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후우-”
아리스타는 잔뜩 긴장한 채 축축이 젖어 든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그녀의 옆에는 루카스도 함께였다. 루카스 또한 아리스타 못지않게 긴장한 상태였다.
현재 두 사람은 난장판이 된 사냥제와 오크 사체를 수습하고 오는 길이었다.
이번 사냥제에서 확인된 사상자는 총 13명, 사망자는 2명이었다.
단 몬스터 두 마리에 의해 나타난 피해였고, 새끼를 찾으려 나타난 마지막 한 마리 때문에 하마터면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뻔했다.
몬스터를 조심해야 한다는 헤르윈의 말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한 황실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황실에선 어떻게든 이 사태를 수습하려 사전에 몬스터를 잡지 못한 헤르윈에게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 했지만, 사람들이 그 말에 넘어갈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게다가 헤르윈 또한 시종일관 황실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헤르윈의 분노가 한계치에 다다라서 그를 진정시키느라 애를 썼을 것이다.
방금 전, 방에서 나온 황궁의가 사색이 되어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는 건가 싶다가도 루시아의 일에 물불 안 가리는 헤르윈이라면 화를 내고도 남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크를 해치우던 헤르윈의 모습이 아직까지 눈앞에 아른거렸다.
헤르윈은 루시아를 붙잡은 오크를 보자마자 바로 그 오른손을 베어냈다.
잘린 손 때문에 자연스레 루시아는 자유의 몸이 되었고, 루시아가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헤르윈이 그녀를 받아 안았다.
그 이후로 이어진 장면은 멀리서 봐도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잘린 손을 시작으로 헤르윈은 하나둘 오크의 사지를 손쉽게 자르며 최대한 고통스럽고, 빠르게 죽여 갔다.
헤르윈 품에 안겨 있던 루시아는 그 모습을 못 본 모양이지만…….
‘차라리 보지 않은 게 다행이야.’
소드 익스퍼트인 자신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의 참혹한 광경. 그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한 일반인 중에는 헛구역질을 하고, 기절까지 한 사람도 꽤나 있었다.
아찔함에 아리스타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리며 비장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똑똑-
“헤르윈, 우리 들어갈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아리스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방안에는 째깍째깍 초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만큼 방 안은 적막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침대 옆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헤르윈이 보였다.
아리스타와 루카스는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헤르윈, 루시아는 좀 어때?”
망부석처럼 가만히 있는 헤르윈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그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올리려던 아리스타는 섬뜩하리만큼 무섭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를 보고 멈칫했다.
자세히 보니 그의 몸 주위로 아직까지 오러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소드 마스터 경지에 다다르면 전신에서 오러가 피어 오른다 들었다.
아카데미 시절에 잠시 본 적 있었지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조금 신기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소드 마스터의 기백에 저절로 몸이 반응했다.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고,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으며,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섰다.
잔뜩 긴장하며 날카롭게 반응하는 것은 오직 아리스타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리스타만큼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기에, 그저 지금의 상황을 무서워할 뿐이었다.
“의사는 뭐래? 아무 이상도 없대?”
그 무서운 분위기를 깨고 루카스가 용기를 냈다. 이미 황궁의한테 전해 들었지만, 루시아가 죽은 듯이 누워있자 불안해졌다.
헤르윈은 여전히 루시아를 응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잠깐 의식을 잃은 것뿐이라 곧 깨어날 거야.”
하아아…….
안도의 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가슴을 쓸어내리던 것도 잠시 루카스는 헤르윈의 눈치를 봤다.
제 동생을 구해낸 그가 무척이나 고마우면서도 지금은 무섭게만 느껴졌다.
그때, 헤르윈이 움찔 떨며 고개를 돌렸다. 살기 어린 붉은 눈동자가 주변을 훑자 누구랄 것 없이 얼어붙었다.
붉은 눈동자는 아리스타와 루카스 뒤에 있는 이를 응시했다.
“캐스퍼 후작.”
“……페네우스 공자.”
바로 베른이었다. 베른의 곁에는 셀린느도 함께였다.
베른과 루시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헤르윈은 베른을 보자마자 분노가 치솟았다.
헤르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번에 베른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약혼자라는 놈이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루시아가 오크한테 잡혀있을 동안 어디서 뭘 했던 거냐고!”
“잠깐, 헤르윈! 진정 좀 해.”
“이것부터 놓고 말해. 응?”
뒤늦게 아리스타와 루카스가 말리려 했지만, 헤르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셀린느가 입을 틀어막으며 안절부절못했다.
베른은 헤르윈의 분노에 반박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이 헤르윈의 심기를 더욱 자극했다.
“당장 말하지 않으면 그 오크처럼 만들어버릴 줄 알아.”
농담이라고 하기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조각조각 난도질 된 오크 사체를 떠올리며 아리스타와 루카스의 낯이 창백해졌다.
베른이 여전히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자 헤르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베른의 멱살을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갈 때-
“저 때문이에요! 베른은 아무 잘못도 없어요!”
셀린느가 헤르윈의 팔을 붙잡았다.
평범한 여인이 받아내기에는 버거운 살기임에도 셀린느는 바들바들 떨면서 헤르윈의 붉은 눈동자를 직시했다.
금방이라도 분노를 쏟아낼 것 같았던 헤르윈은 낯익은 얼굴을 보고 서서히 살기를 지웠다.
“당신은…….”
“저, 저는 셀린느 제인슨입니다. 캐스퍼 후작의 전 애인이죠.”
셀린느가 더듬더듬 입을 열자 헤르윈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아리스타와 루카스가 화들짝 놀랐다.
“베른이 아그네스 영애 옆에 없었던 건 전부 제 탓이에요. 제가 영애에게 후작과 헤어져 달라 말하는 바람에…….”
“잠깐, 셀린느. 내가 얘기할게.”
베른이 뒤늦게 나서려 했지만, 셀린느는 여전히 헤르윈의 팔을 붙잡으며 물러서지 않았다.
“영애는 저와 후작의 사이를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헤어져달라는 제 말을 들어주셨어요. 저랑 베른이 대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셨는데 하필 그때 오크가 와서…….”
아리스타와 루카스도 처음으로 듣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모든 얘기를 듣고 반사적으로 베른을 쳐다봤다.
“……후작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제가 그런 말만 하지 않았어도 영애가 봉변을 당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제발 저를 탓하세요!”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라 그 누구도 반응을 하지 못했다.
아리스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탄식을 흘렸고, 루카스는 턱이 빠질 것처럼 입을 벌렸다. 하물며 헤르윈마저 멱살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힘이 풀린 그 틈을 타 셀린느는 서둘러 베른의 앞을 가로막았다. 꼭 베른을 보호하겠다는 모양새였다.
무거운 침묵 끝에 헤르윈이 입을 열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당신이 후작의 전 애인이고, 루시아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그럼, 루시아가 후작이랑…….”
떨떠름하게 말하던 헤르윈은 뒤늦게 그녀가 어제 베른과 춤을 췄던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리자 베른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헤어졌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제가 전부 설명하겠습니다.”
베른은 너무 다급하게 말했던 셀린느의 말에 보충하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던 헤르윈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서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렇게 된 겁니다. 죄송합니다, 제 이기적인 마음만 아니었어도 루시아가 오크에게 붙잡히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루카스와 아리스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물론, 베른의 말에 충격을 받은 건 맞지만, 이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루시아라고 오크가 갑자가 나타날 줄 알았겠는가.
그럼에도 베른은 죄책감을 가졌다. 자신이 셀린느에게 정신이 팔리지만 않았어도 루시아가 위험해지는 일은 없었을 거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하, 결국 여태까지 루시아를 속인 것도 모자라,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한테 갔다는 얘기 아닌가?”
헤르윈의 입에서 날선 말이 툭 튀어나왔다. 헤르윈은 이번 사태도 사태지만, 베른이 루시아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 누구보다도 베른을 두둔하며 그를 신뢰했던 루시아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루시아가 두 사람을 너그럽게 용서했다곤 하지만, 헤르윈은 그 말을 믿지 못했다.
그저 루시아가 큰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지 걱정이었다.
헤르윈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이라도 저 뻔뻔한 낯짝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루시아가 눈을 떴을 때 마음 아파할까 봐 차마 그러지도 못했다.
헤르윈의 분노를 알아차린 셀린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애초에 이해관계로 맺어진 약혼이었어요.”
헤르윈의 시선이 셀린느에게 쏠렸다.
“후작이 말했죠? 저와 이어질 수 없다고 생각해서 좋은 배우자를 찾은 거라고. 그건 영애도 마찬가지였어요.”
사납기만 하던 붉은 눈이 서서히 커지며 이내 이채가 돌았다.
“영애의 사정을 자세히는 몰라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영애 또한 후작처럼 따로 마음에 두는 사람이 있다는 걸요.”
아리스타와 루카스의 눈이 자연스레 헤르윈에게로 돌아갔다. 루시아가 마음에 담고 있다는 사람이 누군지 훤했다.
헤르윈은 기쁜 듯, 슬픈 듯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헤르윈이 말을 잇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슬픔에 잠기자 베른이 입을 열었다.
“제 일이 아니라 차마 말하진 못했습니다. 지금도 제가 할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이것만큼은 말해야겠습니다.”
루시아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베른이 자신을 콕 집어서 말하자 헤르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저와 있을 때 간혹 당신을 떠올리곤 했어요. 애당초 저와 약혼을 하게 된 것도 당신을 잊기 위해서였죠.”
불현듯 그동안 자신에게 벽을 치며, 낯선 모습을 보였던 루시아의 행동들이 머릿속으로 물밀듯 밀려 들어왔다.
친구라고 선을 그으며 베른과 멀어지던 그녀. 아픈 자신을 뒤로하고 베른을 챙기던 그녀. 정말 자신을 좋아하냐고 물었던 그녀.
마음을 접어서 그런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직도 자신을 사랑한다니.
무척이나 기쁘고 벅차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처음부터 제 마음을 자각했다면 이렇게 멀리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녀가 상처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턱 끝까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헤르윈은 비틀거리며 말없이 루시아 곁으로 다가갔다.
무릎을 꿇곤 루시아의 손에 이마를 맞대는 헤르윈을 보며 모두 침묵했다.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나고 루카스가 헤르윈의 등을 토닥였다.
이내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떠나고 한참 후에야 헤르윈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덧 그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토록 많은 상처를 주었는데도 아직까지 자신을 사랑하는 그녀가 못내 사랑스러웠다.
저도 모르게 코를 훌쩍이던 헤르윈은 문득 테이블에 곱게 놓여있는 손수건을 쳐다봤다.
루시아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것이었다.
손수건에 놓여져 있는 페네우스 가문의 문장과, 그 옆에 있는 이니셜을 보고 루시아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을 처음 봤을 때, 아직 제게도 희망이 있다는 사실에 바보같이 기뻐했다. 하지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지금, 루시아가 어떤 심정으로 만들었을지 궁금했다.
“루시아.”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서로 나눠야 할 말은 밤을 새울 정도로 많았지만, 그녀가 깨어났을 때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였다.
“사랑해.”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손을 어루만지며 헤르윈이 말했다.
헤르윈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사랑한단 말을 속삭였다.
그렇게 루시아가 일어나기 전까지 헤르윈은 한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