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11)

1.

그 애

“계세요?”

알루미늄 문을 슬쩍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기척이 없었다. 오래된 형광등 하나만이 지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텅 빈 오락실 안의 게임 기계들은 모두 꺼져 있었다.

구석에 난 쪽방 안에서 말소리와 함께 화투짝끼리 짝 맞붙는 소리가 났다. 계세요, 하고 한 번 더 묻자 미닫이문이 벌컥 열렸다. 화투를 치는 남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 미스 박은 왔으면 그냥 들어오지 않구 왜 자꾸 불러싸?”

“죄송한데 전화 좀 빌릴 수 있을까요?”

“……타지 사람이유?”

중년 남자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나를 훑었다.

“네. 서울에서 왔는데 길을 잃어버려서요. 나양에 가는 버스를 탔는데.”

“여기가 나양이구먼. 누굴 찾는디?”

전화만 빌려주면 된다는데도 그는 깊이 캐물을 기세였다. 적당히 둘러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친척 어른댁에 왔습니다.”

“어른 뉘?”

내 생각이 짧았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차라리 밖에서 비를 맞으며 공중전화를 찾아 헤매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사내는 나를 등지고 찬장을 뒤적이며 전화를 받았다.

“이 군! 왜 여즉 안 오구 전화질야? 오라고 한 지가 언젠디. 빨리 줌 와 봐. 서울서 아가씨가 하나 왔는디 와서 좀 도와줘야 쓰겄어. 아, 누군진 와 보믄 알지. 딴 데 새지 말고 곧바루 와.”

전화를 끊자마자 그가 수건을 눈앞에 흔들었다.

“일단 좀 닦고 있어 봐유. 젊은 놈이 하나 올 텐께 그눔한테 데려다 달라구 혀.”

사내는 억세 보이기는 해도 나를 어쩔 수작은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안에서 벌여 놓은 판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 보였다. 내가 수건을 받아 들기 무섭게 그는 쪽방으로 훌쩍 들어가 앉았다.

화투짝 맞춰지는 소리, 패를 놓친 사람의 탄식, 점수를 낸 사람의 추임새가 오락실 안을 채웠다. 그 소리가 꼭 TV 드라마 같아서 외롭지가 않았다.

오락실 안에 있는 남자들은 나쁜 짓을 일삼는 이들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썩 배운 사람들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평생 이 오락실 안에서만 산 사람들처럼 오로지 화투판만이 그들의 세계인 것 같았다.

“아가씨! 여 와서 앉어유. 뭐 하러 거기 섰담? 벌서는감?”

“화투판이래두 구경혀. 구경꾼이 있어야 흥이 나지.”

“패 볼 줄 알믄 같이 한 판 치구. 요즘 서울선 화투 안 치나?”

그들은 저들끼리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뭐가 우스운지 몰라 가만히 선 채, 툭툭 물기가 떨어지는 머리끝을 수건으로 대충 털어 냈다.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없는 것보다 나았다.

어둑어둑해진 문 너머로 비 떨어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옆으로 조금만 걸음을 옮겨도 바닥에 깔아 놓은 장판이 구두 굽에 자꾸 걸렸다. 누런 장판 위로 군데군데 담뱃불 구멍이 뚫려 있었다. 크고 작은 구멍들 사이로 곰팡이와 까만 때가 낀 시멘트 바닥이 보였다.

나는 휴대폰의 홈 버튼을 꾹 눌렀다. 여전히 액정은 깜깜하다. 버스에서 깊이 잠들기 전부터 배터리가 없었다. 배터리가 닳는 것에 연연해 본 적 없어 지금 상황이 제법 낯설었다.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나 30분째 같은 자리에 있어 봐도 창밖에 지나는 사람 하나 없었다. 한 자세로 굳은 목이 점점 뻣뻣해졌다.

그때, 오락실 문이 벌컥 열렸다.

“나 왔어.”

선명해진 빗소리를 넘어 키가 훌쩍 큰 남자가 보였다. 그는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오락실 문에 발을 괸 채 서 있었다.

“거 아가씨가 서울서 오셨다는데 좀 모셔다드리구 와. 길을 잃었다잖어.”

“내가 왜?”

“그러지 말고 좀.”

쾅, 하고 남자가 알루미늄 문을 발로 찼다. 그가 몸을 숙여 오락실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자 뒤집어쓴 까만 후드 아래로 앳된 얼굴이 드러났다. 덩치는 컸으나 얼굴 생김이 사내라기에는 한참 덜 자란 듯 보였다. 동네 파출소 순경을 불러다 준다는 줄로 알았는데.

“화투 치자고 불러 놓고 왜 사람을 데려다 놓으래? 알지도 못하는 여잘.”

그 애가 나를 위아래로 흘낏 보며 불퉁댔다.

“이 군 오면 선 잡아 줄 텐께, 응?”

“됐고. 이대로 갖다 팔아도 되지?”

한다는 소리에 농담이라도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눈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시선을 바닥에 내리깔았을 때 그 애가 낮게 물었다.

“어디서 왔다고?”

“…….”

“어디서 왔냐고.”

내가 대답을 않자 그 애가 오락실 문을 발로 툭 찼다. 알루미늄 문이 울리는 소리에 놀라 그를 올려다봤다. 다시 봐도 순경 같은 건 아니었다. 동네 양아치라면 몰라도.

“서울요.”

“서울 어디. 서울로 가기만 하면 돼?”

“가는 건 아니고, 서울에서 왔는데요. 제가 어딜 가다 길을 잃어버려서요. 주소가…….”

“아저씨, 나 간다. 다음번에 이러면 나 진짜 다시 안 와. 비도 오는데 짜증 나게.”

그 애는 내 말을 듣다 말고 문에 건 발을 뺐다. 나는 닫힌 문 너머로 그 애를 다시 한번 봤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오락실의 남자들은 화투판에서 고개도 들지 않고 배웅을 한다.

“그려. 가! 이 군.”

오락실의 남자들은 그를 이 군이라고 불렀다.

“안 따라가고 뭐 혀유? 배달도 다니는 눔이라 동네 지리 빤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불청객처럼 오락실 문밖으로 밀려났다. 처마도 없는 오락실 앞에서 비를 맞으며, 대답 없는 남자를 마주했다.

비를 맞으며 걸어간 곳은 희미하게 불이 켜진 작은 미용실이었다. 그 애는 유리로 된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뒤따랐다. 평소라면 들어갈지 말지 머뭇거렸을 테지만, 이미 비를 흠뻑 맞은 후라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바닥이 보기와 다르게 내려앉아 있어 구두가 삐끗거렸다.

그 애는 비스듬히 뒤를 돌아 내 발을 슬쩍 보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걱정 같은 걸 해서 본 건 아니라고 믿었다. 아무리 봐도 동네 양아치로 보였으니까.

미용실 안에는 남자애보다 30년은 위로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수건을 탁탁 털어 벽에 길게 매달아 놓은 빨랫줄에 널고 있었다. 미용실 원장이겠지. 힘없이 수건을 털 때마다 머리 위에 얹은 돋보기안경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오락실에 있다던 아가씨야?”

“어. 길을 잃어버렸다는데. 바보 같아 보여서 일단 데리고 왔어.”

신경질적으로 까만 후드를 벗는 그 애를 나도 모르게 공격적으로 쳐다봤다. 어디서 사람을 등신 취급을 하지? 분개하는 나를 미용실 원장이 관심 없는 표정으로 흘깃 보았다. 그녀에게서 은근하게 술 냄새가 났다. 여기까지 잘만 따라와 놓고 괜한 위기감이 들었다.

“저 서울에서 왔고, 길 잃어버린 건 맞는데 어디 모자란 사람 아니거든요.”

“근데 왜 날 따라와? 겁도 없이.”

“…….”

비도 오고, 어둡고, 여기가 어딘지를 모르니까.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 어떤 말도 나를 제대로 변호할 수 없었다. 이대로 잡혀가 어디론가 팔려 가거나 죽어도 모를 일이었다. 불현듯 두려웠다.

까만 후드를 털어 빨랫줄 위로 널고, 젖은 운동화를 벗어 벽에 대충 세워 둔 그 애가 갑자기 내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겉옷.”

“…….”

“달라고. 바닥에 물 떨어지잖아.”

젖은 트렌치코트를 벗어 건넸다. 그 애는 얼굴을 찡그리고 코트를 야무지게 털어 단단한 옷걸이에 걸어 놓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사이, 원장이 어디론가 없어졌다.

“계속 그렇게 멍청하게 있을 거야?”

그 애가 성가시다는 듯 수건을 흔들었다. 찬장에서 막 꺼내 든 바짝 마른 수건은 오락실에서 하는 수 없이 넘겨받은 것처럼 퀴퀴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내가 수건을 받자 그 애는 곧바로 뒤돌아 미용실 뒤편으로 이어진 좁은 복도로 향한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천천히 그 애를 뒤따랐다. 한 손은 주머니에 넣어 휴대폰을 꼭 쥔 채. 배터리가 나갔어도 딱딱한 금속이 대단한 무기라도 되는 것 같아서였다.

그 애는 복도 옆에 난 방으로 들어갔다. 쪼그려 앉아 뭘 뒤적이더니 금세 벌떡 일어났다.

“아, 뒤로 좀 가. 누가 나 쫓아오랬어?”

남자가 막무가내로 거리를 좁혀 오자 나는 뒷걸음질로 복도를 급하게 빠져나왔다.

“너 진짜 모지리 아니냐? 아무리 봐도 그런데.”

“너 이 녀석! 언제 봤다고 어른한테! 말 못 가려?”

내가 무어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어디선가 튀어나온 원장이 그 애의 어깨를 찰싹 소리가 나게 때렸다. 아! 내가 뭘. 따끔한 어깨를 문지르는 남자를 보며 나는 꼴좋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미안해요. 내가 막 키워서 종종 이래요.”

“아, 뭐…….”

이 집 아들이구나. 나는 괜찮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괜찮지 않았다.

원장이 김이 펄펄 나는 컵을 내밀었다. 얼결에 받아 든 컵은 말도 못하게 뜨거워 재빨리 수건으로 컵을 감쌌다.

유자 향이 코끝에 훅 끼쳤다. 원장에게선 여전히 술 냄새가 났다.

“근데 젊은 사람이 어쩌다가 길을 잃었을꼬.”

“……버스에서 자다가요. 깨고 보니까 이 동네더라고요.”

“일단 자고 내일 가요. 여기 이상한 데 아니니까. 이 건물이 우리 집인데, 요 뒷문으로 나가면 여관이야. 마침 방 남으니까. 시간도 늦어서 어딜 데려다줄 수도 없고.”

하품을 하는 원장은 몹시 피곤해 보였고, 이 상황이 귀찮은 듯했다. 당연했다. 나라도 모르는 여자가 이 시간에 집에 찾아온다면 도와주키는커녕 안으로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방 안내는 네가 알아서 해 드려.”

남자애에게 말을 전한 여자가 어둑어둑한 복도 너머 쪽문으로 나갔다. 쪽문을 흘깃 본 그 애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걸어왔다.

“귀찮게.”

그 애는 갈색 슬리퍼 신은 발을 찍찍 끌고 와 내 앞에 뭔가를 턱 내려놓았다. 그 애가 신은 것과 똑같이 생긴 슬리퍼다.

발등 부분에 굵은 줄 두 개가 겹쳐져 있고 호랑이인지 곰인지가 작게 그려져 있는. 바닥에 의도를 알 수 없는 선이 여러 개 새겨져 있고 울퉁불퉁 돌기가 튀어나온 슬리퍼.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는지 발등이 푹 꺼져 있다.

“새 거야.”

나는 쪼그리고 앉아 발등 부분을 손으로 쭉 펴고 그 사이로 발을 끼워 넣었다. 벗은 구두를 손으로 들고 일어나자 표정 없는 그 애와 눈이 마주쳤다.

“차 없어. 시내로 가는 차는. 벌써 10시 넘었어.”

“나양미술관은 여기서 얼마나 먼데?”

계속되는 상대의 반말에 나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왔다.

아무렴 어때.

“미술관? 어딘지 모르겠는데.”

“그럼 나 전화 좀.”

그때였다. 천둥만큼 큰 소리로 전화벨이 울렸다. 그 애는 미련 없이 나를 등지고 우렁차게 울리는 수화기를 잡아챘다.

“미용실은 문 닫았고, 방은 있어요.”

나를 등진 뒷모습을 본다.

20대 초반. 몸은 단단해도 쭉 뻗은 선이 여리다. 남자가 아니다. 덜 자란 애다.

비스듬히 창틀에 기댄 그 애가 나를 흘낏 돌아보며 대답했다.

“지금은 손님이 계셔서 안 되고. 급한 일 아니면 내일 아침에 가서 할게요.”

귀찮은 얼굴로, 그럼에도 할 말을 거르지 않고 용건을 마친 그 애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나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방은 이 뒤로 나가면 있어.”

문득 생각했다.

그 애는 이 마을에서 나를 불청객으로 취급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미용실 뒷문으로 나가면 소박한 마당이 있었다. 바닥이 움푹 파인 수돗가, 쌈 재료를 수확할 수 있는 텃밭, 빨랫줄이 허공을 가르는 마당, 그 마당을 둘러싼 디귿 형태의 옛날식 건물. 그 가운데 원장이 쓰는 안채가 있었고, 양옆으로 줄줄이 나붙은 방을 여관이라 불렀다.

하루만 묵으려던 여관 생활은 사흘 내내 이어지고 있었다. 전국적인 폭우로 전시할 그림이 손상될까 배송 일정이 지연된 탓이었다.

내 일정도 자연스레 미뤄졌다. 미술관은 내부 공사로 문을 닫았고, 담당자란 사람은 휴가 중이었다. 내가 갈 숙소는 여전히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아침 먹어.”

아침마다 그 애는 내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세수만 하고 안채로 들어갔다.

첫날 아침엔 그 애가 작은 상을 문 앞까지 들고 와 쿵쾅거렸는데, 그날 저녁부터는 상을 따로 차려 들고 오기도 귀찮았는지 심드렁한 얼굴로 건너와서 먹어, 하고 말할 뿐이었다. 나도 차라리 그게 편했다. 무슨 대단한 손님이라고 상을 가져오라 말라 한단 말인가.

그 애와 나는 마주 앉아 아침을 먹었다. 붓을 잡으면 잘 어울릴 길고 섬세한 그 애의 손끝을 보며 저 손으로 이 음식들을 다 차렸을까, 하는 한가한 생각을 했다. 생각만이 아니라 입으로도 나갔다.

“다 네가 한 거야?”

“비름나물 빼고 나머지는.”

“맛있네.”

상에 올라온 서너 가지의 나물 중 어느 것이 비름인지 몰랐으나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몰라도 맛은 있었다.

수저를 내려놓고 설거지라도 할까 싶어 넌지시 물었지만 번거로우니 됐다는 말이 돌아왔다. 어차피 빈말이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짧은 단잠을 잤다. 장판은 적정 온도로 데워져 있었다. 침대 체질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늘은 수챗구멍이라도 된 듯 쏴쏴 끊임없이 물줄기를 쏟아 냈다. 하릴없이 누워 있는 것도 지겨워 멍하니 일어나 앉았을 때 지글지글 소리가 났다. 비가 더 거세졌나 했는데 방문 틈새로 고소한 냄새가 새어 들었다.

방문을 열고 흘깃 넘어다보니 마룻바닥에 커다란 덩치를 웅크리고 앉은 그 애의 등이 보였다. 생선을 향해 앞발을 뻗는 고양이처럼 나도 모르게 발길이 향했다.

마주 앉았을 때 그 애의 고개가 들렸다. 빗소리가 발소리를 가렸는지 앞에 와 있는 날 보고 흠칫 놀란 눈이 귀여웠다. 그 애는 아닌 척 손목을 놀려 파전을 뒤집었다.

“우와.”

요리사도 아닐진대 가히 기술적인 손놀림이었다. 노릇노릇한 파전을 보니 군침이 돌았다.

잘 구워진 한판을 접시에 덜어 낸 뒤에도 내가 가만히 보고만 있자, 그 애가 손으로 쭉쭉 찢어서 내 앞으로 한 점 밀어 준다. 나는 냉큼 받아먹었다. 기름지고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감돈다. 입안이 뜨거워 하아, 날숨을 내뱉으며 부정확한 발음으로 물었다.

“손 안 뜨거워?”

“뜨거워.”

그러면서도 또 한 점 찢어 내민다. 나는 사양하지 않았다.

“술은 없나. 막걸리 같은 거.”

아니면 맥주라도. 파전을 오물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대자, 반죽을 부어 다시 파전을 굽던 그 애가 나를 흘깃 바라보았다. 어이없다는 얼굴에 나는 비죽 웃어 주었다.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바쁘게 살다 보니 지금처럼 쉬는 때가 오면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딱히 할 일이 없어 여관방에 혼자 앉아 그 애의 방에서 꺼내 온 책을 들춰 보기도 하고, 비가 그치고 해가 잠시 나오면 마당에 나가 앉아 있기도 했다. 미용실에 나가 원장과 몇 마디를 주고받기도 했다.

“머리 좀 잘라 줘?”

“그럴까요.”

어깨에 닿아 뻗치는 시기는 이미 지나 있었다. 모처럼 차분하게 어깨 아래를 살랑거리는 길이라 자를 생각은 없었지만 의자에 앉았다. 미용실에 손님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첫날 여관비도 안 받았고, 방값에 포함됐다고는 해도 삼시 세끼 식사까지 얻어먹는 것에 조금 마음이 쓰이기도 했다.

“안 바쁘시면 머리 좀 바꿔 볼까 하고요.”

“그래? 어떻게 하고 싶은데?”

“알아서 해 주세요. 전 잘 몰라요.”

“그럼 머리 먼저 감을까.”

원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뒷문이 열렸다. 슬리퍼 찍찍 끄는 소리가 뒤따랐다. 나는 의자에 앉아 세면대에 기대 누운 채 고개만 슬쩍 틀었다.

당신은 딱 한 번만 산다. 하지만 똑바로 산다면, 한 번이면 충분하다.

어느 금발 여배우의 명언이 프린트된 티셔츠가 보였다. 그 애가 아침에 입고 나간 옷이었다.

“담배 좀 태우고 올 테니까 머리 감겨 드려.”

원장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툴툴대며 거부할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커다란 손바닥 안에 머리가 담겼다.

미지근한 수온이 머리를 적시는 것을 느끼며 그 애를 올려다보았다. 최악의 각도에서조차 잘 빠진 턱과 높은 콧날은 변함이 없다.

“거품 들어간다.”

무뚝뚝하게 떨어지는 말에 눈을 감았다. 야무진 손놀림이 내 머리를 감겼다. 두피와 목 뒤쪽을 꾹꾹 누르는 손힘에 몸이 노곤노곤 풀렸다. 질리도록 잤는데도 수면욕이 일었다. 물기를 짜내고 수건으로 탈탈 털어 주는데도 눈이 안 떠졌다.

“야, 눈 뜨고 일어나.”

“시원해서 좋다. 손힘 세네.”

늘어지듯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담배 한 대를 태우러 갔다던 원장은 무슨 이유에선지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왜 돌아오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 대신, 너는 머리 자를 줄 몰라? 하고 물었다. 그 애는 별스러운 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 콧방귀만 뀌었다.

그 애와 나는 할 일도 없이 미용실에서 시간을 죽였다. 나는 거울 앞 의자에, 그 애는 서너 걸음 떨어진 낡은 소파에 웅크리고 누운 채였다. 노을이 미용실 안으로 들어왔다. 매일 비가 내려 얼마 만에 보는 노을인지 새삼 반가웠다.

지금은 구하는 것조차 힘들 법한 낡은 라디오에서 지역 방송이 흘러나왔다. 시끌벅적한 걸그룹 노래부터 한물간 팝송까지 선곡도 다양했다. 곡이 바뀌는 동안 눈이 계속 마주쳤다.

“뭘 봐.”

“그러는 넌.”

그 애가 여전히 웅크린 채로 나를 보고 있다. 문득 이 애가 왜 나를 너라고 부르는지 궁금해졌다. 기분이 나빠서는 아니었다.

“너, 왜 자꾸 나한테 너라고 해?”

어떻게 봐도 내가 연상인데, 존대는커녕 너라고 부르는 이유가 정말로 궁금했다.

“설마하니 나한테…….”

그 애가 비스듬히 몸을 일으켜 제 얼굴에 팔을 괴었다.

“아줌마 소리 듣고 싶은 건 아니지?”

“아줌마 소리 들어도 별로 이상할 나이는 아냐.”

심상한 내 대답에 그 애는 픽 웃었다.

“웃기고 있네. 너라고 부를 때 고마워해라.”

비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짐을 챙겨 오갈 곳 없던 나의 나흘을 책임져 주었던 방을 나섰다. 마당을 기웃거려도, 미용실에도 그 애는 보이지 않았다. 원장에게 숙박비와 감사하단 말을 건네면서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덕분에 덜 심심했다.

그 한마디라도 하고 싶었는데. 어쩐지 찝찝한 기분에 발걸음이 느려졌다. 어차피 급할 것도 없었다. 그런 생각으로 마루에 앉아 있었다.

“뭐냐. 이 시간에 다 일어나 있고.”

큰 그림자가 앞을 막아섰다. 올려다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았다. 마당 수돗가에 놓인 비누 향이 코앞에서 은은하게 끼쳐 왔다.

“넌 아침부터 어디 갔다 와.”

“어디 갔다 오면.”

이른 아침부터 뭘 하고 왔는지 턱 끝에 땀이 맺혀 있었다. 그 땀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그 애가 눈을 치켜떴다. 표정이 왜 저 모양이야. 그 애의 삐딱한 눈초리와 말투가 목구멍까지 찼던 인사치레를 누른다.

“왜 시비조야. 마지막이라 잘 먹고 잘 자고 간다고 인사 할랬더니.”

“왜 마지막인데?”

“왜냐니. 가야 하니까.”

구시렁대는 내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 애가 나를 스쳐 지나 앞장섰다. 말 그대로 마지막인데 괜히 짜증을 냈나 싶다가도, 어차피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 뭐 어떤가 싶기도 했다.

그때, 그 애가 흘깃 돌아 내게 시선을 주었다.

“길도 모르면서.”

내가 길을 잃었던 그 폭우의 밤과는 달리 오늘은 맑았고 아직 해도 지지 않았다. 휴대폰 배터리도 나가지 않았고, 시장 근처엔 택시도 다녔다.

“안 따라오고 뭐 해.”

그러나 나는 사양하지 않고 그 애를 뒤따랐다. 그 애는 시장길 사이로 들어가지 않고, 시장 밖으로 돌아나가 큰길로 걸었다. 길이라고 해 봐야 아스팔트로 포장된 잘 닦인 도로가 아니라 흙길을 넓게 다져 놓은 시골길이었지만 걸을 만은 했다.

“느려 터져서는.”

“나는 이게 있잖아.”

앞장섰던 그 애가 성큼성큼 돌아와 내 손에 들린 짐 가방을 빼앗았다.

“난 또 얼마나 무겁다고.”

든 것이라고는 옷가지 몇 벌 뿐이라 무거울 것도 없었다. 그래도 짐은 짐인지, 손이 홀가분해지자 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초록빛을 띤 벼가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걸 보며 나는 걷고 또 걸었다.

그 애는 종종 걸음을 멈추고 논둑에 우뚝 서 있다가 다시 걷곤 했는데, 내가 거리를 좁힐 때에서야 다시 앞장선다는 것을 아는 데까지는 제법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런 기다림이 문득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여기서부터는 갈 줄 알아.”

“…….”

“가방.”

고맙다고 말하기 어색해 손을 뻗었다. 그 애는 아무 말 없이 짐 가방을 내 손에 턱 쥐여 주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커다란 등판이 빠르게 작아졌다.

그 애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고, 나도 딱히 그러기를 바라지 않았다.

미술관에서 내어 준 숙소로 들어갔을 때 천둥 치는 소리를 들었다. 환기를 시킬 겸 창문을 열었을 때 나는 이미 젖은 땅을 보았다. 그날 밤도 진득이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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