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11)

6.

수채

이종하의 고백 이후 우리의 관계가 드라마틱하게 변했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우리는 서로 애틋해 죽는 열렬한 연인이 되지도 않았고, 썸을 타다 헤어져 눈을 마주치기도 어색한 관계가 되지도 않았다. 내가 이종하의 고백만 냉큼 받아먹고 답은 돌려주지 않은 탓이었다.

표면상으로는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림이었다. 이종하는 때가 되면 점심을 싸 들고 미술관을 찾아왔고 나는 당연하게 그 애의 호의를 받아들여 함께 식사했다.

내 퇴근이 더 빠른 날엔 고깃집으로 가서 이종하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럴 때면 이종하는 내 테이블에 혼자 먹기에 버거울 정도로 음식을 차려 주고는 일하는 내내 내 쪽을 돌아보며 눈을 마주쳐 왔다.

“뭐 해. 일 안 해?”

“너 봐.”

“보지 마.”

“예뻐 죽겠다.”

“나 간다.”

“가지 마. 있어. 좀만 더 있어. 응? 내가 안 볼게.”

우리는 입만 벙끗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입 모양을 보지 않더라도 나를 보는 이종하의 눈빛만으로도 그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애정이 철철 흘러넘치는 그 애의 눈.

한 번 맛보면 쳐내기 쉽지 않은 달콤함에 나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소주를 느릿하게 삼키는 입매로 웃음이 새어 나간다. 무슨 비밀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 간지럽고 우습다.

내가 저를 이전처럼 쳐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부터 이종하는 조금 더 대범하게 굴었다. 걸을 때면 은근슬쩍 손깍지를 끼거나 내 허리를 한쪽 팔로 감싸 안아 더운 몸을 부착하기도 하고, 아무 때나 커다란 손으로 내 뺨을 잡고 진하게 입을 맞춰 오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 봐.”

“뭘?”

“너 진짜 내가 처음이야?”

이종하의 등에 업혀 집으로 향하는 길에 불쑥 물었다. 술기운이 은근하게 도는 내 몸 때문인지, 열이 많은 이종하의 체온 때문인지 더웠다.

“나 인기 많았어. 학교 다닐 때는 맨날 책상에 편지랑 선물도 쌓여 있고, 옆 학교에서도 내 얼굴 보러 찾아오고, 고백도 하루에 세 명한테 받아 보고 그랬어. 책상 치우고 우는 여자애들 달래 주는 시간만 없었으면 아마 공부도 잘했을 텐데.”

이종하는 제 목을 헐겁게 끌어안은 내 손에 고개 숙여 입 맞추며 대답했다. 웃으라고 한 소리였겠지만 아마 사실이었을 것이다.

잘생긴 이종하, 다정한 이종하. 내가 그 나이 또래의 여학생이었다면 이종하를 보고 설레어 밤잠을 설쳤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왜 아무도 안 사귀었어?”

“너만큼 예쁜 애가 없어서.”

“이종하, 진짜 보는 눈 없다.”

“김수연이랑 학교 같이 다녔으면 좋았겠다. 교복 입고 연애하는 기분은 어떤가 싶어서.”

조금 전 상상을 들키기라도 한 것 같아 얼굴이 화끈해졌다. 아마도 그때라면 상황이 반전되어 있을 것 같다. 나는 반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여학생 1, 이종하는 전교생도 모자라 타 학교에서도 얼굴 보러 찾아오는 인기남. 괜한 심술에 딴지를 걸었다.

“누가 너랑 연애해 준대?”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졸졸 따라다니지 뭐. 이 얼굴로, 이 몸으로 들이대는데 배겨?”

“잘난 척.”

이종하의 귓불을 손으로 주욱 잡아당겼다. 이종하는 아프다고 엄살을 피우면서도 내가 불편할까 봐 엉덩이를 추켜올려 주었다.

난 널 꼬실 거고, 넌 결국 날 만날 거야. 쓸모없는 가정이지만 단호한 이종하의 대답이 기분을 들뜨게 했다.

웃음소리가 들킬 것 같아 나는 이종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고기 냄새와 땀 냄새가 배어 있는 살갗이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창문으로 깊게 스며든 따스함이 감은 눈꺼풀 위를 넘실댔다. 나는 눈을 뜨지 않고 게으른 몸만 움직여 햇빛을 피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햇빛도 나를 따라왔다. 두어 번 자리를 옮기던 나는 끈질긴 태양의 구애에 못 이기는 척 기상했다.

“모처럼 늦잠 좀 자나 했네.”

휴일을 방해받았지만 그리 불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몸 상태도 가뿐했다.

기지개를 쭉 켜며 머리맡에 둔 휴대폰을 눈으로 확인할 때, 초인종이 울렸다. 길게 한 번, 짧게 한 번. 그리고 잠시간의 정적. 또다시 길게 한 번, 짧게 한 번. 뭐가 이렇게 매번 똑같냐.

현관문을 열기 전 스치듯 돌아본 거울에 어느 멍청한 여자가 웃고 있다. 목 늘어진 셔츠에 헝클어진 머리. 세수라도 먼저 할까 하다가,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가 어색해 손으로 대충 머리를 빗어 넘겼다.

“확인 좀 하고 열어라.”

문을 열자마자 잔소리다. 이런 이종하에게 뭘 얼마나 예쁘게 보이겠다고, 세수는 무슨. 나는 입을 삐죽이며 이종하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몸을 틀어 주었다.

“어차피 너밖에 오는 사람도 없어.”

“하긴. 나 아니면 누가 너 챙기냐.”

히죽대긴. 올라간 입매가 상큼해서 봐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어제 나 그냥 가서 섭섭했어?”

“섭섭은.”

“나 좀 보고 싶었나?”

왜 저래, 진짜.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는 이종하에게 까딱하면 웃어 줄 것 같아 재빨리 그를 등졌다. 억지로 하품하며 아직 바닥에 깔린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는데, 이종하가 내 팔을 잡아끈다. 씻으라고 욕실에 등 떠밀리며 나는 불퉁댔다.

“왜. 나 더 잘 건데.”

“갔다 와서 자면 되잖아.”

“어딜?”

맨발로 욕실까지 따라 들어온 이종하가 칫솔에 치약을 짜서 내민다. 어딜 가는데? 질문에 대답 대신 얼른 씻으라며 부추긴다.

좁은 화장실에 함께 들어와 있으니 안 그래도 커다란 이종하가 더 크게 느껴졌다. 혹시 그사이에 키가 더 컸나. 아직도 자라는 중일까. 칫솔을 든 채로 물끄러미 올려다보는데,

“내가 이 닦아 줄까.”

이종하는 또 앞서 나간다.

“됐어. 애냐.”

“애면 큰일 나지. 너만 보면 나 이렇게 흥분되는데.”

“능글맞은 남자, 취향 아냐.”

끝 간 데를 모르는 이종하를 무시하고 돌아서 이를 닦기 시작했다. 씻고 나와. 뒷머리에 쪽 소리 나도록 뽀뽀하고 나가는 이종하의 등을 거울을 통해 바라본다.

커다랗고 곧은 등. 내가 할퀸 상처로 가득할 등. 그럼에도 언제든 내 앞에 내밀어질 등.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을 등.

가슴속이 기포로 가득 찬 것처럼 우글거린다. 울적한 것 같다가도 웃음이 샌다. 이게 무슨 감정일지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나는 거칠게 이를 닦았다.

이종하는 반질반질 광이 나는 파란 트럭에 기대어 서 있었다. 나는 의문스러운 눈을 하며 그 애가 열어 준 트럭 안으로 올라탔다.

조수석 문을 닫은 이종하가 차체를 빙 돌아 운전석에 올랐다. 옆집 동이네에서 빌려 왔다는 트럭 내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시트는 물론이고 바닥에도 흙먼지 한 톨 남아 있지 않았다.

“오토바이만 모는 줄 알았는데.”

안전벨트를 매면서 묻자, 이종하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듯 아쉬운 눈을 했다. 벨트를 대신 매 주며 로맨틱한 상황이라도 연출하려 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못하는 게 어디 있나.”

“그러게. 너 다 잘하지.”

나는 은근하게 말하며 남자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허벅지 근육에 힘이 바짝 들어가고, 날 향해 돌린 얼굴엔 당황이 짙게 배어 있다. 나는 미련 없이 손을 떼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뭐 해. 출발.”

“아씨, 진짜!”

그제야 놀림당한 걸 알고 빽 소리를 내지르는 녀석을 보며 나는 삼켰던 웃음을 흘렸다.

이종하가 모는 트럭이 부드럽게 주행을 시작했다. 나는 창문을 내렸다. 살랑이듯 내부로 들어온 여름 바람엔 장마의 기운이 전부 걷혀 있었다.

제멋대로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그대로 둔 채 손을 창밖으로 슬쩍 뻗었다. 기분 좋다. 그런 말이 절로 나올 만한 날이었다.

20분 남짓 샛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계곡이었다. 나무와 수풀이 한적한 계곡을 둘러싸고 있다. 내게 튀긴 닭을 먹이겠다고 데려갔던 청보리밭만큼이나 풍경이 좋았다.

너는 얼마나 더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고 가슴에 품으며 자라 왔을까. 나양에서 나고 자란 이종하가 처음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물 내음을 맡으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이종하는 수박을 계곡물에 넣어 두고 돗자리를 힘 있게 털어 펼치며 분주히 움직였다. 돗자리 위로 정성스럽게 싸 온 김밥이며 간식거리를 올려 두는 그 애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가 싼 거야?”

“응. 먹을래?”

“조금 있다가.”

“여기 좋지?”

“어.”

“여기 데려온 거 네가 처음이야.”

어느 틈엔가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있는 이종하에게 영광이네, 하고 답했다. 이종하의 눈이 살짝 접히는 것이 예뻐 나도 따라 웃었다.

우리는 신발을 벗고 발만 찰박찰박 적실 정도로 담근 채 계곡을 따라 걸었다.

바람과 새와 물이 만들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조용히 걷기도 하고, 때때로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다. 마디를 얽어 잡은 손의 감촉이 좋아 나는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소풍 온 어린아이처럼.

짧은 산책을 마쳤기 때문인지 첫 끼여서인지 김밥이 술술 들어간다. 속이 알차게 들어갔는데도 잘린 단면이 흐트러지지 않는 김밥은 모양새만큼이나 맛도 좋았다. 보냉병에 담아온 차가운 커피를 따라 주며 살뜰하게 챙겨 오는 이종하에게 익숙해진 나는 어리광이 늘었다.

“나 수박.”

이종하는 신이 나서 물에 담가 둔 수박을 가져왔다. 잘 익은 수박이 쩍쩍 붉은 속을 드러냈고, 그 가운데 가장 단 부분은 이종하의 손에 들려 내 입으로 들어왔다. 이종하는 어미 새처럼 부지런히 수박의 속살을 퍼다 날랐다.

수박과 함께 긴 손가락도 입안으로 들어왔다. 이곳으로 오기 전, 녀석의 긴장한 허벅지를 쓸어내리고 모른 척했던 것에 대한 복수인가. 나는 장난기에 응해 녀석의 긴 손가락을 쪽 빨았다. 순식간에 벌게지는 이종하의 귓불을 모른 척하며 돗자리 위로 털썩 드러누웠다.

“아, 천국이다.”

하늘을 가리는 파릇한 나뭇잎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그 위로 미남의 얼굴이 불쑥 들어온다.

웃지 않는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이마에, 콧등에, 입술에 차례로 입술이 닿았다. 더 깊숙이 들어올 혀를 맞이하려는 순간 입술이 산뜻하게 떨어져 나갔다.

나는 작게 벌어진 입술을 오므리며 눈을 떴다. 이종하는 등을 돌린 채 가방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 애가 꺼내 든 것은 크로키북과 연필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몸을 옆으로 굴려 팔꿈치에 머리를 괴었다. 나에게 짧게 시선을 준 이종하는 계곡으로 새침하게 시선을 돌리고는 스케치를 시작했다. 심지어 나를 그리는 것도 아니고 풍경화를 그리시겠단다.

그러나 어이없던 마음은 금세 사그라졌다. 아니, 애초에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사각사각, 종이에 연필심이 그어지는 소리가 좋다. 집중하고 있는 이종하의 옆얼굴은 더 좋았다.

이종하는 빠르게 한 장을 다 그리더니 다음 장을 넘겨서 또 슥슥 그려 냈다. 그 소리를 음악처럼 듣고 있다가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수박이 담겨 있었던 계곡물에 발을 다시 밀어 넣었다. 시원하게 감기는 물이 종아리를 스쳐 허벅지까지 넘실댄다.

허리까지 잠길 정도로 깊숙이 들어와서는 고개를 돌렸다. 이종하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눈이 마주치고 내가 웃자 이종하도 따라 웃는다. 하얗고 고른 치열은 내가 좋아하는 녀석의 부분 중 하나였다.

“이종하.”

들릴 듯 말 듯 입 모양을 벙긋거리며 손으로 물을 튕겼다. 이종하가 크로키북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목한 손바닥에 물을 담아 물장난을 치자 이종하가 못 이기는 척 몸을 일으켰다.

팔을 교차로 들어 올려 셔츠를 벗어 던진 녀석이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옷은 왜 벗고…….”

“아까 못 했던 거마저 해야지, 우리.”

“웃기지 마.”

“진짠데.”

나는 슬슬 뒷걸음쳤다.

“넌 아까 기회를 잃었어.”

“기회는 또 만들면 되지.”

사냥감을 노리는 들짐승처럼 이종하의 눈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고 나는 본격적으로 도망쳤다. 그래 봤자다. 순식간에 나를 따라잡은 이종하가 등 뒤에서 덮치듯 끌어안았다. 단단한 품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칠수록 남자에게 힘이 들어갔다. 차가운 물이 이리저리 튀어 우리를 적셨다.

그것으로 멈추지 않은 이종하는 나를 안은 채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녀석에게 안긴 등은 뜨겁고 가슴으로 스며드는 계곡물은 차갑다.

짜증보다는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뱃속이 간질간질했다. 머리까지 흠뻑 젖는 동안 우리가 내는 웃음소리가 한적한 공간을 청명하게 울렸다.

“감기 걸리겠다.”

“그걸 걱정하는 사람이 머리까지 물에 담갔어?”

“하하, 미안.”

한참을 몸을 부대끼며 놀다 물 밖으로 나왔을 때, 이종하는 내 건강을 염려하며 벗어 두었던 제 셔츠로 나를 닦아 주었다.

얼굴과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귓속까지 꼼꼼하게 닦아 주는 이종하의 벗은 어깨를 잡고 발꿈치를 들었다. 물기가 툭툭 떨어지는 말끔한 턱에 키스하자 이종하의 손이 일순 멈추었다.

이종하와 눈을 맞춘 채,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대었다. 이종하가 오늘 내게 보여 준 이 완벽한 시간에 대한 답례였다. 천천히 허리를 끌어안는 강인한 팔에 기대어 나는 조금 더 깊숙이 녀석에게 키스했다.

눅눅한 공기, 타는 듯한 열기가 한 꺼풀 꺾인 것을 보면 여름도 끝나가고 있는 듯하다. 전시가 폐하면 흔적도 없이 떠나려던 최초의 계획과는 많이 동떨어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종하는 틈만 나면 나를 데리고 집 밖을 돌아다녔다. 집 안에서 몸을 나누는 것만이 나를 만나는 이유가 아니라고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나 역시 그 애를 따라 나양의 곳곳을 누볐다. 이 조그마한 동네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볼거리가 있었다. 이종하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다.

“이종하, 잠깐만.”

“왜.”

“저기 좀 세워봐 봐.”

우리는 오토바이로 동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오락실이 보였다.

나양에 처음 왔던 날, 쏟아지는 비를 피해 들어갔던 어둑한 오락실.

이종하를 처음 만난 곳이었다. 을씨년스럽던 당시의 기억과는 다른 모습이 구미를 끌었다.

“오락하자고?”

“너 동전 있어?”

“없는데. 방법은 있지.”

주인마저 자리를 비웠는지 오락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종하는 오락실 안에 난 작은 방을 열고는 종이 상자에 담긴 동전을 한 움큼 쥐고 돌아왔다.

동전을 내가 앉은 게임 기계 위에 대충 던져 놓고 몇 개만 기계에 넣었다. 비행기에서 총알이 나오는 게임이 시작되었다.

황당하다는 내 눈을 마주한 이종하가 시작하라며 턱짓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모는 비행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추락했다. 처음에는 한 판도 못 깨다 나중에는 두 판 정도는 깨게 되었다. 더 나중에는 새 판을 시작할 때 비행기를 고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전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종하가 동전을 채워 주었다. 동전의 출처를 석연치 않아 하던 나는 어느새 게임에 몰입해 있었다.

“왼쪽. 왼쪽에서 오는 것도 피해야지.”

이종하는 나를 뒤에서 끌어안듯이 바짝 붙어 앉아 조언했다.

“위에서 내려오는 거 먹어. 그건 총알 아니야.”

그 애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버튼을 눌렀음에도 내 비행기는 추락했다.

“에이, 죽었다. 한 판 더?”

“아, 짜증 나. 이거 기계 좀 이상한 것 같아. 버튼이 안 먹혀.”

남은 동전 두 개를 마저 밀어 넣는 이종하의 팔을 밀쳐 내고 몸을 일으켰다. 이종하는 벗어나려는 내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 아예 제 다리 위로 앉혀 버렸다.

“더 하기 싫어?”

“너 하든가.”

“알았으니까 나 하는 거 봐.”

이종하는 나를 무릎에 앉힌 채 게임을 시작했다. 나는 커다란 품에 잠자코 안겨 게임을 지켜보았다.

건강한 심장 고동이 등을 울리는 것은 이제는 익숙해진 감각이다. 이종하는 내가 겨우겨우 도달했던 지점까지 단번에 돌파했다. 그는 손으로 하는 건 뭐든 잘했다. 게임도, 그림도, 요리도, 그리고 나를 달뜨도록 만드는 것마저.

지난밤 나를 거칠게 몰아붙이던 이종하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뒷목에 입술이 닿았다. 나 혼자 괜히 의식하는 게 아니었다. 반응 없이 가만한 내 뒷목에 잘난 콧날이 아무렇게나 비벼지기 시작했다. 김수연, 내 이름이 그의 목울대에서 길게 울렸다.

“나 좀 봐봐.”

“…….”

“얼굴 보고 싶은데.”

묘기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쏟아지는 폭격을 피하던 이종하의 비행기가 추락했다. 게임 종료 문구에서 시선을 뗀 나는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이종하의 길쭉한 눈매가 휘어진다. 볼을 살살 쓰다듬는 손길을 피해 고개를 틀어도 그 애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왜 이렇게 앉아 있어. 치마 입고.”

“네가 앉힌 거잖아.”

올라간 치마 아래로 하얀 다리가 비죽 나와 있다. 이종하의 앞에서는 무방비해진다. 나는 무안한 마음을 숨기려 툴툴대며 치마를 내렸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도 덧붙였다.

“왜. 치마 입고 이러고 앉아 있으니까 하고 싶나 봐?”

“……너는 못 하는 말이 없어, 계집애가.”

이종하가 치마를 내려 주었다. 저도 흥분한 주제에 나만 탓하는 이종하가 얄미웠다. 먼저 달라붙었던 게 누구인데 혼자만 멀끔한 척하느냔 말이다. 냉면이나 먹으러 갈까 하며 딴소리하는 녀석에게 오기가 일었다.

“그거 말고 다른 거 하자, 우리.”

“뭐?”

순진한 얼굴로 되묻는다. 그 얼굴을 무너뜨리고 싶다.

“섹스.”

“…….”

“지금 하자. 여기서.”

금붕어처럼 입만 달싹이는 이종하에게 어차피 주인도 없잖아, 응? 하며 답지 않게 사근사근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인지 그 애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귀여워. 사랑스럽다.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면 더 괴롭혀 주고 싶고, 나를 안고 싶어 흥분하는 남자의 열기에는 가슴이 저릿해진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심보였다.

“수연아.”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내가 그 애를 휘두르는 게 아니다. 그 애가 나를 휘두르고 있다. 무엇에도 심드렁하던 나를 네가 이렇게 만들었다. 웅크려 있던 심장을 네가 이렇게 건드려 놨다. 사람을 잘도 유치하게 만들어 놨어.

그러니까 이종하, 다 네 탓이야.

나는 혀를 내어 이종하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할짝였다. 아씨, 버럭 화를 낸 이종하가 더는 못 참겠는지 입술을 짙게 맞물려 왔다.

불편하게 고개를 튼 채 녀석과 키스했다. 안으로 파고드는 혀가 뜨거웠다. 숨이 급했다. 서로의 입안을 오갔던 타액이 입 밖으로 흐르자 그 애가 곧바로 고개를 숙여 내 턱을 핥아 올렸다. 흥분된 몸이 절로 들썩였다.

“으응.”

이종하의 손을 잡아서 벌린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허벅지 끝까지 올라간 치마 안으로 넣으려 하자 그가 손에 힘을 주어 버틴다.

“왜.”

“지금 안 돼.”

“그러니까 왜.”

“콘돔 없어.”

이종하는 답지 않게 위생 관념에 철저한 타입이었다. 이종하의 손이 땀으로 젖은 내 허벅지를 달래듯 어루만졌다. 뒷목을 빨아올리는 입술에 내 몸은 점점 더 달아올랐다. 흥분한 남자가 내뱉은 한숨 역시 뜨거웠다.

허벅지를 쥐던 커다란 손이 올라와 속옷 위를 스쳤다. 젖은 곳을 달래려 이종하가 손바닥 전체로 속옷 위를 압박했다. 다른 한 손은 티셔츠 위로 가슴을 둥글게 말아 쥐었다. 나를 달래듯 내 몸 구석구석을 만지는 그 애의 손길이 애틋했다. 나는 이종하의 단단한 가슴에 기댄 채 작게 호흡했다.

“수연아.”

낮은 부름에 질끈 감겨 있던 눈을 떴다. 시야에 이종하의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입을 맞춘 이종하가 나를 일으켰다. 흥분에 잠겨 있던 나는 어리둥절한 채 그 애의 앞에 서 있었다. 이종하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너 무슨…….”

눈을 마주하며 이종하가 옅게 웃는다. 그의 손에 속옷이 무릎까지 끌어 내려졌다. 막을 새도 없이 남자의 뜨거운 혀가 아래를 빨아들였다.

머리를 떼어 내려 할 때마다 이종하는 내 허벅지를 꽉 끌어 쥐고 더욱 깊숙한 곳까지 헤집었다. 채워지는 느낌에 몸이 덜덜 떨려 왔다. 나도 모르게 조인 다리 사이로 이종하의 머리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아!”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치마폭에 가두어지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들고 이종하가 말했다.

“소리 내지 마.”

“……싫어.”

“밖이잖아. 나 걱정돼서 미칠 것 같아.”

그 애의 목소리가 으르렁댔다. 평소보다 더 낮아진 음색에 나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이종하는 다시금 내 다리 사이로 그 잘난 얼굴을 묻었다. 압박하듯 빨아들이는 입술, 노골적인 혀의 움직임, 쭉 뻗은 콧대가 건드리는 지점, 거칠고 뜨거운 이종하의 호흡.

내 손은 이종하의 귓불을 쥐었다가 어깨를 짚었다 부산스럽게 굴었다. 입술을 깨물어 소리를 죽이는 대신 허리를 움직였다. 허리를 비틀 때마다 그의 혀가 황홀하게도 박혀 들었다가 빠질 듯 입구까지 밀려났다. 부풀어 오른 곳을 미끈해진 혀로 문지르곤 또다시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나는 젖어 들대로 젖어서 이제 그에게 몸을 완전히 기대고 허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정말이지 미칠 것 같았다. 내 생에 이런 섹스는 처음이었다.

“……하아.”

온몸이 땀으로 완전히 젖었을 때에서야 이종하가 얼굴을 떼어 냈다. 번들해진 입가를 손등으로 훔쳐 내고는 굽혔던 무릎을 폈다. 순식간에 눈높이가 역전되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나를 그 애가 꽉 끌어안아 왔다. 열 오른 뺨을 비비며 이종하가 귓가에 속삭였다.

“집에 가자.”

아주 잠시 머무를 집. 여름이 끝나면 떠날 집. 그리하여 변변찮은 살림살이만으로 흔적을 죽이며 보낸 집. 여행 뜨내기처럼 짐도 제대로 풀지 않고 깨금발로 지냈던 그 공간이 이종하의 입에서 불리는 순간,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안락하게 다가왔다.

집에 가자고…….

이종하는 늘어진 내 몸을 꼼꼼히 추슬러 오토바이에 앉혔다. 나는 어른의 보살핌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애도 아니고, 손을 다친 것도 아니었다. 고작 삽입 없는 섹스를 나누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 애가 오토바이에 앉히고, 헬멧을 씌우고, 내 팔을 제 허리에 두를 때까지 넋을 빼고 있었다.

“김수연.”

걱정이 됐는지 이종하가 제 허리에 맥없이 놓인 손을 꼭 잡으며 내 이름을 불러왔다. 나는 단단한 어깨에 턱을 기댄 채 그 애와 눈을 마주했다.

“다시는 밖에서 이러지 말자.”

“치마 속에 머리 넣은 게 누군데.”

“네가 좋은 건 나도 좋아. 근데 걱정된단 말이야.”

“뭐가.”

“불안해.”

누가 너 볼까 봐 신경 쓰이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는데 그러는 것도 걱정되고, 그런데도 못 참고 너 건드린 나도 싫고. 이종하는 제 불안을 쏟아 내듯 털어놓았다. 종알거리는 게 귀여웠다. 그래서 못 참고 웃었다. 그런 나를 따라 이종하도 웃었다. 어이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이었다.

“뭘 잘했다고 웃어! 아, 진짜! 사람을 왜 이렇게 만드냐?”

“지금 내 탓하는 거야?”

“내 탓하는 거다! 내가 병신이지 뭐. 너한텐 안 된다는 말이 왜 이렇게 안 나오는 줄 모르겠어. 머리로는 안 된다, 하지 말자 생각하는데도 못 그래. 그래서 가끔 되게 억울한 거 알아?”

피차일반이라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너 때문에 내 맘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걸 너도 모르겠지. 시답지 않은 대화를 종료하려 나는 이종하의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출발해. 집에 가자며. 등에 입술을 댄 상태로 중얼거리는 불명확한 발음을 알아들은 이종하가 시동을 걸었다. 선선한 바람을 가르며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눈앞의 중년 커플은 새로운 데이트 장소라도 발견한 듯이 자주 미술관을 찾았다.

팸플릿을 손에 쥐고 점잖게 그림을 감상하던 처음과 달리 이제는 그림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은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솟을 즈음 찾아와 미술관 내부의 가장 볕이 들지 않는 곳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러고는 노을이 지기 전 말없이 돌아가곤 했다.

애틋하게 서로의 손을 쓰다듬는 장면을 엿보려 한 것은 아니었다. 보지 않았더라도 둘의 관계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상대를 향한 눈에서 비어져 나온 절절한 마음이 누군가와 닮아 있어 모를 수가 없었다.

이종하가 나를 보는 눈. 어쩌면 내가 이종하를 보는 눈일지도 몰랐다.

부러 기척을 내려 한 것은 아닌데, 내 등장에 화들짝 놀란 그들은 빠르게 맞잡은 손을 떼어 낸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미술관을 빠져나가는 성급한 발걸음에 입구 테이블이 채였다. 그 위에 쌓아 둔 전시 도록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도 아랑곳없이 그들은 빠르게 멀어져 갔다.

“누가 뭐래나.”

고작 이 정도에 겁을 집어먹는다. 제 감정 하나 추스를 배짱도 없으면서 무슨 사랑을 한다고.

그들이 흐트러트리고 간 도록을 정리하는 내 입가에 비릿한 비웃음이 담겼다. 나 자신을 향한 조소이기도 했다. 내 주제에 누굴 사랑한다고.

제멋대로 펼쳐진 도록 속 그림을 보며 이종하를 떠올렸다. 이종하에 대한 생각은 시도 때도 없이 내 머릿속을 점령했다. 정확히는 이종하가 그린 그림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 애가 그린 계곡의 물줄기, 나뭇잎의 결, 어슷하게 이어진 산기슭 같은 것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애의 그림은 사람의 눈길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문득 그 애의 수채화가 궁금해졌다. 연필 선만으로도 많은 걸 표현해 내는 이종하가 물감을 쓰면 어떨까. 그 애가 색을 담아 그려 낼 나양이 보고 싶었다.

나는 퇴근하자마자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 물감과 팔레트를 샀다. 붓을 호별로 고르고, 물감통도 크기별로 두 개를 골라 화구 통에 담았다. 이젤에 수채용 스케치북까지 겨드랑이에 끼고 집으로 돌아와 베란다에 화구를 몽땅 숨겼다.

내친김에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입시 때 하던 대로 팔레트에 물감을 색색별로 듬뿍 짰다. 굳어 가는 물감을 보며 나는 이종하에게 선물할 생각에 홀로 들떠 있었다.

마침 이종하가 바쁜 날이었다. 고깃집에 새 고기가 들어오는 날이면 가게에 손님이 넘쳐 밤늦게까지 가게를 정리해야 했다. 그런 날엔 이종하가 새벽에 돌아오니 물감을 굳혀 숨기기에 딱이었다. 물감은 주인 몰래 착실하게 굳어 갔다.

“수채 해 봤어?”

“…….”

“받아. 주려고 가져온 거야.”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이종하는 내가 내민 팔레트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내 예상에는 없던 행동이었다.

어젯밤 내가 생각한 이종하는 팔레트에 한가득 짜 놓은 수채 물감을 보고 신나 했었다. 그러나 입을 꾹 다문 채로 내 앞에 선 이종하는 꼭 수채 물감을 처음 보는 어린아이 같았다. 대학 때로 돌아가 미술 학원 강사가 된 기분이었다. 뭐라도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미술 학원 가면 기초 데생 배우고 바로 수채 들어가거든. 너 연필로 명암 표현하는 거 보면 수채도 금방 배울 것 같아서.”

“해 본 적 없는데.”

“해 보면 되지.”

“……가르쳐 줄 거야?”

이종하는 팔레트를 받아 드는 대신 되물었다. 궁금해서 묻는 투가 아니었다.

답지 않게 주저하는 모습이 이상해 크로키는 누구한테 따로 배운 거였냐고 묻자, 이종하의 두 눈이 내 시선을 피해 달아난다.

하기 싫은 대화에서 침묵으로 도망치는 건 엄마에게 질질 끌려와 억지로 미술 학원 문턱을 넘은 초등학생이 하는 짓이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엽기도 하고, 얄밉기도 하고. 나는 부러 사근사근한 말투로 이종하를 부추겼다.

“혼자 알아서 배운 거잖아. 수채도 할 수 있어. 나가서 그려 보자.”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그래, 라는 말을 굳이 덧붙이며 이종하에게 수채용 스케치북과 화구 통을 쥐여 주었다. 그때까지도 팔레트는 여전히 내 손에 있었다.

“안 갈 거야?”

평소와 다르게 내가 앞섰고, 이종하는 뒤따랐다.

우리는 청보리밭으로 갔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이었고, 청보리는 눈이 부시도록 빛났다. 풀 냄새가 옷에 밸 기세로 온 사방에 진동했다. 허공에 붓을 그으면 초록색이 담뿍 묻어날 것 같은 짙은 녹음이 한창이었다.

나는 이 풍경을 이종하가 어떻게 스케치북에 옮겨 담을지 궁금해 밤에 잠도 설칠 지경이었다.

내 속도 모르고 이종하는 심드렁하게 서 있었다. 그 모습에서 나는 문득 선배를 떠올렸다. 그림으로 옮기지 않고는 못 견딜 풍경을 앞에 놓고도 감흥 없이 있다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화폭에 담던 유일한 사람.

나는 크게 고개를 저어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 냈다. 떨쳐 내려고 이젤을 펼치고 스케치북을 올리며 부산을 떨었다. 화구 통을 열고 팔레트를 펼쳐 들었을 때 이종하의 그림자가 내 쪽으로 졌다. 머뭇대며 다가오는 그림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뒤돌아 이종하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고 싶은 대로 그려 봐.”

“…….”

“너 여기 좋아하잖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이종하가 이젤 앞에 섰다.

“오래 걸릴 거야.”

“그래.”

내가 보지 않길 바라는 것 같아서 떨어져 그늘에 앉았다. 앉은 자세는 점점 그대로 기울어 모로 누운 채로 잠에 들었다. 눈을 다시 뜰 때까지도 이종하는 스케치북 앞에 있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나는 조심스레 이종하의 뒤로 다가갔다.

“다 그렸어? 봐도 되나.”

이종하의 그림에는 색이 없었다. 오로지 남색 물감만 이용해 명암으로 표현한 녹음에 기가 막혔다. 이종하가 반해 몇 번이고 봤던 선배의 그림을 따라 그린 꼴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종하의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선배의 그림을 흉내 낸 사람은 나를 포함해 수없이 많았지만, 선배가 수묵으로 옮긴 짙은 녹음을 이토록 완벽하게 베껴 낸 이는 지금껏 아무도 없었다.

“너 이 그림…….”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선배의 그림을 흉내 냈다는 말로만 설명하기에 이종하의 첫 수채화가 아까워서였다.

“할 수 있는 만큼 한 거야.”

“할 수 있는 만큼 남의 그림 따라 했단 뜻이야?”

이종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 하고 싶은 대로 그려 보라고 했잖아.”

어쩌면 선배만큼 그릴 거라고, 그 이상의 잠재된 재능이 있다고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코 이런 걸 바라진 않았었다.

“누굴 따라 한 건 아니야.”

붓을 내려놓은 이종하가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그냥 내 눈엔 이렇게 보여. 어둡고, 덜 어둡고 다 그래.”

이종하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따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 눈에 보이는 대로 네가 볼 수 있게 그리고 싶어도, 난 그렇게 못 해. 내가 고른 게 무슨 색인지도 몰라.”

이종하는 색을 볼 수 없다.

“어둡게 보이는 색 중에서 아무 거나 고른 거야. 이게 검정이길 바라면서. 나한텐 다 그렇게 보이니까.”

팔레트에는 하양도, 검정도 없다. 수채를 배우는 모든 학생들은 하양과 검정을 쓰지 않고 그리는 법을 배운다. 이 세상 풍경에는 완벽한 하양도 완전한 검정도 없다는 강사의 말을 굳게 따른다. 나 역시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가르쳤다.

나는 틀렸다. 내가 알고 만나고 가르치고 배워 온 그 누구도 틀렸다. 세상에는 하양과 검정만으로 세상을 보는 이들도 있음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종하, 나는…….”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키지 않아 하던 이종하를 끌고 와 그림을 그리게 한 것도, 색맹임을 고백하게 한 것도 나였다. 어떻게 지금까지 몰랐을 수가 있지. 어떻게.

시장에서 내 옷을 골라 줄 때만 해도 장난인 줄 알았다. 오래된 흑백 영화를 좋아하는 이종하가 어쩐지 귀엽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이종하의 결핍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나를 탓했다.

지금껏 나는 그에게 얼마나 무심했던가.

“어때? 해 본다고 해 봤는데, 미술관 그림 흉내 낸 것 같아?”

“…….”

남색과 짙은 남색, 회색과 짙은 회색, 보라와 짙은 보라, 검정에 가까운 초록, 깊은 빨강. 비슷한 명암을 가진 수많은 어두운색들 중에 이종하가 고민 끝에 고른 것은 남색이었다. 남색 하나만으로 눈에 보이는 양달과 음달이 표현된 청보리가 흐드러지게 펼쳐져 있었다.

“왜 아무 말도 없어. 별로야?”

“…….”

“나 색맹인 거 때문에 그래?”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림을 등졌다. 이종하를 볼 수도 없었고, 이종하가 그린 그림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방황하는 내 옆으로 이종하가 따라붙었다.

“몰랐어.”

“당연히 모르지. 내가 말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아.”

“하기 싫다고, 그렇게 말하지 그랬어.”

“하기 싫은 게 아니라 좀 무서웠어. 네가 나한테 실망할까 봐. 네 기대에 못 미칠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게 제일…….”

“그렇게 말하지 마.”

네가 여태껏 버텨 오고 숨겨 온 결핍이, 남들은 다 가지고 태어나는 당연한 것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지 못한 절망과 아픔이 겨우 내 실망보다도, 나 같은 것보다도 못한 거라고 말하지 말라고. 나는 이종하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난 괜찮아. 신경 안 써도 돼. 너 부담스러울까 봐 말 못 한 거야.”

나 같은 걸 너보다도 위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기엔 이종하가 나를…….

“근데 내가 너를 남들 다 보는 것처럼 제대로 못 보는 게 얼마나 속상한지 그건 알아줬으면 좋겠다. 옷도 못 골라 주고.”

이종하는, 나를 너무도 사랑했다. 내 뺨을 어루만지는 이종하의 두 눈이 덜덜 떨렸다. 이종하는 무서워하고 있었다. 색을 못 보는 저한테 내가 실망할까 봐, 그래서 나를 잃을까 봐.

“미안해.”

“울지 마. 왜 울고 그래.”

“미안해. 너 내키지도 않는 거 하게 해서. 그게 제일 미안해.”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너 좋아하는 그림 그리면서 신나 할 줄 알고. 그렇게 내 생각만 했다. 이종하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그동안 왜 색이 들어간 그림은 그리지 않았던 건지, 그 애가 무얼 좋아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이 없었다.

“미안해…….”

네가 날 사랑하는 것만 알았어.

나는 내가 널 사랑하는 것도 몰랐어.

내가 하고 싶은 어떤 말도 지금 할 수 있는 말이 되지는 못했다. 미안한 마음으로 사랑을 말할 수는 없었고, 사랑을 말하기에 나는 너무 엉망이었다.

이종하는 날 때부터 색맹이었다고 했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순간부터 우리 엄마는 미용실에서 일을 했어. 지금하고는 달리 그때 엄마는 원장할머니 보조였지만.”

당시 나양에는 유치원이라는 것이 없어 아이를 보내려면 버스로 한 시간은 걸려 도심으로 나가야만 했고, 혼자 몸으로 아이를 등하교시킬 수 없던 엄마는 이종하와 함께 미용실로 출근했다.

다행히도 원장할머니는 이종하를 어여뻐 했다. 똘똘한 이종하는 파마를 마는 원장할머니 옆에 서서 빨간색 파마 롤을 집어 달라면 작은 사이즈 롤을, 초록색 파마 롤을 집어 달라면 큰 사이즈 롤을 건네주었다.

“빨간색을 작다, 초록색을 크다. 색깔이 아니라 크기로 구분했던 것 같아.”

미용실에 손님이 없을 때 이종하는 원장할머니가 주는 과일을 집어 먹으며 낡은 소파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곤 했다. 검정색 딸기를, 하늘색 바나나를, 연두색 구름을, 새파란 립스틱을 칠한 엄마의 얼굴을 그렸다.

원장할머니는 아이의 상상력에 감탄했지만, 삶에 고단했던 엄마는 왜 이런 이상한 그림을 그렸냐며 핀잔을 주었다. 원장할머니가 사 준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도 빼앗아 장롱 안에 숨겨 버렸다.

이종하는 상상력 흘러넘치는 그림을 그린 것도, 엄마가 화를 낼 정도로 이상한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렸을 뿐이었다.

뭔가 잘못됐음을 알게 된 건 이종하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였다. 신체검사 날이었다. 반에 애들을 모아 놓고 피도 뽑고, 귀 옆에 탁탁 소리 내면서 들리는 쪽 손 들라고 하고, 숟가락처럼 생긴 거로 눈 가리고 숫자도 읽고.

“그러다가 작은 동그라미만 가득한 카드를 보여 주면서 읽어 보라는 거야. 뭘 읽으라는 건지 모르겠더라고. 거기에 뭐가 있는데 자꾸 읽으라는 건지.”

혈액형, 청력, 시력 등을 알아보는 몇 단계의 간단한 검사에서 정상 통과하지 못한 아이는 많지도 않은 전교생 중 이종하 하나였다.

미용실 보조를 끝내고 돌아온 작은방에서 엄마는 매일 술에 취해 한탄하고는 했다.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아느냐고.

그러던 것이 그날 이후로 완전히 바뀌었다. 자신의 아이가 색맹 판정을 받은 것보다, 그 사실을 초등학생이 되도록 몰랐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미안해. 미안해, 종하야. 미안해, 우리 아들. 자신을 끌어안고 아이처럼 엉엉 우는 엄마의 등을 이종하는 이유도 모른 채 토닥여 주었다.

엄마는 술도 끊었고, 더 이상 폭언을 하지도 않았다. 편모 아래서 컸다고 무시당하지 않도록 늘 옷과 가방도 시내에서 제일 비싼 것으로만 사 주었고, 누구보다 화려하고 풍성한 도시락을 싸 주었다. 일도 악착같이 배웠다. 언젠가는 엄마가 미용실 원장이 될 거라고 했다.

“밝아진 엄마를 보면서 매일매일이 오늘 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어느 날인가, 잠에서 깼는데 엄마가 내 스케치북을 보고 있는 거야. 학교 숙제로 그린 거였는데, 그걸 보는 엄마 눈이 조금만 건드리면 울 것 같더라고. 그래서 다짐했지. 엄마는 내가 그림 그리는 게 싫은가 보다. 엄마 앞에서는 절대로 안 그려야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화가였다는 것을 안 것은 이종하가 중학교 때의 일이었다. 엄마의 친구라고 찾아왔던 아줌마의 입을 통해서였다. 화가는 무슨, 애 뗄 돈도 없다고 뻗대던 비렁뱅이 주제에.

학교에서 돌아온 이종하는 책가방을 내려놓지도 못한 채 얇은 방문 앞에 서서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얘기를 가만히 듣고 섰는데, 엄마한테 미안했어. 그림 그까짓 게 뭐라고 엄마를 속여 가면서 그려야 하나.”

그때까지도 이종하는 종일 밖을 나돌았다. 집에서는 못 그리니 청보리밭이든 계곡이든 혼자 찾아가 몇 시간이고 스케치북에 옮겼다. 그렇게 그린 그림은 그날로 버려졌다. 간혹 가방 구석에 숨기기도 했으나 며칠 후엔 똑같이 버려지는 신세가 되었다.

어느 날, 이종하의 엄마가 이종하에게 물었다. 그림을 그릴 때 행복하냐고. 엄마가 도와줄 테니 공부해 보겠느냐고. 네가 행복해야 엄마도 행복하다고. 그녀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한 것은 이종하의 착각이었다.

“미친 척 엄마가 하라는 대로 미술 공부할까, 그런 생각 안 한 건 아니었는데. 용기가 안 났어. 엄마 마음에 못 박으면서 내가 그래도 되나. 어차피 색도 구분 못 하는 주제에 뭘 얼마나 대단한 걸 그리겠다고.”

말을 마친 이종하의 얼굴은 덤덤했다. 재미없는 이야기 들어 줘 고맙다며 옅게 웃기까지 했다.

나는 그런 그 애의 상처를 헤집어 놓았다. 몰랐다는 핑계로 뒷짐 지기에는 무자비한 횡포였다. 그 애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기에 더더욱 마음 쓰린 일이었다.

이종하는 웃는데 나는 울었다. 자꾸만 눈물이 났다. 이종하는 내가 흘리는 눈물을 나보다 더 아파하며 나를 달랬다.

“종하야…….”

“그냥 나 좀 안아 주라.”

나는 말없이 이종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등을 어루만지고 어깨를 그러쥐었다. 키가 한참이나 큰 이종하는 허리를 숙인 불편한 자세로 내 품에 얌전히 안겼다.

이종하는 색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종하의 그림이 좋았다. 하나의 색을 이용할 때조차 어떤 화려한 그림보다 눈길을 끌었다. 사람 마음을 움직였다. 그 애의 그림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내가 끝내 갖지 못한 능력이었다.

나는 이종하가 더 많은 시도를 하기를 바랐다. 색이 없는 많은 것들을 그 예쁜 두 눈에 담고 가슴에 채우길 바랐다. 그리하여 더 넓은 세상으로 날아가기를.

그리고 그런 바람은 내 마음을 아프도록 꾹 짓눌러 왔다. 겨우 나 따위가 그 애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던 탓이었다.

여름은 시간을 타고 착실히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종하와 나도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물감을 곱게 굳힌 팔레트를 다시 거두어 가려 했다. 이종하가 그렇게 두지 않았다. 고작해야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 산 것을 유명 화방의 고급 화구라도 되는 듯 소중히 품에 안고 돌아갔다.

색맹임을 들키면 내가 실망할까 머뭇대던 이종하는 이제는 내 앞에서도 곧잘 수채화를 그리곤 했다. 역시나 색을 쓰는 방법이 신선했다.

어린 이종하에게 크레파스를 사 주고 그림에 상상력이 넘친다며 엉덩이를 토닥여 주던 미용실 원장할머니처럼 나도 그를 칭찬해 주었다. 엉덩이에 닿아 있는 내 손을 힐끗 내려다보며 이종하가 물었다.

“왜. 끌려?”

“모처럼 순수한 칭찬을 더럽히지 말아 줄래?”

답지 않게 능글대는 이종하의 고개를 손끝으로 돌려 버렸다. 마저 그림이나 그리라는 듯이. 이종하 역시 그냥 해 본 말이었는지 산뜻하게 고개를 돌리곤 붓을 놀렸다.

비를 쏟아 내는 하늘과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가 맞닿아 있다. 명암의 차이만으로 생생하게 표현해 내는 이종하의 그림을 나는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 애가 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또 어떤 얼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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