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29)

<83화>

“사실, 며칠 전에 우리 집에 헤르윈이 왔었거든.”

“헤르윈?”

며칠 전이라면 혹시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갔던 그날을 말하는 걸까?

“응, 루시아 보고 싶다고 찾아왔었는데…….”

루카스가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달싹이자 아리스타가 되물었다.

“왔었는데?”

“하아, 왔었는데 내가 쫓아냈어…….”

아리스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루카스가 불편한 얼굴로 마저 말을 이었다.

“그것 때문에 루시아랑 한 번 싸우고, 부모님께도 혼났거든. 아무리 그래도 손님을 무작정 쫓아내면 어떡하냐고.”

“어, 음…….”

대체 뭐라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리스타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자 루카스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반응할 것 같아서 말 안 하려고 한 거야.”

“아니, 너무 놀라서 그만…. 내가 알기론 오라버니랑 헤르윈은 거의 친형제 수준으로 가까웠던 것 같은데. 아니야?”

루카스가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한 거야?”

“……너도 두 사람 친구이니 얼추 알겠지.”

잠시 고민하던 루카스가 무언가 중얼거리며 아리스타를 쳐다봤다. 강렬한 눈빛을 마주한 아리스타는 저도 모르게 움찔 떨었다.

“사실 루시아가 약혼을 하게 된 게 전부 헤르윈 때문이거든.”

“뭐?”

“아니, 정확히는 두 사람의 마음이 같질 않아서 루시아가 헤르윈을 포기한 거라고 해야 하나.”

루카스의 말을 듣고 아리스타는 일전에 헤르윈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 분명 헤르윈이 루시아의 고백을 거절한 직후, 루시아가 맞선을 봤다고 했었지?’

“난 처음에 둘이 서로를 좋아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어. 하지만, 아카데미 시절의 사건 때문에 서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거라 생각했지.”

루카스의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았다. 헤르윈에게 진실을 듣기 전까지 자신 또한 그와 같은 생각을 했었다.

“하,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루시아는 몇 번이고 헤르윈에게 진심을 고백했는데 그 녀석은 끝까지 그걸 받아주지 않았어.”

루카스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며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루카스가 화났다는 것을 직감한 아리스타가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건 두 사람의 일이잖아. 루시아를 받아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헤르윈을 내쫓은 거야?”

바닥을 노려보던 루카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아리스타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두 사람의 일인데 내가 관여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 하지만, 어느 오빠가 제 동생이 상처받고 있는 걸 두고만 볼 수 있을까?”

루카스는 양 주먹을 꽉 쥐었다. 헤르윈을 쫓아낸 게 홧김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나는 오빠가 꼭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했으면 좋겠어.’

체념한 얼굴로 제게 행복을 말하던 루시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차마 루시아 앞에서 헤르윈의 욕을 할 수 없어, 그저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척 방을 나섰었다.

하지만, 루카스는 도저히 헤르윈을 용서할 수 없었다.

어딜 내놔도 아깝지 않은 동생이 겨우 남자 한 명 때문에 모든 것을 체념하며 팔려 가듯 약혼하는 것이 보기 싫었다.

아무리 루시아가 먼저 부모님께 약혼하고 싶다고 말한 거라고 해도 루시아가 그렇게 행동할 때까지 절벽으로 떠민 부모님도 원망스러웠다.

더더욱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헤르윈은 루시아 앞에서 완전히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뒤에서 루시아를 조용히 응원하는 것뿐.

처음엔 루시아의 약혼과 연관된 모든 것이 싫어서 그녀의 약혼자인 베른도 탐탁잖게 보였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베른이 진심으로 루시아에게 잘해주고 아껴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나마 좋은 사람을 만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실연의 고통을 견뎌내며 이제 겨우 행복해지려는 루시아의 앞에 다시 헤르윈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이제는 루시아를 좋아한다는 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내뱉으면서.

“그 녀석이랑 친하지 않았으면 이미 주먹 날아갔어.”

헤르윈을 떠올리자 다시금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감정이 널을 뛰는 루카스를 보던 아리스타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오늘 계속 한숨을 내쉬었던 게 전부 헤르윈이 짜증 나서 그랬던 거야?”

루카스가 멈칫했다. 그리곤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좀처럼 아리스타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건 아니지만…….”

“내가 봤을 땐 오라버니는 아직 헤르윈한테 미련이 남아있는 것 같은데?”

절대 아니라고 반박하려던 루카스는 어째선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헤르윈을 내쫓은 것 때문에 루시아랑 부모님께서도 뭐라 하셨다며.”

“……헤르윈이 나한테 내쫓기고 나서 거의 반나절 동안 밖에서 루시아 기다렸거든.”

“그렇게 오래?”

“응, 마차 안에도 안 들어갔다더라… 어쨌든 그거 때문에 좀 아팠대. 루시아 말로는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고…….”

아리스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색하게 뒷목을 만지작거리는 루카스의 얼굴에선 약간의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그렇게 헤르윈을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직 그에 대한 정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헤르윈이 아프다니. 난 걔가 아픈 거 거의 못 봤는데.”

예전에 자신과 같이 오거를 맞닥뜨리고 부상을 입었던 것 외에는 그가 아픈 모습을 본 적 없었다.

아카데미 시절, 유독 추웠던 겨울. 전교생의 반 정도가 지독한 감기몸살에 시달릴 때도 그는 쌩쌩했었다.

그만큼 건강 빼면 시체인 애가 고작 반나절 동안 밖에 있었다고 감기에 걸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아리스타는 무언가 떠올렸다.

“혹시 헤르윈이 찾아왔다던 날이 2주 전 금요일이야?”

“그걸 어떻게 알았어?”

“역시나. 그때라면 아프고도 남았겠네.”

“뭘 알고 있는 거야?”

루카스가 갑자기 흥분하며 아리스타의 어깨를 잡았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벽안을 보고 아리스타는 뒤로 슬슬 물러섰다.

“헤르윈이 오라버니 저택에 가기 전에 나랑 같이 있었거든. 그때부터 헤르윈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어. 듣기로는 일주일 동안 밥도 안 먹고 술만 마셨다고…….”

루카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헤르윈이 술을 내리 마셨다는 말을 못 믿는 눈치였다.

그에 아리스타는 옅은 콧김을 내뿜으며 진지하게 루카스를 쳐다봤다.

“오라버니는 헤르윈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해?”

루카스가 단번에 얼굴을 굳혔다.

“당연하지. 그동안 루시아가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는 거들떠도 안 보던 녀석이 이제 와서 좋아한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내가 가지긴 싫고, 남이 가지긴 아까운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헤르윈이 그렇게까지 나쁜 녀석일까? 나보다 오라버니가 헤르윈이랑 더 오래 알고 지냈으니까 그 녀석 성정 잘 알잖아.”

아리스타가 계속 헤르윈을 두둔하고 나서자 루카스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내 말은, 헤르윈도 헤르윈 나름의 사정이 있다는 거야. 그리고 헤르윈이 루시아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한 거, 착각 아닐걸?”

“뭐?”

“헤르윈은 지금까지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했어. 루시아가 다른 남자랑 있는 걸 보고 나서야 제 마음을 자각한 거지.”

루카스는 잠시 넋을 놓다가 이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참이나 허, 참 등 어이없는 탄식을 계속 흘리던 루카스는 문득 아리스타가 헤르윈의 입장을 대변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런데 헤르윈이 루시아를 좋아한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야 헤르윈한테 직접 들었으니까.”

“직접 들었다고? 그러면 그전까지는 자각하지 못한 이유도 알고 있어?”

아리스타가 멈칫했다. 헤르윈이 루시아에 대한 마음을 자각하기 전, 자신에 대한 동경을 사랑으로 착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 얘긴 아무한테도 말 못 해. 특히 오라버니한테는…….’

얼른 말해 보라며 눈을 부릅뜬 루카스를 보면서도 아리스타는 입술만 달싹였다. 그리고는 서둘러 얼버무렸다.

 “그, 그것까지는 몰라. 하지만, 나랑 있다가 루시아한테 간 게 맞다면 아마 고백했을 것 같은데?”

“뭐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아리스타가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놀랄 일 아니잖아. 헤르윈이 루시아 찾을 때 이미 예상한 거 아니었어?”

“그, 그렇긴 하지만, 난 그 녀석이 그냥 루시아 마음을 흔드는 건 줄 알고…….”

“흔들어놓기는 무슨. 루시아가 자신을 거절할까 봐 전전긍긍하던 녀석이야. 헤르윈도 결코 가벼운 감정으로 그런 게 아니라고.”

루카스는 뒤늦게 진지한 얼굴로 제게 루시아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한 헤르윈을 떠올렸다.

아무리 냉정하게 내린 판단이라고 하더라도 당시에는 이미 헤르윈에 대한 편향적인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

헤르윈에 대한 미안함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원망과 맞부딪쳤다.

“그, 그래도 나는 아직 헤르윈 용서 못해…….”

하지만, 말과 다르게 루카스는 도통 얼굴을 펴지 못했다. 죄책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기에 아리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헤르윈을 미워하든 싫어하든 구워삶든 전부 오라버니 마음대로 해. 그런데 오라버니.”

순간 가라앉은 목소리에 루카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건 두 사람의 일이야. 제삼자가 끼어들면 안 돼.”

루카스는 차마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아리스타의 말이 모두 맞기 때문이다.

태어날 적부터 워낙 예뻐했던 동생이라 루시아 일이라면 물불가리지 않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감정을 앞세워 행동했다.

문득 부끄러워졌다. 아리스타는 공과 사를 구별해서 냉정하게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정작 그녀보다 나이가 많은 자신은 감정에 휘둘려 상황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웃음기라고는 없는 진지한 보랏빛 눈동자를 보며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멋있다.”

“어? 뭐라고 했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루카스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괜히 말을 바꿨다. 어쩐지 아리스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자기보다 어린 동생에게 어른스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줘서 그런 걸까?

‘어쩐지 조금 더운 것 같기도 하고…….’

제 귓불이 달아올랐다는 것을 루카스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런데 루시아랑 싸울 정도면 헤르윈이 많이 아팠던 모양이네? 하긴, 떠나기 전부터 이미 폐인에 가까운 상태였으니.”

간질거리는 손끝을 툭툭 건드리던 루카스는 옆에서 들려오는 말에 순간 현실로 돌아왔다.

이내 그는 며칠 전, 루시아와 부모님께서 했던 말을 떠올리곤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 정말 많이 아팠던 걸까? 나는 루시아랑 부모님께서 과장하신 거라고 생각했는데…….”

“루시아가 뭐라고 말했는데?”

“아무 말도…….”

“아무 말도?”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날 경멸의 눈초리로 쳐다봤어.”

좌절하는 루카스를 보니 루시아가 그를 어떤 눈초리로 봤을지 상상됐다.

웬만하면 웃는 얼굴로 넘기는 루시아가 그렇게 반응했다면…….

“응, 오라버니가 잘못했네.”

“하아아… 어떡하지? 헤르윈한테 가서 사과해야 하나?”

“글쎄. 그런데 노려보는 것 말고 루시아가 따로 한 말은 없었어? 헤르윈이 많이 아팠다며. 뭐, 상태가 좋아졌다든지, 감기가 전부 나았다든지.”

“음, 그러고 보니 집으로 돌아왔을 때 루시아 상태가 조금 이상하긴 했어.”

“어디가 이상했는데?”

“뭐랄까, 얼굴이 좀 붉었다고 해야 하나? 처음에는 아무리 불러도 말이 없길래 헤르윈한테 감기라도 옮은 건가 싶었거든.”

그때를 떠올린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루시아의 행동에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아리스타는 얼추 두 사람 사이가 조금은 진전됐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아리스타는 슬쩍 루카스를 훔쳐봤다. 조금 전 한숨을 푹푹 내쉬며 죽을상을 하던 것과 달리 그의 얼굴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고민했던 건 좀 해결됐어?”

“어?”

루카스가 퍼뜩 고개를 들고 아리스타를 쳐다봤다.

상담을 해준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자기 말만 한 건 아닌가 싶어 아리스타는 내심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루카스가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응, 덕분에 머리가 아주 말끔해졌어! 고마워, 아리스타! 네가 아니었다면 계속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을 거야.”

“고, 고맙긴 뭘… 도움이 돼서 다행이야.”

루카스가 나중에 보답이라도 하겠다며 싱긋 웃어 보였다. 확실히 기분이 풀린 루카스를 보고 아리스타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뒷짐 진 손을 만지작거렸다. 온몸에 가득 퍼진 설렘으로 가슴이 콩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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