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어머니는 지금 어디 계시지?”
“방에 계십니다.”
급하게 저택까지 달려온 베른은 서둘러 어머니, 티아나의 방으로 향했다.
“어머니!”
방 안에는 하녀들과 주치의, 그리고 침대에 누운 티아나가 있었다.
혈색이 도는 안색을 보고 베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는 괜찮으신가?”
“네, 빠른 조치 덕에 안정을 되찾으셨습니다.”
“별것도 아닌데 왜 벌써 왔니.”
“별것 아니긴요. 어머니께서 쓰러지셨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이제는 괜찮으신 거죠?”
티아나의 꾸중에도 베른은 아랑곳 않고 다가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처음엔 탐탁잖아 하던 티아나도 베른의 걱정에 피식 웃음을 보였다.
“그래. 이제는 괜찮구나.”
“앞으로 일은 자중해주세요. 하는 일이 너무 많으니 쓰러지신 거 아닙니까.”
“난 아직 창창하다. 겨우 이깟 것 때문에 내 일을 그만두라는 거냐? 그건 싫구나.”
“하지만, 어머니.”
“네 아비도 없는데 나라도 네게 보탬이 되어야지.”
퉁명스럽게 고개를 돌리는 티아나를 보고 베른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 있다가 들어온 것 같은데, 나 때문에 무리한 건 아니니?”
베른이 일 때문에 밖에 나갔다고 생각한 티아나가 염려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일이 있어서 나간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 그럼 누구라도 만났어?”
잠시 입을 달싹이던 베른은 결국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아그네스 영애를 만나고 왔습니다.”
티아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어머, 데이트라도 하고 왔나 보구나. 이런, 괜히 나 때문에 즐거운 데이트가 망쳐버린 건 아닌가 모르겠네.”
“다행히 영애께서 이해해주었습니다.”
티아나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얘기를 들어보면 참한 아이더구나. 저번에 내 친구가 아그네스 영애를 보고 여린 외모에 비해 상당히 강단이 있다고 하더라. 얼른 아그네스 영애를 만나보고 싶네.”
“아직 약혼이 확정된 건 아닙니다.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황녀 전하 약혼식에 파트너로 참석했다고 하지 않았니. 모든 사람이 네가 아그네스 영애와 약혼할 거라 생각할 텐데?”
베른은 말없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뭐, 아그네스 영애에게 있는 소문이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네게도 그런 흠 하나쯤은 있으니 별로 상관은 없다.”
베른이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강하신 것 같으니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갑작스레 돌변한 아들의 태도를 보고 티아나는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그가 나가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설마, 너 아직도 그 여자를 잊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베른이 걸음을 멈췄다.
“그 여자는 잊거라! 네게 어울리지 않는 여자야! 네 아비가 무슨 심정으로 그랬는지 너도……!”
“예. 그래서 지금 이렇게 되었지요.”
결국 베른은 뒤를 돌아 제 어머니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머니와 아버지의 뜻을 거르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아니, 도리어 체념한 듯한 빛이 서려 있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릴 것 같은 아들을 보고 티아나는 입술을 짓이겼다.
어머니가 붙잡기 전에 베른은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제 방으로 들어온 그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그리고 팔을 올려 눈가를 가렸다.
제게 햇살보다 환한,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주던 그녀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점점 희석되어 불과 1시간 전에 봤던 루시아의 얼굴로 바뀌었다.
“……그래. 이걸로 된 거야.”
어차피 그녀와 이어질 수 없다. 이제는 제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으니까. 그러니 이거면 충분하다.
베른은 옅은 숨을 내뱉으며 창밖 너머로 보이는 달빛을 쳐다봤다. 오늘따라 달이 밝았다.
* * *
헤르윈과 아리스타의 만남으로부터 5일이 지났다.
헤르윈과 이상한 분위기에서 헤어진 뒤로 그에게로부터 어떠한 편지도, 연락도 받은 적 없었다.
물론 자신이 그에게 연락을 보낸 적도 없고.
헤르윈이 자신에게 흔들렸던 걸까, 진지하게 고민도 했지만, 그날 밤에 봤던 반응과 그 후로 아무런 연락도 없는 걸 보아 제 착각이라 생각했다.
단 한 번도 자신을 이성으로 본 적 없으니, 그저 친한 친구가 약혼한다는 소식에 혼란스러운 거라 여겼다.
그러는 편이 제게도 훨씬 편하니 말이다.
“아그네스 영애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상념에 잡혀있던 루시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이럴 때가 아니다. 자신은 지금 티파티에 참석한 상황이었다.
“네, 아무래도 그러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역시 그렇겠죠?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봐야겠어요.”
“또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동그란 테이블 위로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루시아는 기계적인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약혼자를 둔 미혼여성과 결혼한 지 별로 안 된 기혼여성들의 모임이었다.
아무래도 모인 인원들의 특성 때문인지 오가는 대화의 주제는 주로 제 약혼자나 남편, 혹은 다른 이들의 풍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그네스 영애의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누군가가 자신을 지목하자 루시아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신을 부른 사람은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었다.
‘분명, 셀린느라고 했던가?’
저번 모임에서 만났던 여자. 베른을 좋아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던 사람이었다.
“영애께선 어쩌다 캐스퍼 후작님과 인연이 이어지시게 된 건가요? 맞선을 통해 만나게 되었단 말은 들었습니다.”
“어머. 저도 그거 궁금했어요.”
“아그네스 영애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캐스퍼 후작님이 미혼 여성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았거든요.”
다른 사람들도 궁금하다며 루시아를 부추겼다.
루시아는 머쓱하게 웃으면서도 셀린느를 쳐다봤다.
그녀는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었던 전에 비하면 지금은 상태가 양호해 보였다.
베른을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 제게 라이벌 의식이라도 느끼는 건가 싶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그런 투쟁심이 느껴지진 않았다.
다만 긴장한 눈초리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말하지 못할 건 없지.’
셀린느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나 그녀에게 발목을 잡히고 싶은 건 아니었다.
루시아는 흔쾌히 그녀의 말에 넘어가 자신과 베른이 어떻게 만났고,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상세히 설명했다.
그럴수록 셀린느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머, 상당한 사랑꾼이시네요.”
“그러면 지금 착용하신 게 저번에 받은 목걸이인가요?”
“네, 맞습니다. 괜찮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꼭 보답하고 싶다고 제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제겐 너무 과분하죠.”
“너무 잘 어울리세요.”
“성실해 보인다 생각은 했지만, 기대한 것보다 더 사람이 좋군요. 영애, 좋은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시겠어요.”
칭찬이 물밀듯 쏟아졌지만 루시아는 말없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럼, 이제 더 이상 페네우스 공자를 좋아하시지 않는 건가요?”
그때, 누군가가 헤르윈을 들먹였다. 루시아는 속으로 흠칫 떨며 고개를 돌렸다.
어떤 여자가 부채를 살랑이고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낯선 얼굴은 아니었다. 분명 헤르윈을 쫓아다니던 사람 중에서 본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이긴요. 영애께선 꽤나 오랫동안 페네우스 공자를 좋아하시지 않았습니까?”
누가 보더라도 루시아를 공격하는 말투였다.
모두가 루시아를 둘러싼 소문을 알아도 쉬쉬하며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놀란 사람들이 루시아의 눈치를 봤다.
“혹시 제가 아카데미에 있었던 일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건 오해입니다.”
부채를 살랑이던 여인이 표독스러운 눈빛을 했다.
“제가 헤르윈을 좋아했던 건 맞으나, 그건 과거입니다. 제가 아카데미를 졸업한 지도 벌써 3년이나 되었는걸요?”
“그, 그렇죠? 그렇지 않고서야 캐스퍼 후작님과 약혼할 리 없잖습니까.”
“세상에 살면서 짝사랑 한 번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어요. 안 그런가요?”
루시아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헤르윈과의 관계를 단언하자 다른 사람들이 루시아를 두둔했다.
제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은 것이 불만인지 여인은 신경질적으로 부채질을 했다.
일촉즉발과도 같은 상황이 일단락되자 루시아는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곤란한 상황을 넘기긴 했지만, 한번 뒤집어진 감정을 제어하기가 어려웠다.
“아까 너도 봤지? 아그네스 영애가 말하는 거.”
무작정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던 루시아는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멈춰 섰다.
어느 방 안에 두 여인이 화장을 고치며 얘기하고 있었다.
“사람이 겉모습과 다르게 만만치 않더라. 툭 건드리면 금방 눈물 흘릴 것처럼 생겼는데.”
“그러니까.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성숙하던데.”
처음에는 제 뒷담화라도 하는 건가 싶어 긴장하던 루시아는 한시름 걱정을 놓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그네스 영애에 비하면 레이란 영애는 어리석기 짝이 없더라.”
“누가 누구보고 말하는 건지. 레이란 영애가 오히려 페네우스 공자를 좋아하고 있지 않아?”
“아그네스 영애가 페네우스 공자와 친한 사이잖아. 그러니 질투라도 난 거겠지.”
“하하하, 귀엽기는. 아직도 어리네.”
장난 섞인 말투가 들리는 걸 보아선 별다른 악의 없이 그냥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자신의 이야기가 더 이상 나오질 않자 루시아는 슬슬 자리를 떠났다.
“르마리오 자작부인은 대체 왜 그런다니?”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이름 때문에 다시금 발이 붙잡히고 말았다.
르마리오. 그것은 셀린느의 성이었다.
‘그런데 자작부인이라고?’
베른을 언급하며 우는 모습으로 보아 의심의 여지 없이 그저 미혼 영애인 줄만 알았다.
“너 그거 몰라? 르마리오 자작부인이 과거에 캐스퍼 후작과 연인 사이였다는 소문이 있었잖아.”
뒤이어 들려온 말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의외의 진실이었다.
“결혼도 한 사람이 이제 와서 그러는 것도 꼴불견이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르마리오 자작가에 거의 팔려 가듯 결혼한 거였으니. 나 같아도 그러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약혼녀 앞에서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지. 아그네스 영애는 이 사실을 알까?”
“글쎄, 모를 것 같은데. 애초에 두 사람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고. 확실한 것도 아니야. 그저 자작부인이 캐스퍼 후작을 짝사랑한 걸 수도 있어.”
“하긴, 그럴 가능성이 더 크겠다. 자작부인은 결혼 전에도 후작에 비해 작위가 낮았잖아. 애초에 두 사람이 연인이라니 말도 안 되지.”
화장을 전부 고쳤는지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왔다. 루시아는 서둘러 문 뒤로 몸을 숨겼다.
“둘이 연인이었다고?”
그들은 셀린느가 베른을 짝사랑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루시아는 어쩌면 두 사람이 과거에 연인이었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울었던 건가.”
전에 자신의 앞에서 눈물을 보였던 셀린느가 떠올랐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셀린느는 현재 르마리오 자작의 부인이 되었고, 베른은 자신의 예비 약혼자였다.
베른에게 미련이 남은 걸 보아선 결코 합의하에 헤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저와 많이 닮아서… 그래서 루시아를 선택했습니다.’
베른에게 들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어쩌면 그 말과 연관이 있을 지도 모르겠네.”
궁금했다. 그가 대체 어떤 점에서 자신과 닮았다고 말한 것인지, 셀린느와는 어떤 사이였는지.
나중에 베른을 만나면 꼭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하며 루시아는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