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129)

<59화>

루시아는 잔뜩 긴장하며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오늘 하루는 정말 마라도 끼었나 보다. 베른이 안내한 식당이 하필 이곳이라니.

이곳 또한 헤르윈에게 마지막 고백을 하기 전, 그와 함께 만찬을 즐겼던 가게였다.

헤르윈도 루시아처럼 불편한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몸을 비틀었다.

‘확실히 맛있긴 하지만……!’

이곳으로 오자고 한 베른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여긴 저도 와보고 싶었는데 매번 사람이 많아서 실패했었어요. 오늘은 운이 좋네요.”

“그러게요. 사실, 예약하지 않고서는 찾기 힘든 곳이라 저도 반신반의했습니다.”

아리스타의 말에 베른이 친절히 답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지만, 헤르윈과 루시아는 아니었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내오고 하나둘 메뉴를 살폈다. 반면, 루시아는 맞은편에 있는 헤르윈에게 온 신경이 쏠려 글자가 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참 메뉴를 살피던 베른이 넋이 나간 루시아를 발견했다.

“어디 불편한가요?”

“네? 아, 아니에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럼 메뉴는 고르셨나요?”

“그러니까…….”

루시아는 뒤늦게 허둥지둥 메뉴를 살폈다. 하지만, 워낙 가짓수가 많아 뭘 시켜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저번에 왔을 때도 가장 잘나가는 것을 예약한 거라 그날 먹었던 것 외에 무슨 메뉴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루시아가 선뜻 고르지 못하자 베른이 그녀가 있는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고민되시면 제가 추천해드릴까요?”

“아.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루시아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른은 기다렸다는 듯 몇몇 음식을 추천했다.

“특히 개인적으로 저는 이것이 가장 좋더군요. 트러플의 풍미가 스테이크와 잘 어우러진답니다.”

베른이 제일 추천하는 것은 하필이면 루시아가 먹지 못하는 버섯이 들어간 메뉴였다.

루시아는 잠시 당황하며 대답하길 머뭇거렸다.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한 베른이 물었다.

“괜찮다면 이걸로 시킬까요?”

“……네, 그렇게 해요.”

차마 베른의 호의를 거절하지 못한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종업원이 오고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건너편에 있는 아리스타와 헤르윈이 먼저 음식을 주문하고 베른이 그 뒤를 이었다.

루시아는 허벅지 위에 올려진 주먹을 꽉 쥐며 식은땀을 흘렸다.

‘괜찮겠지?’

다른 사람 모르게 버섯을 빼내면 큰 탈이 나지 않을 것이다. 헤르윈이랑 왔을 때도 그냥 먹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루시아는 괜찮을 것이라며 스스로 다독이며 주문한 음식을 다시 확인하는 종업원을 비장하게 쳐다봤다.

“……이렇게 다섯 가지 맞으시죠?”

“네, 맞습니…….”

“잠깐만.”

헤르윈이 중간에 베른의 말을 가로챘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메뉴판을 다시 살피던 헤르윈은 베른이 시킨 음식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인상을 찌푸렸다.

“후작님께선 약혼녀가 못 먹는 음식도 모르십니까?”

“네?”

“루시아는 버섯을 못 먹습니다. 먹으면 이틀은 앓아야 해요.”

헤르윈의 지적에 베른이 화들짝 놀라고, 루시아의 낯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뒤늦게 아리스타가 손바닥을 마주쳤다.

“맞아, 그랬었지 참!”

“루시아, 저 말이 사실입니까?”

루시아는 베른과 헤르윈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죄인처럼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른이 탄식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큰일 날 뻔했잖아요. 왜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루시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베른은 안타까운 숨을 내뱉었다.

꽉 쥐어진 작은 주먹 위로 차가운 손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베른이 다정한 눈빛으로 루시아를 쳐다봤다.

“다음부터는 꼭 얘기해주세요. 그래야 제가 알고 주의하죠.”

“……네.”

“화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크게 놀랐을 뿐이에요.”

루시아의 손을 토닥인 베른은 주문을 수정했다. 종업원은 바뀐 주문을 재차 확인하고 나서 자리를 떠났다.

베른이 안도하며 헤르윈에게 말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공자.”

다정하게 루시아의 손을 잡은 베른을 싸늘하게 쳐다보던 헤르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삐뚜름하게 말했다.

“약혼자시면 적어도 루시아가 무엇을 못 먹는지, 어떤 걸 싫어하는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누가 들어도 그의 말투는 시비조에 가까웠다. 루시아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고, 아리스타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기분 나쁠 법도 한데 베른은 안색 한번 변하지 않고 얼굴을 굳혔다.

“네, 맞습니다. 제 잘못이지요.”

베른이 쉽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원하던 답이 아니었는지 헤르윈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잘못을 아신다니 그나마 다행이군요. 다음부터는 조심하십시오. 아무리 정략혼이라고 해도 서로의 기본적인 부분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헤르윈이 베른의 잘못을 다시금 들추었다. 아무래도 루시아와 베른이 서로 사랑하여 맺은 관계가 아니니 그 점을 콕 집은 것이다.

베른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루시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제 손에 올려진 베른의 손을 꽉 잡았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해. 내가 말하지 않은 건데.”

헤르윈은 루시아가 자신을 타박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도 잠시, 짐짓 얼굴을 굳혔다. 그건 루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만난 지 고작 두 달밖에 안 됐어. 아직 약혼식도 안 치렀다고. 모르는 게 당연하잖아.”

“……….”

“나도 베른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고, 베른도 마찬가지야. 이제 서로 알아가는 단계니까. 우리가 알아서 할게.”

“아, 그래?”

헤르윈이 허탈한 웃음과 함께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다음부터 조심해줘.”

평소 같았으면 헤르윈의 화난 모습에 안절부절못했을 루시아였지만, 지금만큼은 그녀도 어지간히 화났는지 헤르윈을 냉랭하게 대했다.

최악으로 치달은 분위기에 베른과 아리스타가 서로를 쳐다보며 눈치를 봤다.

베른이 슬쩍 루시아에게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공자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닌데요, 뭐.”

루시아는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화 푸세요. 네?”

베른의 간곡한 말을 듣고 나서야 루시아는 삐죽 나왔던 입을 조금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베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물론, 베른은 사과하지 말라고 그녀를 말렸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아리스타와 베른이 나서서 대화를 주도했다.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은 루시아는 자연스레 그들의 대화에 동참했지만, 헤르윈 만은 여전히 못마땅한 눈빛으로 루시아를 지그시 쳐다봤다.

머지않아, 음식이 나오고 각자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베른이 바꿔서 주문한 음식을 한입 먹은 루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맛있네요.”

“그래요? 입에 맞으셔서 다행입니다. 이 음식은 꼭 기억해 둬야겠네요.”

아무리 괜찮다고 말했어도 베른이 헤르윈의 말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루시아가 포크를 깨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어렸을 적에 버섯을 먹고 크게 탈이 난 적이 있어서 그 이후로 버섯을 조금이라도 먹으면 아프곤 한답니다. 알레르기도 아닌데 겨우 그런 이유로 먹지 못하는 것이 조금 창피해서 말하지 못했어요.”

분위기에 휩쓸려 말하지 못한 것도 있긴 하지만, 이 이유도 한 몫을 차지했었다.

이 나이 먹도록 편식하는 게 자랑거리는 아니지 않은가.

얼굴까지 붉히며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는 루시아를 보고 베른은 잠시 놀라다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군요. 그 마음, 뭔지 알 것 같습니다.”

베른이 제 접시를 보다가 구석에 데코레이션 되어 있는 당근을 포크로 찍었다.

그것을 한 입 크게 베어 물고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처음으로 베른의 망가진 얼굴을 본 루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못 먹을 것을 먹은 것마냥 한참 당근을 씹던 베른이 그것을 삼키고 나서야 찡그렸던 얼굴을 폈다.

“후아, 이것 참 힘드네요.”

“대체…….”

“저는 당근을 못 먹습니다.”

조금 창백해진 낯으로 그가 말했다.

“루시아처럼 어렸을 적 탈이 난다거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이것만큼은 도저히 먹기 힘들더군요.”

물로 입가심을 한 베른이 한층 나아진 얼굴로 씩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못 먹는 음식이 하나씩 있으니 서로 별반 다를 게 없네요. 그렇죠?”

베른이 자신의 부담을 덜어내 주려고 일부러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아챈 루시아가 설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비밀 얘기하듯 속닥이며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것을 헤르윈이 빤히 쳐다봤다.

한평생 체기라는 것을 경험해본 적 없었는데 지금은 속이 더부룩하여 음식이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물만 들이켜던 헤르윈은 결국 그대로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옆에서 그의 변화를 눈치챈 아리스타가 슬쩍 물었다.

“더 안 먹어?”

“……별로 입맛이 없네.”

“그래?”

헤르윈이 음식 남기는 것을 본 적 없는 아리스타는 그에게 말을 건네려다가 그의 온 시선이 루시아에게 쏠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상황이 아리스타에겐 낯설게만 느껴졌다.

‘꼭 바뀐 것 같네.’

보통은 루시아가 어미 쫓는 아기 새마냥 헤르윈을 지그시 쳐다보곤 했는데 지금은 그 정반대였다.

의식하진 않았지만, 헤르윈은 루시아가 얼른 자신의 변화를 알아채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든 그 누구보다 사소한 변화를 먼저 알아차리곤 했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흘러 베른과의 대화를 마치고, 아리스타와 얘기를 할 때도 그녀는 단 한 번도 헤르윈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가 식사를 하지 않는 것에 의문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공자. 어디 아프십니까. 반도 드시지 못하신 것 같은데.”

오히려 베른이 루시아보다 먼저 헤르윈의 이변을 알아차렸다.

그제야 헤르윈 쪽으로 루시아가 시선을 돌렸다.

루시아 입에서 말이 나오길 기다리던 헤르윈은 끝까지 그녀의 작은 입이 열리지 않는 것을 보고 씁쓸하게 말했다.

“……조금 입맛이 없네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러신가요? 혹시 아프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의사라도 부르겠습니다.”

“맞아, 헤르윈. 의사한테 가보는 건 어때?”

아리스타도 베른의 말에 동의했지만, 헤르윈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야.”

헤르윈이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올려 루시아를 쳐다봤음에도 그녀는 그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그녀와 이리 서먹해진 건 아카데미 시절에 싸웠을 때를 제외하곤 처음이었다.

루시아가 진심으로 제게 화난 것 같아 헤르윈은 불안했다. 하지만 그 감정을 애써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모든 식사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각자 시켰던 디저트가 나왔다.

조각 케이크를 먹으며 아리스타의 말에 호응해주던 루시아는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헤르윈이 케이크에 손대지 않고 있었다.

‘계속 안 먹네.’

사실, 베른이 헤르윈에게 말을 건네기 전부터 그녀는 헤르윈이 식사에 좀처럼 손대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계속 베른에게 무례하게 대한 것이 있어서 베른이 옆에 있는 지금 상황에선 말을 건넬 수 없었다.

게다가 불과 몇십 분 전에 그와 크게 다퉜으니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네는 건 불가능했다.

‘혹시 어디 아픈가? 아니면 체하기라도 한 걸까? 걱정되네.’

그럼에도 루시아의 머릿속은 온통 헤르윈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저 어떻게 하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을 건넬 수 있을지 궁리했지만, 결국 루시아는 헤르윈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각자만의 생각을 떠안은 채 만월이 밤하늘에 점차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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