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129)

<78화>

“뭐? 지금 누가 왔다고?”

“페네우스 공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시도록 할까요?”

아론의 말을 듣고 잠시 당황했던 줄리안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얼른 안으로 모시거라.”

집사장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줄리안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설마 친구가 이리 갑자기 찾아올 줄은 몰랐다. 아니, 애초에 수도에 온 것조차 몰랐다.

저번에 편지를 주고받았을 때는 수도에 온다는 말 없었는데.

“이럴 때가 아니지 참.”

줄리안은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고 서둘러 응접실로 향했다.

마침 스칼렛이 집사장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스칼렛!”

북부공작의 부인답게 고고한 모습을 보이던 스칼렛의 얼굴이 줄리안을 보자마자 부드럽게 풀어졌다.

“줄리안. 이게 대체 얼마만이야!”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반기며 서로를 얼싸안았다.

“나는 네가 방문했다는 소리를 듣고 잘못 들은 건가 했어. 대체 수도엔 언제 왔던 거야?”

“어제 막 도착했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나란히 응접실로 들어간 그들은 마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오면 말을 하지 그랬어. 그랬다면 이것저것 준비했을 텐데.”

“에이, 우리 사이에 뭘 준비하고 그래.”

“내가 마음이 편하질 않아서 그렇지. 아론, 다과를 준비해주겠나? 스칼렛이 뭘 좋아하는지 알지?”

“네, 금방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줄리안이 뒤에 있던 아론에게 명령했다.

“어머, 내가 여기 안 온 지도 벌써 3년이 넘는데 그걸 다 기억해?”

“아론이 워낙 뛰어난 집사잖아. 네가 좋아하는 스콘이랑 차를 내올 거야.”

아무리 친구라 하여도 연락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쳤으니 곤란했을 텐데 최선을 다해 대접하자 스칼렛이 미소 지었다.

“그동안 별일은 없었지?”

“별일은. 그런 거 없었어.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수도에 오다니. 무슨 볼일이라도 있었던 거 아니야?”

“나는…….”

루시아의 약혼 이야기를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다는 얘기를 차마 바로 할 수 없었다.

루시아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던 헤르윈의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가 진정으로 큰 잘못을 했다면 줄리안은 스칼렛을 꺼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줄리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태도였다.

혹시 그녀가 일부러 자식들의 이야기를 배제하려는 건가 싶어 스칼렛은 잠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북부에만 있으니 갑갑해서 말이야. 자식들도 전부 수도에 가 있고, 남편은 허구한 날 몬스터를 토벌하러 가니 성이 적적해.”

줄리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몬스터라니… 아직도 몬스터가 남아있어?”

“좀처럼 사그라들지가 않네. 그래도 예전에 몬스터 군단이 발견됐을 때에 비하면 좀 많이 나아졌어.”

“그렇다면 다행이네. 혹 우리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언제든 도와줄 테니까.”

스칼렛은 몇 년 전 신년회를 즐기러 왔다가 북부에서 몬스터가 창궐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날을 떠올렸다.

당시에 반년 넘게 아그네스 백작가에 의탁하며 큰 빚을 졌었다.

“그때 우리를 도와준 것도 아직 다 갚지 못했는걸? 마음만이라도 고마워.”

친구의 따뜻한 마음에 스칼렛이 줄리안의 손을 꽉 잡았다.

마침 타이밍 좋게 하녀들이 다과를 준비했다.

줄리안이 말한 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가득 차려진 다과상에 스칼렛은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다과를 즐기며 마저 대화를 이어갔다.

“맞아, 몬스터 하니까 하는 말인데 그이가 요즘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

줄리안 입에서 몬스터란 말이 나오자 스칼렛이 차를 마시다 말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뭔데 그래?”

“최근 숲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대. 숲 근처에 있는 밭이 파해 쳐지는 곳도 있고, 곳곳에서 짐승들의 사체가 발견되는 모양이야.”

“그냥 짐승의 소행 아니야?”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조사를 착수해보니 밭이나 숲에 찍힌 발자국이나, 사체의 형태가 짐승의 소행으로 보기엔 어렵나 봐.”

요한의 말에 의하면 가끔 숲에서 발견된 동물 사체는 포식자가 제멋대로 뜯어 헤친 모습이 아니라, 기다란 꼬챙이가 관통한 모양이라고 했다.

게다가 발자국이 사람의 것과 비슷하다는 말을 듣고 스칼렛이 인상을 찌푸렸다.

“더 자세한 건 없어?”

“나도 그이가 하는 말을 들은 것뿐이라 잘 모르겠어. 하지만, 발자국 크기가 사람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건 확실해.”

줄리안이 들은 말이 부풀려진 것이 아니라면 확실히 이것은 몬스터의 소행이었다.

그것도 지능이 있는 몬스터.

“혹시 모르니 황실에도 한번 들러봐야겠네. 좋은 정보 알려줘서 고마워.”

“아니야. 이 정도는 뭘. 그런데… 그 반응을 봐선 진짜 몬스터인가 보네?”

“응, 아마 그럴 확률이 높을 거야. 설마 몬스터가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네. 북부에서 밑으로 내려온 걸까?”

“나야 모르지. 하지만,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잖아?”

“전에 언제… 아!”

스칼렛은 뒤늦게 일전에도 수도 근처에서 몬스터가 발견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맞아, 헤르윈이 오거를 봤다고 했지.”

“아카데미가 수도에서 떨어져 있다고 해도 이 근방이니까.”

헤르윈이 크게 다쳤다는 소식과 함께 몬스터가 수도에서 나타났다는 사실을 접했다.

그때는 무리에서 떨어진 오거가 우연히 수도 인근 숲까지 내려온 거라고 판단했지만, 이번에 줄리안이 말한 것이 정말로 몬스터가 맞다면 이건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이에게 이 소식을 알려야겠어.’

스칼렛은 속으로 하일에게 연락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조금 뒤숭숭하네. 무슨 일 생기는 건 아니겠지?”

줄리안도 위기감을 느꼈는지 그녀가 소름 돋은 팔을 쓸어내렸다.

스칼렛은 처음엔 멈칫하다가 줄리안을 다독였다.

“괜찮아.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혹시 많이 무서우면 우리 아들이라도 불러. 금방 해치워줄 거야.”

헤르윈 얘기가 나오자 줄리안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하, 하하… 그렇지 참…….”

잠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응접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줄리안은 자신의 실수를 눈치채며 축축해지는 손바닥을 문질렀다.

“그러고 보니 루시아가 약혼한다고 하던데. 사실이야?”

그때, 스칼렛이 입을 열었다. 줄리안이 황급히 고개를 들어 스칼렛을 쳐다봤다.

스칼렛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 줄리안에게 향하고 있었다.

줄리안은 뒷목을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마, 맞아. 얘기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헨리가 편지로 알려줬어. 서운해. 루시아는 나한테도 자식 같은 아이인데 이런 얘기도 안 해주고.”

“조금 일이 있어서…….”

웃으며 말하는 스칼렛과 달리 줄리안은 어색해하며 도통 스칼렛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누구랑 약혼하는 거야?”

“캐스퍼 후작이랑 하게 됐어.”

“어머, 정말? 캐스퍼 후작이면 최근에 작위를 물려받은 사람 말하는 거지?”

“응. 맞선으로 만나긴 했는데, 약혼까지 하는 걸 보면 둘이 잘 맞는 것 같더라고.”

“그렇구나… 그럼, 약혼하기로 확정된 거야? 헨리 말로는 아직 식은 올리지 않았다고 하던데.”

“아직 정식으로 이야기가 오가진 않았지만 곧 하지 않을까? 후작도 우리 루시아를 많이 아끼는 것 같고, 루시아도 마음이 있어 보이거든. 나중에 약혼식을 치르게 되면 꼭 얘기할게.”

겉보기엔 평범한 대화였지만, 그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줄리안은 스칼렛의 말 안에 뼈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괜히 자신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건가 싶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헤르윈은 별다른 소식 없어? 헤르윈도 이제 슬슬 약혼해야 하잖아.”

탁-

찻잔을 내려놓은 스칼렛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싱긋 웃었다.

“아직 없어. 하지만, 우리도 슬슬 알아보긴 해야겠지.”

“아, 그렇구나…….”

다시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말을 하지 않아도,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이미 둘의 사이에 간극이 생겼다는 것을 파악했다.

말없이 눈치싸움을 하고 있던 찰나, 문득 이 모든 것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상대방의 눈치를 보며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은 도저히 스칼렛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결국 스칼렛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하아,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루시아가 헤르윈이랑 약혼할 줄 알았어.”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에 줄리안이 스칼렛을 쳐다봤다. 날카로웠던 그녀의 눈매가 밑으로 축 처졌다.

“나만 그렇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헤르윈이랑 루시아가 서로에게 호감이 있는 줄 알았거든. 그래서 때가 되면 두 사람이 약혼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스칼렛…….”

“……일이 이렇게 돼버렸네.”

줄리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스칼렛이 지금 무슨 심정인지 알 것 같았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자신 또한 그녀와 같은 마음이었다.

루시아가 결혼을 한다면 그 상대방은 당연히 헤르윈일 거라 여겼다.

두 사람이 서로 오랫동안 함께 한 것도 있지만, 루시아가 헤르윈을 좋아한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루시아가 헤르윈에게 고백을 했을 때는 그저 소꿉장난에 가까운 풋사랑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루시아는 모든 사람에게 제 마음을 숨긴 채 몇 년이나 헤르윈을 좋아해 왔다.

아카데미 때 있었던 일만 아니었다면 지금까지도 그녀가 헤르윈을 좋아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이대로 약혼까지 시킬 셈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아쉬워. 둘이 서로 좋아하잖아. 우리가 결혼을 반대하는 것도 아닌데 이리 두 사람을 갈라놓는 건…….”

“이미, 끝난 일이야. 스칼렛.”

제 말을 끊어내는 줄리안을 스칼렛이 멀거니 쳐다봤다. 줄리안은 무언가 굳게 다짐한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네가 어디까지 아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두 사람 사이에 충분한 이야기가 오갔어. 그래서 루시아가 다른 사람이랑 약혼하기로 결심한 거야.”

“네가 약혼을 추진한 게 아니었어?”

“……반은 맞고 반은 틀려.”

루시아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난 다음부터 그녀가 헤르윈을 대하는 행동이 눈에 들어왔다.

덕분에 루시아가 얼마나 헤르윈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고, 또한 그간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얼마나 사랑에 지쳐있었는지 어미로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건 요한도 마찬가지였기에 이 이상 루시아가 망가지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결국 요한과 오랜 상의 끝에 무리하면서까지 루시아에게 약혼 얘기를 꺼낸 것이다.

헤르윈에게 고백하여 받아들여진다면 좋을 일이고, 거절당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그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대로 혼자 사랑에 끙끙 앓는 것이 정답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오판이었다.

루시아가 헤르윈에게 거절당하던 날. 그날 줄리안은 제 딸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스칼렛,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어. 하지만, 나는 이대로 루시아가 원하는 대로 둘 셈이야.”

스칼렛은 움찔 떨었다. 저를 쳐다보는 눈동자가 굳은 결심을 담고 있었다.

“더 이상 내 딸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만 볼 순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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