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129)

<125화>

“정말 가는구나…….”

“여행 끝나면 잠깐 수도에 들를 거지?”

정신을 못 차리는 친구들을 깨우고, 같이 식사 자리를 가진 헤르윈과 루시아는 신혼여행 길에 오를 준비를 했다.

주인이 없는 곳에 머무를 수는 없기에 다른 친구들도 마차를 불러 떠날 참이었다.

이제는 정말 앞으로 얼굴 보기 힘들어질 것이다.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친구들과 헨리, 그리고 루카스는 헤르윈과 루시아를 한차례 안아주며 인사했다.

“루시아, 꼭 수도에 들러야 돼요. 알겠죠? 언제 다시 내려올지 모르잖아요!”

“……응, 최대한 시간을 내볼게.”

아침에 루카스에게 한 말이 있어서 루시아는 슬쩍 그의 눈치를 봤다. 그리고는 곁눈질로 루카스와 아리스타를 살폈다.

두 사람의 사이가 평소보다 냉랭해 보였다. 아리스타의 말대로 루카스를 붙들어놓기는 했는데 제대로 대화라도 나누긴 한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래도 둘 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서로 사이가 나빠진 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루시아, 가기 전에 부모님께 들르고 갈 거지?”

루카스가 앞으로 다가와 조금 섭섭한 눈으로 루시아를 바라봤다. 루시아는 곧바로 정신 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부모님께 인사는 해야지. 그리고 어머님이랑 아버님도 거기에 계시니까.”

어제, 친구들이 페네우스 저택으로 올 것을 예견한 페네우스 공작 부부는 아그네스 가에 머물겠다며 자리를 비워준 터였다.

“이제 정말 출발하셔야 합니다.”

제롬이 시간을 확인하고 재촉했다. 이미 예정 시간보다는 훨씬 늦은 상태였다. 제시간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헤르윈과 루시아는 섭섭해하는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인사하며 마차에 올랐다.

“나중에 또 보자.”

“결혼식 날짜 잡히면 꼭 알려줘야 돼! 알겠지?”

헤르윈과 루시아는 창문에 붙어, 애들에게 못다 한 이야기를 했다. 친구들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당연하지! 너희에게 제일 먼저 편지 보낼게!”

“올 때 우리 선물 잊으면 안 된다!”

“편지 자주 하자!”

“누나! 만약에 형이 서운하게 하면 나한테 말해!”

마차가 움직이고 친구들과 헨리, 루카스의 얼굴이 서서히 멀어졌다. 왠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몸을 휘감았다.

“조금…….”

“시원섭섭하네.”

헤르윈도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표정이 조금 오묘했다. 서로를 쳐다보던 두 사람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서로의 손을 꽉 잡았다.

두 사람은 바로 아그네스 저택에 들러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부모님들은 덕담과 함께 신혼여행을 잘 보내라 격려하였고, 가서 맛있는 거라도 사 먹으라며 용돈을 얹어주었다.

뒤늦게 마차에서 용돈을 확인한 루시아가 기겁할 정도의 거금이었다.

오후 2시경, 신혼부부를 태운 마차가 수도를 벗어났다. 그들이 신혼여행지로 고른 곳은 최근에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는 남부지역의 섬이었다.

바로 몇 달 전에 텔레포트를 설치하여 마차를 오래 타지 않아도 단숨에 갈 수 있었고, 사시사철 따뜻한 기후를 즐길 수 있는 여행지였다.

텔레포트가 있는 곳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섬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텔레포트를 탄 직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루시아의 입에서 감탄이 쏟아져 나왔다.

“세상에…! 헤르윈 저기 좀 봐! 저게 바다인가 봐!”

여태까지 가본 곳이라고는 북부와 수도가 전부인 루시아에게 바다는 신비롭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헤르윈도 마찬가지였기에 그도 루시아만큼이나 들뜬 얼굴로 새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진 바깥을 구경했다.

미리 예약해 둔 숙소에 짐을 풀고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여행에 나섰다.

옷을 몇 벌이나 껴입어야 하는 수도에 비해 이곳은 비교적 따뜻해 여름처럼 옷을 가볍게 걸쳐 입어도 괜찮았다.

쏴아아-

“와아! 엄청 차가워! 아앗! 밀려온다! 밀려온다!”

푸르른 바다를 본 루시아는 아이처럼 신나며 맨발로 바다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헤르윈도 똑같이 신발을 벗어 던지고 그녀와 함께 바다에 발을 담갔다.

“그러네, 엄청 시원하다.”

“바다 좋다. 이런 풍경을 보고 깨어나면 엄청 좋을 것 같아.”

“그래? 그러면 여기에 별장이라도 지을까?”

“응?”

“아직 개발이 다 되지 않았으니 분명 괜찮은 땅이 있을 거야. 없더라도 웃돈을 더 얹어주면 충분히…….”

“돼, 됐어! 별장을 갖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니야! 별장 관리하는 것만 해도 돈이 얼만데…….”

“돈 걱정을 왜 해. 우리가 누군데.”

루시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래, 페네우스 가문의 재력이라면 여기에 별장 하나 짓는 거 정도는 별거 아닐 것이다.

그래도 루시아는 고개를 내저으며 헤르윈의 팔을 붙잡았다.

“우리 이번엔 저기 가 보자! 제롬이 그러는데 유명한 절벽이 있대.”

이곳에 더 있다가는 정말 별장을 짓겠다고 나설 것 같아 루시아는 최대한 말을 돌렸다. 헤르윈이 그걸 모를 리 없었지만, 이번엔 그냥 그녀에게 넘어가 주기로 했다.

얼마 돌아다니지도 않았는데 벌써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숙소에서 짐을 풀고 나왔을 때가 오후 4시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사흘은 더 머물기로 했으니 지금의 아쉬움은 내일 채우기로 하고 낮과는 다른 매력을 가진 밤거리를 거닐었다.

최근에 관광사업에 힘을 쓰고 있다는 것이 거짓말은 아닌지 거리가 각종 상점들로 인해 대낮처럼 환했다.

게다가 곳곳에는 노점들도 있어, 즐길 거리와 먹을 것도 많았다. 가끔은 길거리에서 공연을 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와아아!”

특제 핫소스가 발라진 꼬치를 먹으며 루시아는 앞에서 펼쳐진 마술쇼에 감탄했다.

눈앞에서 사람들이 불을 뿜고, 아무것도 없던 모자에 비둘기가 쏟아져 나왔다.

수도에서도 몇 번 보던 마술쇼였지만, 장소가 달라서 그런가 유독 특별하게 느껴졌다.

“헤르윈, 재밌다! 그렇지?”

“응, 아마추어는 아닌 것 같아.”

헤르윈도 재밌는지 즐거운 표정으로 마술쇼를 관람했다. 그때, 얼굴에 물방울과 별 문양을 그린 한 남자가 우스꽝스러운 걸음으로 루시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말없이 루시아와 헤르윈을 끔뻑끔뻑 보다가 두 사람을 번갈아 가리키며 하트 모양을 그렸다.

꼭 둘이 연인이냐고 묻는 것 같아서 루시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요. 저희 어제 결혼했어요.”

광대의 얼굴에 놀라움이 피어오르더니 이윽고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는 마술쇼를 구경하는 관객들에게 박수를 유도했다.

“응?”

광대가 헤르윈을 붙잡았다. 헤르윈은 처음엔 의아하다가 자신을 따라오라는 제스처에 루시아를 돌아봤다.

“다녀 와.”

“……대체 뭘 하려는 거지?”

헤르윈은 딱히 내키지 않는 모양이지만 순순히 광대에게 끌려갔다. 광대가 헤르윈 앞에서 꼼지락거리며 무어라 속삭였다.

헤르윈은 순순히 그의 말을 들었다. 이윽고 광대가 다른 광대와 함께 헤르윈의 앞뒤에 섰다.

그리고는 헤르윈의 키만큼 검은 천을 들어 그를 가렸다.

말없이 행동만 하는데도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흥미진진하게 보던 그때, 갑자기 한 광대가 칼을 빼 들었다. 그리고는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천을 향해 칼을 찔러 넣었다.

“헤르윈!”

루시아가 화들짝 놀라며 다가오려 했지만, 광대가 오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는 다른 광대가 그리했던 것처럼 이번엔 그도 칼을 빼 들어 천으로 칼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루시아의 낯이 창백해졌다. 헤르윈의 반사 신경이라면 피할 거라 생각하며 천 밑에 보이는 헤르윈의 발을 살폈다.

그는 그대로였다. 칼이 꽂힌 위치상 쪼그려 앉거나 피할 수 없어 보였다.

아무리 마술이라고 하여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내 남편을 데리고 무슨 짓을 하는……!”

루시아가 따지려던 찰나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헤르윈의 주변을 감싸던 천이 새하얀 베일로 변하며 꽃가루가 흩날렸다.

깜짝 놀라 얼어붙는 사이, 다친 곳 없이 말끔한 헤르윈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장미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루시아.”

헤르윈이 환한 미소를 짓자, 주변 여성들이 탄식을 흘렸다.

“나랑 결혼해줘서 고마워. 우리 평생 행복하게 살자.”

얼떨떨해하는 루시아의 손에 장미꽃을 쥐여준 헤르윈이 그녀를 꼭 안자 주변에서는 휘파람과 함께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그제야 정신 차린 루시아는 주변을 돌아봤다. 마술을 벌인 광대들이 미안하다는 제스처와 함께 온갖 사탕을 품에 안겨주었다.

“전부 마술이었어?”

“응,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부인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지 않냐고 하더라고.”

“너, 정말……!”

“내 남편이라는 소리, 듣기 좋았어, 여보.”

미처 화를 내기도 전에 헤르윈이 루시아의 볼에 뽀뽀를 하며 애교를 부렸다. 결국 루시아는 화내지도 못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밥도 맛있었고, 오늘 정말 재밌었다.”

“발 아프지는 않아?”

“응, 편한 거 신어서 괜찮아.”

숙소에 오자마자 루시아는 터덜터덜 걸어와, 침대에 곧장 누웠다. 얼굴을 박고 있는 모습에 헤르윈이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신발을 손수 벗겨주었다.

부탁하지 않아도 척척 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그가 너무 신기했다.

“자, 이제 씻어야지.”

“응? 오늘 아침에 씻고 왔잖아.”

또 씻냐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루시아를 보며 헤르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있으려고? 뭐, 나야 상관없지만.”

루시아는 헤르윈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능글맞다는 것을 눈치챘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이 보였다.

게슴츠레 뜬 붉은 눈을 보고 루시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뭐, 뭐 하려고?”

“뭐하긴.”

헤르윈의 붉은 눈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감과 동시에 루시아의 옷을 어깨 밑으로 슬며시 내렸다.

“어제 못다 한 일을 해야지.”

잠시 넋을 놓던 루시아는 곧바로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아니! 나 먼저 씻고 올게!”

루시아가 허둥지둥 욕실에 들어가자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아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불탄 감자처럼 붉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모습이 목에 피어난 꽃과 몹시 흡사했다. 어제 내심 첫날밤을 보내지 않아 안도했는데 막상 맨정신에 하려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 싶다가도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일이라 기대감이 앞섰다.

루시아는 옷을 벗고, 수건으로 대충 몸을 둘둘 말았다. 욕조에 받은 물 온도를 확인하다가 눈을 데구루루 굴려 굳게 닫혀있는 문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문가로 다가갔다.

“헤르윈.”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왜? 뭐 놓고 간 거라도 있어?”

“그게 아니라…….”

도통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루시아는 잠시 숨을 고르고 용기를 냈다.

“같이… 씻을래?”

갑자기 바깥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질 않아 민망함이 밀려왔다.

“시, 싫으면 됐어. 그냥 한 말……!”

문을 닫고 뒤를 돌아서려던 그때, 손잡이를 붙잡고 있던 손이 앞으로 나아갔다. 루시아는 비틀거리며 단단한 무언가에 코를 박았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자신만큼이나 얼굴을 붉힌 헤르윈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붉은 눈에는 짙은 욕망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진심이야?”

“……내가 괜히 그런 말을 했겠어?”

루시아는 슬쩍 제 몸을 가리고 있던 수건을 내렸다. 헤르윈의 눈이 제 몸을 훑었다.

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욕실이 적막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윽고 목울대를 긁는 소리와 함께 헤르윈이 거칠게 상의를 벗어 던지며 루시아를 단번에 안았다.

“못 참을지도 몰라.”

“괜찮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루시아의 긍정 어린 대답에 헤르윈의 안광이 번뜩이며 단숨에 루시아를 집어삼켰다.

루시아는 처음으로 자신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튀어나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히 손과 발끝이 오그라들고, 무엇이든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붙잡을 수 있는 건 오직 헤르윈뿐이었다.

“루시아……!”

“……헤르윈!”

두 사람은 욕실에서 침대로 옮겨, 한데 뒤엉켰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긴 밤을 황홀하게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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