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11)

2.

녹음

출근은 서울에서 하던 그대로였다.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반듯하게 올려 묶고 화장을 한 뒤에 검은 투피스 정장을 걸쳐 입었다. 어떤 때는 바지였고, 어떤 때에는 치마였으나 흰색 상의에 검은색 하의임에는 늘 변함이 없었다.

작은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다. 그것이 내 출근 준비의 전부였다.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서 빈둥대거나 집을 나서기 전까지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일은 없었다. TV를 틀어 놓거나 음악을 듣지도 않았다. 아침 식사로 뭘 준비해서 챙겨 먹는 일도 없었다. 그나마 요즘은 기분이 새로웠다. 출근길이 달랐으니까.

미술관에서 숙소로 내어 준 작은 빌라에서 20분 거리에 나양미술관이 있었다. 사잇길을 이용하면 가까울 텐데도 나는 시장을 가로지르지 않고 크게 돌아 걸었기에 40분 가까이 걸렸다. 요즘 같아선 날씨도 좋고 가는 길이 대부분 평지라 걷기에 적당했다.

벌써 2주째. 일은 할 만했다. 전시 해설이라는 것이 별다른 질문만 없으면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서 출근 후에 특별히 준비해야 할 일은 없었다. 예상대로 전시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홀로 시간을 보내다 퇴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오늘은 습관에서 벗어났다. 미술관 문 잠금을 확인하고 나오는 길에 충동적으로 발길을 돌려 시장으로 향했다. 뽀글뽀글 파마가 잘 빠진 아주머니가 나온 미용실 안으로 몸을 들였다.

“이게 뭐야?”

전시회 팸플릿을 받아 들며 원장이 물었다.

“지난번에 신세 진 게 죄송하고 고맙고 그래서요. 제가 나양미술관에서 일하는데, 여기에서 지금 전시를 해요. 시간 날 때 보러 오세요.”

다분히 충동적인 걸음이었지만 거짓된 마음은 아니었기에 말이 술술 나왔다.

“내가 봐서 뭘 아나.”

“제가 안내해 드리면 되죠. 저 그림 설명하는 일 하거든요. 잘 모르셔도 설명 들으면서 보시면 좋을 거예요.”

그때 마당으로 연결된 뒷문이 벌컥 열리고 멀끔한 얼굴이 쑥 들어왔다. 막 씻고 나왔는지 숱 많은 검은 머리카락이 촉촉이 젖어 있고 얼굴은 평소보다 뽀얗다.

나를 향했던 그 애의 눈이 흠칫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무감하게 돌아갔다. 반가운 마음에 알은척이라도 하려는 나를 무시하듯 그 애가 몸을 틀었다. 나 나가, 하는 말과 함께.

“아가씨가 그린 그림은 아니구?”

“네, 제가 그린 건 아니에요.”

대답은 원장에게 했지만, 내 눈은 덜 마른 머리를 성가시다는 듯 손으로 넘기는 그 애를 향해 있었다.

조금 어이가 없었다. 뭐야. 나 지금 무시당한 거야? 그 애와 나 사이에 묘한 기류가 떠도는 가운데 원장은 프린트된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팸플릿을 손으로 쓸었다.

“우리 애가 그림을 잘 그리는데.”

“아! 쓸데없는 소릴 해! 나 나간다고!”

터벅터벅 소리를 내며 나를 스쳐 지나간 그 애가 미용실 문을 벌컥 열었다.

“아유, 내가 무슨 소릴 했다고. 예민을 떨어 대, 아주. 술 마시러 나가면서 뭘 나간다 만다 얘기를 여러 번 해싸!”

쾅 하고 미용실 알루미늄 문 닫히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아드님이 그림을 배우나 봐요.”

“그만둔 진 좀 됐는데, 옛날엔 잘 그렸다더라고. 그려 놓은 게 몇 장 있어서 봤는데.”

원장은 말을 멈추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실내임에도 아랑곳없이 불을 붙여 한 모금 주욱 빨아들이곤 허공에 연기를 내뿜었다. 나는 원장이 내려놓은 팸플릿 위로 전시회 입장권과 명함을 올려놓고 말했다.

“그럼 아드님이랑 같이 오세요. 혹시 몰라서 표 다섯 장 넣었는데 다른 자제분이나 동네 친한 분들하고 같이 오세요. 표 더 필요하시면 저한테 연락 주시고요. 명함 놓고 갈게요.”

“그래요. 놓고 가요.”

원장이 일어나 담뱃불을 끄자 연약해 보이는 미용실 문이 다시금 텅, 하고 울렸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거슬리는 소리였다. 안으로 들어온 이가 누구인지 알지만, 나는 알은척하지 않았다. 아까 무시당한 것의 소심한 복수였다.

“왜 다시 왔어? 나간다고 그렇게 유세를 하더니.”

“……놓고 가서.”

원장의 물음에 그 애의 대답이 한 박자 늦게 나왔다.

“뭘.”

“…….”

그 애는 팸플릿 위에 놓인 전시회 입장권과 명함에 눈길을 내렸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고개만 슬쩍 내민 모양새였다.

김수연. 그 입술이 작게 소리 내어 내 이름을 읽었다.

“남의 이름 읽어 놓고 넌 왜 가만히 있어? 소개할 줄을 몰라?”

“난 명함 같은 거 없는데.”

“입 뒀다 뭐 하고.”

원장이 나무라자 그 애는 입을 꼭 다물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창피해서일 것이다. 성인이 되어도, 손님이 앞에 있어도 엄마한테 혼나는 꼴이라니. 고소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미용실 귀신.”

그 애가 나와 눈을 맞추고 말한다. 시건방진 눈빛도, 건들거리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럼 뭐 해. 제대로 된 대답을 안 하는걸. 미용실 귀신, 그걸 지금 본인 소개라고 하는 거야?

“그렇게 부르기 싫으면, 이 군.”

“이 군?”

되물어 보는 나를 등지고 그 애는 미용실을 나섰다. 미용실 밖으로 빠져나간 뒷모습은 문 앞에서 여전히 가만했다. 뭘 놓고 갔다더니, 빈손으로 들어와 또다시 빈손으로 나가는 그 애의 속내가 못내 궁금했다.

“하이고, 저 성질머리!”

사춘기 애같이 구는 아들을 타박하는 원장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삐걱거리는 미용실 문을 넘어서 나갔다. 내 구두 소리를 따라 슬리퍼 끄는 소리가 울렸다. 뒤따르는 그 애의 그림자가 내 앞으로 길게 늘어졌다.

따라오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 애는 전시 설명회 시간에 맞춰 온 유일한 사람이었다. 내가 미용실에 들러 표를 놓고 온 지 딱 이틀 만이었다. 정말 그림을 보러 온 건가.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에라도 다녀온 길인가. 검은 슈트 재킷이 넓고 단단한 어깨에 딱 맞는 걸 보아하니 빌린 옷은 아닌 모양이었다.

“못 올 데 왔어? 뭘 그렇게 봐.”

다가가진 않고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헛기침을 한 그 애가 툴툴댄다.

“그냥 좀 봤어.”

“설명해 준다며.”

“그랬지.”

나는 대충 대답하며 무선 마이크를 끄고 정리했다. 관내에는 그 애를 제외하고는 관람객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들으러 왔으니까 해 보라고, 그 설명.”

뭘 어떻게 설명하나 두고 보자, 하는 투로 그 애가 앞장섰다.

나는 해설 매뉴얼대로 고분고분 설명을 시작했다. 화가의 이력, 그의 작품 세계, 그리고 전시된 그림을 따라 차근차근 걸으며 그 애를 안내했다.

학생 시절 습작과 초기작을 지나 이윽고 전시의 막바지인 최근 작품으로 접어들었다. 국내외로 명성을 얻었으나 아직 젊은 화가라 작품 수는 많지 않았다.

“전시된 작품 중 가장 큰 작품입니다. 제일 널리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고요. 제목 그대로 녹음을 수묵으로 표현한 섬세하고 강렬한 작품입니다. 천천히 감상해 보시겠습니다.”

그 애는 커다란 그림을 따라 걸음을 옮겨 가며 작품을 보았다. 푹 빠진 눈을 하고 있었다. 늘 심드렁하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림 속 나무처럼 고요하고 깊게.

“녹음이 무슨 뜻인데.”

그 애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질문이었다.

“저 그림이 녹음이야. 푸르고 울창한 나무.”

“죄다 까만데 푸르긴 개뿔.”

투덜대면서도 그 애는 그림 앞을 떠나지 못했다. 커다란 버드나무가 흐드러져 있다. 버들잎 하나하나 은은하게 번짐으로 표현되었으나 그림 자체가 워낙에 커 강렬한 느낌을 주는 수묵화였다.

“제목이 뭐 저래?”

“나야 모르지. 제목은 작가가 붙였으니까.”

그 애는 따지듯 그림에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한참을 노려보았다. 처음 발견한 식물을 관찰하는 식물학자처럼 진지한 자세였다.

침묵이 길어지자 나는 그 애의 속내가 궁금했다. 무엇이 저 애를 저렇게 진지하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저 아이를 집중하게 만들었을까. 두 눈에는 흥분과 약간의 신경질 같은 것이 들어차 있었다. 그림 앞에 선 그는 이때까지 본 중 가장 눈길이 가는 모습이었다.

“화가들은 나무를 나무만 하게 안 그리잖아. 이건 왜 이렇게 크게 그린 거야?”

아이 같은 질문에 웃음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 애의 진지함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작가 맘이지. 보는 사람이 그림의 전부를 이해할 필요는 없어.”

이 그림을 그린 이가 늘 해 주던 말이었다.

그림은 보는 이의 세계가 아니라 작가의 세계다. 너는 있는 힘을 다해 너를 그림에 던지겠지만, 그렇다고 보는 이가 그린 널 이해할 거란 생각은 하지 마. 그건 온전히 그 사람만의 몫이니까.

“뭐, 내 맘대로 보는 게 장땡이란 말이지?”

내 말을 이해했는지 그 애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그림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실은 나도 이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 무척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몹시도 좋아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대학 시절 내 선배였다. 힘찬 붓질로 큰 그림을 단번에 그려 내는 타고난 화가. 가장 존경했으나 끝내 흉내도 못 내 본 사람이었다.

처음 동양화를 전공으로 택한 것은 서양화가 왠지 흔하고 시시하다는 유치한 생각에서였지만, 대학 내내 동양화에 매달린 것은 오로지 선배 때문이었다. 그처럼 그리고 싶어서.

“언제 끝나?”

“두 시간 있다가.”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 있는 나를 그 애가 일깨웠다. 나는 건조한 목소리로 답했고, 그 애는 미련 없이 나를 등졌다. 기다리겠다는 말이 없이도 나는 그 애가 기다릴 거라는 걸 알았다.

관내를 정리하고 컴컴한 미술관을 벗어났을 때 담배를 태우고 있는 그 애의 등이 보였다. 습기로 꽉 찬 밤공기 사이로 흰 연기가 소리 없이 피어올랐다. 이윽고 담뱃불을 끈 그 애가 나를 돌아봤다.

“나 좀 배고픈데.”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폼이란 폼은 다 잡더니,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다. 피식 웃음이 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시장 어귀의 치킨집으로 왔다. 간판도 없는 작은 치킨집엔 동네 사람들이 제법 들어차 있었다. 저녁 뉴스가 틀어진 실내에서는 주거니 받거니 사람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었으나 창문이 열려 있어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나는 맥주 한 잔에 기본 안주로 나온 뻥튀기를 집어 먹고, 그 애는 소주에 튀긴 닭을 먹었다. 노릇노릇하게 튀겨져 나온 닭을 손으로 쥐고 잘도 먹었다. 닭을 쥔 손가락이 참 길고 곧았다. 여기저기 굳은살이 박이고 까진 상처가 수두룩했지만 그럼에도 고운 손이었다.

내가 흘깃거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애는 닭 반 마리를 천천히 먹어 치웠다. 정말로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재킷을 벗고 셔츠를 대충 걷어 올린 모양새가 또 영락없이 애다. 미술관에서 마주했던 모습과는 달랐다.

“왜 안 먹어?”

“배가 안 고파.”

“그럼 여긴 왜 왔어?”

“네가 배고프다며.”

그 애는 대답 대신 닭을 크게 물었다. 입안에 고기가 가득 차서인지, 아니면 내 말이 내키지 않아서인지 그 애의 얼굴이 불퉁해 보였다.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 답지 않은 긴 비 때문에 공기는 습기로 꽉 차 있었다. 탈탈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이 시원하기는커녕 도리어 거슬렸다. 빠져나온 머리카락 몇 올이 뺨에 엉겨 붙는 것이 못내 짜증스러웠다.

불쑥 손을 뻗은 그 애가 벽걸이 선풍기 아래로 길게 나온 줄을 탁탁 잡아당겼다. 선풍기가 멈추자 옆 테이블의 중년 사내가 무어라 하는 것 같았으나 그 애는 아랑곳없이 남은 소주를 비워 냈다. 잔을 채워 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별로 그럴 만한 사이도 아니었고, 그 애도 내게 딱히 바라는 것 같지 않았다.

먹을 만큼 먹었는지 그 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애가 지갑도 없이 주머니에서 꺼낸 꾸깃한 지폐를 테이블에 올려 두는 것을 보며, 나는 가방 속에 넣었던 손을 스윽 빼냈다. 미술관에 와 준 것이 기특해 사 주려고 했는데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어디로 가는데?”

“집에.”

물으나 마나 한 질문에 답하나 마나 한 대답이었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물을 말도, 들을 말도 없는 사이에 적절한 침묵이었다. 논을 따라 걸으니 축축한 저녁 공기가 온몸을 감싸 왔다. 춥지는 않았으나 몹시 끈적거렸다.

조금 전 뉴스에서는 서울엔 비가 많이 오지 않았다고 하던데. 아래 지방, 그중에서도 유독 나양이라는 이 동네만 비에 잠길 듯했다. 서울에서 들어오는 우체국 차량이니 택배 차량도 다 끊겼다고 했다. 지내면 지낼수록 이상한 곳이었다.

내가 타고 왔던 버스는 여전할까. 그때 나를 불청객 취급했던 시외버스 터미널을 지나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긴 여정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희한한 동네도 처음이었고, 지금 내 곁을 따라 걷는 남자애와 같은 인연도 생소했다.

“있을 만해?”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풀벌레를 손으로 휘휘 저어 쫓아내며 그 애가 물었다. 질문을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보니, 그제야 별로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계속 산 게 아니면 고장 난 곳 많을 텐데.”

그 애의 말이 맞았다. 겉보기엔 멀쩡해도 고장 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가 이상한데.”

“싱크대 물은 쫄쫄 나오고, 욕실 세면대 물은 또 너무 세고, 하수구는 막혔는지 잘 안 내려가.”

“고쳐 줘?”

네가? 하마터면 그렇게 물을 뻔했으나 진지해 보이는 눈을 보니 그 말이 쑥 들어갔다.

“지금?”

“싫으면 말고.”

그 애와 함께 내가 지내는 빌라로 들어왔다. 집에 연장이 있는지 묻고는 싱크대며, 욕실이며 둘러본 그 애가 불쑥 집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건물 사람에게 이것저것 빌려서 금세 돌아왔다. 보기보단 말주변이 좋은가 싶었다.

애로만 본 게 괜한 생각임을 안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애는 싱크대 수도를 느슨히 풀어 물 세기를 조절해 주고, 욕실 세면대도 봐 주었다. 솜씨 좋게 철제 옷걸이를 쭈욱 펴서 욕조 하수구도 단번에 뚫어 주었다. 삐걱거리는 현관문에 기름도 치고, 여기저기 구멍이 난 방충망도 손질해 주었다.

그 애의 턱을 타고 땀이 뚝뚝 떨어졌다. 습기로 축축한 날, 제법 힘쓰는 일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호의로만 치기엔 고생스러워 보였다.

“대충이라도 좀 씻을래?”

조금 머뭇거리던 그 애는 나를 등진 채 셔츠를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간 이어지던 물소리가 멈추었다. 그 애는 바지만 입은 채로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대충 손으로 문지르며 욕실을 나왔다.

안에 수건이 없었나 하는 생각은 베란다 건조대에 빽빽이 걸린 세탁물을 보고 사라졌다. 나는 개중 가장 잘 마른 수건을 골라 내밀었다.

“목말라.”

소파조차 없는 휑한 거실을 서성이며 그 애가 중얼댔다.

“맥주밖에 없는데 그거라도 줘?”

“어.”

사양하지 않는 그 애에게 캔 맥주를 건넸다. 내 손에도 똑같은 로고의 맥주가 들려 있었다. 그 애와 나는 나란히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나는 낡은 TV에 시선을 두고 시사 프로그램을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그 애는 투정 많은 평소와 달리 별말 없이 맥주를 마셨다.

“저건 뭐야?”

“응?”

불쑥 내 몸 위를 가로지른 그 애의 손이 거실 구석에 둔 크로키북을 끌어당겼다. 남에게 그림을 보여 준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겉장을 넘기고 몇 장을 넘길 때까지 의미 없는 선이 들쭉날쭉하게 그어져 있었음에도 창피하진 않았다.

전시회 입장권을 주러 미용실에 갔다 원장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너, 그림 그린다고?”

“아니.”

“예전에 그렸었어?”

“…….”

말하기 싫은 걸 굳이 끌어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캐묻는 대신 내 이야기를 꺼냈다.

“난 원래 그림 그렸어.”

그 애가 크로키북을 한 장 더 넘겼을 때 그 애의 모습이 나왔다. 쭉 뻗은 어깨와 너른 등, 곧고 긴 다리. 비가 쏟아지던 첫날, 미용실로 나를 데리고 가던 그의 뒷모습이었다.

그 애는 전시회장의 ‘녹음’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것처럼 내 그림에 눈을 박고 있었다. 나는 모른 척했다.

시간이 지나 깊은 밤이 되어도 그 애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돌아갈 거란 생각은 나도 하지 않았다. 그 애가 내 집에 들어올 때부터.

나는 냉장고에서 남은 맥주를 모두 꺼내 왔다.

“그림.”

“응.”

“나야?”

“응.”

얕은 취기에 물들어 그를 보았다. 그 애도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눈과 코와 입, 그리고 솜털 하나까지 낱낱이 뜯어보는 집요한 시선이 좋았다. 나도 모르게 멈추었던 숨을 옅은 웃음과 함께 내쉬었다.

“넌 겁 많게 생겨서 겁이 없다.”

그 애가 말했다.

“그런 말 많이 들어.”

내가 답했다.

“말귀를 못 알아먹어. 겁 좀 내라고 계집애야.”

그 애는 답답하다는 듯 거친 손놀림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스르륵 내려오는 것을 보며 나는 그 애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 고작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가벼운 입맞춤에 그 애가 떠는 것이 느껴졌다.

마주친 그의 눈도 떨리고 있었다. 그 옅은 떨림으로 나는 직감적으로 내가 무언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다는 것을.

목을 감싸던 손을 풀어내리며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차갑게 나갔다.

“마시던 것만 다 마시고 가.”

“…….”

“식어서 마시기 싫으면 그냥 두고. 내가 알아서 버릴 테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대답도 듣지 않고 그 애가 마시던 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맥주는 싱크대 개수구에 몽땅 부어 버렸다. 맥주는 반 이상 남아 있었고 식지도 않았었다.

내가 그러는 동안에도 그 애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수리비 줘?”

“…….”

내 물음에 그 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땀에 전 셔츠를 찾아 손에 꽉 쥐었다. 그러고는 집을 나섰다. 구겨진 재킷이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엉겨 있었다. 속이 답답해 나는 그대로 방에 들어가 누웠다.

차라리 나와 밤을 보내고 말았을 것이지. 그런 맘이 아니었으면 날 밀쳐 내고 욕이라도 하면 될 것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축 처진 어깨를 하고, 황망한 눈으로 날 보곤 나가 버렸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애초에 안 것도 없으면서.”

헛웃음을 내뱉으며 술에 취한 채로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벌과 같이 지독한 숙취가 찾아들었다.

방 안은 새벽녘 빛에 물들어 온통 푸르렀다.

녹음처럼.

비가 그쳤다. 안개가 걷혔다. 오랜 습기가 물러갔다. 그리고 순리대로 더위가 찾아들었다.

여름이었다. 연녹색 풀들이 짙어져 눈길 닿는 곳 모두 맑았다.

나는 아무도 없는 미술관에 앉아 시간이 흐르는 것을 견뎠다. 출근했다가 퇴근하고, 퇴근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하면 시간은 알아서 흘러갔다.

누군가는 안정적이라고 말할 만한 삶이었으나 나는 남들이 말하는 안정 같은 건 느껴 본 일이 없었다. 늘 혼자였고, 살기 위해 뭐라도 해서 돈을 벌었다. 사는 내내 그런 삶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딱히 불안하여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고, 사무치게 안정을 바라지도 않았다.

저녁으로 무언가를 먹어야겠단 생각이 들어 시장 골목으로 들어섰다. 왁자지껄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무리 지어 앉은 애들이 눈에 들어왔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녀가 치킨집 앞 간이 테이블에 모여 있었다. 그 사이에 그 애도 있었다. 오래된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는.

대부분 술에 취해 떠들어 대고 있었으나 그 애만은 멀쩡해 보였다. 또 모르지. 취했는지. 그 애는 소주 한 병을 혼자 다 마시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었다.

그 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여자애가 보였다. 미색에 가까운 맑은 얼굴에는 잡티조차 없었다. 입술만 발갛게 발랐을 뿐인데 막 피어나는 꽃처럼 싱그러웠다.

여자애가 그 애에게 팔짱을 끼며 칭얼거렸다. 하던 게임이 끝났는지 휴대폰을 내려놓은 그 애가 고개를 들고 심드렁한 얼굴로 무어라 대꾸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풋풋한 연인으로 보였다. 문득 웃음이 났다.

내가 저 앨 데리고 뭘 하려고 했지.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

“…….”

그 애는 표정 없는 얼굴로 날 보곤 그새 시선을 거뒀다. 그게 끝이었다.

끝일 거라 생각했다.

일요일 밤이었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었기에 일주일 중 가장 마음이 편한 시간이었다.

시장에 들러 먹을 것과 맥주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터덜터덜 나태한 걸음을 걷다 옅게 비가 흩날리기 시작하자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지겨운 비. 펼친 손을 이마 위로 올려 비를 막았다.

빌라에 다다랐을 때, 입구 앞에서 날리는 담배 연기를 보았다. 붉게 빛을 내며 타는 담배를 쥔 이는 그 애였다.

그 애가 고개를 돌렸다. 덜컥 눈이 마주쳤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반가움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불쑥 짜증이 뒤따랐다. 얼마 전 시장에서 꽃 같은 여자애를 옆에 두곤 알은척도 않더니,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모르겠다. 제멋대로인 자식.

그대로 스쳐 지나려는 나를 커다란 손이 잡았다. 참은 숨을 내뱉듯 그 애가 말했다.

“수리비 내놔.”

“수리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묻던 나는 곧이어 말뜻을 이해했다. 싱크대며 욕조를 고쳐 달라 그 애를 인부처럼 써먹었던 그 밤, 어설픈 키스를 나누고 그 애를 돌려보내려고 했던 말이었다.

“아, 그 수리비.”

정말로 그 돈을 받아 내러 온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나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내밀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낸 터라 얼마인지도 몰랐다. 색이 다른 지폐가 여러 장 섞여 있었다.

달라고 할 땐 언제고 그 애는 받지도 않고 멀거니 섰다. 말을 섞기도 귀찮아 무시하고 가려는 찰나, 그 애가 거칠게 돈을 낚아챘다.

빌라 입구에서 우리는 서로를 노려봤다. 오랜 빚을 받으러 온 빚쟁이처럼 그 애가 나를 훑었다. 진 빚도, 진 죄도 없는 나는 그 애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 애가 한 걸음 다가왔을 때, 입구의 센서 등이 반짝하고 켜졌다. 그 애의 뒤로 흩날리는 비가 보였다. 안개처럼 흩뿌리는 비가 얼굴을 적셨다.

“우산 있어?”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검은 봉지가 들린 손을 들어 보였다. 캔 맥주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보면 몰라?”

“집에 있냐고.”

내게서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자, 그 애는 초조한 기색을 숨기며 채근했다.

“있으면 팔아. 비 맞고 가기 싫으니까. 이건 우산값.”

그러고는 나에게 돈을 다시 쥐여 주는 것이었다. 그사이 빗줄기가 거세져 있었다.

비를 피해 계단을 오르는 나를 그 애가 따라왔다. 집으로 들어가 문을 열어 놓은 채로 나는 우산을 찾았다. 쓰고 다니던 우산은 베란다에 펼쳐 둔 상태였고, 갖고 있는 우산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베란다로 가 우산을 꺼내 접는 사이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돌아갔든지 들어왔든지 둘 중 하나다. 내 예상은 후자였고 보기 좋기 들어맞았다.

“들어오란 소리 안 했는데.”

“그날 나한테 왜 그랬어?”

“뭘.”

“나한테…….”

거기까지만 말하고 그 애는 입을 다물었다.

어둑한 거실에서 우리는 그저 마주 서 있었다. 침묵에 목이 막힐 지경이다. 나는 본디 침묵을 지겨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학교에 다닐 때도, 그림을 그릴 때도, 미술관에서도, 집에서도 나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말을 주고받을 상대가 생기자 간사하게도 침묵이 지겨워졌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내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너한테 왜 그랬냐고. 왜 키스했냐고?

“그냥. 하고 싶어서 했어.”

“그래? 그럼 나도 하고 싶은 거 하면 되겠네.”

그 애가 성큼성큼 다가와 입술을 맞붙였다. 커다란 두 손이 내 얼굴을 감싸고 성급한 혀가 입안을 곧장 파고들었다. 나는 밀어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꺼이 받아 주지도 않았다. 성난 호흡과 뜨거운 숨결을 그저 내버려 두었다. 서툴지만 열렬한, 그 진지함이 불편했다.

한참 동안 내 입속을 헤매던 혀가 빠져나갔다. 남의 일인 양 방관하는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가 씩씩 숨을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아쉬운 입술을 떼어 내지 못한 채로 물어 왔다.

“키스, 하고 싶어서 했다며.”

“그래.”

“그게 전부였어?”

“전부는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잘 기억 안 나.”

“근데 왜 먼저 건드려 놓고 하다 말았어?”

멋대로 키스하고, 멋대로 집 밖으로 떠밀었다. 황망함에 차마 묻지 못했을 질문을 그는 이제야 내게 던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 밤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오늘 나를 기다리며 무슨 말을 곱씹고 있었을까.

“책임지기 싫어서.”

고작 키스 한 번에 얕게 떠는 애를 데리고 내가 무얼 할 수 있었겠는가. 이후에 따라올 귀찮은 과정을, 당시의 나는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밀어냈다.

“누가 너더러 책임지래.”

“…….”

“어? 누가 너더러 책임지랬냐고!”

무엇이 그를 이렇게 북받치게 했을까. 그가 내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그의 젖은 머리에서 튀어 오른 빗방울이 내 얼굴을 스쳤다.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리자 그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에이씨, 왜 지금 물이 튀고 난리야.”

신경질적이지만 조심스러운 손길로 물기를 닦아 주는 그의 목소리에 언뜻 서러움이 묻어났다.

뭐가 그렇게 서러워? 내가 애 취급을 해서?

애는 애네. 피식 웃음이 샜다. 어서 이 지리멸렬한 소모전을 끝내고 따뜻한 물에 몸을 씻어 내고 싶다. 그리고 시원하게 식힌 맥주나 마셨으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뜻밖의 흥미가 일었다. 멍청해 보일 정도로 속을 내보이는 순진한 미남과의 하룻밤이 어쩌면 나쁘지 않을지도.

“너 여기 뭐 하러 왔어. 진짜 수리비 받으러 왔어?”

“아닌 거 알잖아.”

“똑바로 말해. 징징대는 거 질색이니까.”

“나는…….”

“갈 거면 가고, 있을 거면 있고.”

가지 않을 것을 알고 하는 말이었다. 그걸 그도 알 것이다.

“있을래. 있을 거야, 여기. 너랑 하고 싶어.”

조급하게 내 허리를 끌어안는 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따뜻한 입술이 맞닿았다. 조금 전 맛보았던 것과 같은 온도. 그러나 전혀 다른 감각이다.

눈을 감아도 그려 낼 수 있을 것처럼 내 입안 곳곳을 깊숙이 헤집던 그가 불쑥 블라우스 안으로 손을 넣어 왔다. 젖어서 살갗에 달라붙는 천을 밀어내며 들어온 손이 브래지어를 풀었다. 순서를 모르는 남자를 대신해 나는 직접 블라우스 단추를 열었다.

침 삼키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마지막 단추를 풀어낼 때까지 달뜬 시선으로 지켜보던 그가 어깨에 걸려 있는 브래지어를 벗겨 냈다. 옹송그려졌던 가슴을 핥아왔다.

키가 큰 남자가 엉거주춤 허리를 숙여 가슴을 빠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살살 간지럽게 핥다가 볼이 움푹 팰 정도로 세게 빨아들이기도 했다. 이갈이를 하는 애완동물이 정도를 모르고 주인을 깨문 느낌이었다. 결 좋은 머리를 살살 쓸어 주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떼어 내자, 왜? 하는 표정으로 남자가 올려다본다.

“살살해.”

“미안. 아팠어?”

“조금.”

그 애는 정말로 미안한 얼굴이었다. 흥분한 건지, 창피한 건지 귓불도 조금 붉었다. 그러면서 다시금 가슴을 머금었다.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게. 도톰한 입술이 가슴에 닿는 것이 좋았다.

나는 전기가 오른 손끝을 감아쥐며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또 내뱉었다. 그 애의 입술이 가슴에서 홀쭉한 배로, 그리고 더 아래로 내려갈수록 호흡이 점차 흐트러졌다.

“하아…….”

검은 수풀 속에 한참 동안 코를 묻고 있던 그 애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높이가 그새 높아졌다. 나 혼자 벗겨 놓고 저는 멀끔한 차림을 하고 있던 그가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는 눈을 내게서 떼지 않은 채, 아래에서 위로 팔을 교차시켜 순식간에 상의를 벗어 냈다. 넓고 각이 진 어깨와 단단한 가슴, 그 아래로 잘 짜인 복부 위를 쓸어 보았다. 그는 긴장으로 몸을 굳히면서도 내가 조금 더 잘 만져 볼 수 있도록 상체를 앞으로 더 내밀었다. 인위적이지 않은 싱그러움이 손끝에 전해졌다.

이제 다시 그의 차례였다. 어깨를 쥐는 손에 작은 떨림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때 그 밤처럼 그를 밀어낼 생각은 없었다. 나와 고집스레 눈을 맞추던 그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춰 왔다. 비릿한 향이 묻어났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미약하게 그의 혀를 빨았다.

그가 맞닿은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내 몸을 끌어안고 눕혔다. 소파가 없는 바닥이 휑해 얼마 전 시장에서 사 둔 얇은 러그 위였다. 입안을 맛보던 혀가 빠져나가 턱을 쓸고 귓불을 물었다. 귓속으로 그의 거친 숨소리가 스며들었다.

“후우…….”

느릿하게 목덜미를 핥던 그는 나의 몸 전체를 천천히 애무해 나갔다.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는 듯, 맛있는 음식을 아껴서 맛보기라도 하듯 정성스럽고도 짙은 애무였다. 미온에 온몸이 가득 잠긴 것 같은 나른함이 밀려왔다. 동시에 끝 모를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아찔함도 느꼈다.

“하아……. 거긴, 그만.”

종아리를 타고 내려가는 그의 혀가 발등 위에 닿았을 때, 나는 다리를 접어 그의 단단한 어깨를 툭 하고 찼다. 그대로 두면 발가락까지 입에 넣고 굴릴 태세였다.

“이리 와.”

나는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렸고, 그는 기꺼이 내 품에 안겨 들었다. 우리는 몸을 겹친 채 잠시간 서로를 끌어안았다. 거세게 뛰는 그의 심장 박동이 내 오른쪽 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불덩이같이 뜨거운 남자의 성기 역시 은밀한 곳에 닿아 뭉근하게 치대지고 있었다.

“후, 달아.”

“응?”

“너 몸이 왜 이렇게 달아. 전부 다 빨아 먹고 싶어. 내 입안에 넣고 굴리고 싶어.”

정제되지 않은 노골적이고 과격한 표현에서 오히려 그 애의 순진함이 엿보였다. 나는 굴곡진 등 사이로 움푹 팬 골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키득키득 웃었다. 무섭게 왜 그래. 전혀 무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웃지 마.”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살 내음을 맡고 있던 그 애가 벌떡 고개를 들고 입술을 삐죽였다. 자신에 비해 여유로워 보이는 내가 못마땅한 듯했다.

내 머리 양옆으로 짚은 그의 팔에 퍼런 힘줄이 돋아나 있었다. 나는 등을 쓸어내리던 손으로 그의 팔목을 가만히 잡아 보았다. 다른 한 손으로는 미끈하게 잘 빠진 볼을 감쌌다. 그러고는 천천히 다리를 벌렸다.

“이제 들어와.”

내 위에서 거친 숨을 훅훅 내뱉던 그 애의 목울대가 울컥 튀었다. 그는 긴 팔을 뻗어 아무렇게나 벗어 둔 바지에서 콘돔을 빼 들었다. 입으로 콘돔 포장을 뜯어내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나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말랬잖아.”

“웃음이 나는데 어떡하라고. 작정하고 온 거 너무 티 나잖아.”

“이러려고 왔는데 어쩌라고.”

웃음이 도무지 그치질 않아 키득거렸다. 그만하랬지, 낮은 목소리와 동시에 커다란 손이 내 뺨을 감싸 쥐었다.

“너 그렇게 웃는 건 내 상상 속에 없었단 말이야.”

“무슨 상상.”

“너랑 하는 상상. 많이 했거든. 밤마다 너 안는 생각하면서 여러 번 느꼈고.”

나는 그에게서 뺏어 든 콘돔을 성기에 씌웠다. 이 정도의 크기가 내 안에 전부 들어차는 생각만으로도 온몸이 저릿해진다. 콘돔에 감싸여 미끈거리는 성기를 미약한 힘으로 쓸어 올리자, 꽉 짜인 복부가 다급하게 들썩였다.

“아읏, 못 참겠어.”

“안 참아도 돼.”

그가 곧바로 내 허벅다리 안쪽을 단단하게 붙들고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딱딱한 끝이 은밀한 곳에 닿는가 싶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번에 내벽을 밀고 들어왔다.

“뜨거워, 네 안.”

상상보다 더 뜨겁다는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이쪽이야말로 하고픈 말이다. 깊어. 너무도 깊었다. 그리고 뜨거웠다. 절로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골반을 붙든 강인한 힘 때문에 달아날 수도 없었다.

“하으, 차라리 움직여.”

빨리, 하고 그를 재촉하며 종아리를 그의 허리에 감았다. 멈추어 있는 것이 오히려 더 버거웠다. 오랜만인 탓인지, 평균을 확연히 웃도는 크기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팔과 다리로 그의 몸을 옭아매듯 꼭 끌어안은 채 나는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그의 성기는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갔다가 스프링처럼 탄성 좋게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콕콕 깊은 곳을 찌르듯 파고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버튼을 누르면 반응하는 인형처럼 소리를 냈다. 신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가슴이 맞닿도록 내 몸을 가득 끌어안고 미친 듯이 허리를 쳐올리다가도, 이따금씩 상체를 들어 내 얼굴을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이지러진 눈가에, 찡그린 코끝에, 신음하는 입술에 키스했다. 거센 허리 놀림과는 다른 부드러운 입맞춤이 간지러웠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대화다운 대화가 불가능했다. 체온 높은 그의 몸이 차가운 내 몸을 녹여 갔다. 그는 미치겠단 말만 되풀이하며 들끓는 숨을 헐떡였고, 나는 줄줄 흘러내리는 몸을 추스르지 못한 채 그에게 매달려 끙끙댈 뿐이었다.

흐릿한 시야로 잘빠진 얼굴이 보였다. 흔들리는 새까만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는 잔뜩 붉어져 청초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를 악문 듯 질끈 다물린 턱관절을 어루만지다 입술을 쓸었다. 겨우 그 손짓 하나가 자극적이었는지, 눈을 찡그리는 모양새가 퍽 마음에 찼다.

“키스.”

“…….”

“키스해.”

그대로 내려온 입술이 삼키듯 나를 얼렀다. 가지런한 이로 자근자근 입술을 깨물기도 하고, 입안 깊숙이 파고들었다가 내 혀를 쭉쭉 빨기도 했다. 언제 서툴렀냐는 듯 능숙해진 움직임에 조금 기가 찼다. 애송이 주제에, 그런 주제에 나를 높은 곳으로 솟구치게 했다가 벼랑 아래로 내몰았다.

나는 그의 혀를 다디단 사탕처럼 빨며 넘겨주는 타액을 고스란히 받아 마셨다. 허공으로 치솟았다 가라앉는 다리로 힘껏 그를 조였다. 손끝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그의 둔부를 잡아 쥐었다. 흠결 없는 탄력적인 살에 손이 미끄러질 듯했다.

“아아!”

어느 순간 그의 허리가 튀었다. 걷잡을 수 없이 속도가 빨라졌다. 맞붙었다 떨어지는 아래에서 찰박찰박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나는 눈도 뜨지 못한 채 흔들렸다. 그의 턱을 깨물고 어깨를 할퀴며 북받치는 고동을 참아 냈다.

그가 움직임을 멈추었을 땐, 화로에 잘 달구어진 쇳물이 내 안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하아, 뜨거워…….”

나를 끌어안은 채 그는 거친 호흡을 가다듬었다. 맞닿은 가슴으로 두 개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무거워.”

작은 속삭임에도 기민하게 촉을 세우고 있던 그가 내 위에서 내려왔다. 그가 빠져나가자 어쩐지 뱃속이 텅 빈 것도 같다. 사용한 콘돔은 끝이 묶여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졌다. 그걸 무연히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시야가 뒤바뀌었다.

“이렇게 하면 안 무겁지?”

“……그래.”

내 몸은 바다에 뜬 부표처럼 그의 몸 위에 안착해 있었다. 아니, 그가 부표고, 나는 하늘을 날다 지쳐 그 위에 잠시 올라앉은 새였다. 나는 힘을 쭉 빼고 그의 위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여름은 아침을 예정보다 일찍 불러왔다. 창 너머 풍경이 밝아진 지 제법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벗은 남자의 몸에 안겨 있었다. 모처럼 여유를 즐기는 중이었다.

맨 등에 닿은 그 애의 가슴은 매끈하고 탄탄했다. 그리고 아주 따뜻했다. 데일 듯이 뜨겁다고 생각했던 그의 품이 안락하게 느껴졌다. 배를 감싼 팔과 손을 만지작거렸다. 길고 마디가 곧은 손가락과 주름 없는 손등을 보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리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미 저지른 일이었으니 후회는 되지 않았다. 안기고 싶었고, 안고 싶었다. 그런 내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다시 선택지를 준다 해도 아마 같은 선택을 할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마주했다. 드센 시골 볕에 그을리지도 않는지 얼굴이 뽀얗다. 붓으로 그린 듯 길쭉한 눈매를 손끝으로 쓸고, 오뚝한 콧날을 살짝 튕겼다. 얕은 잠투정을 하던 남자의 눈이 슬며시 떠졌다.

“일어나 있었어?”

그가 물었다. 큼큼, 가다듬는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응.”

“더, 안 자도 돼?”

“어.”

“씻을래?”

“조금만 더 있다가. 찝찝한 것도 없는데 뭘.”

새벽 내 이어진 정사에 지쳐 잠든 내 몸을 그 애가 씻겨 놓았는지 말끔했다. 지난밤을 떠올렸는지 갑작스레 얼굴을 붉히던 그 애를 보며, 근데 배는 조금 고프다고 덧붙였다. 새까만 눈동자를 두어 번 깜빡이던 그 애가 나를 안고 있던 팔을 조심조심 풀어냈다.

“밥할게.”

밥을 해다 바치는 건 미용실 뒤편 여관에서나 여기에서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나는 그 애의 호의를 당연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가 일어서며 덮고 있던 얇은 이불을 내 머리 위로 휙 올렸다. 춥지도 않은 날씨에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빼려는데.

“그대로 있어! 보지 마!”

빽! 하는 소리가 들렸다. 큭큭 헛웃음이 났다. 나는 기어이 고개를 빼고 바라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단단한 몸은 휘파람이라도 불어 주고 싶을 정도로 훌륭했다. 밤새 저 몸에 짓눌려 신음했던 기억이 문득 현실감 짙게 다가왔다.

“보지 말라니까.”

“이제 와서 뭘 창피해하는데. 그게 더 웃긴 거 알아?”

“창피해하는 거 아냐. 그냥 좀…….”

“좀?”

“밝아서.”

갖다 대는 이유가 우스웠다. 몸이 왜 이렇게 다냐고. 전부 다 빨아 먹고 싶다 했던, 밤마다 나를 안는 상상을 했다던 남자는 누구였더라. 그를 놀리려다가, 이런 내가 처녀를 희롱하는 아저씨처럼 여겨져 입을 다물었다.

그 애는 벗어 둔 옷을 빠르게 꿰입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비스듬히 몸을 일으켜 앉자 이불이 아래로 스르르 떨어져 내린다.

가슴이 허전하다고 느끼기 무섭게 그 애가 이불을 내 머리까지 끌어올려 칭칭 감고는 내 어깨를 뒤로 눌렀다. 몸이 휘청하고 넘어갔다.

“야! 뭐 하는 거야!”

“있어.”

“뭐?”

내가 몸을 다시 일으키려고 하자 그 애가 꾹 이마를 눌렀다.

“가만히 있으라고. 밥할 테니까.”

“너, 내가 벗고 있어서 이래? 나는 별로 상관…….”

“나는 상관있어! 그러니까 가만히 좀 있어라.”

계집애가 왜 이렇게 뻔뻔해. 투덜대는 말치고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나는 이불에 갇힌 채로 다시 잠이 들었다. 이상하게 잠이 쏟아졌다. 짧은 수면 후 일어났을 때는 아직 식지 않은 아침상이 내 앞에 있었다.

“일어났으면 옷 입고 먹어.”

그 애는 내 옆에 앉아 등을 벽에 기댄 채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가지런히 놓인 옷을 입고 상 앞에 앉았다.

멀건 계란국과 나물 몇 가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흰쌀밥이 있었다. 먹을 거라곤 생수와 맥주뿐인 냉장고에서 뭘 찾아냈을 리는 없고, 내가 잠든 틈에 나갔다 온 모양이었다.

자는 나를 두고 갔다고 해도 별 상관없었다. 현관 도어록조차 없는 낡은 빌라는 종일 문을 열어 놓아도 아무 일 없을 것이었다.

여관에서 받았던 밥상을 떠올리며 수저를 들었다.

“잘 먹을게.”

“그래.”

부드러운 국물은 목 넘김이 좋았다. 나물을 무친 참기름 향이 식욕을 돋웠다. 볼 한쪽이 가득 차도록 밥을 밀어 넣고 오물거리며 눈을 들었다. 그 애는 한창 게임에 빠져 있었다.

“넌 안 먹어?”

“너 많이 먹어.”

보는 둥 마는 둥 손을 재빠르게 놀리며 그 애가 말했다. 나는 두 번 묻지 않고 밥을 떠먹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저녁부터 공복 상태다. 그 채로 밤을 새워 정사를 나누었으니 허기지지 않을 리 없었다.

나보다 더 움직였던 건 그였을 텐데 배고프지 않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너 유부녀야?”

낡은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가 물었다.

“뭐?”

“결혼했냐고.”

질문의 심각성과는 달리 묻는 말투가 심드렁했다. 그래서 나도 똑같은 투로 대꾸했다.

“아니.”

별걸 다 걱정한다 싶어 웃음이 났다. 그러다 문득 드는 해괴한 생각에 쭈뼛하고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너…….”

미성년자는 아니겠지. 그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제 나와의 섹스가 이 애의 처음임이 분명했기에. 불러 놓고 한참을 말이 없자, 그 애가 줄곧 머물러 있던 휴대폰에서 눈을 떼곤 나를 돌아보았다.

“왜.”

“아냐. 아무것도.”

“내가 미자일까 봐 겁나? 책임지라고 할까 봐? 아님 신고할까 봐?”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너 미성년자야?”

“아니.”

녀석 역시 별걱정을 다 한다는 투로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 애의 대답으로 나는 여유와 뻔뻔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제 와서 뭘 걱정하는 거야? 돈 주고 산 것도 아니잖아. 나 꽃뱀 같은 거 아니거든.”

“그런 생각 안 했어.”

사랑하는 여자와 잔 것이 아니다. 애태우며 기다리던 그런 밤이 아니었다. 그러니 떨려서 서툴렀던 것이 아니다. 처음이라서, 정말로 잘 몰라서 어떻게 할 줄을 몰랐었던 거다.

나는 그 애의 첫 경험을, 우리의 지난밤을 그렇게 정의했다. 그러니 그 애에게 첫 여자가 된 것은 큰 문제도 아니라고.

“싫었어?”

“…….”

“티 났을 거 아냐. 나도 알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처음임이 티가 났든 안 났든, 그 사실을 내가 알았든 몰랐든 바뀌는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젯밤 우리는 잤고, 그 애는 처음이었다.

“처음인 건 맞는데, 그때고 지금이고 네가 걱정할 건 없어. 책임지라고 안 해.”

섹스는 좋았다. 나도, 그 애도 지치도록 서로에게 몇 번이고 엉켜 들었으니까.

“안 싫었어. 좋았어.”

그 애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손등으로 제 뺨을 슥슥 아무렇게나 문지르더니 눈만 슬쩍 들어 나를 보았다.

“또 해도 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애가 끓여 놓은 미적지근한 보리차를 마시고 있었다.

“하고 싶어.”

내가 빈 잔을 내려놓자 그 애는 밥상을 옆으로 밀며 입술을 붙여 왔다. 순식간에 다리 사이로 깊이 파고들어서 몸이 뒤로 밀렸다.

기울어 가는 내 등을 한 손으로 감싸 안으며 그 애는 입안을 핥고 또 핥았다. 그렇게 입술을 붙여 오는 게 하도 애틋해서, 나를 잃을까 봐 조바심이라도 내는 것 같았다.

물론 명백한 착각이었다. 그럼에도 아무렴 어떤가 싶어 그 애의 목에 손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의 온기를 잃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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