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생결단 To be or not to be
살 수 없으면 죽어야 한다.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아직 죽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살아야 했고, 당장 살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했다.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빗물이 살갗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게 식은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내 힘으로는 죽일 수가 없어요.”
폭우를 고스란히 맞는 나를 최사헌은 가만히 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완벽한 남자였다. 그에 반해 그 앞에 선 내 모습은 어떤가.
젖은 옷은 무겁게 달라붙고, 눈조차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꼴사나운 모습이겠지만 상관없었다.
“최사헌 씨가 도와주면.”
이제부터 이 남자한테 바닥을 보여 줄 생각이었으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줄게요.”
눈물이 났다.
그러나 볼을 흐르는 눈물은 금세 빗물과 섞여 차가워졌다.
오로지 눈두덩만이 지옥처럼 뜨거웠다.
* * *
주저―흔(躊躇痕)
[명사] 한 번에 치명상을 만들지 못하고 여러 차례 자해하여 생긴 흔적.
사람은 심리적으로 한 번에 치명상을 가하지 못하고, 여러 번 시도하다가 실패하거나 마지막으로 치명상을 가하여 사망한다. 이처럼 치명상이 아닌, 자해로 생긴 손상을 주저흔(躊躇痕, hesitation mark)이라고 한다.
* * *
내 삶에는 세 번의 죽음이 있다.
가난하고 지긋지긋했던 어린 시절, 내 어머니의 죽음.
자랑스러운 해신 그룹의 아들, 내 이복동생의 죽음.
그리고 그 애를 위해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얻어 내야만 했던 또 다른 죽음.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러나 죽음은 이야기를 시작하기 좋은 주제가 아니다.
불운은 당하는 자에게나 의미가 있고 대단하다. 남의 비참함 따위 얼마나 하잘것없는 이야깃거리인가.
그러니 그보다 더 좋은 것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
예를 들어 최사헌에 대해.
보기만 해도 눈이 멀어 버릴 것처럼 생각되었던 남자.
폭력적일 정도로 강렬한 빛.
* * *
조명이 너무 환해서 눈이 시큰거렸다.
돌아간 뺨이 얼얼했다. 입 안이 터졌나 확인하려고 입 안쪽 볼을 혀로 건드려 보니 쓰라렸다.
“다시 말해 봐, 이 새끼야.”
방금 내 뺨을 내리친 손을 주먹 쥐며 사촌이 으르렁댔다.
작품을 돋보이게 하고자 설치한 전등에서 새하얀 불빛이 쏟아진다. 백부가 취미 삼아 찍었다는 사진이 회장의 벽면에 붙어 있었다.
대단찮은 작품들임은 흘깃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어쨌건 오늘 경매에서 억을 호가하는 단위로 낙찰될 작품들이다. 해신 그룹 부회장이 직접 찍은 사진이니까.
그리고 내 앞에 있는 놈은 그 부회장님의 아들이었다.
개망나니 새끼. 가질 만큼 갖고 태어났으면 심보 좀 곱게 쓸 일이지.
“네가 사촌한테 발정하는 미친 개새끼인 거, 너희 부모님도 아시냐고.”
나는 어차피 가진 게 없는 놈이라 착한 심성 따위 가지지 않아도 된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입을 열기만 해도 입 안이 욱신대고 골이 울렸다.
“이게 아주,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정신을 못 차려.”
무슨 개라도 다루는 말투였다. 평생 당하던 취급이라 놀랍진 않았다.
아무리 전시장 구석이라지만 소란이 벌어지는데도 힐긋거리며 쳐다보는 이들 외에는 딱히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마지못해 진정시키러 왔던 가드한테 대고 백지훈이 으르렁대고 난 후부터는 가드들조차 못 본 척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여기는 백부님의 공간이었고, 지금 소란을 피우는 놈은 주인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놓은 자식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탕아였다.
원래 이 자리에 있을 자격도 없는 인간이다.
“비싼 옷 걸쳤다고 네가 정말 이쪽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아?”
순식간에 멱살이 잡아채였다. 셔츠가 구겨지고 넥타이가 목을 졸랐다.
“요즘 작은아버지가 너 빨리 어디 갖다 팔려고 안달이시라며.”
사촌의 형형한 눈이 나를 잡아먹을 듯 노리고 있었다. 목소리는 누가 들을세라 은밀해졌고, 그만큼 끈적거렸다.
“어차피 팔아치울 몸이면 나한테 한 번 못 줄 것도 없잖아.”
마주치기만 하면 끈덕지게 살갗을 맴돌던 시선이었다. 백지훈은 재벌가의 발정 난 알파 중에도 개종자였다.
아무리 피가 덜 섞였대도 사촌한테 발기할 정도로.
“진짜 한 번 줘?”
속삭이자 백지훈이 순간 멈칫했다.
나는 이 개종자보다도 못했다.
이따위 취급이나 받는데 이제는 모멸감보다 지겨움이 앞설 정도라니. 분노와 좌절이 익숙한 나머지 지겨웠다.
지금 머리에 그 짓만 가득 찬 이 짐승 새끼는 내 목덜미에서 새어 나오는 달콤한 향취를 맡고 있을 터였다.
백지훈이 그간 지긋지긋하게 펼친 주장이었다.
네가 꼬드겨서, 나한테 꼬리를 쳐서.
“좋냐?”
일이 이렇게 되는 거다.
멍청한 얼굴에 대고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그러나 대신에 나는 그냥 웃어 주었다.
“내가 차라리 개돼지한테 몸을 팔지.”
“…….”
“너한테 주겠냐?”
그러고는 내 멱살을 틀어쥔 백지훈의 손을 있는 힘껏 세차게 뿌리치며 짓씹듯 내뱉었다.
“등신아.”
분노로 일그러지는 백지훈의 얼굴이 보였다. 치켜 올라가는 손도.
이어질 충격을 예상하고 나는 눈을 감았다.
“백지훈 씨.”
주먹이라도 날아오겠다 싶었을 때, 누군가 사촌의 이름을 불렀다.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큰 소리가 아닌데도 잘 들릴 정도로 발음이 깨끗했다.
“지금 바쁩니까?”
“아…… 선배님.”
양아치처럼 으르렁거리던 백지훈이 순식간에 낯빛을 바꾸었다.
불과 몇 초 만에 정중한 상식인의 얼굴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나한테 함부로 구는 인간이라고 모두한테 그러지는 않는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겪을 때마다 쓰레기가 되는 기분이다.
“벌써 오셨어요? 아버지하고는 이미 인사 나누셨죠?”
당혹감을 떨치고 앞으로 걸어가는 백지훈을 따라 나도 시선을 움직였다.
곧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최사헌이었다.
이 바닥 인간이면 누구나 이름을 알 정도로 최사헌은 유명하고 유망했다.
부모 모두 한자리씩 하는 게 당연한 곳에서도 휘황하다 못해 찬란한 배경을 가진 남자였다.
이력은 또 어떤가. 8할의 망나니와 2할의 제정신 박힌 놈들 가운데, 그는 가히 월등히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최사헌을 쳐다보았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러고 있었다.
대단한 장신이었다. 190은 넘을 키에, 잘 관리된 몸의 두께감 덕에 서 있기만 해도 공간을 채우는 위압감이 있었다.
딱 한 번만 뒹굴어 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저질스러운 농담들이 왜 들리는지 알 만했다.
워낙 신체가 빼어나신 덕에 얼굴은 웬만큼만 했어도 됐을 법한데 최사헌은 타협이 없었다.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그편이 인간미가 없어 보일 정도로 치밀하게 깎인 이목구비와 어울렸다. 쳐다보면 눈을 떼기가 어려운 미남이었다.
무엇보다도 분위기. 절도 있는 자세. 한 호흡조차 허투루 소모할 것 같지 않은 몸놀림.
최사헌은 완벽했다.
소문보다도 더.
옛날보다 더.
방금까지 사촌과 불쾌한 실랑이를 벌이던 것도 잊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따지고 보면 최사헌이 나를 구해 줬다고 할 수도 있으련만,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최사헌의 시선이 무심하게 나를 스쳤다.
터진 입술과 부어오른 뺨이 수치스러웠다. 막상 최사헌은 신경도 쓰지 않을 텐데도.
저 남자와 내 처지가 얼마나 다른지 생각하니 속이 떨렸다.
서둘러 옷깃을 정리하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숨이 가빠졌다.
보이는 문을 아무거나 열고 들어가자 새카만 대리석으로 마감한 화장실 벽이 앞에 보였다.
널찍한 공간에서는 청결한 냄새만 감돌았다.
인기척이라고는 일체 들리지 않는 곳에서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그제야 입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왜…….”
손바닥으로 눈가를 누르자 조그만 빛이 눈꺼풀 아래서 깜빡였다.
비어져 나오는 눈물을 도로 눌러 담고 싶었다.
예전에 최사헌을 본 적 있다.
해신에 들어와 적응하고자 애쓰고 있을 때.
해신 그룹 차남 슬하의 첫째. 번지르르한 타이틀이다.
진실은 이렇다. 나는 불륜 관계에서 태어난 혼외 자식이었다.
어머니는 내쳐지면서 한 재산 챙길 정도로 영악하지도 못했다. 아이를 지울 결심조차 못 했다.
필연처럼 우리 모자는 어렵게 살았다. 손가락질당하는 건 익숙했고 아프기도 예사였다.
어느 날 해신에서 사람이 왔다. 그 집의 ‘진짜’ 부인이 불임 판정을 받았다고 들었다.
나는 대체재였다. 해신에는 혈통이 중요하다고 믿는 구시대적인 인간들로 가득했다.
어머니는 해신에서 내미는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아버지의 으리으리한 저택으로 들어가는 것도 마다했다.
그리고 자신의 힘만으로도 나를 훌륭히 키울 수 있다고 큰소리쳤던 게 무색하게, 새벽같이 일을 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정말 죽었다.
길바닥에 나앉든지, 아니면 생면부지의 아버지를 따라가든지. 내겐 선택지가 없었다.
내가 아버지 집으로 들어간 지 1년 만에 동생이 태어났다.
나하고 다르게 그 애는 진짜였다.
이전에 최사헌을 본 적 있었다는 말을 정정해야겠다.
전에 최사헌을 사랑한 적 있다.
아무도 모르게.
내 주제에.
* * *
세면대로 차가운 물이 쏟아진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물줄기가 얼음장처럼 찼다.
한동안 멍하니 거기에 손을 담그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가관이었다.
확연히 한쪽만 부어오른 뺨은 물론이고 찢어진 입술은 척 봐도 눈에 띄었다.
찬물을 끼얹어 봤지만 부어오른 뺨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듯했다.
“하여간 무식하게 힘만 세서…….”
머리는 나쁜 새끼가. 푸념해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딴 소동쯤 흔한 일이다. 개한테 물렸다고 치부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최사헌만 안 보였더라도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는 않았을 텐데.
“약이라도 바르지 그래요.”
물소리를 뚫고 들어온 음성에 절로 어깨가 긴장했다.
회장의 분위기를 단번에 사로잡던 그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자 최사헌이 서 있었다.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버티고 서 있는 최사헌을 보니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당장 달아나고 싶다는 충동과, 어떻게든 버티고 서서 대거리를 하고 싶다는 충동이 동시에 들었다.
“최사헌 씨가 신경 쓰실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결국 나는 후자를 택하고 이유도 없이 삐딱하게 굴었다. 수도를 잠그는 손끝이 약간 떨렸다.
그동안 남들 비위 맞추는 건 실컷 했다. 만약 최사헌이 10년 전에 다친 내게 말을 걸었더라면 나는 벌벌 떨면서 고마워했을 거다.
실제로 그러기도 했었고.
그러나 이제는 자포자기한 지 오래였다. 어떤 식으로 발버둥 치든 내가 이 세계에서 맡을 역할은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비굴하게 고개 숙이느니 위악이라도 떨고 싶었다. 멍청한 짓이더라도.
최사헌은 내 무례한 태도에도 아무 내색이 없었다. 최사헌이 들어오자 공간이 다 달라 보였다.
흡사 여기가 전시장인 것만 같다. 전시품 목록에 최사헌 하나만 넣어 놓더라도 보러 올 사람이 줄을 설 테다.
“의현이하고 만난다면서요.”
“최의현 씨는 제 동생하고 만납니다.”
나는 또박또박, 씹듯이 말했다.
자기 친척이 누구하고 만나는지도 모르나. 헷갈린 게 아니라 의도적인 말이었다.
이 인간도 겉보기만큼 신사적이지는 않다.
하긴. 이 바닥에 성격 안 꼬인 인간이 어디 있다고.
“의현 씨가 들으면 언짢아하겠네요.”
하물며 나는 최의현씩이나 되는 인물과 만날 주제도 못 됐다.
최사헌이든 최의현이든, 사생아하고 엮일 위치의 분들은 아닌 거다.
더군다나 최의현은 줘도 가질 마음 없다.
내 동생은 그 자식을 좋아했다.
그딴 새끼를.
“백유성 씨는, 듣던 대로네요.”
“무슨 말을 들으셨길래.”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라고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백지훈 따위가 줬던 것하고 비교할 수 없는 수치심이었다.
“그렇습니까?”
대충 흘려 넘기고 자리를 떠야 할 타이밍이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내가 대놓고 비아냥거리면서 입매를 비틀자 최사헌은 마주 웃었다.
비웃고 싶으면 비웃어라. 어차피 취급이 같을 거라면 이라도 드러내고 싶었다.
“얼마나 매력적인데요?”
“…….”
“자고 싶을 만큼?”
일부러 흘린 오메가 페로몬이 주변을 메웠다. 유치한 도발이었다.
최사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당황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지나치게 예상대로라 재미없는 반응이었다.
발악할수록 우스워지는 건 나뿐임을 안다. 그래도.
“아까처럼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마요. 하나도 안 고마우니까.”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 발악이라도 하게 된다.
“난 또 자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았지.”
“…….”
“왜 웃습니까?”
“그렇게 싫어하면서 이런 자리는 왜 왔을까 싶어서. 동생을 많이 아낀다더니 그것도 사실인가 봅니다.”
내 속을 전부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기만 했다.
어쨌거나 최사헌의 지적은 옳았다. 여섯 살 터울의 동생만 아니었더라도 오지 않았을 행사였다.
백부의 생일 축하를 겸하는 자리였으므로 형제 중 하나는 얼굴을 비쳐야 했다. 최의현을 만나러 간다는 유민이를 위해 별수 없이 내가 온 거고.
“그럼 저는 이만.”
“백유성 씨.”
“또 뭐죠.”
“정말 의현이랑 아무 사이 아닙니까.”
최사헌을 지나쳐 출구로 걸어가던 걸음조차 멈추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무 사이 아니냐고? 정말, 아무 사이 아니냐고.
나를 만지던 최의현의 손길이 떠올라 목에 소름이 돋았다. 놓으라고 뿌리치면 더욱 끈질기게 달라붙던 손길. 눈빛.
안 그래도 예민하던 신경이 바늘처럼 곤두섰다. 최의현. 이름만 되뇌어도 신물이 올라온다.
“보이는 것만큼이나 성미 고약한 녀석이죠.”
“…….”
“엮이지 말아요.”
“당신이 뭔데…….”
“유성 씨를 위해서 충고한 겁니다. 요즘 선 자리 자주 나간다면서요. 괜히 자극하지 말아요.”
“내가 그걸, 최의현 자극하자고 하는 것 같아요?”
분노로 목이 떨렸다. 이 집구석에 들어와 하루도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었지만 오늘은 특히나 지치는 날이었다.
“이런 동네에서 성인인 오메가가 결혼 시장에 나가는 게 뭐 이상한 일이라고. 집안에 길러 준 보은이라도 하려고 노력 중인 건데. 내가, 최의현 때문에…… 최의현 보라고, 그런 짓을 하겠어요?”
오히려 반대였다. 차라리 팔려 가서 하루빨리 혼인 신고서에 도장이라도 찍혔으면 싶은 바람이었다.
그러면 제아무리 최의현이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 눈에 맞는 애들끼리 짝 맞춰 놓는 게 자연스러운 상류층 생리라지만, 나는 거기서 예외였다.
밖에서 낳아 온 자식이라는 흠을 그나마 만회할 만한 것은 내가 오메가라는 사실뿐이었다.
오메가든 알파든, 형질 보유자라는 분류표는 결혼 시장에서 플러스가 됐다. ‘형질 보유자’라는 딱지가 붙을 정도로 강한 형질을 지녔다는 건.
미신에서 비롯된 선호였다. 알파 혹은 오메가를 선호하거나, 베타를 더욱 높이 치거나,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인식은 변해 왔다.
형질이란 스펙트럼 같은 것이어서 완전한 베타는 드물었다. 베타만이 아니라 알파나 오메가도. 양극단으로 갈수록 수가 적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형질이 강한 알파일수록 생식 확률이 떨어진다. 그럴 때는 오메가가 아이를 보기에 유리하다. 무슨 근거에서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곧잘 떠드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아이가 우수하지 않겠냐는 이야기 같은 것들. 내가 듣기에는 체할 때 손을 따면 된다는 미신 같은 얘기였으나 신봉하는 사람이 넘쳐 났다.
가치란 사회적이다. 정말로 알파나 오메가가 우수한지 따위는 상관없다. 사람들이 그렇게 믿으면 끝이다.
덕분에 몸값이라도 올랐으니 감사히 여겨야 할까.
내가 동생보다 더 가졌다고 할 만한 건 고작 그 오메가라는 타이틀 하나였으니.
“최사헌 씨, 나는요. 세상 누구보다 내 동생이 최의현 씨하고 부디 잘됐으면 하는 사람이거든요.”
하지만 나는 내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단 한 번도 반갑게 여긴 일이 없다.
동생에게 줄 수 있었더라면 기꺼이 주었을 거다.
“최의현이 개자식이긴 해도 어차피 다른 인간들도 수준 엇비슷하고, 다른 것보다도 유민이가 많이 좋아하니까.”
나는 내 동생을 사랑했다. 당연히 그랬다.
아무리 비참한 인생이라도 좋아하는 것 하나 정도는 있어야 제정신으로 살 수 있는 법이다.
유민이는 내 삶에서 유일하게 사랑할 만한 것이었다.
백유민이 태어나면서 나는 원래 있던 자리보다 더 낮은 곳으로 처박혔으나, 그건 분수에 안 맞는 자리에 들어온 이가 응당 치러야 할 대가였으므로 딱히 억울해할 일도 아니었다.
유민이는 아빠나 엄마라는 말보다 형이라는 말을 더 먼저 했다. 그 애를 사랑하는 건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제가 아무리 근본 없는 놈이라도 제 동생 상대는 안 건드리거든요. 그딴 걱정 하지 마세요. 충고 필요 없습니다.”
최사헌이 들릴 듯 말 듯 웃음소리를 흘렸다.
“난 유성 씨가 뭘 할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닌데요. 의현이가 저지를 일을 걱정하는 거지.”
“그건 진작에 걱정하셨어야죠.”
힐난하듯 쏘아붙이자 최사헌의 입가에서 미소가 걷혔다.
정말이다. 최의현은 이미 최악의 짓을 저질렀다.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고 최의현이나 어떻게 해요.”
최사헌을 지나쳐 문을 나서고도 분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이래서 이딴 모임에 오기 싫었다. 동생의 부탁만 아니었더라도 근처에도 안 왔다.
발이 닿는 대로 걷다 말고 또 멈춰야 했다.
회장의 가운데에 최의현이 서 있었다.
무언가를 찾듯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자 본능적으로 몸이 뒷걸음질 쳐졌다.
본능을 따라 기둥 뒤편으로 숨고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느라 자꾸 손이 미끄러졌다.
오늘 동생은 최의현과 데이트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최의현이 여기 와 있는 걸까.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빨리, 좀. 입술을 잘근거리는데 비로소 통화가 연결되었다.
“유민아.”
― 왜…….
동생의 대답을 듣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일그러졌다.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백유민, 너 목소리가 왜 그래.”
― 뭐가……. 빨리 용건이나 말해.
“너 또 약 했어?”
― ……아니야.
“백유민.”
― 아니라고. 할 말 없으면 끊을게.
신경질 섞인 대꾸였다. 금방이라도 끊어 버릴 것 같아 추궁도 포기하고 급하게 말을 꺼냈다.
“최의현 여기 와 있어.”
― ……의현 씨가?
되묻는 말끝이 뒤집혔다. 갑자기 일어섰는지 물건이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어디야? 혼자 있어?”
― 지금 거기로 갈게.
“무슨, 지금? 백유민. 잠깐만. 너 상태 괜찮은 거 맞아? 유민아.”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안내음만 이어졌다.
끝이 흐늘흐늘 늘어지던 음성을 떠올리니 골치가 지끈댔다. 약은 아니겠지, 설마.
최의현하고 다시 만나면서 요즘은 잠잠했는데.
초조함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느덧 기둥 뒤를 서성이고 있었다.
유민이가 약에 손을 댄 계기는 나였다. 나 때문이다.
최의현 때문이기도 했다.
“누구랑 통화했어?”
갑자기 머리맡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놀라 올려다보자 최의현의 얼굴이 바로 곁에 있었다.
목덜미의 솜털이 일제히 곤두섰다. 나는 다시 뒷걸음질 쳤다.
“뺨은 왜 그래?”
“네가 왜 여기 있어.”
허겁지겁 물러서는 나를 보고도 최의현은 뻔뻔했다.
“있으면 안 돼? 뺨, 혹시 맞았어?”
“유민이랑 약속 있다며.”
“그랬었지.”
“근데 왜 여기 있냐고. 말 빙빙 돌리지 마.”
“요즘 참 열심히 피해 다니더라.”
최의현이 내게로 한 발 더 다가섰다. 체구 탓에 그것만으로도 위협감이 느껴졌으나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버텼다.
최의현도 껍데기는 최사헌과 비슷한데 속은 썩다 못해 곯았다.
최의현과 백지훈 중 하나와 꼭 자야 한다면 기꺼이 개종자인 사촌을 택할 거다. 혹은 정말 개하고 붙어먹거나.
“네가 나라면 너 같은 새끼 다시 보고 싶겠어?”
그날 일을 떠올리면,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내게 말을 걸 수 있는 신경이 대단했다. 양심이 없든가, 도덕이 없든가.
그도 아니면 내가 정말 인간으로 안 보이든가.
최의현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뭔가 더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최의현이 할 말 따위보다 휴대폰 진동 소리가 훨씬 내 주의를 끌었다.
“유민이 전화야?”
“…….”
“유민이지? 전화 받아.”
진동이 계속 울리는데 최의현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려고도 안 했다.
“일단 우리 얘기부터 해.”
“우리가 얘기할 게 뭐가 있는데. 전화나 받아.”
꿈쩍도 안 하고 나만 쳐다보는 시선이 진저리쳐졌다. 유민이를 그렇게 봤어야지.
내리꽂히는 눈빛이 싫어 자리를 뜨려 들자 곧장 팔이 잡혔다.
익숙한 손길이었다. 악몽 같은 기억 속에서 수백 번 나를 험악하게 움키고 끌어당기던 손이었으니.
머릿속이 진창으로 끌려가는 듯했다. 기억하기도 싫은, 그래서 도리어 진력나게 곱씹어야만 했던 그 밤으로 돌아가는 느낌에 나는 온 힘으로 최의현의 팔을 뿌리쳤다.
“놔.”
그날처럼, 최의현은 뿌리쳐지지 않았다.
버티고 서서 여전히 당기는 팔 힘이 소름 끼쳐 발작처럼 몸이 떨리려고 들었다.
“유성아, 얘기 좀 하자.”
“놔!”
필사적으로 밀어내려 했으나 최의현 역시 지지 않고 나를 붙잡아 두려 했다.
악이라도 쓰고 싶었다. 동시에 이 소란이 이목을 끌까 두려웠다. 유민이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뭐 하는 거야?”
누군가 내 앞으로 나섰다. 아무리 애를 써서 풀어내려 해도 그대로였던 최의현의 손이 단번에 떨어져 나갔다.
나를 도운 이가 최사헌임을 알아차리기까지는 몇 초가 걸렸다.
“얘기.”
최의현은 명백히 적개심이 담긴 두 음절로 간단히 답했다.
“좀 떨어져서 하지. 오해 사기 좋아 보이는데. 백유성 씨, 몸 안 좋아요?”
적의 어린 태도가 익숙한지 최사헌은 내게만 주의를 기울였다.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한 게 고작 10여 분 전이건만 지금은 최사헌의 참견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괜찮습니다. 전 이만, 다른 분들한테 인사라도 드리러 가야 할 것 같네요.”
당장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마음에 없는 말을 주워섬겼다. 이 둘이야말로 여기서 가장 가까이 있기 싫은 사람이었다.
곧 있으면 경매에 앞서 백부의 인사 겸 개회사가 있을 거다. 백부의 수집품과 사진 몇 점이 자선 경매에 부쳐질 예정이었다.
시작 전에 잠시라도 나가 바람을 쐬어야겠다. 바깥 공기 생각만 간절했다.
건물 뒤편으로 빠져나가 습관처럼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고 싶어도 라이터가 없었다.
“불 필요해요?”
등 뒤에서 최사헌이 물었다. 나는 이번에는 놀라지 않고 최사헌을 돌아보았다.
“저 따라다니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길래. 혹시 사람 없는 데서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요.”
“별걸 다 걱정하시네요.”
남이야 쓰러지든 말든. 중얼거리며 최사헌이 내민 라이터를 받아 들었다.
완벽한 인간은 소품도 완벽히 갖춰 다니는지, 라이터조차 근사했다. 지포 라이터의 은색 뚜껑을 열자 길쭉한 불길이 치솟았다.
“원래 그렇게 매사에 날부터 세웁니까. 날 특별히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제가 성격이 나빠서.”
“아하.”
담담한 반응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나마 폐로 빨아들인 담배 연기가 신경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최의현하고는 안 엮일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자꾸 달라붙는 이유가 뭐예요?”
“의현이가 미쳐 있다는 게 누군지 궁금해서, 였죠.”
미쳐 있다.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신경질 섞인 웃음이 가벼운 기침으로 바뀌었다.
목을 가다듬자 씁쓸한 맛만 입 안에 남았다.
문득 울고 싶었다.
“그래서, 궁금증은 잘 해소하셨습니까?”
“아까 유성 씨가 말했잖아요.”
“…….”
“자고 싶냐고.”
지금 생각해도 바보 같은 소리였다. 매캐한 담배 연기 사이로 최사헌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거기서 어렵지 않게 욕망을 읽었다.
그렇구나. 최사헌도 알파구나.
알파라는 사실은 본래 알고 있었다. 최사헌은 드물게도 형질이 아주 강하게 발현된 알파였고, 그럴수록 꼼꼼한 관리를 요해 주변에 말이 돌 수밖에 없다. 이 바닥은 소문이 빠르다.
지금 느낀 건 그런 깨달음이었다. 너도 그냥 그까짓 거구나. 약이 없으면 주기에 맞춰 발정하고, 페로몬에 휩쓸려 다니는.
내가 오메가라는 게 치가 떨리게 싫다.
그렇지만 지금은 좀 신기하게 생각됐다. 최사헌씩이나 되는 인물이 나 같은 놈한테 욕정하다니.
겨우 오메가라는 이유만으로.
그 외에는 최사헌이 내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바닥에 담배를 던져 버리고 최사헌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우리는 가까웠다.
“자고 싶으면 지금 잘 수도 있어요.”
아무렇게나 던진 말에 최사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고작 내 말에 반응하는 게 우스워서 다시 잔기침 같은 웃음이 났다.
“원래 그렇게 함부로 얘기합니까?”
“내가 뭘 함부로 얘기했는데?”
말허리를 잘라먹은 어중간한 반말에도 최사헌은 내 의도를 안다는 듯 잠시 건조한 눈빛만 보냈다. 손톱에 사소하게 긁힌 듯 귀여워하는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얘기하냐고 물은 겁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나랑 자고 싶지도 않으면서.”
놀랐다. 바로 속을 들킨 것도 그렇지만, 최사헌이 내 기분을 신경 쓴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쪽이랑 안 자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어요?”
최사헌이라면 누구나 나랑 자고 싶어 한다는 자신만만한 착각에 빠져 있더라도 이해가 간다.
실제로 마주치는 사람 중 열에 아홉은 최사헌과 잘 수 있다고 하면 흔들릴 거다.
나도 조금은 궁금하다.
과연 이 무쇠처럼 차가워 보이는 남자는 달아오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내가 의현이 사촌이라 싫은 겁니까.”
“제 사촌도 아닌데요, 뭘.”
진짜 사촌 주제에 나한테 헐떡대는 개새끼도 있는 판국에, 뭐.
“그보다는 그냥 알파가 싫어요.”
“…….”
“특히 당신처럼 잘난 알파는 보기만 해도 짜증 나요.”
대놓고 욕했는데도 최사헌은 이번에도 담담했다.
“형질 보유자를 꺼리는 사람들도 있죠.”
“주기적으로 눈 뒤집히는 놈들인데 아무렴요.”
“그래도 선호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아는데요.”
일반적으로는 그랬다. 알파나 오메가라는 걸 알리는 것만으로 섹스어필이 된다.
완전한 베타가 거의 없다는 말은, 둔한 정도가 다르다 뿐이지 대부분이 페로몬은 감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최사헌만큼 특성이 뚜렷한 알파라면 어지간히 둔감한 사람도 알파 페로몬을 느낄 수 있다.
지금 내가 최사헌한테서 시더우드와 사향의 냄새를 맡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꼬시면 다 넘어갔나 봐요.”
다른 알파가 이랬으면 화가 치밀었을 텐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쥐고 있던 지포 라이터 뚜껑을 여닫으며 손장난을 쳤다.
길쭉한 불길이 사라졌다가 다시 드러나 혀를 날름거린다.
최사헌이 마음만 먹었다면 당장에라도 나를 제 발치에 쓰러지게 할 수도 있었을 거다. 오직 페로몬 때문에 아랫배부터 불이 붙은 듯 뜨거워지는 감각을 알고 있다.
왜 나한테 이러지.
사촌 동생이 따라다니는 오메가가 궁금한 걸까. 최사헌이 오메가한테만 욕정하는 취향일지라도 주변에 오메가가 궁하진 않을 텐데.
금욕적인 얼굴하고는 달리 궁금하면 일단 건드려 보는 타입인가. 하룻밤 정도는 별것도 아니니까.
“그냥 나도 넘어갈까.”
소리 내 중얼거리자 최사헌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비록 이제는 까마득해진 첫사랑이지만 최사헌의 이름만 들어도 손끝이 뜨거워지던 기억이 남아 있다.
최사헌하고 잔 걸 알면 최의현도 포기할지 모른다. 이런저런 계산이 머릿속을 오갔다.
사실 내게는 손해 볼 게 없는 섹스였다.
탕, 지포 라이터가 닫혔다. 나는 나무가 드리운 그늘에 숨어서 곁의 남자를 마주 보았다. 혀로 입술을 핥자 담배의 쓴맛이 났다.
“최사헌 씨, 오늘 나하고…….”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난다.
담배 냄새가 아니었다.
거리에서 굉음이 들렸다. 무언가 깨지고 터지는 소리.
그 순간에, 이상하게도 어떤 예감이 들었다.
뒷덜미에 차갑고 축축한 시체의 손이 닿는 듯했다. 내 삶이 아래로 굴러떨어질 때마다 등을 떠밀던 선뜩한 손길이었다.
정말 누가 밀기라도 한 듯 나는 소리가 난 곳을 따라 도로로 향했다. 가로수를 들이받아 뒤집힌 채 박살 난 차가 보였다.
차종이 낯익었다.
“음주 운전인가?”
멀리서 수군거림이 들렸다.
어지간한 난폭운전이었는지 깨진 기물들이 주변에 널려 있었고 차체에도 파손의 흔적이 여럿 있었다.
꼭 취해서 차를 몰기라도 한 것같이…….
온몸이 무거웠다. 발을 떼면서 나는 세 배의 중력을 느꼈다.
세상이 온통 느리게 보였다. 바깥의 소란이 귓가로 몰려들다가 금세 사라졌다.
소음이 들끓다가 갑자기 모든 소리가 차단되었다.
사고가 난 차 가까이 가자 번호판이 눈에 들어왔다. 네 자리 숫자는 착각의 여지없이 익숙했다.
“유민아.”
왜 이름을 불렀는지 모르겠다.
꼭 부르면 대답이 돌아올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진 소리와 달리 기름과 연기 냄새는 갈수록 짙어졌다.
납작하게 눌린 운전석으로 허우적거리며 걸었다. 정말 거기 있는 게 동생이라면 꺼내야 할 것 아닌가.
아닐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착각일 수도. 그냥 모든 게 다.
“떨어져요. 위험하게 뭐 하는 겁니까.”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삽시간에 몸이 뒤로 당겨지며 차가 멀어졌다.
아스팔트 바닥으로 흘러나오는 피를 본 것 같았다.
온몸이 떨렸다.
시야가 뒤집히더니 최사헌이 보였다. 나를 내려다보는, 최사헌의, 굳은 얼굴.
“유민이가…….”
더 말을 이어 갈 수조차 없었다. 분명 숨을 들이마셨는데 산소가 부족해서 눈앞이 돌았다.
양팔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뭘 잡으려는지도 모르고 팔을 뻗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붙잡듯 나는 최사헌을 끌어안았다.
내가 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데 최사헌의 심장 소리만이 울렸다. 그것만 들렸다.
그 후는 기억나지 않는다.
* * *
최사헌을 처음 본 건 어느 오찬 모임에서다.
당시 나는 갓 열여섯이었고, 그는 스물두 살이었다.
비록 객식구로 살았다 해도 10여 년을 해신에 몸담았다. 나도 얼추 그네들이 하는 대로 흉내는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겨우 흉내만이었다. 본질이 달랐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있는 행사라도 갈라치면 흠 잡힐 행동을 하지 않으려 애를 쓰던 무렵이었다. 너무 노력한 나머지 다녀오면 꼭 열병을 앓을 정도였다.
내 동생은 달랐다. 유민이는 하고 싶은 대로 떠들고 움직였다.
유민이가 널따란 정원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조마조마하게 가슴을 졸였다.
저러다 넘어지면 어쩌지, 다치면 어쩌지, 그래서 내가 너를 다치게 한 책임을 몽땅 뒤집어쓰게 되면 어쩌지.
‘유민아, 천천히 다녀.’
그러면서 뛰지 말라고 동생을 말리지도 못했다. 주제넘게 동생을 막아선다고 혼이 날까 봐 겁났다.
‘그만 뛰어. 넘어지겠다.’
한데 최사헌은 얼마나 자연스럽고도 간단하게 유민이의 뜀박질을 막아 냈는지.
‘감사합니다.’
눈도 맞추지 못하고 겨우 인사만 했다. 최사헌은 너무 완벽해서, 그때 내가 되고 싶었던 모든 것과 갖고 싶은 것들을 한데 합쳐 놓은 것처럼 보였다.
‘끈이 풀어졌네.’
인사를 받고도 그는 내 앞에 머물렀다. 구두끈이 풀린 사실을 알자 나는 허둥지둥 허리를 굽히려 했다.
그처럼 사소한 실수에도 겁이 나던 때였다. 손톱만 한 흠도 잡혀서는 안 됐다.
‘내가 묶어 줄게.’
최사헌은 몹시 자연스럽게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 구두끈을 고쳐 매 주었다.
‘뭐라도 마실래?’
구부러지고 묶여서 꽉 당겨지는 끈이 꼭 내 마음인 것 같았다.
‘아까부터 계속 서 있기만 하길래.’
최사헌의 친절에 귀가 달아올랐다. 내 노력은 모두 티가 난 게 틀림없었다.
기진할 정도로 애를 쓰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으리라. 초라하고 촌스러워 보였을 거다.
‘이름이 뭐였지?’
쉽사리 입도 떼지 못하는 나를 배려한 듯 최사헌은 다른 질문을 했다. 숨어 버리고 싶기도 했고, 최사헌이 부르는 내 이름을 듣고 싶기도 했다.
와앙. 뒤에서 울음소리가 터지면서 고민도 끝났다.
‘백유민!’
다음에 내가 부른 건 유민이의 이름이었다. 나는 곧장 유민이가 울고 있을 곳으로 뛰어가야 했다.
‘유민이 좀 챙기지 그랬니.’
주스로 젖은 유민이의 가슴팍을 손수건으로 훔쳐 내며 어머니는 나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결코 언성을 높이는 일 없는 어머니의 질책은 그래서 더 매섭게 느껴졌다.
‘형, 화났어?’
옷을 갈아입히러 데려간 욕실에서 유민이가 조심히 물었다. 대답할 힘도 없어 나는 고개만 저었다.
‘화내지 마. 난 형 좋아.’
갑자기 나를 끌어안으며 유민이는 비밀이라도 말하듯 소곤거렸었다.
‘엄마, 아빠랑 다르게 형은 나랑 맨날 놀아 주구, 좋아.’
유민이에게선 달짝지근한 과일 주스 냄새가 났다. 햇볕과 풀잎, 그 자유의 냄새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이의 냄새.
그 애가 자그마한 손으로 나를 붙잡으면, 나는 이 애가 태어나면서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 다 잊어버렸다.
이 거대한 저택도, 내 매정한 아버지의 재산도, 다른 모든 이들의 사랑과 인정도, 그래. 다 가지라지. 너는 하나뿐인 내 동생이니까.
‘나도 유민이 너 좋아.’
어차피 내 것도 아닌 것들. 너를 미워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게 더 쉽다.
내게는 달리 좋아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동생의 따뜻하고 연한 몸을 끌어안으면 나도 사랑이란 게 뭔지 아는 사람 같았다. 비로소 사람 같았다.
* * *
장례식은 빠르게 치러졌다.
약물에 취해 낸 사고라는 얘기가 돌았다. 유민이의 자취방은 물건이 어지럽게 흩어져 엉망이었고, 책상에는 미처 치우지 않은 각성제가 있었다.
해신의 입장에선 백유민의 죽음은 그 자체로 추문이었다. 아버지는 장례식보다 차 사고를 조용히 묻는 데 더 힘을 썼다.
어머니는 시체를 연상케 하는 안색으로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없을 때는 줄곧 가면 같은 무표정이었다.
나는 울지도 못했다. 부모님도 묵묵히 장례를 치르는데 고작 반쪽 형제인 내가 우는 건 허락되지 않는다.
상복을 입고서 그저 죽은 듯이 시간을 보냈다. 쥐 떼가 머릿속을 쏠아 대어 머리가 텅 비어 버린 듯했다.
그 애는 겨우 스물하나였다.
어리고 여려서 매사 걱정시켰던 내 어린 동생이었다. 그 애의 숨결이 사라진 대기는 무겁고 찼다.
장례식장에 최의현이 왔다.
새카만 정장을 입고서 한동안 장례식장에 머무르던 최의현은 나를 주차장으로 불러냈다.
평소였다면 쳐다도 안 봤겠지만, 유민이에 관한 얘기를 할까 싶어서 갔다.
그래도 최의현은 유민이의 약혼자였다.
사과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유민이 전화를 끝내 받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유민이를 내버려 두고 거기 나타나서, 그 애가 또 약을 먹도록 내버려 두어서, 취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그 말이 듣고 싶어서 갔다. 유민이 대신 사과라도 받고 싶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몰랐건만 주차장에는 노을이 깔렸고 바람은 서늘했다.
최의현은 내 앞에 서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최악의 방법으로 내 기대를 비웃었다.
“결혼하자.”
뒤통수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머리가 깨진대도 이보다 뼈아팠을까.
“방금 뭐라고, 했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혀가 굳어서 뻣뻣했다.
“알잖아. 집안끼리 이미 해 둔 얘기도 있겠다, 너희 부모님도 원하실 거야.”
“뭘…… 원한다고? 너 지금, 제정신, 이야?”
식식대는 숨이 목구멍을 빠져나왔다. 최의현의 뒤로 노을빛이 적색 신호처럼 깜빡댔다.
“내가 본 건 처음부터 너였어.”
차라리 귀를 막고 싶었지만 전부 또렷하게 들렸다.
유민이 장례식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감히 그딴 소리를.
“너 진짜, 인간이 아니구나…….”
생각보다도 말이 먼저 흘러나왔다. 입술이 떨렸다.
“네가 이러고도 사람 새끼야? 나는, 난, 걔 형이야. 유민이는 내 동생이야. 그런데 뭐? 네가, 네가 나랑 뭘 해?”
시작하자 멈출 수가 없었다. 분기가 온몸을 채우고 혈관을 들끓게 했다.
“시기가 안 좋다는 건 알아. 나도 기다리려고 했어.”
“그래? 이게 기다리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해? 네가 유민이를,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하면 이럴 수는 없는 거잖아.”
“너 때문에 이러는 거야.”
“나 때문이라고?”
최의현이 내 양어깨를 와락 붙들었다. 온몸이 통째로 흔들렸다. 시야가 잘게 조각나 사방으로 튀었다.
“네가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구니까!”
난폭하게 내 어깨를 쥔 최의현의 손가락이 그대로 뼈를 부술 것만 같았다. 차라리 그러면 좋겠다.
나를 망치고 부수고 으깨 버렸으면.
“이대로 두면 무슨 일이라도 낼까 무서워서 도저히 가만 못 두겠다. 불안해서 당장 붙잡아 두기라도 해야겠어, 난.”
관에 눕는 건 유민이가 아니라 나였어야 했다.
내가 불타야 마땅했다.
“유성아, 제발 나 좀 봐 줘.”
“…….”
“내 마음, 너도 알고 있었잖아.”
최의현이 숨을 몰아쉬며 성토했다. 나는 멍하니 최의현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
내가 알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아직도 그날의 꿈을 꾸다 소스라치며 일어나곤 한다.
러트라는 핑계로 짐승처럼 헐떡이며 나를 만졌을 때의 최의현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던 나를.
문틈으로 우리를 발견한 유민이의 표정이 어땠는지를.
그 애가 그날 이후로 어떻게 망가졌는지.
다 기억하고 있다.
“결혼이라고. 너랑, 결혼.”
나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너하고 내가 유민이를 망가뜨렸는데. 유민이가 왜 죽었는데.
“넌 하겠다고만 하면 돼.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최의현의 잘난 면상에서 희망이 빛나는 꼴이라니.
눈자위에 고여 있던 눈물이 끝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비참해서도 아니었다.
애틋한 애정과 염원으로 환해진 최의현의 낯빛을 보면서 나는 오로지 하나만 생각했다.
죽여 버리겠다.
동생의 장례가 치러지는 저녁이었다. 낙조가 우리 둘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나는 너 없으면 안 돼.”
열렬한 고백을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비리고 쓴 침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장을 부식시켰다.
태양이 저 멀리서 익사한다. 밤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입 안의 살을 씹고 또 씹으며 핏물을 삼켰다.
이 남자를 죽여야겠다.
* * *
“얘기 좀 하자.”
유민이의 장례가 끝나고 어머니가 내게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내가 자란 집에 가 보기는 오랜만이었다. 이제는 어린 시절과 눈높이가 한참 달라졌는데도 저택은 여전히 크게만 보였다.
응접실 벽에는 새카만 색을 몇 번이고 겹쳐 바른 그림이 걸려 있었다. 어머니가 앉은 소파 뒤로 펼쳐진 거대한 흑색 캔버스가 흡사 장막 같았다.
테이블에 놓인 차가 식어 갔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낡고 먼지 쌓인 침묵만이 자리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죄송해요.”
적막 속에서 내가 먼저 입을 뗐다. 사죄를 듣고도 어머니는 그저 무덤덤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거니.”
유민이를 보살피지 않은 것, 그 애가 뛰다가 넘어지도록 내버려 둔 것, 심지어 내가 그 애의 등을 떠민 꼴이 된 것, 사죄할 목록은 길고 길었으나 하나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 집 사람들하고도 얘기하고 오는 길이야. 다행히 약혼식은 아직 안 치렀고, 구두로 오간 약속이었으니 깨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일이지.”
따로 발표는 없었더라도 주변에서는 유민이와 최의현이 무슨 사이인지 다 알았다. 그런데 고작 조화나 보내고 이런 식으로 흐지부지하겠다니.
속이 꼬였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경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차라리 그들이 이 약혼을 얼룩처럼 지워 내기로 했다는 결정이 마지막이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모든 나쁜 일 뒤에는 항상 더 나쁜 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말인데, 상대를 너로 바꿨으면 어떨까 하더라.”
어머니의 뒤에 펼쳐진 검은 색채가 더욱 짙어 보였다. 질린 낯빛을 들킬까 봐 고개 숙여 식어 빠진 차를 삼켰다.
“제가…… 최의, 현하고 결혼했으면 하세요?”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꺼림칙해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최악의 일들이 죄다 몰아닥치고 있다.
“네 조건에 더 좋은 집안이나 상대를 찾긴 어렵겠지. 그쪽 집에서도 처음에는 마다했었다. 그렇겠지. 죽은 약혼자 형이라니, 그게 말이 되니? 그 집이야 너 아니라도 아쉬울 게 없고.”
설명을 이어 가는 어머니는 남의 얘기를 하듯 초연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아이를 앞서 보냈다. 실성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어머니는 너무나도 잠잠했다.
건조하기 짝이 없는 겉모습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닥친 일을 해치워 버리려는 의무감만 읽혔다.
“그런데 의현이가 너하고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더라.”
조용한 눈초리는 말보다 더한 힐난을 담고 있었다.
아니에요, 저는. 고개를 젓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최의현 따위와 닿고 싶었던 적조차 없다. 유민이를 진심으로 아꼈노라고 호소하고 싶었다.
나도 그 애를 사랑했다고.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어차피 어머니는 듣지도, 믿지도 않을 테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쩌겠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가 저 한마디에 모두 담겨 있다.
잡을 것도 없으면서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양 몸이 앞으로 쏠렸다. 무릎만을 부서져라 움켜쥐며 나는 안간힘을 다해 호소했다.
“유민이 약혼자예요. 이제 막 장례 치렀는데, 더군다나 사십구재도 아직 안 지났어요.”
내 호소를 들은 어머니가 갸웃하게 목을 뺐다. 몇 올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새하얀 이마에서 흔들렸다.
“별수 있니?”
굳어 있던 어머니의 입술이 비틀어져 올라갔다. 미소랄 수도 없는 괴괴한 표정이 어머니의 단정한 얼굴을 헝클어 놓았다.
“너나 나나.”
시원하게 뻗은 눈매에 얼핏 물기가 배었다. 푸르게 보일 정도로 새하얗던 흰자위에 실핏줄이 두드러져 있었다.
내가 처음 이 집에 발을 들였던 날의 어머니는 지금보다 앳되었다.
세 번째인가 네 번째 유산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부모님의 권유대로 나를 데려오기로 했다고 들었다. 마지막 유산 이후 불임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나를 아무 감정 없이 대했다. 속이야 몰라도 겉으로는 그랬다.
넓은 집에 적응을 못 한 내가 층계참 아래 숨어서 울고 있던 밤, 나를 발견하고서 어머니는 한참을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며.’
혼잣말처럼 속삭이고서, 어머니는 내 손을 잠시 잡아 주었다. 아주 잠깐.
어머니의 손은 부드럽고 미지근했다.
‘그래, 너나 나나 어쩔 수 없지.’
그 체념 어린 중얼거림이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슬픔조차 포기해 버린 자의 태도.
“약혼은 됐고, 결혼식 날부터 맞춰 보자.”
그런 사람을 앞에 두고 감히 싫다고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입이 사라진 사람처럼 고개만 떨어뜨리고 있었다.
목에 올무가 걸린 듯했다. 새끼줄이 서서히 목덜미를 조여들었다.
벽을 뒤덮은 캔버스에서 그림자가 쏟아져 아래로 길게 흘러내렸다.
* * *
온통 어둠이다.
암막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제외하고 거실은 그늘에 덮여 있다.
며칠을 오피스텔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불조차 켜지 않은 집 안에서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헤아리기 어려웠다. 바닥 아무 데나 쓰러져 숨만 쉬었다.
이대로 내가 없어지면 좋겠다.
그러나 다 닫히지 않은 커튼 틈에서 무심히 해는 떠올랐다.
삑삑, 바깥에서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적막뿐이던 공간에 오랜만의 변화였다. 나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가 들어올지 예상한 탓이다.
현관문이 열리면서 기름한 인영이 현관 안으로 발을 디뎠다. 낙낙한 후드티에 샛노란 스니커즈가 음침한 공간에 갑작스러운 생기를 불어넣었다.
소년처럼 짧게 친 머리카락 아래로 둥그런 눈이 깜빡인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나이를 유추하기 어렵게 예쁘장했다.
어둑한 집 안과 내 몰골을 찬찬히 훑어보던 여미림이 방글방글 웃으며 거실에 불을 밝혔다.
“눈 나빠지겠다. 아무것도 안 먹었어?”
장례식 이후 처음 보면서도 미림은 어제 만난 사이처럼 굴었다.
여미림은 유일하게 내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였다. 10년이 넘게 내 고약한 성미를 견뎌 준 사람이기도 했다.
“왜 왔어.”
“걱정되니까 왔지.”
“바쁘잖아, 너.”
“우리 사이에 섭섭한 얘기 할래? 죽이나 먹어. 비싼 거야. 무려 완도산 활전복을 청와대 조리사 출신 주방장이 손수 손질해서 만든 거지.”
활기차게 떠들며 미림이 포장된 음식들을 꺼내 놓았다.
힘이 없을 때는 일단 맛있는 걸 먹으면 된다는 게 미림의 신조였다. 삶을 향한 여미림의 낙천성이 항상 좋았다.
예전이었더라면 늘어져 있다가도 미림의 권유대로 죽을 한 술씩 비웠을 거다. 그러다 기운을 차렸을 수도 있다.
지금은 죽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구역질이 올라왔다. 텅 빈 위장이 불쾌하게 요동쳤다.
“괜찮아?”
미림이 황급하게 달려와 내 어깨를 감쌌다. 어깨를 부술 듯 움켜쥐던 최의현의 손아귀가 떠올라 속이 뒤집혔다.
입을 틀어막고서 겨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차피 게워 낼 것도 없었다. 뒷덜미에 땀이 뱄다.
“나 최의현하고 결혼 못 해.”
쉬어 있는 목소리는 내 것인데도 생경하게 들렸다. 연신 내 등을 어루만지던 미림이 굳었다.
“알았어. 말만 해. 이 누나가 뭘 도와줄까. 새 신분과 스위스에 차명 계좌 개설?”
미림이 애써 밝게 말했다. 여미림의 안간힘을 쓴 농담에도 나는 웃지 않았다.
“진심이야. 정 하기 싫으면 해외로 빼돌려서라도 막아 줄게.”
이제는 짐짓 진지한 말투로 나를 달랜다.
국경이라도 넘지 않는 이상 최의현이 이 결혼을 포기할 리 없다. 갖고 싶으면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정신 나간 재벌가 도련님이니까.
“도망갈 생각 없어.”
게다가 나도 숨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해 봤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최의현을 죽일 수 있을까.
밤마다, 아니 매 순간 잠도 들지 못한 채로 미친 사람처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결혼을 피할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차라리 해 버릴까.
옆에 있으면 기회는 어떻게든 올 터였다. 마실 물에 약이라도 탈까. 단둘이 있을 때 찔러 죽여 버릴까. 삼류 스릴러 영화 같은 핏빛 상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쉽다.
최의현이 가진 것들을 빼앗고 비참하게 나뒹굴도록 하고 싶었다. 그래야 공평하다.
더군다나 실패하기라도 하면.
같이 죽거나 갇히는 것 정도는 무섭지 않다. 하지만 찌르거나 목을 조르는 일차원적인 방법으로는, 단번에 죽이지 못하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다.
매일 새벽 새파랗게 번지는 여명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나는 담금질당하는 칼처럼 광기를 벼렸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더 나은 복수가 필요하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데, 떠오른 이름은 하나였다.
“최사헌에 대해서 알아봐 줘.”
최사헌의 이름을 듣자 미림이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알 수 있는 거면 뭐든 다.”
몇 번 입을 벙긋거리던 미림이 나를 살폈다.
“유성아, 너 지금 아파. 쉬어야 돼.”
거울을 볼 필요도 없이 지금 내 꼴이 상상 간다. 물만 마시면서 잠조차 제대로 안 잤으니 이게 사람 꼴인가 싶겠지.
“최의현이 언제 결혼하자고 했는지 알아? 6개월 후야.”
미림의 말대로 난 아팠다. 이마에서 며칠째 열이 내리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라고는 없는데 여전히 최의현이 한 말을 떠올리면 심장 주변이 부글거렸다. 혈관에서 기포가 터졌다.
“처음엔 당장 석 달 뒤도 좋다고 했어. 양가 부모님이 안 말렸으면 그대로 밀어붙였을걸. 제정신이 아니지? 그 새끼는 유민이 생각은 하지도 않아. 애도조차 안 했어.”
과연 제정신이 아닌 게 누구일까. 나는 신열에 사로잡혀 마구 떠들었다. 말이 점점 빨라졌다.
동생의 유골에 아직도 화장터의 열기가 남아 있을 것만 같은데, 그 약혼자였던 자식은 죽은 약혼자의 형과 결혼할 생각에 들떠 있다. 자기 사랑에만 푹 빠져서.
장례식장에서 사과하리라던 기대가 우스울 지경이었다.
“그 새끼하고 결혼하느니 죽는 게 나아.”
내가 지금 살아 있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최의현이었다. 죽여 버리겠다. 그러지 못하면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죽는다는 말 하지 마.”
미림이 덜컥 나를 부둥켜안았다.
나보다 한참 작은 주제에 미림은 자주 나를 안으려 들었다. 조그마한 품에 고개를 묻고서 나는 터진 입술을 이로 뜯었다.
“그러지 마, 백유성.”
때마침 귀를 맴도는 미림의 만류는 중의적으로 들렸다.
그러나 나는 기어이 피를 보고 만다. 딱지가 떨어져 나간 입술에서 핏방울이 넘쳤다.
“제발 도와줘.”
여미림의 어깨 밑으로 고개를 감춰 버리고서는 열심히도 빌었다. 누구한테 비는지도 모르면서 간절히. 그렇게도 절실히.
* * *
약병을 뒤집었다. 동그란 알약들이 손바닥으로 쏟아졌다.
병에 붙은 종이에는 약품 이름이 길게 쓰여 있었다. 소위 말하는 오메가용 억제제다.
발현한 이후로 나는 억제제를 강박적으로 챙겼다. 어딜 가든 늘 들고 다녔고, 주기 체크를 빼먹은 적도 없다.
알약들을 손아귀에서 굴리다 싱크대에 떨어뜨리자 알약들 표면이 물기에 녹아 뭉개졌다.
병째로 약을 쏟아붓고 수도를 틀었다.
쏴아아.
물소리와 함께 알약들이 덩어리져 뭉친다.
병에는 약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단 하나도.
녹아 가는 알약을 보고 있는데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어 댔다. 쌓인 부재중전화와 메시지의 대부분은 최의현이 남긴 거다.
확인하지도 않고 휴대폰 전원을 껐다. 물이 쏟아지는 싱크대 안에 휴대폰을 넣자 매끄러운 액정을 타고 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한참 후에야 나는 수도를 잠갔다.
걷고 있던 소매를 다시 펴고 단추를 끼운다. 셔츠 깃을 가다듬고, 현관에 붙은 거울을 통해 내 모습을 확인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그럭저럭 볼만한 정도는 된 것 같다. 나는 거울을 향해서 웃어 보였다.
감춘 속내와 달리 미소는 유순했다. 공들여 고른 흰 셔츠는 단정한 인상을 만들었다. 어젯밤 다듬은 갈색 머리카락이 보기 좋다.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라고요.’
그의 말을 순진하게 믿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날 나를 보는 눈에 떠올라 있던 욕망은 믿었다.
일부러 구두끈을 더 세게 동여맸다.
최사헌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 * *
외출도, 운전도 오랜만이라 계획보다 헤맸다.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
보통 비즈니스에 있어서 시간은 금이지만, 이 만남은 반대였다. 시간을 오래 끌수록 유리하다.
비서의 안내를 따라서 사무실로 들어서며 데스크에 놓인 시계를 확인했다. 초침의 움직임이 유독 묵직하게 느껴졌다.
“먼저 연락할 줄은 몰랐습니다.”
블라인드가 쳐진 창가에 서서 최사헌이 인사를 건넸다. 눈물 나게 반가웠다.
대뜸 연락을 넣었을 때는 안 만나 주면 우연을 가장해 앞에서 엎어지기라도 하겠다는 마음이었는데, 최사헌은 뜻밖에 나와의 만남을 곧장 수락했다.
“기다리고 있었으면 먼저 연락 주셨을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최사헌은 대답하지 않고 고갯짓으로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커피 들겠어요?”
“됐습니다.”
손을 저어 사양하고 나서, 소파에 앉는 대신 사무실 안을 느린 걸음으로 돌았다.
사무실만 봐도 성미가 보였다. 흑백 단색으로 밀어 버린 통일성은 그렇다 치더라도, 책상에 잡다한 필기구 하나 굴러다니지 않았다.
모든 것이 엄격한 통제하에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최사헌 씨,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상무이사 최사헌>
책상까지 걸어가 명패를 손톱으로 톡톡, 두드려도 최사헌은 나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탄탄대로만 걸은 것도 아니던데. 어릴 땐 쫓겨나다시피 외국행, 귀국하고 나서는 되다 만 회사나 떠맡았고.”
일부러 거슬리라고 한 소리에도 기분 나쁜 내색이 없다. 내 의도가 파악되기 전에는 입을 열지 않을 듯했다.
이제는 이런 유의 과묵함이 타고난 게 아니라 나름대로 바닥을 구르면서 갈고닦은 신중함임을 알겠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최사헌의 이력은 내가 보기에도 감탄이 나왔다.
어린 시절부터 마냥 떠받들어지면서 살았을 줄 알았더니 그렇지만도 않았다.
구태여 주변에서 떠들지 않는 최사헌의 옛날 일 중에는, 현재 그의 외양만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구질구질한 것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사실 그의 아버지는 집에서 내쫓긴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는 어머니와 해외를 돌면서 자랐다는 사실이 그랬다.
외가의 배경도 만만찮았으니 최사헌을 뺏기지는 않았던 모양이나 모친이 병사한 후에는 친조부의 밑으로 돌아갔다. 당시 최사헌은 20대였다.
이후 그의 아버지가 고개를 조아려 가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 곁에는 새어머니라고 부를 사람이 함께 있었다. 복잡한 가계였다.
부인에 애까지 팽개치고 떠나서는, 끝까지 이혼해 주지 않았던 본처가 죽고 나서야 집에 돌아온 이가 최사헌의 아버지라니. 저 금욕적이고 책임감이 강해 보이는 남자와는 사뭇 달라 보인다.
한 지붕 아래 모이고도 사이좋은 부자는 아니었는지 최사헌은 학업을 마친다는 이유로 다시 한국을 떴다.
돌아온 최사헌에게 할아버지가 선심 쓰듯 떠맡긴 사업은 다 죽어 가는 필름 제조업이었다. 하고 많은 계열사 중 오래전에 사양길에 접어든 사업을 맡고서도 최사헌은 돌파구를 찾아냈다.
제조 기술을 이용해 고전압 배터리 신소재 제조에 성공해 흑자를 냈고, 그 후로는 지금껏 승승장구였다. 죽어 가던 계열사가 최사헌의 손을 타면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변했다.
버틸 때와 놓아야 할 때를 알아차리는 감각은 가히 동물적이고, 베팅하는 배짱이며 인내심을 타고난 승부사다, 라고 외부 문서에 줄줄이 쓰인 칭찬을 읽었다.
‘뒷배가 없었더라도 일 쳤을 놈’이라고 그의 조부가 자랑스레 떠들고 다니는 심경이 이해가 갔다.
집안의 문젯거리인 아버지와 싸잡혀 없는 인간으로 취급당하다 명실공히 후계자로 급부상하다니. 드라마틱하지 않나.
최의현이 열등감을 느끼는 이유도 알 만했다.
“계륵만 떠안은 게 한두 번도 아니던데 본인 힘으로 여기까지 끌고 왔죠. 진심으로 대단한 실력이라고 생각해요.”
“내 칭찬을 해 주러 온 겁니까?”
최사헌이 드디어 입을 뗐다. 빨리 본론으로나 들어가라는 뜻이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서른셋 맞죠? 그렇게 급한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어른들 심정은 역시 다르신가. 집에서 압박이 심하다면서요. 작년에 결국 결혼 직전까지도 갔었다던데.”
중세 군주들을 흉내 내듯 집안 간의 결탁으로 세를 불려 나가는 시대착오적 자본가들 사이에서는, 미혼의 결혼 사정이란 늘 흥미로운 가십거리였다.
최사헌이 결혼을 앞뒀다는 소리는 변두리에서 지내는 내 귀에까지 들렸다. 깔끔한 파국 역시 일파만파 소문이 퍼졌다.
“결혼이 성사되지 않은 이유는 최사헌 씨 측에서 내민 혼전 계약서 때문이었죠?”
그러나 왜 최사헌의 결혼이 어그러졌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사를 열심히 했네요. 더 해 봐요. 노력했는데, 그 성의를 봐서라도 끝까지 들어 줘야지.”
본인의 치부랄 수도 있을 얘기를 꺼냈는데 이번에도 최사헌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본래 그의 자리인 책상 근처에 선 나를 창가에서 손님처럼 지켜보기만 했다.
“첫 아이를 낳으면 양육권은 무조건 포기, 출산 전에는 이혼 금지, 좀 징그러운 조항들이 많던데요.”
“손이 귀한 집안이라서요.”
그것만일 리 없다. 급 차이가 심하다면 모를까, 상대도 어느 정도 한다 하는 집 자식이었다.
그러니 노발대발하며 결혼 직전에 판을 엎었겠지.
다 알면서 독단으로 계약서를 내민 게 틀림없다.
왜 그랬을까. 여미림도 거기까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속내야 본인만 알겠지. 나는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는 최사헌을 보았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유가 뭐였든.
“나랑 결혼해요.”
밑도 끝도 없는 내 청혼에 최사헌의 눈썹이 까딱 움직였다. 그 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대로였다.
어디 더 해 보라는 식이다. 물론 내게는 얼마든지 계속할 용의가 있다.
“최의현만 아니면 돼요. 근데, 이 상황에 아무나 붙잡고 결혼한다고 하면 그 새끼가 가만히 있을 리 없잖아요. 그럼 적어도 최의현이 못 건드릴 만한 사람이어야겠죠.”
중간부터 말을 쥐어 짜냈다. 숨이 조금씩 벅찼다.
최의현이 감히 이를 드러내지 못할 상대가 누가 있을까. 누굴 내 옆에 세워야 그 새끼 기분이 제일 좆같을까.
최사헌은 여러모로 완벽한 상대였다.
손위 사촌에 집안 어르신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유망주 아닌가. 더불어 최의현이 유일하게 열등감을 드러내는 상대이기도 했다.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긴 해요?”
물정 모르는 애라도 다루듯 최사헌은 무심히 선을 그었다. 울림이 깊은 목소리만 아니었더라면 무례하게 들렸을 것이다.
“최사헌 씨랑 결혼하고 싶다고 했는데요.”
“식 날짜 언제로 잡을지 얘기 오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의현이가 아주 의욕적이라던데요, 지난번하고 다르게.”
최의현이 이 결혼에 미친개처럼 달려들고 있다는 얘기가 어떤 식으로 퍼지고 있을지 생각하자 속이 울렁거렸다.
솔직히 최사헌이 미치지 않은 이상 내 청혼을 받아들일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절박했다. 시간이라도 끌 수 있으면 된다.
점차 호흡이 빨라진다. 무릎 아래에서부터 힘이 빠졌다. 비틀거리는 나를 최사헌이 붙잡았다.
“어디 아픕니까?”
백부의 전시회장에서 만난 후부터 지금껏 최사헌한테 이 비슷한 질문만 몇 번을 듣는지. 남 걱정도 참 부지런히 해 준다 싶다.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이 빠져나왔다. 어지럼증이 심해져 최사헌이 지탱해 주지 않았더라면 꼴사납게 바닥에 엎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소파에 앉히고 이마를 짚어 보려 허리를 굽히던 최사헌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내 살갗을 떠돌고 있을 단내를 맡자마자 훅 상체를 물리는 모습이 불에 데기라도 한 것 같았다.
“히트예요?”
히트 사이클은 오메가의, 이를테면 발정기였다.
일정한 주기로 찾아와 번식을 강요하고 신체를 통제 불능으로 만드는 정신 나간 시기다.
그래도 보통은 약으로 조절할 수 있었다. 처방받은 대로 제때 복용만 한다면.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판단을 내렸는지, 최사헌은 골치 아프다는 듯 내게서 물러섰다.
“억제제는.”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 수중에도, 집에도, 처방받아 둔 건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버렸다.
이미 그제부터 전조가 있었다. 오늘 아침 늘어지는 몸을 끌고 침대에서 기어 나오면서 상태가 나빠지리라고 예상했다.
아니, 기대했다.
오늘 최사헌의 앞에서 이런 꼴이 되기를 고대했다.
“먹긴 했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최사헌이 몸을 일으키며 한숨을 터뜨렸다.
“일부러 이런 거야?”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바라보자 최사헌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랄 만한 게 드러났다.
화가 나면 저런 얼굴이 되는구나. 대단한 거라도 알아낸 듯 흡족했다.
“기가 막히는군. 뭐 하는 수작이에요?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 정도로 대책 없는 사람은 아닐 줄 알았는데. 일어나요. 병원 데려다줄 테니까. 그것도 아니면 호텔 방에 처박아 놓든지.”
이렇게 빠르게 말하기도 하네. 말수가 적다는 인상이었는데.
말이 많아져도 한마디씩 귀에 명확히 꽂혀 들어온다. 발음과 톤도 타고난 건지.
“엄청 친절하시네.”
“백유성 씨.”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냉정한 인상인데, 굳어진 턱과 힘이 들어간 입매가 사나움을 더했다.
다른 때였으면 겁이라도 먹었을지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웃음이 나옵니까.”
“미안. 웃고 있는지 몰랐어요.”
열 때문에 취기가 돌 때처럼 온몸이 느슨해졌다. 곧 통증으로 변하겠지만 아직은 견딜 만했다.
“체질이 좀, 특이해서, 병원에 가서 당장 처방받아도 늦어요.”
“무슨 소리예요. 제대로 설명해.”
“내 인생이 골고루 엿 같단 소리죠…….”
슬슬 시야가 어렴풋해져 최사헌의 표정을 똑바로 읽기 힘들었다.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일까. 천박한 태생답게 몸으로 들이받고 보는 행태에 질리고 기가 막혔을까.
약간은, 흥분했을까.
슬슬 배가 땅기고 뒷골이 찡하게 아렸다. 본능이 이성을 파먹어 들어가는 순간은 언제 겪어도 진절머리가 났다.
억제제를 들이부어도 종종 주기의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몸이다. 아래가 젖어 들기 시작하면 일단 죽고 싶다는 생각부터 들었는데, 지금은 조금 즐겁다.
“이런다고 내가 당신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댈 것 같아?”
그러나 사무실 공기가 진득거리도록 오메가의 페로몬이 진동하는데도 최사헌은 겉보기에 지극히 침착했다.
대단하신 자제심이다. 주기가 아닌데도 내 앞에서 눈이 벌게져서 헐떡거리던 놈들하고 비교하면 박수라도 쳐 주고 싶다.
차라리 다른 인간들처럼 대뜸 바지부터 벗기려고 달려들었으면 일은 쉬워졌으련만.
알파라도, 대단하신 최사헌은 역시 나랑은 다르다는 건가. 주기만 되면 저질스럽게 나뒹구는 나와 달리 얼마든지 잘난 얼굴로 내려다볼 수 있다는 걸까.
나한테는 이따위 수단밖에는 없는데.
“못 할 것도 없잖아.”
오기가 솟았다. 간신히 소파에 걸치고 있던 등을 떼어 내 바닥에 무릎을 댔다.
“지금 뭐 하는…….”
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건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정장 바지에 입술을 댔다.
다행스럽게도 최사헌은 보이는 것만큼 아무 느낌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묵직한 질량이 느껴지는 허벅지를 따라 입술을 옮겼다.
숨을 들이마시면 최사헌 특유의 체취가 맡아졌다. 머리 꼭대기까지 화끈거렸다.
벨트를 더듬자 위에서 조그맣게 욕설이 들렸다.
“거래를 권하러 온 사람치고 프레젠테이션이 저질이네.”
최사헌이 신경질적으로 나를 안아 소파에 눕혔다. 말이 눕히는 거지, 내던지는 거나 다름없는 동작이었다.
“얌전히 있어요. 범용 억제제라도 사 오게.”
“어차피 효과도 없다니까.”
떼쓰는 아이를 다루는 행태였다. 나름대로 마음먹고 벌인 짓이었는데도.
자기도 정장 바지의 한쪽 허벅지 천이 팽팽해지도록 부풀려 놓고서. 아래 세우고 달려드는 새끼들한테 진저리를 친 적은 있어도 이렇게 밀려나기는 처음이다.
억울하고 분했다. 형질을 내다 버리고 싶을 때는 사방에서 환장하더니, 왜 정작 필요할 땐 쓸모도 없을까.
나는 매번 왜 이럴까.
“존나 비싼 척하네…….”
건방이라도 떨어 볼 작정이었건만 말끝이 형편없이 흐트러졌다. 구질구질하게.
최사헌이었더라면 이보다 훨씬 똑바로 말했겠지.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말했듯, 별수 없이 나라서.
눈가가 쓰라렸다. 눈물이 흘러넘쳐 살갗을 타고 미끄러졌다. 닦아 내지도 않고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불쌍해 보인다면 그것도 좋았고, 비참해 보인다 해도 개의치 않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최사헌이 입을 열었다가 탁한 숨만 뱉고 도로 닫았다. 그러고는 안전선처럼 유지하던 거리를 좁혀 내게로 다가왔다.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눈물로 흠뻑 젖은 뺨에 최사헌의 손이 닿았다. 나는 순종적인 동물처럼 그의 손바닥에 머리를 가만히 기댔다.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깜빡일 때마다 뿌연 눈앞이 닦여 최사헌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또렷하게 보였다.
그답지 않게 몹시 난감해 보여 우스웠다. 눈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당신이 이렇게 하게 만들잖아.”
“누구 탓을 하는 거야.”
기가 막힌다는 듯 말하면서도 최사헌은 내게서 손을 떼지 않았다.
닫힌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비슷한 간격을 두고 세 번. 그 후 비서가 최사헌을 불렀다.
“이사님, 지금 밑에…….”
“들어오지 말아요.”
처음 내가 들어왔을 때보다 딱딱해진 음성이 비서의 말을 끊었다.
“다음 일정 전부 미뤄 주세요.”
최사헌의 눈이 나를 향했다.
“손님 나가실 때까지.”
저릿한 쾌감이 손발을 데웠다. 비열한 승리감이었다.
이번에는 알면서도 웃었다. 웃을 수 있었으니까.
“좋은가 봐.”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기며 최사헌이 빈정거렸다. 나는 거리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짓이 정상이라고 생각해요?”
최사헌이 내 머리맡에 앉았다. 그가 가까워지자마자 나는 소파를 짚고서 상체를 세웠다.
넥타이를 잡아당기자 최사헌은 순순히 끌려왔다. 예상했다는 투였다.
“아직 안 넘어갔어.”
당신하고 결혼할 생각 없어, 최사헌이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움직이는 입술에 입 맞추자 최사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입 맞춰 본 적은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기분 좋았다.
근사한 목소리를 내는 최사헌의 입술은 감촉도 감미로웠다.
그가 밀어내지 않았기에 나는 몇 번이고 키스했다. 휘청거리는 내 등을 받쳐 주며 최사헌이 혀를 찼다.
“그냥 당신이 너무 우니까…… 그것뿐이야.”
그렇다면 그까짓 눈물쯤 얼마든지 흘려 주겠다. 신파극 속 비련의 주인공처럼 눈이 녹아 없어질 때까지 울다 끝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더라도 좋았다.
동정이어도 좋다. 이용할 수만 있다면야.
칼날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든, 해치고픈 이의 목을 찌를 수만 있다면.
“그것뿐이야?”
눈물을 닦아 주는 최사헌의 손을 붙잡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이미 천이 기분 나쁘게 살에 달라붙을 정도로 젖은 다리 사이에 손을 겹쳐 누르자 숨이 절로 거칠어졌다.
직접 닿는 것도 아니고, 천 위에서 만져지는 건데도 이게 최사헌의 손이라는 것만으로 짜릿했다.
“하아, 아…….”
숨이 달콤하게 흘렀다. 아래에서 미지근한 체액이 끊임없이 배어 나왔다.
남의 손으로 자위하면서도 그리 수치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히트 사이클의 열기가 머리 어딘가를 뭉그러뜨린 탓이다.
“이거면 만족하겠어?”
내가 하는 양을 두고 보기만 하던 최사헌이 내 바지를 벗겼다. 아까보다 낮아진 음성이 마음에 들었다.
밴딩 슬랙스가 아래로 구겨져 내려갔다. 나는 혀끝을 내어 아랫입술을 축였다. 벗기기 쉬운 옷을 고른 걸 알고 있을까.
푹 젖은 속옷에서 진득한 액체가 살결을 따라 이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내 발목에서 바지를 빼낸 최사헌이 나를 무릎 위에 앉혔다.
몇 번 만나지도 않은 남자의 허벅지에 올라타 다리를 벌리면서도 거부감은 없었다. 머릿속에는 연분홍색 안개만이 떠다녔다.
약에 취하는 것도 이런 기분이려나. 갑자기 든 생각에 가슴이 쑤셨다.
잡생각을 밀쳐 내듯 손가락이 안으로 들어왔다.
길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속살을 벌리며 파고든다. 숨을 크게 들이쉬어도 허리 아래로 자꾸 힘이 들어갔다.
“아……. 이런, 거, 말고.”
더듬거리며 최사헌의 귓가에 입술을 묻자 최사헌이 쉿, 목을 울렸다.
“조용히 해. 밖에 들리겠다.”
전시회장 뒤편에서 맡아 보았던 냄새가 훨씬 진하게 밀려들었다. 따뜻하고 무거운 냄새. 몹시 정성을 들여 조향한 듯한 향기였다.
심장이 미칠 듯 뛰는데 반대로 안심이 된다니 기묘한 경험이다.
히트 사이클에 막 돌입한 육체는 알파 페로몬을 달게 주워 삼켰다. 환장하며 반기는 게 스스로 느껴졌다.
오래도록 마른 입술을 물로 적시는 것만 같다. 더 원했다. 좀 더.
최사헌의 다리 사이로 손을 뻗자 금세 제지당했다.
“열이나 식혀 주려는 거예요. 힘들어 보이길래.”
그러는 당신도 터지기 직전 같은데. 비아냥거릴 힘도 없어서 코만 훌쩍였다.
“심통 난 애 같네.”
최사헌이 웃었다. 그 애 아래를 쑤셔 대고 있는 주제에 뭐라는 건지.
엄밀히 말하면 이제 막 들어온 상태니 쑤셔 대고 있지는 않지만.
“읏, 윽, 아…… 하.”
속을 읽은 양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리 깊이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머리에서 폭죽이 터졌다.
둘 중 하나였다. 히트를 오랜만에 약 없이 맞는 바람에 몸이 맛이 갔거나, 최사헌이 기가 막히게 손을 잘 쓰거나.
“아, 읏, 아!”
소리가 자꾸 샜다. 아래에서는 젖은 소리가 울려 대는 바람에 귀가 다 눅진해지는 기분이었다.
“물고 있을래요?”
문가를 흘깃 보던 최사헌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내 입에 소매를 물리려 들었다. 노려보다 기꺼이 그의 어깨를 물어 주었다.
“진짜 버릇이 나쁘네요, 유성 씨는.”
내용과 달리 최사헌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이런 와중인데도 최사헌에게 불린 이름이 듣기 좋았다.
끌어안는 팔도, 들숨마다 폐를 채우는 향기도, 점막을 교묘하게 문지르는 손길까지 모든 게 쾌락이다.
쾌감은 쉬지 않고 치미는데 부족해서 갈증이 났다. 너무 강한 빛을 맨눈으로 본 듯 눈앞이 새하얗게 깜빡거렸다.
이번에는 그저 생리적인 이유로 눈물이 났다. 견딜 수 없어 최사헌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자 그가 나를 더 세게 안아 주었다. 눈가가 자꾸만 젖었다.
* * *
블라인드 틈으로 칸칸이 끊긴 햇빛이 들어와 바닥에 직선을 긋는다.
나는 땀에 젖은 채로 최사헌의 사무실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 두어 간혹 시원한 바람이 피부에 닿았다.
“입어요.”
백화점 로고가 박힌 쇼핑백이 내 앞에 놓였다.
움직이지 않고 고개만 위로 틀었다. 아까 일은 거짓말인 듯 한 점 흐트러지지 않은 최사헌이 보였다.
“갈아입어야 나갈 거 아닙니까.”
최사헌은 둘도 없는 신사였다. 내가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오로지 손가락과 페로몬만으로 달래 주고는 자리를 정돈하고 제대로 눕혀 주었다. 거기다 갈아입을 옷까지 대령 중이다.
엉망으로 당하고 다리를 후들대며 꼴조차 엉망인 채 사무실에서 나가게 됐더라도 원망하지 않았을 텐데, 내 생각보다도 훨씬 신중하고 인내심이 좋다.
“어차피 젖을 텐데 뭐 하러.”
혼자 뭐가 저렇게 잘났어. 아니꼬워서라도 고분고분하게 굴 수가 없다.
“약 먹었잖아.”
“범용 억제제는 안 듣는다니까요. 잠깐 가라앉다 금방 또 심해져요.”
그새 목이 나가 소리가 중간중간 갈라졌다. 그게 최사헌을 자극했는지 그때마다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는 게 눈에 띄었다.
이럴 때만 즐거워지는 걸 보니 내 심보가 못돼먹긴 했나 보다.
“어쩌란 겁니까. 당신 때문에 밀린 일정만 몇 갠 줄 알아요? 난 당장 나가 봐야 해요.”
최사헌의 바쁜 일정 따위 알 바 아니었다. 나 하나로 손해를 볼 사람이 아니기도 했다.
“집에 혼자 못 가.”
“데려다 달라고?”
“그쪽 덕분에 며칠 집에 틀어박혀서 지옥같이 보내야 할 예정이거든요.”
엄밀히 말하면 최사헌 탓은 아니지만.
지금 내가 잘 생각이 있는 알파는 최사헌밖에 없었고, 억제제로 주기를 넘길 타이밍은 놓쳤으니 뼈까지 녹일 듯한 열에 시달리며 며칠을 그저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 가라앉기는 했어도 언제 다시 더 열이 오를지 몰랐다.
또 적시면 큰일이지. 소파도 비싼 것 같은데.
소파 표면을 뽀득, 소리가 나도록 문지르자 최사헌이 입술을 적셨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것 같아 나는 최사헌을 향해 미소 지었다. 몇 년 사이 오늘만큼 많이 웃은 날이 없는 것 같다.
“데려다주든가…… 아니면 나랑 하든가.”
이대로 얌전히 일어서기는 싫어 지껄여 봤는데 최사헌은 눈에 띄게 인상을 찌푸렸다. 자꾸만 균열을 보여 준다.
최사헌이 쇼핑백에서 꺼낸 새 옷들을 내 품에 직접 건넸다.
“입기나 해요.”
그게 최사헌의 대답이었다.
* * *
“너무 커.”
자꾸 발목으로 흘러내리는 바짓단을 다시 접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소매가 난리다.
바지고 셔츠고 할 것 없이 질질 흘러내렸다. 속옷은 말할 것도 없다.
“아마 비서가 내 사이즈로 사 왔을 겁니다.”
시동을 걸던 최사헌이 잠깐 내 발치를 확인했다.
“최사헌 씨 것도 너무 커요?”
유치하리만치 적나라한 음담에 최사헌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몹쓸 버릇이 들 것 같았다. 완벽한 남자를 쿡쿡 찔러 대서 반응을 얻어 냈을 때의 질 낮은 기쁨이랄까.
“아무리 잘 젖어도 그렇게 좁으면 감당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죠.”
그대로 수도사 흉내나 낼 줄 알았더니 받아치는 바람에 당황했다. 조금은 당해 줄 줄 알았더니.
차가 주차장에서 매끄럽게 나아갔다. 자기 손으로 운전하고 다니지도 않을 텐데 솜씨가 제법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을 붙여 보내는 정도로 충분했을 텐데, 바쁘다더니 손수 운전까지 해서 데려다주는 이유가 새삼 궁금해졌다.
원래 누구한테나 이 정도로 친절한가.
아니면 내가 이럴 정도로 꼴사나웠나.
“뭘 그렇게 능숙한 척이에요? 경험도 별로 없어 보이던데.”
“그걸 그쪽이 어떻게 알아요.”
“왜 모르겠어.”
여유가 넘치는 답변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최사헌과 내 사이의 격차가 보이는 듯했다.
짜증 나. 들으란 듯 중얼거리며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최사헌이 웃은 것 같았다. 정말 짜증 난다.
이마를 유리창에 박자 차가운 유리가 열이 도는 이마로 인해 미지근하게 데워졌다. 바깥에서는 내 기분 따위는 아랑곳없이 여전한 도심의 풍경이 지나갔다.
“결혼 말이에요.”
운전석에서 문득 들린 말에도 나는 돌아보지 않고 빌딩 숲을 쏘아보았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저마다 분주해 보인다.
저 안에도 지금 당장 죽고 싶은 사람이 있겠지. 지금 건널목을 지나는 저 사람도 속에는 누굴 해칠 마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회장님도 그렇고, 의현이네 부모님도 탐탁잖게 여기는 분위기니까 어쩌면 무산될 수도 있을 겁니다. 너무 조급하게만 생각하지 말아요. 정 힘들면 의현이 설득 정도는 도와줄게요.”
이렇게 고마울 수가. 끝까지 신사다. 차창에 비치는 최사헌의 옆얼굴을 감상했다.
인생의 질곡을 침착함과 결기로 지나왔을 사람답게 곧은 선으로만 이루어진 옆모습이었다.
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의 고통을 다루었을 남자.
이 남자는 무언가 착각하고 있다.
나는 최의현과 결혼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 새끼하고 식장에 함께 들어가다니.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뒤집히지만 그저 결혼식만 피하고 싶었던 거라면 이딴 짓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았을 거다.
최의현을 죽이고 싶다.
바닥으로 끌어내려 처절하게 뭉개 버리고 싶다. 유민이가 겪었을 고통을 알려 주고 싶었다.
“다른 사람한테 가서 이런 짓 하지 말라는 소립니다.”
“들켰네요. 다음에는 최의현네 아버지라도 찾아가려고 했는데.”
“……백유성 씨.”
최사헌의 저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 감당 못 할 말썽꾸러기를 대하는 것처럼 구는 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불쌍해요?”
비로소 운전석을 쳐다보자 최사헌도 내게로 눈을 돌렸다. 때마침 신호는 빨간불이었다.
“나랑 결혼할 거 아니면 참견하지 말아요. 필요 없어요.”
정 안 되면 식장에 칼이라도 품고 들어갈까. 시간이 촉박했고, 어쩌면 두고두고 후회할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지만.
별수 있을까, 내가.
“또 그런 표정이네.”
내게 내리꽂힌 최사헌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아랫배에서 또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열기를 느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 흥분하다니. 히트 사이클의 오메가란 대체로 발정 난 동물과 다를 바 없다. 특히나 알파 앞에서는.
“내가 뭐, 되게 천박한 표정이라도 짓고 있어요? 이마에 ‘나 히트 사이클’이라고 써 붙인 표정?”
“아니요. 다 포기하고 싶은 얼굴.”
신호가 바뀌었다. 다시 운전에 집중하면서 최사헌이 긴 숨을 토했다.
차창이 조금 내려갔다.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나는 다시 창문에 기댔다.
차 안의 공기가 최사헌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내 체취로 범벅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저속한 승리감이 들었다.
몸을 굽혀 구두끈을 다시 묶었다. 나는 이제 열여섯이 아니고, 끈을 풀리도록 둔 채로 걸어 다니지 않는다.
최사헌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당신이 틀렸다고.
보잘것없이 무력해 보일지라도 나 역시 당신을 망칠 수 있다고. 얼마든지.
* * *
“가세요.”
태워다 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조수석에서 내렸다. 오피스텔 주차장은 오늘따라 차가 많았다.
“혼자 들어갈 수 있겠어요?”
조수석으로 넘어올 듯 허리를 숙이고서 최사헌이 나를 살폈다.
“혹시 저 좀 모자라 보여요?”
일부러 얄밉게 되묻자 최사헌이 쓴웃음 지었다.
“범용 억제제로는 안 된다면서요. 언제 다시 안 좋아질지 모른다고 해서 걱정한 겁니다.”
“엘리베이터 타면 바로 집이에요.”
주차장에서 집으로 올라가려면 3분이면 충분하다. 중간에 상태가 나빠지더라도 그 정도는 버틸 만했다.
“바쁘시다면서요. 빨리 가기나 하세요.”
“말 참 밉게 잘한다.”
난 원래 이 모양이라고 쏘아붙일 타이밍이었는데, 그럴 기분이 안 들었다.
“그래요. 그럼 조심히 올라가요.”
최사헌은 친절했으나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친절이 아니었다. 몸을 돌려 가 버리는 대신 나는 우울하게 차 안을 응시했다.
‘의현이가 미쳐 있다는 게 누군지 궁금해서.’
전에 최사헌이 내게 했던 말을 곱씹었다.
이 남자가 나한테 미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웃기지도 않는 생각이었다.
패를 내밀었지만 최사헌의 패가 나보다 높았다. 알고 있었다.
내가 감히 쥐기 힘든 사람이라는 것쯤, 알면서도 부딪혀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절박했다.
“……옷값은 비서분한테 연락해서 보낼게요.”
“그럴 필요 없어요.”
“아니요.”
실컷 뻗대 놓고 이제야 예의를 차리는 게 우스워 보일 법하다. 그래도 최사헌에게 빚지기 싫었다. 사실 최사헌이 아니라 누구한테든.
“오늘 고마웠습니다.”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서 가능한 바르게 돌아섰다. 오피스텔 현관의 유리문을 통과하도록 뒤에서 차가 떠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타자 비로소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층수를 누르고 연거푸 얼굴을 쓸어내렸다. 눈이 따가웠다.
도착하자 문이 양옆으로 걷혔다. 내리는데 발이 질질 끌렸다.
나는 걷다 금방 멈추었다.
나보다 먼저 집 앞을 지키고 선 사람이 있었다.
온몸이 바짝 얼어붙었다. 그대로 엘리베이터로 돌아가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문 앞에 서 있던 최의현이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제야 다리가 움직였다.
돌아서서 계단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보다 먼저 팔이 붙잡혔다.
“어디 가.”
아무리 빠져나오려 해도 최의현은 손쉽게 나를 당겼다. 질질 끌려가는 기분은 굴욕적이었다.
“너 없는 데.”
도로 최의현의 앞으로 끌려오자 이제는 화가 치밀었다.
안 받아도 끈질기게 남기는 부재중전화를 보며 언젠가 찾아오겠거니 짐작하긴 했다.
최의현은 이렇다. 뭐든 다 그저 제 마음대로다.
최의현이 나한테 목을 매는 이유? 자기 마음대로 안 돼서 더 억지를 쓰는 거다.
“어디 다녀왔어.”
“알아서 뭐 하게.”
“전화도 안 받고, 답장 한 통을 안 하고.”
“내가 너랑 연락을 왜 해야 돼.”
“우리 조만간 결혼할 사이야.”
최의현 입에서 결혼이란 말을 듣자 눈이 뒤집혔다.
“유민이한테 이렇게 했어 봐.”
“넌 나랑 할 말이 그 얘기밖에 없어?”
아주 지긋지긋하다는 투였다. 유민이 얘기가 이렇게 취급당한다는 사실이 안 그래도 부글거리던 속에 기름을 끼얹었다.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내가 부탁했지. 제발 유민이랑 만나 달라고, 유민이한테 잘해 주면 나도 다 묻겠다고 했어.”
약에 취해 정신을 못 가누면서도 오로지 최의현만 찾는 유민이를 보다 못해 내 발로 찾아갔었다. 최의현 앞에서 빌었다.
살아 있는 한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작심해 놓고 몇 달 만에 그 짓을 했다.
그래도 지금껏 잘한 일이라고 여겼다. 최의현과 다시 만나면서 유민이는 약을 끊었고, 이럭저럭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유민이만 괜찮으면 난 네가 나한테 한 짓들, 다 용서할 수도 있었어.”
최의현이 엉망으로 인상을 구겼다. 입매가 일그러지면서 턱이 단단하게 불거지고 목이 뻣뻣해지도록 힘이 들어갔다.
“지금 내가 얼마나 참아 주고 있는지 알아?”
“네가 참을 줄도 알아? 몰랐네.”
말을 끝내기도 전에 멱살을 잡혔다. 그악스레 끌려가자 최의현의 눈이 코앞에서 번뜩였다.
나보다 한참 큰 자식이 으르렁대자 과연 위협감이 들었다. 더군다나 주먹깨나 쓰고 다니셨던 망나니 도련님 아닌가.
이 손으로 얻어맞으면 백지훈한테 맞았던 것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아플 게 틀림없다.
“다른 새끼 냄새는 덕지덕지 묻혀 와서는…….”
내 목에 코끝을 가져다 대며 최의현이 낮게 뇌까렸다. 숨이 살갗에 닿았다. 당장이라도 물어뜯길 것 같아 발에 힘이 들어갔다.
누구 냄새인지 알면 더 열받을 텐데. 혼란과 공포로 뒤엉킨 머릿속에서도 비아냥이 떠올랐다. 습관이 무서운 건지.
그나마 옷을 갈아입어 다행이었다. 덕분에 최사헌의 알파 페로몬을 뒤집어쓰고, 히트 사이클이라고 동네방네 소문내고도 남을 냄새를 질질 흘리면서 최의현의 앞에 서진 않아도 됐다.
“떨어져.”
한쪽 팔로 최의현을 힘껏 밀어냈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걱정스러웠다.
히트 사이클임을 들킬 것만 같았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당연히 알아차릴 거다.
“오늘 이상하다?”
“너하고 상종하기 싫은 건 항상 그랬어.”
“그게 아니라.”
최의현이 의미심장하게 말을 멈췄다.
“평소에는 실수로라도 약간의 페로몬조차 흘리면 절대 안 될 것처럼 악착같이 갈무리하고 다녔으면서. 오늘은 왜 이래?”
등줄기를 따라서 긴장이 흘렀다. 최의현이 내게로 다시 상체를 붙이려 들었다.
“너 혹시 히트…….”
“내가 주기에 티 내는 거 봤냐?”
한껏 날카롭게 쏘아 대면서도 식은땀이 났다.
그간 주기 관리를 소홀히 한 적은 없다. 과하게 철저히 약을 챙겨 먹다 과용하는 바람에 부작용을 겪은 경험은 있어도.
최의현도 그간 내가 히트 사이클을 겪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긴가민가하다는 얼굴이다.
그러나 곧 증거가 나타날 판국이니 언제까지 시치미 떼는 게 먹힐 것 같지는 않다.
“넌 나 보면 그런 생각밖에 안 하지? 이런데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해. 비켜. 피곤해.”
일부러 최의현을 밀치며 현관문으로 다가섰다. 최의현은 순순히 밀려 주지 않았다. 덕분에 오히려 가까워진 꼴이다.
당장 계단으로 뛰쳐 내려가 최의현을 따돌리는 게 나을까, 빨리 집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는 게 나을까.
둘 중 뭐든 쉽사리 될 것 같지 않아 막막했다.
체력이든 체격이든, 최의현한테 상대가 안 된다.
고작 3분 거리의 집에 들어가는 일이 문제가 될 줄이야. 최사헌의 말대로 됐다.
“어디 다녀왔는지 말해.”
“밖에. 이제 비켜.”
“옷은 왜 이 지경인데.”
그새 흘러내린 소맷자락이 붙잡혔다. 최의현은 골이 난 애새끼처럼 내 소매를 다 끌어내렸다.
“연락 계속 무시할래?”
“알았다고. 받으면 돼? 제발 가라.”
마음이 급해졌다. 자꾸 속이 뜨거워지는데, 긴장해서 그런 건지, 히트 사이클 때문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비밀번호를 누르려 키패드를 더듬으면서도 온 신경이 뒤로 집중됐다. 거기 최의현이 서 있다는 사실이 악몽이었다.
“백유성.”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길이 분주해졌다.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문만 잠그면.
잠금쇠가 풀렸다. 문고리를 돌리는 찰나에 목덜미에 숨결이 끼쳤다.
“맞지, 히트 사이클.”
음절 하나하나가 목 뒤에 유리 조각을 꽂아 넣는 듯했다.
“왜 이렇게 벌벌 떨어.”
“……나중에 보자. 들어갈게.”
감각이 옅어진 손으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은 반도 열리지 못했다.
최의현이 내 머리 옆으로 팔을 뻗었다. 뒤에서 문을 눌러 닫아 버리자 잠금쇠가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어디 다녀왔는지 말해.”
손바닥으로 문을 누르며 최의현이 뒤에서 천천히 다시 말했다. 손가락 끝마디가 무언가를 움키듯 구부러지면서 손등의 뼈가 새하얗게 불거졌다.
숨이 막힐 정도의 알파 페로몬이 쏟아졌다. 히트가 아니라도 정신을 못 가눌 농도였다.
나는 오로지 악으로 버텼다. 지나치게 힘을 준 발이 구두 안에서 둥글게 굽었다.
“어디서, 누구랑 있다 왔어.”
무게를 지니고 짓쳐 내리는 공기에 최의현의 음성이 음산하게 섞였다. 말소리마저 어깨를 찍어 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간신히 쓰러지지 않았다 해도 나머지는 의지의 영역이 아니었다.
내장 안쪽에서부터 몸이 녹아내리기라도 하듯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눈알 뒤편이 화끈댔다.
그저 달래 주는 것뿐이라던 최사현의 말이 진실이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난폭하게 들이치는 페로몬 샤워는 안정감은커녕 머리를 뭉개 놓았다.
더는 못 서 있을 지경이라 문에 이마를 박으며 기댔다. 무릎이 천천히 꺾였다.
아래가 불쾌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허벅지를 타고 체액이 흘러내리는 느낌 역시 생생했다.
이대로면 주저앉겠다 싶을 즈음 최의현이 내 허리를 안아 올렸다.
“손, 떼……!”
나는 발작하듯 반응했다. 몸부림을 치느라 발에 현관문이 채여 탕, 탕, 쇳소리가 울렸다.
“어디서, 뭘 했길래 주기를 그렇게 지독하게 챙기던 애가 이 꼴로 기어들어 왔냐고.”
“놓, 이거, 읏, 개새끼야!”
발버둥 칠수록 최의현의 팔은 더 세게 조여들었다. 아예 나를 들다시피 안아 올리면서 최의현이 이를 갈았다.
멋대로 휘둘리기만 하는 상황에 낯익은 분노와 절망이 번갈아 들었다. 아무리 발악해도 이 꼴이구나.
온몸을 다 내던져도, 나는.
“놓으라잖아.”
그때 단단히 다져진 목소리가 최의현과 내 사이에 얼음송곳처럼 파고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주시했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배경으로 최사헌이 보였다.
당황했는지 최의현의 팔이 느슨해졌다. 틈이 생기자 가차 없이 뿌리쳐 벗어났지만, 똑바로 설 수가 없어 벽에 기대야 했다.
“괜찮아요?”
최사헌이 최의현을 지나쳐 내게로 걸어왔다.
왜 최사헌이 여기에 있는 걸까. 의아한 눈길을 보내자 최사헌이 쇼핑백이 걸린 손을 내밀었다.
“옷 돌려주러 왔습니다. 놓고 내렸길래요.”
쇼핑백에는 아까 입고 나갔던 옷이 담겨 있었다. 페로몬과 체액에 젖은 천이 꼭 지금 내 모습 같기도 했다.
“무슨 소리야?”
최의현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둘이 같이 있었어?”
질문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짙은 눈썹 사이가 찌그러져 깊은 골이 팼다.
“애초에 형이 왜 여기에 있어.”
“몸도 안 좋은 사람한테 뭘 한 거야. 함부로 구는 버릇 고쳐.”
따져 묻는 최의현을 최사헌은 간단히 무시했다. 최의현의 인상이 더욱 그악스럽게 일그러졌다.
“오늘 둘이 같이 있었냐고 묻잖아. 언제 이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셨어?”
“일이 있어서 만났어.”
“무슨 일.”
“너한테 보고해야 하니.”
최사헌의 말씨는 평범해서 더 깔아뭉개는 것처럼 들렸다. 나긋한 신사 흉내만 내는 줄 알았더니 작정하고 하대할 때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대답을 안 하시겠다?”
최의현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저 성질에 주먹이 안 나가는 게 용했다.
“나하고 백유성, 결혼할 사이야.”
하도 힘을 주어 말하는 바람에 발음이 중간중간 뭉그러졌다.
“넌 정혼자를 이렇게 대해?”
“도대체 언제부터 백유성하고 아는 사이였다고 참견질이야?”
시종일관 차분한 최사헌과 달리 최의현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주먹을 쥐고 온몸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부릅뜬 눈 밑이 조금씩 떨렸다.
심사가 뒤틀리다 못해 어그러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최사헌이 자기 사촌 동생을 얼마나 잘 아는지는 몰라도 아마 나보다 제대로 알지는 못할 거다.
최의현은 폭발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폭탄이었다. 자신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음을 배우면서 자란 인간이란 해롭기 짝이 없다.
나는 욱신대는 눈가를 손바닥으로 덮어 누르며 입술을 뗐다.
“미림이 만나러 나갔다가 우연히 마주쳤어.”
최의현이 터지는 꼴을 보느니 내가 접기로 했다.
죽어도 최의현한테만은 굽히기 싫었다. 그래도 자존심 구기고 비위를 살피는 거야 늘 하던 일이라 익숙했다.
“근데 갑자기 히트 사이클이 오는 바람에 이 꼴이라, 최사헌 씨가 옷이고 뭐고 도와준 거야.”
고개를 들어 최의현의 표정을 확인할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럴싸하게 들릴지 깊이 고민하지도 않았다.
본래 믿느냐, 마느냐는 상대방의 마음이다.
무슨 말을 하든 최의현은 의심할 거다.
“요즘 일이 많아서, 약 챙길 정신이 없었어. 스트레스 때문에 주기도 당겨진 것 같고.”
머리가 웅웅 울렸다. 말을 똑바로 하려고 숨을 몇 번씩 가다듬어야 했다.
“의현아, 나 너무 피곤해…….”
성을 떼고 이름으로만 불렸을 때 최의현이 크게 움찔하는 모습이 곁눈으로도 보였다.
자꾸 뭉치는 느낌이 드는 명치께를 만지면서 문으로 돌아섰다. 최의현이나 최사헌을 보지는 않았다. 뒤는 조용했다.
문고리가 천근만근이었다. 겨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다리가 후들대며 무너졌다.
이번에는 버티지 않고 신발장 바닥에 주저앉아 어깨를 감싸 안았다. 문의 잠금쇠가 이리저리 돌아가다 끝내 맞물리지 못하고 경고음을 한 번 냈다.
다시 일어나 잠글 정신조차 없었다.
이마에서 발가락까지 조그만 벌레들이 몸 구석구석을 기어 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간지럽고, 참을 수 없이 덥고, 살이 아렸다.
너무 더운데 오한이 든 듯 손이 연신 떨렸다. 바닥을 짚고 현관 안쪽으로 상체를 올렸으나 침실까지의 거리가 너무 까마득했다.
어떻게든 안으로 기어가다 그냥 옆으로 누워 몸을 웅크렸다. 그러면 이 고통이 조그맣게 말아 버린 등을 타고 흘러가기라도 할 것 같이.
아무도 찌르지 못하는 칼은 거꾸로 나를 베고 있었다.
원한은 독을 마시면서 다른 사람이 죽어 가기를 바라는 일이라는 속담이 있었는데. 나는 턱을 가슴팍에 붙이고 어금니를 더 꽉 맞물렸다.
상관없다.
이 독으로 그와 나, 둘 중 누가 죽더라도.
뱉어 내지 않을 것이다.
* * *
오피스텔 건물 복도는 질척거리는 페로몬이 서로 공격적으로 뒤섞여 어지러웠다. 사헌이 넥타이를 만지며 힐긋 뒤를 보았다.
유성이 들어간 현관문은 끝까지 닫히지 않고 틈이 아주 약간 어긋나 있었다.
목울대를 울렁대던 의현이 문고리를 잡으려 들었다. 놔두면 쳐들어가 다시 난동이라도 피울 기세였다.
“그만해.”
사헌이 의현을 막아섰다.
“김 실장님도 없이 왜 여기 와 있어. 회사 일은 제대로 마치고 온 거 맞아?”
“이, 씹. 이제는 하다 하다 별 데 다 참견이네.”
의현의 입꼬리가 뒤집히면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요즘 남들이 치켜세워 준다고 뭐라도 된 줄 안다?”
의현이 사헌의 가슴팍을 툭, 건드렸다.
“할아버지가 정말 형한테 회사 물려줄 것 같아서 그래? 그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지?”
기분 나쁘게 가슴을 떠밀어 대는 손길을 내려다보던 사헌이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의현아, 넌 어떻게 일곱 살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꾸준해.”
얼마든지 새로 살 수 있으면서 굳이 남의 손에 들린 장난감을 빼앗아서 망가뜨려야 만족하던 그 시절에서 조금도 달라진 부분이 없다.
사헌은 작은 왕처럼 걸어 다니던 의현을 떠올렸다. 잠시만 빌려서 놀겠다고 약속하고는 팔이 망가진 장난감을 돌려주며 심술궂게 웃던 소년을.
그래서 백유성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었다. 과연 최의현이 손아귀에서 안 놓겠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장난감은 어떻게 생겼을까.
사헌이 정장 윗주머니에 닿은 의현의 손을 잡았다. 서서히 힘을 주어 움키자 딱딱한 뼈의 형태가 느껴졌다.
“이제 말조심하면서 살아. 애도 아니고.”
그 손을 허공에 떨쳐 내자 의현이 곧장 사헌의 멱살을 잡으려 들었다. 한 발 물러서는 것만으로 허공을 할퀴는 손을 피하고 나서 사헌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왜 백유성 씨가 너한테 학을 떼는지 알겠다.”
“야!”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복도를 때린다. 소리 잘 지르는 것도 안 변했네. 사헌이 혀를 찼다.
“너 유성이한테 관심 있냐?”
“결혼 앞둔 예비 배우자 뺏는 취미는 없어. 그나저나 계속 여기에 있어도 되겠어? 회장님 눈치 보는 시늉이라도 하지.”
최의현은 태어났을 때부터 회장 내외가 가장 예뻐한 손주였다. 버르장머리가 없어도 오냐오냐, 왕좌는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판도가 다소 바뀌었다. 최의현이 급기야 백유성과 결혼하겠다 선언하고 나선 후부터는 더욱이.
결혼 상대로 백유민은 나쁘지 않았다. 해신 정도면 빠지는 배경은 아니다.
그런데도 고모님은 더 좋은 상대를 바랐던 것 같지만.
어찌 됐든 백유민이 백유성보다는 훨씬 나았다.
의현이 유성과 결혼하겠다 선언한 후로 조부는 불편한 심사를 대놓고 드러냈다. 요절한 약혼자의 형이라는 점도 걸리지만 무엇보다 유성의 출신이 조부의 심기를 거슬렀으리라.
“유성이 말처럼 우연히 만난 거 맞아?”
의현이 도전적으로 물었다. 사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자 뚫어져라 꽂은 시선이 따가웠다.
그렇게 본다고 사람 속이 보이겠어. 사헌은 속으로 비웃었다.
최의현은 어리다.
의현이 유성을 요란하게 물고 늘어질수록 사헌에게는 유리하다. 아주 간단한 계산이었다.
이만 빠지는 게 옳다. 끼어 봤자 좋은 꼴 볼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유성이가 한 말이 사실이냐고 묻잖아.”
유성의 이야기는 제대로 들어맞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거짓말의 허술함은 의현 역시 느끼고 있을 거다.
과연 백유성이 제 다리 사이로 기어든 얘기를 해 주면 어떤 표정이 될지 궁금했다. 사헌이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핥았다.
쉬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면서 쏟아지는 피로를 미처 감추지도 못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나른한 피로, 좌절감과 체념이 겹겹이 쌓여 더운물에 담가진 실크처럼 엉망으로 구겨진 모습이었다.
사무실에서 적극적으로 몸을 붙여 올 때도 유성은 엇비슷한 얼굴이었다. 배가 다 뻐근해질 정도로 흥분했으면서도 사헌은 차마 유성에게 손대지 못했다.
그가 의현에게 매달아 놓아야 할 짐이라서만은 아니었다.
“그래.”
그 한마디로 사헌은 유성의 공범이 되었다.
“우연히 마주쳤고, 힘들어 보이길래 도와줬어. 그게 전부야.”
“…….”
“듣고 싶은 대답 다 들었으면 이만 가지?”
아무리 봐도 의현은 사헌을 남겨 두고 떠날 기색이 아니었으므로 사헌이 먼저 움직였다.
문가에는 끝내 유성이 들고 가지 않은 쇼핑백이 쓰러져 있었다.
바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사헌이 어긋난 문 틈새를 돌아보았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던데. 주변에 도움을 청할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찌 됐든 백유성이 알아서 할 일이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간 사헌이 바뀌는 층수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문이 열린다.
올라타기만 하면 되는데도, 사헌은 멈춰 있었다.
“최의현.”
사헌이 고개를 돌렸다.
의현은 유성의 집 문고리를 쥐고 있었다. 안 잠겼나. 한 뼘 정도 열린 문틈으로 어렴풋이 집 안의 풍경이 보인다.
“슬슬 회사 복귀해야 할 시간일 텐데?”
“무슨 상관이야?”
“지금 거기 들어가면 저녁까지 안 나올까 싶어서 하는 소리야. 내 기억으로는 할머님하고 약속도 있었던 것 같은데. 잠깐만.”
사헌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김혜령 실장. 의현의 어머니인 최문경 사장의 수족이자 의현을 전담해 지켜보는 여자였다.
“실장님, 의현이 일정 좀 확인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야!”
의현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사헌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았다. 이를 가는 눈빛은 날이 섰지만 아직 어린애일 뿐이다. 자기 일도 제대로 책임지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놀러 다니는.
“어머니한테 힘들게 받은 결혼 허락, 다시 뺏기고 싶은 거 아니면 행실에 주의하지?”
“네가 참견할 일은 아니잖아?”
“궁금해서. 그러는 너는 할아버지가 회사 너한테 물려주실 것 같니? 아직도 일곱 살 때처럼 노느라 바쁜 애한테.”
의현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사헌은 조용히 웃으며 의현의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갔다.
곧장 의현의 핸드폰이 울었다. 애 보기 담당이 일을 열심히 하나 보네. 사헌이 속으로 비꼬는 동안 의현은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아직 머물러 있던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같이 타고 내려갈까 고민했지만, 거기까지 자극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정도 해 줬으면 됐겠지.
최의현한테든, 백유성한테든.
주차한 차로 돌아온 사헌은 가장 먼저 시계를 확인했다.
내비게이션에는 본래 오후에 볼 예정이었던 공장 경로가 설정되어 있었다. 새 설비를 들이고 라인을 확장하면서 일정은 더욱 빡빡해졌다.
사헌이 습관처럼 손목시계를 두드렸다. 스스로에게 하는 재촉이었다. 사헌의 세단이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운전하는 내내 사헌은 숨을 마실 때마다 눈썹 사이를 좁혔다.
차에는 유성이 남긴 달콤한 냄새가 온통 배어 있었다. 창문을 열고 달려도 폐로 스며들었다. 미처 닫아 주지 못하고 온 유성의 집 문이 떠올랐다.
“망할 페로몬 트릭.”
욕설을 씹으면서 사헌이 운전대를 돌렸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차는 떠나올 때보다 더 빠르게 달렸다.
* * *
형질이 발현된 시기는 10대 후반이었다.
죽을 만큼 열이 끓어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살이 저미는 것처럼 아팠다. 그때의 나는 온통 땀에 젖은 침대에 웅크린 채로 금세라도 내가 어떻게 되어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끼니마다 방문 앞에 놓이는 식사를 받으러 걸어갔다 오면 왠지 모르게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내 발현 소식은 금세 퍼졌고, 내가 오메가라는 얘기는 이목을 끌었다.
‘하필…….’
어머니의 조그만 속삭임에 무슨 말이 생략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아니라 유민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고등학교에서 나는 착실한 모범생이었고, 조용히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애였다.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부터 꼬리처럼 따라붙는 시선들을 전보다 훨씬 많이 느껴야 했다. 복도에서, 교실에서, 다시 하굣길을 따라서.
이름도 모르는 옆 반 학생에게 억제제를 빼앗기는 짓을 당했을 때는 그저 곤혹스러웠다.
‘형은 오메가라서…… 부러워.’
유민이는 가끔 그렇게 말했다.
그 애는 큰 증상 없이 사춘기를 보냈고, 아버지의 압력으로 인해 서류에 오메가로 적혔으나 베타에 가까운 열성이었다. 내가 억제제를 챙길 때면 약통을 유난히 오래 쳐다볼 때가 있었다.
히트 사이클이 돌아올 때마다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형질의 발현은 대부분 약한 몸살감기 정도의 증세로 지나간다. 이후에 겪게 되는 주기도 그렇다.
기본적으로 형질 보유자 자체는 수가 적다. 알파나 오메가로 구분될 정도로 특질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진통제처럼 처방 없이 살 수 있는 범용 억제제가 있는 이유도 그래서다. 이를테면 유민이처럼 형질 발현도가 낮은 경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형질을 억지로 바꾸려 드는 일은 대가가 크다. 알파와 오메가에 관한 선호가 커져도 변환 시술이 합법화되지 못한 이유였다.
나는, 오메가에서 베타로의 형질 변환을 약물로 딱 한 번 시도했다. 그리고 그 위험한 시도의 결과로 특별히 맞추어 처방받은 억제제 없이는 주기를 제대로 조절할 수 없게 되었다. 평생을.
오메가로 발현된 이후는 언제나 쫓기는 기분이었다.
유민이와 멀어진 것도 형질 때문이었다.
형질 발현 이후 겪어야 했던 어떤 일보다도, 그게 견디기 힘들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알파야.’
학교 얘기를 즐겁게 늘어놓던 애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 순간, 잘못도 없으면서 죄책감을 느꼈다.
‘형이라면 이런 고민 안 하겠지?’
유민이를 앞섰기에 피아노를 그만두어야 했듯, 유민이가 열성이라면 나는 오메가여서는 안 됐다.
친구를 통해 약물을 구했다. 할 수 있다면 형질을 모조리 긁어내고 완벽한 베타가 되고 싶었다. 그 누구에게도 영향을 주지도, 받지도 않는.
약물 탓에 병원에 실려 갔던 때, 아버지는 내가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알면서 묵인했다. 꾸짖지도 않고서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단속하는 일에만 신경 썼다.
나 스스로에게까지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유민이를 원망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데는 그 애의 탓도 있다고 생각했다.
‘형이 죽는 줄 알았어.’
그래서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며 목놓아 울던 그 애한테 미안했다. 구급차에 함께 앉아 계속 내 손을 잡아 주던 손길이 아직도 기억난다.
결과적으로 내 실패는 유민이 탓이었다. 형질 변환제가 신체를 갉으며 몸 일부를 녹이고 있을 때 유민이가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사제 약품으로 형질 변환을 시도하는 건 불법이었고, 상태를 본 병원에서 나를 방치할 리 없었다.
의료 처치를 받은 나는 여전히 오메가 형질을 유지했다.
유민이는 열심히 병실에 드나들며 나를 간호했다. 서툰 솜씨였지만 노력이 느껴졌다.
내 동생은 나를 사랑했다. 악의 없는 사랑은 나를 살리고, 상처 입혔다. 우리가 자랄수록 자주 그랬다.
‘의사 선생님이 정말 큰일 날 수도 있었대.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퇴원하는 내게 새끼손가락을 걸게 하고서, 유민이는 중얼거렸었다.
‘형은 오메가인 게 싫어? 내가 형이랑 바꿀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순진한 백유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절반짜리 내 동생.
나보다 덜 영악하고, 덜 빠르고, 더 무지하고, 훨씬 아름다운.
나는 그 애가 좋았고, 미웠고, 사랑스러웠다. 유민이 앞에서는 마음껏 아플 수도 없었다. 어디서든 내 곁에는 유민이가 있었다. 그 애가 있어서, 항상 나는 혼자였다.
‘만약에 페로몬을 조절하는 기관이 이 찰흙이라고 칩시다.’
퇴원 전에 진료실에 들어가자, 두꺼운 안경을 쓴 의사가 내 앞에서 찰흙 덩이에 펜을 꾹 눌렀다. 패인 자국은 돌아가지 않았다.
‘환자분은 이런 식으로 조직에 상처를 준 거죠.’
내게 결함이 생겼다는 의미로 들렸다.
‘약은 드릴 건데, 장기간 복용할수록 몸에 무리가 될 수 있어요. 그래도 일단은 방법이 없으니까. 웬만하면 약 말고 주기를 보낼 다른 방법을 찾으시는 쪽이.’
의사의 눈길이 얼핏 내 목덜미에 머물렀다.
‘정기적인 파트너라든가.’
나는 풀려 있던 단추를 맨 위까지 채웠다.
나 자신을 버리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 후 억제제 복용을 빼먹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훨씬 더 거대해진 함정이 발목을 끌어당겼다.
발버둥 칠수록 나는 항상 더 깊이 빠지기만 했다.
“……습니다. 아뇨, 아직…….”
주파수가 불안정한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소리가 끊겨 들린다.
듣기 좋은 목소리라 계속 귀를 기울였다. 안테나가 서서히 바로 선 듯 문장도 명확해졌다.
“그래요. 실무자분들한테는 그렇게 전달 부탁합니다. 그래도 한 시간 내외로는 복귀할 수 있을 겁니다.”
누구 목소리인지 눈치채는 게 내가 내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보다 빨랐다.
침실 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누운 상태로도 거실을 볼 수 있도록 침대 끝 쪽으로 움직이자 셔츠를 걸친 등이 보였다.
최사헌이 거실에 서서 통화 중이었다. 우리 집 거실에서.
내 팔에 밀려 침대 가장자리에 걸쳐져 있던 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깼네요.”
베개를 줍기도 전에 최사헌이 말을 걸었다.
“그쪽이 왜 여깄어요.”
목이 깔깔했다. 얼마나 쓰러져 있었는지 감이 안 잡힌다.
“문이 안 닫혔더라고요. 옷만 놓고 가려다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두고 갈 수가 없어서.”
“최의현은?”
“갔어요.”
“그럴 리가 없는데.”
순순히 돌아갔을 리가 없는데. 내 중얼거림을 들은 최사헌이 조용히 부연했다.
“김 실장님이 데려갔을 겁니다.”
아, 엄마한테 끌려갔단 말이지. 그 얘기를 듣자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최의현이 근처에 있기만 해도 진이 빠지곤 했다.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요?”
“설마. 좀 기다려 보다 갈 생각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다렸는데?”
최사헌은 어깨를 으쓱거리기만 했다. 반응으로 보아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닐 듯했다.
“혹시 알파가 아니라 베타예요?”
히트 사이클인 오메가하고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저토록 침착해 보이다니.
그냥 최사헌이니까 가능한 건가.
“그래서 난 여기 있잖아요.”
최사헌이 거실 바닥을 가리켰다. 환기를 위해서인지 베란다 문은 활짝 열린 채였다.
더운지 겉옷을 벗은 것 말고는 복장마저 완벽했다. 심지어 그 겉옷도 팔에 걸쳐 뒀다.
금세라도 떠날 사람의 차림새였다. 내가 깬 걸 봤으니 당장이라도 가겠다고 말할 것 같았다.
“……배가 이상해요.”
“아파요?”
친절한 반문이 이상했다. 그가 내가 아픈지, 아닌지 관심을 둔다는 게.
옷을 챙겨 온 것도, 최의현을 말린 것도. 전부.
보통은 같이 자고 싶을 때나 이러지 않나.
그러니 내게는 승산이 있다.
“모르겠어. 그냥 이상한데. 잠깐만 와서 봐 주면 안 돼요?”
최사헌은 잠시 멈춰 있다가 침실로 걸어왔다. 한 걸음씩 다가오는 그를 보면서 나는 사냥꾼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보기 좋게 잘 뻗은 신체가 나를 향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손가락 끝까지 저릴 정도로 피가 돌았다.
교미하고 싶은 알파가 곁에 있을 때 히트 사이클을 맞이한 오메가가 받을 법한 느낌이었다.
아주 감미롭고 끈적거리는 욕망이 배 속에 고였다.
“왜 안 들어와요?”
침실 문가에 선 최사헌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문지방이 넘어서는 안 될 정지선이라도 되는 듯이.
“배 어디가 이상해요. 위쪽? 스트레스 많이 받았으니까 경련일지도 모르겠네요.”
“잘 모르겠어. 와서 만져 볼래요?”
배를 덮은 이불을 걷어 내며 묻자 최사헌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만져 본다고 내가 알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요.”
“그래도.”
나는 최사헌이 저 낮은 문턱을 넘게 하는 데 온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프단 말이야.”
일곱 살배기 애가 썼더라면 어울렸을 말투였다.
몇 초는 반응이 없던 최사헌이 마지못해 침실로 발을 디뎠다. 머리도 제대로 못 가누는 주제에 나는 사냥감을 덫으로 몰아넣은 듯한 기쁨을 느꼈다.
“만족스러워요?”
침대 옆에 서서 나를 보며 최사헌이 물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최사헌의 허벅지에 닿자마자 바로 손이 붙잡혔다.
“장난칠 힘은 있나 봐요. 정신 차렸으면 이만 갈게요. 부엌에 뭐 좀 사다 뒀으니까 먹어요. 냉장고에 물밖에 없던데.”
“애가 필요한 거예요?”
앞뒤 없이 던진 질문은 무시당했다. 최사헌은 내 이불을 다시 끌어올려 덮어 주었다.
“혼전 계약서에 온통 애 얘기였잖아.”
“당신이 알아야 할 내용 아니야.”
최사헌이 자르듯 말했다. 그런 주제에 이불을 반듯하게 펴 주는 행동은 냉정과는 거리가 멀어 우스웠다.
“나도 갖고 싶어.”
기껏 최사헌이 덮어 준 이불을 침대 밑으로 떨어뜨리면서 나는 최사헌의 손목을 붙잡아 침대로 당겼다.
“당신 애.”
최사헌이 원하는 거라면, 그래서 최사헌과 거래할 수 있을 거라면 뭐든, 나도 갖고 싶다.
버티지 않고 침대로 끌려 들어오는 체중은 가히 육중하다. 그간은 겨우 나 하나만 감당하면 됐던 침대 매트리스가 전에 없이 흔들렸다.
사진으로 남겨 자랑할 만한 물고기를 잡을 때의 손맛이 이렇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내 몸 위에 올라탄 최사헌의 뺨을 만져 보았다. 지나치게 높지도, 낮지도 않은 광대와 턱선. 근사했다.
지금 만져 보니 최사헌의 살도 달군 쇠처럼 뜨거웠다. 나는 무릎을 세워 최사헌의 다리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렇게나 태연해 보였는데, 얼마나 잘 참고 있던 건지 붉은 기가 도는 목을 따라 땀이 배어 있다.
반응만 보면 내가 아니라 그가 러트 직전인 것만 같다.
“왜 여기 계속 있었어요?”
“말했잖아요. 쓰러진 사람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고…….”
“침대에 눕혀만 놓고 나갈 수도 있었잖아.”
“안 그래도 곧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그의 목울대에 손가락을 내렸다. 동그란 울대뼈의 촉감이 재미있다.
최사헌이 음울하게 나를 노려보았다. 굳은 인내가 긁히는 광경은 좋은 구경거리였다.
“그냥 두고 갔어야 했는데.”
맞아.
두고 갔어야지.
나는 속으로 맞장구쳤다.
보살펴야 할 정도로 약해 보였어도 친절을 베풀 만한 상대와 그럴 가치가 없는 상대를 잘 골랐어야 했다.
최사헌의 넥타이와 셔츠 단추를 풀자 잘 단련된 상체가 드러났다. 최사헌이 나를 저지할 기미가 보일라치면 나는 그의 목덜미에 가만히 입술을 댔다.
울대에 살며시 이를 세우자 최사헌의 어깨가 짧게 들썩였다.
페로몬을 눈으로 볼 수 있었더라면, 꿀처럼 진득한 점성을 지닌 오메가 페로몬이 최사헌의 살갗에 고여 흘러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거다.
굳이 페로몬을 조절할 필요도 없었다.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범용 억제제의 효과는 몇 시간도 안 갔고, 난폭한 알파의 페로몬 샤워까지 당하고 나자 내 육체는 다시 번식을 위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후회할 짓 하지 마요…….”
초점이 애매하게 빗나가 있는 눈을 깜빡거리며 최사헌이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그냥 웃었다.
“체질이 좀 특이하다고 얘기했던 거 기억나요?”
“…….”
“일반적인 억제제는 안 듣고, 따로 처방을 받아야 하는데 그 약도 몸에 무리가 간대요. 안 쓰는 게 제일 좋다는데. 그러니까…….”
“…….”
“최사헌 씨는 지금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소리죠. 몸으로 하는 봉사?”
최사헌이 무슨 생각으로 나를 동정하는지는 모르나,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무해하지 않다.
약한 것들이라고 모조리 해롭지 않은 건 아니다. 그 정도의 독은 품고 있다.
최사헌의 셔츠를 내리면서 입술도 따라 내렸다. 빗장뼈 사이의 오목한 홈, 골격에 맞추어 붙어 있는 가슴과 갈비뼈의 근육.
배꼽 부근의 단단한 살을 손가락으로 간지럽히자 최사헌이 인상을 썼다.
벨트 버클을 따자마자 정장 바지춤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드로즈는 얇고 매끄러웠다.
“와아…….”
맹한 감탄사를 터뜨리는 와중에도 최사헌의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진짜로 너무 크긴 하네.”
속옷 위로 만져 본 감상은 그랬다. 허벅지에 갈무리해 놓은 성기를 더듬으며 어림하자 사무실에서의 일들이 되살아났다.
등을 끌어안으며 지탱해 주던 팔이라든가, 콧속으로 흘러들어 오던 무거운 향기가 떠오르자 마른침이 넘어갔다.
드로즈를 약간 걷어 내기만 해도 성기 끝이 만져졌다. 미끌미끌한 액체로 젖은 선단을 나는 장난감처럼 다루었다.
최사헌은 아래만큼이나 어깨를 딱딱하게 굳혔다. 턱 근육이 도드라지며 목에 핏줄이 곤두섰다.
“여기서 안 먹으면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적나라한 대사를 던지자 최사헌의 고개가 훅 아래로 내려왔다. 쏟아지는 그림자와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탓에 내심 당황했다.
“……못 하는 말이 없어.”
최사헌이 내 손목을 꽉 쥐더니 침대 시트에 억눌렀다.
“어린애가.”
스물일곱은 애라고 불릴 나이가 아니라고 항의하고 싶었으나 입술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최사헌의 입술에서 빠져나온 혀가 아랫입술을 적시고 다시 안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무작정 입술을 겹쳐 혀를 얽었다.
아무렇게나 섞은 혀가 곧 절묘하게 엉켰다. 입 안의 점막을 문질러지고, 호흡을 빼앗기는 기분은 독한 담배 연기에 취하는 것과 비슷하게 몽롱했다.
산소가 부족해 몸이 나른히 늘어진다. 헐렁한 바지가 끌려 내려갔다. 손으로만 만져 본 두꺼운 살덩이가 허벅지를 묵직하게 압박했다.
허벅지 안쪽의 성기가 마구잡이로 문질러졌다. 살갗이 벗겨질 것만 같은 뜨거움, 아릿함, 두드러진 핏줄까지 느껴질 듯한 생생함에 다리가 떨렸다.
살그머니 무릎을 벌리자 최사헌에 의해 금세 다시 다리가 닫혔다. 이해할 수 없는 전개였다.
내가 지금 뭔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걸까. 멍한 머리로 섹스에 관해 되짚었다.
사실 경험이라고 할 만한 건 최의현과의 밤이 전부였다. 그마저 기억에 남은 부분은 고통과 지독한 열감이 다였다.
의아해하는 와중에도 훅 끼쳐 오는 알파 페로몬에 몸이 반응해 허벅지가 축축하게 젖었다. 젖은 살끼리 달라붙는 게 기분 나빴다.
눅진거리는 살갗에 발기한 성기가 비벼지면서 듣기 민망한 소리가 났다.
감각은 점점 예민해지고 머릿속은 덩달아 젖은 듯 질척대서 정신을 가눌 수가 없는데, 연한 허벅지살을 비비면서 파고든 성기는 녹아내린 입구를 건드리기만 할 뿐이라 안달이 났다.
“왜, 애, 안 하는, 데.”
힘이 빠진 손으로 최사헌의 어깨를 때리자 최사헌이 달래려는 듯 내 관자놀이에 입 맞췄다.
나는 억지로 최사헌의 어깨를 떠밀었다.
“안, 할 거면…….”
온 체중을 실어 최사헌을 뒤집고 올라타면서 나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피가 머리로 쏠리면서 흥분이 뒷덜미에 누덕누덕 쌓이는 것만 같은 감각이라니.
내 아래 깔린 최사헌이 숨을 몰아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사실 밀려났다기보다는 스스로 누워 준 것에 가까웠다. 내가 침대를 벗어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예상에 부응해 주는 대신에 나는 최사헌의 가슴팍에 더듬더듬 손을 올리고 자리를 잡았다.
“유성…….”
그제야 뭘 하려는지 깨달은 듯 최사헌이 내 이름을 불렀다. 질감이 살과는 다르게 느껴질 정도로 딱딱한 성기를 쥐고서 나는 보란 듯 천천히 내려앉았다.
“아…… 윽.”
귀두가 좁은 입구를 압박하면서 살을 찢으려는 듯 마구잡이로 밀고 들어오던 감촉이 떠올랐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최사헌은 살짝 눈을 찌푸리고 나를 보고 있었다.
혈연답게 닮은 이목구비가 기억 속 최의현과 겹쳤다.
내장까지 헤집을 것처럼 깊게 들쑤셔지면서, 베개에 이마를 묻고 헛구역질을 견디던 기억이 깜빡거렸다.
관자놀이 부근이 타는 듯 아렸다.
발바닥에서부터 긴 침이 찔러 들어오는 듯하다. 뻣뻣하게 굳는 근육을 이완하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억지로 넣으려 허리를 내리자 목에서 작게 비명이 터졌다. 도저히 전부 삽입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안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가슴을 부풀려 가며 허벅지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살덩이가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면서 좁은 데가 우악스럽게 벌어졌다. 구역감이 목을 긁었다.
“왜 그렇게…….”
서둘러 내 허리 뒤를 받쳐 지탱해 주면서 최사헌이 중얼거렸다. 귀가 먹먹해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삽입은 엉망진창이었다. 피를 보지는 않았을까 싶게 아래가 아릿했다.
우스운 건 그런데도 결합부가 질척댈 정도로 연신 흐르는 체액이었다.
“……아파.”
슬슬 최사헌이 말한 후회가 다른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악물고 심호흡하면서, 최사헌의 가슴을 짚던 손을 떼 아랫배를 더듬거렸다.
배꼽 밑이 완만하게 솟아 있는 것도 같았다. 삽입만으로 겉에 티가 날 수도 있나? 이 정도 크기면 원래 그런 걸까?
의문을 담아 배를 문지르자 최사헌이 잇새로 욕설 비슷한 말을 뇌까렸다.
“아파……요.”
눈물을 글썽거리는 나를 멍하니 보던 최사헌이 한숨 쉬었다. 골반에 커다란 손이 안전장치처럼 감겼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넣으니까.”
끊어 말하며 최사헌이 상체를 일으키고는, 나를 더 당겨 안았다.
“긴장해서 벌벌 떨면서 무작정, 넣기부터 하면, 당연히 아파.”
그는 상냥한 교사처럼 말했다. 미처 주워 담지 못한 흥분이 말 사이에 고여 숨을 흐트러뜨리는 순간이 좋았다.
데워진 손이 내 목덜미에서 시작해 등을 쓸면서 내려갔다. 애 어르듯 만져 주다 이내 허벅지와 엉덩이 사이를 쥐면서 틀어박혀 있던 것을 느리게 빼낸다.
버겁던 압박감이 덜해졌으나 이물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배 안쪽이 불편했다.
“본인이 어떻게 하는 걸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그러, 엄…… 최사헌 씨는, 후, 알아요?”
“…….”
“내가 어떻게, 해야 좋아하는지?”
도전장이라도 받은 듯 최사헌이 엷게 웃었다.
대단히 금욕적인 이목구비에 관능이 덧씌워진다. 최사헌이 아주 난잡하게 구는 모습을 상상하자 아랫배가 뭉쳤다.
어중간하게 성기를 빼내고서 최사헌은 아래가 그저 이어져 있게만 두고는 내 몸 여기저기를 만졌다.
척추 선을 쓸고, 말랑한 엉덩잇살을 문지르고, 완전히 기대도록 만들어 목에서 귀까지 이어지는 선을 따라 입 맞추곤 하는 행동이 모조리 간지러웠다.
체온으로 달아올라 습습한 공기에 알파 페로몬이 진하게 섞였다. 최사헌한테서 나는 향은, 미칠 정도로 좋았다.
힘이 빠져나가면서 허리가 떨어졌다. 걸쳐져 있기만 하던 성기가 다시 안으로 짓쳐들어오는 느낌에 허벅지가 알아서 움찔거렸다.
미지근하고 미끄러운 액체가 새었다. 말하자면 질질 싼다고 할 만한 꼴이었다.
수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처럼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에는 흥분이 과했다.
어떻게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허리를 띄우고 버티자 최사헌이 나를 꽉 안고서 내려 앉혔다.
“아, 으흑…… 앗, 아.”
학학거리는 숨이 끊이지 않았다. 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연약한 멀미가 느껴졌다. 치밀기 시작한 감각이 겁났다.
아직 다 들어가지 않았던 건지, 최사헌의 손바닥이 내 허벅지를 누르는 순간 고개가 젖혀질 정도로 무거운 자극이 치고 들어왔다.
배 안이 뭉치고, 풀리고, 긁히면서 성기에 엉겨 붙었다.
눈 뒤편에서 색색의 불꽃이 튀었다. 감전된 사람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최사헌은 잠시 멈춰 기다려 주었다.
“아프, 읏, 아, 흐읏…….”
아파, 호소하고 싶은데 정말 아픈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감각이 폭력적으로 강렬했다.
“하…… 아픈 거 아닐걸, 그거.”
그럼? 그렇게 묻고 싶어 최사헌을 봤더니 그가 웃으며 목을 울렸다.
“어떻게 해야, 좋아, 하는지 알았어요.”
최사헌이 안은 상태로 상체를 붙이자 몸이 뒤로 넘어갔다. 등을 감싸 주지 않았으면 이대로 침대에 나동그라졌을 거다.
“그냥 박아만 줘도 좋아하네…….”
속삭임이 들리고, 뒤통수가 푹신한 시트에 닿았다.
자세가 바뀌면서 자극되는 곳이 달라져 나는 배를 안고 앓았다.
“어떡, 아, 으응, 어떡해?”
흐느낌과 비슷한 숨소리가 자꾸 비강을 치고 올라왔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몸의 어느 한 군데도 똑바로 둘 수가 없었다. 발가락이 시트를 긁으며 한껏 오므라들었다.
섹스라는 게 기분 좋을 수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이런 식으로, 오감을 다 녹여 버릴 정도로 기분 좋은 줄.
억지로 깔아 눕혀져 감내해야 했던 메슥거리는 쾌감과는 달랐다.
“어떻게 하고 싶은데…… 응?”
최사헌의 목소리는 성감에 푹 젖어 무겁게 끌렸다. 말끝을 끌어올려 묻는 소리를 듣자 손발이 저릿했다.
“……줘.”
말이 자꾸 삼켜졌다. 최사헌이 내 입술에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
“아무, 생각도, 응, 못 하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기분 좋게.
“기분, 좋게…… 해 줘.”
이번에는 최사헌의 욕설이 분명히 들렸다. 된 발음을 할 때조차 깔끔하게 떨어지는 발음은 지독히 섹시하게 들렸다.
온몸이 뒤흔들렸다. 내가 위에 올라타 갈피를 못 잡던 것과 달리 최사헌은 몹시 능숙했다.
느리고 깊이 박았다가 빼낼 때면 느른한 머리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얼이 빠질 정도로 잘한다.
안의 어딘가를 찔리면 눈앞이 반짝일 정도로 기분 좋았는데, 말하지 않아도 같은 곳에 곧 원하는 만큼의 자극이 주어졌다.
최사헌은 내가 안달하며 매달리는 와중에 숨이 막힐 정도로 처박고서 천천히 안을 찧었다. 배를 불편하게 채운 이물감이 다른 감각으로 바뀌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가 나를 가르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 앗, 아, 아……!”
어느 순간부터는 눈앞이 계속해 깜빡였다.
등골을 긁는 쾌락은 차라리 공포와 닮았다. 짐승의 캄캄한 입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이 온몸이 빳빳이 긴장하며 솜털이 곤두섰다.
그러나 오로지 황홀하기만 해서 이상했다.
경멸했던 내 안의 어떤 부분, 섹스와 번식을 갈구하는 저속한 본능이 머리를 갉았다.
눈물이 눈꼬리에 맺혔다가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숨이 넘어갈 듯 취해 있을 때 최사헌이 내 머리 옆의 시트를 쥐어뜯으며 날숨을 터뜨렸다.
안을 부족함 없이 채우고 있던 성기가 밖으로 빠졌다. 이번에는 애태우는 게 아니었다.
노팅 전에 빼려는 생각이었다. 알아차리자 부글거리는 흥분 속에서 날카로운 짜증이 일었다.
여기까지 해 놓고도 끝까지 못 가겠다고? 본인도 머리 꼭대기까지 흥분해 있는 주제에.
하지만 최사헌의 등을 더 꽉 끌어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리는 후들거렸고 온몸은 이미 물먹은 솜 같았다.
넣을 때보다 커진 것만 같은 성기가 점막을 긁으며 빠져나왔다. 성기의 가운데는 이미 귀두보다 두꺼워져 있었다. 입구가 무리하게 벌어지며 내벽이 딸려 나갈 것만 같아 몸서리가 쳐졌다.
뽑혀 나온 성기가 내 아랫배 위에서 부풀었다. 가운데에 두툼한 결절이 맺혔다. 복부를 누르는 부피감을 손으로 확인하자 아주 잠시 뺀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점성이 있는 탁액이 살갗 여기저기에 튀어 있었다. 오목한 배꼽 부근으로 땀과 정액이 함께 고였다.
최사헌과 눈을 마주치면서 나는 배에 뿌려진 정액을 긁어모아 손가락과 함께 아직 다 다물어지지 않은 안으로 밀어 넣었다.
굳어 있던 최사헌의 얼굴에 성욕이 날카롭게 돌출했다.
결국 최사헌도 어쩔 수 없는 알파 따위다. 언젠가 했던 생각을 똑같이 곱씹으며 다시 이어질 난폭한 교미를 예측했다.
하지만 내 예상을 비웃듯 최사헌은 침대에서 일어섰다. 설마 이대로 나가는 건가. 혹시 욕망이 식고 나면 곧장 자리를 떠 버리는 타입일까. 궁금해하고 있을 때 최사헌이 욕실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려 먼저 씻기라도 하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그는 곧 물기를 짠 따듯한 수건을 들고 와 내 살갗을 닦아 주었다.
“욕실까지 갈 수 있겠어요?”
내 종아리를 닦아 주며 묻는 얘기를 흘려 넘기면서 최사헌의 사타구니에 발끝을 비볐다. 놀랍게도 여전히 발기한 채다.
숨을 가다듬는 최사헌의 턱 아래로 새파란 핏대가 섰다.
참을 이유가 뭐가 있지. 내가 의아해하는 사이 최사헌은 내 발을 움켜쥐고 발허리를 아플 정도로 눌러 댔다.
“아.”
“하지 마. 말로 할 때.”
“말로 안 해도 되는데.”
“…….”
“키스할래?”
진이 빠져 발음이 무뎌졌다. 내가 듣기에도 어리광 같다.
최사헌은 뜸을 들이다 내 이마에 입 맞추었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찰나에 짙은 체향이 덩어리째 밀려왔다.
갖고 싶다.
그를 올려다보며 한순간, 강렬하게, 진심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