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11)

4.

모른 척

그 애는, 이종하는 종종 점심을 싸 들고 미술관엘 찾아왔다. 사거리 슈퍼에서 빵과 우유를 사 들고 오거나 시장에서 김밥 몇 줄을 사 왔다. 처음 왔던 그날처럼 튀긴 닭을 들고 오기도 했다.

번거롭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처음 몇 번은 밀어냈다. 원래 점심 같은 거 잘 안 먹으니 낮에는 오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나 그 말이 오히려 도화선이 되었는지, 그다음부터는 도시락 통에 집 밥을 싸 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대로 안 챙겨 먹으니까 뼈만 잡히지, 투덜대며.

밑반찬만 해도 서너 가지가 넘어갔다. 반찬 가게에서 산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 애가 만든 음식이었다. 이제는 메뉴가 바뀌는 것이 기다려질 지경이었다.

“이것도 네가 만들었어?”

“어.”

속을 통통하게 채운 유부초밥이 탐스러웠다. 이종하는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하는 모양이었다. 긴 손가락 끝이 야물었다.

밥을 먹을 때 말이 없는 나를 대신해 이종하는 종종 그의 일상을 이야기했다. 동네 사람들 심부름을 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저께는 건넛집 할아버지를 대신해 경운기를 몰았다. 어저께는 슈퍼 집 하수구를 뚫어 주고, 동이네 지붕도 수리해 주었다 등등.

나는 동이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새콤달콤한 유부초밥의 간이 입에 맞아 다음에도 또 만들어 달라고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은 새벽부터 일어나 생선 가게에 가서 생선 궤짝을 날라 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종하에게서 비린내는 나지 않았다.

오늘따라 높은 구두를 신어 잠깐 비틀대던 나를 부축할 때 그 애의 품에서 상쾌한 비누 향만이 났다. 마당 수돗가에 늘 놓여 있던 그 비누의 향이었다.

“그럼 보통 땐 뭐 해?”

내 물음에 이종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방금 말했잖아. 동네 사람들이 일 시키는 거 돕는다고.”

“그걸 하루 종일 해?”

“일찍 끝날 때도 있고, 늦게 끝날 때도 있는데 보통 한나절씩은 걸려. 빨리 안 끝날 일이라 날 부르는 거니까.”

고작 심부름하는 일을 그 정도의 시간을 들여 한다는 게, 그리고 그걸 매일 한다는 게 이상했다. 아직 어리니 차려입고 출퇴근하는 번듯한 직장을 구하려 기를 쓸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멀쩡한 젊은 애가 미래도 보이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캐묻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자, 이종하는 머쓱해 하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냥 하는 거 아냐. 일당 받아.”

“그래.”

“그게 내 일이라고.”

“그래. 알았어.”

도시락을 싸 들고 미술관을 찾아오는 시간 외에 너는 무얼 하느냐고 먼저 물어본 주제에, 내가 봐도 성의라곤 조금도 없는 대답이었다.

이종하와 나 사이에는 잠시간 침묵이 맴돌았다. 이야기를 조곤조곤 이끌어 가던 이종하가 돌연 말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나도 어색함을 잘라 내려 노력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이번에도 역시 먼저 입을 뗀 것은 이종하였다.

“너 아까 그 질문,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아님 나 무시하는 거 티 내려고 물어본 거냐.”

“…….”

“내가 뭘 하고 다니는지 궁금하지도 않잖아, 너는.”

“이종하, 나는…….”

이종하의 일상이 전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묻지 않아도 줄줄 제 일과를 읊어 오기에 그저 가만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애의 말에 항변하기를 멈추었다. 항변하기에 적절한 때는 아니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내가 이종하를 어느 정도 무시한 건 맞았다. 무시하지 않았다고 하기에 내 태도는 썩 좋지 않았다.

“내 얘기가 듣기 싫으면 차라리 듣기 싫다고 해. 너 관심 없는 얘기 나도 안 하고 싶으니까.”

이종하는 나를 미술관으로 데려다주곤 인사도 없이 떠났다. 그리고 그날 이후부터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밥을 싸 오는 일도, 폐관 시간의 미술관을 찾는 일도, 늦은 밤 집 앞에서 기다리는 일도 없었다.

나는 점심을 거른 채로 혼자 퇴근해서 집에서는 맥주만 마셨다. 냉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집은 한낮의 더운 기운을 품어 후텁지근했다. 나는 속옷만 입고 거실에 앉아 연거푸 맥주를 들이켰다. 천천히 마시니 취하지도 않았다. 구겨진 빈 캔이 거실 바닥에 널브러졌다.

“우습다.”

문득 그 애의 부재가 우스웠다. 그 애가 내게 보여 줬던 모든 게 하찮았다.

나와 있을 때 보이던 조급함, 나를 만질 때의 애틋함, 내게 애정을 조르던 어리광 같은 것들이 내가 구긴 맥주 캔보다도 못하게 느껴졌다.

함께 엉켜 들었던 밤도, 나눠 먹었던 음식들도 없으면 그만일 것들이다. 어차피 안 보면 그만일 사이였다.

며칠이 지났다.

똑같은 하루의 반복이었다. 그 애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고, 나도 그 애를 찾아다니지 않았다.

퇴근 후 시장을 지나다가 뜻밖에 미용실 원장을 봤다. 미용실 원장은 생선 가게 앞 천막 아래서 담배를 태우며 시장 아낙들과 화투짝을 맞추고 있었다. 그냥 지나쳤어도 될 일이었지만, 나는 살금살금 천막으로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미용실 원장이 먼저 알은척을 해 왔다.

“아가씨, 오랜만이네. 장 보러 왔어?”

“퇴근하고 지나는 길이에요. 안녕하셨어요?”

“나야 똑같지. 지낼 만해? 시장 오간단 말은 건너 들었는데.”

“시장 분들이 절 아세요?”

“워낙 작은 동네라 새로 든 사람이 있으면 소문 금방이지.”

그러면서 화투짝을 든 여자들에게 넌지시 묻는 것이었다.

“알지? 미술관에서 일하는 아가씨. 서울서 왔다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다들 데면데면한 표정이었으나 나를 위아래로 훑는 눈초리만은 선명했다.

그다지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여자들의 시선에는 나를 경계할 의도나 평가할 의지가 조금도 없었다. 차라리 호기심에 가까웠다.

나는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공손하게 전하고 놀러 오시라 덧붙였다. 어차피 오지 않을 것이다. 원장에게도 입장권을 건넸지만 찾아온 것은 그녀의 아들뿐이지 않았는가. 그러나 나를 소개하기엔 이게 제일 편한 방편이었다.

“미술관에 놀러 오란 말은 살다 살다 또 처음 듣네. 가도 우리가 뭘 아나? 원장님. 그래서 칠 거야, 말 거야. 자기 차례 기다리잖아.”

“하이고, 말 몇 마디 좀 했다고. 기다리던 패가 좀 들어왔나 부지?”

원장의 너스레에 여자들이 까르르 웃었다. 사납게 재촉하던 말투와는 달리 친하게 어울리는 사이임이 분명해 보였다. 원장이 쥐고 있던 패 한 짝을 날렵하게 맞췄다. 짝 맞는 소리가 경쾌하게 이어지자 할 일이 없어진 내가 슬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자긴 화투 칠 줄 모르나?”

“왜 모르겠어요.”

“퇴근했댔지? 바빠? 우리 장사 걷을 때면 모여서 몇 판 치고 이걸로 소주 먹거든. 자기, 안 낄래? 집에 기다리는 사람 있어?”

“저 잘 못 치는데, 제가 껴도 재밌으시겠어요?”

“자기야말로 싱싱한 아가씨가 과부들 사이에 껴도 괜찮겠어?”

나는 대답 대신 피시시 웃으며 평상에 다가앉았다. 여자 셋이 자리를 좁혀 앉으며 내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치던 판을 깔끔하게 가져간 원장이 패를 돌렸다. 원장이 빠진 자리에 내가 들어갔다. 패를 고분고분 쥐고 치마 입은 다리를 올려 옆으로 접었다.

매끈매끈한 비닐 앞치마를 맨 여자가 탈탈 소리를 내는 작은 선풍기를 내 쪽으로 돌려주었다. 의도치 않은 친절에 마음이 풀렸다.

“자기야, 지금은 그 패가 아니지. 고 옆에.”

“알려 주지 마. 지금 점수 난 거 몰라? 아가씬 서울서 화투만 쳤어?”

나는 그냥 웃었다. 일부러 져 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장을 파하고 귀가하는 장사꾼들이 반찬거리를 사러 들를 때마다 앞치마를 맨 여자가 자리를 비웠다. 그때마다 미용실 원장이 대신 패를 맞춰 주었다.

그렇게 서너 판을 치고 나니 해가 다 져 있었다. 전구 아래로 몰려드는 날벌레가 성가신지 여자들이 슬슬 판을 정리했다.

“오늘은 우리 미용실 가서 마시자. 다들 괜찮지? 자기도?”

미용실 원장이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 대용의 깡통에 비벼 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슬며시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어차피 집에 가 봤자 혼자 술을 마시는데, 이들 사이에 껴서 마신다 한들 그다지 다를 일도 아니다.

각자 가게를 정리하고 가겠다는 말에 미용실 원장과 내가 먼저 미용실로 향했다.

“머리 자르러 한 번 오지 그랬어? 우리 집 있을 때 못 잘라 줘서 맘에 좀 걸렸었는데.”

“그러게요. 생각을 못 했네요.”

“자기도 태울래?”

미용실 원장이 내미는 담배를 순순히 받아 들었다. 우리는 담배 연기를 유유히 내뱉으며 어두운 골목길을 걸었다. 조용하고 편안한 밤이었다.

생선 가게 여자와 반찬 가게 여자가 오기 전에 머리를 다듬어 주겠다는 말에 나는 거울 앞에 앉았다.

문득 미용실 원장에게 머리를 자르기로 했던 날, 이종하가 머리를 감겨 줬던 것이 떠올랐다.

“참, 우리 앤 일 나갔어.”

미용실 원장이 내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나도 모르게 가게를 둘러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경운기 몰고 나가는 건 지나가면서 몇 번 봤었어요.”

“걔가 그래 봬도 할 줄 아는 게 많아.”

경운기를 몰고 동네 사람들 잔심부름을 하는 게, 과연 일이라고 할 만한가 싶어 나는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어르신들이 도와 달라고 하면 거절을 잘 못 해서. 오며 가며 경운기 몰아 드리고, 짐 좀 날라 드리던 게 나중엔 동네 심부름꾼처럼 돼서. 일당 받고 젊은 사람 없는 집 가서 노인네들 일 봐주게 된 거거든. 근데 무슨 취직을 했다나.”

“취직요?”

“가게에 들어앉아서 일을 봐주기로 했대.”

그때, 미용실 문이 열렸다. 두 여자 모두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뭘 사 들고 왔어? 예쁜 아가씨 꼈다니까 신경이라도 썼나 벼?”

“산 게 아니라, 자기 아들내미가 미용실 가서 술 마시는 거면 들고 가라고 주더라고. 오는 길에 상추, 깻잎만 더 챙겼지 뭐. 걔 요즘 고깃집 일 도와줘?”

까만 비닐봉지에서 삼겹살 덩어리와 채소가 나왔다. 원장은 잽싸게 내 머리를 다듬어 주고는, 미용실 뒷문을 열고 나가 상을 폈다. 내가 채소를 씻을 동안, 여자들이 반찬을 옮겼다.

취직. 고깃집.

푸짐한 한상차림이 차려질 동안 나는 그 애, 이종하에 대해 생각했다.

여자들은 내 예상보다 수다스럽지 않았다. 본래 성격들이 호들갑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돌아가며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며 저마다 손님들 흉을 봤다. 옛날 노래를 불렀다가 담배도 태웠다가 하며 시간을 보냈다.

소주 세 병이 넘어가도 누구 하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없었다. 주로 반찬 가게 여자와 미용실 원장이 얘기를 이어 갔다. 생선 가게 여자는 나보다도 말이 없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와 나이가 비슷할 것 같았다.

술병이 전부 비기 전에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딜 혼자 내빼느냐고 질책하는 이도, 가지 말라 잡아끄는 이도 없었다.

빈 잔에 소주를 따르며 미용실 원장이 말했다.

“또 와.”

“그럴게요.”

또 오란 말도, 그러겠단 말도 가벼웠지만 서로가 진심이었다.

시장 여자들과 화투를 친 이후로 나는 사나흘에 한 번꼴로 그들 사이에 끼었다. 어쩌다 끼어도 왜 오지 않았느냐 묻지 않아 편했다.

여자들은 서로에겐 어떤지 몰라도 나에게는 약간 무심했다. 그편이 좋았다. 이따금씩 여자들은 나에게 반찬이나 생선을 주었고, 나는 과자 몇 봉이나 맥주를 사 들고 가기도 했다.

일이 늦게 끝난 금요일 밤, 나는 시장 바깥 길에 있는 정육 식당으로 들어섰다.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서자 이종하가 주방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내 얼굴을 확인한 그 애가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

이종하가 이곳에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던 나만 태연했다. ‘어서 오세요’라는 흔한 인사도 없는 그 애를 두고 내 멋대로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종하가 쭈뼛대는 사이, 식당 구석 자리의 손님이 그를 불렀다.

“여 불판 좀 갈아 주쇼.”

나는 빈 테이블 앞에 홀로 앉아 이종하를 지켜보았다. 고기 양념에 까맣게 그을린 불판을 갈아 주고, 새 고기를 가져다 판에 올려 주는 손길이 야무졌다.

그사이, 가게에 손님이 더 들어찼다. 이종하는 내게 눈길 한 번 주질 않았다. 나도 딱히 이종하를 부르지 않았다.

이종하가 바빠 그러든 바쁜 걸 티 내려는 거든, 나에겐 그 애를 재촉할 이유가 없었다.

그 앤 한참 만에 주문을 받으러 왔다.

“뭐 줘?”

손님을 대한다기에는 너무도 퉁명스러운 말투에 웃음이 나올 뻔했다. 나는 이종하의 눈을 빤히 올려다보며 입을 뗐다.

“삼겹살 2인분이랑 소주 한 병.”

이종하는 대답도 없이 돌아섰다. 양은 쟁반에 근을 잰 고기를 척척 얹고, 쌈 야채와 밑반찬, 소주 한 병까지 챙겨 돌아왔다. 빈 테이블이 금세 푸짐해졌을 때, 테이블 맞은편 의자를 죽 끌어낸 이종하가 턱 하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왜?”

“고기 구워 주려고.”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고기가 불판에 올려졌다. 한쪽 면이 노릇하게 구워졌을 때, 이종하는 노련한 손놀림으로 고기를 잘게 잘라 냈다.

고기 익는 냄새에 제법 군침이 돌았다. 이종하는 나머지 한 면을 익히는 동안 집게를 한 손에 든 채 소주를 잔에 따라 들이켰다. 소주잔은 하나뿐이었다.

“그건 또 왜 마시는데?”

“고기 구워 주는 값.”

구워 달란 말도 안 했는데 멋대로 자리에 앉은 주제에, 이종하는 무슨 대단한 부탁이라도 들어주듯 말했다.

“너 모르나 본데 나 이 동네에서 비싸. 심부름하는 거마다 다 돈이야. 에누리는 해 줘도 외상, 공짜는 절대 없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제법 당당했다. 놀려 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으나 기를 꺾고 싶지는 않았다.

고깃집 취직. 이종하가 여기서 일하게 된 것이 나와의 말싸움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 영향이 전혀 없다고 볼 순 없었다. 그걸 모를 정도로 무심하지는 않았다.

“소주 한 병 다 줄 테니까 고기 구워 줘.”

그러나 그때의 말싸움에 대해 사과할 생각은 없었다. 밑반찬으로 나온 파절임을 집어 먹으며 말하자, 이종하가 비식 웃으며 대꾸했다.

“소주 한 병으로는 안 되겠는데.”

“됐어, 그럼. 나머진 내가 구울게. 가 봐.”

“너는 꼭 그러더라? 한 번쯤은 좀 받아 주면 안 되냐?”

“내가 안 받아 주는 거 알면서 꼭 그러더라, 넌.”

내가 집게를 빼앗으려 들자 이종하가 몸을 뒤로 물리며 집게 든 손을 바꿔 잡았다. 왼손을 썼던가. 별 의미 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 노릇노릇 구워진 삼겹살이 내 앞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냉큼 고기들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고소했다.

“고기만 먹지 말고 쌈에 싸 먹어.”

귀찮다고 고기만 먹다간 이종하가 직접 쌈까지 싸서 입에 넣어 줄 기세라, 나는 그 애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쌈을 쌌다. 그래 봐야 고기 한 점에 파절임 조금, 작게 썰린 고추를 장에 발라 올리는 것뿐이었다.

내친김에 이종하의 앞에 있던 빈 술잔을 내 앞으로 끌어다 놓았다. 술을 따르려는데 손에 있던 소주병이 빠져나갔다. 작은 술잔에 투명한 액체가 콜콜 따라졌다. 이종하가 따라 준 소주를 반쯤 마시고 내려놓는데, 그 애가 불쑥 물었다.

“머리 잘랐어?”

“응.”

너네 엄마한테서, 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작은 동네에 미용실이라곤 그곳 하나뿐이었으니. 끝만 조금 다듬은 거라 별반 차이도 없을 텐데 알아차린 이종하가 신기했다.

이종하는 남은 고기를 불판에 더 올리며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예쁘네.”

이종하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얼굴 앞에서 직접 듣는 말이 낯간지럽다. 못 들은 척하는 나에게 이종하가 너 예쁘다고, 부러 콕 집어 되풀이했다. 나는 손등으로 붉어졌을 뺨을 무심히 쓸고는 그 애 앞으로 휘휘 손을 내저었다.

“알았으니까 가. 손님 많이 오네.”

젊은 얼굴들이 가게로 우르르 몰려들어 온 참이었다. 이종하랑 비슷한 또래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정말로 그 애의 친구들이었던 모양이다. 그들이 이종하와 내가 앉은 쪽을 보더니 싱글싱글 농을 걸어왔다.

“이종하. 뭐냐? 여자랑 같이 있네? 일하는 줄 알았는데 아주 놀고 있네, 놀고 있어.”

“그 여자야?”

“조용히 좀 하고 앉아라? 그쪽 말고 저쪽으로.”

이종하가 나를 등지고 일어나 친구들을 반대편으로 몰았다. 양 떼를 울타리 안으로 모는 듬직한 양치기 견 같았다. 나는 소주를 잔에 따르며 무리를 훑어보았다. 인상이 흐릿해 기억에 남는 이는 없었지만, 아마도 저 중 한둘은 시장에서 이종하와 함께 있던 이들일 것이다.

이종하의 친구들은 고기를 먹는 둥 마는 둥 나를 흘깃거렸다. 개중 몇은 대놓고 나를 봤다. 영 신경이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태연하게 남은 고기와 소주를 비워 갔다.

그때, 이종하가 내게 다가왔다.

“혼자 먹기 그러면 내 친구들이랑 같이 먹을래? 고기 사 준대.”

“아니, 난 괜찮은데.”

이종하가 제 친구들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몇몇은 탄식했고, 몇몇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되게 도도하다. 서울 여자들은 다 저런가?”

“이종하보다 나이가 훨 많다잖아. 우리가 다 애새끼로 보이나 보지.”

나를 등지고 목소리를 낮춰 하는 소리였지만, 잘만 들렸다.

“암튼 저 여자야. 이종하 아다 뗀 서울 여자.”

“아! 좀!”

이종하가 펄쩍 뛰며 성질을 부리자 그 애들은 좋다고 저들끼리 낄낄거렸다. 그들 말마따나 나보다 한참은 더 어린 애새끼들의 말이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근데 마지막 말은 좀 셌다. 이종하 아다 뗀 서울 여자. 거름망 없이 적나라한 표현에 조금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소주잔을 입에 댔다.

“조용히 하랬다. 한 번만 더 그러면 다 내쫓을 거야.”

이종하는 그들을 조용히 윽박질렀다. 목소리는 거의 애원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면서도 고기 굽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내 쪽을 확인하기가 두려워 구석 친구들 테이블에서 미적대는 것으로 보였다.

“새끼야, 너 우리한테 자랑하려고 오늘 부른 거잖아.”

“아니라고. 나도 올 줄 몰랐다고.”

하긴, 애초에 연락 없이 불쑥 찾아온 것은 나였으니까.

그들은 끊임없이 이종하에게 내 얘기를 캐물었다. 이종하가 아니라 나 들으라 하는 소리 같았다.

뭐 어때. 나도 개의치 않았다. 20대 초반의 남자애들이 할 만한 얘기였다. 이 작은 동네에서 관심 가질 일이라곤 누가 누구랑 만나 연애를 걸고 섹스를 한다는 소식뿐일 것이다. 그러다 같이 살고 애를 낳으면 또 그런대로 축하를 해 주겠지.

이종하의 친구들이라는 남자애들은 질이 나빠서 입방정을 떠는 것이 아니었다. 이종하를 놀려 주려는 것이었다. 알 만했다. 이종하는 놀리기 딱 좋은 성격이었다.

“이종하, 요즘 여자 생겨서 도장도 안 오고. 아주 빠져 가지고.”

“그런 거 아니거든?”

다 같이 동네 도장에서 운동이라도 하는 모양인지 오늘은 누가 훅이 좋았다느니, 발재간이 늘었다느니 하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떠드는 것을 들으며 나는 천천히 고기를 구워 소주 한 병을 다 마셨다.

“나 계산 좀 해 줘.”

흘끔흘끔 나를 확인하던 이종하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야 이쪽으로 다시 돌아왔다. 친구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을 향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종하는 계산은 됐다며 손을 작게 내저었다.

“그냥 가라고. 내가 알아서 하니까.”

“여기가 네 가게야?”

돈을 안 받겠다는 이종하에게 고집스레 카드를 내밀었다. 그 애는 못마땅한 얼굴로 카드를 받아 들었다. 계산하고 나가는 내 뒤로 급한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김수연!”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금세 따라잡은 이종하는 나를 붙들어 세우는 대신 나와 걷는 속도를 맞추었다. 이대로 집까지 데려다주기라도 할 건가 싶을 정도로 오래도록 옆을 지키던 이종하가 답답해 내가 먼저 물꼬를 텄다.

“일 안 끝났잖아. 그 꼴로 집까지 갈 건 아니지?”

이종하는 기름기 묻은 앞치마를 내려다보며 쭈뼛거리듯 말했다.

“미안.”

“뭐가.”

“애들이 하는 말, 들렸지?”

“아아, 나 들으라고 하는 말 아니었어?”

아니라면 목소리가 너무 컸다. 제법 재밌는 수다라 그 덕에 심심하지는 않았지만.

이종하는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애처럼 내 눈치를 봤다.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인상을 찌푸리던 이종하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진짜 미안. 근데, 내가 그런 거 아냐. 너랑 나랑…….”

답지 않게 뜸을 들이던 이종하가 말을 이었다.

“너랑 나랑 그런 사이라고 말하고 다닌 거 아니라고. 저 새끼들한테.”

“너랑 나랑 무슨 사이라고 말하고 말 것도 없잖아.”

이종하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뭐라고 말하고 다니든 신경 안 써.”

내 팔을 이종하가 홱 끌어 잡았다. 친구들에게 놀림받아 당황하고 나한테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던 조금 전과는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넌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하냐고?

나는 이종하를 올려다봤다. 억울하고 분한 표정이었다. 솔직히 이종하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내 말 몇 마디에 자존심이 상해서는 며칠이고 찾아오지도 않은 게 누구인데. 이제 와선 뭐가 그렇게 억울한데?

그렇게 보지 않은 시간이 열흘이었다. 열흘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이종하와 내가 서로 안 보면 그만일 사이라는 것을 확신해 나갔다. 이런 속내를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도 없었다.

“아파.”

이종하에게 잡힌 팔이 아팠다. 그 애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내 팔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나는 곧바로 그를 등졌다.

그날 밤이었다.

술기운에 꽤 깊이 잠들었던 나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겨우 눈을 뜨고 밖으로 나갔다. 이곳, 나양에서 나를 찾을 이라고는 단 한 명뿐이었다.

“……잤구나.”

“어.”

이종하가 가만히 서 있기에 나도 똑같이 있었다. 한참을 서 있자 어둠에 눈이 익숙해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 시간에 찾아왔는지, 그런 주제에 말없이 침묵을 지키는지.

보아하니 그 애는 술에 취한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취한 것은 내 쪽이었다. 할 말 생각나면 다시 찾아오라고 일갈하며 닫으려는 문을 이종하가 잡았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너랑 나랑…….”

“대체 지금이 몇 신데 와서. 그 얘긴 아까 끝냈…….”

“아무 사이 아니어도 되니까 나랑 있어.”

이종하가 못 견디겠다는 듯 나를 껴안았다. 밀어내도 조금도 꿈적하지 않을 정도로 평소보다 힘이 셌다. 빈틈없이 맞닿은 가슴으로 쿵쿵, 거센 심장 박동이 전해져 왔다.

“내가 잘못했어.”

“이종하…….”

뭘 잘못했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그가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알고 있다.

“내 멋대로 안 할게. 그러니까 나랑 같이 있어. 너한테 부담 안 줄게. 그러니까…….”

그 애는, 이종하는 나와 함께 있기 위해 빌고 있었다.

그 밤, 이종하는 나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내게 처음을 주었던 그날처럼 그 애는 유독 수줍어했고, 그런 모습에 나 역시 평소보다 달뜬 신음을 흘려야 했다.

이렇게 온몸 구석구석을 빨리고 쓸어안고 맞대고 있는데도 너와 내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이 이상했다. 나는 내가 내뱉은 말에 위화감을 느끼며 단단한 남자의 등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 순간 이종하가 내 안에서 뜨거운 흥분을 토해 냈다.

땀으로 끈적끈적한 몸을 씻지도 않고 이종하와 나는 그대로 누워 있었다. 나란한 어깨가 맞닿아 있다. 커튼이 없는 방의 창문으로 흘러 들어온 희끄무레한 달빛이 우리의 알몸을 비추었다.

“서울에서는 어떻게 지냈어?”

“지금이랑 비슷하게.”

이종하가 물었고, 내가 답했다.

“너 몇 살이야?”

“서른하나.”

“나보다 아홉 살 많네.”

“그래서 뭐.”

“그냥 그렇다고.”

“내가 나이 많아서 좀 그래?”

아니! 이종하가 펄쩍 뛰며 부인했다. 너 나이 하나도 안 많아 보여. 아니 많아도 상관없어. 상관없다는 건 그니까 우리가 꼭 어떤 사이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그니까 내 말은……. 말은 두서없어도 그 애가 하고 싶은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알았으니까 가만히 좀 있으라고 이종하의 팔을 툭툭 쳤다. 이종하는 쓸데없는 질문을 한 자신을 자책하며 다시 내 옆에 누웠다.

그 애는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시골 개울물처럼 투명해서 속이 다 들여다보였다. 그 애의 장점이었다.

조금 주춤하던 이종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한 것을 못 참겠는지 계속해서 질문해 왔다. 이종하를 만나기 전 나에 관한 질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거 좋아했어?”

“그랬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그림을 좋아했지만, 그림을 그려 벌어먹고 살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미대를 졸업하며 그동안 배운 것 중 가장 쓸모 있는 짓이라곤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사회에 나와 다른 분야의 직업을 얻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미술관엔 어떻게 취직했어?”

“학교 선배가 추천해 줘서 그냥 들어갔어.”

당시의 나에게는 과분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선배의 제안을 덥석 물었겠지. 2년간 끈질기게 피해 다닌 주제에, 허허실실 사람 좋게 웃으며 선배를 마주할 자신도 없으면서.

“추천해 준 선배는 어떤 사람인데?”

“……나 목말라.”

이종하는 벗은 몸을 그대로 일으켜 물을 떠 왔다. 한쪽 팔로 내 등을 감싸 일으키고는 등 뒤로 제 벗은 몸을 겹쳐 왔다. 나는 그 애의 품에 늘어져 물 한 잔을 다 받아 마셨다.

“그렇게 목이 말랐으면 말을 하지.”

내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올리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여태 실컷 자 놓고는, 제 몸을 제멋대로 내게 포개 올 때는 언제고 이종하는 내 벗은 몸을 의식했다. 가슴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조금 우스웠다.

“혼자 일하면 안 힘들어? 난 저녁 시간에 혼자 홀에 있으면 힘들더라.”

“여기는 사람이 워낙 없으니까 혼자지만. 서울에서는 혼자 일할 때도 있고, 둘이서 일할 때도 있고. 애들 방학 때만 좀 바쁘지. 전시 설명 일정이 늘어나거든.”

보통 두세 명씩 한 조를 이루어 하루 일정을 번갈아 가며 맡는다고 덧붙이자 이종하가 이것저것을 물어 왔다.

전시 설명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똑같이 설명을 하느냐, 그림 설명서 같은 게 있어서 그걸 외우는 거냐, 왜 작가가 직접 설명하지 않느냐 등 제법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그럼 그 추천해 줬다는 선배, 그 사람이랑도 같이 일했어?”

“아니.”

“왜?”

나는 대답 대신 몸을 돌려 이종하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내 가슴이 제 몸에 닿자 이종하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종하는 내가 대충 대답하거나 침묵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내키는 말만 하는 나를 이미 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입을 불쑥 다물면 왜 저럴까 궁금해하면서도 그대로 영영 입을 다물까 봐 전전긍긍하는 이종하를 안다. 그럼에도 목마르지? 덥지 않아? 괜히 딴소리를 하는 그 애를 모르는 척했다.

내 모른 척을 모를 리 없는 이종하는 내게 무언가를 묻기보다 제 얘기를 주절거리기를 택했다. 보통 오늘 있었던 일이나 과거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였다. 이종하가 말을 하면 나는 조용히 들었다.

“내일 뭐 해?”

긴 주절거림 끝에 이종하가 어렵게 물어 왔다. 내일은 휴관일이었다.

“몰라. 잘래. 졸려. 내일 너 가고 싶을 때 가.”

“그럼 내일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돼?”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종하는 밤새 내 머리와 얼굴을, 어깨와 등을 어루만졌다. 흙으로 도자기라도 빚는 것처럼 쓰다듬었다. 나는 선잠이 든 채로 이종하가 빚은 도자기는 어떨까 생각했다. 보고 싶기도,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선배가 그림을 그릴 때마다 느끼던 기분이 꼭 그랬다. 나는 그 기분에서 도망치듯 아득한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정오를 넘겨서야 일어났다. 내가 잠든 동안 시장을 봐 온 이종하는 요리 중이었다. 그 애는 짧은 사이에 뚝딱뚝딱 요리 서너 가지를 만들어 냈다.

세수도 하지 않고 주방을 기웃거리자, 그런 날 보고 비죽 웃은 이종하가 내 입안에 무치고 있던 나물을 쏙 넣어 주었다. 나물 특유의 쌉싸름함과 참기름의 고소함이 잘 어우러졌다.

“이종하, 장가가면 사랑받겠다.”

“접때도 그 얘기 했었거든. 씻고 나와 밥 먹어.”

“그냥 먹을래.”

이종하는 잔소리 대신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밥그릇을 내 앞에 놓아주었다. 자느라 제멋대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어 빗겨 주기도 했다. 함께 밥을 먹고, 후식으로 과일 화채까지 챙겨 먹었다. 이종하와 휴일을 맞이하는 것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날씨 좋다.”

이종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맑았다. 열어 놓은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평소처럼 눅눅하지 않았다. 습관이 된 것처럼 계속해서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던 이종하가 불쑥 물었다.

“영화 보러 갈래?”

“그래.”

이종하는 나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동네 영화관엘 갔다. 영화관은 시장 초입에 있는 버스 터미널 바로 옆이었다. 영화관이라고 해 봤자 다 쓰러져 가는 오래된 건물에, 상영하는 영화는 단 한 편, 그마저도 상영 횟수는 하루에 고작 네 번 정도였다.

이종하는 매표소에서 과자며 맥주를 사 들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꽤 들떠 보였다.

“혹시 이 영화 봤어?”

예고편도 없이 영화가 시작되자 이종하가 내게 소곤거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영화는 최신작이었다. 생각 없이 보기에 신나는 액션 영화였다.

이종하는 내가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했다. 딴에는 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조심 흘끔거리는 듯했지만, 그게 오히려 부산스럽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신경은 쓰였지만 나름 귀여웠기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전부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우리는 영화관 직원이 들어와 청소를 시작한 뒤에야 밖으로 나왔다.

“재밌었어?”

“응.”

“영화 뭐 좋아해?”

“아무거나 잘 봐.”

영화라면 피 튀기는 잔인한 것 말고는 딱히 장르를 가리진 않았고, 무엇보다 영화관에 온 게 오랜만이라 나 역시 들떠 있었다.

“그래? 난 홍콩 영화가 좋더라.”

그렇구나. 내 성의 없는 대꾸에도 이종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애는 나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집에 데려다주었고 당연하다는 듯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끊겼던 영화 이야기가 다시 이어졌다.

“버스 터미널 건너편에 만화책 방이 있었거든. 지금은 없어졌는데, 그 집 아들이랑 친해서 자주 갔었어.”

이종하는 동네 만화책 방에서 꽤 오래 아르바이트를 했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만화책이랑 소설책만 있었는데, 형이랑 내가 막 졸라서 나중엔 비디오도 들였어. 거기에 있는 비디오는 한 개도 안 빼놓고 다 봤다. 저녁에 가서 딱 세 편 보면 해 뜨더라.”

이종하는 가게를 봐주며 그 집 아들이라는 한 살 많은 형과 놀았다고 했다. 고깃집에서 봤던 애들 중 한 명이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종일 가게 보려면 지겹진 않아?”

“비디오 보고, 만화책 보는데 뭐가 지겨워. 재밌지. 어차피 학교도 잘 안 나갔는데 시간 때우기도 좋고.”

불성실했던 학교생활에 대해서는 깊게 말하지 않았다. 대신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영화의 내용과 주인공들을 상세히 설명해 주는 이종하는 그 어느 때보다 신이 나 있었다. 어떤 영화는 여러 번 반복해 봤는지 대사까지 흉내 냈다. 이종하가 전해 주는 영화들은 내가 듣기에도 하나같이 재밌었다. 다만 문제는,

“난 애마부인이 좋아.”

이종하가 주로 이런 영화를 통해 여자와의 섹스를 배웠고,

“넌 주윤발이야, 유덕화야? 난 무조건 유덕화. 멋있잖아.”

나도 모르는 소싯적 홍콩 영화를 좋아해서 나와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니었고, 영화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지만 이종하가 너무나도 옛날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1편에서는 유덕화가 나쁜 놈으로 나오는데, 사실 나쁜 놈은 아냐. 운명적으로 불쌍한 사람이지. 처음부터 경찰이었다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이종하가 제일 좋아한다는 홍콩 영화는 그나마 나도 들어 본 적이 있는 2000년도 초반의 것이었다. 그 영화야말로 홍콩 영화의 부활을 알리는 명작이라고. 내가 안 봤다고 하자 영화관에 가서 상영 기사에게 조르면 틀어 줄 거라고 했다.

“진짜라니까? 그 삼촌이랑 친하단 말이야. 꼭 보자. 너도 좋아할걸? 진짜 재밌거든.”

다음 날, 우리는 정말로 그 영화를 봤다. 그 영화는 세 편짜리 연작이라 일주일에 한 편씩, 세 번에 걸쳐 보기로 약속까지 했다. 내 의지가 아닌 약속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영화는 이종하의 말대로 명작이라고 할 만큼 좋았다.

“진짜 재밌다.”

진심이었다. 영화에 대한 내 칭찬이 자신을 향한 칭찬이라도 되는 듯 이종하는 들떠 보였다.

세 편짜리 연작을 다 본 후로도 이종하는 나를 데리고 종종 영화관에 갔다. 일주일에 한 번이나 두 번. 그 애가 고른 영화는 대부분 재밌었다. 그러나 어떤 영화는 내 취향과는 상관없이 너무도 지겨워서 졸기도 했다.

이종하는 잠든 내 손을 잡았다. 어루만지기도 하고 손바닥을 간질이기도 하며 장난을 쳤다. 알면서도 졸려서 내버려 두었다. 어떨 때는 내 눈앞으로 손을 휘휘 젓고는 내가 눈을 뜨지 않으면 입을 맞추기도 했다.

“많이 졸렸어? 중간에 깨웠는데.”

내가 별말을 않자 그 애는 아무 짓도 안 한 척 어깨만 으쓱했다. 입 밖으로 꺼내거나 티 내지는 않았지만, 그 애가 나이답게 귀엽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났다.

나는 나양에서의 일상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그건 이종하에 대해서도였다.

혼자 있는 시간보다 그 애와 함께 있는 시간이 더 길다는 것을 의식한 것은 미용실 원장의 태도에서였다. 나는 이따금씩 이종하가 고깃집에서 일하고 있을 때 시장 여자들의 화투판에 끼곤 했다.

원장은 화투 치는 내내 평소와 다름없이 굴었지만, 시간이 되어 돌아가려는 내 손에 반찬 서너 가지가 담긴 찬합을 쥐여 주었다. 이종하가 좋아하는 반찬이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남의 집 찬만 거덜 내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가자마자 냉장고에 넣어. 날이 이래서 조금만 밖에 둬도 쉬니까.”

“아아, 네…….”

허구한 날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들이 어디서 지내고 있는지 원장이 모를 리 없었다. 나도 딱히 숨기는 건 아니었지만, 서먹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원장은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당신 자식과 내가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생수 외엔 텅 비어 있던 냉장고를 때마다 채워 놓는 것은 댁의 아드님이고, 요리를 해다 내 코앞까지 바치는 것도 댁의 아드님이에요. 댁의 아드님과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하고 있지만, 우리는 남들이 말하는 연인 관계는 아닙니다. 그렇게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종하와 나는 확실히 이상한 관계였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로 맺지 않았을, 만남이 끝나면 서로가 서로에게 그 어떤 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인스턴트 관계.

나는 이 도시에게 탓을 돌렸다. 나양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거라고.

하루하루가 모여 일주일이 되고, 어김없이 휴일은 돌아왔다. 나는 지난밤도 이종하와 함께 밤을 보냈다.

먼저 일어난 이종하는 부지런하게 샤워까지 마쳤다. 머리의 물기를 털어 낸 그 애는 익숙하게 서랍을 열어 옷을 꺼내 들었다. 언제부턴가 내 옷장과 서랍에 그의 속옷과 옷가지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 애 몫의 칫솔과 스킨로션이 생긴 것도 당연했다.

나는 나태하게 반쯤 몸을 일으키고 앉아 이종하의 너른 등을 바라보았다. 단단한 살갗에 희미하게 남겨진 내 손톱자국에 시선을 두고 있는데, 인기척을 느꼈는지 티셔츠를 막 꿰입은 그 애가 나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는 얼굴이 언제나처럼 싱그러웠다.

“집에 뭐 먹을 거 하나도 없더라.”

미용실 원장이 내 손에 쥐여 준 찬합은 벌써 안을 비운 지 오래였다. 제 집에서 온 반찬을 꼬박꼬박 상에 올리고 텅 빈 찬합을 정리하면서 이종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반찬이 어디서 났느냐 묻지도 않았다.

“장 봐서 올게. 먹고 싶은 거 있어?”

“없어.”

답지 않게 재빠르게 몸을 일으킨 나는 이종하를 따라나섰다.

“왜?”

“나도 나갈래. 안에 있기 답답하다.”

“그렇게 입고?”

지난밤 흥분한 이종하가 아무렇게나 바닥에 벗어 둔 티셔츠였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품이 큰 티셔츠 아래로는 편하게 입으려고 시장에서 산 고무줄 치마를 입었다. 서울에서라면 집 앞 슈퍼에 가기도 힘든 차림으로도 이곳에선 어쩐지 뻔뻔해졌다.

“왜. 창피해?”

아니, 하고 입꼬리를 늘이는 이종하는 들떠 보였다. 내가 말을 바꾸기라도 할 것 같았는지, 그 애는 내 등을 밀며 서둘러 현관을 나섰다.

시장 골목 초입에 다다르자, 이종하는 아이스커피부터 한잔 사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덥다.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여기 앉아 있어.”

나는 이종하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평상에 앉았다. 이종하는 어지럽게 천막이 쳐진 시장 골목 안으로 모습을 숨겼다.

바닥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것 같은 더위. 괜히 따라 나왔나 잠시 후회를 하며 이종하가 준 커피를 마셨다. 믹스 커피 두 포를 타서 얼음을 잔뜩 넣은 아이스커피는 달고 맛있었다. 이런 거 하나에도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얼마쯤 지났을까. 얼음덩어리 사이로 조금 남은 커피를 쪽쪽 빨아 먹은 나는 미련이 남은 손으로 플라스틱 컵을 평상에 내려 두었다. 바닥에 탁탁 슬리퍼 끝을 두드리며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야, 이종하!”

그 애의 이름을 부르는 앙칼진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숭아 꽃 같던 여자애가 씩씩거리며 이종하의 뒤를 따라붙고 있었다.

“너 지금 어디 가는데!”

“가라고, 좀!”

“그 여자 집에 가?”

“따라오지 말랬다.”

“오빠보다 늙었대매? 나보다 스무 살이나 많다매! 넌 늙은 여자가 좋냐?”

그 정도까진 아닐 텐데. 하긴, 저 여자애한테는 열 살 차이나 스무 살 차이나 똑같을까.

“너 말조심해.”

이종하가 홱 뒤를 돌아 겁을 주는 듯 여자애에게 바짝 다가섰다. 이종하의 덩치에 놀랄 만도 한데, 여자애는 겁먹지도 않았는지 이종하를 쏘아봤다.

“똥폼 잡으면 내가 겁이라도 먹을까 봐? 때리지도 못할 거면서.”

“좋게 말할 때 그냥…….”

“……저거 뭐야.”

여자애의 시선이 이종하가 아닌 내게로 와 있었다.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이종하를 지나쳐 달려온 여자애가 다짜고짜 내 상의를 잡아당겼다.

“아줌마. 이 옷 벗어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하던 이종하가 두 손에 잔뜩 든 비닐봉지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 놓고 뛰어와 여자애의 손을 잡아챘다.

“야! 박미진!”

여자애는, 박미진은 그때까지도 내 상의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고, 그 바람에 한쪽 어깨가 다 드러날 정도로 티셔츠가 늘어나 버렸다. 이종하가 힘을 주어 박미진의 손을 뜯어내며 소리 질렀다.

“너 뭐 하는 거냐. 미쳤어?”

“너야말로 미쳤어? 너는 내가 사 준 옷을 남한테 주냐? 내가 니 생일 선물로 준 거 기억도 못 해? 병신 아니니?”

박미진은 속사포처럼 쏘아 댔다. 제대로 된 백화점도 없는 이 시골에서 고르고 또 골라 선물했을 티셔츠일 것이다. 그렇게 준 선물을 떡하니 다른 여자가 입고 있으니 화낼 만도 했다.

귀찮았지만, 둘의 다툼을 방관하듯 보고만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미진에게로 다가가자 이종하가 나를 막아섰다.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네가 뭘 알아서 해? 너도 참 너다.”

나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서 박미진에게 건넸다.

“받아요.”

졸지에 속옷만 입고 시장 한복판에 선 나를 박미진과 이종하가 황망하게 쳐다봤다. 다시 한번 셔츠를 내밀었지만 그녀는 미동조차 없었다. 입을 벌린 채 조각상처럼 굳어 있었다.

“내가 모르고 입은 거예요. 실수했네요.”

“…….”

티셔츠를 박미진의 어깨에 올려놓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시장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눈빛이 따가웠다. 모른 척 뻔뻔하게 걸어가는 내 등 뒤로 박미진의 목소리가 울렸다.

“미쳤네. 완전히 미친 여자네.”

“입 안 다물어? 나중에 보자, 너.”

서둘러 뒤쫓아 온 이종하가 나를 막아섰다. 커다란 덩치로 사람들의 눈을 가려 주듯 서서는, 제가 입은 티셔츠를 벗어 내 머리에 끼워 주었다. 옷을 벗기는 것보다 입혀 주는 것에 서툰 손짓이다. 다급한 마음에 옷이 제대로 입혀지지 않자, 뭐 구경났어요? 하며 사람들에게 빽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얼른 입어. 빨리.”

“너는.”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티셔츠를 입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사이, 이종하가 바닥에 던져두었던 짐을 챙겨 들었다. 그러고는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시장을 빠져나갔다.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못 산다.”

“미리 말해 줬음 안 입었잖아. 내가 저 애였어도 화냈지. 좋아하는 남자한테 사 준 옷을 다른 여자가 입고 나왔는데, 머리채 안 잡힌 게 다행이다.”

“왜 쟤 편을 들어? 쟤 말하는 거 못 들었어?”

“틀린 말 하나 없던데 뭐.”

미쳤네. 완전히 미친 여자네. 질린 얼굴로 나를 보던 말간 두 눈이 잊히지 않았다. 열여덟 살이나 됐을까. 말만 걸게 하지 순해 빠진 얼굴이었다. 괜히 헛웃음이 났다.

“나 쟤랑 아무 사이 아니야.”

묻지도 않았는데 이종하가 해명을 해 왔다. 설사 그들이 무슨 사이라고 해도 내가 뭐라고 할 위치도 아닌데.

“오해할 짓 한 적 없어.”

“저 여자애도 그렇게 생각해?”

“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뭐가 중요해. 내가 아니라는데.”

나는 대답을 하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그저 걸음을 멈추고 빤히 이종하를 바라보았다. 내 반응이 시원치 않았는지 이종하가 팔짝 뛰었다.

“너 쟤가 몇 살인 줄 알아? 고1이야. 고1. 아무리 나 좋다고 매달려도 사람이 할 짓이 있고 안 할 짓이 있지!”

“그래? 너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

예쁘장한 여자가 저 좋다고 달려드는데 굳이 말릴 남자가 있을까. 이종하는 어땠을까. 궁금한 마음이 반,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아까부터 여자애와의 관계를 부정하며 변명해 대는 꼴이 꽤 웃기기도 했다.

“…….”

그런데 놀려 주려고 묻는 말에 대답이 없다. 우물쭈물 뜸을 들이는 이종하를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그 잠시가 어쩐지 길게 느껴졌다. 바닥에 발을 탁탁 치며 말을 고르던 이종하가 습관적으로 뒷덜미를 긁었다. 곤란할 때 나오는 그의 습관이었다.

“저 계집애가 술 취해서 몇 번 업어 준 적은 있어.”

슬슬 신경을 거스르려는 찰나 이종하가 중얼거리듯 작게 말했다.

업어 준 거. 겨우 그거 가지고 그렇게 뜸을 들였나 싶기도 하고, 미성년자가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에 취한 상황이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둘이 술을 마셨다고? 고1짜리랑?”

“형들이랑 다 같이 마셨지! 내가 먹인 거 아냐! 지가 쫓아와서는 한두 잔 마시고 뻗었어. 쪼끄만 게 아주 까져 가지고.”

“귀엽기는 했나 보다. 취했다고 업어 주고.”

“아니거든? 쟤가 어디가 귀엽냐? 징그럽지. 말도 얼마나 안 듣는 줄 아냐? 그리고 옷 입은 거 봤지? 다 벗고 다녀.”

“좀 그러고 다니면 어때. 예쁘기만 하더라.”

박미진은 민망하다 싶을 정도로 짧은 청치마에 딱 달라붙는 민소매 티를 입고 있었다. 그럼에도 천박한 구석 없이 눈길을 끌만큼 예뻤다. 상처 하나 없는 하얀 피부에 길고 가는 팔다리가 꼭 인형 같았다. 당당하게 걸어와 내 티셔츠 잡아채던 여자애를 보고 청춘이구나 싶었다.

지금 내 옆에 선 이종하도 꼭 그 여자애 같았다. 내 벗은 몸을 가리겠다고 제 몸을 벌거벗었다. 아무리 작은 동네여도 사람들이 한창 오가는 시간의 시장 한복판인데, 상체를 탈의한 상태로 아무렇지 않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계집애가 겁도 없이 어떻게 그런 꼴로 시장엘 나다녀. 더 더워지면 아주 다 벗겠더라!”

“이종하. 너는 지금 남 말할 처지가 아니야.”

지 꼴은 생각도 안 하고.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 탓인지, 흥분한 탓인지 붉게 익은 어깨는 이런 순간에조차 곧게 뻗어 아름다워 보였다. 물론, 이런 말을 면전에 해 줄 생각은 없었다.

“야! 나는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어쨌든 너도 다 벗고 다니잖아.”

“아, 몰라. 이 정도 몸이 어디 흔해? 벗고 다녀도 돼, 나는.”

“그 여자애도 예쁘니까 그래도 돼.”

“김수연. 너는 눈이 어디 있냐? 나 정도는 생겨야 예쁘고 귀엽고 잘생긴 거지.”

“누가 아니래?”

“뭐?”

아무렴 나도 눈이 있는데, 이종하가 잘생긴 것쯤은 알았다. 이종하의 얼굴은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남자다운 생김에 고운 구석들이 있었다.

긴 눈매, 섬세한 입술선, 맑으면서도 우울한 그림자가 있는 얼굴. 단순한 성격과 달리 예민하고 서늘한 분위기 같은 게 있었다.

그림으로는 옮기기 어려운 얼굴. 그럼에도 제대로 그려 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이종하는 모르겠지만, 그 애가 먼저 잠든 어떤 새벽에는 그 얼굴을 손으로 만져 본 적도 있었다.

“김수연. 나 예뻐?”

“뭐 샀어?”

대놓고 말을 돌렸다. 이종하의 손에 들린 봉지에 흘끔 시선을 주자, 그 애는 순순히 봉지를 벌려 자신이 장 본 것을 보여 주었다. 오늘 점심으로 무슨 요리를 해 주려는지 설명을 덧붙여 가며. 이대로 조금 전의 화두는 일단락되는가 싶었더니만.

“솔직히 네가 보기에도 잘생겼지? 아무리 TV를 봐도 말야. 요즘 나오는 남자애들만큼은 생긴 것 같아, 내가. 그치?”

“내 취향은 아니야.”

거짓말을 했다. 무슨 바람엔지 들떠 있는 녀석에게 사실을 말했다간 지금보다 더 설레발을 치고 달려들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어린 것만 빼면 무섭도록 내 취향의 외모였다. 솔직히 이대로 연예인으로 데뷔한다 해도 외모만으로 관심을 끌 정도였다.

“잘생긴 거에 취향이 어디 있어. 무조건 좋지.”

“그렇게 치면 예쁜 거에 취향이 어디 있어? 그 여자애도 예쁘던데, 무조건 좋겠다.”

“아니라니깐! 그런 거 아니라고!”

“이종하 좋겠다. 어리고 귀엽고 예쁜 여자애가 좋다고 막 선물도 주고.”

“그렇게 치면 김수연, 너도 좋겠네! 어리고 귀엽고 예쁜 이종하가 장도 대신 봐 주고, 짐도 들어 주고, 밥도 해 주고! 그거뿐이냐? 내가 밤마다 네 위에서…….”

반사적으로 이종하를 빤히 봤다. 시장에서 멀어진 지 한참이지만 인적이 전혀 없는 곳은 아니다. 내 소리 없는 질책을 능글거리는 웃음으로 무마한 이종하는 불쑥 다가와 내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맞췄다.

“저녁에 뭐 해 먹을까? 다 말해 봐. 잘생긴 내가 다 해 준다.”

으스대는 꼴이 웃겨서 나는 픽 웃고 말았다. 지가 말해 놓고도 쑥스럽기는 한지 이종하도 따라 웃었다.

우리는 아직도 뜨거운 햇볕 아래, 논둑길을 따라 걸었다. 해가 지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지나야 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지겹게도 무더웠다.

지친 걸음이 점점 느려져 나는 이종하의 그림자를 밟고 걸었다. 길게 뻗은 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내가 손으로 쿡 찌르자 이종하가 뒤돌아봤다.

“뭐.”

“너 타겠다.”

“이 김에 태우지, 뭐.”

“짐 하나 줘.”

이종하는 내 말을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어쭈, 이종하. 대답 안 하지.”

“너나 잘해라. 지 하고 싶은 말만 하면서.”

틀린 말이 아니어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종하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나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찬물로 열을 식히고 나왔을 때 이종하는 더운 주방에서 땀에 전 채로 국수를 삶고 있었다. 장 봐 온 봉지는 이미 다 정리돼 있었다. 뭐라도 할까 싶어 서성대는 나를 이종하가 끌어 앉혔다.

나는 편안히 앉아 그 애가 만들어 준 콩국수를 먹었다. 그릇을 비우고 정리를 마쳤을 땐 이른 저녁이 되어 있었다. 같이 저녁을 먹고 TV를 보다 나란히 눕는 생활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날 밤 꿈에 시장에서 마주친 그 여자애, 박미진이 나왔다.

“미쳤네. 완전히 미친 여자네.”

내가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그제야 깨달았다. 어쩌다 연고 없는 나양에 흘러온 나는 전에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사귀지도 않는 남자와 매일같이 몸을 섞고 같이 살다시피 했다. 이 작은 동네에 소문이 나지 않았을 리 없다.

나야 평생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여자였지만, 이종하는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띌 만한 남자였다. 더욱이 이종하는 동네의 몇 안 되는 청년이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었지만 남들을 도우며 동네에서 살아온.

나는 이미 이 동네 사람들에게 서울에서 온 정신 나간 여자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왜 내가 이렇게 됐을까. 왜 나는 이종하와 이런 사이가 되었을까. 이종하가 내게 매달린다는 이유로? 그 애가 왜 이렇게까지 내게 매달리는지 그 이유도 모르면서.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아니, 사실은 그 애의 마음을 알면서.

이종하가 나를 좋아하는 걸 안다. 그런데 내가 책임질 마음이 아니니 알고 싶지 않았다. 못된 걸 알면서도 외로움이 싫어 그 애의 마음을 모른 척하며 그 애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잠든 이종하가 뒤척이며 내게 제 팔을 감아 왔다. 따뜻하고 편안했다. 이 온기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종하를 만난 이후 나는 전에 없던 방식으로 살고 있었다. 문득 그것이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 애를 만나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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