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인정
퇴근하고 생선 가게 앞을 지나는 길이었다. 생선 가게 여사장이 생선 궤짝을 가게 밖으로 내놓고 있었다.
파란 호스를 들고나와 바닥에 물을 뿌리자 쌓여 있던 빈 궤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여사장은 짜증 난 기색도 없이 호스를 바닥에 두고 궤짝을 다시 쌓았다.
“도와드릴게요.”
“비켜요. 옷 버려요.”
나는 여사장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궤짝을 같이 쌓았다. 여사장은 고맙단 말도 없이 파란 호스를 다시 들어 바닥을 부지런히 닦았다.
“원장님이랑 찬 가게 사장님은 시장 사람들이랑 놀러 가셨어요. 덥다고 계곡에.”
“알아요. 사장님은 왜 안 따라갔어요?”
“별로 안 더워서.”
여사장은 이 더위에도 긴소매 티셔츠에 긴바지를 입고 있었다. 종아리 중간까지 오는 고무장화까지 신었으니 땀을 흘릴 만도 한데, 도리어 낯빛은 창백할 정도였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은 그을린 기운도 없이 늘 뽀얗기만 했다.
누굴 닮은 것도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느라 여사장이 어느새 손을 멈추고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시선을 의식하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가게를 청소하는 데 여념이 없던 여사장이 처음으로 물었다.
“화투 치려고 왔어요?”
“아니요.”
화투판이야 심심풀이로 낀 것이고 못 친다고 해서 아쉬울 것도 없었다. 그저 퇴근하고 지나는 길이라 답했다. 내게 관심을 보이는가 했던 여사장은 다시금 무심한 얼굴로 돌아가 가게를 정리했다. 얼추 정리가 끝났을 때 여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저녁이나 먹고 가요. 수연 씨.”
여사장이 나를 ‘수연 씨’라고 했다. 기분이 묘했다. 이 마을에서 나를 이름으로 불러 주는 이는 이종하뿐이었다. 미술관에서는 으레 그렇듯 나를 김 선생이라고 불렀고, 원장이나 반찬 가게 사장은 나를 아가씨라고 칭했다.
“날이 이래서 회는 좀 그렇고. 매운탕 괜찮죠?”
“좋죠. 저도 같이할게요. 할 줄 알아요.”
고개를 내저은 여사장은 큰 생선 한 마리를 금세 손질해서 냄비에 차곡차곡 담았다. 시뻘건 양념을 툭 던져 넣고, 콩나물이며 미나리며 채소를 가득 쌓기까지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나는 평상에 상을 펴고 버너를 올렸다. 탕이 끓는 것을 보던 여사장이 가게 안에서 수저와 살얼음이 낀 차가운 소주 한 병을 꺼내 왔다.
“먼저 한 잔 받아요.”
우리는 서로 소주잔을 채워 준 후, 잔도 부딪치지 않고 소주를 들이켰다. 차고 썼다. 거기에 매운탕 국물을 한 숟갈 푹 넣으니 속이 달았다.
내 앞으로 흰밥을 가득 담은 일회용 그릇이 놓였다. 반찬이라곤 김치도 없이 시금치 무침뿐이었으나 모자랄 것 없는 저녁 식사였다. 어스름히 해가 가라앉기 시작한 시장 골목에 마주 앉아 우리는 조용히 밥을 먹었다.
“언니.”
그때, 하얀 얼굴이 불쑥 모기장 안으로 들어왔다. 박미진이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들어오더니 나를 발견하자마자 순식간에 눈매를 뾰족하게 갈았다.
“어쩐 일이야.”
“불 켜져 있어서……. 근데 지금 뭐 해, 저 아줌마랑?”
박미진이 턱 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밥 안 먹고 왔으면 얼른 앉아.”
“저 아줌마랑 뭐 하고 있냐고.”
“너 수연 씨를 알아?”
“이 동네에 저 아줌마 모르는 사람도 있어? 언닌 뭐야? 둘이 친구라도 돼?”
모난 시선은 여전히 내게 둔 채 박미진이 쏘아붙였다. 하얀 얼굴에 뾰족한 눈꼬리. 그제야 생선 가게 여사장이 누굴 닮았는지 알았다.
“먹고 가려면 앉고, 갈 거면 가. 시간 늦었다. 엄마 걱정하셔.”
“화투 치려면 나 필요하잖아. 안 그래요, 아줌마?”
이 사람이고 저 사람이고 나를 화투 못 쳐서 안달한 사람으로 보는 건가. 피식 웃음이 샜다.
“화투 칠 줄 알아요?”
“모지리도 아니고 어떻게 몰라요?”
별 의미 없이 물은 질문에도 박미진은 빽, 하고 날카롭게 답했다. 내 질문과 웃음이 자신을 어리게 보아 무시하는 것쯤으로 들렸나 보다. 박미진은 당장 화투 실력을 증명하겠단 기세로 밥상 옆에 화투판을 펼쳤다.
여사장은 한 판만 치고 가라며 박미진을 말리지 않았고, 나도 자연스레 내 앞에 깔린 패를 잡았다. 어차피 밥도 다 먹은 차였다.
박미진은 화투를 엉망으로 쳤다. 방법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대놓고 나에게 판이 불리하게 돌아가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뻔히 보이는 수에 내가 미동도 하지 않자, 뭐가 또 그리 억울한지 씩씩거리는 폼이 귀엽고 웃겼다. 지금 이 상황이 다 무언가 싶었지만, 또 파르르 달려들 것이 뻔한 박미진 앞이라 간신히 웃음을 삼켰다.
이 기묘한 조합의 화투판에 패가 모이고 흩어지길 몇 번 반복했을 무렵이었다. 누군가 가게를 찾았다. 문을 닫은 가게에 들른 것으로 보아 여사장을 보러 온 듯했다.
“둘이 치고 있어 봐요.”
여사장이 자리를 털고 나간 사이, 박미진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 폼이 어수룩했으나 나는 모른 척했다.
“아줌마도 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 같이 피우고 싶지 않았다. 다만, 금방 여사장이 돌아올 텐데 미성년자가 대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어도 되는 걸까, 혹은 그걸 보고도 어른인 내가 말리는 척을 하지 않아도 되나 싶기는 했다.
“저 아저씨 오면 원래 말 길어지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쫄 것 없다는 박미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때 아줌마 좀 미친 것 같았어. 알아요?”
“옷 달라고 해서 줬는데 그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나.”
“그러게 애초에 남의 옷은 왜 입고 있는데. 옷이 그렇게 없나.”
“옷이 별로 없는 건 맞는데, 그때는 내 옷이…….”
“아아! 됐으니까 말하지 마. 누가 이유 물었대요?”
박미진이 목소리를 높여 내 말을 끊어 냈다. 내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예상이 갔던 모양이다.
이종하와 함께 밤을 보낸 내가 이종하의 옷을 입게 된 과정이 상상이 가는 듯 몸서리를 쳤다. 잘못 들이켠 연기를 캑캑 내뱉으며 짜증을 부리던 박미진을 나는 무심한 눈으로 보았다.
“난 미용 배워요.”
또다시 불쑥 박미진이 말을 꺼냈다.
“손재주가 좋나 보네요.”
“네. 미용실 원장님이 나보고 미용실 물려받으면 잘할 거라고 그랬어요.”
“…….”
“솔직히 여자 직업으로 헤어 디자이너 좋잖아요. 애기 낳고 나이 먹어도 계속 일할 수 있고. 나 결혼하면 원장님한테 미용실 물려받아서 일할 거예요. 종하 오빠 내조하면서 원장님도 모시고 살 거고. 어차피 서울 가 봤자 별것도 없잖아요?”
박미진은 내가 묻지도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은 자기 미래 계획을 떠벌였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전개였다. 나를 화나게 하고 싶어 이쪽저쪽으로 찌르는 박미진에게 나는 전투 의지를 꺾이게 하는 재미없는 대답만 툭툭 내놓았다.
“맞아요. 별거 없어요.”
“아줌마는 뭐 할 거예요? 결혼 안 해요?”
“별로 생각 없어서.”
“아, 그래서 종하 오빠 데리고 노는 거구나.”
“…….”
“동네 사람들이 그래요. 아줌마가 이종하 데리고 논다고.”
“뭐라고 말해도 상관 안 해요.”
“그러시겠지. 근데 이종하한텐 상관있거든요? 아줌마, 이종하한테 무슨 짓 하고 있는 줄 알아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고, 앞으로도 별거 안 할 거예요.”
박미진이 발끈하고 일어섰다. 멀뚱히 앉아 있는 내 정수리를 쏘아보며 화를 냈다.
“이 아줌마 되게 웃기네. 할 짓 못 할 짓 다 하면서 뭘 안 해? 내가 바본 줄 알아요?”
“이종하가 그러던데, 고1이라면서요. 애한테 있던 일 다 얘기할 수는 없지.”
“아줌마, 혹시 그 나이에 이종하 좋아하기라도 해요? 아님 이종하처럼 잘생기고 젊은 애가 아줌마한테 잘해 주니까 먹고 버리자, 그런 심보예요?”
“맘대로 생각해요.”
나 역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여사장은 아직도 돌아올 기미가 없었고, 여사장이 돌아온다고 해도 화기애애 화투패를 돌릴 상황도 아니었다. 애초에 별 재밌지도 않은 게임, 시간이나 죽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가게를 나서려는 내 앞을 박미진이 막아섰다.
“어딜 가! 내 얘기 안 끝났어요!”
퇴근 후에도 없던 피로감이 갑자기 밀려왔다. 시끄럽다. 집으로 돌아가 샤워하고 맥주나 마시고 잤으면 좋겠다.
“그렇게 막살면 멋있어 보이는 줄 아나 본데, 그러니까 재밌어요? 미치려면 아줌마 혼자 미치지 왜 이종하한테 엉겨요? 이종하가 뭘 잘못했는데?”
“그렇게 궁금하면 이종하한테 물어봐요. 엉긴 건 나 아니니까.”
“허! 내가 처음부터 알아봤지만, 아줌마 진짜 미친 여자 같아. 아줌마 때문에 서울 갈 궁리하는 이종하가 불쌍하다. 재수 없으니까 앞으로 우리 언니 가게에도 오지 말고, 우리 언니랑 화투도 치지 말아요. 아! 재수 없어!”
돌아온 생선 가게 여사장이 모기장을 들추는 사이 박미진이 자리를 떠났다. 박미진이 세게 치고 간 어깨에 미약한 통증이 올랐다.
아니, 그보다 깊은 곳이 욱신댔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생선 가게 여사장을 보고 있다가 인사도 하지 않고 나왔다.
“뭐야?”
그날 밤, 고깃집 일을 마치고 여느 때처럼 내 집으로 온 이종하에게 내가 다짜고짜 물었다. 이종하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지도 못한 채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가?”
“뭐냐고. 이 시간에.”
“……일단 좀 들어가자.”
이종하는 상한 기분을 숨기며 내 곁을 스쳐 집 안으로 들어섰다. 대놓고 문전박대를 해도 이런다. 하긴, 빈정이 상해 떠났으려면 진작 떠났겠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거실로 가 앉았다.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던 이종하가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 아이스크림 사 왔는데.”
이종하는 까만 비닐봉지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나는 대꾸도 않고 TV만 봤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드라마였다.
“냉장고에 넣어 놓을게. 먹고 싶을 때 먹어.”
냉장고에 아이스크림을 차곡차곡 넣어 둔 이종하가 맥주 두 캔을 들고 돌아와 내 옆에 털썩 앉았다. 한 캔을 따 내 볼에 살짝 댔다.
“덥지?”
“너 안 가?”
“나 진짜로 가?”
이종하는 내 손끝을 살며시 쥐어 왔다. 나는 그의 손을 내치고 입고 있던 원피스를 벗었다. 속옷까지 끌러 내리려는 내 손을 이종하가 막았다.
“김수연.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빨리하고 가.”
“뭘.”
섹스하려면 하고 빨리 가든지 말든지. 내가 생각해도 썅년 같은 행동이었다. 이종하의 얼굴이 현관에서 문전박대를 당했을 때보다 더욱 일그러졌다.
“너 이러는 거 진짜 나쁜 거 알아?”
“…….”
“내가 오는 게 싫으면 싫다고 그냥 말을 해. 나 이런 식으로 병신 만들면 재밌어? 신나? 너 나 정말 싫어서 이래? 내가 뭘 어쨌는데.”
이종하는 평소와 달리 따박따박 따져 댔다. 그 모습이 꼭 박미진 같았다.
“아줌마, 이종하한테 무슨 짓 하고 있는 줄 알아요? 아줌마, 혹시 그 나이에 이종하 좋아하기라도 해요? 아님 이종하처럼 잘생기고 젊은 애가 아줌마한테 잘해 주니까 먹고 버리자, 그런 심보예요? 그렇게 막살면 멋있어 보이는 줄 아나 본데, 그러니까 재밌어요? 미치려면 아줌마 혼자 미치지 왜 이종하한테 엉겨요? 이종하가 뭘 잘못했는데?”
둘이 캐묻는 것 중에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게 바로 내가 기분이 더러운 이유였다.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
“너 어차피 나랑 자려고 온 거 아냐? 아니면 왜 맨날 와? 여기가 네 집이야?”
“너랑 자려고 온 거 맞는데, 그럼 너는? 넌 나랑 잘 마음 전혀 아니었어?”
“…….”
평소라면 아무 잘못 안 했어도 잘못했다고 빌어야 할 이종하가 오늘따라 내 맘 같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이종하는 아무렇게나 벗겨진 원피스를 다시 내게 입혔다. 표정은 험악한 주제에 손길만은 다정했다.
“오늘은 가라니까 가는데, 너 다시 이러지 마라. 너 지금 나한테 이런 식으로 지랄 대는 이유, 내가 맨날 여기 오는 것 때문 아니…….”
“솔직히 말할까. 네가 매번 찾아오고, 난 거절할 이유 없어. 내가 결혼을 했어, 애가 있어? 내 기분 내킬 때 너랑 같이 밥 먹고 놀고 자고 그럼 안 돼? 솔직히 안 외로워서 좋아. 그게 뭐가 잘못됐는데?”
이종하의 말을 자르고 쏘아붙였다. 우스운 변명이었다. 아니, 변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가시를 바짝 세웠다. 그 가시에 찔려 상처 입을 그 애를 알면서도.
“잘못 아니야.”
우는 것도 아닌데, 이종하가 손을 뻗어 내 눈가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섬세한 손길이 눈에서 뺨으로, 뺨에서 귓불로 미끄러졌다. 손길만큼 목소리도 부드러웠다.
“그게 잘못이라곤 안 했어. 네가 내키는 대로 나랑 놀고 자고, 여태 하던 대로 해. 그래도 돼.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내가. 근데 나 막 대하지는 마. 그건 잘못이야. 나한테 이러면 네 기분은 좋아?”
“…….”
“그리고 너 이럴 때만 솔직한 거 되게 치사해. 너 편하자고 이럴 때만 솔직하고, 이럴 때만 하고 싶은 말하면 다냐.”
“그래, 다야. 나이 먹어서 잘하는 건 치사한 거밖에 없거든.”
이종하가 피식 웃었다.
“간다. 문 잘 잠그고 자.”
조금 전 웃음 끝처럼 돌아서는 뒷모습도 썼다.
휴관일이 지난 화요일 아침, 평소보다 일찍 나선 출근길은 몹시 힘들었다. 딛는 걸음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당연했다. 휴관일 내내 집에만 처박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이종하에게 엉망으로 굴 때는 언제고 자기 혐오감에 몸부림을 치다니. 그조차도 혐오스러웠다. 잘못인 걸 잘 알면서도 기어이 잘못을 저지르는 인간.
“김 선생. 어디 안 좋아유? 얼굴이 영 별룬데.”
“괜찮습니다.”
개관 준비를 돕는 경비가 걱정스레 말을 붙여 왔다. 오지랖이 있는 양반이 아닌데도 아프냐고 묻는 걸 보면 어지간히 내 꼴이 말이 아니구나 싶었다.
조명과 관내 온도 체크를 마지막으로 힘겹게 개관 준비를 마쳤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서니 헛웃음이 났다. 꼴이 말이 아니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차가운 물로 다시 한번 얼굴을 씻고 립스틱을 발랐다.
“대체 왜 이러고 사냐. 김수연.”
나는 터벅터벅 화장실을 벗어나 관내에 비치해 둔 관람객용 의자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오전에는 찾아온 이가 없었다. 문득 이곳 나양미술관이 내 꼴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보기에만 멀쩡한 미술관. 당장 없어져도 아무도 모를, 아무도 안타까워하지 않을 이곳.
갑자기 숨이 막혔다. 불규칙한 호흡을 견디며 나는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하아.”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눈을 감았다 떴다. 매미 우는 소리와 함께 눈부시게 환한 여름 햇살이 무기력해진 나를 깨웠다. 정신 차리라고.
“네가 내키는 대로 나랑 놀고 자고, 여태 하던 대로 해. 그래도 돼.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내가. 근데 나 막 대하지는 마. 그건 잘못이야. 나한테 이러면 네 기분은 좋아? 그리고 너 이럴 때만 솔직한 거 되게 치사해. 너 편하자고 이럴 때만 솔직하고, 이럴 때만 하고 싶은 말하면 다냐.”
그래, 모든 게 내 잘못이다. 이종하가 한 말은 다 맞고, 내가 한 말은 다 틀렸다.
“네가 매번 찾아오고, 난 거절할 이유 없어. 내가 결혼을 했어, 애가 있어? 내 기분 내킬 때 너랑 같이 밥 먹고 놀고 자고 그럼 안 돼? 솔직히 안 외로워서 좋아. 그게 뭐가 잘못됐는데?”
전부 개소리였다. 박미진의 말대로 서울에서 온 미친 여자 하나가 이종하를 멋대로 쥐고 흔들고 있었다. 가진 건 쥐뿔도 없는 주제에 나 좋다는 남자, 그것도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애를 데리고 놀고 있었다.
내가 나 좋다는 남자 하나 내 맘대로 못 해? 솔직히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척 억지로 연기하며 돈을 뜯어낸 것도 아니다. 나랑 잤으니 책임지겠다고 거짓을 말한 적도 없다. 애인이 있는 것도,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당사자인 이종하가 내 맘대로 다 하라고, 같이 있게만 해 달라고 했다.
이따위 생각에 내 멋대로 굴던 나는.
“비겁하다. 못났네, 참.”
나는 비겁했다. 그게 나의 가장 큰 잘못이었다.
이런 나를 받아 주는 이종하는 참 솔직했다. 나를 대하는 그 애는 매 순간 순진하리만큼 맑았다.
동정을 내게 내어 주고도 혹시나 내 마음에 차지 않았을까 전전긍긍하던 이종하다. 표정이 어두운 내게 책임지라고 안 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기분이 내키지 않아 이제 찾아오지 말라 짜증을 피웠을 때도 그저 옆에만 있게 해 달라던 너다.
어쩔 땐 바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말마따나 어리고 귀엽고 예쁜 이종하가 장도 대신 봐 주고, 짐도 들어 주고, 밥까지 해다 바치니 끝 간 데를 모르고 함부로 대했다.
내 잘못이다. 잘못을 인정하니 차라리 속이 편했다. 이제는 이 잘못을 사과할 일만 남아 있었다.
“김수연.”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바닥으로 내리깐 시야에 익숙한 운동화가 들어왔다. 나는 앉은 채로 내 앞에 선 이종하를 올려다보았다.
“점심은, 먹었어?”
“그냥.”
“뭐가 그냥인데.”
잘못한 건 난데 숙이고 들어오는 건 여전히 이종하다. 나는 피식 힘없이 웃으며 내 옆자리를 툭툭 쳤다. 이종하는 내 손짓에 고분고분 옆에 앉았다. 어깨가 닿았지만 내버려 두었다. 이종하가 조금 더 내 쪽으로 당겨 앉았다.
“혹시, 박미진이 뭐라고 했어?”
“…….”
그 일에 대해선 말하기가 싫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건 나쁜 버릇이라는 걸 알면서도 박미진과의 유치한 말다툼을 이종하에게 말할 순 없었다. 이종하를 놓고 주고받은 말싸움이었지만, 어찌 됐건 박미진과 나 사이의 일이다. 전해야 할 말은 따로 있었다.
“이종하.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
“네 말이 다 맞아. 내가 한 말은 다 틀리고.”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종하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럴 만도 했다. 여태까지 내가 그에게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너 함부로 대했잖아. 그저께만 그런 거 아니고 자주, 거의 매번. 내가 잘못했어. 변명할 여지도 없어. 너한테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알면서도 그랬어. 그것도 정말 미안해.”
“됐어. 지난 일 가지고 왜 이래.”
“사과 받을 건 받아. 너 맘 많이 상했을 거잖아.”
이종하는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사과한다고 그동안 너 속상했던 거 안 풀리는 거 알아. 당장 내 사과 받아 달라는 거 아니야. 내 맘 편하자고 마음에도 없는 말하는 건 더 아니고. 너한테 미안하다고 제대로 말하고 싶었어. 생각해 보니까 너한테 제대로 사과한 적이 한 번도 없더라. 그것도 미안해.”
“그래. 알았어.”
“근데 이종하. 하나만 묻자.”
“……뭘?”
그렇게 묻는 말투에 망설임과 두려움이 묻어났다.
“넌 나한테 질리지도 않아? 난 네가 신기해. 솔직히 내가 그저께 더 심하게 굴긴 했지만 못되게 군 거 한두 번 아니었잖아. 너 왜 맨날 너 함부로 대하는 거 참아? 이제 이런 거 그만…….”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이종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다른 한 손에는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미술관에 찾아올 때 여러 번 들고 와 눈에 익은 쇼핑백이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도시락 싸 왔어. 너 어제 내내 아무것도 안 먹었지? 지금 얼굴이 어떤지 알아?”
“안 먹을래.”
“도시락이라도 들고 가, 그럼.”
도시락이 든 쇼핑백을 자리에 올려 두곤 이종하가 나를 등졌다. 성큼성큼 내게서 멀어지려는 발걸음이 다급해 보였다. 그 애의 셔츠 끝자락을 잡았다.
“이종하. 내 말 안 끝났어.”
“별로 안 듣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아서.”
“넌 이러는 게 질리지도 않아? 그만할 때도 됐잖아.”
“아직 질릴 만큼 뭘 하지도 않았잖아! 너랑 나.”
그제야 등졌던 등을 돌리고 이종하가 나를 바라보았다. 답답하다는 듯 제 얼굴을 마구잡이로 쓸어내리며 목소리를 누그러트렸다.
“근데 내가 너한테 뭘 바라.”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고 나면, 너한테 남는 게 뭐야. 너 나한테 이렇게까지 할 이유 없어.”
“이유가 왜 없어? 너 정말 몰라서 묻냐?”
화난 말투가 아니었다. 심지어 이종하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마저 어려 있었다.
“너 그저께 한 짓만 나쁜 게 아니야. 지금 이러는 것도 똑같이 나빠. 다 알고 있잖아. 내가 너 좋아하는 거.”
“…….”
“너 좋아해.”
“…….”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를 들었는데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종하의 목소리로는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김수연. 네가 좋아서, 너무 좋으니까. 그래서 네가 수도 없이 못되게 굴어도, 쉬지 않고 나쁜 짓을 반복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더라.”
“나는, 나는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솔직히 그래.
끝맺지 못한 문장 너머로 침묵이 이어졌다.
이종하가 나에게 진심을 털어놓아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똑같이 되돌려 줄 수도 없었다. 나한테 잘해 주는 너를 거부할 이유가 나에게는 없다고, 그러니 그냥 이대로 이 모호한 관계를 이어 가면 안 되는 거냐고, 또다시 그따위 말을 해서도 안 됐다.
“…….”
“나 갈게. 들어가서 얼른 점심부터 먹어.”
내게서 어떠한 대답도 듣지 못할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이종하가 나를 등졌다. 성큼성큼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속이 탔다.
잡고 싶은데, 잡아도 될까.
아무 말도 못 할 거면서. 아무런 확답도 주지 못할 거면서.
이종하는. 이종하는 어떨까? 내가 잡아 주길 바라고 있을까.
이종하, 거기 멈춰. 돌아봐, 빨리. 날 붙잡는 건 늘 네가 하는 일이었잖아.
이종하는 끝내 날 돌아보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새 내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달려가 이종하를 붙잡아 돌렸다. 이종하는 손쉽게 내 손에 잡혀 주었고, 몸을 돌려 나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마치 이 순간만을 오랜 시간 기다려 온 사람처럼. 마주친 두 눈이 절절 끓고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이종하는 내 손가락 사이마다 제 손을 맞잡아 낀 채로 내 손등을 애틋하게 어루만졌다. 뺨과 머리를 쓸어 주는 손길 모두 분에 넘치는 애정이었다. 내게 쏟아지는 모든 것들이 좋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해 주는 이종하가 좋았다.
“종하야.”
그럼에도 자신이 없었다. 이 마음을 이종하에게 전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나는 비겁했다. 그 애를, 그 애의 마음을 책임질 상황도 아니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이종하, 나는…….”
“아무 말도 안 해도 돼.”
“…….”
“지금은 이걸로 충분해. 지금 나 잡아 준 거. 나한테 잘못했다고 말해 준 거. 나 속상한 거 알아준 걸로 됐어. 내 말 알아들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이종하가 더 깊이 끌어안았다. 비겁하고 못난 나를 받아 주는 이종하가 버거웠지만 더 이상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우리는 곧바로 집으로 갔다.
계단을 오르면서 입을 맞추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기도 전에 서로의 옷을 벗겼다. 언제 보아도 이종하의 몸은 아름다웠다. 인위적이지 않은 그 싱그러움을 보고 있자면 그의 앞에 있는 내 자신이 초라해질 지경이었다.
다시금 입을 맞추려 고개를 숙여 오는 이종하에게서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짙은 그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지금, 여기서, 왜. 의문을 담은 눈이었다.
“…….”
손바닥을 펼쳐 성마른 숨을 몰아쉬며 들썩이는 남자의 가슴을 쓸었다. 고동치는 심장이 손안에 담겼다. 이종하는 내게 키스하고 싶은지 연신 입술을 달싹이면서도, 잘 훈련된 대형견처럼 기다리란 주인의 말을 따랐다.
천천히 이종하의 몸을 덧그리듯 만졌다. 판판한 가슴을 타고 올라가 시야에 가득 들어차는 어깨를 쓸었다. 곧게 뻗은 쇄골에 내 손이 닿았을 때 그의 목울대가 울컥 떨렸다. 손끝을 따라붙던 시선을 들어 올리자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웃지 않았다. 웃지 않는 내 얼굴이 이종하의 눈동자에 비쳤다. 하루에도 수없이 보는 내 얼굴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던가. 이런 표정으로 너를 보고 있었던가.
이종하를 마주한 채, 쇄골에 닿아 있던 손을 내려 그의 팔을 쓸었다. 섬세하게 빚어진 근육과 그 위에 흐릿하게 돋아난 힘줄. 특히 내가 예뻐하는 부분이었다.
팔을 따라 내려간 손끝에 그의 손이 맞닿았다. 주먹 쥔 손을 살살 어루만져 펼치고 그 안으로 내 손을 끼워 맞췄다.
“나 많이 참은 것 같은데. 더 기다려야 돼?”
초조한 듯 혀를 내어 마른 입술을 축이던 이종하가 물었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져 있었다.
“아니. 이제 됐어.”
마지막 말은 이종하의 입안에서 울렸다. 뜨거운 숨과 매끈한 혀가 동시에 밀고 들어왔다. 나는 성급한 침입자를 위해 기꺼이 입을 벌렸다.
이종하가 불어넣은 숨이 내 전신을 나른하게 녹였다. 허리를 감싸 안은 강인한 팔의 힘도, 얇은 셔츠 안으로 팔을 넣어 등허리에서 목덜미까지 쓸어 올리는 커다란 손바닥의 감촉도 좋았다.
이종하는 떨어져 있는 잠시도 아깝다는 듯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나를 들어 올렸다. 현관에서 거실을 지나 침실로 들어서는 동안 나는 두 팔로 이종하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에 응했다.
이종하의 키스 실력은 날로 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어디서 배워 왔기에 이렇게 키스가 능숙하냐고. 그는 거짓이라곤 조금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모두 내게서 배운 것이라 답했다. 키스보다 섹스는 더 잘 배웠다고 덧붙였다.
나는 어느새 알몸이 되어 이종하의 아래에 누워 있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는 키스보다 섹스를 더 잘했다. 전희만으로도 나를 붕 떠오르게 했다. 오랜 키스로 붉게 달아오른 입술이 내 온몸 구석구석을 지나 다리 사이를 점령했다. 나는 그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쥔 채 가슴을 들썩였다. 눈앞이 새하얗게 번졌다.
“하아. 하아…….”
천장의 벽지 무늬가 다시 눈에 들어왔을 즈음, 나는 흥분에 달달 떨리던 몸을 일으켰다. 이종하를 눕히고 그 위에 올랐다. 아플 정도로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남자의 중심이 내 체중으로 짓눌렸다.
“읏, 아, 너 뭐야.”
이종하의 길쭉한 눈매가 일그러졌다. 이종하는 팔꿈치를 받쳐 간신히 상체를 든 채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찡그린 눈매를 살짝 핥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엉덩이 사이로 단단한 기둥이 스윽스윽 쓸리는 감각이 섬뜩했다. 그리고 더없이 자극적이었다.
이종하는 연신 미치겠다고 중얼거렸다. 내 엉덩이를 터트릴 것처럼 강하게 쥐어짜며 허릿짓을 독려하기도 했고, 사정감이 치밀 때면 골반을 붙잡아 움직임을 저지시키기도 했다. 그와 내가 흘린 미끄덩한 액이 갈급하게 맞비벼지는 살갗의 마찰을 줄여 주었다.
“넣을게.”
“아직.”
“넣을래. 넣게 해 줘.”
“하으…….”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이종하가 내 허리를 들어 올렸다. 내 엉덩이에 짓눌려 있던 성기가 튕겨지듯 꼿꼿이 섰다. 한 손으로 내 허리를 받든 채, 다른 한 손으로 제 성기를 쥐고 입구를 맞추려는 그를 피해 나는 무게 중심을 앞으로 몰았다. 풀썩 이종하에게 안겨졌다.
“김수연, 왜 또.”
이종하를 피하려고 숨어든 곳이 고작 이종하의 품이었다.
“이종하. 너, 내가 왜 좋아?”
“하아. 왜 이러는데 지금. 나 더 못 참아.”
“빨리 말해. 내가 왜 좋아.”
괴롭히려는 이유는 아니었다. 듣고 싶었다. 밀어내고 상처 내고 할퀴어도 왜 계속 나를 찾아오는지. 별 볼 일 없는 나를 왜 이리도 갖고 싶어 애달아하는지.
“예뻐서. 너처럼 예쁜 여자 처음 봤어.”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나 하나도 안 예뻐.”
“내가 어리든 늙었든 그게 뭔 상관인데. 내 눈엔 네가 제일 예뻐. 너만 예뻐.”
“……너는 거울도 안 보냐.”
나는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목소리 끝에 묻어나는 떨림을 이종하가 눈치채지 못하길 바랐다. 나는 태연하게 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대로 손을 뒤로 물려 한 손으로는 제대로 잡히지도 않는 성기를 쥐었다. 기둥을 위아래로 쓸다가 귀두 끝을 손바닥으로 둥글게 어루만졌다. 젖은 입구에 성기를 맞춰 내리려는 순간,
“김수연, 좋아해.”
목에 핏대를 세우고 나를 올려다보던 이종하가 말했다. 그의 고백은 낮은 신음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온몸으로 전해 오는 그 마음을 어떻게 모를까. 그럼에도 이종하는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정말 좋아해.”
“…….”
“많이 말해 주고 싶었는데, 못 그랬어. 너 볼 때마다 말하고 싶었어.”
나는 알고 있었다. 비겁한 내가 도망갈까 두려워 좋아한단 말을 수백 번 참았을 그 애의 마음을. 목구멍 속 가득 숨겨 두었던 좋아한다는 말을 겨우 꺼내는 그 애의 애틋함을.
그리고 이제,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나를 좋아하는 이종하를, 그리고 그런 이종하를 좋아하는 내 마음을.
나는 이종하의 몸을 품었다. 천천히 내 안을 채우는 부피를 느꼈다. 기분 좋은 아득함에 신음이 샜다.
“앗, 아윽.”
“하아아…….”
누구에게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 없었다. 한껏 흐트러진 채로 타인에게 몸을 내맡기는 것은 내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종하 앞에서는 쉬이 뻔뻔해진다. 대담해진다. 수치를 모르고 날뛰게 된다. 그런 나를 나조차 제어하기 힘들었다.
여느 때보다 적극적인 내 반응에 이종하는 기꺼이 응해 왔다. 황홀경에 빠진 이처럼 반쯤 풀린 눈을 하고 내 온몸을 물고 빨았다. 그의 모양으로 길이 난 내부를 수없이 가르고 들어왔다. 그의 것만이 닿을 수 있는 깊은 곳으로 짓쳐들어왔다.
세 번째 정액을 내 가슴에 쏟아 내고서야 이종하는 내 위에서 물러났다. 그러고도 아쉬웠는지 허리를 끌어안고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나 안 예뻐.”
마치 그 안의 사정은 없었던 일처럼, 나는 삽입 전에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를 끌어왔다. 이종하는 이마에 쪽쪽 소리가 날 정도로 입을 맞추며 답했다.
“예뻐.”
“안 예뻐. 예뻐서 좋다는 거 거짓말 같으니까 왜 좋은지 다시 이유 말해 봐. 갑자기 지어낸 거라고 해도 봐줄게.”
“나는 멍청해서 그런 거 못 지어내.”
“왜 못해. 빨리 말해 봐. 예를 들어 서울 여자를 처음 봐서 좋아졌다든가.”
내 말이 어디가 우스운지 키득대던 이종하가 몸을 비스듬히 뉘어 제 머리를 받쳤다. 내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며 생각을 쥐어짜듯 골몰했다. 그런 와중에도 성실한 이종하의 손은 내 가슴을 쥐었다. 정액을 로션처럼 가슴에 펴 바르듯 주무르며, 그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너처럼 심드렁한 애 처음 봤다, 난.”
“내가 심드렁했다고?”
처음 만난 밤을 되짚었다.
서로를 경계했던 밤. 낯선 마을에 온 나는 모든 이에게 불청객이었다. 그 애만은 나를 성가셔하지 않았다.
말로는 귀찮다 했지만 폭우가 쏟아지던 그 밤에 나를 거둬 하룻밤을 재워 준 것도, 길을 안내해 준 것도 다 이종하였다. 그래서 그 애에게 경계를 쉽게 푼 것은 맞지만, 결코 심드렁하지는 않았었다.
“그래서 쿡쿡 찌르고 싶었어.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근데 너는 알다가도 모르겠더라. 우리 집에 있을 땐 밥도 넙죽넙죽 잘 먹고, 파전 찢어 주는 걸 받아먹으면서 술 없냐고 묻지를 않나. 찾아가면 찾아가는 대로 받아 주고. 그러다가도 또 못되게 굴고. 그런 거 보니까 더 신경 쓰이고 미치겠더라.”
그 애가 하는 말은 전부 내가 그 애에게 느끼던 그대로였다. 자꾸 찾아오니까 찾아오는 대로 받아 주고, 그런 그 앨 보니까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고 쿡쿡 찔러 보고도 싶었다. 아닌 척했지만 이종하는 내게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
“나한테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누굴 생각하면서 자위를 해 본 적도 없고, 누구랑 자 보고 싶단 생각도 한 적이 없어. 네가 하는 말, 네가 움직이는 모습, 나를 보는 표정, 나를 만지는 손길. 그런 게 자꾸 생각이 났어. 그래서 그림으로라도 옮겨 두고 매일매일 보고 싶었어.”
습관처럼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너한테도 내가 그런 남자였으면 좋겠어.”
이종하는 내게 이미 그런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만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