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29)

<84화>

오랜만에 베른을 찾아간 루시아는 약혼식에 대해 이런저런 논의를 나눴다.

“그럼, 약혼식은 여름제가 끝나고 난 다음에 하는 게 좋겠네요.”

“……….”

“여름제가 당장 2주 뒤이니. 약혼식까지 준비하려면 생각보다 시간이 촉박하겠어요.”

“……….”

“약혼식에 입을 예복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

약혼식 준비 목록을 들여다보던 루시아는 아무런 답도 들려오지 않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만났을 때부터 베른의 상태가 좀 이상하다 생각은 했지만, 지금 그는 다른 데에 정신이 팔린 듯 아예 넋을 놓고 있었다.

루시아는 베른의 눈앞에 손바닥을 휘저었다.

“베른? 베른!”

“……아! 미, 미안해요. 방금 뭐라고 하셨죠?”

베른이 뒤늦게 정신 차리며 허둥지둥 움직였다.

“약혼식 날짜를 정하고 있었죠? 아무래도 여름제 전까지는 일이 있어서 그 시기에는 조금 힘들 것 같아요.”

그리고는 이미 의논이 끝난 일을 들먹였다.

루시아의 눈엔 베른이 아직 정신을 차린 것 같지 않았다.

결국 루시아는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이런 상태로는 오늘 아무런 논의도 못 하겠네요.”

“죄송합니다. 혹시 화나셨나요……?”

“아뇨, 화난 건 아니에요. 만났을 때부터 베른이 영 집중을 못하시는 것 같아서요.”

“면목 없습니다.”

베른이 고개를 푹 숙이며 연신 사과했다. 그는 피곤한 듯 안경을 벗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오늘 약속도 잡기 힘들었는데. 일이 많이 바빴나 봐요.”

루시아는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지만, 베른은 괜히 제 발이 저려 몸을 움찔 떨었다.

루시아의 말대로 약혼식 논의를 위해 진작 약속을 잡아야 했다. 하지만, 베른은 계속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약속을 뒤로 미루고 미뤄 오늘에서야 약속을 잡은 것이다.

“아니면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요?”

루시아의 진심 어린 걱정에 베른은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약속을 미루고 미룬 이유는 바로 셀린느 때문이었다.

그녀는 발목을 다친 날 이후에도 계속 베른의 주변을 맴돌았다.

아직 다 낫지 않은 발로 절뚝이는 셀린느를 볼 때마다 베른은 도저히 그녀를 냉정하게 쳐낼 수 없었다.

결국 의도치 않게 하루가 멀다 하고 셀린느와 만나게 된 것이다.

곁을 내준 건 아니지만,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루시아를 뒤로하고 셀린느와 만나온 것은 사실이었다.

어쩐지 바람피우는 것만 같아 루시아에게 미안해졌다.

“아니에요. 그냥 요즘 조금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괜히 걱정을 끼쳐드려 미안합니다.”

“일도 좋지만 쉬엄쉬엄하세요. 그러다가 쓰러지시겠어요.”

“……네, 그렇게 할게요.”

“흐음, 오늘은 상태가 별로 좋지 않으신 것 같으니 여기까지 하지만, 일단 약혼식의 날짜 정도는 정하고 헤어지도록 해요. 여름제 전까지는 바쁘다 하셨죠?”

“네, 여름제가 끝나면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될 테니 약혼식은 그 이후에 치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아예 확 뒤로 미루는 건 어때요?”

“더 뒤로요? 여름 전에 하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긴 한데, 생각했던 것보다 준비할 게 더 많아서 아무래도 시간을 널널하게 잡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한숨을 내쉬는 루시아를 따라 베른은 테이블에 늘어놓은 서류들을 살폈다.

바쁜 베른을 대신해서 루시아가 정리해 둔, 약혼식 준비에 필요한 것들이었다.

“괜히 저 때문에 더 힘드신 것 같아 죄송하네요.”

“죄송해하실 거 없어요. 가뜩이나 일 때문에 바쁘신데 이런 걸로 짐을 더 안겨드릴 수는 없잖아요. 베른에 비해 비교적 한가한 제가 하는 게 맞죠.”

“그래도 이걸 다 준비하시느라 힘드셨을 것 같은데요? 자료도 하나같이 다 꼼꼼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약혼식에 필요한 것들이 많아서 깜짝 놀랐어요. 대단합니다, 루시아.”

베른이 칭찬을 하고 나섰지만, 어째선지 루시아는 그것이 못내 불편했다.

베른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불순한 목적으로 약혼식 준비에 매달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사실 도피처로 일을 택한 거지…….’

헤르윈과 입 맞췄던 날부터 매일같이 그를 떠올렸었다.

그가 꿈에까지 나타나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에 이르자, 이러다가는 베른을 남겨두고 헤르윈에게로 달려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베른이 할 일까지 가져와 미친 듯이 약혼식을 준비했던 것이다.

약혼식을 준비하면서 자신과 베른의 관계를 끊임없이 되새기고, 눈코 뜰 새 없이 몸을 고생시키면 헤르윈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약혼을 준비하는 동안엔 헤르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중간중간에 헤르윈이 각종 편지나 선물을 보내서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 자신을 방해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나마 그가 자신을 직접 만나러 오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그럼, 루시아 말대로 약혼식을 조금 더 뒤로 미루도록 할까요?”

“네, 그렇게 해요.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으니까요.”

“급한 일이 끝나는 대로 저도 약혼식 준비를 돕겠습니다. 약혼식도 미뤘으니 이제 조금은 쉬세요.”

“아…네…….”

순식간에 할 일이 사라져버린 루시아는 다시 헤르윈이 자신의 머리를 침범할까 무서웠다.

하지만, 그것을 내색할 순 없었다.

구태여 베른에게 헤르윈과 자신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할 수는 없으니까.

어느새 또 헤르윈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자각한 루시아는 서둘러 그를 머릿속에서 내쫓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베른도 이번 여름제에 참석하실 거죠?”

“당연히 참석해야죠. 황실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가 아닙니까.”

“그러면 둘째 날에 있는 사냥제에도 참석하시나요?”

사냥제라는 말에 베른이 잠시 머뭇거렸다.

“음, 솔직히 말하면 제가 몸 쓰는 일에는 재능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 비하면 사냥을 그리 잘하진 못하죠. 그래도…….”

머쓱하게 말하던 베른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루시아를 쳐다봤다.

“약혼녀를 위해 여우 하나쯤은 잡아보겠습니다.”

혹시 유혹인가? 아니면 가끔 능글맞게 행동할 때가 있으니 지금도 그런 건가?

순간적으로 훅 들어오는 베른에 잠깐 헛된 생각을 하던 루시아는 싱긋 미소로 답했다.

“그렇다면 저도 약혼자를 위해 손수건을 준비해야겠군요. 혹시 좋아하는 문양이나 동물이 있을까요?”

“저는 루시아가 해주는 거라면 다 괜찮습니다.”

“아무거나가 제일 어려운 거 모르시죠?”

“하하, 그런가요? 음, 그러면…….”

무엇이 좋을까 생각하던 베른은 순간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셀린느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베른, 이것 봐. 예쁘지?’

아카데미 시절, 둘만의 비밀의 방에서 셀린느가 완성한 손수건을 베른에게 자랑했다.

아름다운 색감의 푸른 실로 아기자기한 꽃이 수 놓여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꽃이야?’

‘물망초라는 거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거든.’

‘그래? 좋아하게 된 계기라도 있어?’

셀린느가 씩 웃으며 베른의 귓가에 속삭였다.

‘물망초의 꽃말이 진실한 사랑이라서.’

사귀기 시작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베른은 그 말과 함께 수줍게 웃는 셀린느가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졌었다.

그날 셀린느가 완성한 손수건은 자연스레 베른이 갖게 되었고, 이후로도 셀린느는 물망초를 자주 수놓았었다.

‘분명 진실한 사랑 말고 다른 꽃말도 있었던 것 같은데…….’

“베른?”

과거에 젖어 들었던 베른은 루시아의 목소리를 듣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루시아를 앞에 두고 셀린느를 생각하고 말았다.

‘약혼녀를 두고 뭐 하는 거야. 정신 차려!’

베른은 스스로를 질책하며 구겼던 인상을 피며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잠깐 딴 생각했네요. 저는 정말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제게 너무 큰 숙제를 내주시는 거 아니에요?”

루시아가 뾰로통한 표정을 짓자 베른이 웃었다.

“정 그러시면 저희 캐스퍼 가문의 문양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나마 만족스러운 대답인지 루시아가 씩 웃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베른이 여우를 잡으려면 제가 힘 좀 써야겠네요.”

“아…….”

베른이 당황하자 루시아가 그를 흘겨보며 킥킥 웃음을 흘렸다.

“농담이시죠?”

“아뇨, 농담 아닌데요? 베른이 먼저 여우를 잡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아, 이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지금이라도 사냥 연습을 좀 해야겠네요.”

루시아가 기대하겠다며 방긋 웃었다. 그리곤 콧노래와 함께 테이블 위에 있는 서류를 정리했다.

서류를 챙긴 루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쁘더라도 여름제 전에 한 번 만나도록 해요.”

“네. 제가 꼭 시간을 비워놓겠습니다.”

“피곤하실 테니 오늘은 이만 푹 쉬세요. 저도 그럼 가 보겠습니다.”

루시아를 배웅하기 위해 베른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찰랑거리는 루시아의 갈색 머리카락을 보며 베른은 입술을 달싹였다.

“저, 루시아.”

루시아가 뒤를 돌아봤다. 이런 말이 그녀에겐 정말 실례라는 걸 알지만, 루시아라면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물망초 아십니까?”

“물망초요? 꽃 이름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자수 얘기 하셨을 때 물망초를 떠올렸는데 도저히 물망초의 꽃말이 생각나지 않더군요. 혹시 아시는 거 있습니까?”

베른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루시아가 진실을 모르더라도 셀린느와의 추억이 있는 물망초를 물어보는 건 상당히 무례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진실한 사랑 외에 물망초가 무슨 꽃말을 가지고 있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지금 당장 알고 싶을 정도로.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제가 꽃에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지만, 분명 물망초는 진실한 사랑이라는 뜻일 거예요.”

“아…그렇군요.”

역시 그 외의 꽃말은 모르는 건가. 베른은 저도 모르게 어깨가 축 처졌다.

“아, 하나 더 있었네요.”

그때, 루시아가 다른 꽃말을 입에 담았다.

“날 잊지 마세요.”

“……네?”

“그것도 물망초의 꽃말이에요. ‘날 잊지 마세요.’ 진실한 사랑에 이은 꽃말이죠. 이렇게 보니 물망초가 상당히 사랑스러운 꽃이었군요.”

루시아의 말을 듣고 베른은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제야 비밀의 방에서 셀린느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너랑 사귀고 난 다음부터 물망초가 제일 마음에 들더라고. 이걸 볼 때마다 날 생각해줘. 알겠지?’

그때는 연인 사이였기에 영원히 서로를 사랑하길 바라는 마음에 한 말이었겠지만, 그녀와 헤어진 지금은 그 의미가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마음이 허했다. 루시아와 만날 거라고 말했을 때 절망하던 셀린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물망초를 아시는 걸 보면 꽃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보통 남자들은 장미나 튤립처럼 유명하거나 흔한 꽃만 아는 편인데.”

“……어쩌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물망초를 좋아하시나요?”

좋아한다라. 글쎄 좋아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물망초를 볼 때면 셀린느를 떠올렸다.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흐음, 그래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치고는 사연이 있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물망초와 무슨 추억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루시아는 손수건에 물망초도 같이 수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마차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베른은 곧바로 상념에서 빠져나와 루시아를 에스코트했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상냥한 태도로 루시아를 마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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