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디저트를 먹으며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던 때에, 베른의 보좌관이 다가왔다.
“후작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보좌관이 베른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그걸 듣고 낯이 어두워진 베른이 주위를 둘러봤다.
“정말, 죄송합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어차피 저희도 거의 다 먹었으니 같이 나갈까요?”
루시아가 덩달아 일어나려 하자 베른이 미안한 기색으로 루시아를 포함한 나머지 세 사람을 쳐다봤다.
“괜히 저 때문에 자리가 빨리 마무리된 것 같아 죄송하네요.”
“아니에요. 슬슬 집으로 돌아갈 시간인걸요.”
아리스타가 루시아 말에 동의하며 모두 베른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 밖으로 나오자, 베른의 보좌관이 벌써 마차부터 대기해 놓은 채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었다.
“후작님, 빨리 가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베른은 쉬이 마차에 오르지 못했다. 루시아를 연신 돌아보자 그녀는 웃는 얼굴로 베른의 등을 밀었다.
“얼른 가세요. 보니까 급한 일인 것 같던데.”
“하지만, 제가 데려다드려야…….”
베른이 루시아를 신경 쓰는 이유는 오늘 그녀가 베른의 마차를 타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녀도 마차도 대동하지 않는 그녀를 위해 돌아갈 때도 직접 데려다줘야 했다.
“여기 제 친구들도 있잖아요. 간만에 친구들이랑 더 얘기하다 갈 테니 제 걱정은 마세요.”
루시아 뒤에 있는 헤르윈과 아리스타를 쳐다보던 베른이 루시아의 손을 꼭 잡으며 그녀에게만 들리게끔 속삭였다.
“그래도 불편하시다면 말씀하십시오. 자택까지 데려다드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친구들이 집까지 데려다줄 수 있다고 하여도 그중엔 헤르윈이 있었다. 루시아가 식당에서 헤르윈과 다투지 않았는가.
만약 루시아가 헤르윈을 불편해한다면 베른은 어떤 일이든 미루고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줄 의향이 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루시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괜찮아요. 자, 이러다가 늦겠어요.”
그녀는 베른의 제안을 극구 거절했다. 베른은 영 못마땅해하면서도 옆에서 자꾸 재촉하는 수하의 말을 듣고 하는 수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디 루시아를 잘 부탁합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루시아를 부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베른과 시선을 마주하자 헤르윈은 차가운 눈빛으로 응수했다.
“저희가 알아서 잘할 테니 그만 가보시죠.”
“나중에 또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문이 닫히고, 베른을 실은 마차가 빠르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마차를 보고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봤다.
헤르윈과 루시아가 다투고 난 후, 아직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않았기에 어색한 기색이 역력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아리스타가 과장된 행동으로 시간을 확인하곤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 맞다! 나도 아버지께서 오늘 집에 빨리 들어오라 하셨는데!”
아리스타에게 부탁하려던 루시아가 당황했다.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아리스타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나 지금도 늦어서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 루시아, 헤르윈한테 데려다 달라고 해. 알았지?”
“자, 잠깐만. 아리스타……!”
“그럼, 난 이만 갈게. 우리 또 나중에 봐!”
루시아가 붙잡기 전에 아리스타는 특유의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황당하단 눈으로 헤르윈을 보자 그 역시 루시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리를 만들어줬으니 알아서 잘하라고.’
적어도 오늘 있었던 일은 화해하길 바라며 아리스타는 곧바로 자신의 마차로 향했다.
결국 루시아는 헤르윈과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나마 아리스타가 있어서 낫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채 5분도 안 돼서 떠날 줄은 몰랐다.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고 루시아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헤르윈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딸꾹질이 나올 것 같아 진땀을 뺐다.
잔뜩 긴장한 루시아를 보고 헤르윈은 무심하게 말했다.
“바로 집으로 갈 거지?”
“어?”
“너, 집에 안 갈 거야?”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에 루시아는 얼떨떨하다가 퍼뜩 정신 차렸다.
“가, 가야지!”
“그래, 그럼.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헤르윈은 잠시 루시아를 두고 어딘가로 가더니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곧 마차가 올 거야. 잠깐만 기다리면 돼.”
“……알겠어.”
그걸 끝으로 더 이상의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자 루시아는 괜히 눈을 굴렸다.
그러다 헤르윈을 슬쩍 훔쳐봤다. 그는 그저 앞만 보고 있었다. 어쩐지 기운이 없어 초연해 보였다.
헤르윈과 다퉜다는 것도 잊은 채 루시아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저기……!”
헤르윈의 고개가 돌아가, 붉은 눈이 루시아에게 향했다.
“……너 어디 아파?”
“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서… 혹시 배탈이라도 난 거야? 아니면, 아직도 속이 울렁거려?”
머릿속에만 눌러두던 걱정이 터져 나와, 루시아는 속절없이 그의 상태를 물었다.
헤르윈이 아무런 대답도 안 하고 가만히 있기만 하자 조바심을 느낀 루시아가 그에게 성큼 다가갔다.
“이러지 말고 우리 얼른 의사한테 가 보자. 이러다가 큰일이라도 생기면…….”
다급하게 걱정하던 것도 잠시 루시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여태 무표정이었던 헤르윈이 피식 웃음을 보인 것이다.
“내가 걱정되긴 하나 보네?”
“……….”
“다른 사람들은 다 내 상태를 물어도 너만 가만히 있길래 나한테 단단히 화난 줄 알았어.”
“화는… 났었어.”
헤르윈이 베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상했었지만,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화났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그에게 언성을 높인 것이기도 했고.
“하지만, 걱정되는 게 당연하잖아.”
그럼에도 그가 걱정되어 온 신경이 그에게 쏠려 있었다. 다만 겉으로 티 내지 않았던 것뿐.
흔들림 없는 벽안에서 진심을 느낀 헤르윈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의식 속에서 커져가던 불안감이 눈 녹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서, 진짜 어디 아픈 건 아니야?”
루시아가 얼굴을 들이밀곤 다시 한 번 헤르윈의 안색을 살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입맛이 없었을 뿐이니까. 아픈 곳은 없어. 너도 알잖아? 나 웬만해선 잔병 없는 거.”
“……그러면 다행이고.”
루시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침 마차가 도착했다. 헤르윈이 에스코트를 위해 손을 내밀자 루시아는 그것을 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에 오른 두 사람은 처음, 둘만 남겨졌을 때에 비하면 분위기가 많이 편안해졌다.
그래서 지금 상황을 틈타, 헤르윈이 물었다.
“그런데 왜 그 상황에서는 걱정되냐고 안 물어봤던 거야?”
“그럴 상황이 아니었잖아. 베른도 옆에 있었고…….”
베른의 이름이 나오자 헤르윈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마차 안이 어두워 루시아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는 너야말로 오늘 왜 그랬어. 베른한테 말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한 줄 알아?”
“……난 그 사람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알아. 그런 것 같더라.”
루시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의 한숨에 돌덩이 하나가 순식간에 가슴에 내려앉았다. 헤르윈은 불편해진 기분에 더욱 미간을 좁히며 팔짱을 꼈다.
“베른을 왜 안 좋아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쁜 사람 아니야.”
루시아는 헤르윈이 가진 베른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열심히 그에 대해 설명했다.
“연애가 처음이라 내 반응이 많이 느린데도 늘 천천히 다가와 주시고, 절대 재촉하지 않으셔. 배려심은 또 얼마나 많으신데. 덕분에 큰일을 모면한 적이 몇 번 있었어. 그리고…….”
한참 말하던 루시아가 입을 달싹였다. ‘내가 널 짝사랑했다는 점에 대해서 묻지 않아.’라고 말하려 했지만, 짝사랑 대상 앞에서 말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결국 입을 꾹 다문 루시아는 다른 말로 순화했다.
“나처럼 부족한 사람을 아무 말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준 사람이야.”
다른 사람들 모두 헤르윈을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점에 대해 걸고넘어질 때, 유일하게 베른만이 루시아를 있는 그대로 받아줬다.
“……네가 부족하다고?”
“그래. 그러니 너도 모나게만 보지 말고 베른을 잘 좀 대해…….”
대충 호응하던 루시아는 미처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맞은편에 있는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기 때문이다.
때마침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마차에 내려앉았다. 어두웠던 내부가 환해지며 이제야 헤르윈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그는 얼굴을 굳히며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식당에서 다퉜을 때와 비할 수 없는 분노였다.
“어떤 자식이 너보고 부족하대?”
루시아가 아무런 대답도 못 하자 붉은 안광이 더욱 흉흉해졌다.
“설마, 후작이 너한테 그런 말을 했어?”
“아니야, 그런 거.”
“그럼, 네 입에서 도대체 부족하다는 말이 왜 나와!”
잠시 말이 없던 루시아는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지금 이 상황이 참으로 오묘했다.
헤르윈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남자들에게서 무시를 당했었는데 정작 헤르윈은 자신을 위해 화내주고 있었다.
그것이 고마운 한편으로는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가 대신 화내준다고 한들 결국 제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니니까.
“그냥 내가 지어낸 말이야. 그 누구도 나한테 부족하다고 한 적 없어.”
헤르윈은 루시아의 말을 믿지 못했다. 설마, 이것으로 믿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베른이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니 좋게 봐달라는 거였어. 네가 계속 그렇게 나오면 내 입장이 곤란해지잖아.”
루시아가 애써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거짓 미소를 띠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헤르윈은 인상을 풀지 않았다.
“그래도 난 그 사람 마음에 안 들어.”
헤르윈이 다시 루시아와 시선을 마주하며 그녀를 설득했다.
“네가 아무 이유 없이 부족하다고 할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 그런데 지금 그 사람이랑 만나는 와중에 그런 소리를 했다는 건 분명 중간에 말 못 할 일이 있었던 거겠지.”
“그런 거 아니라니까.”
“후작이 충분히 착한 사람이라는 건 몇 번 대화하다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어. 그래도 그 사람은 안 돼.”
“왜?”
착한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 왜 싫어하는 건지 루시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베른은 왜 안 되는데?”
헤르윈은 답하길 망설였다. 정확하게는 뚜렷한 답을 내지 못한다는 것이 맞았다.
분명 목 끝까지 베른을 반대하는 어떠한 이유가 있지만, 그것을 쉬이 말로 풀어내기에는 어려웠다.
그 정답은 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감정이 뒤섞인 무언가였으니까.
“……그런 게 있어. 그냥 내 감이야.”
“뭐야, 그게.”
“어쨌든 내 감이 좋지 않다고 외치고 있으니 잘 생각해 보라고! 너 꼭 후작이랑 약혼해야겠어?”
계속되는 반대에 루시아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리고 헤르윈을 쳐다보자 문득 오늘 하루 종일 그가 자신과 베른에게 했던 행동이 떠올랐다.
루시아는 온갖 표정을 얼굴에서 지워내며 입을 열었다.
“헤르윈, 혹시 너…….”
덜컹-
마차가 흔들리며, 다시금 빛이 내부에 스며들었다.
“나 좋아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벽안과 붉은 눈의 시선이 얽혔다.
평온한 루시아와 달리 헤르윈은 잔뜩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동요는 어둠 속에 가려졌다.
시간이 지나도 헤르윈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날 좋아하지 않잖아.”
“……….”
“나랑 결혼할 거 아니잖아.”
“……루시아.”
“여러 맞선 상대를 만나보고 고른 사람이야. 난 그 사람 괜찮다고 생각해.”
천천히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 어떠한 흔들림도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헤르윈에게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미련마저 저 깊은 심해로 빠져들어 루시아가 평정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왔다.
“그럼… 그 사람이랑 결혼이라도 할 거야?”
“그러지 않을까.”
기어코 헤르윈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충격에 내부 전체가 격하게 흔들렸다.
덜컹거리던 마차가 아그네스 백작가 앞에 멈춰 섰다. 루시아는 얼어붙은 헤르윈을 뒤로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헤르윈.”
루시아의 부름에 헤르윈이 겨우겨우 고개를 돌렸다.
루시아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베른이 아니더라도 나는 언젠가 누군가와 결혼할 거야.”
헤르윈이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 그가 우는 것처럼 보였지만, 루시아는 어두워서 착각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내가 잘 지낼 수 있게 응원해줘. 우린… 친구잖아.”
루시아와 자신은 친구라고 늘 말하던 헤르윈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루시아는 아무 말 없는 헤르윈을 보다가 결국 돌아서서 저택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