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29)
  • <99화>

    루시아와 눈이 마주친 오크는 그녀 옆에 자신의 새끼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새끼가 처참한 모습으로 철창에 갇혀있자 오크의 눈이 시뻘겋게 변했다.

    크와아아아!

    어마어마한 기세에 공기가 날카로울 정도였다. 머리카락이 삐죽 설 정도로 짙은 살기가 느껴졌다.

    1초가 억겁같이 느껴졌을 때, 오크가 움직였다. 

    거대한 덩치에 걸맞게 오크가 움직일 때마다 땅이 울렸다.

    쿵! 쿵! 쿵!

    오크가 곧장 루시아를 향해 뛰어왔다. 사태를 파악한 기사와 남자들이 창과 활을 쏘아댔지만, 오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을 맞고도 더욱 속도를 높였다.

    거리가 있어 충분히 오크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루시아는 움직이지 못했다. 

    처음으로 느껴본 살의에 몸을 움직일 수 없던 것이다. 그저 사시나무처럼 떨며 숨을 멈추던 루시아의 귀에 찢어질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아!”

    “아그네스 영애!”

    왼쪽에서는 루카스와 아리스타가, 오른쪽에서는 베른과 셀린느가 루시아를 있는 힘껏 불렀다.

    누구랄 것 없이 그들의 낯이 창백했다. 그제야 손가락이 움찔거린 루시아는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루시아는 멈췄던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허나, 멀리 도망가기도 전에 오크가 그녀의 바로 뒤까지 와있었다.

    크와아아아!

    오크가 통나무처럼 두꺼운 팔을 휘둘렀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지척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루시아는 빠르게 발을 놀렸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밟고 말았다.

    “꺄아악!”

    콰아앙!

    큰 굉음과 함께 루시아의 갸냘픈 비명이 들렸다. 

    “아, 아아…….”

    넘어져 부딪친 무릎과 손 외에는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루시아는 덜덜 떨며 바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크르르르…….

    오크가 섬뜩한 울음소리를 내며 침을 뚝뚝 흘렸다. 천천히 눈동자를 굴리자 오크 손에 의해 찌그러진 철창이 보였다.

    ‘만약 내가 넘어지지 않았다면…….’

    저 손에 종잇장처럼 찢어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바로 눈앞에서 목격한 몬스터의 힘에 루시아는 더더욱 몸을 떨었다.

    당장 도망쳐야 한다. 몬스터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도록 조금씩 도망치면…….

    뒤로 주춤 물러서던 루시아는 오크와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저 오크 손에 죽을 것이란 직감이 들었다.

    “루시아! 꼼짝 마!”

    마침, 저 멀리서 달려오던 아리스타가 루시아에게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그녀는 서둘러 검을 꺼내 들곤 오러를 분출했다.

    하지만, 몬스터를 마주한 것은 처음이라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우리가 유인할 테니까. 거기서 꼼짝도 말고 있어! 알겠지?”

    루시아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타는 곧바로 기사들과 함께 오크의 시선을 끌었다.

    온갖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요란스러운 소리에 오크가 비틀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내 화가 치밀었는지 오크가 더더욱 크게 울었다. 그리고 제자리에 쿵쿵 뛰어 날뛰고는 제 새끼가 갇힌 철창을 붙잡고 흔들었다.

    루시아는 날뛰는 오크 발에 밟힐 것만 같아 조금씩 뒤로 물러서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이상 움직이면 오크가 곧장 반응하여 도망칠 수 없게 만들었다.

    “제기랄…! 왜 움직이질 않는 거야!”

    오크가 루시아 곁을 떠나질 않자 아리스타는 더더욱 초조해졌다.

    유인하려고 해도 오크는 제자리에서 날뛰기만 할 뿐이었다.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마치 루시아를 인질로 잡은 것처럼 사람들과 팽팽한 기 싸움을 벌였다.

    몬스터치고는 영악하기 짝이 없었다.

    “저러다가 두 마리 다 놓치겠어요!”

    설상가상 인간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 오크가 철창을 휘어, 새끼 몬스터가 빠져나오게 만들었다.

    주변에 대기하던 기사들이 침음을 흘리며 몬스터가 놓칠까 두려워했다.

    하지만, 아리스타는 오히려 기회라 생각했다.

    ‘차라리, 이대로 새끼랑 도망치는 게 나아. 그러면 루시아만은 무시할 거야.’

    지금까지 오크는 제 새끼를 구하는 데만 관심을 둘 뿐, 루시아를 위협하지 않았다. 

    루시아 때문에 자신이 공격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아리스타는 기사들에게 눈짓하여 조용히 하라 명했다.

    무거운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에 오크만이 새끼 오크를 품에 안고 낮은 울음소리를 흘렸다.

    이윽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 움찔 떨던 오크는 기사들이 길을 터주자 눈빛이 돌변했다.

    일부러 오크를 놓아주는 것이다.

    “공격하지 않으마. 그냥 저기로 가.”

    말이 통할지 모르겠지만, 아리스타가 숲으로 향하는 길을 가리켰다. 오크가 다시 이를 드러냈다.

    잠시 눈치를 보던 오크가 더욱 자세를 낮추며 한걸음 움직였다.

    ‘됐다!’

    아리스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대로 오크가 순순히 새끼와 함께 떠나기만 한다면 루시아는…….

    “꺄아아악!”

    안심하기도 전에 찌를 듯한 비명이 들렸다. 오크가 루시아를 붙잡은 것이다.

    오크의 덩치가 웬만한 천막보다 컸기에 그 손이 루시아의 허리를 전부 감쌀 정도였다.

    아리스타와 기사들이 검을 들며 바로 경계태세를 잡았다.

    크와아아아!

    오크는 한 손에 자신의 새끼를, 다른 한손으론 루시아의 허리를 낚아채며 주위에 괴성을 질렀다.

    꼭 이리 말하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다가온다면 이 여자를 죽여 버리겠다. 

    착각은 아닌지 오크는 루시아를 앞으로 내세웠다. 누가 보더라도 인질을 잡은 모습이었다.

    “흐으으, 흐으…….”

    루시아는 패닉에 빠져있었다. 극심한 공포에 빠진 나머지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비명도 내지를 수 없었다.

    제 허리를 붙잡은 거대한 손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오크가 조금이라도 힘을 주었다가는 몸이 터져나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무어라 떠드는 것 같았지만, 루시아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어, 어떡하지?’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 치면 오크가 자신을 던지거나 찢어버릴 것 같았고, 가만히 있자니 이대로 오크한테 끌려가 영영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해도 안 좋은 결과만 떠오르자 루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헤르윈……!’

    투두둑-!

    그때, 작은 말발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오크도 느꼈는지 루시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으윽!”

    히히힝!

    가까워진 투레질 소리로 말이 바로 뒤까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뒤돌아보고 싶었지만, 루시아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저 제 허리를 옥죄는 오크의 손을 풀려고 안간힘을 쓸 뿐이었다.

    크오오오!

    그때, 루시아가 거슬렸던 건지 오크가 괴성과 함께 날뛰기 시작했다. 

    루시아가 더욱 겁에 질린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 살려…….”

    서걱-

    작은 목소리로 덜덜 떨던 것도 잠시, 무언가 썰리는 소리와 함께 루시아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허리를 옥죄던 손에 힘이 풀린 느낌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추락하던 루시아는 이내 따뜻한 온기와 함께 익숙한 머스크향을 느낄 수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루시아는 넋을 놓았다. 코앞에 헤르윈의 얼굴이 있었다.

    헤르윈은 땀범벅이 된 얼굴로 무섭도록 정색하고 있었다.

    “헤르…….”

    “눈 감아.”

    미처 헤르윈의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루시아는 곧바로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1초도 되지 않아, 오크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크와아아! 크롸아아아! 

    지금까지의 괴성과는 조금 달랐다. 무언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루시아는 눈을 감고 있었기에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떨어지지 않게 꽉 잡아.”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있는 힘껏 헤르윈의 목을 끌어안았다.

    제 허리를 감싸는 헤르윈의 강인한 팔이 느껴졌다. 무언가 일이 벌어지겠구나 직감하던 것도 잠시,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의 비명이 더욱 처절하게 변해갔다.

    크레렉-

    머지않아 오크의 소리는 더욱 작아졌고, 끝내 오크의 비명이 멈췄다.

    어떻게 된 건지 직접 보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직도 오크에게 붙잡혀있는 것만 같아 몸이 사정없이 떨렸다.

    “하아, 하아…….”

    공포로 잠식되어 숨이 막혀왔다.

    “……시아.”

    “끄윽, 하아…….”

    한 손으로 철창을 일그러뜨리던 오크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루시아!”

    “하악……!”

    귓가에 꽂히는 익숙한 목소리에 루시아는 번뜩 눈을 떴다. 머릿속을 헤집어놓던 장면들이 사라지고 헤르윈의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헤르윈…….”

    “이제 괜찮아. 다 끝났어.”

    헤르윈이 부드러운 미소로 식은땀을 흘리는 루시아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사시나무처럼 떨던 루시아는 헤르윈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다…다, 끝났어?”

    “응, 다 끝났어.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그의 말 한마디가 안도감을 몰고 왔다.

    루시아는 그제야 헤르윈이 오크를 완전히 쓰러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사적으로 루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의 고개가 다 돌아가기 전에 헤르윈이 루시아의 눈을 가렸다.

    “보지 마, 네가 볼 게 아니야.”

    루시아의 눈에는 길쭉한 손가락들이 보였다. 그녀의 정신 건강을 위해 황급히 가린 것들이었지만, 조금 늦어버렸다.

    루시아는 이미 오크의 잔해를 본 뒤였다.

    전부 봤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오크와 오크 새끼가 처참하게 죽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지독하고 끔찍한 혈향이 코끝을 찔렀다. 분명 오크의 녹색 피가 풀 위에 흐트러져 있었던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매스꺼워졌다. 왜 그토록 사람들이 몬스터를 꺼리는지, 왜 헤르윈이 몬스터를 조심하라고 단단히 일렀는지 알 것 같았다.

    1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살면서 제일 무서운, 아니, 한평생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헤르윈……!”

    루시아는 본능적으로 안식처를 찾았다.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헤르윈이 나머지 손으로 루시아의 등을 꼭 끌어안았다.

    “헤르윈…….”

    “응.”

    “너, 너무 무서웠어.”

    “응. 잘 견뎌줬어.”

    등을 토닥이는 다정한 손길과 귓가에 나긋나긋하게 들리는 목소리 덕에 몸의 긴장이 서서히 풀렸다.

    “루시아! 루시아!”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루시아는 갑자기 풀려버리는 긴장 탓에 의식이 가물가물했다.

    “헤르윈, 나…….”

    “쉿, 아무 말 안 해도 돼. 내가 옆에서 지켜줄 테니까.”

    안심하고 자.

    마법과도 같은 말이었다. 누군가가 와서 뭐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루시아의 의식은 점차 꺼져갔다.

    가물거리는 시야 끝에 다정한 붉은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루시아의 몸은 축 늘어졌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헤르윈은 루시아를 안정적으로 안아 들었다.

    “루시아는! 루시아는 괜찮아?”

    “루시아!”

    루카스와 아리스타, 베른 등 루시아와 친분 있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주위로 모여들었다.

    아직 루시아가 잠든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야단을 피우며 다가왔지만-

    “……….”

    헤르윈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오러를 보고 모두 하나같이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헤르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루시아에게 보여주던 다정한 눈빛을 지우고 오금이 저릴 정도로 섬뜩한 살기를 띠고 있었다.

    비켜

    눈빛만으로도 그의 의사를 알 수 있었다. 아리스타와 루카스를 포함한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그들은 바로 지척에 있는 오크의 사체를 볼 수 있었다.

    “윽……!”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처참하게 난도질 되어 있었다. 

    화살도 창도 통하지 않는 오크를 단 한 명이 제압했다는 사실에 모두들 침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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