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바로 자택으로 갈까요?”
마부가 작게 나 있는 창문으로 루시아에게 목적지를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려던 루시아는 문득 집에 손수건으로 만들 천이 있는지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푸른 실도 저번에 다 떨어졌었던가?’
그 외에도 필요한 물건들을 떠올린 루시아는 입을 열었다.
“아니, 들어가기 전에 잠깐 저잣거리에 들르도록 하지.”
마부는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목적지로 향했다. 얼마 있지 않아 가게가 줄지어 늘어진 거리에 도착하고 루시아는 마차에서 나왔다.
“이것저것 사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거야. 두 시간 뒤에 이곳으로 와.”
“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가씨.”
마차가 떠나가고 루시아는 바로 앞에 있는 가게에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혹시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있으신가요?”
“손수건으로 만들 천을 찾고 있는데.”
“손수건 말씀이시죠? 이쪽으로 오세요.”
직원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도 루시아는 주위를 둘러봤다. 가게를 제대로 찾은 모양이었다. 곳곳에 다양한 재질의 천이 놓여 있었다.
꼼꼼하게 살펴보던 루시아는 익숙한 천을 보고 멈칫했다.
하얀 실크 베이스에 부분부분 금빛 자수가 들어가 있어 보는 방향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천이었다.
루시아는 홀린 듯 그 천을 들어 올렸다.
‘……헤르윈한테 쓰던 천이었는데.’
헤르윈을 위한 손수건을 만들 때면 자주 애용하던 천이었다. 헤르윈은 항시 빛나는 사람이라 이 천이 가장 어울린다 생각했다.
“손님, 안목이 좋으시네요. 그건 저희 가게에서 제일 잘 나가는 상품입니다.”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직원이 해맑은 얼굴로 말을 얹었다.
덕분에 루시아는 추억에 젖지 않을 수 있었다.
루시아는 고개를 내저으며 천을 도로 내려놓았다.
“마음에 안 드시나요?”
“다른 걸 보고 싶군요.”
“어떤 디자인을 원하십니까? 혹시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용도인가요?”
“곧 약혼자가 사냥에 나갑니다. 그때 줄 손수건을 만들 생각인데 그에 맞는 천을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
“약혼자분께 드릴 선물이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직원이 딱 맞는 천을 가져오겠다며 가게 내부로 사라졌다. 루시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애꿎은 천만 만지작거렸다.
헤르윈이나 가족 외의 사람에게 손수건을 선물하는 건 처음이라 낯설기만 했다.
어쩐지 사람들에게 베른을 약혼자라고 말하는 것이 영 껄끄러웠다. 꼭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약혼식을 치르고 나서도 이럴까 봐 괜히 걱정됐다.
“오래 기다리셨죠? 저희 가게에서 특별히 공수한 천들입니다.”
얼마 있지 않아 직원이 다가와서 고급스러운 종류의 천들을 보여줬다. 직원이 온갖 부연 설명을 덧붙이긴 했지만, 루시아는 그중에서 그나마 베른과 잘 어울리는 천을 골랐다.
은빛이 도는 옅은 녹색의 천이었다.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직원의 감사 인사를 들으며 루시아는 밖으로 나왔다. 루시아는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손에 들린 물건을 살폈다.
“……이건 괜히 샀나?”
처음엔 베른에게 줄 천만 살 생각이었지만, 어느새 저도 모르게 헤르윈 손수건에 쓰는 천도 사고 말았다.
“……어차피 주지도 못하는데.”
다시 들어가서 환불해 달라고 할까 고민하던 것도 잠시 루시아는 걸음을 옮겼다.
‘부모님께 드리지 뭐.’
어차피 헤르윈에게만 쓰던 천도 아니었다. 루시아는 부모님을 떠올리며 핑계 아닌 핑계를 댔다.
이후로도 여러 가게를 들러 루시아는 각종 물건을 구매했다.
알록달록한 실까지 사고 나서야 루시아는 한숨을 돌렸다.
“생각보다 많네.”
쇼핑을 끝내고 보니 짐이 한 가득이었다. 이걸 어떻게 가져갈까 고민하던 루시아는 잠시 광장에 있는 카페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완전한 여름이었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많이 얇아졌고, 어린아이들은 분수대 근처에서 물놀이를 치고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시원해지는 광경이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주문한 음료가 나오고, 광장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 루시아의 뒤로 한 사내가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주변을 살피던 그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조심스러운 손길로 루시아 가방에 손을 뻗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물건을 훔쳐 가는 것도 꿈에도 모른 채 루시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사내는 그 짧은 시간 내에 루시아의 지갑과 그 외의 돈이 되는 것을 전부 털었다.
이제 모든 볼일이 끝나 도망치려던 찰나, 그의 앞에 두꺼운 벽 같은 것이 나타났다.
“으악!”
바로 뒤쪽에서 비명이 들려오자 루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웬 사내가 누군가에게 제압당하고 있었다.
“벌건 대낮에 도둑질이라니. 간도 크군.”
“큭, 이, 이거 놔!”
“……헤르윈?”
익숙한 검은 머리카락을 보고 루시아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사내를 제압하던 헤르윈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서늘하게 읊조렸던 것과 다르게 활짝 웃으며 루시아를 쳐다봤다.
“안녕, 루시아.”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오는 미소에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 모습을 미처 보기도 전에 헤르윈은 근처에 놓인 루시아의 물건 중, 곱게 포장되어있던 리본 끈을 풀어 헤쳐 그것으로 사내의 양 손목을 옭아맸다.
“페, 페네우스 공자님!”
지척에서 기사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헤르윈을 부르며 헐레벌떡 다가왔다.
“금품을 갈취하던 자입니다. 경비대에 끌고 가도록 하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기사들은 경례와 함께 헤르윈이 잡은 사내를 끌고 갔다.
영문도 모른 채 어정쩡하게 있던 루시아는 먼지를 터는 헤르윈을 쳐다봤다.
“이게 무슨…….”
어안이 벙벙한 루시아의 앞으로 헤르윈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에 사내가 훔친 물건을 돌려줬다.
“어? 내 지갑.”
“뭐야. 도둑질당하는 것도 몰랐어?”
“방금 그 사람이 훔친 거야?”
“……정말 몰랐구나.”
허탈한 웃음을 내뱉던 것도 잠시, 헤르윈은 씩 웃으며 알게 모르게 루시아의 손을 쓸었다.
루시아는 손목까지 올라온 딱딱한 손가락을 느끼며 황급히 손을 뒤로 뺐다.
“고,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도둑질당한 것도 몰랐을 거야.”
“말로만 고맙다고 할 거야?”
“어?”
“뭔가 보상이 필요할 것 같은데.”
평소 같았으면 조심하라며 애 취급할 헤르윈이 조금 능글맞았다. 꼭 브라이언을 보는 것만 같아 루시아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뭐 갖고 싶은 거라도 있어?”
“음… 글쎄.”
헤르윈은 뭐가 좋을지 곰곰이 고민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헤르윈을 보며 루시아는 천천히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헤르윈의 복장이 평소와 달랐다. 검 휘두르기 편한 복장이 좋다며 늘 셔츠에 편한 바지만 입던 그였는데 오늘은 아예 정복을 차려입은 채였다.
더운 날씨라 그런지 헤르윈의 이마와 목으로 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조금 섹시한 것 같기도…….’
저도 모르게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던 그때, 헤르윈과 눈이 딱 마주쳤다. 너무 놀란 나머지 루시아는 소리를 빽 질렀다.
“가, 갑옷을 입었네?!”
“……응. 잠깐 일이 있었거든.”
헤르윈이 씩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루시아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무슨 일이길래 갑옷까지 차려입은 거야?”
“황실에서 의뢰가 들어왔어. 최근 수도 인근에서 몬스터가 발견됐나 봐.”
“몬스터?”
헤르윈의 눈치를 보던 루시아가 심각성을 파악하며 얼굴을 굳혔다.
“그거 심각한 일 아니야?”
“심각하다면 심각하지. 그런데 조사해보니까 그렇게까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서식지가 발견되지 않기도 했고, 아직까지는 민간인의 피해가 없거든. 그래도 당분간 경비를 단단히 해야겠지.”
“너는… 괜찮아?”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헤르윈은 걱정 어린 루시아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오로지 자신만을 걱정하는 루시아를 보니 마음이 술렁거렸다.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론 기분 나쁘지 않은 감각이었다. 헤르윈의 입가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나 걱정하는 거야?”
애정을 가득 담은 눈동자로 부드럽게 웃는 헤르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위험했다. 루시아는 고개를 돌리며 횡설수설했다.
“거, 걱정하지 그럼 안 하겠어? 아무리 네가 소드 익스퍼트라고 해도 걱정되는 건 당연하잖아!”
“그래? 기쁘다.”
“기쁠 건 또 뭐 있어…….”
루시아는 괜히 투덜거리다가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차가운 음료를 마셔도 도저히 몸의 열기가 가라앉질 않았다.
“하여튼 몬스터 때문에 며칠 동안 수도 외곽을 주구장창 돌아다녔어. 미안해, 너를 직접 보러 가고 싶었는데.”
“나를 보러 온다고?”
“응, 혹시 내 마음을 오해할까 봐 몸이 낫는 대로 너를 찾아가려고 했어. 갑자기 일이 생겨서 그러지 못했지만 말이야. 내가 보낸 선물 잘 받았어?”
“어, 어…….”
그가 자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선물과 각종 편지를 보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들으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어머니랑 제롬의 말로는 네가 우리 집에 왔었다는데, 사실이야?”
자연스레 헤르윈과의 키스를 떠올린 루시아는 달아오르려는 열기를 애써 억눌렀다.
“마, 맞아. 네가 아프다고 해서 잠깐 보러 갔었어.”
당시 헤르윈은 잠에 취해있었으니 자신과 키스했던 것을 모를 것이다. 루시아는 평정을 유지하며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그에 헤르윈은 팔짱을 끼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루시아를 살폈다.
“그래? 난 네가 온 줄도 몰랐어.”
“그야 네가 자고 있을 때 봤으니까.”
“……그러면 그때 나랑 아무 일도 없었어?”
다 안다는 듯한 말투에 루시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긴장됐다.
“무슨 말이야? 뭔 일이라도 있었어?”
그리고는 최대한 모르는 척 잡아뗐다. 천연덕스러운 루시아의 반응에 헤르윈은 순간 헷갈렸다.
“꿈은 아닌 것 같은데…….”
“응?”
헤르윈의 중얼거림에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냥감을 바로 앞에 둔 포식자처럼 헤르윈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헤르윈은 테이블 위에 있는 루시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놀란 루시아가 움찔 떨며 손을 빼려 했지만, 헤르윈은 놓아주질 않았다.
“헤, 헤르윈 손 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고?”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일단 이것 좀 놓고…….”
복숭아처럼 보기 좋게 달아오른 저 볼을 한입에 베어 물고 싶었다. 꿈처럼 갈증이 일었다.
“내가 꿈을 하나 꿨거든.”
“……꿈?”
“응,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생생해서 꿈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설마 키스했던 걸 기억하기라도 하는 걸까?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꿈을 꾼 건데?”
잠시 고민하던 헤르윈이 씩 웃으며 붙잡은 루시아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그러면서 상체를 앞으로 숙여 루시아에게 속삭였다.
“너랑 키스하는 꿈.”
쿵쿵 주체 없이 뛰는 심장 박동이 바로 귓가에까지 들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루시아는 반응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혹시 자신을 떠보는 건가 싶어 헤르윈을 쳐다보자 그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꿈이 아니구나?”
만약 헤르윈만의 꿈이었다면 루시아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거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루시아는 딱 비밀을 들킨 아이처럼 얼어붙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붉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벌거숭이가 된 것만 같았다. 루시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헤르윈의 손을 뿌리쳤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너, 너랑 그런 걸 할 리가 없잖아.”
루시아는 헤르윈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허둥지둥 짐을 챙겨 자리를 떠나려 했다.
하지만, 워낙 산 물건이 많았기에 단번에 자리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우왕좌왕하는 루시아의 옆에 헤르윈이 다가와 그녀의 짐을 마저 챙겨줬다.
“이리 줘.”
“됐어. 이 정도는 들어줄게. 타고 온 마차는 있어?”
헤르윈은 태연했다. 상대방을 있는 대로 흔들어놓고 태연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화가 났다.
“됐다니까! 그거 얼른 달라고!”
루시아가 손을 뻗어 헤르윈 손에 들린 물건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뺏기는커녕 상자가 떨어지며 안의 내용물이 튀어나왔다.
“아, 이런…….”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은 다름 아닌 손수건에 쓰일 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