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11)

3.

이름

폐관 직후 미술관의 풍경은 고요하다.

나는 종일 관람객과 마주했을 그림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전시관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 바깥쪽까지 천천히.

그림을 제대로 보는 시간은 하루 중 지금뿐이다. 관람객에게 그림을 설명할 때에는 그림을 등지거나 관객의 시선을 터주기 위해 관객 뒤에 머문다.

지금은 그림을 등질 필요도, 누군가의 등 뒤에 설 필요도 없다. 그림과 나뿐이다.

혼자만의 감상이 끝나면 가이드라인 내 침입이나 파손의 흔적을 살피며 그림을 돌본다. 조명의 밝기를 점검하고, 조명이 떨어지는 자리가 변하지는 않았는지 확인한다. 매일 하는 일. 업무의 연장일 뿐이다. 그럼에도 지겹지가 않았다.

전시장 안쪽부터 차근차근 불을 끄며 입구로 향했다. 오늘도 입구에 서 있는 긴 인영이 보였다.

마지막 불까지 끄자 사방이 어둡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길 기다려 입구의 인영에게로 걸어갔다. 누군지 보지 않아도 안다. 나는 그 애와 함께 컴컴한 미술관에서 빠져나왔다.

“오늘은 해 지니까 좀 시원하다.”

“그러네.”

이제는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지 않는다. 이 길을 나란히 걸은 것도 벌써 손에 꼽지 못할 만큼 여러 번이다. 우리는 별말 없이 걸었다. 반딧불이 날리는 밤하늘을 보며 풀 냄새를 맡았다.

“여긴 밤이 진짜 까매.”

“밤이 까맣지 그럼.”

퉁명스레 답을 던져 놓은 그 애가 흘낏 내 눈치를 살피더니, 서울은 달라? 하고 물었다. 은근한 호기심이 묻어나는 그 애의 목소리가 귀엽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달라.”

“뭐가 어떻게 다른데.”

“그냥 달라. 그런 걸 말로 어떻게 설명하냐.”

“설명하는 게 네 일이라며. 그림 앞에 두고 어려운 설명은 잘만 하더니만.”

나는 여태껏 밤은 새까맣지 않다고 믿었었다. 그림을 그릴 때는 자연 풍경에 검정도, 하양도 쓰지 말라고 배운다. 나양에 오고 나서 새까만 밤도, 새하얀 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퇴근 후, 불빛이 귀한 새까만 시골길을 걷다 보면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함과 동시에 미약한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광활한 들, 깊은 숲이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쓸모없는 상상력이 만들어 낸 공포가 나를 긴장시켰다.

그러나 그 애가 데리러 온 뒤로는 무서울 일이 없었다. 커다란 그 애의 그림자가 나를 안심시켰다. 혼자였을 땐 길게만 느껴지던 퇴근길이 어느새 기분 좋은 산책로가 되어 있었다.

그 애의 배려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저도 좋으니까 오는 거겠지 뭐.

“나중에 서울 와서 직접 보든가. 어떻게 다른지.”

“…….”

그 애는 대답이 없었다. 나 역시 별생각 없이 던져 본 말이었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늘 이랬다. 알아도 몰라도 상관없을 가벼운 질문을 하고 되는대로 대답했다. 그마저도 대답하기 싫어지면 제멋대로 입을 다물기도 했다. 그야말로 영양가 없는 대화였다. 그래서 편했다.

퇴근을 하고도 해가 아직 저물지 않은 날에는 시장엘 들렀다.

“시장 좀 가자.”

내가 먼저 시장 쪽으로 몸을 틀자, 느릿하게 뒤따라오는 그 애의 기척이 느껴졌다.

“뭐 해. 장 보려던 거 아니야?”

시장 입구에서 어정쩡하게 걸음을 멈추고 있는 나를 그 애가 이상하게 보았다.

“맞아.”

“근데 왜 그러고 섰어?”

“반찬 뭐 할까 고민하느라.”

평소라면 당장 먹고 치울 정도로만 음식을 사들였겠지만, 요 며칠간의 생활은 혼자 지내던 때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 애는 거의 매일 우리 집에 왔다. 가끔은 집 앞에서 돌아갈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함께 밤을 지새우고 동이 틀 무렵 아쉬운 듯 집을 나섰다.

“살 게 좀 많을 것 같은데, 너 바빠?”

“뭘 물어. 짐꾼으로 데려와 놓고선.”

그 애는 익숙하게 장보기를 도왔다. 채소 고르는 것에 참견을 한 뒤로는 성실히 내 뒤를 따라 짐꾼 노릇을 했다. 뭘 이렇게 많이 사냐는 투정도 없었다.

반찬 서너 가지를 하려고 했을 뿐인데 살 것이 제법 많았다. 조미료부터 고기, 채소 등 늘어난 재료는 성실한 짐꾼의 손에 전부 들려 빌라 앞까지 안전하게 옮겨졌다.

“저녁 먹고 갈 거지?”

“나보고 저녁 차리란 말로 들리는데.”

“제대로 잘 들었네.”

“솔직히 말해 봐. 너, 나 짐꾼에 식모로 부리려고 집에 들이지?”

“짐꾼에 식모살이까지 해 준다는데 마다할 바보가 어디 있어.”

무심한 내 대답에 잘 빠진 그 애의 눈썹이 위로 비죽 올라갔다.

“와, 너 진짜 뻔뻔하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아니면 둘 다인 건지, 그 애는 무심하게 던지는 내 말이나 행동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말하자면, 놀리는 맛이 있었다. 그게 재미있어 더욱 뻔뻔함으로 일관하는 나도 참 나였다.

아, 김수연 진짜. 투덜거리면서도 그 애는 나를 앞서 계단을 밟았다. 성큼성큼 올라서는 그 애의 걸음걸이가 내 뒤를 따르던 평소보다 덜 초조해 보였다.

요리는 내가 했다. 놀린 것이 미안해서는 아니었다. 장을 볼 때부터 염두에 둔 음식이 있었다.

재료 손질을 돕던 그 애는 처음 보는 레시피를 궁금해하며 내가 요리하는 순서를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흔한 레시피가 아니기 때문에 궁금해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선배가 만들어 준 요리를 먹고, 평생 처음 보는 맛에 나 역시 호기심을 느꼈었으니까.

“맛봐도 돼?”

“자.”

국물을 뜬 수저를 옆으로 내밀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 애는 커다란 몸을 숙여 받아먹었다.

열 많은 남자의 체온이 훅 끼쳤다. 탈탈거리는 선풍기에서 만들어진 미지근한 바람이 고작인 초여름의 밤이었지만, 맞닿은 어깨를 밀어내진 않았다. 맨살이 닿는 것에 전혀 불쾌함이 없었다.

“어때?”

“먹을 만해.”

그 정도의 평가면 되었다.

우리는 좁은 식탁에 마주 앉아 저녁을 먹었다. 먹는 동안 대화는 없었다. 거실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TV라도 틀까 했지만, 침묵이 불편하지 않아 그냥 두었다. 먹을 만하다는 평가대로 그 애는 내가 한 요리를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

조용한 식사가 끝난 후, 나는 시원하게 식혀 둔 맥주를 꺼내 들었다. 눅눅한 거실 벽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쭉 펼쳐 앉아 맥주를 홀짝였다. 설거지하는 그 애의 등을 보며 불쑥 내뱉었다.

“고무장갑 끼고 하지?”

“불편해서 원래 잘 안 해.”

그러고 보면 여관에서 밥을 차려 주고 설거지를 도맡아 할 때도 맨손이었다. 평균보다 큰 그 애의 손에는 고무장갑이 갑갑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예쁜 손인데 잘 관리하면 좋잖아.”

“남자가 손 예뻐서 뭐 하려고.”

“이왕이면 부드러운 손으로 만져 주는 게 더 좋고.”

그 애의 등이 움칠 튀었다. 그릇을 씻어 내는 움직임이 눈에 띄게 부자연스러워져 있었다. 역시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나는 키득키득 맥없이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설거지를 마치고도 그 애는 여전히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습관처럼 내 크로키북을 펼쳐 들었다.

휙휙 넘기는 손길은 여상했으나, 그림을 보는 눈길은 그렇지가 않았다. 남의 그림을 눈여겨볼 때의 눈빛은 그림을 그려 본 사람들만이 안다. 그는 지금 그림을 그리고 싶다.

“빈 데에 그려도 되는데.”

“…….”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그림을 그렸었냐는 내 질문에 그 애는 입을 꾹 다물었었다.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과거를 들추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다. 하고 싶은 것을 참고 살 이유가 없다는 말쯤은 해 주고 싶었다.

연필을 찾아 건네자 조금 머뭇대던 그 애가 연필을 쥐었다. 커다란 손안에서 연필을 굴리며 그 애가 나를 바라봤다. 뭘 그릴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내 얼굴을 빤히 보던 그 애가 크로키북에 빠르게 선을 긋기 시작했다. 나를 그리는 것이었다.

“다 입고 있으니까 그릴 맛이 안 난다.”

내 야한 농담에 움칠할 때는 언제고, 녀석이 제법 뻔뻔한 소리를 한다. 그릴 맛이 안 난다면 생기게 해 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나는 남은 맥주 캔을 마저 비우고, 입고 있던 원피스를 벗었다. 속옷도 벗었다. 그 애의 앞에선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스스로 신기할 지경이었다.

“너도 벗어. 나도 너 볼 맛 안 나니까.”

“너는 점점 더 뻔뻔해진다.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너 그림 그리는 내내 나 볼 거잖아. 그동안 나도 너 볼 거고. 서로 공평하게 하자.”

“공평은 무슨.”

“다시 입어?”

그다지 논리적이지도 않은 말에 설득당한 그 애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나 진짜 그림만 그릴 거야.”

“그래.”

결국 내 마음대로 될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뚫어지도록 빤히 나와 눈을 맞추던 그 애가 팔을 머리 위로 교차해 티셔츠를 벗었다. 훅, 땀 냄새가 끼쳤으나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애 특유의 시원한 체향이 좋았다.

내 앞에서 나와 같은 나체가 된 채로, 그 애는 연필을 다시 길게 쥐고는 선을 그어 내렸다. 거침없는 선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갔다. 자신감이 배어 있는 움직임은 확실히 그림을 그려 본 사람의 손놀림이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그 애에서, 그 애가 있는 집 안의 풍경으로 시선을 옮겼다.

퍽 낯설었다. 최근 몇 년간 내가 지내는 곳에 누군가를 들인 일이 없었다. 들어오고자 하는 이도 없었지만, 있더라도 들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내 공간에 있는 것은 왜 이렇게도 당연한 일처럼 느껴지는지. 그것도 헐벗은 타인을 말이다.

너는 뭘까.

다시 그 애를 봤을 때, 사각거리던 연필 소리가 멈춰 있음을 알았다.

섬세한 두 눈이 기다렸다는 듯 나와 마주쳤다. 그러다 금세 떨어져 나갔다. 피한 것이 아니다. 그 애의 눈은 나를, 내 몸을 배회하고 있었다. 천천히, 아주 깊이, 몹시 집요하게.

그 애가 크로키북을 덮었다.

“다 그렸어?”

“아니.”

“왜? 시간 충분했잖아. 크로키 한 거 아냐?”

스케치 몇 장을 그려 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애가 옆으로 밀어 놓은 크로키북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려는데, 크로키북 위로 커다란 손이 내려앉았다.

“다 그리고 나서 봐. 내일 와서 마저 그려 줄게.”

너 그러려고 천천히 그렸지? 딴 속셈이 있었던 거지? 그림만 그릴 거라고 폼 잡을 땐 언제고. 유치하게도 그 애를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한참을 두고 봐야, 몇 번을 그려 봐야 그림으로 완성되는 피사체가 있음을 나도 알고 있었다. 완벽하게 표현하고 싶은 피사체일수록 그랬다. 내가 그 애에게 왜 그런 피사체가 되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완성된 그림만큼은 보고 싶었다. 욕심이었다.

“그래. 내일 와.”

내 말끝에 그 애가 싱그럽게 웃었다. 그 애의 긴 손가락이 내 목을 감쌌다. 손끝이 메마른 내 몸을 따라 그림을 그리듯 움직였다.

“정말 그리고 싶었는데.”

“알아.”

“근데 널 보다 보면, 자꾸만 만지고 싶어져.”

더운 숨이 곧장 입안 깊이 몰려들었다.

그림은 며칠 만에 완성됐다. 크로키 다섯 장과 소묘 두 장.

한눈에 봐도 표현력이 좋았다. 여자의 몸을 실제로 보고 그려 본 적이 없을 텐데도 어색한 곳 하나 없이 완벽했다.

가슴의 굴곡이며, 유두, 툭 튀어나온 골반뼈, 다리 사이에 깊숙한 곳까지도.

그 애는 나조차 모르는 나를 도화지 위에 옮겨다 놓았다. 그게 신기해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림 속의 나와 실제의 나는 참 많이 달랐다.

그림이 완성되어 가는 동안 나 역시 그 애의 몸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림을 그릴 때 조금 굽어진 등, 연필을 쥔 손, 내 몸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던 어깨, 허벅지를 핥던 섬세한 입술. 그것들을 모두 도화지에 옮기고 싶었다.

그 애가 떠난 거실에 홀로 앉아 그 애를 그렸다.

그림은 쉽게도, 어렵게도 그려졌다. 어떤 모습은 곧바로 새하얀 바탕 위에 옮겨졌고, 어떤 모습은 아무리 그리려고 해도 손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놀라운 것은 내가 마음이 나서 그림을 그리는 건 몇 년 만이라는 사실이었다.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그 애를 그리고 싶은 것이었다. 처음 만났던 밤, 그 애의 뒷모습을 별생각 없이 그려 놓고도 몰랐었다.

내가 그림을 완성한 날 저녁, 그 애가 다시 내 집을 찾았다. 여느 때처럼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녀석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내가 실제의 그 애보다 그 애를 더 남자답게 그렸다는 사실을.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나는 문득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아래를 치받을 때마다 쾌감에 찌푸려지는 그 애의 미간을 손끝으로 살살 문지르며 눈을 맞추자, 녀석이 움직임을 멈추며 묻는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층 더 낮아져 있었다.

“아니.”

“후우. 근데 왜?”

이유를 캐묻는 녀석의 코를 살짝 쥐고 흔들었다.

“그냥 좀 봤어. 빨리 움직여.”

내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깨문 그 애의 입술이 씨익 장난스럽게 말려 올라갔다. 두렵기는커녕 기대되었다.

녀석은 내 한쪽 다리를 제 어깨에 올려 결합을 더욱 깊숙이 했다. 그러고는 보다 더 집요한 움직임으로 나를 가졌다. 그를 담고 있는 건 나였는데, 꼭 그에게 삼켜지는 기분이었다.

관계를 마치고 잠든 그 애를 옆에 두고, 나는 크로키북을 다시 펼쳤다. 그 애가 그린 그림 속의 나는 신기하고도 어색했다.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곡선으로 만들어진 여자가 아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 만약 누군가가 나를 그린다고 해도, 이보다 더 아름답게 그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새벽, 나는 또 그 애를 그렸다. 그리고 싶은 모습들이 자꾸만 늘어났다.

폐관 시간 전에 그 애가 미술관을 찾은 것은 첫날 이후 처음이었다. 한산한 미술관의 통유리창 너머로 녀석을 보고 나는 밖으로 나갔다. 그 애는 긴 몸을 오토바이에 기댄 채 헬멧에 눌린 뒷머리를 만지고 있었다.

“웬일이야?”

“그냥.”

오토바이 손잡이에 검정색 비닐봉지가 덜렁 걸려 있었다. 기름이 번드르르 묻어난 봉지에서 고소한 튀김 냄새가 올라온다.

“점심 아직 안 먹었지?”

“응.”

“같이 먹자. 닭 튀긴 거야.”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듯 봉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녀석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그래도 여기까지 날 먹이겠다고 시간 맞춰 닭을 튀겨 온 성의를 생각한다면 웃으면 안 될 것 같다.

입을 꾹 닫고 빤히 보고만 있자 그 애가 물었다.

“혹시 시간 안 돼?”

어차피 점심시간이었다. 미술관 안에는 사람도 없었다.

“한 시간 안에 다시 데려다줄게.”

“그래.”

우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미술관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헬멧을 써야 하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이 좋았다. 따사로운 햇볕, 선선한 바람이 얼굴에 감겨드는 감각, 그 속에 묻어나는 그 애의 체향. 나는 너른 등에 옆얼굴을 기댄 채 갑작스레 찾아온 여유를 만끽했다.

도착한 곳은 청보리밭이었다. 초록빛 풀잎이 저 멀리 끝까지 수평선을 이루고 있었다. 어차피 어딜 가도 죄다 논밭뿐인 풍경이었지만, 기분 탓인지 눈이 더 시원한 느낌이다.

그 애는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펼쳤다. 그러고는 부지런히 봉지를 열어 양념이며 소금을 먹기 좋게 정돈했다. 닭다리를 뜯어 먼저 내 손에 쥐여 준 그 애가 나머지 다리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언제 보아도 참 복스럽게 먹는다 싶어, 내가 사 준 것도 아니면서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왜 안 먹어?”

“귀찮아서.”

뼈를 바르는 수고를 하며 먹을 만큼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그 애는 눈을 굳혔다. 먹던 것을 내려놓고 살이 많은 부위를 뜯어 손수 뼈를 발라 주었다.

그 다정함이 싫지 않았다. 나는 아이처럼 입을 벌려 그가 넣어 주는 고기를 오물오물 씹었다.

“맛있네.”

“별로 먹지도 않아 놓고.”

“네가 먹여 주니까 맛있다고.”

“……너 참 손 많이 가는 타입인 거 아냐?”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입을 벌렸다. 입안으로 쏙 들어온 고소한 살을 씹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도시에서보다 유독 낮게 내려와 있었다. 뻗으면 닿을 수 있을까 싶어 나는 하릴없이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팔자 좋은 한량이 따로 없다.

봉지가 비워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애의 손에서 잘 발라진 살은 그의 입보다 내 입에 많이 들어온 듯싶다. 나는 평소보다 배가 불렀으니 그 애는 배가 차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별로 미안하진 않았다.

번잡한 주변을 말끔하게 정리한 그 애가 주머니에서 개별 포장된 물티슈를 꺼냈다. 기름으로 번들대는 손을 닦는 녀석의 바지 옆으로 사각형의 조그마한 비닐이 떨어져 있었다. 물티슈를 꺼낼 때 함께 튀어나온 것이었다.

손끝으로 살짝 집어 들자, 그가 황급히 내 손에서 콘돔을 뺏어 갔다.

“너 진짜 웃긴다. 왜 가지고 왔는데?”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 애는 벌게진 얼굴로 자꾸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혹시 몰라서…….”

“뭘 몰라.”

“언제 할지 모르니까.”

놀리려고 캐묻는 말에 또 솔직하게 대답해 온다. 한 번 터진 웃음은 그치질 않았다.

“그만 웃어.”

“나도 그러고 싶은데 안 멈춰.”

“내가 뭐 나 혼자 좋자고 그래? 준비성 좋은 게 나쁘냐?”

“그래그래. 알았어.”

준비성 하나는 끝내주게 철저하시네요. 나는 건성건성 대답했지만, 좋은 습관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누구한테 배운지는 몰라도 참 잘 배웠네. 앞으로 여자들한테 사랑받겠다, 하는 말에 그 애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그의 시선에 어깨만 으쓱여 보였다.

날은 선선하고, 배는 부르다. 한바탕 웃기까지 하고 나니 잠이 쏟아졌다.

서울에 있을 땐 낮잠 자는 일이 드물었는데, 긴장된 마음이 풀려서일까. 나양에 와서는 틈만 나면 졸렸다. 상체를 느슨하게 뒤로 물린 채 눈을 깜빡였다. 눈꺼풀이 감겨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좀 자든가. 꾸벅꾸벅하다 다치지 말고.”

그 애가 선뜻 내어 준 허벅지 위로 머리를 대고 누웠다. 머리를 살살 어루만지는 손길이 졸음을 더욱 불러왔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감겨드는 모습이 보지 않아도 눈앞에 그려졌다. 나는 안온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야. 야, 김수연.”

조심스럽게 그 애가 어깨를 흔들었다. 나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어리광부리듯 왜애, 하고 말꼬리를 길게 빼며 물었다.

“우리 나온 지 한 시간 정도 됐어. 시간 괜찮아?”

“……들어가 봐야지.”

말만 그렇게 하고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다리 안쪽으로 얼굴을 묻었다. 단단한 근육 베개가 편할 리 없을 텐데 이상하게 안락했다.

조금 뒤 그 애가 다시 한번 어깨를 쥐어 왔다.

“이제 진짜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너.”

“나 잘릴까 봐 걱정돼?”

“응. 내 탓할까 봐. 먹여 주고 재워 준 죄밖에 없는데 억울하잖아.”

싱거운 농담에 나는 후후 맥없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 전부 가시질 않은 졸음을 물리려고 자세를 쭉 펴고 앉아 머리 위로 팔을 길게 뻗어 보았다. 드넓은 청보리밭이 서서히 시야 가득 차올랐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휘날렸다. 익숙한 손이 다가와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 손길엔 조금 전 열심히 살코기를 발라다 입에 넣어 주던 다정함이 녹아 있기도 했고, 깊은 밤 내 벗은 몸을 어루만지던 욕망이 짙게 묻어나기도 했다.

나는 내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커다란 손을 잡아 그 위로 짧게 입 맞췄다.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며 그 애의 다리 위에 올라가 마주 앉았다.

갑자기 무슨 흥미가 돋았는지 나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물끄러미 보는 남자에게 그저 입 맞추고, 살을 맞대고 싶었다.

“야…….”

충동적인 내 행동에 그 애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밀어내지 않았다.

간질이듯 혀로 입술을 덧그리자 얼른 입을 열어 주고, 안으로 들어선 혀를 반갑게 마주 빨았다. 내 허리를 끌어안는 그 애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잠깐만.”

나는 손바닥으로 그 애의 가슴을 짚어 사이를 벌렸다. 내가 빨아서 붉어진 녀석의 입술에 시선을 둔 채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처음 그 애의 앞에서 옷을 벗었을 때보다 어쩐지 지금이 더 떨렸다. 답지 않게 손끝을 조금 떨자, 그 애가 내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잡았다.

“너 들어가 봐야 한다고 했…….”

“가슴 만져 줘.”

그 애의 말을 자르며 나는 당당하게 요구했다.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녀석은 애꿎은 마른침만 삼켰다. 남성적으로 크게 도드라진 목울대가 울컥 떨렸다.

“다시 빌어 봐.”

“뭐?”

나보고 빌라고, 너한테?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러나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빤히 들여다보는 그 애의 눈을 보니 제대로 들은 것이 맞았나 보다.

수없이 몸을 섞었지만, 우리의 섹스는 대부분 그 애의 행동에서 시작되곤 했다.

그는 매번 내게 애원하듯 굴었다. 말로든 행동으로든 늘 그랬다. 넣게 해 줘. 가슴 보여 줘. 참지 말고 소리 내 줘. 네 목소리 듣고 싶어. 손잡아 줘. 한 번만 더 할래. 나도 만져 줘.

나에게 더욱 깊숙이 닿고 싶어 애달파하는 모습을 관망하며 나는 여유롭게 그 애를 컨트롤했다. 관계의 우위에 선다는 것은 때론 편하고, 때론 재밌다.

어쩌면 녀석도 그 기분을 맛보고 싶어졌는지 모르겠다.

뭐, 한 번쯤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가슴, 만져 줘.”

“다시. 조금 더 진심을 담아서.”

“이종하. 까불지 말고.”

“…….”

그 애의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굳어 버린 녀석과 눈을 맞추며 나는 블라우스 단추를 마저 풀어냈다.

이로써 관계의 결정권은 내게로 다시 돌아왔다. 손쉬운 승리였다. 더 이상 그 애는 나를 막지 못했다. 느티나무 그늘 안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나의 가슴은 그의 커다란 손에 맡겨져 있었다. 손의 힘을 조절하지 못하고 세게 쥘 때면 나는 그 애의 혀를 빨며 끙끙 신음을 흘렸다.

그러면 그 애는 얼른 힘을 풀고 미안하다는 듯 붉게 자국 난 가슴을 부드럽게 달래 주었다.

오랜 키스로 호흡이 조금 가빠졌을 때야 입술이 떨어졌다.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자 단번에 눈이 마주쳤다.

“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

“그럼 그것도 모르면서 너랑 잤을까 봐?”

처음 얼마간은 몰랐었다. 스스로 미용실 귀신 혹은 이 군으로 지칭하는 그 애의 이름 따위 몰라도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시장에서 또래들과 어울리고 있는 그 애를 봤을 때, 복사꽃처럼 예쁜 여자애가 종하 오빠, 하고 부르는 것을 듣고 나서야 이름을 알았다.

아니, 그제야 내가 그 애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얘기까지 해 줄 필요는 없겠지 싶어 뒷말은 삼켰다.

“모를 줄 알았어.”

“너도 내 이름 알잖아.”

“명함, 줬었으니까.”

알고 있었구나. 알고 있었어. 작게 그 말을 되뇌는 녀석의 얼굴이 어쩐지 기뻐 보였다.

“이름 한 번만 더 불러 봐.”

“아까부터 시키는 게 많다.”

“한 번만.”

그 애의 조용한 부탁을 나는 너그러이 들어주었다.

“이종하.”

그 애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면서도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눈가와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다. 나로 인해 짙게 흥분한 눈빛이 마음에 들어 눈 위에 촉, 하고 소리가 나도록 짧게 입 맞추었다.

“미치겠다.”

“아!”

내 행동을 신호로 여겼는지, 그 애의 입술이 빠르게 목덜미를 덮쳤다. 내 귓바퀴를 빨고, 턱을 혀로 쓸어내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대로 나를 한입에 집어삼키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 애는 제 다리에 나를 마주 앉힌 채로 내 몸을 혀로 어루만졌다. 뜨끈한 혀와 입술의 감각이 온몸에 퍼져 나갔다.

“아아…….”

고개가 나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쳐들렸다.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청량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찔함을 삭였다. 오싹한 흥분으로 몸을 떨면서도 문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사방이 훤히 드러나는 야외에서, 한참이나 어린, 그것도 겨우 이름 정도 아는 남자와 벗은 몸을 겹치고 있는 자신이 낯설었다. 너무할 정도로 심심하고 재미없는 생활을 하다 보니 때늦은 탈선을 하고 싶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나양이라는 이 축축하고 나른한 도시가 나를 이렇게 만든 거다. 때로는 마음 가는 대로 충동적으로 행동해도 좋지 않겠느냐고 부추긴 거다.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하고 있을 때였다.

땀에 밴 그 애의 두 손이 내 얼굴을 잡고 감싸 내렸다. 눈을 맞춘 그에게 싱긋 웃어 보였더니, 그 애가 이상하다는 듯 보며 뺨을 살살 얼러 왔다.

“무슨 생각하는데.”

“그냥. 다 우스워서.”

“뭐가 우스워.”

“너랑 내가, 벌건 대낮에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

“이제 와서 발 빼려고 그런 소리 하는 거지? 나는 이렇게 만들어 놓고.”

억울함을 토로하는 그 애를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내가 널 어떻게 만들었는데.”

“몰라서 묻는 거 아니잖아.”

“몰라. 말 안 하면.”

뻔뻔한 채근에 그 애는 한숨을 훅 내쉬고는 중얼거렸다.

“약았다, 너 정말.”

그 애의 말이 맞았다. 나는 약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자는 남자의 다리 위에 덥석 올라앉아 키스한 것도 나였고, 당황하는 그 애의 눈앞에서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 맨 가슴을 드러낸 것도 나였다.

허벅지 사이로 닿는 툭 불거진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새침하게 굴고 있는 나는, 내가 생각해도 제멋대로였다.

이왕 약았다는 말까지 들은 거 조금 더 멋대로 굴고 싶어졌다. 나는 다리를 한껏 벌리고 남자의 중심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야. 좀 내려와 봐.”

작게 소리치는 그 애의 얼굴은 말과는 달리 당장이라도 넣고 싶은 듯 일그러져 있었다. 쓸데없이 잘생긴 이 얼굴이 쾌락으로 물드는 게 보고 싶었다.

“나 정말 내려가?”

“아씨.”

그 애는 나를 온전히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마음껏 끌어안지도 못했다. 안절부절못하는 그 애에 반해 나는 자신만만했다.

그 애가 나를 밀어내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의 이유는 오로지 그 애였다.

“김수연. 이따가 집에 가서 해. 미술관 끝날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아랫입술을 짓씹듯 꾹 물며 그 애는 흥분을 삭였다. 어이가 없었다.

“누가 너 집에 들어오게 둔대?”

“아무튼, 여기선 너 안 돼.”

무슨 말인가 싶었다.

“넌 되고?”

“…….”

“콘돔 챙겨 다닌 게 누군데.”

대답 대신 그 애는 잔뜩 흐트러진 내 상체를 정리해 주었다. 서툰 손으로 브래지어를 채우고, 가만가만 블라우스 단추를 잠갔다.

멈추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만이었다. 판단은 엇나갔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어쩐지 소중히 여겨지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단추까지 채운 그 애는 아쉬운 손길로 블라우스 깃을 매만졌다. 그러다 내 손을 끌어다 깍지를 끼듯 맞잡았다.

손가락 사이마다 들어찬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대로 나를 눕히고 내 안으로 파고들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무거운 한숨과 허벅지 안쪽에 닿는 딱딱함을 느끼며, 나는 그 애를 불쌍히 여기기로 했다. 이 이상은 놀리지 말아야지. 산뜻하게 일어나려는 내 허리를 그 애가 긴 팔을 뻗어 끌어안아 왔다. 나는 다시금 그의 다리 위였다.

“뭐야. 내려가라며.”

그 애는 툴툴대는 나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고, 내 어깨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었다.

“이런 데서 끝까지 갈 생각 없어. 내가 아무리 뭘 잘 몰라도 이렇게 아무 데서나 섹스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아. 나 손도 제대로 못 씻었으니까 여자 몸에 안 좋을 수도 있고. 콘돔은 그냥……, 그냥 너 만나고부터는 계속 가지고 다녔던 거고……. 참으려고 하는데, 왜 너 자꾸만 나한테 이러냐. 사람 미치게.”

어깨에 입술을 묻은 채 말하는 탓에 목소리가 반쯤은 뭉개져 들렸다. 그래도 그 애가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이해됐다.

나를 질책하는 품 안의 순진한 남자가 귀여워 죽겠다. 나는 말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참으며 무심히 물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그 애가 천천히 어깨에서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한 번만 해 줘.”

“못 들었어. 잘 안 들려.”

“키스 한 번만 더 해 달라고.”

어째서일까. 유치한 농담이나 감정놀음 따위는 딱 질색이었는데, 이 애의 앞에만 서면 자꾸만 심술 맞아진다.

내 손 위에 올려놓고 마음껏 놀리고 싶어. 내 행동 하나하나에 기민하게 촉을 세우고 있는 그를 뒤흔들고 싶어. 이런 나를 나조차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잠깐만. 너 뭐 하는, 읏.”

나는 땀으로 젖은 티셔츠 사이에 손을 넣었다. 갈라진 근육을 따라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듯 움직이다 바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을 움켜쥐었다. 한 손으로는 전부 잡기 힘들 정도로 그의 성기는 크게 부풀어 있었다.

“아윽, 하아…….”

귓가에 내뱉어지는 신음에 자신감이 붙은 나는 성기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어 위아래로 훑었다. 뜨겁고 미끈거렸다. 선단에서 새어 나온 끈적끈적한 액이 힘줄이 돋아난 표피에 얇게 발리는 동안, 그 애는 눈을 꼭 감은 채 쾌락에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이 나를 더욱 부추겼다. 그 애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것은 순전히 내 의지였다. 당황한 그가 나를 말리기도 전에 바지를 끌어 내렸다.

내 혀가 성기에 닿자마자 그 애의 모든 것이 무력화되었다.

김수연, 김수연…….

그 애의 입에서 끊임없이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흔하디흔한 내 이름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말보다 낯설고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지금 내 머리칼을 흩트리는 것이 그 애의 손인지, 청보리밭을 지나 불어오는 바람인지 모른다.

나는 다만,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그를 가득 머금을 뿐이었다.

미술관 앞에 다시 선 건, 떠났을 때로부터 세 시간은 더 지났을 무렵이었다.

혹시라도 장시간 자리를 비운 것이 문제가 될까 염려된 그 애가 미술관 내부를 살피는 동안, 나는 유리창을 보며 헬멧에 눌린 머리를 태연히 정리했다. 눌린 머리보다 립스틱이 반쯤 지워진 입술이 눈에 더 들어왔다.

“들어갈게.”

“어.”

나는 엄지로 입술 끝을 닦으며 그 애를 등졌다. 마른침을 삼키는데 비릿한 맛이 묻어났다.

얼굴을 떼어 내려는 그 애를 저지하고 기어이 입안에서 사정을 시켰었다. 입안에 정액을 가득 담고 고개를 들자, 어서 뱉으라며 입 앞으로 커다란 손이 들이 밀어졌다. 나는 그 애와 눈을 마주한 채로 꿀꺽 입안의 것을 삼켰다. 불탄 것처럼 시뻘게진 얼굴이 어쩔 줄 몰라 일그러지는 것이 꽤나 만족스러웠다.

더럽게 그걸 왜 먹냐고 성질을 내기에, 다른 건 잘만 하면서 왜 내숭이냐고 쏘아붙였었다.

“참. 덕분에 잘 먹었어.”

“뭐, 뭘?”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기 전, 뒤돌아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명확한 듯 모호한 내 말에 당황한 그 애가 잠시 비틀거렸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삐딱하게 서 있던 자세가 무게 중심을 잃은 듯했다.

“뭐긴 뭐야. 닭.”

“…….”

나는 부러 무심히 답하고는 미술관으로 들어섰다. 등 뒤로 황당함에 물들었을 남자의 얼굴을 상상하니 큭큭 웃음이 나온다.

쟤는 왜 저렇게 놀리기 좋은지 몰라. 그러니까 자꾸만 짓궂은 마음이 들지.

폐관까지는 이제 겨우 두 시간도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건지 물어보려고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보다 빠르게 성큼성큼 다가온 그 애가 내 앞을 막아섰다.

“김수연.”

“왜 이종하.”

“너는 근데, 내 말을 대체 어떻게 알아들은 거야? 난 키스 한 번만 해 달라고 한 거였어.”

빨아 달라고 한 게 아니라, 하는 작은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알아.”

“알아들었으면서 왜 그랬어?”

“그냥 내가 그렇게 하고 싶었어.”

“아, 진짜. 너는 계집애가 왜 그렇게 대책이 없냐.”

“그거 빠는 게 대책이었는데 무슨 대책. 거기선 끝까지는 안 된다며. 하지 말자며.”

“그게 아니라……, 다음에 내가 또 빨아 달라고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좋아서 끙끙 앓았던 주제에, 흥분에 못 이겨 내 얼굴을 쥐고 허릿짓까지 할 때는 언제고 왜 또 성질이야.

무시하고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손목이 붙잡혔다. 왜? 말 대신 눈으로 물었다. 그 애는 잡은 손목을 놓지 않으며 우물쭈물했다.

“그건 그거고. 지금이라도 해 주고 가. 내가 원래 말했던 거.”

“원래 말했던 거 뭐. 아아, 키스?”

“…….”

“여기 나 일하는 데야.”

“한 번만 해 주면 더 안 졸라.”

“그거나 숨기고 얘기해.”

바짓단이 들릴 듯 튀어나온 것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니가 한 번만 해 주면 가라앉아.”

순진한 건지, 응큼한 건지 이럴 때 보면 정말 헷갈린단 말이야. 그 애의 뻔뻔한 말이 싫지 않은 걸 보면 나도 나양에서의 생활이 어지간히 지루한가 보다.

연애도 아닌데 퍽 설렌다. 우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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