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29)

<98화>

숲을 쏜살같이 달리던 헤르윈은 작은 공터에 놓인 노란 깃발을 보고 말에서 내렸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찾지 못하다니…….”

노란 깃발, 숲 입구와 가깝다는 증표였다. 외곽부터 쭉 훑어보면서 중간중간에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몬스터의 위치를 살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도 결국 몬스터를 찾지 못했다.

슬슬 사냥제가 막바지에 다다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으아아아-!

저 멀리, 비명 소리가 들렸다. 헤르윈은 곧바로 반응하며 말을 끌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풀숲을 헤치고 가자 바닥에 주저앉아 낯이 창백해진 남성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페, 페네우스 공자?”

“비명 소리가 들려서 와 봤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남성을 살펴보니 그의 오른팔이 무언가에 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있었다. 헤르윈의 손이 팔에 닿자 남성이 신음을 흘렸다.

“다치셨군요. 일단 치료를…….”

“모, 몬스터! 몬스터가 나타났어요!”

남성의 팔을 살피던 헤르윈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몬스터요? 혹시 맞부딪친 겁니까?”

“네, 네 맞아요. 짐승을 사냥하고 있는데 갑자기 몬스터가 나타나서…….”

남성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도 찬찬히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남성이 사슴을 사냥하러 매복하던 도중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뒤돌아봤을 때, 오크 한 마리가 서 있었다고 했다.

오크는 잔뜩 흥분한 채 남성을 공격했다. 물론 간발의 차로 피하긴 했지만, 뒤이어 오크가 남성의 팔을 붙들었다.

그렇게 꼼짝 없이 죽는 구나 생각했을 때, 오크가 갑자기 남성을 내팽개치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 지경까지 갔는데도 죽지 않은 게 용하군.’

악력만으로도 사람 팔을 부러트리는 오크에게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천운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오크가 갑자기 방향을 바꾼 걸까요?”

“그,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뭔가를 발견한 것 같기는 했는데…….”

끼이익! 꾸에엑!

그때, 저 멀리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헤르윈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남성이 입을 열었다.

“아마, 몬스터 새끼일 겁니다. 저 녀석, 사냥제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계속 울었거든요.”

“계속 울었다고요?”

“네, 중간에 지치는지 소리가 안 들릴 때도 있었지만, 계속 울었어요.”

상황을 파악한 헤르윈의 낯이 점차 창백해졌다.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말에 올라탔다.

“공자님?”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알아서 돌아가세요.”

“자, 잠깐만요!”

뒤에서 남성이 불렀지만, 헤르윈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제기랄! 그러게 바로 죽이자고 말했거늘!’

오크가 사람을 두고 갑자기 방향을 바꾼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제 새끼를 구하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늦으면 대참사가 발생할 것이 틀림없었다. 헤르윈은 턱을 악물며 한시라도 늦지 않기 위해 말을 몰았다.

* * *

토끼 두 마리, 여우 한 마리를 잡고 돌아온 베른은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루시아 얼굴을 어떻게 보지?’

베른의 정신은 계속 사냥제 직전에 머물러 있었다. 

루시아를 속이지 말고 솔직하게 제 마음을 털어놓자 다짐했지만, 루시아와 만날 시간이 다가오자 다시금 긴장되기 시작했다.

‘일단 사과부터 하고…….’

이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루시아를 기만하는 일이다.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루시아는 이해해 줄 것이다.

어쩌면 그럴 것 같았다며 웃어넘길지도 모른다. 루시아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베른은 도통 진정하지 못했다.

“후우…….”

긴장감에 땀이 쉴 새 없이 이마에 흘러내렸다. 베른은 아무 생각 없이 손수건을 들곤 땀을 닦아냈다.

그리고는 뒤늦게 자신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확인했다.

베른의 손에는 루시아가 준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작게 수 놓아진 물망초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베른은 주먹을 꽉 쥐었다.

“베른, 왔어요?”

마침 루시아가 다가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말간 얼굴을 보고 베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수고 많았어요. 사냥감은 많이 잡으셨나요?”

루시아는 베른을 반기며 그의 뒤를 흘긋 살폈다. 사용인들과 기사들이 토끼 두 마리와 여우 한 마리를 가져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우를 잡으셨나 보네요? 축하드려요! 자신 없다고 하시더니, 사냥 잘하시는데요?”

베른의 마음도 모르고 루시아는 그저 평소처럼 그를 대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루시아는 베른의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다는 걸 눈치챘다.

“루시아.”

“……네.”

루시아는 씩 웃으며 베른을 쳐다봤다. 잔뜩 긴장한 베른의 눈에는 지금 루시아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들어오지 않았다.

“제가 돌아오면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었죠…. 지금 얘기할까 해요.”

베른이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루시아. 아무래도 약혼을 이어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약간의 웃음기가 섞여 있었지만, 잔뜩 긴장한 베른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셀린느를 잊지 못했습니다. 루시아가 제게 얼마나 과분하고 좋은 여자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루시아 덕분에 도움을 받은 적도 많고요. 하지만, 도저히 셀린느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정말 면목 없습니다. 저 하나 좋자고 파혼하자는 것이니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루시아의 선택에 맡기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루시아는 잠자코 고개 숙인 베른을 쳐다봤다. 

베른은 정직할 정도로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잘못만 고할 뿐이었다. 그것이 무척이나 그다워서 웃음이 나왔다.

루시아는 웃음을 참다가 베른의 뒤에 보이는 한 인영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베른의 마음은 잘 알겠어요.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베른이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드디어 고개를 들어 올린 그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한대 뒤엉켜 울상을 짓고 있었다.

“감사라뇨… 제가 백 번 사과해도 모자랄 판인데…….”

“아뇨. 감사해요. 결단을 내리기 전까지 베른이 얼마나 고민했을지 눈에 선하네요. 사실, 대충 눈치챘어요. 제인슨 영애를 보는 베른의 눈빛이 아주 열렬했거든요.”

잠시 멍하니 있던 베른은 뒤늦게 루시아의 말을 이해하고는 얼굴이 단번에 화르륵 타올랐다. 늘 웃는 얼굴을 유지하던 그가 무너져 내리자 루시아는 작게 웃었다.

“제, 제가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그게 숨긴다고 해서 숨겨지는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유난히 제인슨 영애를 피하시는 것 같아서 제 나름대로 추측했을 뿐이에요.”

허를 찔린 베른이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제가 루시아에게 너무 못된 짓만 했네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잠시간이지만, 저도 베른과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그저 저도, 베른도 서로 원하는 사람이 달랐을 뿐이에요.”

진심이 담긴 말에 베른은 잠깐 울컥하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약혼식을 미뤄서 다행이네요. 이것저것 준비했으면 취소하는 데도 돈이 꽤 들었을 거예요.”

“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분위기를 풀기 위해 루시아가 농담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베른이 한층 긴장을 풀며 웃었다. 

가식 없이 솔직한 미소에 드디어 진짜 베른과 마주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루시아는 씩 웃으며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잠시 멈칫하던 베른이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손에는 루시아가 준 손수건이 들려있었다.

물망초를 보며 그가 입을 뗐다.

“셀린느에게 청혼할 생각입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사람들 시선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루시아와 약혼한다던 베른이 갑자기 셀린느와 결혼한다면 사교계가 들썩거릴 것이 분명했다. 베른도 예상했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각오한 바입니다. 사실 그동안 셀린느가 계속 저에게 다가왔었어요. 하지만 저는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죠. 루시아와의 약혼도 중요했지만, 제가 더 이상 상처를 받고 싶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였거든요.”

베른이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은 루시아의 눈동자가 떨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제 상처에 급급해 셀린느에게 모든 짐을 떠넘겼습니다. 그런데도 셀린느는 군말 없이 저를 따라주었어요. 그녀도 많이 힘들고 무서울 텐데…….”

루시아는 조금 전, 셀린느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녀는 몸을 잘게 떨면서도, 용기를 냈다. 

“그럼, 사람들 시선이 무섭지 않은 건가요?”

“아예 무섭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괜찮습니다. 그만큼 셀린느를 사랑하거든요.”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이 가슴에 울렸다. 꽉 막혀 답답했던 무언가가 시원하게 뚫린 느낌이었다.

그동안 불안정하고 무섭게만 보였던 길이 점차 안정적으로 변해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베른을 보고 루시아는 입가를 올렸다.

“그렇다네요, 영애. 제가 따로 말할 필요도 없었어요.”

베른은 어리둥절하다가 루시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뒤를 돌아보니 언제 다가왔을지 모를 셀린느가 있었다.

“세, 셀린느…….”

셀린느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다가 결국 눈물을 흘렸다.

“베른, 정말… 정말 나와 결혼해줄 거야?”

베른은 우는 셀린느를 보고 당황하며 그녀에게 다가가다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루시아와 셀린느를 번갈아 쳐다봤다.

루시아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베른이 사냥하러 나갔을 때, 제인슨 영애와 긴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럼, 진작에…….”

“네, 알고 있었어요. 제가 먼저 파혼하자 말하려 했는데 선수를 치셨어요.”

베른은 어버버 말을 잇지 못했다. 어제 셀린느가 루시아를 설득해보겠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설마 정말로 얘기를 나눴을 줄은 몰랐다.

그때, 옷자락을 당기는 힘에 베른은 고개를 돌렸다.

“대답해줘.”

셀린느는 베른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믿지 못했다. 그 탓에 확신을 얻고 싶어 했다.

무척이나 불안했을 텐데도 아무런 내색 없이 제게 다가와 준 셀린느가, 베른은 고마웠다.

이제는 자신이 그녀에게 다가갈 차례였다.

“셀린느,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을 보고 루시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그들로부터 멀리 걸음을 옮겼다.

‘잘됐어.’

이렇게 되는 게 맞다. 처음에는 서로의 사랑을 이룰 수 없어, 슬픔을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정답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변했어.’

베른에게 영영 멀어졌다 생각한 애인이 돌아왔다. 이제 그의 사랑은 더 이상 이룰 수 없는 사랑이 아니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루시아는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냈다. 헤르윈이 손수건을 달라고 칭얼거렸을 때도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이것을 헤르윈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저도 모르게 미련이 남아 만들긴 했지만, 헤르윈에게 주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주지 못했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루시아는 헤르윈의 이니셜이 새겨진 부분을 쓰다듬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헤르윈…….”

그가 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이제는 베른과 셀린느처럼 자신도…….

쿠워어! 쿠어어어!

상념에 빠져있던 루시아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괴성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발이 가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새끼 몬스터가 있는 철창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어디선가 계속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이 녀석이 낸 울음소리였다.

쿠어어어! 쿠오오!

너무 울어서 몬스터의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고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연민을 느꼈다.

그간 말로만 들었을 때는 몬스터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한 존재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슬피 울부짖는 것을 보니 조금 불쌍해졌다.

꼭 어미를 찾는 모양새에 루시아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철창에 닿기 전에 곧바로 거두었다.

“헤르윈이 조심하라고 했지.”

아무리 철창에 갇혀있다고 하더라도 몬스터 근처에 다가가지 말라고 말한 바 있었다.

몬스터를 여러 번 상대해온 헤르윈이 한 말이니 들어서 나쁠 건 없었다.

지금은 불쌍하게 보일지라도 결국엔 몬스터다.

루시아는 찝찝한 마음을 안고 뒤로 물러섰다. 그때,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쿠워어어어!

새끼 몬스터의 것보다 더 큰 울음소리가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꺄아아악!”

“모, 몬스터다!”

“모두 피해!”

소란스러움은 더더욱 커졌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더라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으아아악!”

사람들의 비명과 괴성이 난무한 가운데에 천막보다도 큰 몬스터가 나타났다. 몬스터는 눈에 보이는 대로 사람들을 공격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자 루시아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도, 도망쳐야…….”

뒤로 주춤 물러선 순간, 오크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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