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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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이 끝나기도 전에 칙 공작의 배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고고한 학처럼 리안의 선단을 껴안으려 한다고 해야 할까?
“모르는 척하기엔 썩은 고기의 크기가 좀 큰 것 같군요.”
리안은 그리 말하고는 통신을 끊었다.
더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다.
상대는 이미 행동으로 자신의 뜻을 전했다.
“거참… 저 양반 내 명성을 못 들었나 보네요.”
“그래도 저 정도면 해 볼 만하지 않을까?”
항법사가 상대의 전력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럴 것이 전력이 만만치 않았다.
이쪽은 고잉미샤호를 제외하고 모두 상선인 데 반해 상대는 대부분 군함이거나 무장상선이었다.
원래라면 상선의 포문은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상선 중에서도 허가를 받은 상선들은 포문의 숫자를 늘려도 된다.
“무장도 그렇고 숫자도 두 배나 되긴 하네요.”
전열함 다음으로 큰 배 몇 척은 뒤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다시 말해 그 배들에 물건이 잔뜩 실려 있단 말.
그런 배가 한 둘이 아니니 칙 공작가에서도 상당히 큰 상행일 거다.
당연히 모든 역량을 다해 저 상선들을 호위하는 것일 테고.
“쐐기형으로 진을 펼칩니다.”
리안은 즉시 밀라노정의 선단에 명령을 내렸다.
지금까지 함께해 온 시간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그동안 간단한 진형은 서로 맞춰 봤다.
굳이 공을 들일 필요 없이 진법은 이동 중에도 충분히 연습할 수 있으니.
누가 감히 공왕의 배를 막겠느냐마는 심심하기도 했고 혹시나 몰라 해 본 것이었다.
‘이렇게 써먹네.’
리안의 말에 항법사는.
“저 치들을 믿을 수 있겠어?”
“어차피 운명의 공동체에요.”
리안에게 가장 콩고물을 많이 얻어먹은 상단이 어디일까?
아니, 리안이 없으면 어떤 상단이 가장 피해를 볼까?
리안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 보아도 밀라노정 상단이라 말할 것이다.
“하긴. 그렇긴 하겠네.”
“전속 전진합니다.”
진형이 완성되는 것을 본 리안은 곧장 돌격 명령을 내렸다.
물론 가장 선두에는 당연히 고잉미샤호가 앞장섰다.
그걸 지켜보던 칙 공작은.
“크하하하!! 저런 멍청한 놈을 봤나. 언론에서도 물고 빨고 하던 놈이 저런 애송이였다니.”
배의 전력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무장상선은 군함만큼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화력을 낸다.
반면 상대는 일반 상선.
그것도 모자라 이쪽은 숫자도 많다.
압도적인 포문의 숫자.
더군다나.
“하긴 저깟 놈이 바다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고. 이런 진법을 본 적이나 있을까 몰라.”
“그러게 말입니다. 이걸 돌파할 생각을 하다니……. 숫자도 적은데 말입니다.”
“조금 두들기면 금방 와해될 테지.”
칙 공작과 부관은 자신만만했다.
이 전법을 아는 자는 아마도 없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껏 자신들이 이걸 펼치고도 살아남은 적선은 없으니까.
그중 몇은 저들처럼 돌파를 시도한 적들이 몇몇 있긴 했다.
‘U’ 모양 안으로 들어오면 압도적인 화망에 공포로 금방 와해된다.
“적선 빠르게 접근합니다.”
“아직. 조금 더 기다려.”
“알겠습니다.”
그렇게 리안의 선단은 빠르게 ‘U’ 모양 안으로 제 발로 기어들어 왔다.
힘들게 다가가 상대를 가둘 필요도 없다.
“선회한다.”
“신호를 하겠습니다.”
칙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살짝 구부러져 있던 진형이 대각선으로 비틀어지며 확실한 ‘U’ 모양이 되었다.
살짝 비틀어진 이유는 마포가 달린 옆면으로 돌리기 위해서다.
제자리에서 180도로 돌리지 못하기 때문.
끄르르륵!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숫자에서 압도적으로 많으니 전체적으로 움직여도 여전히 포위망 안이었다.
“발포!”
“알겠습니다. 전 함대, 발포!”
통신 마법사가 각 함선에 명령을 하달했다.
퍼버버버벙!!!
일제히 마포가 불을 뿜었다.
당연히 이걸 그냥 맞아 줄 리안이 아니었다.
“일제 실드 전개.”
“아…알겠어. 일제 실드!”
리안도 명령을 내렸고. 통신 마법사가 전달했다.
두두두둥!!!
밀라노정의 선단에선 일제히 전방에 있는 실드 탄을 앞으로 펼쳤다.
퉁!! 콰과과과광!!
포탄이 실드에 맞아 강한 진동을 울리며 바다에 빠진다.
그걸 본 칙 공작은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그래도 명성이 헛된 것은 아니네. 이렇게 제대로 대응을 하는 놈들은 얼마 없거든.”
가끔 통솔력이 뛰어난 상대를 만나면 일제 사격에 일제 실드로 대응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자율 사격.”
“알겠습니다. 전 함대 자율 사격.”
명령이 하달되자 무장상선들은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사격을 시작했다.
펑! 펑! 퍼버벙! 펑!
사격 통제를 하지 않는 이유는 각 함선의 발사 속도가 제각기여서 비효율적이기 때문.
물론 그것만으로 충분한 화력이었다.
실드는 거의 일회용…….
퉁!! 투두두둥!
“음?!”
일줄 알았는데, 다시 그들의 앞에 실드 장막이 펼쳐졌다.
상대도 나름 생각해 나눠서 쏜 것이다.
처음 실드를 펼칠 때 일부는 펼치고 일부는 펼치지 않았지만 나름 선방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도적이었던 것이었다.
“쯧!”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그래. 알아. 저 실드 막 너머로 오면 저놈들도 끝이니까.”
리안이 이끄는 선단은 전진했고. 실드는 바닥 위에 선을 긋듯 제자리를 지켰다.
당연히 실드를 넘어서야 하지만, 모든 실드를 다 써 버렸다.
“네. 바깥의 배 몇 척이 갈려 나가면 저들도 백기를 흔들 것입니다.”
‘U’ 자 안으로 들어온 적들이 ‘0’ 모양으로 뭉쳐서 들어오는 중이었다.
당연히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망은 밖에 있는 배들이 맞을 수밖에 없다.
그 밖의 배들은 당연히 희생될 수밖에 없는 처지.
어찌 보면 저 진형의 묘리는 그들을 희생하고 알맹이가 적에게 닿게 하는 방패.
문제는 그게 이론과 달리 실전에선 쉽지 않다는 것이다.
몇 대 맞는 순간 아찔해지고. 침몰할 것 같으면 속도를 줄이며 백기를 올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어어어?!! 공작 전하… 적선 2척 침몰!!”
저들은 끝까지 두들겨 맞고 침몰하는 것을 선택했다.
“다…당황하지 마라. 어차피 이곳까지 당도해도 우리가 더 숫자가 많다.”
그래. 그것이 정상이다.
가뜩이나 숫자가 차이 나는데, 저렇게 몇 척이 침몰한다면 더 크게 차이가 날 것이다.
“생각보다 피해가 적었네?”
다만, 리안은 반대로 생각했다.
밀라노정의 상선들이 생각보다 더 이를 악물고 리안의 명령에 잘 따라 줬다.
“그냥 몇 대 맞아주고 백기나 올리지. 아깝게…….”
배도 배지만, 동방에서 싣고 온 화물들이 바다 위에 둥둥 떠다녔다.
저걸 율 대륙까지 무사히 가져간다면 최소 100배의 이득을 볼 것이고 유통까지 직접 한다면, 500배까지 남겨 먹을 수 있다.
참고로 밀라노정은 유통 직전까지 관여할 수 있기에 300배는 우습게 남겨 먹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개땡큐죠.”
리안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안타깝게도 칙 공작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이 진형의 치명적인 약점을.
‘태평한 걸 보니 뚫리는 순간 역전된다는 걸 모르시나 보네. 뚫려 본 적이 없나?’
“모두 따라오세요. 빨로 미~”
부화하기 전의 병아리처럼 알 껍질에 보호받던 고잉미샤호가 알을 깨고 선두로 치고 달렸다.
그 뒤로 밀라노정의 상선들이 새끼 오리처럼 따랐다.
S.
그들은 마치 뱀처럼 지그재그로 한쪽의 배들을 관통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껴 두었던.
퍼버버버벙!!!
마포들을 연신 터뜨렸다.
끼기기기긱!!! 쾅!!!
지근거리에서 쏴 대는 마포에 심하면 단 몇 발로 침몰되기도 했다.
먼저 사격을 시작한 칙 공작의 배들은 마포가 달아올라 연사 속도가 떨어졌지만, 리안 쪽은 쌩쌩했다.
“차례로 쏘세요!!”
막무가내로 쏘지도 않았다.
효율적이게 순차적으로 쐈다.
첨벙! 첨벙!!!
칙 공작의 배들이 빠르게 침몰하거나 전투 불능이 되었다.
“뭐…뭣들 하는 거야?!! 반격! 반격하라고!!!”
“그것이… 아군과 섞여 있어서…….”
리안은 반으로 갈라진 적의 한쪽 날개만 파고들었음에도 적들은 도와주지 못했다.
‘S’ 모양으로 덩굴을 타고 오르듯 칙 공작가의 배들과 완전히 엉켜 버렸다.
당연히 반대쪽 날개의 배들은 도와주고 싶어도 돕지 못했고.
더 뼈아픈 것은 제압한 그들을 인질 삼아.
펑! 펑! 펑!!!
신나게 반대를 향해 마포를 갈겼다.
콰과과광!!!
코앞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근거리.
유효타는 심심치 않게 나왔다.
“공작 전하!! 전하!!!”
그걸 넋이 나간 채 지켜보는 공작.
부관이 공작을 흔들어 깨웠다.
“정신 차리십시오. 전하!!”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어떻게 키운 해군 전력인데, 이렇게 말아먹다니.
다시 키울 걸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정신 차리십시오. 남은 병력이라도 건사해야 합니다!!”
“뭐?!! 그…그래!”
그러나 이미 늦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쏙 빼놓은 상선들은 고잉미샤호를 필두로 빠르게 다가왔다.
“후…후퇴…….”
그러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곧 나머지 날개와도 엉키기 시작했고 쉽게 몸을 빼기 힘들었다.
“이런……!”
“평정을 찾으십시오. 전하. 피해를 많이 봤긴 하지만 그래도 숫자는 엇비슷합니다!!!”
“그…그래!! 우리가 더 유리해!”
생각해 보니 절망적일 것까지는 없었다.
힘들게 키운 무장상선들이 갈려 나가 상실감에 정신 줄을 잠시 놓긴 했지만, 저들은 단 한 척을 제외하고 그냥 상선이지 않은가.
그 말은 오히려 자신들이 유리하다는 뜻이다.
‘그래. 공왕 놈만 잡으면 몇 배는 남는 장사다!’
그리 판단한 공작은 털어 버리고 제대로 싸울 생각이었다.
‘내가 언제부터 유리한 판에서 싸웠다고.’
생각해 보면 옛날에는 자신보다 유리한 적들과 싸워 곧잘 이기곤 하지 않았던가.
어느 순간부터 늘어난 전력으로 찍어 누르듯 싸웠더니 그것이 익숙해진 모양이지만.
‘감히 누구 앞에서 이런 난전을?’
공작은 즉시 진형을 훑어보며 명령을 내리고자 했다. 그런데…….
샤샤샤샥! 펑!! 샤샤샤샥!! 펑! 펑!!!
웬 배 한 척이 날렵하게 요리조리 움직이며 아군의 배 밑창에 마포를 한두 발씩 날려 주며 움직였다.
“뭐…뭐야?! 저게…….”
서로 엉켜 난장판이 된 상대.
배들 사이에는 공간이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
조금 더 싸우다 보면 전장은 백병전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고잉미샤호는 그걸 속도도 줄이지 않고 움직이며 치명상을 먹이고 있었다.
콰과과과광!!!
어떤 배는 한 발에 완전히 기울어져 바다에 눕고 있었다.
“저…딴 게…… 가능할 리가.”
다시 눈이 흐리멍덩해지는 공작.
“공작 전하!! 정신을 차리… 빌어먹을!!”
부관은 눈이 완전히 가 버린 공작을 보며 욕을 내뱉었다.
“새우가 맛있을까? 홍합이 맛있을까? 소라 껍데기는 별로인데…….”
아무리 흔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부관은 이를 악물고 공작을 내버려 두고는.
“전 함대에 알려!! 기함을 기점으로 강제로 A 지점으로 움직이게!!!”
“…….”
그 말에 통신 마법사는 멀뚱멀뚱 부관을 바라봤다.
“공작 전하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손가락만 빨다가 바다에 가라앉고 싶어?!!!”
“아…아닙니다.”
통신 마법사는 즉시 무선으로 다른 배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 즉시 배들은 중간에 적함이든 아군 함이든 가리더라도 급발진 난 자동차처럼 움직였다.
쿵! 쿵!! 쿵!!
“뭐……뭐야?!!!”
당연히 밀라노정의 상선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모든 배들이 서로 엉겨 붙었다.
“제기랄. 백병전!!! 모두 백병전을 준비하라!”
각 상선의 선장들은 매뉴얼대로 명령했다.
배가 서로 붙어 버린 이상 상식적으로 남은 것은 이것밖에 없다.
“선장님!! 우린…….”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그렇다고 이 상황에 별달리 방법이 있나?”
“죄송합니다. 선내 방송을 하겠습니다.”
밀라노정의 상선들은 승무원의 숫자가 적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상선인 데다가 탐사에 가까운 편성을 했다.
당연히 중간에 보급을 받지 못할 것까지 생각해 숫자를 최대한 줄였다.
지금은 그게 독이었다.
“거참. 재밌게 나오네.”
다만, 리안은 그걸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젠장! 웃을 때가 아니야. 저놈들에게는 전열함이 있다고!!”
항법사가 급히 조언을 했다.
저들이 막무가내로 모든 배를 엉켜 버리게 한 것은 백병전에 자신이 있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거의 중심부에는 적들의 기함인 전열함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바다에 떠다니는 성!
“저것들이 위에서 내려다보며 지원 사격을 할 거야.”
전열함은 1~2층 더 높다.
마포의 숫자도 많다.
마치 성에서 공격을 하듯 적을 향해 마포를 쏴댈 것이다.
가뜩이나 숫자도 적은 리안 측은 뼈아프다.
“오. 좀 내다볼 줄 아시네요. 많이 컸어요.”
“크긴 뭘 커! 빨리 엉킨 거 풀고 물려야 하는 거 아니야?”
“물리긴 뭘 물려요.”
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흐리아 민. 선수 교체다.”
“넵!”
조종석에서 자리를 비켜 주자 흐리아 민은 눈을 초롱초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