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이거 놓으란 말 안 들려……?!”
어디선가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베키가 한 사내에게 붙잡혀 인적이 드문 곳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베키는 붙잡힌 손을 빼려고 발버둥 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숲의 초입, 인적이 없는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남자가 멈췄다.
곧바로 손을 뿌리친 베키는 얼얼한 손목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남자가 삐뚜름하게 웃었다.
“우리 사이에 대체 왜 그래? 오늘은 좀 거칠게 하고 싶은 모양이지?”
“거칠고, 나발이고 난 너랑 그럴 마음이 없다니까?”
“그럴 마음이 없다니. 이것 참 슬픈걸? 분명 저번엔 뜨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은데.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능글맞게 말하는 남자를 보고 베키는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루카스랑 약혼을 기약한 날로부터 대부분의 남자들과 관계를 청산했다. 하지만, 딱 한 명. 쥐새끼 한 마리가 남아있었다.
‘내 실수야.’
약혼한다고 말했던 날, 짐승처럼 덤벼들 때 알아봤어야 했다. 마지막이라고 달라붙던 게 몇 번이던가.
아무리 그를 밀어내고, 거부해도 그는 끊임없이 관계를 요구했다. 그렇다면 저 남자가 자신을 좋아하는가?
‘그럴 리가 없지.’
이미 다른 여자와 약혼까지 한 남자다. 애초에 시작부터 사랑으로 맺어진 인연이 아니어서 자신도, 저 남자도 서로에게 바라는 것은 없었다.
그저 자신과의 관계가 아까운 것이다.
“왜 말이 없어? 너도 내심 좋은 거지?”
남자가 능글맞게 웃으며 어느새 베키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무슨 말을 해도 저 좋을 대로 해석하는 남자를 보며 베키는 혀를 찼다.
“이게 벌써부터 노망이 났나. 귀먹었어? 난 더 이상 너랑 그런 일 안 한다고! 약혼한다고 여러 번 말했잖아!”
“누가 보면 순결이라도 지킨 줄 알겠어. 약혼하는 게 뭐 어때서? 나도 약혼한 몸이야. 그런데 이렇게 너랑 잘 놀고 있잖아. 우리만 비밀로 하면 아무도 모른다니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지금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끌고 나와? 분명 네 약혼녀도 그곳에 있었을 텐데?”
“네가 계속 나를 피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고.”
모든 잘못을 저에게 돌리는 화법에 진저리가 날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선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러다가 사람들이 몰려올까 싶어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히며 베키는 남자의 멱살을 거칠게 잡았다.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에도 또 이딴 개수작을 벌이면 그때는 정말 가만 안 둘 줄 알아.”
드디어 원하는 답을 찾은 남자가 뱀처럼 입을 쭉 찢어 웃었다.
이윽고 남자가 베키에게 달라붙었다. 처음엔 귀찮아하던 베키도 어느새 저도 모르게 그를 진심으로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자가 평소보다 진하게 입을 맞춰 오던 찰나-
“베키.”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싸악 가시는 기분이었다. 베키는 반사적으로 남자를 밀치며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루, 루카스……!”
설마 했건만 정말로 루카스였다. 그는 난생처음 보는 무표정한 얼굴로 베키와 한데 뒤엉킨 남자를 쳐다봤다.
아니, 무감한 눈빛 안에는 고요히 분노가 차오르고 있었다.
“뭐야?”
아직 사태 파악이 안 된 남자가 불청객을 맞은 것처럼 짜증스러운 눈길로 루카스를 쳐다봤다.
남자의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입술에 낙인처럼 찍힌 빨간 립스틱 자국에 루카스가 어이없는 한숨을 내뱉었다.
“……아리스타, 네 말이 맞았네.”
덜덜 떨며 변명할 생각도 못하고 있던 베키가 아리스타의 이름을 듣고 퍼뜩 정신 차렸다.
지금 보니 루카스의 뒤에 가증스러운 아리스타가 서 있었다.
순간적으로 베키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너! 기어코 일을 벌였구나!”
루카스에겐 한마디도 못하던 베키가 자신에게 버럭 화를 내자 아리스타는 순간 어이없었다. 아리스타가 한소리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보다 먼저 루카스가 실소를 터트렸다.
“나한테 먼저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루카스… 그게 말이야…….”
“네 반응을 보니 아리스타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인 모양이네. 내심 거짓말이길 바랐는데…….”
아주 잠깐 상처받은 기색이 드러났지만, 그도 잠시 분노가 그 위에 덮어졌다.
“내가 지금까지 대체 누굴 만난 건지 모르겠다. 넌 대체 누구야? 아니, 애초에 네 이름이 베키는 맞긴 해?”
모든 것을 부정하는, 벌레만도 못한 눈빛이 베키에게 쏟아졌다.
그 눈빛에 베키는 질식할 것만 같았다. 늘 애정을 품고 있던 벽안이 저리 바뀔 수 있는지 몰랐다.
이대로 있다가는 영영 루카스가 제 곁을 떠나버릴 것만 같아 베키는 서둘러 그에게 뛰어가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난 너만 사랑해! 이건 진심이야!”
“……….”
훤히 드러난 어깨를 보고 루카스는 더더욱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루카스……!”
베키가 다시 한번 루카스에게 달라붙으려 하자 그 옆에 있던 아리스타가 베키를 붙잡아 떼어냈다.
강한 악력에 베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더러운 손으로 지금 어딜 손대.”
흉흉하게 일렁이는 보랏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베키는 잠시 떨리는 숨을 내뱉다가 이내 눈썹을 치켜뜨며 아리스타의 긴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전부 너 때문이야! 네가 일부러 루카스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 그렇지?!”
“이거 놔.”
머리카락이 땅겨져 아플 텐데도 아리스타는 표정 한 번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리스타보다 루카스가 더욱 질색하며 베키를 밀쳤다.
“베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뒤로 넘어진 베키는 루카스가 자신을 밀쳤단 사실에 충격을 받고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리스타, 괜찮아?”
“응,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루카스가 아리스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오직 그녀만을 걱정하고 있었다.
순간 연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을 보고 베키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하, 하하하하! 지금 내가 이런 꼴이 됐다고 바로 연인 행세라도 하겠다는 거야? 앙큼한 년! 너 일부러 루카스한테 말한 거지? 네가 루카스를 전부 독차지하려고!”
악을 내지르는 베키의 말에 아리스타는 저도 모르게 멈칫하며 동요하고 말았다. 루카스를 잃게 된 베키에게 눈에 뵈는 것은 없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영문을 모르는 루카스만이 베키가 마지막 발악을 한다 생각할 뿐이었다.
미친 사람처럼 웃던 베키가 아리스타를 가리켰다.
“너 몰랐어? 저년이 널 좋아하잖아. 그래서 나랑 너를 떼어놓으려고 한 거잖아.”
루카스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그와 반대로 아리스타의 낯은 창백해졌다.
“친구 동생은 무슨! 저 여자는 단 한 번도 너를 오빠 친구로 본 적 없어! 순진한 얼굴 뒤로 너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알고 있어?”
루카스는 너무 놀란 나머지 아리스타를 돌아볼 생각도 못했다.
‘아리스타가 나를 좋아한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리스타는 절친한 아레스의 동생이자, 사랑하는 동생의 친구라고만…….
“……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내가 너처럼 경박한 여자인 줄 알아?”
옆에서 들려오는 말에 루카스는 퍼뜩 정신 차렸다. 아리스타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베키를 쏘아보고 있었다.
“너는 애초에 오라버니랑 어울리질 않아. 아니, 내가 말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네 민낯을 오라버니가 알아챘을 거야. 그러니 쓸데없이 내 핑계 대는 건 그만두고 너 자신이나 돌아봐. 지금 네 모습은 옆에 있는 흙탕물보다 더러우니까.”
베키는 바로 코앞에 있는 웅덩이를 보고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아이고, 이거 참 살벌해서 무서워 죽겠네.”
그때, 베키와 같이 있던 남자가 입을 열며 주저앉은 베키를 일으켰다. 지금까지 조용하길래 도망간 줄로만 알았는데,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에 아리스타는 눈을 찡그렸다.
‘저 남자는…….’
일전에 어머니와 함께 쇼핑하다가 본 남자였다. 분명 그때도 베키와 함께였었지?
“뭐, 이렇게 된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긴 하지만, 명색이 약혼녀에게 너무 냉담한 거 아닌가?”
루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부적절한 건 우리뿐만 아니라 그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리스타가 버럭 화를 냈지만, 남자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솔직히 우리처럼 스킨쉽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쪽도 다른 사람이랑 놀아나고 있었잖아. 사람들 눈을 피해 사냥복을 입고 숲에서 놀고 온 거 아니었나?”
궤변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화가 났다. 같이 있었던 것만으로도 부적절한 관계라 칭하는 것도 그렇지만, 저들과 동급으로 취급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솟았다.
저도 모르게 왼손에 오러를 피워낸 아리스타는 한 발짝 내밀었다. 하지만, 루카스가 남자에게 주먹을 날린 게 더 빨랐다.
“아리스타를 욕보이지 마. 너처럼 쓰레기 같은 녀석이 함부로 해도 될 사람 아니니까.”
짐승처럼 거친 목소리를 낸 루카스가 매섭게 읊조렸다. 아리스타의 왼손에서 피어오르던 오러가 단번에 가라앉았다.
루카스는 주먹을 털며 걸음을 돌렸다. 순간 베키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도 잠시일 뿐 더 이상의 미련도 없는 듯 무심히 지나쳤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베키는 무정하게 멀어지는 루카스를 붙잡을 수 없었다.
* * *
쿠어어어-!
“으아아악!”
“사, 사람 살려!”
빛이 들어오기 힘들 정도로 나무가 빽빽하게 있는 울창한 숲 안쪽에 몬스터의 끔찍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사이사이에는 사람들의 비명이 섞여 있었다.
비릿한 냄새와 함께 주위에 유혈이 낭자했다.
그들은 모두 호기롭게 몬스터를 잡으려 했지만, 생각 그 이상으로 강한 힘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결국 사상자가 발생했고,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부리나케 줄행랑을 쳤다.
하지만, 다리를 다친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오크를 무력하게 바라봤다.
“사, 살려…….”
집채만 한 크기의 오크가 침을 뚝뚝 흘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오크의 손엔 방금 전 목숨을 잃은 사내의 피가 맺혀있었다.
오금이 저렸다. 사내는 몬스터의 다음 타깃이 저라는 것을 직감했다.
쿠워어어!
오크가 눈을 희번덕 뜨며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사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있기를 한참, 바로 들이닥쳤어야 할 끔찍한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오크의 흉폭한 울음소리도 사라지자 이상하기만 했다.
혹시 자신이 죽은 건가 싶어 사내는 눈을 떴다. 하지만, 눈앞에는 눈을 감기 전과 똑같은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딱 하나. 두 동강이 난 오크를 제외하고는.
“히익-!”
사내가 질겁하며 엉덩이를 질질 끌며 뒤로 물러섰다.
“이, 이게 무슨……!”
“괜찮은가.”
듣기 좋은 중저음 목소리가 들렸다. 덜덜 떨리는 고개를 겨우 돌리자 그곳에는 섬광처럼 번뜩이는 붉은 눈이 있었다.
“늦지 않아 다행이군.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그제야 사내는 헤르윈이 자신을 구해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몬스터가 이곳까지 들어왔을 줄이야…….”
헤르윈은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이미 서늘하게 죽어버린 시체가 하나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왔어도…….’
몬스터의 위치를 잘못 파악하지만 않았어도 살생은 없었을 것이다. 어제 자정이 되어서야 몬스터가 황실 숲에 들어섰다고 하길래 분명 외곽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몬스터는 보란 듯이 제 예상을 깨고 숲 깊은 곳까지 침범해 있었다.
“그런데… 몬스터는 한 마리인가?”
분명 보고에 의하면 남은 몬스터는 총 두 마리였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는 몬스터가 한 마리밖에 없었다.
“모, 몬스터가 더 있단 말씀이신가요?”
“그래.”
“제, 제가 왔을 때는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사내는 자신이 본 것들을 낱낱이 고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몬스터를 발견하고는 힘을 합치면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다 같이 덤벼들었었다.
그 결과 한 명이 죽고, 나머지는 도망치며 다리에 부상을 입은 사내만이 이곳에 남겨진 것이었다.
결국 이곳에는 처음부터 한 마리밖에 없었단 소리였다.
‘이거 난감한걸.’
남은 한 마리가 이 광대한 숲을 활보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아찔했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헤르윈은 자신이 갖고 있던 신호탄을 사내에게 쥐여 줬다.
“이걸 쏘아 올리면 기사들이 올 걸세.”
“가, 감사합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헤르윈은 대충 손을 저으며 서둘러 말에 올랐다. 일단은 최대한 신경을 곤두세우며 남은 몬스터를 찾는 수밖에 없다.
“이랴!”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게 헤르윈은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