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컹! 컹! 으르르-!
섬뜩한 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헤르윈을 좋아하게 된 계기. 공작성에서 마주쳤던 거대한 들개가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8살 당시 어린 모습으로 돌아간 루시아는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들개를 보고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침을 뚝뚝 흘리던 개가 루시아에게 달려들었다.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올리고 몸을 보호하던 것도 잠시, 개의 신음이 들렸다.
깨갱-깽!
“루시아한테서 떨어져!”
어린 헤르윈이 목검을 들고 그녀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 뒤로부터는 어릴 적 봤던 장면 그대로 흘러갔다. 한바탕 헤르윈과 들개 사이의 신경전이 벌어졌고, 잠깐의 틈을 타 루시아가 개한테 돌을 던짐으로써 헤르윈은 들개를 무찌를 수 있었다.
개가 서서히 멀어지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헤르윈이 루시아 곁으로 다가왔다.
“루시아, 괜찮아?”
이쯤에서 자신은 울음을 터트렸어야 했다. 하지만, 무언가 기시감을 느낀 루시아는 그저 멍하니 헤르윈을 볼 뿐이었다.
“그러게 내가 깊숙이 들어가지 말랬잖아. 여긴 들개보다 위험한 짐승이 있다고.”
헤르윈이 툴툴거리며 루시아의 몸을 이곳저곳 살폈다. 정작 큰일을 치른 건 본인이면서 루시아를 먼저 살피고 있었다.
“다시는 숲에 혼자 들어가지 마. 알겠지?”
“……응.”
루시아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게 풀어지는 헤르윈의 얼굴을 보고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헤르윈이 원래 이랬던가?’
다 큰 지금, 당시의 상황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자 감회가 새로웠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을 아끼고 보살피는 헤르윈의 눈빛에서 애정이 엿보였다.
아무리 어리다고 하더라도 친구 사이에 보일법한 눈빛이 아니었다.
헤르윈은 엉망진창인 본인을 뒤로하고 루시아의 손과 치맛자락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네 잎 클로버를 꺼냈다.
“그리고 자, 이거.”
헤르윈이 네 잎 클로버를 루시아에게 건넸다.
“너 가고 나서 찾았어.”
이때 받았던 네 잎 클로버는 아직도 갖고 있다. 압화로 만들어 특별히 코팅까지 하여 제 오르골에 넣어놨었다.
한참 클로버를 보던 루시아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헤르윈이 흙으로 엉망이 된 얼굴로 밝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루시아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제야 조금씩 기억이 돌아와, 그간 함께한 헤르윈과의 추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너는… 늘 나를 지켜줬구나…….”
처음 들개로부터 습격을 당했을 때도,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도, 부러진 칼날에 사고당할 뻔했을 때도. 그리고-
“오늘도 말이야.”
위험을 감수하고 곧장 자신에게 달려와 오크에게서 구해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 루시아의 모습이 현재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린 헤르윈이 활짝 웃자 루시아는 그를 조심스레 껴안았다.
“고마워, 헤르윈.”
“정말?”
“응, 정말. 네가 내 곁에 있어서 다행이야.”
“그럼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줘.”
루시아는 감았던 눈을 뜨며 품에 안았던 헤르윈을 쳐다봤다. 어린 헤르윈이 무어라 속삭였다.
“나는 언제나 너를-”
헤르윈의 얼굴이 새하얗게 번지고, 그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져 갔다.
하지만, 루시아는 그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 * *
여린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이내 벽안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루시아는 눈을 깜빡이며 흐릿한 시야를 떨쳐냈다. 앞이 선명해지자 주위를 둘러봤다.
낯선 천장과 벽, 그리고 곳곳에 놓인 고급품들. 난생처음 보는 방이었다. 어리둥절하던 것도 잠시 루시아의 시야에 헤르윈의 얼굴이 잡혔다.
루시아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헤르윈을 쳐다봤다.
“헤르윈…….”
헤르윈은 웃는 듯 우는 듯,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루시아의 오른손을 꽉 쥐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그런데 여긴 어디야?”
목이 잠기지 않은 걸로 보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았다.
“황실이야. 네가 의식을 차리기 전까지 이곳에서 있을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줬어.”
황실이란 말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린 루시아는 금세 납득했다.
황실에서 괜히 일을 벌이는 바람에 오크 사태가 벌어졌다. 이 정도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여러 방면으로 얘기가 나왔을 것이다.
혼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던 루시아는 문득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왜 헤르윈밖에 없지?’
오빠나 친구들도 분명 자신을 찾아왔을 텐데, 어찌 된 영문인지 방에는 헤르윈밖에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은 사냥제에 참석하지 않아 그렇다 쳐도 루카스까지 없는 건 어딘가 이상했다.
루시아의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헤르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왔다 갔어. 형이랑 친구들이랑 네 약혼자도.”
약혼자라는 말에 루시아가 움찔 떨었다. 루시아는 뒤늦게 자신이 베른과 헤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서히 사라져가던 꿈이 다시 상기 됐다.
지금의 헤르윈보다 어린 얼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언제나 너를 기다리고 있어.’
루시아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상체를 조심스레 일으켰다. 헤르윈이 곧바로 상체를 받쳐주자 그 손을 붙잡았다.
“헤르윈, 너한테 할 말 있어.”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 하니 가시가 걸린 것마냥 무언가 턱 막힌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용기를 낼 때였다.
“나 사실 베른이랑…….”
“루시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헤르윈이 다정하게 루시아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이 너무나도 달콤하여 루시아는 순간 저도 모르게 넋을 놓았다.
멍한 루시아의 표정을 보고 헤르윈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쥐고 있는 루시아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후작이 다 얘기해줬어. 너랑 헤어졌다고.”
“아…….”
설마 베른이 사실대로 털어놓을 줄은 몰랐던 루시아가 탄식을 흘렸다.
“헤어졌단 말 듣고 많은 생각을 했어. 하지만, 역시 이 말부터 해야겠더라고.”
헤르윈의 볼이 달아오름과 동시에 분위기가 점점 잡히기 시작했다.
손끝이 간질거리고 가슴이 뛰며, 긴장감이 맴도는 이 순간. 그건 바로-
“사랑해.”
고백이었다.
처음 고백했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그땐, 그의 말을 믿지 못했다. 우정을 사랑으로 착각해 뺏기기 싫은 마음에 서둘러 고백한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와 붉게 달아오른 얼굴, 그리고 긴장감이 역력한 붉은 눈동자까지.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훤히 비쳤다.
“늘 너를 사랑해왔어. 바보같이 내 마음도 모르고 너를 상처 입혔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을 거야. 돌고 돌아 너무 늦게 와버렸지만-”
헤르윈이 의자에서 일어나,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그리고는 떨리는 입술을 잡고 있던 루시아의 손등에 살포시 마주 댔다.
“나와 결혼해줄래?”
순간적으로 목이 턱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쌓여왔던 설움과 애써 눌러왔던 사랑이 한꺼번에 터져버려 눈물을 만들었다.
루시아의 말간 벽안에 이슬 같은 눈물이 맺히자 헤르윈이 당황하며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아는 새어 나올 것 같은 울음을 꾹 참으며 눈가를 비볐다.
“울지 마…….”
그때, 크고 따스한 손이 루시아의 얼굴을 감쌌다. 손을 따라 고개를 들어 올리니 이번엔 헤르윈이 슬프고도 부드러운 눈으로 루시아를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서 많은 걸 읽을 수 있었다. 제 눈물에 당황하는 것도 같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도 같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제 눈치를 보는 행동이라는 걸 알아차리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서럽게 울던 루시아가 웃음을 터트리니 헤르윈은 얼떨떨했다.
“루시…….”
“……좋아.”
루시아의 이름을 채 다 부르기 전에 루시아가 대답했다. 헤르윈의 눈이 점차 커졌다.
헤르윈이 넋을 놓자 루시아가 맺힌 눈물을 흘리며 활짝 웃었다.
“좋아. 결혼하자.”
“……정말?”
헤르윈이 믿기지 않는 말투로 말하자 루시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먼저 결혼하자고 했으면서 그 반응은 뭐야.”
긴장했던 것도 잊어버린 채 루시아가 말간 웃음을 보였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헤르윈이 입을 꾹 다물며 루시아를 품에 안았다.
잠시 놀라던 루시아는 설풋 미소 지으며 헤르윈의 등에 손을 얹었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꿈이길 바라?”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정말로 네가…….”
헤르윈이 횡설수설하자 루시아는 잠깐 뒤로 물러서 그의 얼굴을 잡았다.
헤르윈이 어느새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참고 있었다. 얼굴이 일그러져도 잘생김은 여전했다.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지 헤르윈이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가리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루시아가 헤르윈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이내 서로의 입술에 부드럽고 말랑한 감촉이 맞닿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멈추고, 헤르윈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윽고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졌다. 루시아의 볼이 복숭아처럼 달아오르고, 배시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어때? 꿈 아니지?”
“……….”
헤르윈은 말이 없었다. 너무 놀라서 그런 건가 싶었지만, 침묵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놀란 헤르윈을 위해 루시아는 다시 한번 그에게 다가갔다.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닿으려고 할 때,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루시아의 상체가 뒤로 밀려났다.
순식간에 눕혀진 루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새 제정신으로 돌아온 헤르윈이 무언가 참는 듯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아…….”
“헤, 헤르윈?”
헤르윈의 얼굴이 다가오자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숨결에 루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바들바들 떨던 것도 잠시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코를 간질거리던 숨이 목으로 옮겨갔다.
“너 정말 어쩌려고 그래.”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슬쩍 눈을 떠서 보니 제 얼굴 옆에 헤르윈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목을 간지럽히는 검은 머리카락에 살포시 손을 올리자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 너머로 열렬한 욕망이 엿보였다.
잡아먹힐 것 같은 눈빛에 잠시 멈칫했지만, 루시아는 다시 헤르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계속 그럴 거야?”
“뭐가?”
“나 지금 많이 참고 있어. 네가 계속 나를 유혹하면 더 이상 멈추지 못한다고.”
일부러 유혹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헤르윈은 루시아가 멈추기를 바랐다. 이렇게 맞닿아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였다.
루시아가 조금이라도 더 다가온다면 차마 참지 못할 것이다.
루시아가 잠시 눈을 데구루루 굴리다가 헤르윈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누가 참으라고 했나.”
물러서기는커녕 한 발짝 더 다가오자 헤르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난 참으라고 한 적 없는데.”
“너, 그 말 진심이지?”
아슬아슬하게 이성이 끊기기 직전이었다.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헤르윈을 보고 루시아가 최대한 유혹적으로 미소 지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귀여운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헤르윈이 보기엔 이 세상에서 제일 위험하고 섹시했다.
루시아의 말이 기폭제라도 된 듯, 헤르윈은 단번에 루시아의 얼굴을 붙잡으며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꿈이라고 생각했던 키스보다 더 격렬했다. 하지만, 여전히 헤르윈은 서툴기만 했다.
그럼에도 달아오르기에는 충분했다. 잠깐 입술이 떨어졌다.
헤르윈이 다시 다가오려 하자 루시아가 그를 살짝 밀었다.
“왜.”
“키스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이번엔 루시아가 먼저 헤르윈에게 다가갔다.
서로의 입술이 부드럽게 열리며 천천히 혀가 얽매였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각에 헤르윈의 손이 갈피를 잃었다.
루시아도 키스하는 것은 서툴렀지만, 헤르윈보다는 능숙했다. 처음에 루시아의 리드에 따라가던 헤르윈은 곧바로 키스를 익히며 주도권을 가져갔다.
주도권이 헤르윈에게 넘어가고, 어느새 자신이 먹히는 형세로 뒤바뀌자 루시아가 헐떡였다. 열렬한 입맞춤 끝에 다시 입술이 떨어졌다.
헤르윈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루시아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대체 어디서 이런 걸 배운 거야?”
기쁜 마음에 한 말이었지만, 루시아가 눈에 띄게 반응했다.
루시아를 웃는 얼굴로 보고 있던 헤르윈은 이윽고 서서히 얼굴을 굳혔다.
“……설마, 캐스퍼 후작?”
루시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피하는 그녀를 보며 헤르윈은 확신했다.
헤르윈의 이마에 핏줄이 우뚝 섰다.
“키스를 후작에게 배웠겠다?”
“……그야, 너랑 이렇게 될 줄 몰랐으니까.”
“아, 그래?”
루시아가 뒤늦게 항변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첫 키스가 내가 아닌 게 많이 아쉽지만, 이미 그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많이 화난진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나 말고 다른 남자랑 키스하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아니, 화가 난 건가?
루시아는 진땀을 흘리며 헤르윈을 쳐다봤다. 불쌍한 표정을 지어 그의 화를 풀려고 했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 전까지 루시아는 헤르윈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