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11)

7.

부재

여느 때처럼 일을 끝내고 찾아온 이종하는 양손 가득 반찬을 들고 있었다. 냉장고에 빈 반찬통을 꺼내고 그 자리에 새로 가져온 반찬통을 차곡차곡 채워 넣었다. 그런 이종하의 뒤에서 서성이며 뭐가 그렇게 많냐고 물었다.

“나 며칠 못 와.”

“왜.”

“어딜 좀 다녀오려고.”

“어딜.”

“조금 먼데.”

“얼마나 걸리는데.”

“잘 모르겠어. 한 3일?”

얼마 전까지의 김수연이라면 그저 관심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이종하가 스스로 이유를 말하려 해도 귀찮으니 설명하지 말라고 손을 휘휘 내저었겠지. 나답지 않게 꼬치꼬치 캐물었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이종하도 내 태도가 바뀐 것을 알아차리고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냉장고 문을 닫고 돌아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궁금해?”

“궁금하다기보다…….”

“내 얼굴 3일이나 못 본다니까 슬프지?”

이종하가 빙글빙글 웃는다. 이마가 닿도록 바짝 들이대는 잘난 얼굴을 밀어내며 코웃음을 쳤다. 나는 그 애가 닫은 냉장고 문을 다시 열고 차갑게 식혀 둔 캔 맥주를 꺼냈다.

“내가 왜.”

“진짜 손톱만큼도 안 슬퍼?”

맥주를 따서 한 모금 들이켰다. 식도를 톡 쏘며 넘어가는 시원한 탄산에도 나는 개운함을 느끼지 못했다.

“아줌마 진짜 미친 여자 같아. 아줌마 때문에 서울 갈 궁리하는 이종하가 불쌍하다.”

갑자기 왜 그 말이 떠올랐을까. 생선 가게에서 박미진이 했던 말이 생생하게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고 무시해 버리려 했는데, 은연중에 마음에 담고 있었나 보다.

이종하, 서울 가는구나. 가서 뭘 어쩌려고. 이제라도 공부해서 대학이라도 다니려는 걸까. 엄마하고는 이야기를 끝낸 건가.

이 여름이 끝나면 나는 나양을 떠난다. 이종하를 흔드는 못된 짓에는 유예 기간이 있었기에 나는 잘못된 걸 알면서도 모른 척 이 관계를 지속해 왔다.

그런데 이종하는 나와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 이종하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나 역시 어떤 식으로든 선택해야 했다. 아직은 정리되지 않아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진짜 안 슬퍼? 나 보고 얘기해 봐. 응?”

굳어 버린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이종하는 열심히 나와 시선을 맞추려고 따라붙다가 풀썩 웃고는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몇 번 더 내 얼굴에 입을 맞추던 이종하가 나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나는 맥주 캔을 쥔 손을 무릎으로 축 늘어뜨린 채 그 애의 품에 안겨 있었다. 들떠 있는 그 애의 모습이 오늘따라 낯설다.

“김수연, 나 있잖아…….”

“씻고 와.”

겨우 그 말 한마디에 이종하의 몸이 화들짝 떨어져 나간다.

“미안. 나한테 냄새나?”

팔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는 이종하에게 힘없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 피곤할 테니까 씻고 얼른 쉬라고.”

굳은 혀로 겨우 내뱉은 말이었다.

“그런 표정으로 그런 말하면 나 오해해.”

“무슨 오해.”

“빨리 씻고 와서 안아 달라는 말로 들…….”

말이 끝나기 전에 이종하의 등을 욕실로 떠밀었다. 두 명의 내가 힘껏 민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을 커다란 몸이 겨우 한 손에 쉽게 밀렸다. 뭐가 그리 좋은지 키득대는 얼굴 앞으로 문을 닫았다. 조금 뒤 물소리가 들려왔다.

남은 맥주를 홀짝이며 앉아 있다가 먼저 자리를 펴고 누웠다. 이종하가 내 안을 파고들 때면 눈앞이 하얘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천장의 벽지 무늬를 무연히 올려다보았다.

나는 이종하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그 애가 나 좋다고 찾아오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기분 내킬 때마다 같이 밥 먹고 놀고 자고 그러려고. 그저 외로운 게 싫어서 옆에 둔 걸까.

처음은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종하는 내가 허락한 적 없는 곳까지 넓게, 그리고 아주 깊숙이 파고들어 있었다. 내 안에 삐죽삐죽 돋아 있는 가시에 찔려도 아픈 줄 모르고 엉겨 붙어 있었다. 복잡할 정도로 깊숙이 얽혀든 이종하를 떼어 내려면 내 살을 많이 도려내야 할 정도로.

생각이 많아지는 것이 버거워 머리를 애써 비워 내고 또 비워 냈을 때 문 열리는 기척이 났다. 자는 척 눈을 감았다. 샤워를 하고 물기도 제대로 닦지 않은 채로 이종하가 나를 껴안았다.

“나 새벽에 일찍 나갈 거야.”

“…….”

“귀찮다고 굶고 다니지 말고. 갔다 와서 냉장고 확인할 거야.”

“…….”

“계속 자는 체할 거야?”

“…….”

“못된 여우.”

말과 목소리가 어울리지 않았다.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에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찬물로 샤워를 해 차가운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그다음은 코, 뺨, 그리고 입술. 이종하는 내게 차근차근 입을 맞추고는 떨어져 누웠다.

그날 밤, 이종하는 나를 안지 않았다.

새벽녘 먼저 깬 이종하가 내 머리를 만졌다. 나는 잠에서 깼으면서도 모른 척했다. 실은 밤새 잠들지 못한 채로 눈만 감고 있었다. 애틋하게 내 볼을 쓰다듬던 이종하가 집을 나섰다. 눈을 뜨니 텅 빈 허공만 보였다.

나는, 이종하를 감당할 수 있을까.

이종하가 말한 사흘은 금방 갔다.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고 나니 그가 돌아오는 날이었다.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이종하가 오기를 기다렸다. 집을 치우고, 밥도 하고 국도 끓였다. 냉장고에는 그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과 내가 좋아하는 맥주를 채워 넣었다.

샤워를 하고 거실에 앉았을 때에서야 자정이 넘은 것을 알았다. 몇 시에 온다고 약속한 적은 없었지만, 나는 이종하가 올 때가 지났음을 직감했다. 나는 뜬 눈으로 새벽을 보냈다. 그리고 출근했다.

사흘. 나흘. 일주일. 이종하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애의 부재가 처음은 아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그 애에게 너는 평소엔 무얼 하며 지내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동네 사람들 일을 돕는다기에 그런 걸 종일 하느냐고 되물었다. 그냥 돕는 거 아니고 일당을 받는다는 말에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었다. 은연중에 녹아 있는 무시를 알아챈 이종하는 이후로 꽤 오랫동안 나를 찾지 않았었다.

고깃집에 취직한 이종하를 내가 먼저 찾아간 것으로 당시의 갈증은 해결되었지만, 이종하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던 지금의 나는 갈 길을 잃었다. 서울을 갔다 올 거라는 짐작은 말 그대로 짐작일 뿐이었다.

퇴근 후 나는 시장을 에두르지 않고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이종하가 일하는 고깃집과 그 애가 친구들과 자주 들른다는 치킨집을 천천한 걸음으로 지나쳤다. 고깃집과 치킨집의 풍경은 여전했지만, 그곳에 이종하는 없었다. 괜히 찬 가게에 들러 사장님과 인사를 했다.

“얼굴 좋아졌네? 자기 요즘 화투 치러 안 오더라?”

나는 별말 없이 웃어넘겼다. 이종하와 사이가 좋아진 뒤로 화투판에 잘 끼지 않았다.

“생선 가게 박 사장이 자기 얘기 물어보던데.”

“그래요?”

사실 화투판을 찾지 않은 것은 생선 가게 여사장이 박미진의 친언니임을 알게 된 이유도 컸다. 박미진과 셋이 화투를 치다 인사도 없이 가 버린 이후로 여사장 보기가 편치 않았다. 여사장이 이런저런 일을 들먹이며 나를 괴롭힐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제 발 저려서겠지. 애를 상대로 유치한 말다툼을 한 것이.

“오랜만에 왔는데 반찬 좀 싸 줄까?”

“괜찮아요. 이번 주엔 반찬 해 놓은 게 많아서요. 그거 다 먹고 다음에 올게요.”

“그래, 그럼.”

편하게 웃어 보이며 찬 가게 사장님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저기 혹시, 하고 운을 뗐다가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모르는 이종하의 행방을 찬 가게 사장님이 알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서둘러 가게를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휴대폰을 뒤적였다. 그제야 지금껏 이종하에게 한 번도 전화를 걸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목덜미를 타고 급작스러운 열이 올랐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샜다.

저장한 연락처들을 훑는 대신 메시지 함을 열었다. 어느 새벽 불쑥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다.

<보고 싶다.>

꾸밈없이 적힌 네 글자만으로 그 번호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나는 답장을 하지도, 번호를 저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우지 않은 메시지만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생각할 것도 없이 통화 버튼을 길게 눌렀다.

“받아라, 좀.”

이종하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나는 내 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다. 무서워 떨고 있는 내 눈앞으로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내밀어진다. 간신히 잡은 손은 뱀처럼 교묘히 내 손아귀를 빠져나가 버리고 만다. 나는 다시금 손을 붙잡으려 팔을 뻗고 또 뻗는다.

빛을 뿌린 것처럼 시야가 환해지는가 싶더니 누군가 나를 꽉 끌어안아 왔다. 이종하였다. 안도하는 순간 이종하는 매몰차게 나를 등진다.

종하야.

이종하.

멀어지는 등을 보며 나는 멈추라고 악을 쓰고 쓰다 목소리를 잃는다. 이종하가 곁에 있을 때 환히 빛나던 사위는 다시금 어둠 속에 잠긴다. 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이를 찾으려 그 어둠 속을 하염없이 헤맨다.

“……하아.”

꿈을 꿨다.

사방이 온통 컴컴한 꿈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자주 꾸었던 꿈.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이종하가 나를 등졌다.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진이 빠질 정도로 시달리다 아침이 되어서야 깨는 이 끔찍한 꿈 때문에 잠들기 싫었던 밤도 많았다.

생각해 보면, 나양에 온 뒤로는 한 번도 꾸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그런데 왜 이제 와 다시 꾸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초조함에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뛴다.

나는 시끄럽게 뛰는 왼쪽 가슴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덥지도 않은데 목덜미부터 등허리까지 밤새 내가 흘린 땀으로 축축했다.

오늘은 주말이 지나고, 출근하지 않는 월요일이었다. 멍하니 누워 있던 나는 어스름이 해가 뜰 무렵에야 어설픈 잠에 들었다. 그 결과 거지 같은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차라리 뜬눈으로 밤을 새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지난 밤, 통화음이 연결조차 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오기 부리듯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 댔다.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냐. 사흘이라고 하지 않았냐. 전화는 왜 꺼져 있냐. 따져 물을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에게 그럴 권리가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나는 이종하의 무엇도 아니었다. 이종하와 나는 친구도, 가족도 아니다. 좋아한다는 그 애의 고백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인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 애가 나를 좋아한다는 감정에 기대어 있는 보잘것없는 여자였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내가 눕지 않은 옆자리로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함께 밤을 지새울 때면 늘 이종하가 눕는 자리였다. 나는 이종하의 베개를 집어 들어 방 밖으로 던졌다.

“짜증 나.”

머릿속 한 구석에서 은근하게 거슬리던 감정은 궁금함으로, 초조함으로, 끝내는 짜증을 동반한 걱정으로 이어졌다. 애도 아닌데 길을 잃었을 리는 없고. 혹시 사고라도 난 건 아니겠지.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금방 다녀오겠다던 부모님의 뒷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이삿짐 트럭에 받혀 무섭게 일그러진 차체 안에서 온전하게 남아 있던 것이라곤, 아마도 내 생일 선물로 준비했을 곰 인형뿐이었다. 그들은 병원으로 옮겨지기도 전에 숨이 끊겼다.

이후, 나는 누군가의 떠나는 뒷모습에 취약했다. 잠든 척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이종하의 등이 오래전 내 곁을 떠난 부모님의 등과 겹쳐 보인다. 어지럽다. 목구멍에 시큼하게 치미는 토기를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방문 앞에는 내가 던져둔 베개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발끝에 걸리는 베개를 뻥 걷어차 버리려다 주워 들었다. 방 안에 얌전히 돌려놓았다. 고작 베개일 뿐인데, 그것이 이종하라도 되는 양.

“오기만 해 봐, 이종하.”

나는 주방으로 가 물을 병째로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목구멍은 따갑고, 온몸이 무거웠다.

찬물로 꿉꿉한 얼굴을 씻어 내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건물을 벗어나기 전부터 매미 소리로 사방이 시끄러웠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 때문에 걷는 내내 갈증이 났다.

시장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얼음을 잔뜩 넣은 아이스커피를 샀다. 시장을 보러 갈 때마다 이종하가 손에 쥐여 주던 것이었다. 달아서 더 목이 탔다. 햇볕을 피해 시장의 후미진 골목을 걷다 반도 마시지 않은 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망설이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최후의 보루처럼 남겨 두었던 미용실 앞. 이종하가 떠난 지 딱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자기 머리 지금 딱 예쁜데.”

동네 할머님의 머리를 말아 주던 미용실 원장이 고개만 돌려 내 얼굴을 스윽 훑고는 말했다. 내가 머리를 자르러 온 것이 아님을 알면서 부러 던져 보는 투였다.

“머리 자르러 온 거 아니에요.”

“종하 없어.”

“…….”

왜 이런 순간에 그 장면이 떠오르는 걸까. 시장 한복판에서 이종하와 그 애를 좋아하는 박미진과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속옷만 입고 실랑이하던 내 모습 같은 거 말이다.

좁은 시장에 소문이 퍼질 대로 퍼졌을 것이다. 원장 귀에도 당연히 들어갔겠지.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예쁘고 순진한 아들내미 잡아먹는 늙은 여우쯤으로 볼 것 같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더 창피할 것도 없었다.

“오면 연락 좀 달라고 전해 주세요.”

“애가 연락 안 줬어? 내려올 때 다 됐는데.”

정각이 되지 않아 뻐꾸기를 집 속에 숨기고 있는 시계를 확인하며 원장이 말했다. 나는 이종하의 연락을 받지도 못했고, 이종하가 어딜 갔다 내려온다는 건지도 모른다. 그저 서울에 다녀오는 것은 아닐까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나니 이종하가 괘씸해졌다. 나의 우려와는 달리 이종하의 손가락은 멀쩡했다. 그럼에도 전화 한 통 주지 않은 이종하는 어쩌면 이제 내가 싫증 났을지도 모른다. 늙고 못된 여우에 홀려 있다가 나양 땅을 떠나자 불현듯 정신을 차렸을지도 모르지.

제멋대로에 말 한마디 예쁘게 하지 못하는 나는 내가 봐도 별로니, 그를 탓할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기분은 더러웠다.

“급한 거 아니면 여기서 기다려요. 커피도 한잔 타 먹고.”

심심하면 화투나 한판 치다 가라던 때와 다름없는 권유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 볼게요.”

최대한 빨리 미용실에서 멀어지려고 방향도 모른 채 걸었다. 시장을 벗어난 곳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보였다. 파란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촌스러운 건물. 나양 시외버스 터미널이라는 글씨가 여전히 희미했다.

나는 불쑥 터미널 안으로 들어섰다. 탈탈거리는 소리를 내는 선풍기가 벽에 군데군데 매달려 있었고, 그 아래에 앉은 사람들이 작은 브라운관 TV를 보고 있었다. 미용실에서 이따금씩 봤었던 이름 모를 드라마가 재방영 중이었다.

TV 위로 ‘서울행 버스 매주 금요일 1회 운영’이라고 붙은 빛바랜 종이가 보였다. 나는 그 종이를 빤히 봤다. 종이가 이종하를 내 앞으로 데려와 주기라도 할 것처럼.

내가 꽃이 아니듯 이종하도 비가 아니다. 그러나 한동안 이종하가 내게 닿지 않자, 나는 시름시름 볼품없이 시들어 갔다.

늦잠을 잔 것도 아닌데 미술관에 지각했다.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며, 이종하가 채워 놓고 간 반찬에 꾸역꾸역 아침밥을 먹으며 끊임없이 현관을 돌아보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금방이라도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던 탓이다.

지각을 해도 누구 하나 면박을 주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스스로의 나태함이 썩 유쾌하지만도 않았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그림과 조명을 살폈다. 그사이 시간은 착실히 흘렀다. 그림 속 나무들처럼 생각을 덜어 내고 평온해지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문가에서 안쪽으로 천천한 걸음을 옮겼다.

미술관 깊은 곳에 걸린 가장 큰 그림, 이종하가 눈을 떼지 못했던 수묵의 짙은 녹음을 마주했을 때였다.

“수연아.”

“……!”

나를 부르는 소리에도 나는 뒤돌아서지 못했다. 잊고 있던 목소리였다.

수연아, 하고 한 번 더 부르는 목소리에 겨우 반쯤 몸을 돌렸다.

“오랜만이다.”

내가 그토록 흉내 내고 싶었지만 발끝만치도 못 쫓아간 남자.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싫어했던 남자. 내 첫사랑.

“선배.”

이 미술관에 걸린 모든 그림의 주인.

지금 그 남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이 그림 제목, 계속 생각하게 돼.”

선배는 나를 스쳐 지나 먹으로 옮긴 녹음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은 그저 길에서 마주친 사람을 훑듯 아무 감정도 담지 않고 있다. 그는 이 그림 앞에서 무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아무렇지 않은 태도에 숨이 막혔다. 그가 이 그림을 처음 보여 줬던 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수연아. 나무를 온통 까맣게 그리는 건 나무에게 학대일까.”

그가 무어라 덧붙였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런 그림을 보게 한 게 학대라는 생각뿐이었다. 압도적인 그림이었다.

강인한 생명력을 뽐내는 굵은 줄기, 그 위로 뻗은 곧고 굽은 가지, 물을 머금은 이파리들.

그 어떤 아름다운 나무도 그가 옮긴 나무만큼은 아름다울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날 그림 앞에서 울었다. 그림을 그린 그가 미웠다. 그런 그림을 못 그리는 나는 더 미웠다.

“그렇게 미안하면 제목이라도 특별하게 붙여 주든지요.”

“생각나는 제목 있어?”

“선배 맘대로 하면 될 일이지 왜 자꾸 물어봐요? 어차피 내가 하라는 대로 할 것도 아니면서.”

“네가 하라는 대로 할 건데.”

“왜요?”

일부러 뾰족하게 대꾸하는 나를 보고 그가 조용히 웃었다.

“그러고 싶어졌어.”

색 없는 나무는 녹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는 그림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그린 순서대로 숫자를 붙였다.

“사람들이 계속 묻거든. 내 그림 중에 이것만 제목이 있잖아.”

“바꿀 수 있잖아요. 선배 하던 대로.”

“원래 몇 번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

나는 기억했다. 이 그림의 이름은 본래 ‘9’가 될 운명이었다. 겨우 9. 큰 그림만 그리는 그는 크로키 외에는 습작을 하지 않았고, 고작 여덟 점의 그림을 그리고 난 뒤 이런 그림을 그려 낸 것이었다. 이전의 여덟 점도 모두 훌륭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딱 10년 전의 일이었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연락도 없이.”

“보러.”

그는 그림에서 눈을 떼어 내며 나와 눈을 맞췄다. 나를 보러 왔다는 말인지, 그림을 보러 왔다는 말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고맙다. 멀리까지 와서 내 그림 돌봐 줘서.”

“그게 제 일인데요, 뭐.”

오후가 되자 평소와 다르게 관람객들이 꽤 몰려들었다. 나는 모처럼 내가 맡은 바대로 전시를 설명했고, 선배는 관람객들과 함께 나를 뒤따랐다.

관람객들이 그림에 대해 물을 때마다 나는 선배를 의식하며 답해야 했다. 그가 작가임을 밝히고 의견을 직접 내주면 좋으련만, 그는 언론 인터뷰조차 거절하는 이였다. 그는 그저 관람객들 사이에 섞인 채로 내 말을 귀담아들었다. 꼭 이 시간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진지했다.

선배와 다시 말을 주고받게 된 것은 폐관 후였다. 그는 그림의 주인답게 조명과 위치에 대한 의견을 내며 조율을 요구했고, 나는 그의 뜻을 따랐다. 전시는 일주일 뒤면 끝이 난다. 그러나 단 하루라 할지라도 작가의 뜻이 최대한 반영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오히려 기꺼웠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났을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저녁 먹어야지. 나 때문에 점심부터 걸렀잖아.”

어두워진 창밖을 보며 선배가 미안해했다.

서울이라면 밤이 깊도록 불을 밝힐 식당이 제법 많겠지만, 나양에서는 고깃집 혹은 치킨집 정도였다. 모두 이종하를 떠올리게 하는 장소였다.

사실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그와 마주 앉아 음식물을 삼키고픈 마음도 들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늘 거르던 그의 습관으로 보아 그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저녁은 됐고. 맥주 어때요?”

한 달 전쯤인가, 늦은 밤까지 도록 정리를 하며 마시려고 샀던 맥주가 휴게실 냉장고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딱 두 캔 남은 맥주를 꺼내 하나는 선배에게 건네고, 남은 하나는 내가 마셨다. 물론 안주는 없었다.

선배는 나처럼 안주 없이 맥주만 들이켜는 걸 꽤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함께 학교를 다닐 때도 우리는 흔한 감자 칩도 없이 몇 캔이고 맥주를 마시며 실기실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아직도 맥주 많이 마시나 보네.”

“항상 똑같아요.”

우리는 유일하게 이름이 붙은 그의 그림 아래 나란히 기대앉아 맥주를 마셨다. 선배는 서울 전시를 마친 직후에 동양화 강의를 하러 베를린에 갔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방학 동안만 진행하는 강의를 끝내고 귀국하자마자 나양으로 왔다고 했다.

“엄청 바빴네요.”

“응. 그랬지. 그랬는데.”

같은 말을 반복해 대화를 잇는 것은 그의 오랜 버릇이었다.

“이제부터 휴가야. 여기 전시도 오늘 다 둘러봤고.”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실은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선배는 나에게 궁금한 사람이었다. 그를 알게 된 이후로 늘 그랬듯 그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 알고 싶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한 나는 영원히 그럴 것이었다.

그 사실이 또다시 나를 우울하게 했다. 그는 나에게 궁금한 게 없을 거다. 그는 내가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서울 전시회 보러 왜 안 왔어? 궁금해했잖아, 전시.”

“오픈 날 갔었는데, 전시만 보고 나왔어요. 선배가 바빠 보여서.”

거짓말이었다. 선배는 전시 때 유명 인사들과 사교를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가까운 이들과만 인사를 주고받고 나선 전시를 보는 관람객에게 집중했다. 그것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다지 인사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학생 때부터 나는 그의 그림을 보고 나면 어김없이 졸렬하게 굴었다. 그림을 그만뒀다고 해도 그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선배의 손이 불쑥 눈앞으로 다가왔다.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를 넘겨주는 손길을 나도 모르게 짜증스레 쳐냈다.

이종하의 부재로 날이 서 있는 날들이 이어지던 터라 근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옷도 대충, 화장도 못 하고, 머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선배의 의견을 반영하며 조명과 그림의 위치를 조율하느라 더더욱 흐트러진 상태였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꼭 이런 날 만나게 된다.

“왜?”

“뭐가 왜예요? 선배가 바빠 놓고.”

“왜 나 안 보냐고 묻는 거야.”

“…….”

“말하면서 사람 눈 빤히 보는 거, 그거 너 습관이잖아. 그런데 여기 와서 너 나랑 한 번도 눈 안 마주쳤어.”

“그게 뭐가 중요한데요.”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사실은 내 외모 따위 선배에게 어떻게 보이든 중요하지 않다. 선배가 전처럼, 마치 우리 관계가 연인이라도 되는 양 다정하게 구는 것이 싫었다. 들고 있던 맥주 캔을 소리 나게 내려놓고 그를 똑바로 봤다.

“봤으니까 이제 됐죠?”

“왜 그렇게 화가 났어.”

“알 바 없잖아요.”

날카로운 말에도 그는 빤히 나를 볼 뿐이었다.

“나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눈앞의 이 남자도, 눈앞에 없는 이종하도 다 짜증 났다. 그냥 누군가 예고도 없이 내 일상에 벌컥 들어서는 게 싫다.

그들 때문에 내가 변하는 것도, 날 변하게 해 놓고 그들이 떠나는 것도 싫었다.

“내가 선배 그런 점 싫어했던 거 알잖아요. 나에 대해 다 아는 척하는 거.”

그는 조용히 웃었다. 당황해서도, 미안해서도 아니었다.

“뭘 웃어. 할 말 없으니까 괜히.”

“내가 널 어떻게 이겨.”

“그런 말 안 듣고 싶어요. 나한테 지든가 말든가.”

선배는 또 웃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아무리 물고 늘어져도 싸움이 되지 않았다.

“그럼 무슨 말을 할까.”

“언제 가요?”

“안 가.”

“…….”

나는 말문이 막혀 멍하게 그를 보았다. 그런데 안 가겠다고 대답한 사람이 곧바로 일어나는 것이었다.

“내일 보자. 끝날 때 맞춰서 여기로 다시 올게.”

“내일요?”

“밥이라도 제대로 사야지. 나 때문에 고생했는데.”

“어디서 자려고요?”

“내가 재워 달라고 할 것처럼 보여?”

“그게 아니라…….”

얼버무리는 사이로 그의 웃음소리가 낮게 파고들었다.

“농담이야. 재워 줄 것처럼 안 보였어, 너도.”

선배의 말처럼 재워 줄 생각이 조금도 없는 나는 더 이상 그의 행선지에 대해 묻지 않았다.

“뭐 하고 있어요, 거기서.”

폐관 시간을 앞두고 관내를 정리하던 나는 관람객처럼 앉아 있는 선배를 발견했다. 언제 왔는지, 내게 말도 하지 않은 채 혼자 앉아 제 그림을 들여다보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언제는 내가 그를 알았을까.

“너 기다렸어. 방해될까 봐 그냥 있었는데.”

대답 않는 내게 선배가 다가섰다.

“정리 다 끝나면 나가자.”

“선배. 저 선배랑 일 외에는 따로 보고 싶지 않아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어제의 만남은 갑작스러웠지만 어찌 됐건 일이었고, 오늘의 만남은 예고는 되었으나 사적인 것이었다.

“어제 오겠다고 할 때 확실히 말 안 해서 헛걸음하게 한 건 죄송한데요. 온 김에 전시 확인 한 번 더 했다 생각하세요. 그리고 앞으론 일 관련해서도 연락 없이 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할 말만 내뱉는 나를 빤히 보던 선배가 내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이마에 닿은 서늘한 온도에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선배. 이런 거 하지…….”

선배의 손은 쳐내기도 전에 떨어져 나갔다.

“넌 네가 아픈 것도 모르더라.”

그제야 열이 꽉 들어찬 두 눈이 빠질 듯 아프다는 걸, 머리가 터질 듯 욱신댄다는 걸 깨달았다.

“데려다줄게.”

“됐어요. 저 괜찮아요.”

“너 안 괜찮아.”

선배가 딱 잘라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선배가 아픈 날 알아채기 전까지 내 얼굴이 식은땀에 푹 젖어 있는지도 몰랐고, 온몸이 열로 들끓는지도 몰랐다. 그저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만 생각했다.

뭘 했다고 이렇게 아플까. 난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그게 우스웠다.

연락도 없이 돌아오지 않는 이종하, 곁에 있지도 않은 그 애에게 괴롭힘이라도 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매일 밤 꿈에서 이종하를 때리고 짓밟고 욕하는 것뿐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아픈 건 나였다. 그리고 그런 나를 들볶은 것은 기별도 없이 찾아든 선배였다.

“어디가 제일 아파?”

“다. 그냥 다 아파요.”

선배는 나를 대신해 관내 정리를 끝내고는 나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 가장 가까운 병원의 위치를 묻기에 단번에 고개를 저었더니, 더 묻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이불 위에 나를 눕힌 선배가 차가운 물을 흠뻑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었다.

“이제 됐으니까 가요.”

“너 불편하게 안 해. 약만 사다 주고 갈게.”

누워도 편한 곳이 없었다. 손끝이 시리고 저렸다. 머리가 울리고, 온몸이 떨렸다.

수연아, 하는 선배의 목소리에 입을 벌리고, 약과 물을 삼키고 잠이 들었다. 시원한 감촉이 이마를 스칠 때마다 얕은 잠은 깊어졌다.

꿈은 꾸지 않았다. 이종하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이종하를 욕하지도, 때리지도 않았다. 대신 몇 번이고 불렀다. 종하야, 이종하. 어쩌면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이종하를 보고 만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도 여전히 이종하는 없었다. 이종하 대신, 이 집에 어울리지 않은 남자가 들어앉아 있었다. 어둑했던 방 안은 푸르스름한 기운을 띄고 있었다.

“궁금하다. 너를 이렇게 그리는 사람.”

“…….”

선배는 벽에 등을 기댄 채로 내 옆에 앉아 이종하가 그린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림 속의 나는 전부 벗은 채였다. 선배가 그려 본 적 없는 모습이다.

“내가 아는 너하고 많이 달라.”

그 애가 그린 나는, 내가 아는 나하고도 많이 달라요.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나는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선배는 나와 눈을 맞추는 대신 한참 동안 그림을 들여다봤다.

팔랑팔랑, 고요한 가운데 크로키북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보고 옮긴 나양과는 다른 나양일 것이다. 연필과 물감으로 옮겨진 나양의 여름을 선배는 진득하게 눈에 담았다.

“아쉽다.”

“뭐가요.”

“훔쳐본 거라 잘 봤다는 말은 못 전하는 게.”

“대신 전해 줄게요.”

그 애가 돌아온다면 말이다. 그런 감상은 몇 번이고 전해 줄 수 있었다. 말끝에 묻어나는 상심의 기운을 느낀 건지 선배가 그제야 나를 돌아보았다.

선배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을 때는 물리도록 쳐다보다가, 정작 선배의 시선이 내게 향했을 때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다시 잠이 오지는 않았다.

“넌 참 똑같다. 혼자 속에 담아 놨다 앓는 것도.”

“내가 다 아는 척, 하지 말랬죠.”

내가 눈을 번쩍 뜨고 노려보자 선배가 잔잔히 웃었다. 나도 똑같지 뭐, 사람 잘 안 변하잖아. 그렇게 덧붙이는 그가 얄미웠다.

“그래요. 나 잘 못 지내요. 선배 만날 때처럼 내가 못나서, 그때하고 하나도 안 변해서. 아니, 그때보다도 훨씬 더 못나서 모든 게 엉망이에요! 내가 다 망쳐서 병났어요! 다 알고 나니 속 시원해요?”

나는 선배를 탓했다. 왜 탓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창피하지는 않았다. 못난 나를 이미 전부 들여다본 사람이었다.

“네 속 시원하면 됐어. 딴생각 말고 편히 자.”

선배는 간다는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고맙단 말도, 잘 가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곧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으니 발소리가 더 잘 들렸다. 단정한 발걸음이 세 걸음을 채우지 못하고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저벅저벅, 투박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선배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선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김수연.”

눈앞에 이종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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