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129)

<127화>

루시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정확히는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저번에 헤르윈이 말해줬어. 그리고는 자신이 멍청했다고 자책하더라고.”

“헤르윈이…….”

“그래서 그걸 듣고 그 녀석 머리를 한 대 내려쳤지! 미친 거 아니냐고 하면서.”

“……….”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싶어 아리스타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지만, 루시아는 여전히 넋을 놓은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리스타는 괜히 머쓱해져 목을 가다듬었다.

“아무튼 그 얘기 듣고 네 생각밖에 안 나더라. 네가 오랫동안 헤르윈을 좋아해 온 걸 잘 아니까.”

“아리스타…….”

“너도 헤르윈이 나를 좋아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하던데, 맞아?”

“……응, 맞아.”

“내가 밉지는 않았어? 내가 만약 너였다면……!”

잠깐 흥분한 아리스타가 숨을 고르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너였다면 내 얼굴 보기도 싫었을 거야.”

설마 예전에 마음 정리했던 일을 이제 와서 들추게 되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아리스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줄이야.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땐, 네가 너무 미웠어.”

“……….”

“1학년 1학기 때 기억나지? 그때, 잠깐 내가 너 엄청 피해 다녔었잖아.”

“응, 기억나.”

“비앙카랑 다니던 시기여서 영향을 받은 것도 없잖아 있었어. 이제 와서 말하지만 그때, 비앙카가 너 엄청 싫어했거든.”

아리스타가 곧바로 얼굴을 찌푸리며 비앙카 이름을 읊조렸다.

“뭐, 그렇다고 해도 내 행동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지. 결국 너를 피하고, 네가 곤란해할 만한 일을 저지를 뻔했으니까.”

“곤란해할 만한 일?”

루시아는 잠시 아차 싶었지만, 곧바로 침착하게 당시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걸 듣고 아리스타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돌아오긴 했는데 그때 일이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있어.”

“……….”

“아리스타, 난 널 미워하지 않아. 오히려 내가 너한테 평생을 사과해도 모자랄 판이야. 너는 날 있는 그대로 받아줬는데 나는 네게 저지른 잘못을 이제껏 숨기고 있었으니까. 정말 미안해.”

마음이 무거웠다. 어느덧 저도 모르게 그 시절의 일을 잊고 지냈다. 

이제는 아리스타와 둘도 없는 친구이니 이대로만 있으면 무단하게 지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합리화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에 불과했다. 

흙탕물로 더러워진 눈덩이에 아무리 새로운 눈을 덮는다고 해도 그 안이 깨끗해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루시아의 말을 듣고 한참이나 말이 없던 아리스타가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에 가슴이 더욱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아리스타가 루시아를 껴안았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결국엔 나를 선택해준 거구나.”

“……….”

“솔직히 놀라기는 했는데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결론적으로는 실행하지 않았고, 나랑 친구가 되기로 결심한 거잖아, 그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속에 있던 무언가를 톡 건드렸다.

“루시아, 내가 너였다면 진작에 그러고도 남았을 거야. 나를 질투하고 시기하고, 어떻게든 헤르윈 곁에서 떼어내려 했겠지.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어. 그것만으로도 훌륭해.”

“내, 내가 그런 말을 들을만한 사람은 아닌데…….”

결국 속에 있던 무언가가 무너지며 눈물이 절로 흘렀다. 울먹이며 말을 더듬자 아리스타가 당황하며 루시아를 더욱 꼭 껴안았다.

“미안해, 널 울리려고 꺼낸 얘기가 아닌데.”

“아리스타아…….”

“울지 마. 내가 너 울린 거 알면 헤르윈이 화낼 것 같아.”

아리스타가 헤르윈을 언급하자 루시아는 최대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울음을 그치려 애썼다. 입술을 다문 모습에 아리스타가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내가 헤르윈한테 그 말을 듣고 조금 조마조마했거든. 네가 나를 미워하면 어떡하나 싶어서…….”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너를 왜 미워해!”

자신의 품에서 빽 소리 지르는 루시아를 보고 아리스타가 푸스스 웃었다.

“맞아. 지금 보니 내가 괜한 생각을 했네.”

“누가 이상한 얘기라도 한 거야? 내가 너를 미워할 리가 없는데 대체 왜 그런 얘기를…….”

루시아가 툴툴거리며 그런 이상한 얘기를 한 놈의 이름을 밝히라고 닦달했다. 그 모습을 보고 미소만 짓던 아리스타가 머뭇거렸다.

“그러면… 내가 지금보다 너랑 더 가까운 사이가 돼도 괜찮겠어?”

“가까운 사이라면…….”

“가족 같은…사이 말이야.”

단순히 말로만 가족 같은 사이를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녀가 아그네스로 입적하는 것도 아닐 테고, 그 외의 다른 방법이…….

루시아의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빠르게 스쳐지나가며 그녀의 얼굴에 놀라움이 피어났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오빠랑 결혼하게?”

아리스타가 흠칫 떨며 눈을 데구루루 굴리다가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의 털이 오소소 솟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너무 놀란 나머지 턱이 밑으로 내려갔다.

“오, 오, 오빠랑 사, 사귀고 있어?”

“……음, 조금 애매해.”

고조됐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루시아가 이상한 표정을 짓자 아리스타가 웃었다.

“미안해, 내 말이 좀 이상하지?”

“아니, 그, 음…….”

루시아가 적절한 말을 고르려 하자 아리스타가 말했다.

“내가 루카스 오라버니랑 사귀는 건 괜찮아? 싫지는 않아?”

“내가? 내가 왜 널 싫어해?”

“……하지만, 네가 나를 반기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과거에 그런 일도 있었고…….”

서로가 직접적으로 얼굴을 붉힌 일은 없었지만, 여러 가지로 얽힌 관계를 생각했을 때, 루시아가 자신을 꺼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과거에 좋아했던 여자가 오빠의 아내로 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말이다. 

아무리 헤르윈이 동경을 사랑으로 오인한 거라고 해도, 과거에 루시아가 그 때문에 상처를 받고 힘들어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루시아는 그제야 아리스타가 왜 그 일을 언급한 건지 알 것 같았다.

“아리스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난 널 싫어하지 않아. 오히려 네가 우리 오빠랑 잘되기를 바라고 있어.”

“어? 저, 정말?”

“응. 그러니 아리스타. 난 너 응원해. 아니, 네가 우리 오빠랑 결혼한다면 난 대환영이야!”

잠시 감정이 벅차올랐던 아리스타는 자신을 꼭 껴안는 루시아의 등에 손을 얹었다.

“……고마워, 루시아. 덕분에 용기가 나.”

“둘이 지금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빠랑 결혼하고 싶은 건 확실한 거지?”

아리스타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나중에 둘이 잘되면 나한테 가장 먼저 말해 줘야 해. 알겠지?”

“당연하지!”

두 여인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루시아가 재채기를 했고, 루시아를 찾아 서성이던 헤르윈이 때마침 나타났다.

헤르윈은 온몸이 꽁꽁 언 루시아를 보고 이렇게 추운 날에 계속 바깥에 있었냐고 잔소리를 했다.

덩달아 아리스타도 같이 한 소리를 듣게 되었지만, 두 사람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마음 한켠에 남아있던 돌덩이가 말끔히 사라진 기분이었다.

* * *

“빨리빨리 움직여!”

“벌써 공작령에 도착하셨다!”

“제이! 거기 말고 저기다 놓으라고 했지!”

한 폭의 그림처럼 새하얀 설산을 배경으로 등지고 웅장하게 있는 페네우스 공작성.

새벽 댓바람부터 사용인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곧 있으면 도착할 이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특히 스칼렛이 손수 사용인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도록 공작성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며칠 전부터 이루어진 대청소라 피곤이 중첩으로 쌓였지만, 사용인들의 얼굴은 밝았다. 그도 그럴 것이-

‘드디어 공자님께서 작은 마님이랑 돌아오신다!’

헤르윈이 수도에서 루시아와 결혼식을 올렸다는 얘기는 진작에 전해 들었다. 

공작성에 있는 반절의 사람들은 헤르윈이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있었던 자들이라 그가 루시아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놀라워했었다.

하지만, 이내 루시아를 떠올리며 금세 납득했다.

‘아그네스 영애라면 인정이지.’

‘그렇게 어릴 적부터 서로 죽고 못 사시더니.’

어릴 적, 루시아가 최대한 사람 눈을 피해 헤르윈에게 고백을 했지만,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굳이 고백하는 장면을 목격하지 않아도 루시아가 헤르윈을 좋아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헤르윈이 다른 사람도 아닌 루시아를 부인을 맞았을 때는 다들 기뻐했다.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더라도 일단 자신들의 주인이 그녀를 열렬히 반기는데 탐탁잖게 여길 사용인은 없었다.

“마차가 들어옵니다!”

현관에 쌓인 눈을 치우던 어린 하인이 공작성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헤르윈과 루시아의 도착을 알렸다. 

그러자 사용인들이 최대한 자신들이 하던 일을 마무리 지으며 어제 연습했던 대로 줄에 맞춰 섰다. 스칼렛과 하일 역시 서둘러 계단을 내려와 곧 도착할 마차를 기다렸다.

마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문이 열리며 헤르윈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고, 그 뒤로는 귀여운 인상의 여인이 발을 내디뎠다.

루시아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얀 모피코트를 입은 그녀는 꼭 겨울 요정 같았다.

“루시아!”

“우리 새아가 왔니?”

스칼렛과 하일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루시아를 있는 힘껏 반겼다. 루시아는 처음엔 당황하다가 이내 상큼한 미소와 함께 인사했다.

“어머님, 아버님 그간 잘 지내셨어요?”

“저기요. 아들은 안 보입니까?”

친자식은 내팽개쳐 두고 루시아만 반기는 부모를 보고 헤르윈이 어이없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작 부부는 오직 루시아에게만 집중했다.

“오느라 고생 많았다. 북부가 많이 춥지?”

“이런, 손이 차구나. 마차에 온열 마도구를 틀어놓지 않았니? 헤르윈, 이런 건 남편이 잘 챙겼어야지.”

“어머님, 제 손이 원래 차서 그래요. 올 때 충분히 따뜻했어요.”

순식간에 찬밥신세가 된 헤르윈은 루시아만 챙기고 들어가는 부모를 보고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공작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작은 마님.”

입구에 다다르자 사용인들이 맞춘 것처럼 일제히 말했다. 루시아는 짐짓 놀라다가 푸스스 웃었다.

“반가워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냉혈하고 거친 북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움이었다. 단 한마디 했을 뿐인데 사용인들의 마음을 녹여버릴 정도였다.

특히 입구에서 제일 가까운 위치에 서 있던 어린 하인이 루시아를 멍하니 보다가 잡고 있던 빗자루를 놓쳐버렸다.

탁- 데구루루

작은 소리였지만, 단숨에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소년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소년을 보는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다. 그는 서둘러 허리를 굽히고 빗자루를 줍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고운 손이 빗자루를 잡았다.

“자, 여기.”

바로 루시아였다. 눈앞에서 본 루시아는 동화책에서 튀어나오는 요정 같았다. 어린 하인이 멍하니 얼어붙자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예쁘다.”

소년의 입에서 진심이 흘러나왔다. 그에 헤르윈이 한쪽 눈썹을 치켜뜨고, 루시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소년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자, 작은 마님! 제가 무슨 말을…….”

“아니야. 예쁘다니 기분 좋네.”

루시아는 소년의 손을 손수 잡아, 빗자루를 얹어주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손이 시뻘겋게 변하여 부르튼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루시아는 자신이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아이의 손에 끼워주었다.

소년이 당황했지만, 어느새 그의 손에 루시아의 장갑이 쏙 끼워져 있었다. 루시아의 손이 작았기에 장갑이 얼추 맞았다.

“날이 많이 추우니 이거라도 끼고 일하렴. 앞으로도 잘 부탁해.”

“이 귀, 귀한 것을…….”

주변에 있던 시종이 괜찮다고 말했지만, 루시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하나 더 뜨면 되니 상관없어.”

그 말만 남기고 루시아는 헤르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어느새 공작 부부와 함께 계단을 올라 서기 시작했다.

저 멀리 헤르윈이 루시아에게 자기도 장갑을 떠달라고 칭얼거렸지만, 소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부드러운 털실로 촘촘하게 떠진 장갑을 멍하니 볼 뿐이었다.

“어디 보자.”

그때, 집사장이 나타났다. 평소에는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상대였기에 소년은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아무리 작은 마님이 준 거라고 해도 받지 말았어야 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아가씨… 아니, 작은 마님이구나. 솜씨가 아주 좋으시네.”

“저… 혼내지 않으시는 건가요?”

“혼낼 일이 뭐 있겠니. 작은 마님께서 네게 직접 주신 건데.”

“……그러면, 이 귀한 걸 제가 가져도 되나요?”

소년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고 노년의 집사장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건 이제 네 거란다. 앞으로 소중히 사용하렴.”

“……넵!”

시동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우렁차게 답했다. 주변 사용인들이 그를 부러움이 섞인 시선으로 쳐다봤지만 이내 각자의 일을 하러 흩어졌다.

소년은 장갑을 품에 꼭 안으며 다짐했다.

‘평생 작은 마님께 충성을 다 할 거야!’

공작성에서 루시아 팬 1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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