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29)

<76화>

헤르윈은 진지하게 루카스와 눈을 마주쳤다.

‘……루시아에게 고백하려고 왔어.’

‘하! 고백? 루시아를 거절할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고백이라고? 너 지금 장난해?’

고백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루카스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형이 나한테 왜 화가 나있는지 충분히 이해해. 나 같아도 그럴 거야. 하지만, 형. 난 진심이야. 루시아를 만나서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

거짓말이면 좋을 텐데 헤르윈은 흔들림 없이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루카스는 더 화가 났다.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 너 같은 녀석, 받아줄 생각 없으니까.’

‘형…….’

‘나가라는 말 안 들려?! 루시아가 너를 만날 일은 없으니까 나가! 여봐라! 당장 이 녀석을……!’

하인들이 루카스의 언성에 못 이겨 헤르윈을 내쫓으려 하자 헤르윈은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

‘내 발로 나갈게. 루시아는 외출한 거지?’

‘너한테 해 줄 말은 없어.’

‘……만약 루시아가 저택에 있으면 내 말 좀 전해줘. 만나기 전까지 저택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누가 네 말을……!’

‘부탁할게, 형.’

루카스는 고개를 숙이는 헤르윈을 보며 화를 내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서서히 멀어지는 헤르윈을 보자 심정이 복잡했다.

그가 제 동생을 힘들게 했다는 원망이 드는 한편 헤르윈의 수척해진 모습이 괜히 마음이 쓰였다.

상반되는 감정에 마음이 혼란스러워지자 루카스는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지치면 알아서 가겠지.’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루시아를 기다리다보면 제풀에 지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설마 그가 정말로 루시아가 올 때까지 기다렸을 줄이야.

“어쩌려는 건지…….”

도통 헤르윈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정말로 루시아를 좋아하게 된 걸까?

이미 늦어버린 지금. 루시아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는 걸까?

두 사람의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루시아.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제 동생이 더 이상의 괴로움 없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했다.

* * *

“지금 막 주무셨습니다.”

제롬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굽혔던 허리를 폈다.

문가에 스칼렛이 서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있는 헤르윈을 보고 미간을 좁히며 천천히 다가왔다.

“다 큰 아들을 걱정할 때가 다 오다니…….”

툴툴거리는 말투와 달리 헤르윈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길에는 그에 대한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시간 전, 아리스타와 얘기를 나누던 헤르윈은 갑자기 어디론가 황급히 사라졌었다.

헤르윈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 생겼다고 아리스타에게서 얼핏 듣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그가 무엇을 하러 나간 건지 알 수 없었다.

성인인 아들이 밖에서 사고를 칠 리는 없겠지만, 그가 일주일 내내 폐인처럼 있었기에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헤르윈이 올 때까지 기다리던 스칼렛은 밤이 되서야 돌아온 헤르윈에게 잔소리를 했다.

‘헤르윈! 대체 어딜 다녀온 거니! 어딜 갈 거면 내게 얘기라도 해야……!’

잔소리를 쏟아내던 스칼렛이 멈칫했다. 말없이 나갔던 아들의 상태가 척 보기에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주일 동안 폐인처럼 지내서 상태가 좋지 않은 건 당연하지만, 유독 얼굴이 붉었고 눈동자는 반쯤 풀려있었다.

헤르윈이 스칼렛의 말에 반 박자 늦게 반응했다. 이윽고 그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스칼렛은 서둘러 헤르윈을 부축했다. 옷 너머로 후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몸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열이 나잖아? 이 몸으로 밖에 돌아다닌 거야?’

‘저는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몸이 불덩이 같은데! 일단 얼른 방으로 가자꾸나.’

앵무새처럼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던 헤르윈은 결국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스칼렛은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 그를 겨우겨우 방으로 옮겼다.

의사를 불러 헤르윈의 상태를 진단하니 여름감기라고 하였다.

헤르윈은 워낙 튼튼하게 태어나서 병이라곤 지금까지 가벼운 감기가 전부였던 아이였다.

그런데 성인이 된 지금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감기에 걸린 아들을 보니 스칼렛은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색색거리며 자는 헤르윈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마부에게서 아그네스 백작가에 갔다 왔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다.

마부가 말하길, 헤르윈은 백작가에서 쫓겨나 몇 시간 동안이나 바깥에 서서 루시아를 만나길 기다렸다고 했다.

헤르윈이 언제 올지 모르는 루시아를 한없이 기다리자 보다 못한 마부가 겨우겨우 그를 마차에 들였다고는 했지만, 이미 컨디션은 나빠질 대로 나빠진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일주일 내내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술만 마시던 놈이 계속 밖에 있었는데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게 이상하다.

“하아, 한 번도 아픈 적 없던 아이라 더 걱정이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님. 도련님께서 금방 건강해지실 겁니다.”

“그래. 자네가 우리 헤르윈 좀 잘 보살펴 주게.”

“제게 맡겨만 주십시오!”

제롬의 각 잡힌 대답을 듣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스칼렛은 헤르윈의 이마에 올려진 물수건을 새로 갈아준 다음 밖으로 나왔다.

조금씩 걸음을 옮기는 스칼렛의 발이 점차 무거워졌다.

서서히 입가가 굳어지자 스칼렛은 볼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아그네스 백작가와 허울 없는 사이라고 해도 아들이 이렇게 무너진 모습을 보자 화가 났다.

『루시아 누나가 말하던 걸 보면 무조건 형이 먼저 잘못했어요.

그러지 않고서야 누나가 갑자기 다른 남자와 약혼할 리가 없잖아요.』

헨리가 보낸 편지에는 분명 그리 적혀있었다.

루시아의 약혼 소식을 알리던 편지의 끝에는 헤르윈도 마음이 있어 보이지만, 루시아의 약혼을 말리려는 행동은 없었다는 문구가 있었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헤르윈은 두고두고 후회할 거예요. 그러니 잠시만 헤르윈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둬 주세요.’

아리스타가 떠나기 직전에 헤르윈을 찾으려 우왕좌왕 거리는 사람들에게 했던 말이다.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중심에는 분명 루시아가 있었다.

루시아와 헤르윈 사이에 매우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내 아들을 쫓아낼 만큼 큰일이었던 거겠지.’

안 그래도 수도에 오면 줄리안을 만나 볼 생각이었다.

그녀에게서 루시아가 왜 약혼을 하는 건지 그 이유를 물어보려 했는데 아무래도 좀 더 진지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다.

스칼렛은 스산하게 빛나는 다갈색 눈동자를 들어 올리며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 * *

으르릉 컹컹!

어디서 개의 사나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두운 공간에 덩그러니 있던 헤르윈과 루시아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일하게 빛이 비친 곳에는 어린 시절의 루시아와 헤르윈이 보였다.

“저건…….”

“들개를 마주쳤을 때…….”

어린 루시아가 들개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 기적처럼 헤르윈이 나타나 그녀를 구해줬다.

‘루시아, 괜찮아?’

‘으, 으우… 헤르윈.’

통통한 볼 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내 어린 루시아가 헤르윈을 껴안았다.

‘나, 나 무서웠어……!’

‘그러게 내가 깊숙이 들어가지 말랬잖아. 여긴 들개보다 위험한 짐승이 있다고.’

‘훌쩍, 킁, 으응…내가 자, 잘못했어…….’

하나의 연극처럼 그날의 일을 생생히 재연한 장면을 보며 헤르윈과 루시아는 각각 다른 생각을 했다.

“내가 처음으로 헤르윈한테 반한 순간이었지.”

“루시아가 잘못되는 줄 알고 엄청 무서웠었어.”

팟-

작은 아이들이 껴안고 있던 장면이 순식간에 꺼지며 다시 주위가 어두워졌다.

팟-

이번엔 다른 곳에서 빛이 들어오며 방금 전과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들개와 맞서고 난 다음 공작성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세상에! 헤르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둘 다 옷이 왜 그래?’

지금 와서 보니 엉망진창이 된 두 아이의 모습에 어른들이 많이 당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린 헤르윈은 자신이 들개를 훌륭히 쫓아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다.

두 아이가 엉망이 된 채로 나타났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 홀에는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헤르윈은 어렸을 적 자신이 무척이나 싫어했던 인물들이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맞아, 이때 루시아가…….”

“……내가 헤르윈한테 고백했었어.”

헤르윈과 같은 장면을 보는 루시아가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어린 루시아가 사랑에 빠진 눈으로 헤르윈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했던 것처럼 저 아이도 곧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고백할 것이 분명했다.

이날을 계기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이 이어졌다.

저 작은 소녀는 알까? 자신이 13년이란 세월 동안 99번의 고백을 하게 될 것이란 걸.

오직 헤르윈만을 담은 순수한 말간 벽안을 보고 있으면 숨이 턱 막혔다.

자신과 같은 길을, 같은 고통을 겪을 거라 생각하니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소녀의 입이 열리기 전에 루시아가 손을 뻗었다.

이내 루시아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며 사람들 사이에 있던 어린 루시아와 모습이 겹쳐졌다.

입을 열려던 어린 루시아가 멈칫했다. 이윽고 루시아는 절대 입을 열지 않겠다는 양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다행이구나. 상태가 말이 아니니 일단 올라가서 씻을까?’

줄리안이 어린 루시아를 다독이며 계단으로 향했다. 루시아는 순순히 그녀의 손을 잡으며 헤르윈에게 박혔던 시선을 돌렸다.

한편 어린 시절 있었던 일을 지켜보던 헤르윈은 과거와 다르게 흘러가는 장면을 보고 당황했다.

분명 지금 이 타이밍에 루시아가 고백했어야 했다. 하지만 루시아는 아무 말도 없이 떠나고 있었다.

어릴 적에는 ‘루시아가 내게 고백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 많이 했지만, 막상 그렇게 되자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그녀가 다시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더는 제게서 멀어지는 루시아를 보고 싶지 않았다.

헤르윈이 손을 뻗자 이번엔 그가 어린 헤르윈과 모습이 겹쳐졌다.

‘일단, 다친 곳이 있을 수 있으니 의사한테 검진을 받아보자꾸나.’

눈앞에 선 스칼렛이 어린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뒤로 루시아가 멀어지는 것도.

‘루시아!’

헤르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계단을 오르던 루시아에게 닿았다.

안 그래도 동그란 루시아의 눈동자가 더더욱 커졌다.

무언가가 울컥 차오르며 턱이 떨렸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헤르윈은 애써 목소리를 높였다.

‘널 좋아해!’

과거에 일어났던 일과는 정반대였다.

그 때문일까? 과거와 동일하게 흘러가던 주변 풍경이 멈춰버리고 오직 헤르윈과 루시아만이 이 세상에 남겨진 것처럼 생생히 움직였다.

‘헤르윈……?’

꾀꼬리처럼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꼭 벌어져선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처럼, 무척이나 당황한 것 같았다.

‘네가 없으면 안 돼! 꼭 네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까! 날 기다려줘!’

헤르윈의 절절한 말을 끝으로 주위가 서서히 어두워졌다.

이내 어린 두 사람의 모습이 조금씩 자라 21살의 현재, 성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서로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수면 위로 점차 올라왔다.

각자의 집, 각자의 방에서 루시아와 헤르윈이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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