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129)

<97화>

사냥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숲의 초입에는 황실 기사와 사냥제에 참석하지 않는 남성 몇몇, 그리고 사냥하러 떠난 남자들을 기다리는 여성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루시아는 어색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헤르윈이 평소답지 않게 한바탕 소란을 피웠기에 주변 사람들이 루시아를 향해 수군거렸다.

저들이 무슨 얘기를 할지 대충 예상이 되어 조금 피곤해졌다.

‘어디 잠깐 도망갈 곳 없나?’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루시아는 주변을 서성였다. 

크리스틴이라도 찾을까 주변을 서성이던 그때, 루시아의 앞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아그네스 영애.”

“……제인슨 영애?”

바로 셀린느였다. 당황하던 루시아는 얼떨떨한 눈으로 제게 다가오는 그녀를 쳐다봤다.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요?”

“저랑 대화를 나누시겠다는 건가요?”

“네.”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라 루시아는 조금 떨떠름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셀린느의 모습에서 사냥을 떠나기 직전의 베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인적이 없는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제게 하고 싶은 말씀이 뭐죠?”

질질 끌 만한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 루시아는 바로 본론부터 말했다.

셀린느도 그게 좋다고 판단했는지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눈을 부릅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저는 캐스퍼 후작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라 루시아는 덤덤했다. 

그간 베른을 보던 셀린느의 눈빛이나 행동을 보면 그녀가 베른을 좋아한다는 걸 모른다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말없이 가만히 있는 루시아를 보고 셀린느는 말을 이었다.

“영애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한때 후작과 연인 사이였습니다. 그러다 제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되었지요.”

루시아는 셀린느가 먼저 그녀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털어놓자 내심 속으로 놀랐다. 

‘다른 사람에게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닌데.’

약점이나 다름없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헤어진 후에도 저는 단 한 번도 캐스퍼 후작을 잊어본 적 없어요. 그저 마음에도 없는 무정한 말로 그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을 끝없이 후회하고, 제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죠.”

일전에 베른이 말해준 두 사람의 과거가 떠올랐다. 분명 셀린느가 상처 주는 말로 이별을 고했다고 했었다.

지금의 셀린느를 보고 있자니 그녀가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저는 이제 베른이 아니면 안 돼요. 그 사람이 아니면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요.”

침착하던 셀린느의 목소리가 점차 떨리더니 이내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순간 루시아는 셀린느의 눈물을 닦아줄 뻔했지만, 그럴 사이가 아니기에 주먹을 꽉 쥐었다.

“영애에게 정말 염치없는 행동이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제발, 그 사람과 헤어져 주세요.”

결국 셀린느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셀린느는 애써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가다듬으려 했다. 허나, 한 번 터져버린 눈물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루시아는 셀린느의 말을 듣고 침묵을 유지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셀린느가 자신을 불렀을 때부터, 아니 베른이 나중에 얘기하자고 말했을 때부터 이렇게 되리라는 걸 얼추 예상하긴 했다.

‘베른이 내게 못 해주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셀린느와 있을 때면 사람이 달라지곤 했으니까. 

자신과 셀린느를 대하는 태도에 차별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우연히 셀린느를 마주치거나, 그녀에 대해 언급할 때면 의도적으로 대화 주제를 바꾸면서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다.

그만큼 자신이 셀린느에게 흔들리지 않고, 결백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도리어 그 점이 루시아의 눈에 들어왔다.

‘눈에 띄게 셀린느를 배제하려는 것부터 이미 마음이 있다는 뜻이지.’

셀린느와 있는 베른을 볼 때면, 그가 꾸밈없이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베른은 늘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았어.’

그는 늘 상냥하고, 배려심도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가면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순 없었다.

가식적인 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베른을 탓할 문제는 아니었다. 루시아 또한 베른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얼굴에 가면을 쓴 채,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

피식- 

루시아 입에서 옅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많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아직 서로의 벽을 넘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 말을 믿지 못하시는 건가요……?”

문득 셀린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아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셀린느가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와 초조한 기색으로 루시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무작정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게 아니에요. 두 분이 헤어지시는 게 영애에게도 좋을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저에게도 좋다고요?”

뜬금없는 말에 루시아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네, 주제넘은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영애께선…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이 따로 있으시죠?”

순간 루시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셀린느가 헤르윈까지 언급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제 뒷조사를 하신 건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네, 조금 했습니다. 아무래도 베른의 약혼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거든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셀린느는 계속 저자세로 나오며 루시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연신 사과를 해왔다.

그럼에도 루시아는 불쾌함을 숨길 수 없었다.

‘아니, 침착하자.’

숨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애초에 사교계에 소문이 퍼다 했잖아.’

게다가 셀린느가 있던 티파티에서 한 영애가 자신에게 헤르윈은 어떻게 됐냐고 무례한 질문을 한 적도 있었다.

그쯤 되면 굳이 셀린느가 뒷조사를 하지 않아도 자신에 대한 소문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베른의 약혼녀로 지내면서 헤르윈과 엮인 적이 없다 보니 저도 모르게 과민반응하고 말았다.

“후우…….”

루시아는 침착하게 깊은숨을 내뱉었다. 셀린느는 입을 다문 채 안절부절못했다.

그녀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루시아는 겨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계속 얘기해보세요. 대체 이 파혼이 제게 어떤 면에서 좋다는 건지 궁금하네요.”

다정했던 벽안이 낮게 가라앉은 것을 본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단 한 번밖에 없는 절호의 기회이기에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사랑 없는 약혼을 했단 거, 알고 있어요. 서로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도요.”

루시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가 약혼을 기약하게 되신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로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대로 약혼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최선의 선택지가 따로 있잖아요.”

“……….”

루시아는 문득 제게 고백하던 헤르윈을 떠올렸다. 

그래, 셀린느의 말대로 자신이 가장 원했던 것은 이런 형식적인 약혼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미래였다.

“영애께서 무슨 사연이 있으신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영애께선 베른보다 페네우스 공자와 있을 때 더 편해 보이셨고, 그분을 사랑하는 게 눈에 보였어요.”

루시아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상황을 본인에게 유리하게 만들려 거짓말하는 건가 싶었지만, 셀린느는 진지했다. 

“페네우스 공자 또한 영애를 마음에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요.”

루시아의 손이 움찔 떨렸다. 다른 사람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는 게 차마 믿기지 않았다.

“저처럼 영애께서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건 누구나 바라는 일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라…….”

그래, 그녀의 말대로 아직도 헤르윈을 사랑한다. 그리고 헤르윈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셀린느의 말처럼 파혼만 한다면 헤르윈과 결혼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12년 전, 헤르윈을 사랑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수없이 꿈꾸던 일. 하지만, 그것이 멀게만 느껴졌다. 

지금의 헤르윈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오랜 기간 그로부터 학습된 거절과 방어기제가 지금의 상황을 부정했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제 앞에 놓인 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새로운 길이 나타나니 혼란스럽기만 했다.

한쪽은 행복을 확신할 순 없어도 안정적인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행복해질 수 있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이 너무나도 불투명하고 불안정했다.

“저는 잘… 모르겠네요.”

결국 루시아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셀린느는 그녀가 불안해한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루시아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이 겹쳐 보였다. 

“처음, 베른에게 헤어지자 말했을 때…….”

문득 들려오는 셀린느의 목소리에 루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저는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했습니다.”

셀린느는 덤덤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저희 둘은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저희의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리고 저는 너무나도 지친 상태였죠.”

딸을 한낱 돈벌이로만 생각하는 지긋지긋한 가족, 저를 탐탁잖게 여겼던 베른의 부모님까지. 

오직 사랑으로만 감내하기엔, 그 모든 것들이 버겁게만 느껴졌다.

“베른을 두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것이 어쩌면 현실에서 도망쳐 버린 걸지도 모르겠네요. 확실히 결혼을 하고 나니 저를 압박하던 모든 것이 사라졌거든요. 처음으로 숨통이 트였죠.”

그러나, 숨통이 트인 만큼 그에 대한 죄책감과 베른에 대한 그리움이 다시금 목을 졸랐다.

“하지만, 다시 죽을 것 같았습니다. 결혼한 지 반년 만에 겨우 깨달았죠. 나는 아직 ‘베른을 사랑하고 있구나.’라고 말이에요.”

베른에 대한 마음 때문에 하루하루 죽을 것 같으면서 그가 폐인처럼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조금은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만큼 베른이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하지만, 그가 루시아와 약혼한다고 했을 때는 제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제가 왜 지금 이리 절박한지 아세요?”

잠자코 있던 루시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제 인생에 베른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이미 한차례 큰 이별과 시련을 겪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녀의 진실한 마음이 루시아에게 와닿았다.

“……베른에게 얘기는 해보셨나요?” 

잠시간 말이 없던 루시아가 결국 입을 열었다. 담담한 어조와, 투명한 벽안. 셀린느의 말이 통했다는 좋은 징조였다.

“두 분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굳이 제가 아니라 베른에게 말해 이 약혼을 파기할 수 있었을 텐데요.”

셀린느는 루시아가 제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기뻐하던 것도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루시아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대로 베른의 파혼 의사만 있다면 이 약혼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굳이 이렇게 힘들게 루시아를 설득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베른은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선택은 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의외의 답변에 루시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루시아는 떨떠름해졌다.

“제가 그렇게까지 베른에게 소중한 사람은 아닌데…….”

“그만큼 영애가 마음에 걸린 모양이에요. 만약 제가 이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대로 영애와 약혼을 이어갔을 거라고. 제 대체품으로 취급될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설마, 베른이 그런 말을 했을 줄은 몰랐다. 아니,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이 돌아왔는데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려는 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본인을 더 신경 쓰면 될 텐데 참…….”

사람이 착하다고 해야 할지 답답하다고 해야 할지.

루시아의 말을 듣고 셀린느가 설풋 웃었다.

“답답하긴 해도, 그게 베른의 매력이죠.”

은은한 미소를 띠는 셀린느의 얼굴에서 사랑이 느껴졌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관계라면 조금 식을 만도 하건만, 그녀의 미소에서 풋풋한 첫사랑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던 루시아는 피식 웃었다.

“……영애의 말은 잘 알겠습니다.”

셀린느가 다시금 긴장 어린 기색으로 루시아를 쳐다봤다. 

이윽고 들려오는 루시아의 대답에 셀린느가 눈물을 글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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