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나흘간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루시아와 헤르윈은 마차에 올랐다.
루시아는 마차에 제대로 앉지 못하고 헤르윈의 무릎에 머리를 댄 채 누워있었다.
밤만 되면 남편의 탈을 쓴 짐승이 계속해서 덮치는 바람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허리에 통증이 일었다.
신혼여행 둘째 날에는 누구랄 것 없이 모두 고삐가 풀려 하루를 꼬박 방에서만 지냈다.
황홀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짐승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아는 지끈거리는 허리를 통통 두드렸다. 그러자 헤르윈이 긴 팔을 뻗어, 루시아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허리 많이 아파? 내가 안마라도 해줄까?”
“안마해준다는 사람이 왜 엉덩이에 손이 가 있어?”
“잘못 간 거야. 내가 봐 줄게.”
일부러 만진 것이 틀림없을 텐데 헤르윈은 능청스럽기만 했다. 이내 그리 세지도 않은 악력으로 허리를 주물러 주었다.
루시아는 눈을 감고 그의 손길을 느꼈다.
“으음, 거기 좋아.”
딱 불편한 곳을 짚어서 눌러주자 뭉친 부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을까? 조금씩 헤르윈의 손이 옆구리 쪽으로 내려왔다.
처음에 의아함만 느끼던 루시아는 눈을 가자미처럼 뜨며 베고 있던 헤르윈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얏!”
“진짜 틈만 나면 그럴 거야?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아픈 건데!”
“하지만, 자기야. 나 혼자만 좋아한 건 아니었잖아.”
루시아는 아예 몸을 뒤집어, 헤르윈의 얼굴을 응시했다. 헤르윈은 눈을 깜빡이며 붉은 눈을 빛냈다.
애교라도 부리는 모양이지만, 저 눈빛에 넘어가 여러 번 후회했다. 또 넘어가면 그때는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나 오늘은 진짜 피곤해. 그만해.”
루시아가 손을 뻗어, 헤르윈의 코를 잡고 나서야 헤르윈이 툴툴거리며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루시아를 쳐다보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 마리의 고양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한 손이 계속 머리를 어루만지자 눈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졸려?”
“……으응.”
“요 며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긴 했지.”
“……누구 때문인데.”
졸려서 그런 걸까. 투정 부리는 듯한 말투에 헤르윈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예쁘래? 네가 너무 예쁘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잖아.”
웃음기 섞인 말에 루시아는 짐짓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내 헤르윈의 품에 깊이 얼굴을 묻었다. 신혼여행 내내 잠을 푹 자지 못했기에 피곤했다.
“자면 안 되는데…….”
텔레포트를 이용하면 수도에 도착하는 건 금방일 것이다. 수도에는 딱 하루만 들르고 바로 북부로 갈 생각이기에 시간을 쪼개 부모님께 인사도 해야 하고, 친구들을 만나 선물도 주어야 한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눈이 계속 감겼다.
“자. 내가 도착하면 깨워줄게.”
“하지만…….”
“괜찮으니까.”
헤르윈의 따뜻한 손이 눈가 위로 올라왔다. 덕분에 완전히 시야가 깜깜해지자 루시아는 금세 단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헤르윈은 고운 소리를 내며 잠든 사랑스러운 부인을 보고는 마부에게 조용히 명령했다.
“천천히 가도록.”
마부가 말을 천천히 몰기 시작했다. 그 덕에 마차의 흔들림이 잦아들었다.
원래대로라면 1시간 내에 도착하겠지만, 헤르윈은 넉넉하게 2시간으로 잡으며 연신 루시아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루시아가 피로를 푸는 2시간 동안, 헤르윈도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그간 쌓인 피로를 풀어냈다.
* * *
축 늘어진 팔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코끝에는 익숙한 머스크향이 맴돌았다.
꼭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처럼 몸이 조금씩 흔들렸지만, 퍽이나 안정적이어서 불안하지는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잠깐 망설이던 루시아는 퍼뜩 눈을 떴다.
“아, 깼어?”
시야가 흐릿한 와중에 헤르윈의 얼굴이 선명했다. 아직 잠이 다 깨지 않은 루시아는 멍하니 헤르윈을 보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여긴…….”
“아그네스 저택이야.”
“언제 도착했어?”
“방금 전에. 너 자는 줄 알고 방에 데려다 놓으려고 했어. 어머님, 아버님께 인사라도 할래?”
“으응…….”
루시아는 두 눈을 비비며 조심스레 헤르윈의 품에서 내려왔다. 잠깐 비틀거렸지만, 잠이 좀 깨고 나니 괜찮아졌다.
헤르윈의 말대로 여긴 너무나도 익숙한 자신의 집이었다. 그것도 제 방으로 가는 복도였다.
“어머니랑 아버지 모두 집에 계셔?”
“응, 많이 피곤할 테니 깨우지 말라고 하셨어. 지금 1층에 계실 거야.”
“깨우지 그랬어. 이대로 밤까지 계속 잤으면 어쩌려고.”
“미안, 네가 너무 깊이 자는 바람에…….”
다음부터는 그냥 깨워달라고 말한 루시아는 헤르윈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1층에서 제일 넓은 크기를 자랑하는 방에 들어가자 벽난로 앞에 모여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는 부모님이 보였다.
“어머니, 아버지.”
두 사람은 루시아의 목소리에 곧장 반응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벌써 깬 거니? 더 자지 그랬어.”
“그래, 신혼여행 때문에 피곤했을 텐데.”
루시아의 손을 붙잡으며 쉬라고 말을 하곤 했지만, 두 사람의 얼굴에는 만연의 미소가 띠어져 있었다.
“내일 바로 북부로 떠나야 하는데 잠 때문에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죠. 저희가 선물 사 왔어요! 혹시 헤르윈이 벌써 드렸나요?”
“그래, 지금 풀어보고 있단다.”
“찻잔이 예쁘더구나. 앞으로 이 찻잔만 사용해야겠어.”
부모님께 드릴 선물로 몇 시간이고 고민하여 고른 찻잔과 그 외의 섬에서 유명한 특산물들을 사 왔었다.
기뻐하는 부모님을 보고 흐뭇해하며 못다 한 이야기를 했다.
그래봤자 헤어진 지 고작 나흘밖에 되지 않아서 얘기할 만한 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내일 몇 시에 출발할 생각이니?”
“음, 글쎄요. 헤르윈, 몇 시에 출발할 거야?”
헤르윈에게 대답을 넘기자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슬슬 폭설이 시작되는 시기라 일찍 가는 게 좋기는 한데… 점심은 먹고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봄이 되기 전까지는 내려오기 힘들 테니 조금이라도 더 있다가 가야죠.”
“그래, 잘 생각했다. 올라가면 바로 공작위를 물려받는다고 했지?”
“네, 당장은 아니고 일단 아버지의 일을 인계받으면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나갈 것 같아요. 수도에 내려오기 전에는 완전히 공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게…….”
헤르윈과 요한이 미래에 대해 진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줄리안이 흐뭇한 얼굴로 루시아에게 속삭였다.
“두 사람, 이제 어색해 보이진 않지?”
“네, 사이가 좋아져서 다행이에요.”
“그거 아니? 저번에 페네우스 공작 부부가 우리 집에 머물렀을 때, 공작님이랑 하루 종일 헤르윈 얘기했던 거?”
“결혼식 날에요?”
“그래. 헤르윈이 최근에 수도에 나타난 몬스터를 토벌하면서 다시금 인기가 많아졌거든. 어느 새부턴가 저이도 헤르윈이 자기 사위라면서 자랑하고 다니더라고.”
“어머.”
처음에 자신과 헤르윈의 결혼을 반대하던 것을 떠올리면 놀라운 발전이었다. 실제로 헤르윈과 얘기하는 요한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
“저녁은 여기서 먹을 생각이니?”
“아뇨. 친구들이랑 만나서 먹기로 했어요. 내일은 따로 시간이 안 날 것 같더라고요.”
“그렇구나. 너희도 참 아카데미부터 지금까지 사이좋게 지내다니 대단하구나. 서로 가정을 이루고 나면 멀어질 수도 있으니 지금 인연을 소중히 여기렴. 나중에는 지금 같은 친구를 찾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네, 알고 있어요. 안 그래도 편지 자주 하려고요.”
루시아는 줄리안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시간이 훌쩍 흘러 저녁이 되었다.
신혼여행 가기 전에 미리 약속해 두었기에 오늘은 에단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럼, 저희 갔다 오겠습니다.”
“그래, 잘 놀다 오렴.”
부모님의 배웅을 받으며 정문으로 향했다. 따뜻한 남부 지역에 있다가 와서 그런지 추위를 더 타는 것 같았다.
루시아의 떨림을 눈치챈 헤르윈이 찬기가 스미지 않도록 그녀의 옷을 여며주었다. 마차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그때, 문이 열리며 루카스가 나타났다.
피곤한 기색이던 루카스가 루시아와 헤르윈을 보고 얼굴을 환하게 폈다.
“얘들아! 오늘이 돌아오는 날이었구나?”
“오빠, 안녕.”
“지금 퇴근하는 길이야?”
“응, 맞아. 너희는 보니까… 어디 가려는 것 같네?”
“친구들이랑 저녁 약속 있어.”
“오빠도 괜찮으면 같이 갈래? 애들도 반가워할 거야.”
루카스가 움찔 떨며 티 나게 그녀의 눈을 피했다. 의아함을 느끼기도 전에 루카스가 손을 내저었다.
“난 됐어. 너희들끼리 갔다 와.”
“그래? 알겠어.”
루카스가 자기는 들어가 보겠다며 걸음을 옮겼다. 서서히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루시아와 헤르윈은 서로 속삭였다.
“오빠, 무슨 일 있나?”
“저번에 아리스타랑 무슨 일 있는 것 같았다며. 그거 아니야?”
“그런가……?”
잠깐 둘에 대해 생각을 해봤지만, 생각한다고 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건 아니기에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마차가 오고, 헤르윈과 함께 에단의 집으로 향했다.
저녁 7시. 에단의 집에는 그의 애인인 헬라와 다른 친구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루시아와 헤르윈은 그들을 얼싸안으며 여행에서 사 온 선물들을 하나씩 주었다.
그렇게 난리를 피우며 헤어졌다가 겨우 나흘 만에 만나게 된 거라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친구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 자체로 좋았기에 민망함은 금세 사라지고 여느 때처럼 편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모두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루시아의 눈에 잠시 자리를 비우는 아리스타가 포착됐다.
루시아는 조심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아리스타.”
“아, 루시아.”
“화장실 가는 거야?”
“아니, 술을 좀 마셨더니 열이 올라서 테라스에 가려고. 너도 같이 갈래?”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옆에 섰다. 아리스타를 따라 테라스로 나오자 시원함을 넘어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쳤다.
“으으-”
“자, 이거라도 덮어.”
아리스타가 자신이 입고 있던 재킷을 루시아에게 벗어 주었다. 거절하려 했지만, 아리스타가 한사코 건네는 탓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혼하는 걸 봤는데도 뭔가 실감이 안 난다. 너희가 가정을 이루다니.”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아침에 헤르윈 얼굴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걸?”
“결혼하니까 어때? 좋아?”
“음…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래도 헤르윈이 여보라고 부르면 좋기는 해.”
“으으- 헤르윈이 그 말 할 때마다 소름이 돋더라.”
아리스타가 오글거린다며 소름 돋은 팔을 쓸어내렸다.
“저기, 아리스타.”
“응?”
“저번에 내게 오빠를 붙잡아달라고 했었잖아.”
아리스타가 멈칫했지만, 루시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오빠랑 얘기는 좀 했어? 둘이 싸운 건 아니지?”
“음…….”
아리스타는 잠시 말을 골랐다. 하지만, 이내 의미심장한 얼굴로 루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싸우진 않았어. 오라버니가 그대로 도망가 버렸거든.”
“그래? 얘기는 잘 했고?”
“어떻게든?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뭔가 아리스타의 얼굴이 씁쓸해 보였다. 헤르윈에게서 아리스타가 루카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익히 들었지만, 그녀에게 차마 아는 척 할 수는 없었다.
“루시아. 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뭔데?”
“단 한 번도 내가 미웠던 적 없어?”
너무 뜬금없는 질문이라 루시아는 어리둥절했다.
“한때, 헤르윈이 나를 좋아했잖아.”
뒤이어 이어지는 말에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말을 잃었다.
“그 사실을 다 알았으면서도, 내가 밉지 않았어?”
순간 두 시선이 허공에 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