더듬거리며 아랫배를 감쌌다. 아직도 배에 이물감이 남아 있다.
무릎을 안고 웅크리자 알알한 통증들이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나는 인정하기 싫은 쓸쓸함이 아픔과 함께 내 몸을 비질하고 사라지도록 두었다.
베란다에 쳤던 암막 커튼을 걷어 버리자 쨍한 햇살이 빗발쳤다. 한동안 햇빛을 맞다가 물을 마시고, 최사헌이 사 두고 간 죽과 약을 먹었다.
물기가 바싹 마른 싱크대 안에는 휴대폰이 그대로 처박혀 있었다. 들고서 전원을 켜자 불이 들어왔다.
요즘은 다 방수 기능이 있다더니. 그러나 막상 다 켜고 나니 군데군데 얼룩이 져 화면이 일그러져 보였다.
“주인이랑 닮았네.”
못 쓸 것도 없다는 생각에 주머니에 넣었다. 쌓인 부재중전화는 확인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걷다가 허리며 허벅지가 아파 드문드문 주저앉았다가도 다시 일어서서 걸었다.
차를 몰고서 도로를 달렸다. 이따금 뒤집힌 차 아래로 흘러나오던 유민이의 피가 떠올라 메슥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특한 유선형의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큰어머니가 세운 갤러리였다.
갤러리 안에 들어서자 데스크 직원이 내게 용건을 물었다. 나는 데스크를 지나쳐 안쪽 방을 열어젖혔다.
“뭐냐?”
백지훈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사원 주제에 개인 사무실도 쓰고, 역시 재단 이사장 아들이라 팔자 좋아.”
나는 백지훈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채광도 잘 드는 방을 빙 둘러 걸었다.
사고뭉치 막내아들인 백지훈은 쟁쟁한 형, 누나들과 달리 예쁨이나 받으며 어머니 소유 갤러리에서 편히 먹고 놀 팔자를 타고났다.
“야, 뭐냐고. 네가 여기 왜 와. 너랑 만난 거 알면 나 최의현한테 뒤져.”
백지훈이 내 앞을 막아섰다. 최의현 운운하는 걸 보니 지난번 백부의 생일 겸 전시회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아마 나한테 손댄 만큼 처맞았던가 살벌한 으름장을 들었던가 했겠지.
“뒤지든가.”
내 대꾸에 눈을 부라리면서도 백지훈은 이제 손은 올리지 않았다. 최의현은 무섭다, 이거지. 쓰레기 새끼.
백지훈을 지나쳐 비어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등받이에 한껏 기댔는데도 비싼 의자라 그런지 삐걱대는 소음조차 없다.
“네가 거기 왜 앉아. 일어나.”
“너, 최사헌하고 친해?”
“뭐, 사헌 선배?”
고등학교 땐가, 최사헌이 다니던 명문 사립학교에 방학 중에 잠깐 교환 다녀온 걸로 아직도 선배란다. 내가 이걸 아는 이유도 백지훈이 떠들고 다녀서다.
내 기억으로는 백지훈이 대학 졸업 전 인턴으로 지낸 곳도 최사헌의 회사였다.
“그냥저냥? 그 선배는 원래 다 친해 보이는데 아무랑도 안 친해.”
“그럴 것 같았어.”
“뭔데, 씨. 갑자기 와서는. 빨리 나가.”
“백지훈, 넌 나랑 왜 자고 싶었냐?”
앞뒤 없이 튀어나온 화제에 백지훈의 입이 딱 다물렸다.
“과거형으로 물어볼 게 아니라, 왜 자고 싶냐고 했어야 되나?”
“몇 달 새에 또라이가 됐냐.”
하, 백지훈이 코웃음을 쳤다. 틀린 말은 아닌지라 싱거운 웃음이 나왔다.
“야, 너 의현이 때문에 이러지. 어?”
“최의현 얘기는 됐고, 너 이진주랑은 친하지.”
이진주는 최사헌의 결혼 상대였다. 혼전 계약서를 퇴짜 놓은 주인공이기도 했다.
“나 이진주랑 만나고 싶어.”
머리 나쁜 백지훈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맨입으로?”
그러나 역시 백지훈은 머리도, 인성도 나빴다. 은근하게 내 어깨 위를 쓰다듬는 꼴이, 아무래도 죽기 전에 정신 차리기는 그른 듯했다.
“백지훈, 너는 최의현이 그렇게 무섭냐?”
“갑자기 뭐야. 이르기라도 하겠다고?”
“아니, 그냥. 등신 같아서.”
자기 욕에는 재빠르게도 반응하는 백지훈은 금세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뺨은 못 치게 됐으니 어깨라도 부술 기세다.
“여기 올라오는 계단.”
“엉?”
“가파르더라. 확 자빠져서 구른 다음에 최의현한테 울며불며 전화나 할까 봐.”
“…….”
“걔 그런 거 되게 좋아하잖아. 자기한테 우는소리 하는 애 앞에 나서서 힘자랑하는 거. 그 새끼 성질 알지.”
최의현의 역겨운 과시도 지금이라면 이용할 수 있다.
백지훈이 제 관자놀이 옆에서 검지를 빙글빙글 돌렸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서 문가로 걸었다.
“야! 야, 백유성. 진짜 또라이냐? 알았어.”
백지훈이 다급히 나를 추월해 문에 기대어 섰다. 멍청하고 성질도 급한 놈이라 좋다. 알기 쉬워서.
“근데 진주 누나랑 만나서 뭐 하게?”
앞에서 들리는 백지훈의 의문을 한 귀로 흘리며 사무실의 유리 벽 아래 비치는 도시의 자동차 행렬을 구경했다. 복잡하게 얽혔다가 빠져나가는 차들이 각자의 목적지로 떠난다.
나는 교차로 한가운데에서 부딪혀 폭발하는 차들을 상상했다. 그날의 사고처럼 잔뜩 찌그러진 차와 바닥을 물들이는 붉디붉은 피를.
* * *
“와인 시켜도 되죠? 그러니까, 백유성 씨? 유성 씨가 사는 거죠? 비싼 걸로 고를게요.”
이진주는 세련된 미인이었다. 약속 장소로 고른 지중해풍 바와 어울렸다.
자리에 앉고 나서는 친구와 약속에 온 것같이 굴었다. 백지훈의 연락에도 흔쾌히 응했다고 했다.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하나 고심했는데, 저쪽에서 먼저 이것저것 말을 걸어서 최사헌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 쉬워졌다.
“사헌이 얘기 물어보러 부른 거예요? 재밌네.”
와인을 꿀꺽꿀꺽 들이켜면서 이진주는 자주 웃었다. 그럴 때마다 귀에 건 링 귀걸이가 흔들렸다.
“파혼 후에 사헌이 얘기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꿍꿍이가 비슷비슷하던데.”
얘기하면서도 이진주는 내 반응은 신경 쓰지 않고 시원스레 마시고 먹었다. 접시에서 프로슈토로 감싼 멜론이 빠르게 사라졌다.
최사헌과 결혼했더라도 꽤 잘 어울렸으리란 상상이 들었다.
“그때 파혼 얘기가 궁금한 거면, 좋아요. 안 그래도 이 질문 친구들한테 엄청 많이 받았었거든. 말 못 할 거 없죠. 대신 유성 씨도 비밀 정도는 털어놔야 재밌죠.”
테이블을 넘어올 듯 허리를 숙이며 이진주가 윙크했다.
“뭐가 궁금하신데요?”
“최의현.”
“…….”
“걘 왜 그러는 거예요, 유성 씨한테?”
흥미로 눈을 반짝이는 이진주가 불편하지는 않았다. 나는 여러 대답을 떠올리다 지워 버렸다.
“그냥 또라이라서요.”
“아하하, 웬일!”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이진주는 테이블을 두드려 가며 폭소했다. 아예 엎드려 있던 이진주가 팔 위로 눈이 보이도록 고개를 들며 눈웃음쳤다.
“근데 최사헌도 되게 또라이거든요, 유성 씨.”
커다란 눈이 이번에는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생각 없이 건드리면 후회할걸?”
지금껏 살아오면서 후회하지 않았던 일이 얼마나 있을까.
“후회하죠, 뭐.”
내 몫으로 나온 와인을 입에 털어 넣자 발효된 포도의 향기와 나무 냄새가 몰려들었다. 식도가 알싸했다.
“유성 씨, 예쁘게 생겼다.”
“이진주 씨도요.”
“나랑 잘래요?”
이진주가 내 볼을 스치듯 건드렸다. 나는 그가 마음대로 나를 어루만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저랑 자면 결혼해야 돼요.”
“하룻밤이 엄청 비싸다.”
깔끔한 프렌치 네일을 한 손가락이 내 턱 밑을 간질였다. 약지에는 이미 약혼반지가 끼워진 채였다.
“사헌이랑 결혼하게요? 걔 취향으로 예쁘긴 한데, 유성 씨 조건으로는 힘들 텐데.”
“…….”
“아아, 오해하지 말아요. 나쁜 뜻으로 한 말 아니니까. 그냥 사헌이는…….”
입술을 위로 삐죽이던 이진주가 내게로 더 가까이 상체를 숙였다.
“TY에서 왜 사헌이한테 아무 원조도 안 해 주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사헌이네 어머니, TY 회장님이 업고 살던 고명딸이었잖아. 시집도 안 보내고 끼고 산다고 했었는데 본인이 졸라서 결혼했던 거래요.”
아까보다 속삭이는 투였다. 최사헌은 외가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기업가 집안이었다.
“아버지 때문이었겠죠.”
세간에서는 주로 그렇다고들 떠들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금지옥엽 외동딸을 데려간 사위가 그 난리를 부렸으니, 우태영 회장의 불같은 성미에 손자도 눈 밖에 내버린 거라고.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외손잔데. 사위가 암만 꼴 보기 싫어도 딸이 20년을 데리고 살았잖아요.”
이진주의 지적도 옳았다. 그래도 핏줄인데.
이상할 정도로 냉랭한 외조부 우태영 회장의 태도 역시 최사헌을 부각했다. 그는 재벌가의 순혈이면서도 자수성가한 분위기를 풍겼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최사헌씩이나 되는 남자가.
나는 최사헌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야 했다. 어떤 것도 흘려 넘길 수 없다.
“뭐, 아무튼. TY도 그렇고, 범운도 그래요. 최사헌, 배경 대단해 보이는데 막상 보면 다 자기 손으로 하고 있다니까. 지원 팍팍 받으면서 왕자님처럼 자란 실속파는 최의현이라는 거지. 걘 고생도 안 시켜요. 사헌이나 계열사 뺑뺑이 돌리고 있지, 최의현은 처음부터 본사 입사였고.”
신소재 사업의 성공 이후에도 공치사는 하되 이리저리 잔가지 쳐진 계열사만 맡기는 게 묘해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시험이자 경험 쌓기의 일종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지금은 그룹 내에서도 주요 사업의 책임자였다.
“둘이 사이 엄청 안 좋은 거 알죠.”
이진주가 나이프와 포크를 양손에 각각 들고 엇갈려 부딪혔다.
최의현이 최사헌만 보면 시비 트느라 바쁜 건 안다. 사석에서도 최의현 앞에서 최사헌 얘기를 꺼내는 건 금기였다.
“나도 최의현 별로예요. 재수 없어서.”
“저도요.”
이진주와 나는 공범의 미소를 주고받았다. 이진주의 왼손에 들린 나이프가 빙빙 돌면서 동그란 원을 그렸다.
“뭐가 그렇게 필사적인지는 몰라도 이왕이면 유성 씨 편을 들어주고 싶네요.”
식기가 다시 접시에 놓인다. 이진주의 손은 이제 다시 나를 만지고 있었다. 콧잔등을, 턱선을, 입가를.
“내가 또, 예쁜 애들을 좋아해서.”
검지가 내 아랫입술을 살짝 훔치면서 지나갔다. 손가락 끄트머리에 혀가 닿도록 입술로만 손톱을 머금자 이진주가 눈매를 둥글게 접었다.
“다 얘기해 줄게요.”
* * *
혼전 계약서 얘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몰라도 그게 파혼의 이유는 아니에요.
애초에 파혼도 내 입에서 먼저 나온 말이 아니고.
계약서에서 임신 얘기가 왜 나왔는지는 알아요?
범운 승계 조건이에요.
아니이, 농담하는 거 아닌데? 진짜루. 애 없으면 걔네 회장님이 총수 자리 안 물려준다니까 그러네?
낳는 거든, 기르는 거든, 나는 솔직히 싫었는데…….
걔 할아버지가 좀 유난이에요? 자기 딸도 자식 낳고 나서야 그나마 본격적으로 밀어 주기 시작한 거 유명하잖아.
최의현이 그래서 더 기고만장한 거라니까요. 지야 무서울 게 없겠지.
사헌이한테도 그러셨다나 봐요.
결혼 전에 제일 먼저 정한 게 예식 시기도 아니고 애는 낳을 건지였으니까.
아무리 어른들 옛날 사람이라 자식이 최고라고 한다지만, 아. 정말 유난해.
그래도 경영권 휘두르면서 손주 운운하면 방법 있겠냐구요. 최사헌, 그때는 자기 고모한테 치이느라 한창 삽질 중이기도 했었고.
걔, 고모한테 완전 털려서 거의 개털 될 뻔했던 거 알죠? 최의현은 아직 학교나 다니는데 사헌이가 치고 올라오니까 거슬렸나 보지.
나랑 결혼 서두른 것도 아마 그래서 아닐까.
그냥저냥 사귀고는 있었는데 결혼 얘기 꺼낼 줄은 몰랐거든요. 근데 뭐, 나쁘진 않았죠. 그놈의 애 얘기만 아니었어도.
그냥 자기가 갖고 싶다는 거면 모르겠는데 앞날이 걸렸는데 어떡해요? 안 된다고 할 수 없잖아.
애야 두면 자라는 거고, 키울 사람들도 있으니까 갖는 것까지는 그래, 좋다. 대신에 내가 낳지는 않겠다고 했거든요.
그렇잖아. 몇 달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몸 망치긴 싫다구요.
대리모라도 쓰면 되지 않냐고 했더니 노발대발하는 거예요.
최사헌 알죠? 웬만해서는 언성도 안 높이잖아.
그런데 화를 내더니 협의 없이는 결혼은 어렵겠다고 해서 그놈의 혼전 계약서까지 나온 거고요.
사실상 내가 아니라 걔가 깬 거예요, 결혼.
무슨 계약서까지 쓰냐고, 결혼하면 자연스럽게 애 낳고 살게 돼 있다고 우리 엄마가 타이르는 앞에서 자긴 절대 바깥에서 애 낳아 오는 일 없을 거라나.
깨끗한 척이야. 결혼은 적당히 해 놓고 나가서 노는 애들 사방에 깔렸는데 뭐 어때요.
그래서 난 그런 거 별로라고 그랬더니 또 어찌나 무섭게 골을 내시던지. 걔는, 열받으면 악 지르고 발 구르는 게 아니라서 더 살벌해요.
암튼 그렇게 나랑 걔랑 대판 하다가 깨진 거지, 뭐. 그나마 내 체면 챙겨 준다고 파혼 얘기 이상하게 도는 데도 내버려 두더라고.
그거 말고는 다 괜찮은 남자였는데. 도대체 애가 뭐 그리 대단한 문제라고 핏대들을 세우는지.
웃기죠? 걔도 할아버지 닮았나? 조선 시대 사람이야?
피는 못 속인다더니.
참, 유성 씨.
동생 일은 유감이에요.
* * *
대로변에서 조금만 들어가도 건물의 태가 달라진다. 낡은 상가에 들어서자 엘리베이터 옆의 안내판에 엇비슷한 사무실 상표들이 층수별로 늘어서 있었다.
좁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서 가장 위층을 눌렀다.
꼭대기 층에 입주한 사무실은 하나였다. 사무실 문에는 하얀 바탕에 검정 글씨로 상호만 쓰여진 간판이 붙어 있었다.
<삼삼 흥신소>
좀 닦지. 간판이 아주 꾀죄죄하다. 슬쩍 소매를 끌어내려서 문고리를 돌렸다.
사무실은 사무용으로 쓰는 작은 책상 서넛과 고객 접대용 소파가 파티션으로 나뉘어 있었다. 심히 소박한 입구에 비해 안은 생각보다 넓다.
하얀 모니터 화면을 보면서 자판을 두드리던 여자가 의자를 뒤로 쭉 뺐다.
“요지경, 아이스크림 내 것도 사 왔냐?”
“아이스크림 사 올걸 그랬나 봐요.”
여자가 나를 쳐다봤다. 모자를 푹 눌러써서 가려진 이목구비에 놀라움이 요동쳤다.
“아, 안녕하세요.”
임기주가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허리를 숙였다. 허둥거리느라 모자가 떨어질 뻔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지경인 줄 알고. 근데 지금 사장님 안 계시는데요.”
“알아요. 오다 통화했어요. 미림이 금방 온대요.”
“그러시구나. 어, 음. 커피라도 타 드릴까요? 믹스커피 있어요.”
기주가 허둥거리며 일어섰다. 괜찮다고 하기도 전에 인스턴트커피가 든 통이 바닥에 엎어졌다.
“아오, 씨!”
“와우. 림기주, 뭐 함. 다 때려 부수라.”
허리를 굽히고 커피를 줍느라 바쁜 기주의 앞에 스포츠머리 남자가 껄렁하게 섰다. 손목에는 아이스크림 껍질이 튀어나온 비닐봉지를 걸고 있다. 곽지경이었다.
“유성이 형 오셨네요. 아이스크림 드릴까요?”
“야, 내 거는.”
“네 거는 네가 알아서 챙겨 드시고요. 와, 형은 오늘도 미모가 빛나네요. 임기주가 손 떨 만하네. 얼굴이 복지다. 그죠, 사장님.”
“유성이 놀리지 마. 쟤 예민해.”
여미림이 곽지경의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여미림 정도면 평균 키인데 지경이 덩치가 있다 보니 잘 보이지도 않는다.
“유성아, 나가서 얘기할래?”
미림이 엄지를 세워 문 바깥을 가리켰다.
“저희가 나갈게요. 안 그래도 기주랑 하남 출장 가야 돼요.”
“아이스크림 좀 먹고 가자.”
“너 또 유성이 형 구경하고 싶어서 이러냐? 속 보여. 빨리 나와.”
“안 닥쳐? 이게 누나한테 진짜. 죽어. 저기, 저희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고개만 굽혀 인사하는 지경과 달리 기주는 다시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맞다, 사장님. 정 실장님 다녀가셨는데요. 대양 제약 파일 책상에 뒀어요. 확인해 보세요. 그럼.”
말을 마친 기주가 사무실 문을 닫았다.
“언제 봐도 씩씩하네.”
“원래 되게 조용해. 너 올 때만 저래.”
먼저 소파에 앉은 미림이 내게 사탕을 내밀었다. 당장 캠퍼스에 앉아 있어도 어울리게 생겨서는 웬 누룽지 사탕이다.
“됐어. 그나저나 왜 하필 삼삼 흥신소야?”
“여기 차릴 때 울 이모가 숫자 삼이 길하댔거든. 그래서 우리 작업복이랑 회사 차 번호판까지 다 삼삼으로 맞췄잖아.”
미림이 사탕을 이로 다각다각 굴리며 말했다.
여미림네 이모는 무속인이다. 아버지는 인천 일대를 주름잡던 밀수업자, 어머니는 고리대금업자의 딸. 고등학교 때 유명했다. 나는 사생아로, 쟤는 깡패 딸로.
“대양 제약이 왜?”
“그런 게 이써어. 우리 의뢰인 아닌 사람한테는 비밀이야.”
불법은 저지르지 않겠다며 집을 뛰쳐나온 여미림은 기업 전문 흥신소를 차렸다. 본인 말로는 업계에서 나름 알아준다는데, 사실인지는 모른다.
흥신소도 불법 아니냐고 물었더니 공인 탐정 제도만 시행되면 합법이라며, 다른 나라에서는 이미 합법이라고 박박 우겨 댔다.
“그럼 나도 의뢰인 할래.”
“응?”
“최사헌 때문에 왔어.”
최사헌의 이름이 나오자 미림은 탐탁지 않은 반응이었다. 말은 안 하고 볼이 볼록해지도록 머금고 있던 사탕만 어금니로 깨물었다.
“알아낸 거는 저번에 다 줬는데.”
“지난 파혼에 뭐가 더 있는 것 같아서.”
“꼭 최사헌이어야 해?”
미림은 조그만 입으로 사탕을 야무지게도 씹었다.
“그냥 최의현 피하려는 거면, 다른 사람이어도 되잖아. 최사헌은 최의현이랑 너무 가까워. 계속 마주쳐야 할 텐데.”
그래서 최사헌인 거다.
염려로 가득 찬 여미림의 갈색 눈동자를 보면서 나는 말없이 웃었다.
“나는 네가 걱정돼.”
“알아.”
미림의 애정은 의심의 여지없이 투명하다. 세상천지에 나를 걱정하는 건 얘 정도다.
그래서 여미림만큼은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내가 결혼해 줄까?”
미림이 하도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폭소가 터졌다.
“남은 심각한데, 뭐야.”
“여미림,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죽어도 결혼 안 해.”
“왜, 왜. 최의현 때문에? 암만 연 끊었다지만 나도 무서운 집 자식이야.”
미림이 눈썹에 잔뜩 힘을 주었다.
“아는데, 너랑은 안 해.”
내가 아끼는 사람이랑은 결혼 안 해. 그런 사람이 나 같은 거랑 결혼하면 안 되니까. 입 밖으로 말하지 않고서 그저 고개만 움직였다.
최사헌처럼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다 끝낼 수 있는 정도의 인간이 딱이었다.
무엇보다 최사헌의 냉담함이 마음에 들었다.
히트 사이클의 오메가를 앞에 두고도 끝내 안에 사정하지 않으려 드는 인내라던가, 하룻밤을 지내고 약과 먹을 것은 준비해 주지만 연락하라는 빈말 하나 없이 안부 인사만을 남기고 가는 면 같은.
마음먹으면 나를 철저히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점이 좋았다. 그래야 공평하니까.
“내가 이번 일 빼고는 살면서 너한테 한 번도 뭐 부탁해 본 적 없는 거 알지.”
“자랑이다.”
미림이 사탕 껍질을 내게 던지며 야유했다.
“부탁할게, 미림아.”
미림은 여전히 뾰로통했지만 나는 여미림이 내 부탁을 들어주리라고 확신했다.
일어서서 떨어진 쓰레기를 주웠다. 반들대는 사탕 비닐이 손바닥을 찔렀다.
“유성아, 유민이는 네가 행복하길 바랄 거야.”
사무실을 나서려는 내게 미림이 속삭였다.
나는 손톱으로 사탕 껍질을 꾹꾹 눌러 접고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여미림이 틀렸다.
유민이는 내가 끝까지 가기를 바랄 거다.
부서지더라도 끝을 보기를.
어쩌면 부서지기를 바랄지도 모르겠다.
* * *
‘형이 불행했으면 좋겠어.’
잘못 말린 빨래처럼 구겨져 웅크린 채로 유민이는 중얼거렸었다.
약 기운이 가시지 않아 허물어진 발음이었으나 나는 그 애가 뭐라고 하는지 모두 알아듣고 말았다.
못 들은 척 유민이의 자취방을 정리하는 내 등에 대고 유민이는 다시 말했다.
‘형도 나만큼 괴롭고 비참했으면 좋겠어.’
등을 찌르는 말을 무시하고 흐트러진 물건을 제자리에 두고, 쓰레기를 모았다. 들어오자마자 창문을 열어 두었는데도 집에서 아직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형이…….’
그다음은 들리지 않았지만 뒤에 올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없어졌으면 좋겠어.”
눈꺼풀을 들자 익숙한 창문과 커튼이 보였다. 유민이의 자취방은 아니었다.
손바닥으로 주변을 더듬으며 상체를 세우자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소파에 누워 졸았던 모양이다.
“아.”
배 위에 올려 두었던 A4 뭉치가 아래로 떨어졌다.
거실 바닥에 종이가 이리저리 흩어졌다.
개중 한 장에는 최사헌이 미국 고등학교에서 찍은 졸업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지금보다 더 어리고 음울한 얼굴이었다.
흑백으로 뽑느라 화질이 깨진 사진을 만져 보았다. 손가락이 지나가는 자리를 따라 최사헌의 무표정한 얼굴이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흐트러진 종이 뭉치를 정리하자 사진도 다시 감춰졌다.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점심이 지난 시간이었다.
외워 뒀던 번호를 하나씩 눌렀다. 얼마 되지 않아 전화가 연결됐다.
“해신 화학 백유성입니다. 최사헌 이사님 좀 바꿔 주시겠어요.”
비서가 최사헌을 바꾸는 데도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 무슨 용건으로 연락하셨습니까.
고의성이 느껴지리만치 사무적인 톤이었다. 그날은 없던 일로 하자, 이거지.
누구 마음대로.
“저 임신했어요.”
― …….
무거운 침묵이 돌아왔다. 오래가지는 않았다.
― 진짜 용건이 뭡니까.
“뭐예요. 시시하게.”
― 지극히 희박한 가능성이니까요.
“지극히, 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넣긴 했잖아.”
― 용건은.
“보고 싶어서요.”
통화가 다시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보러 와요.”
― 미인계로 경로 잡은 건 알겠는데, 육탄전은 이제 그만하죠.
“우리 집으로 올래요?”
― 바쁩니다. 백유성 씨도 슬슬 바쁠 텐데요.
“그럼 내가 보러 갈게요.”
― 이렇게 막무가내로……. 하, 다시 백유성 씨 집 앞에서 의현이하고 마주치고 싶진 않으니까 밖에서 만납시다.
“포기가 빠르시네요.”
― 무슨 짓이든 할 작정이잖습니까. 이럴 때 말리거나 피해 봐야 들을 리도 없으니까요.
그렇다. 무슨 짓이든 해 버릴 생각이었다.
최사헌은 이미 주변에서 그런 인간을 꽤 보아 왔을 거다.
그의 생년과 입학 기록이 적힌 종이를 맨 앞으로 꺼내어 더듬으면서 나는 좀 더 어린 최사헌의 얼굴과 마주 본다.
그는 울지도, 웃지도 않으며 앞을 주시하고 있다. 일견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신 약속 장소는 제가 고르겠습니다.”
나는 흑백의 최사헌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무릎에 놓인 두툼한 종이 뭉치가 새삼 묵직했다. 거기에는 한 인간의 일생이 기록돼 있다.
모조리 최사헌이었다.
* * *
내가 고른 약속 장소를 돌아보며 최사헌은 지친 낯빛을 했다.
“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요. 됐습니다.”
“떡볶이 좋아해요? 튀김이랑 순대는?”
“…….”
“싫어요? 오기 전에 이미 시켰어요.”
“……정말 제멋대로네.”
그래도 결국 최사헌은 자리에 앉았다. 플라스틱 의자가 체중을 못 이기고 삐걱거렸다.
최사헌을 불러낸 곳은 초등학교 앞에 흔히 있는 분식집이었다.
맨투맨과 청바지 차림의 나와 달리 흘깃 봐도 값이 나가 보이는 맞춤 정장을 입은 최사헌은 가게 풍경과 심히 겉돌았다.
게다가 덩치도 덩치라서, 작은 가게 안에 앉혀 놓으니 단연 존재감이 있다.
“예전에 우리 엄마가 분식집을 했어요. 여기보다 좁은, 진짜 한 칸짜리 가게였지만.”
컵을 꺼내 차례로 물을 따르면서 나는 불쑥 옛날이야기를 시작했다. 케케묵은 추억이었다.
“사실 분식집 말고도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을걸요. 청소 일에, 바느질,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더 있을 거예요. 본인 입버릇처럼 자식 먹여 살리려고 정말 별일을 다 했다고 하셨으니까.”
“…….”
“난 그게 참 싫었는데.”
언제나 내 존재가 누군가의 짐이라는 감각이.
최사헌 앞에 물컵을 밀어 주자, 최사헌은 수저를 꺼내 놓았다. 나를 보는 눈에는 살얼음 같은 경계가 끼어 있다.
“이제는 동정심 작전인가 고민하는 중이에요?”
“유성 씨는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이니까요. 의도를 읽으려고 할 수밖에요.”
“살벌하네. 떡볶이 사 주려고 불렀더니.”
물론 불쌍한 척이나 하자고 어릴 때 얘기를 꺼낸 건 아니다.
“언제부터 외국에서 지냈어요?”
“학교 입학 전이었으니 일곱 살 정도.”
최사헌은 여전히 내 속내가 미심쩍은 듯했으나 이번에는 대답했다.
“그럼 옛날 기억도 나겠네요. 보통은 네 살 전 기억은 잘 안 난다던데, 나는 다섯 살에 아버지 호적으로 들어갔는데도 옛날 생각은 다 나더라고요.”
최사헌이 물잔을 내려놓고 입을 다물었다. 이번 방어 전략도 침묵인 모양이다.
“일곱 살 전에는 어머니랑 있었어요?”
“…….”
“최사헌 씨 진짜 어머니요.”
때를 맞춰 떡볶이와 튀김, 순대가 우리 앞에 놓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떡볶이를 포크로 찍어 들자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안 먹어요?”
맞은편에서는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그 조그만 머리로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 중인지 궁금해.”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는 최사헌을 그대로 두고 나는 부지런히 떡볶이를 씹었다.
떡볶이는 맛있었다. 원래 여미림하고 오던 집인데 여기는 늘 맛있다.
“입학 기록을 봤어요. 출생신고서도. 그런 건 아무리 정밀하게 조작해도 어딘가에 흔적이 남는대요. 진짜가 아니니까, 미처 아귀를 못 맞춘 숫자가 남는다고요.”
“결국 추측이란 소리네요.”
“최사헌 씨가 태어나기 6개월 전에 TY 외동딸이자 최문혁 씨 배우자이신 우연조 씨는 베니스 아트 페스티벌에서 한국 전시관 개관 행사에 참여 중이셨고…….”
“당시 임신 중이셨다가 귀국 후 출산, 난 팔삭둥이로 태어나죠.”
8개월이면 납득 못 할 숫자는 아니다. 베니스에서 찍힌 기사 사진 속 우연조의 배는 임산부라고 하기에는 늘씬했지만, 몇 주 안 됐다고 하면 그것도 이해가 간다.
“그 후 TY는 범운 그룹 IT 계열사와 공동 추진 중이던 데이터 서비스 개발을 멈추고 자체적인 비즈니스 인텔리전스를 구축하겠다고 발표했고요. 당시 범운 데이터시스템은 최문혁 씨가 지휘 중이었고, TY와 범운 사이가 틀어졌다고 말이 많았더라고요. 첫 손주가 태어난 기념할 만한 시점에.”
“그래서?”
“보통은 손주를 봐서라도 사위한테 안 그러지 않나 싶어서. 협업도 문제없이 이루어지던 중이었고요.”
“사업은 사심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요.”
“최사헌 씨는, 일곱 살 이전에는 기록이 별로 없더라고요. 먹어요. 이러다 나 혼자 다 먹겠어요.”
아직도 빈손인 최사헌에게 억지로 포크를 쥐여 주자 최사헌이 느릿느릿 튀김을 찍었다. 가게 바깥에서는 포장 손님과 주인의 수다가 한창이었다.
“유치원 대신 홈스쿨링. 열심히 뒷조사했으니 그것도 쓰여 있었을 것 같은데요. 백유성 씨, 우리 둘 다 이런 대화로 시간 낭비하기에는 피차 바쁘지 않습니까?”
“일곱 살까지 집안이며 각종 행사 사진에 전혀 찍힌 적이 없다는 것도 그렇고.”
“어디까지 짜 맞추려고요. 근거가 너무 빈약한데.”
최사헌의 말을 빌리자면, 빈약한 근거를 가진 내 추측은 이렇다.
세간에는 최사헌이 어머니를 따라 외국을 돌면서 자랐다고 알려져 있으나 우연조는 최사헌의 친모가 아니다.
외동딸을 지극히 아끼던 TY 우 회장이 최사헌의 출생 이후 돌아선 것도, 지금껏 최사헌이 받은 홀대도 설명된다.
최사헌이 나하고 똑같은 처지라면.
다른 점이 있다면 최사헌의 부친은 끝까지 부인 외의 여자와 함께하기를 택했다는 점 정도겠다. 아마도 최사헌의 친모와.
“얼마 전까지도 꾸준히 경영난인 계열사 위주로 돌아다녔죠. 이번에 겨우 주요 계열사인 범운 정공 이사로 취임하면서 후계자설도 물밑에서 나오기 시작한 거고. 가능성 있다고 보세요?”
“글쎄요. 낙관하진 않습니다. 이 정도 겸손이면 무난하겠죠. 여기가 회장님 서재였으면 솔직하게 대답해 드렸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혹시 지금 인터뷰 중입니까? 인터뷰 내용은 형편없지만 떡볶이는 맛있네요.”
일단 먹기 시작하자 접시를 비우는 속도가 빨랐다. 이전의 섹스가 생각났다.
금욕적인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식욕도, 성욕도 왕성하다. 최사헌이 먹는 모습을 보느라 나는 포크를 놓았다.
“이진주 씨가.”
이진주 얘기를 꺼내자 최사헌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파혼은 혼전 계약서 때문이 아니라던데요.”
* * *
숱 많은 속눈썹이 팔랑거린다. 사헌이 유성의 눈가를 시선으로 훑었다. 지금 자기가 얼마나 많이 눈을 깜빡이는지 알고 있을까.
긴장했을 때의 습관인가. 말이 길어질수록 눈을 자주 깜빡인다.
분홍색 혀끝이 소스가 묻어 있던 입술을 핥았다. 보기 좋게 도톰한 입술이 우물우물 움직였다.
사헌은 갈증을 느낀다.
“결혼에 대한 의견이 안 맞았던 거죠. 흔한 파혼 사유 아닙니까.”
“보기 드물게 정조 관념이 있으시던데.”
“배우자가 있으면서 너저분하게 놀아나는 건 질색이에요. 유성 씨는 그런 게 좋은가 봅니다.”
“바람은 용서 못 한다는 파?”
“약속은 지키자는 거죠.”
대답이 재미없었는지 유성의 시선이 도로 떡볶이 그릇으로 떨어졌다. 포크가 양념을 뒤집어쓴 떡을 찔렀다.
“정말 범운 승계 조건이 아이예요?”
“회장님은 가족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에요. 범운만의 얘기도 아니잖습니까?”
자기 핏줄에 연연하느라 온갖 비합리적인 짓을 저지르는 경우는 저 바깥에서도 흔하지 않으냐는 말이다. 그런 부류의 욕망은 부자와 빈자를 가리지 않았다.
“물론 회장님이 유난한 편이기는 하지만.”
연을 끊고 도망친 자식 품에서 기어이 손주를 빼앗아 와야 했을 정도면.
더군다나 며느리한테 입적시켜 본인 말마따나 ‘신분 세탁’까지 시켰으니 그야말로 유난이었다.
“유성 씨가 하는 추측은 나한테 약점거리가 못 돼요. 그래 봤자 그냥 가십이지.”
들춰져 봐야 다들 알고도 묵인하는 정도로 그칠 거다. 최종필 회장이 부인하고, 당사자인 최사헌이 부인하는데 앞에서 가십을 떠들 멍청이는 흔치 않다.
“약점 삼으려고 한 적 없는데.”
유성은 감흥 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사헌은 그 가십을 약점 중의 약점으로 생각할 한 사람을 꼽아 보았다.
최종필 회장은 사헌을 거두고도 그가 다 자라기까지 거들떠보지 않았다.
성인이 되어 범운에 완전히 들어갔으나 사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제한되어 있었다.
중요한 사업들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본가에는 사헌이 발도 들이지 못한 곳들이 존재했다.
예컨대 회장의 서재 같은.
이름만 서재지, 별채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모래와 돌이 대부분인 일본식 가레산스이 정원이 한옥 건물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입구의 석등과 돌길을 지나 툇마루에 오르자 안에서 헛기침이 들렸다.
범운 정공으로 이동이 있기 전에 회장의 부름이 있었다. 서재로 사용하는 석등원에 출입하기는 사헌도 처음이었다.
‘그래도 네가 장남의 아들 아니냐. 피를 타고났어도 옥석혼효한데 개중에 이만하면 청옥이지.’
여든에 가까워서도 한 나라의 왕처럼 정정해 보이는 노인의 공치사를, 사헌은 고개 숙이고 들었다.
‘고개 똑바로 들어라.’
하라시기에 그렇게 했다. 사헌의 이목구비를 꼼꼼히 뜯어보던 최 회장이 쯧쯧거렸다.
‘네 아버지를 너무 닮았어.’
회장 내외는 그 말을 탄식으로 썼다. 네 아버지가 정신만 좀 차렸었으면, 아아. 아니다. 네가 정말 연조 아들이기만 했어도.
‘일은 잘하고 있으니 이제 네 급선무는 가정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책임질 가정이 있어야 진짜가 되는 법이지.’
돌려 나오는 속뜻을 모를 정도로 천치는 아니었다.
‘바깥에서 실수하는 거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애는 무조건 본처한테서 봐야 하는 거다.’
네 아버지 같은 꼴은 용서하지 않겠다. 그렇게 되지 않겠다는 증거를 보여라.
‘의현이 놈은 아직도 철이 없고…… 원체 성미가 너무 급해. 나 죽기 전에 정신 차리는 건 볼 수 있을는지.’
회장 내외가 내심 의현을 다음 실권자로 밀어 주려는 건 비밀도 아니었다. 사헌이 무시하기 힘든 실적을 거두기 전까지는 그랬다.
입 닥치고 늘 주어진 일 이상으로 과로해 온 결실이 지금에야 손에 잡히려고 했다.
‘증손주까지 보고 갈 수 있으면 그것도 참 복록일 거다.’
어전에 엎드린 신하처럼 중얼거리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천수를 누리소서.
고모와 의현이 있으니 쉽지 않겠지만 회장 내외가 살아 있는 한 돌파구는 있었다.
사헌은 들어갔던 것만큼이나 조용히 정원을 빠져나와 모래로 표현된 물살을 구경했다. 자갈과 바윗돌, 모래와 이끼로 표현된 삼라만상.
문득 그곳을 갈퀴로 긁어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사헌이 웃으며 석등을 지나쳤다. 여기를 떨치고 달아난 아버지와? 그러고도 끝내 절름거리며 돌아오고 만 아버지와.
언젠가 이 정원의 주인이 되는 날, 이끼는 쓰레기와 섞어 내던지고 바위는 부술 거다. 모래 한 알 남기지 않겠다.
아무도 모르는 증오였다.
그런데 당신이 나에 관해 뭘 안단 말일까.
사헌이 휴지를 뽑아 한참 입가를 닦고 있는 유성의 턱 언저리를 훔쳐 주었다.
“여기도 묻었습니다.”
“다른 데는요?”
“이제 없어요.”
“여기 왜 이렇게 매워졌지.”
후, 후, 숨을 불던 유성이 물잔을 비웠다.
“아이가 있으면 최사헌 씨한테 유리해요?”
“의현이가 백유성 씨를 물고 늘어지면 나한테 유리하죠.”
매워서 그런지 아까보다 촉촉해진 유성의 눈동자가 사헌 쪽으로 굴렀다.
“정말 결혼까지 가든 아니든, 의현이가 유성 씨 때문에 피우는 난리가 평판에 마이너스일 건 확실하잖아요. 난 두 사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아요. 그날 일은 실수였습니다.”
“먹고 버리겠다?”
“굳이 말하자면 나보단 당신이 날 먹은 쪽에 가깝지 않나.”
“남 탓도 하시고.”
“달려든 건 백유성 씨예요. 내가 아니라.”
“그게 남 탓이지.”
젖은 눈이 가늘게 휘면서 거기 담긴 물기가 한층 반짝거렸다. 사헌은 유성의 눈을 오래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존나 비싸. 재수 없어.”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에 유성의 입술에서 뾰족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말투이나 삐죽하니 튀어나온 입술은 무슨 새 부리 같았다. 그게 귀여워 보이기도 해서, 사헌은 굳이 유성의 말버릇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래요. 최의현이랑 결혼하지, 뭐.”
길게 깔아 놓던 서론이 무색하게 유성은 선뜻 말했다.
그러고는 떡볶이를 먹는 데만 열중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릇이 비자 유성은 입까지 깨끗이 닦고 일어섰다. 계산대에 먼저 가서 선 유성이 사헌의 뒤로 물러섰다.
“그쪽이 사요.”
“사 준다면서?”
“싫어. 그쪽이 사. 내가 차였으니까.”
당연하다는 듯 대꾸한 유성이 미닫이로 된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사라지는 유성의 등을 사헌은 털 짐승의 폭신한 앞발에 얻어맞은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아주 버르장머리 없는 도련님처럼 굴 때가 있다. 아마 일부러 저러는 것 같은데, 당해도 싫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사헌이 지갑을 꺼내 계산하고 나자 유성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계산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는데 바깥에는 유성의 흔적도 없었다. 설마 정말 떡볶이만 먹고 간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즈음이었다.
“여기요.”
가게 옆의 골목에 들어가 있던 유성이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벽에 쓰레기가 기대 있는 좁은 골목과 곱상한 도련님 같은 생김새의 유성은 그리 어울리지 않았다.
“불 빌려줘요.”
그러나 익숙하게 담배를 꺼내 물고 운동화를 신은 앞꿈치로 바닥을 치는 동작 같은 게 전시장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워서, 사헌은 유성을 흥미롭게 보았다.
주머니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내 주자 유성이 라이터 표면을 살폈다. 처음 빌려 갔을 때와 똑같이.
“마음에 들어요?”
“그렇다고 하면 주게?”
은근슬쩍 말을 짧게 하는 건 분명 고의였다. 매사가 도발이다.
유성이 담뱃불을 붙였다. 숨을 길게 빨아들이면서 새빨간 불이 종이를 태웠다.
뱉는 숨을 따라 흰 연기가 공기 중에 퍼져 나간다. 한 모금을 즐긴 유성이 사헌에게로 상체를 틀었다.
니코틴과 타르가 스민 입술이 사헌의 뺨에 닿았다. 애들이 하는 수줍은 입맞춤 같았다.
키 차이 탓에 유성은 한껏 까치발을 들고 있었다. 시선이 맞닿자 유성이 사헌의 목에 팔을 둘렀다.
다음은 입술이었다. 사헌이 몸을 숙여 주지 않아 유성은 잠시 비틀대다 아예 사헌에게 매달리듯이 기댔다.
둘 중 누구도 눈을 감지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얽힌 채였다.
햇빛을 받으면 불그스름한 빛을 띠는 적갈색 눈동자 속의, 새카만 동공이 수축하며 사헌을 노렸다.
사헌의 등골을 타고 가느다란 전류가 미끄러져 내렸다.
그저 익을 줄밖에 모르는 과실처럼 달콤한 향이 담배 냄새 대신 주변을 어지럽히고 있다.
이전에 당했던 것과 똑같다. 대항하고 싶은 기분이 딱히 안 든다는 점까지.
입술이 틈 없이 맞물렸다. 사헌은 유성이 말랑하고 끈적한 혀로 저를 맛보도록 내버려 두었다. 혀가 엉키면서 골목에 습한 소리가 울렸다.
“후우…….”
사헌의 어깨에 머리를 얹으면서 유성이 숨을 골랐다. 떨어진 담배에서 불씨가 깜빡댔다.
고작 키스 한 번에 연한 분홍색이 된 유성의 동그란 귓바퀴를 사헌은 관찰했다. 어딘가 나른한 표정의 유성이 숨을 쉴 때마다 겹친 상반신에 가슴이 부풀었다 꺼지는 느낌이 전해졌다.
“나여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사헌이 입을 열었다. 회사로 들어가기 전에 냄새는 빼야겠다. 옷에 단내가 배어서 돌아가면 어떤 소문이 돌지 안 봐도 뻔했다.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도록 감추는 건 능숙하더니, 반대에는 영 조절에 요령이 없었다. 콸콸 들이붓다시피 한다. 마킹이라도 하고 싶은 줄 알았다.
아마 별로 안 해 본 거겠지. 섹스가 서툴렀듯이 이것도.
아직도 발돋움 중인 발끝이 아슬아슬해 보였으나 사헌은 끝내 높이를 맞춰 주지 않았다.
“내가 최사헌 씨를 좋아하거든요.”
거짓말.
이렇게 뻔한 거짓말을. 남의 어깨에 기대어 말끄러미 올려다보는 얼굴은 얄미울 정도로 뻔뻔했다.
“그래서 자고 싶고, 결혼하고 싶어요. 최의현이 아니라 최사헌 씨랑.”
“음, 그렇구나.”
“그쪽도 나랑 자고 싶잖아요.”
“이만 가죠. 바래다주고 갈게요.”
유성의 콧등에 가느다란 세로 주름이 생겼다. 유성이 사헌의 정장 옷깃을 구겨 쥐었다.
막무가내로 끌어당겨 퍼붓는 입맞춤은 아까보다 사나웠다. 아랫입술을 물어뜯기며 사헌이 유성의 어깨를 붙잡고 벽에 눌렀다.
“놔.”
억지로 떨어지고도 유성은 잔뜩 골이 나 있었다. 씩씩대는 숨을 토하며 유성이 사헌의 팔을 긁었다.
“애야? 분풀이하지 마.”
물린 입술을 혀로 누르자 묽은 통증이 퍼졌다. 피 맛이 났다.
사헌을 노려보던 유성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면서 눈가에 촘촘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귓불에 올랐던 홍조가 눈언저리에도 스며 있었다.
옷차림 탓에 안 그래도 어려 보이던 얼굴에서 애티가 난다. 넉넉한 맨투맨 소매로 입가를 훔치는 유성이 사헌의 사이즈에 맞춘 셔츠를 입었던 모습과 겹쳤다.
“혼자서도 갈 수 있어.”
“그러든가.”
일부러 짧게 던진 말에 유성의 입매가 달싹였다. 금세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아 사헌은 자신도 모르는 새 긴장했다.
유성은 끝끝내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골목을 벗어나 멀어졌다. 유성의 뒷모습을 보면서 사헌은 그가 어떤 표정으로 걷고 있을지 그려 보았다.
손목시계의 분침이 사헌을 재촉했다. 시계를 확인하고 차를 찾아가려던 사헌이 허전한 주머니를 뒤지며 짤막한 욕설을 삼켰다.
라이터, 이번에는 돌려받는 걸 깜빡했다.
* * *
“미림아, 보내 준 거 고마워. 수임료는 입금했어.”
통화하면서 나는 랩톱 액정에 띄운 기사 목록을 훑었다.
하이브리드 카 개발에 뛰어든 범운, 주가 상승 기대. 범운 사상 최대의 승진 인사, 최종필 회장의 맏손자 최사헌 씨 범운 정공 상무이사 등재…….
최사헌의 이름 옆에 온갖 수식이 매달려 빛난다.
그가 정말 나와 똑같은 혼외자라 해도, 위치는 이토록 다르다.
“몇 가지만 더 알아봐 줘. 부탁할게.”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최사헌과 헤어져 돌아온 집은 평소보다 고요하게 느껴졌다.
애초에 혼외자니 뭐니 하는 말로 최사헌을 압박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안 했다. 추측을 본인한테 확인해 본 것뿐이다.
중요한 건 그래서 최의현에게 밀려났던 최사헌이 무엇을 필요로 할지다.
마우스를 움직이려는데 옆에서 진동이 울리기에 휴대폰을 확인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미림의 직원들은 간혹 모르는 번호를 쓸 때가 있었다.
“여보세요. 백유성입니다.”
― 어디니?
발이 멈췄다. 최의현의 어머니로부터 온 전화였다.
― 나와 있는데 잠깐 얼굴이나 보면 좋을 것 같아서. 밖이니?
“……아뇨. 집이었어요.”
― 차나 한 잔 하자. 너희 집이 어디였지?
“아니에요. 계시는 데 알려 주시면 제가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입술에 지그시 손등을 짓눌렀다. 누가 위장을 서서히 짜내는 기분이었다.
결국 욕실로 달려갔다. 먹었던 음식을 전부 토해 내고도 구역질이 그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세면대에 찬물을 틀었다. 입 안을 강박적으로 헹구고, 얼얼하도록 칫솔질을 하고도 무언가 더 씻어 내야만 할 것 같았다.
입고 있는 옷에서는 담배와 최사헌의 냄새가 났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거울을 보면서 단추를 끝까지 채웠다. 위장이 시큰거렸다.
구두를 고르면서 손에 남아 있는 라이터를 만지작댔다. 라이터 밑바닥에 이니셜이 각인되어 있었다.
두 개의 알파벳을 손톱으로 긁다 라이터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여전히 불이 필요했다.
* * *
갤러리 연은 범운의 안주인이 세운 업적 중 하나였다.
투명한 기둥이 건물을 관통하면서 가운데 독특한 프리즘을 만든다. 넓게 트인 1층 바닥에 긴 무지개가 걸렸다.
최의현의 어머니는 무지개 중앙을 밟고 있었다. 벽에 붙은 작품을 훑던 그는 내가 옆에 서도 알은체하지 않고 그림만을 주시했다.
“우리 어머니지만, 참 보는 눈은 있으셔.”
최문경, 범운 그룹 최종필 회장의 딸이자 현 범운 그룹 사업 총괄사장 겸 범운 문화재단 이사. 자기 어머니 소유의 갤러리에 서 있는 최문경은 왕국의 주인처럼 당당했다.
장신이기도 하지만 자세가 꼿꼿해서 더 커 보인다. 민화를 무늬로 그려 넣은 스카프와 무채색 옷이 엄격히 절제된 미감을 드러냈다.
최의현은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훨씬 많이 닮았다. 특히 멋대로 굴 때 그랬다.
“괜한 데로 불렀나? 나온 김에 그림이나 볼까 하고.”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
고개를 뒤로 뺀 최문경이 나를 살폈다. 머리에서 발까지 시선이 지나갔다.
“오늘 들어가기 전에 네 옷 좀 사 입혀야겠다.”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 숙였다. 최사헌을 만났던 차림으로 나왔으면 무슨 소리를 더 들었을지 뻔했다.
“의현이랑 요즘 연락 안 하니?”
“최근에 집 앞에서 봤어요.”
“걔 너무 멋대로지? 혼자 자라서 그래. 겁대가리도 없고 다 제 맘대로 되는 줄 알아.”
쳐들어오는 거나 다름없는 방문이었음을 아는 것처럼 말한다. 때로는 이 사람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최의현이 나를 강간한 후에 김 실장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었다. 물론 이 사람이 보냈을 거다.
“그럴 만도 해. 헛발질만 안 하면 거칠 게 없잖아, 의현이는.”
헛발질이라는 말을 하면서 눈길이 나를 스쳤다.
“걔도 참, 네 어디가 그렇게 좋을까.”
“그러게요.”
“아주 말썽이야. 그나마 너는 정식으로 입적은 돼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너 같은 애 중에 호적 정리도 안 된 애들이 한둘이어야지.”
이 정도 말로는 화도 나지 않았다. 어차피 사실이다.
“요즘은 좀 나아지셨다만 회장님이 원래는 아주, 피 흐린 애들이라면 질색을 하셔서.”
최의현이 내게 비이상적인 관심을 드러내면서부터 줄곧 나를 거슬려 하던 사람이었지만, 결혼 얘기가 나오니 심사가 더 꼬인 모양이었다.
미움받는 건 익숙했다. 그러나 익숙하다고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굳은살에 사포를 문지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세게 문질러지면 아직도 피가 난다.
“그래도 네가 오메가라서 다행이지. 회장님이 증손주 빨리 봤으면 좋겠다고 난리셔. 애 키우는 거 젊어서 하는 게 나아. 의현이 앞으로 점점 더 바빠질 텐데.”
호적 얘기를 하다 아이 얘기로 빠지는 의도는 더 안 들어도 훤했다.
일종의 지시였다. 최문경은 명령을 내리는 일에 익숙했다.
“대학원 다니다 그만뒀던가?”
“……예, 작년에.”
유민이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나도 하던 일들을 여럿 그만뒀다. 최의현과 유민이가 본격적으로 만나게 되면서부터는 주로 맞선 자리에 나갔다.
“다시 다녀서 석사 따고 우리 재단에서 일했으면 싶어.”
“…….”
“그게 너한테도 낫지. 어차피 백 대표님한테 너는 내놓은 자식 아니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도 백 대표님 부부한테 이젠 자식은 너 하나니까. 어찌 보면 잘된 거지.”
얘기하면서도 걸려 있는 그림을 훑는 최문경의 눈초리는 차가웠다. 유민이 역시 저런 눈으로 봤으리란 생각에 참을 수가 없었다.
“잘된 건가요?”
내 동생은 대학도 졸업하지 못하고 절명했다. 그것도 당신 아들을 보러 달려오다가.
유민이는 늘 이 여자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했다. 사랑받는 게 천직인 것만 같았던 애가 병든 강아지처럼 풀이 죽어 돌아오기 일쑤였다.
유민이의 약한 형질이 문제였다. 최문경은 유민이를 되다 만 반편이 오메가라고 여겼다.
최문경이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림의 가치를 살필 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눈빛이었다.
“기회라고 생각하면 뭐든 기회가 돼.”
확신에 찬 어투로 그는 나를 가르쳤다.
“암만 눈 밖에 났어도 남은 자식이라고 딱 하난데, 대표님도 물려줄 건 주시겠지. 둘이었어 봐.”
유민이가 있었더라면 내 몫은 아무것도 없었으리라는 말을 최문경은 지극히 무미건조하게 했다.
나도 안다. 유민이가 태어나고 내 처우는 빠르게 정해졌다.
나는 유민이의 보조였고, 대리였고, 페이스메이커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그 애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잘되지 않았다.
“의현이가 하자는 대로만 해.”
내가 침묵하는 사이 최문경은 내게 다시 지침을 내렸다. 최의현이 나랑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알기나 하고 하는 말인가.
“결혼 서두르는 것도 좋겠어. 시간이 금이라고, 질질 끌어서 좋을 거 없어.”
“……그렇겠네요.”
질질 끌어서 좋을 거 없다. 맞는 말이다.
서둘러야겠다.
나는 최문경이 그랬듯 전시된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것을 봐야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감정을 다스리기가 힘들었다.
“결혼 선물로 하나 사 줄까?”
최문경이 내가 보던 그림을 고갯짓으로 짚으며 말했다.
“그림은 잘 볼 줄 몰라서요.”
“너희 어머니랑 참 다르네. 그림 그리셨었다며. 하긴 친자식도 아닌데 닮을 게 있겠어.”
대놓고 찌르는 말을 침묵으로 받아넘겼다. 틀린 말도 아니다.
벽에는 이름 모를 화가의 작품이 연달아 걸려 있었다. 이따금 보았던 어머니의 화풍과 닮았다.
연속해서 보면 이어지도록 구상한 연작이었다. 전작의 그림이 다음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큰 그림을 봐야만 한다.
사람의 언행에는 언제나 의도가 있다.
최의현이 밀어붙인다 해도 나와의 결혼을 최문경이 허락하고, 먼저 연락해서 압박하는 이유가 뭘까.
말마따나 나 아니라도 아쉬울 게 없는 집이다. 유민이조차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내색을 하는 바람에 아버지 자존심을 건드린 적도 있다.
최의현이 나 아니면 안 된다고 발악 중이라지만 몇 년 끌어서 포기시키는 것도 방법일 텐데. 어찌 됐든 이렇게 재촉하는 건 지금까지 본 모습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최문경보다 반 발자국 뒤에서 나는 여자의 꼿꼿한 몸체가 바닥에 망토처럼 늘어뜨리는 그림자를 따라 걸었다.
건물 기둥이 만든 프리즘이 내부에 어지러운 무늬를 그린다.
생각을 해.
밟아 넘어뜨릴 듯 그림자 자락을 딛는 발걸음에 체중이 실렸다. 이 사람은 나를 우습게 보고 있다. 나한테는 유리한 지점이다.
생각을 해. 이유가 뭘지.
알아내면 이용할 수 있다.
“예식장은 내가 골라도 되겠지? 너희 어머니하고 상의는 할 텐데, 아는 데 맡기는 게 좋지 싶네.”
이 여자가 고삐를 잡았으니 안 그래도 코앞이던 결혼식이 쉽사리 앞당겨질 게 뻔했다.
최문경이 걸음을 멈추면서 그림자가 내 무릎으로 휘감겼다.
사형수의 목에 걸려 있던 올무가 목뼈를 부러뜨릴 듯 바짝 조인다. 발밑의 의자가 당장이라도 빠질 기세로 덜컹거렸다.
“다음에 의현이랑, 부모님이랑 함께 식사나 같이하자.”
숨이 막힌다.
바닥이 통째로 흔들리며 삐걱삐걱 우는 듯했다. 균형을 잡으려면 온몸의 긴장을 풀 수가 없다.
생각을 해. 생각을. 손바닥에 축축한 땀이 뱄다.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장내에 바람이 돌았다. 갤러리 안으로 정장 차림의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나도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본인을 김혜령 실장이라고 소개하며 최의현이 한 짓을 덮으려 분주했던 사람이다.
잔머리 한 올 용납지 않고 한데 묶어 넘긴 머리와 날렵하고 단단한 체형이 인상적이었다.
“이사님, 회장님께서…….”
김 실장이 최문경에게 다가가 급히 속삭이다 나를 보며 말을 멈추었다.
“일이 생겨서 가 봐야겠네. 차는 나중에 들자.”
아까보다 질린 안색의 최문경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두 사람이 갤러리 바닥에 끌고 다니는 그림자를 지켜보았다.
돌아서서 눈에 담은 벽에는 연작의 한 부분이 전시되어 있다.
서너 걸음 물러서서 그림들의 이음매를 응시했다.
물감을 마구잡이로 쓴 유화의 곳곳에 새카만 금이 뻗어 나갔다. 균열은 어딘가로 퍼지는 중이었다.
* * *
사헌이 컵 속의 얼음을 입 안에 털어 넣고 깨물었다. 조그맣게 깨진 얼음이 혀를 굴러다녔다.
방금 사무실에 방문한 아버지가 건넨 커피였다.
“협심증이란다.”
오랜만에 본 아버지는 눈가의 주름이 짙었다. 지쳐 있어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른다.
회장님의 부르심 덕에 나이 오십 줄인 양반들이 대낮에 헐레벌떡 뛰어 다녀온 참이었다. 누구는 부산에 출장차 내려가던 차도 돌렸다니 말 다 했다.
“갑작스럽네요. 건강 생각 끔찍하신 걸로 알았는데요.”
“연세가 연세니까. 스트레스성이라던데.”
“회장님이 스트레스받으실 일이 뭐가 있다고.”
중얼거리며 사헌이 얼음을 씹었다.
“자식들 문제지.”
가장 문젯거리였던 사람이 저 말을 하니 우습다. 본인도 민망했는지 아버지가 쓰게 웃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범운 그룹의 2세 승계는 바깥에서도 흥미로운 사건으로 손꼽혔다.
본래 차기 회장으로 점찍어 전자와 건설을 비롯한 범운 주요 사업을 넘겨받는 중이었던 장남이 돌연 연을 끊겠다는 소리를 하면서 일대 파란이 일었다.
후계자 자리는 무역업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던 둘째 최문경에게 넘어갔고, 그렇게 집안을 떠났던 장남은 훗날 모친의 설득으로 돌아왔지만 그 후부터가 문제였다.
언제나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던 장남의 아들과 둘째가 느지막이 본 어린 아들.
이제는 자식들도 쉰이 넘었으니 나머지는 알아서들 하게 내버려 두셔도 될 텐데, 눈 감기 전에 마음에 내키는 손주를 반드시 골라내야 성에 차시나 보다.
병이야. 사헌이 물방울이 맺힌 컵을 이마에 댔다. 뭐든 통제하려고 드는 거, 조부의 고질이다.
최 회장의 통제광 기질은 사실 사헌에게는 좋은 징조였다. 최문경 측과 달리 사헌에게는 뒤를 받칠 인맥이 부족했다. 사헌을 선택한 회장이 직접 자기 사람들이라도 물려주지 않는 한은…….
“저녁에 시간 내서 석등원에 들러.”
아버지가 넌지시 말했다.
“뭘 하라고 하시든 그냥 알겠다고 해라.”
“좋은 조언이네요.”
“삐딱하게 듣지 말고. 핑계가 필요하시다니 만들어 드려. 갑자기 주자를 너로 바꾸려면 내세울 이유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니냐.”
“제가 아직 부족한가 봅니다.”
“일 열심히 한 거 누가 몰라? 나 때문이지.”
“…….”
“경영이지만, 가족 간의 일이기도 해.”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사헌이 말을 삼켰다.
미지근해진 컵을 이마에서 떼어 내자 얕은 두통이 계속되었다.
“알다시피 문경이가 보통 독하냐? 의현이가 능력이야 너보다 떨어지지만, 문경이는 자기 아들이 바보천치여도 어떻게든 회장 만들 애야.”
중간에 아예 좌천과 다름없이 전속 보직될 뻔한 이후로 사헌은 외부의 적보다 문경을 경계했다. 여차하면 다시 올라오지도 못하게 밟아 주겠다는 의지는 그때 잘 봤다.
“의현이는 할아버지께 결혼 날짜 받아 볼 생각인가 보더라.”
골목에서 까치발을 들고 입 맞춰 오던 유성을 생각하며 사헌이 찢어진 입술을 혀로 문질렀다. 심한 상처는 아니다. 얼마 지나면 아물 거다.
“너도 오늘 가서 주시는 대로 받아.”
* * *
아버지의 방문은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오후에 헤어진 사람을 퇴근길에 다시 보게 될 줄은 예상 못 했다.
적어도 며칠은 뜸을 들일 줄 알았는데. 로비에서 한참을 기다렸다던 유성은 아까와는 다른 차림이었다.
“라이터 돌려주러 왔어요.”
유성이 사헌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말아 쥔 손을 내밀었다.
사헌이 손바닥을 내밀자 유성이 그 위에 제 손을 얹어 놓았다.
“받았는데, 손 안 치울 겁니까?”
“손잡아 달라고.”
태연한 어리광에 사헌이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이지.
라이터만 챙겨 손을 빼자 유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사헌에게 따라붙었다.
“그쪽 집에 무슨 일 있어요?”
“아무 일 없는 가족도 있습니까.”
건물 밖으로 나서자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사헌이 처마 밑에 섰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전에 빌어먹을 두통이 가시도록 바깥 공기를 들이켜고 싶었다.
“내일까지 비 온대요.”
유성의 말을 들은 사헌이 바깥으로 손을 내밀었다. 띄엄띄엄 떨어지는 물방울이 손바닥을 건드렸다.
하늘을 보니 쉽게 그치지 않을 것 같다.
“비 안 좋아하나 봐요.”
유성이 문득 말했다. 속을 들킨 기분이라 사헌은 재빨리 낯빛을 정리했다.
“표정이 안 좋길래.”
“피곤해서 그런 거겠죠.”
“피곤해요?”
“매일.”
빗소리에 섞여 나도, 라고 중얼거림이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최사헌 씨는 매일같이 너무 피곤해서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 무슨 생각해요?”
“……정원.”
망설이다 사헌이 정직한 답을 꺼내 놓았다. 빗발이 벌써 굵어지고 있다.
“아, 꽃도 있고 나무도 있는 예쁜 정원에서 휴식?”
유성이 빌딩 주변을 둘러싼 나무를 가리켰다.
그러나 사헌이 떠올리는 건 풀이라고는 이끼뿐인 정원이다. 모래와 돌뿐인 곳.
“이만 가죠. 라이터 잘 받았습니다. 비 조심해요.”
공기는 충분히 쐤다. 빌딩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의 지하 주차장 층수를 누르는데 유성이 다시 사헌의 옆에 나타났다.
“어디까지 따라오게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도 유성은 계속 사헌을 따라왔다. 혹시 같은 층에 주차했나 했건만, 아니나 다를까 유성은 그만 졸졸 쫓고 있다.
“우산을 안 가져와서 그러는데 좀 태워 줄래요.”
“이 정도는 맞고 가요.”
“나쁜 놈.”
무심한 말에 욕이 돌아온다. 유성의 아랫입술이 앞니에 눌렸다. 사헌은 잠시 시선을 빼앗긴다.
“태워 줘, 개새끼야.”
유성이 사헌의 소맷자락을 쥐고 흔들었다. 욕설과 달리 하는 행동거지는 어린애가 생떼라도 쓰는 것만 같다.
성가셔야 할 텐데 별로 싫지 않았다. 이것도 페로몬 트릭의 일종일지도.
어쨌든 형질이 강렬한 오메가들에게는 주변의 시선과 마음을 끄는 기질이 있다. 사헌이 만나 본 바로는 그랬다.
“나 말고 다른 남자한테도 갑자기 찾아가서 태워 달라고 해요?”
“너 말고는 다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나한테 태워 준다고 해.”
“인기 많아서 좋겠네.”
여상히 대꾸하자 유성은 입술을 삐죽대며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 티를 냈다.
속이 뻔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디까지가 도발이고 어디부터가 진짜인지 헷갈린다.
“그래서 태워 주는 대로 타고 다녔어요?”
“알파 새끼들 차에는 안 타요.”
대답에 지긋지긋함이 묻어났다. 이건 확실히 진짜 같다.
“나는 특별한 알파 새끼인 건가?”
“응, 내가 좋아하니까.”
또 거짓말. 하지만 이제 조부가 엮어 주는 상대와 혼담을 진행하게 될 테니, 유성과 이렇게 엮이는 것도 마지막이다. 이후부터는 찾아온다고 한들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막판 한 번쯤 장단 못 맞춰 줄 것도 없었다.
“오늘은 먼저 퇴근하세요. 도곡동은 저 혼자 가겠습니다.”
차를 찾아 다가가서 대기 중인 기사를 물리자 유성의 눈이 반짝였다.
유성이 기쁨을 감추지 않고 드러낼 때면 사헌은 재밌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백유성은 양가적이다.
곱게 자란 태가 나면서도 구김살을 다 숨기지 못한다. 음지에서 자란 꽃 같았다.
예를 들어 조모가 취미 삼아 기르던 값비싼 춘란. 돌보기가 지극히 까다로워 손 놓고 싶다가도, 창가에서 부는 바람에 묻어나는 난초 향을 맡으면 왜 난이 귀한지 알게 된다고 했다.
운전석에 오른 사헌이 곧 조수석에서 끼치는 단내에 숨을 깊게 마셨다.
“어디 가요?”
안전벨트를 채우며 유성이 질문했다.
“회장님 댁.”
“왜요?”
“좋은 말씀 들으러요.”
하. 유성이 대놓고 코웃음 쳤다.
유성에게 곧이곧대로 집안 사정을 이야기해 줄 필요는 없다. 장난삼아 넘어가 주는 건 한두 번이다.
지난 섹스가 발목을 잡게 둘 수는 없었다. 사헌이 차를 출발시켰다.
“내가 최의현이랑 결혼할 사람이 아니었으면, 나랑 계속 잤어요?”
그건 이쪽이 해야 할 질문일 텐데. 사헌이 길을 따라 운전대를 돌렸다.
최의현이 아니면 내게 자자고 덤벼들었을 리가.
남의 사정에 이용당하는 건 사양이다.
“예.”
사헌은 솔직히 답했다.
유성은 그 후로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오피스텔 주차장에 차가 멈춰 섰다. 차 안이 어둑한 그늘에 잠겼다.
차를 세우고 한동안 기다려도 옆에서는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착했잖아. 내려요.”
유성은 안전벨트조차 풀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팔을 늘어뜨리고 등받이에 한껏 기댄 자세가 무방비했다.
“풀어 달라고?”
물으면서 사헌이 조수석으로 허리를 숙였다. 안전벨트의 고정을 풀자 유성의 팔이 사헌의 목에 감겼다. 오늘, 골목에서처럼.
입술은 닿지 않았다. 숨이 섞일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유성은 사헌을 바라보았다.
코끝이 장난처럼 엇갈린다. 유치해. 사헌은 야유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운 것도 아닐 텐데 유성의 눈가는 이번에도 운 것처럼 붉은 기가 돌았다. 유혹이라기에는 절박한 몸짓이 여지없이 혼란스럽다.
녹은 사탕처럼 엉기면서도 유성은 울적하고 음산한 눈빛을 했다.
공기에 스민 향은 달고 진했다. 사헌은 불현듯 썩기 직전의 과실이야말로 가장 달다는 이야기를 상기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먼저 입술이 겹쳤다. 유성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도톰한 아랫입술을 깨물자 유성은 잠시 버티다 입을 벌려 주었다. 두 사람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조수석 의자가 좀 더 뒤로 젖혀졌다.
뒷머리를 쓰다듬다 등으로 내려오는 유성의 손길이 느껴졌다. 아래로 뻗은 척추 선을 따라 유성이 손가락을 그었다.
“당신하고 키스하는 거 좋아.”
유성이 조잘거렸다. 백유성은 성감이 오르면 끔찍하게 달콤한 목소리를 낼 줄 알았다.
자기 살에서 내는 향취만큼이나 달다.
부분부분 흐려진 발음과 애매하게 낮아진 목소리를 들으면 배 속이 다 간지러웠다.
“회장님 댁에 왜 가는데요?”
떠보기가 열심이다. 유성의 사연을 몰랐더라면 기업 사정을 알고 싶어 이러나 의심했을 거다.
“아프셔서.”
사헌은 진실을 얘기해 주었다.
아마 백유성이 어설픈 기업 스파이였더라도 대답해 줬을지도 모른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위험한 생각이다.
“오래 건강하게 사시라고 얘기하러 가는 거예요? 최사헌 씨 혼자?”
말투는 지나가듯이, 그러나 의도는 지나치기 어려울 만큼 뚜렷한 물음을 들으면 바보 같은 연극의 주연이 된 기분이었다.
“맞아요. 다른 사람들 없이 나 혼자.”
다 알면서도 속이고, 속아 주는 게임. 이런 시간 낭비는 그만할 때가 됐다.
“의현이 결혼시키기 전에 나한테도 적당한 짝 붙여 주실 계획이실 거고, 난 원하시는 대로 할 생각이에요.”
“결혼해요?”
유성이 사헌의 재킷 옆구리 부근을 붙잡았다.
“나는?”
사헌을 보는 유성의 눈이 한층 커졌다. 마치 그가 순진한 연인을 배반하는 나쁜 놈이라도 된다는 식이었다.
“자꾸 우리가 무슨 관계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지 마. 지금 결혼할 사람 있는 건 당신이면서.”
“결혼하지 마.”
현실을 꼬집는 적나라한 사헌의 말에도 유성은 표정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동그랗게 뜨인 눈동자는 투명한 갈색이었고, 사헌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고집 부리지 말라고 말해야 했다. 당신이야말로 이제 이렇게 들이닥치는 짓은 그만두라고.
“할 거야, 결혼.”
사헌이 무거운 입술을 움직였다. 외면하듯 유성이 바로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사헌은 약간의 감탄을 담아 유성을 들여다보았다. 몸을 이루는 선이 세필 붓으로 그린 것처럼 섬세했다.
가는 머리카락이 유성의 이마를 비질하며 흩어졌다. 결이 좋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담색 눈동자에 음영이 고였다.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손톱이 손바닥을 찌를 정도로 힘껏 주먹을 쥐다 풀자 손가락에 갑자기 피가 돌며 저렸다. 사헌이 운전석으로 돌아가 앉았다. 갈증이 느껴졌다.
* * *
석등원에 도착하자 빗발이 한층 굵어졌다.
미리 나와 있던 고용인이 사헌의 머리 위로 우산을 펼쳤다.
빗줄기가 우산을 때리고 떨어졌다.
이 집으로 들어올 때가 장마철이었다.
일곱 살 어린 아들이 떠나는 길이건만 그 배웅조차 나오지 못한 어머니는 창문도 채 못 열고 그림자로만 사헌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림자조차 희미하다.
왜곡과 과장이 보태져 태산만큼 거대하던 할아버지가 그날의 가장 큰 부분에 자리한다.
‘누구 태를 빌렸든 너는 문혁이 애 아니냐.’
묵색 개량한복을 입고서 최 회장은 사헌의 팔을 움켜쥐었다.
‘이제부터는 여기서 살았던 건 잊어버려라.’
바깥에서는 먹물 같은 비가 퍼부었다.
아버님, 잠깐만요. 뒤에서 쫓아오던 소리는 환청이었나. 돌아보려던 사헌의 고개를 최 회장이 붙잡았다.
귀를 틀어막고서 다시 정면을 보도록 고개를 돌려놓던 손은 굳은살이 박여 거칠었다. 이대로 사헌의 머리 정도는 어디로든 돌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아 심장이 쿵쿵, 뛰었다.
‘감히 이 최종필의 손자를 시궁창에서 자라게 해.’
차에 올라탄 최 회장이 혀를 찼다. 사헌은 그가 자란 동네를 좋아했었다. 좁고 포장이 덜 된 길을 따라 고급 세단이 아래로 내달렸다.
차는 오래 달렸으나 사헌은 잠들 수 없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사헌은 그날 이후로 오래도록 제대로 잠들 수 없게 된다.
차창 바깥의 풍경은 이제 다른 나라처럼 낯설어졌다. 높은 담장과 그보다 더 높은 주택이 사헌의 집중을 빼앗았다.
앞에서 보던 것보다 더 높은 저택 앞에서 차가 섰다.
담벼락을 따라 능소화가 주렁주렁 피어 있었다. 주홍색 꽃이 비바람을 따라 머리채를 흔들었다.
‘사헌아.’
‘…….’
‘할아비가 불렀으면 대답을 똑바로 해야지!’
벼락같은 노성에 사헌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아직 어린 심장이 팔딱거리며 몸부림쳤다. 최 회장은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사헌은 홀로 차에서 내렸다. 이제 사헌은 그게 최 회장의 실망 탓이었음을 안다.
막 부모 품을 떠난 일곱 살 손자가 얼빠지게 구는 게 마음에 안 차서 자기가 끌고 온 곳에서 같이 내리지도 않았다. 최종필 회장은 그런 사람이다. 지금껏 그런 사람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운전을 하던 고용인이 사헌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
대문이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담으로 가려져 있던 안은 사헌의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뜰에서 2층으로 곧장 이어지는 계단에 여자가 서 있었다.
검은 장우산을 쓰고, 온통 새카만 옷을 입은 여자가 사헌을 맞이했다.
아버지의 진짜 아내였다.
우연조는 키가 작고 깡말라 비바람에도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 보였다.
사헌은 지금보다 키가 훨씬 작아, 돌계단에 올라서 있는 연조를 보려면 목이 아프도록 고개를 올려야만 했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우거진 나무들을 무겁게 적셨다. 가지가 휘어지게 열린 무화과는 따지 않고 두는 바람에 매달려 썩어 가고 있었다.
‘회장님은?’
멈춰 있던 우연조가 입을 열었다.
사헌이 아니라 고용인에게 한 말이었다. 고용인이 뭐라고 대답하자 우연조가 계단을 박찼다.
우연조는 날듯 빠른 걸음으로 내려와 사헌의 어깨를 떠밀었다.
충격과 함께 시야가 돌았다. 사헌은 다음 순간 마당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흙탕물이 사헌을 적셨다. 장맛비는 계속 쏟아졌으나 사헌을 마당으로 데려온 고용인은 사헌에게 우산을 씌우지도 못하고 연조의 눈치를 살폈다.
놀라서 그대로 넘어져 있는 사헌을 내려다보던 연조가 사헌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연조와 10년이 넘게 같이 살았지만, 지금도 사헌은 연조를 생각하면 그때의 표정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이제 내가 네 엄마야.’
빗물이 창백한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도록 내버려 둔 채 연조는 사헌을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굵직한 빗방울이 속눈썹에 맺혔다가 눈자위를 타고 뺨으로 흘러내렸다. 그래도 연조는 눈을 감지 않았다.
‘알겠니?’
일어서려는 사헌의 어깨를 다시 아래로 짓누르며 연조가 재차 물었다.
‘알겠냐구.’
그때 저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서일 거다.
이혼은 죽어도 해 줄 수 없다. 하지만 첩이 낳은 자식을 본처 소생으로 둔갑해 품는 정도는 해 주겠다. 아버지의 외도를 묵인하는 대신 우연조가 내민 조건이었다.
그즈음 아버지의 강경함으로 미루어 우연조와 아버지 사이에 아이가 생길 일은 없어 보였고, 사헌은 아버지를 몹시 닮은 소년이었다.
애를 그대로 둘 수는 없지 않냐는 회장의 강력한 권유였다고 나중에 들었다. 우연조 측에서 몇 번 싫다고 했는데 그때마다 소란이 컸다고도.
왜 끝내 이혼이 아니라 남의 자식을 기르는 길을 택했을까.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본인이 말해 준 적 없으니 알 수가 없다.
알고 있는 건 우연조가 사헌을 아들로 대한 적이 없다는 사실뿐이다.
그 후로 10여 년이 넘게 흘러 만난 친모와 친부 역시, 사헌에게 특별히 부모 노릇을 한 적은 없다.
물론 그들에게는 핑계가 있었다. 회장 내외는 사헌의 친모를 결코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밖에서 낳아 온 자식이라는 사실이 사헌의 앞날을 어떤 식으로 가로막게 될지 위협적으로 주입되곤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지키고 싶어 했고 어머니는 사헌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절대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다치거나 싸워야 할 때, 사헌은 명백한 혼자였다.
그러니 사헌은 누구의 아들도 아니었다.
사헌이 회장이 앉아 있는 앞으로 가 무릎 꿇었다. 가지치기당한 분재들이 회장의 뒤로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왔냐.”
“낮에는 못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애들이나 불렀지, 손주들은 일부러 오지 말라고 했다. 아비가 가서 얘기는 했지? 너도 들었다시피 이제는 내가 몸이 예전 같지 않다.”
“그런 말씀 마세요. 나아지실 겁니다.”
각본이 짜인 선문답이었다. 으으흠, 가래 끓는 소리를 내던 최 회장이 오동나무 탁자 위로 황토색 봉투를 던져 놓았다.
“펼쳐 봐라.”
사헌이 앞에 놓인 봉투를 열어 여러 장의 프로필을 넘겼다.
종이마다 사진과 간단한 약력이 인쇄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귀한 집 자제분들이었고, 하나같이 오메가였다.
“가정이 있어야 바깥일도 하는 거다. 네 아버지처럼 실수하지 말고 기틀부터 다져.”
충고를 가장한 명령이 사헌의 앞에 떨어졌다.
넘겨 보던 종이를 가지런히 정돈하며 사헌이 고개 숙였다.
‘주시는 대로 받아.’
지금 떠올라야 할 말은 아버지의 얘기였다.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옷깃에 남은 단내가 코끝을 스쳤다. 사헌이 입술 안쪽의 상처를 혀로 눌렀다. 아직 아물지 않은 입술이 따가웠다.
* * *
생각을 해.
나는 중얼거리며 화면을 노려보았다.
딸깍딸깍, 마우스를 누를 때마다 랩톱 화면이 바뀌었다.
띄워 둔 파일에는 범운 일가 3대를 아우르는 기사와 인터뷰 등이 모여 있었다.
범운 최종필 회장은 자수성가의 표본으로, 한때 방황하였으나 첫 자식이 태어나면서 마음을 다잡고 사업을 크게 일구었다.
자식에게 엄격하기로도 유명했단다. 특히 첫째에게는 유난했던 모양이라, 사고사했다는 보도 자료와 달리 진짜 사인은 자살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최종필 회장은 첫 자식을 잃고 큰 시름에 빠졌다가 첫 아이가 아우와 함께 잠드는 꿈을 꾼 후 이젠 장남이 된 둘째 최문혁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최문혁은 TY 그룹 회장의 외동딸 우연조와 부부의 연을 맺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과 인연을 끊는다. 당시 대단한 스캔들이었다.
그렇게 쫓아냈던 자식을 결국은 다시 불러들였을 정도로 최종필 회장은 혈연에 집착이 큰 인물이다.
마우스 휠을 내리자 고집이 엿보이는 불퉁한 표정의 노인이 정면을 응시하는 사진이 화면 한가득 떴다.
일흔에 찍은 사진인데도 기골이 장대하고 선이 굵었다. 젊은 시절 마을에서 유명한 헌헌장부였다더니.
젊었을 적에 폭행 사건이 몇 건 있었다고 한다.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덩치 탓에 어머니가 양공주네, 양놈 피가 섞였느니 어쩌니 하는 질 나쁜 소문이 돌았던 모양이다.
얼굴뼈가 부러지도록 맞은 피해자들이 고소한 기록이 남아 있다. 최의현의 유전자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겠다.
첫째의 죽음을 지켜보며 충격을 받았는지 집안을 떠난 최문혁과 달리 최문혁의 동생이자 최의현의 어머니인 최문경은 회장의 충실한 오른팔로 살았다.
이뤄 낸 사업적 성과 역시 만만치 않았음에도 최 회장은 최문경을 오래 외면했다. 최문경이 본격적으로 최 회장의 지지를 받은 건 최의현을 낳고 나서부터였다.
화면 속에 어린 최의현을 안고 환하게 웃는 최문경과 그 곁에 선 최 회장 부부의 사진이 나타났다. 최의현의 친부는 어정쩡하게 물러서 있었다.
최문경의 약력이 사진 아래로 이어졌다.
범운 물산 생활문화부문 경영전략담당 사장, 건설 대표이사, 범운 문화재단 이사…….
최문경은 최의현을 낳고 나서 커리어에 도약을 거듭했다. 범운 그룹의 주요 사업들이 최문경의 약력에 줄을 섰다.
간혹 함께 뜨던 가족사진에 어느 순간부터 늘 어중간한 자리를 지키던 남편이 사라졌다.
사립초등학교 교복을 입은 어린 최의현의 옆에는 최문경만 환히 웃고 있었다. 최종필 회장도 함께였다.
최의현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시점에 남편과 합의 이혼. 가족사에 한 줄이 추가됐다.
남편은 아이와 다시는 접촉하지 않는 조건으로 거액의 위자료를 가지고 한국을 떴다.
최사헌의 혼전 계약서가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이 집안 식구들은 다 이런가.
‘범운 승계 조건이에요.’
이진주의 말 그대로다. 어디 문서화돼서 조건으로 박혀 있대도 놀랍지 않겠다.
“징그러워.”
베란다 문에 기대어 고개를 처박자 떨어지는 빗속에 있는 듯했다. 난방을 켜지 않은 집은 싸늘했다.
그러모은 정보가 계획에 더해진다. 생각해. 타고난 이빨과 발톱이 없는 동물은 상대의 약점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모든 걸 쏟아부으면 단 한 번의 반격 정도는 가능하다.
가능해야만 한다.
방바닥에 던져둔 휴대폰이 울었다. 화면에 뜬 ‘최의현’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움직여 전화를 끌 힘도 없었다. 대신 귀를 틀어막았다.
진동은 끝나지 않았다. 점점 더 커져 골통을 쏘아 대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휴대폰을 노려보다 거칠게 집어 들었다.
“왜.”
― 집이야?
전화를 받자 진동 대신 최의현의 목소리가 귀를 쐈다. 이게 전화기가 아니라 총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어. 왜.”
― 지금 너희 집 근처야. 올라간다.
오지 말라고 할 틈도 없었다. 말해도 안 들었을 거다.
최의현이 올 거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일찌감치 현관에 섰다.
굳게 잠긴 철문조차 위로가 되지 않는다.
이윽고 벨이 울렸다가, 거의 곧바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몸을 때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심호흡하고 잠금쇠를 풀었다.
두꺼운 문이 열리면서 문틈으로 최의현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 눈썹이 구겨졌다.
“왜 왔어.”
“그냥 보고 싶어서.”
나도 최사헌한테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실소가 나왔다.
좋아하지도 않는 인간한테 들으면 별 같잖은 기분이구나. 최사헌도 이랬으려나.
“봤으니까 가.”
그러나 최의현은 언제나처럼 나를 무시하고 내 집으로 들어왔다. 거실로 누비는 모습이 제집처럼 자연스러웠다.
저지하고 싶었으나 오히려 자극하는 꼴이 될 게 뻔했다.
변한 곳은 없는지 검사하듯 집 안을 훑던 최의현이 서랍장에 올려 둔 유리병을 만졌다.
안에 미니어처 악기들이 들어 있는 유리병은 유민이가 준 선물이었다.
“만지지 마.”
신경질적으로 최의현이 든 유리병을 빼앗아 테이블에 놓자 그가 나를 우악스레 돌려세웠다.
“언제까지 이럴 건데?”
“뭘.”
“네 태도. 결혼해서도 얼굴 안 보고 살래?”
만약에 너랑 결혼한다고 해도 오래 얼굴 볼 일 없어.
너하고 나, 둘 중 하나는 없어질 텐데.
“아니.”
내 대답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최의현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뺨에 최의현의 손이 닿았다. 머리카락을 만지다 곧 목을 어루만진다. 나를 만지는 최의현의 손길은 이 집에 들어설 때와 똑같이 주저가 없었다.
옷 안쪽으로 조금씩 파고들어 살결을 더듬는 동작에서 지긋지긋한 욕망이 묻어났다.
나는 피하지 않고 견뎠다. 한순간 정도는 견딜 수 있다.
도저히 견뎌지지 않는 것은 이런 일이 계속될 거라는 점이다. 나나 최의현이 살아 있는 한, 영원히.
“도대체 넌 나랑 왜 자고 싶어?”
최의현의 어깨 너머로 주방 한켠 보관대에 꽂힌 식칼들이 보였다.
내 몸을 함부로 만지는 이 손을 잘라 내고 싶었다. 이 얼굴이 놀라움과 고통에 물들어 나를 보면 어떨까.
나도 최의현을 찌를 수 있는 인간임을 알게 되면.
“갑자기 귀여운 질문을 해.”
최의현이 픽 웃었다. 웃는구나, 너는. 다 우습구나.
“나, 너한테 줄 거 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최의현이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정사각형의 상자는 손바닥 안에 들어갈 만큼 작았다. 반드르르한 윤기가 상자 겉면에 머물렀다.
이걸 우스워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웃을 수가 없었다.
“이거.”
기분 좋은 표정으로 최의현이 상자를 열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상자가 열리면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나타났다.
아무 반응 못 하는 내게 최의현은 손수 반지를 끼워 주었다. 약지에 반지가 꼭 맞게 들어가는 순간 목이 콱 조였다.
지금 손을 잘라야 할 건 나였다.
“청혼 선물로는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최의현이 한껏 들떠 물었다. 신물이 올라왔다.
“그래? 뭐든지 말해도 돼?”
“원하는 건 다 해 줄게.”
다정한 속삭임이 들척지근했다. 지금 최의현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연인의 모습일 거다.
그게 참을 수가 없다.
처음 나를 강간한 다음에도 최의현은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저기서 뛰어내려서 죽어 줘.”
나는 팔을 쭉 뻗어 베란다를 가리켰다.
바깥에서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못 알아들은 듯 깜빡거리던 최의현의 눈매가 곧 사나워졌다.
“뭐든 다 해 준다며.”
“백유성, 작작 까불어.”
“주지도 않을 거면서 준다고 지랄이야.”
최의현의 주먹이 위로 솟구쳤다. 나는 치기 좋게 고개를 똑바로 세웠다.
주먹은 날아오지 않았다. 최의현은 대신 탁자의 유리병을 주워 내던졌다.
유리가 산산이 조각나며 안에 들어 있던 조그마한 악기들이 흩어졌다. 음악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유민이가 골라 왔던 장식품이었다.
열이 몰려 이마를 짚었다. 최의현이 내 가슴을 떠밀어 벽에 짓눌렀다.
“계속 그래 봐. 그따위로 해. 네가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넌 결국 내 거야.”
나를 노려보며 최의현은 한 글자씩 씹어 뱉었다. 사실을 내 뇌리에 똑똑히 새겨 주겠다는 듯이.
나는 핀에 꽂힌 벌레처럼 팔다리만 버둥거릴 따름이었다. 내게 몸을 바짝 붙인 최의현이 목에 입 맞췄다.
“하지 마. 싫어.”
“아무리 싫어도 네가 뭘, 어쩔 거야.”
끈적한 숨결이 목덜미로 달라붙었다. 혀가 목선을 따라 기어올라 귓불을 빨아당긴다.
“집에 처박아 놓고 내가 벌리랄 때 벌리게 할 거야. 그땐 이렇게 안 봐줘.”
무릎 안쪽으로 기어든 손가락은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허벅지 살을 가만히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는 아귀힘이 억셌다.
“난 첫째는 너 닮았으면 좋겠는데, 너는?”
귓바퀴가 아플 정도로 깨물렸다. 다리가 얽히면서 허리 아래가 서로 강하게 맞닿는다.
어느새 쏟아진 페로몬 탓에 혼미했다. 주저앉으려는 나를 안아 올린 최의현이 소리 내 웃었다. 이번에는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나는 여전히 웃을 수 없었다.
“지금 하고 싶은데 첫날밤을 위해서 아껴 두려고.”
“…….”
“네가 그날은 어떻게 울지 궁금해서.”
최의현이 내 손을 붙잡아 반지가 끼워진 약지에 입술을 눌렀다. 낙인처럼 뜨거웠다.
“결혼반지도 기대하고 있어, 유성아.”
팔을 놓자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는 나를 최의현은 즐겁게 관망했다.
최의현이 떠나고 문이 닫힐 때까지 나는 멍하게 아래만 보았다.
어느새 바닥에 물방울이 하나둘 맺혔다.
울지 말고, 생각을 해.
두개골 틈에서 폭발이 일었다. 얇은 껍질처럼 덮여 있던 생각들은 사방으로 깨져 나가고, 남은 건 파편뿐이었다.
벌떡 일어서자 팔이 세차게 휘둘러졌다.
벽에 붙은 액자를 떼어 내 바닥에 내던졌다. 박살 난 유리병 옆에 깨진 액자가 나뒹굴었다.
그러면서 비명을 지른 것도 같다.
목이 아팠다.
반지를 빼 던지려고 했지만, 딱 맞게 들어가던 반지는 아무리 힘을 주어도 빠지지 않았다.
손가락이 얼얼해지도록 애를 써도 마찬가지였다. 약지에 할퀸 상처만 연달아 팼다.
바닥을 나뒹구는 유리 조각을 집어 손가락을 긁자 피가 한 방울씩 흘렀다. 잘라 버리고 싶다.
유리가 제법 깊이 베고 지나가면서 통증이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손에서 떨어진 유리 조각이 다시 두 개로 갈라졌다.
피에 젖은 약지가 미끄러웠다. 반지가 마디를 지나 빠져나왔다.
손톱 밑에 맺힌 핏방울이 무겁게 추락했다.
무슨 정신으로 집을 나왔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최의현이 밟고 간 집 안에 더 있다간 미칠 것 같았다.
걷기라도 하지 않으면, 어긋나 버린 정신이 다시는 제대로 짜 맞춰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박살 난 유리처럼 금이 간 생각들을 그러모으면서 비상구 계단을 내려갔다.
바깥은 어두웠다. 자정을 넘긴 것 같았다. 모르겠다.
오피스텔 밖으로 나오자 무척 추웠다. 나는 고작 반소매 한 장만 걸친 상태였다.
입술을 떨면서 차에 올랐다. 주머니에는 차 키와 휴대폰뿐이었다.
시동을 걸고 히터를 틀어도 추웠다. 운전해서는 안 될 상태였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비게이션에 주소 입력을 마친 상태였다.
비가 많이 내렸다.
와이퍼를 켰는데 앞이 흐렸다.
간신히 최사헌의 집 가까이에 왔을 때 차가 덜컹거렸다. 벤치에 부딪히고 화단의 나무를 스치면서 사이드미러가 떨어져 나갔다.
나뭇잎이 우수수 자동차 앞창으로 쏟아져 내렸다.
더는 앉아 있을 수 없어 밖으로 나왔다.
차 옆면이 마구 긁혀 심한 사고라도 당한 듯 보였다. 나는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발목 뒤편부터 뜨끈한 통증이 일었다.
휴대폰이 꺼져 있었다. 전원을 켜자 불이 들어오긴 했지만 배터리가 1퍼센트 부근에서 깜빡였다.
한 통의 전화만 할 수 있으면 된다. 나는 조급하게 번호를 눌렀다. 손가락이 자꾸 미끄러지려고 했다.
받을까. 제발 받았으면.
환청처럼 곧장 전화가 연결되었다.
“지금, 최사헌 씨 집 앞인데요…….”
추워서 자꾸 소리가 흔들렸다. 제대로 말하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할 말이, 있는데……. 나와 주면 안 될까요.”
전화를 끊고 나자 그제야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새벽 3시였다.
입김이 뿌옇게 나왔다. 서 있으면 쓰러질 것 같아 무작정 발을 움직였다.
비를 맞으며 아파트 단지를 배회하는 일은 외줄을 타는 것만 같았다. 균형을 잡으려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어깨가 자꾸 기울었다.
“당신 미쳤어?!”
감각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고 느낄 즈음 고함이 비를 뚫고 나를 이끌었다.
끊이지 않고 몸을 치던 비가 멎었다.
최사헌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우산이 빗줄기를 끊어 내고 그와 나를 안전지대에 가두었다.
“어디 있는지 제대로 얘기하지도 않고, 전화기는 꺼져 있고.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기는 해?”
그가 하는 말 대부분은 단어로만 쪼개져 맴돌았다. 찾아다녀, 나를. 전화…….
“배터리가 다 나가서, 그래서…….”
중얼거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비가 다시 머리로 쏟아졌다.
왜 화를 내는 걸까. 어째서 평정을 잃고 내게 소리치고 있을까. 왜 나를 찾아다녔다고 말할까.
최사헌은 나를 잡으려다 내가 손을 피해 물러서자 멈췄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최사헌이 억눌린 신음을 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냐고. 최사헌의 말을 되뇌느라 입술이 둔하게 움직였다.
어디부터 말해야 할까.
유민이가 죽었는데, 나는 살아 있는데, 내게는 삶보다 죽음이 더욱 필요한 것만 같다고…….
입은 벌어지지만 나는 언어를 잊는다. 할 수 있는 말은 한정되어 있었다.
* * *
앞이 똑바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우였다.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굳이 우산을 벗어나 비를 맞는 유성은 핏기 없이 온통 새하얬다. 빗속의 유령 같았다.
세찬 비를 감당하느라 유성의 어깨가 조금씩 휘청였다. 흐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내 힘으로는 죽일 수가 없어요.”
사헌이 우산 손잡이를 꽉 움켰다.
세차게 떨어진 빗물이 물살을 만들며 흐른다. 유성의 맨발 밑으로 분홍색 물길이 새로이 생겼다.
신발조차 제대로 신지 않은 발 탓에 유성은 더욱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최사헌 씨가 도와주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뭐든 해 줄게요.”
사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생각한다.
석등원의 모래를 파헤치고 돌을 뽑아내어 정갈한 정원을 폐허로 만들고 싶은 욕망을.
너절한 인간들의 무릎을 부수어 똑바로 서지 못하게 하고 싶은 충동과, 내 아버지의 오명, 호적에조차 오르지 못하고 정부로 살아가는 어머니, 연적의 아이를 빼앗아 개처럼 끌고 다니던 우연조.
과거를 닦아 내고 깨끗해진 자리에 앉겠다.
조부가 원하는 대로 서류에 적힌 이름들 중 하나를 골라 결혼할 것이다.
색이 사라진 유성의 입술에서 흰 입김이 연달아 흩어지더니, 유성이 무너져 내렸다.
생각이 끊겼다.
사헌이 우산을 내던지고 유성을 받아 안았다.
무섭게 내리치는 비가 사헌을 적셨다. 차가운 빗물이 옷 안으로 흐른다.
품에 들어온 유성만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실수다.
거래에서 고모에게 뒤통수를 맞았던 순간처럼 섬뜩한 열이 폐부에 번졌다. 뒤에서 날붙이로 가슴을 꿰뚫린 것만 같았다.
잠시 멈춰 있던 사헌이 긴 숨을 내쉬었다. 흰 입김이 꼬리를 늘이다 스러졌다.
사헌의 눈이 꽉 감겼다가 다시 뜨였다. 찡그린 미간을 타고 물방울이 빠르게 떨어진다.
사헌이 천천히 유성을 고쳐 안아 건물로 들어갔다. 추적추적한 물기가 옷자락에서 넘쳤다.
바닥에 뒤집힌 채 방치된 우산에 빗물이 고였다. 장대비를 맞은 우산이 파도 위의 배처럼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