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29)

<77화>

서서히 동이 트고, 묽은 수채화를 풀어 해친 듯한 푸른 빛이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왔다.

루시아는 멍하니 방 안을 둘러봤다.

그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꿈이었구나.”

과거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꿈꿔서 순간 현실인 줄로만 알았다.

“아니, 조금 달랐던가…….”

꿈에서 자신은 헤르윈에게 고백하지 않았다.

고백하지 않음으로써 13년 동안의 외롭고 지치는 미래를 어린 자신이 겪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변수는 하나 더 있었다.

“설마 이것도 내 희망 사항인가?”

헤르윈이 고백을 하다니.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에게.

어제 고백을 받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토록 염원했던 일이 꿈속에서 일어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모든 것을 꿈이라고 자각하고 나니 마음이 복잡할 뿐이었다.

“나는 아직도 헤르윈에게 벗어나지 못했나 봐…….”

루시아는 그저 자신의 무의식이 꿈에 반영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과거와는 모순되고 정반대되는 꿈을 꿨을 터.

고백하지 않음으로써 느꼈던 안도감과 헤르윈의 고백을 받음으로써 느낀 희열이 부딪쳤다.

처음으로 헤르윈보다 우위에 선 순간이었다.

그 순간 쾌감을 느꼈단 사실이 지독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최악이야. 루시아 아그네스.”

루시아는 자책했다.

그럼에도 가슴은 제 마음대로 요동쳤다. 아무리 꿈에 불과할지라도 헤르윈의 고백엔 저절로 반응했다.

루시아는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6시에 다다른 이른 시각. 잠도 다 깨버렸다. 루시아는 비척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로 세수하며 달아오르는 마음을 조금은 가라앉혔다.

“꿈에 너무 연연하지 말자.”

그래, 꿈은 꿈일 뿐. 과거에 있었던 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게, 어제 왜 나한테 고백해서는 사람 헷갈리게 만들어.”

괜히 애꿎은 화살을 헤르윈에게 돌렸지만, 그럴수록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루시아는 서서히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사랑해, 루시아.’

달달하다 못해 녹아버릴 듯한 눈빛과 감미로운 목소리, 그리고 손등에 닿았던 그의 숨결까지 모든 게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괜히 얼굴만 화끈 달아올랐다.

다시 한번 냉수마찰을 하던 루시아는 헤르윈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쓰다 문득 걸리는 부분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평소랑은 조금 달랐던 것 같은데.”

어제, 헤르윈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었다.

“살도 좀 빠진 것 같았고, 다크서클도 심했고, 눈이 조금 충혈되어 있었지?”

한눈에 봐도 수척해진 모습에 저도 모르게 걱정했었는데 갑작스러운 고백에 너무 놀라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제 일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헤르윈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볼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편지라도 써볼까?”

그를 직접 만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약혼자가 있는 상태에서 미혼 남성의 집에 가는 것은 법도에 어긋났다.

“그러고 보니 몸도 뜨거웠었어! 많이 아팠던 거면 어떡하지?”

헤르윈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자는 생각은 어느새 잊어버렸는지, 루시아는 방 안을 서성이며 그에 대한 걱정을 키워갔다.

* * *

“으음…….”

“도련님, 깨어나셨습니까?”

흐릿한 시야 속에서 헤르윈은 제롬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헤르윈은 몸이 천근 추를 단 것처럼 무거운 것을 느꼈다.

“끙…….”

“일어나지 마세요. 아직 열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열…이라고?”

“네, 어젯밤에 저택에 도착하시자마자 바로 쓰러지셨잖아요. 기억나지 않으세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정신으로 저택으로 돌아왔는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지끈지끈 울리는 머리에 헤르윈이 골을 눌렀다. 제롬의 말대로 열이 있는 건지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열이라니…….”

“어제 마님께서 얼마나 놀라셨는지 아세요? 도련님께서 크게 앓으신 적 없으셔서 더 놀라셨던 것 같아요.”

뒤늦게 스칼렛의 존재를 떠올린 헤르윈이 제롬을 쳐다봤다.

“맞아, 어머니가 왔었지? 어머니는 지금 어디 계셔?”

“식사 중이십니다. 곧 오실 거예요.”

“그래…….”

긴장이 좀 풀렸는지 헤르윈은 노곤하게 침대에 온몸을 맡겼다.

이렇게 아팠던 적은 살면서 손에 꼽을 정도라 유독 몸이 더 축축 늘어졌다.

움직일 수 없으니 잡생각이 많아졌다.

‘그러고 보니…….’

과거에 있었던 일을 꿈에서 본 것 같았다.

물론 그때와는 조금 다르게 상황이 흘러갔지만 말이다.

어제의 루시아처럼 꿈속에서 본 어린 루시아도 자신을 떠나려 하여 필사적으로 그녀에게 제 마음을 고백했었다.

‘그 뒤에 어땠더라?’

루시아가 대답을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제게서 멀어지려는 그녀의 뒷모습만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에 헤르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벌이야.’

가벼운 감기 한 번 걸리지 않던 저가 이리 아픈 것은 분명 루시아에게 상처를 준 죄로 신이 내린 벌이 틀림없었다.

‘루시아도 나만큼 힘들었을까?’

마음을 자각한 지 얼마 안 된 자신도 이리 괴로운데 루시아는 어떻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고통을 참았던 걸까?

아니, 어떻게 이 고통을 견뎌가며 저를 사랑했던 걸까?

루시아의 입장이 되어보니 그녀가 대단하다 느껴지면서 미안해졌고, 평생을 다해 사죄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도련님, 밥 드실 수 있으세요?”

옆에 아직도 남아있던 제롬이 말했다.

“아니, 입맛 없어.”

“하지만, 요 며칠 제대로 된 식사 한 번 하신 적 없으시잖아요. 어제도 바로 밖으로 나가셨으면서.”

“몸이 안 좋아서 그래.”

“그래도…….”

다 죽어가는 목소리를 듣고 헤르윈이 정말 아프다 생각한 제롬이 발을 동동 굴렀다.

“아플수록 잘 챙겨 먹어야 하지 않겠니.”

그때, 스칼렛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왔는지 문가에 서 있던 그녀는 점차 헤르윈에게 다가왔다.

“주방장에게 특별히 말해서 갖고 왔단다.”

“마, 마님. 저한테 시키시지 않고…….”

스칼렛이 미음을 들고 나타나자 제롬이 당황하며 그녀의 손에 있는 쟁반을 가져갔다.

“어디, 열은 좀 떨어졌니?”

이불을 걷어낸 스칼렛이 헤르윈의 이마에 손을 올려 체온을 쟀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낫구나.”

“저는 괜찮아요.”

“괜찮긴 무슨. 목소리도 잔뜩 가라앉아있으면서. 얼른 일어나서 이거라도 먹거라. 그래야 약 먹고 낫지.”

꼭 애 취급을 하는 것 같아 헤르윈은 꿍얼거리다가 결국 자리에 앉아, 미음을 먹기 시작했다.

깨작깨작거리는 헤르윈을 보던 스칼렛이 제롬에게 손짓을 하며 그를 내쫓았다.

방에 둘만 남게 되자 헤르윈은 스칼렛을 쳐다봤다.

“내게 할 말 없니?”

“……듣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어제 아그네스 백작가에 갔다는 얘기는 들었다.”

헤르윈이 먼저 말하지 않을 거란 걸 직감한 스칼렛은 떠보는 것을 멈췄다.

“루시아를 만나러 간 것 같던데. 맞니?”

“……네.”

“루시아의 약혼 소식도 그렇고, 헨리의 편지도 그렇고, 어제 네가 했던 행동도 그렇고… 아무래도 루시아랑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구나.”

헤르윈은 입을 꾹 다물며 대답을 피했다.

예상했던 바라 스칼렛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가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 마음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래도 입을 다물고 있을 거야?”

아예 헤르윈이 고개를 돌려버리자 스칼렛은 인상을 찌푸렸다.

“마부가 말하길 네가 아그네스 백작가에서 쫓겨났다고 하더구나. 아무리 아그네스와 허울 없는 사이라 하여도 너를 몇 시간 동안 밖에 세워둔 것까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생각은 없다. 당장 오늘이라도 아그네스에 항의할 생각이야.”

헤르윈이 퍼뜩 고개를 들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지 마세요……!”

“이렇게까지 해야만 나를 보는구나.”

팔짱까지 끼며 굳은 표정을 짓는 스칼렛을 보고 헤르윈이 주먹을 꽉 쥐었다.

“제가…제가 먼저 루시아에게 못할 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니 부디 용서해주세요.”

“무슨 잘못을 했길래 너를 쫓아내기까지 했을까?”

헤르윈이 입을 뻐끔거렸다. 아무리 루시아 사이에 여러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을 부모인 스칼렛에게 털어놓기에는 힘들었다.

하지만 애꿎은 불똥이 아그네스에게 튀게 둘 수는 없었다.

“자세한 얘기는 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 행동으로 루시아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어제는 제가 루시아에게 급히 할 말이 있어서 무작정 찾아간 것뿐이에요.”

스칼렛은 아무 말 없이 헤르윈을 내려다봤다.

헨리에게 편지를 받고 수도에 도착하기 전까지 스칼렛은 헤르윈이 감정을 숨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루시아 이름을 들먹이고 그녀를 약혼녀로 들이자 말했다.

하지만 다시 만난 제 아들은 사랑에 허덕여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헨리가 쓴 편지가 거짓인 건지, 아니면 그사이 헤르윈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는 아들을 이대로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내가 더 이상 할 말은 없겠구나. 하지만 하나만 물어보지. 루시아를 좋아하니?”

헤르윈이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아도 스칼렛은 그의 답을 알 수 있었다. 생기를 잃어가던 붉은 눈동자에 불꽃이 튀어 오르고 있었다.

“그나마 저번에 내가 했던 말에 답을 찾은 것 같아 다행이구나.”

저번에 북부로 올라갔을 적 스칼렛이 했던 말을 떠올랐다.

‘루시아도 언젠가는 누군가와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할 거란다. 그 아이가 다른 사람 손을 잡고 떠났을 때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진정한 친구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알아서 잘 생각해보렴.’

굳이 멀리 돌아오지 않더라도 이리 쉽게 해답을 찾을 수 있었는데도 헤르윈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시아가 평생 제 곁에 있을 거란 오만에 차 있던 것이 분명했다.

입안이 씁쓸했다. 그때라도 제 마음을 자각했다면 루시아가 제 곁에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르윈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지자 스칼렛은 그의 손에 들린 그릇을 치우고 약을 건넸다.

“의사가 당분간 푹 쉬라고 하더라. 얼른 약 먹고 한숨 자렴.”

헤르윈은 약을 잠시 손에 굴리다가 순순히 스칼렛의 말대로 그것을 먹은 뒤 침대에 누웠다.

“혹시 열이 다시 오르거나, 머리가 아프면 사람을 불러야 한다. 알겠지?”

“어디 가시게요?”

스칼렛의 말투가 꼭 자신은 집에 없을 거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오랜만에 수도에 왔으니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야지.”

“아그네스에 가셔서 괜한 소리 하시는 건 아니죠?”

물수건을 짜던 스칼렛이 멈칫하며 제 아들을 내려다봤다. 한참 말이 없던 스칼렛이 픽 웃으며 물수건을 헤르윈 이마에 올렸다.

“네가 하도 입을 다물고 있어서 했던 말이야.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렴.”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그제야 의심이 풀린 헤르윈은 약의 기운에 몸을 맡겼다.

약의 효과로 금세 잠든 헤르윈이 고운 소리를 내었다.

스칼렛은 헤르윈이 푹 잘 수 있도록 커튼을 단단히 친 다음 방에서 나왔다.

복도에는 제롬이 대기하고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헤르윈을 잘 살펴봐주렴.”

“네, 알겠습니다. 마님께선 어디 가시나요?”

“아그네스 백작가에.”

스칼렛은 헤르윈에게 보여줬던 포근한 미소를 지우며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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