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29)

<58화>

“루시아!”

베른을 보고 오묘한 표정을 지었던 아리스타는 그의 뒤에서 나타난 루시아를 발견하고 얼굴을 활짝 폈다.

루시아는 반갑게 다가오는 아리스타와 우두커니 서 있는 헤르윈을 떨떠름하게 쳐다봤다.

설마, 이런 곳에서 두 사람을 마주칠 줄은 몰랐다.

“여긴 어쩐 일이야? 혹시…데이트?”

아리스타가 베른을 흘겨보며 속삭였다. 루시아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베른과 데이트를 몇 번 한 적 있지만, 오늘은 순전히 그가 티아나의 선물을 고를 수 있도록 같이 쇼핑에 나선 것뿐이라 이런 것도 데이트라고 불러도 될지 고민됐다.

루시아가 대답을 망설일 때, 옆에 있던 베른이 입을 열었다.

“네. 오늘 제게 중요한 일이 있어서 루시아가 도와줬습니다.”

“어머, 그렇군요.”

명확히 말하진 않았지만, 아리스타와 헤르윈은 두 사람이 데이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얼어붙었던 헤르윈이 표정을 풀며 드디어 움직였다.

헤르윈이 다가오자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베른의 팔을 붙잡았다.

베른은 루시아가 긴장한 걸 느끼고 그녀를 흘긋 쳐다봤다.

“그러는 너희야말로 여긴 어쩐 일이야? 설마, 우연히 이 가게에 같이 들어온 건 아닐 테고.”

루시아의 질문에 아리스타가 살짝 당황했다.

“아, 그게…….”

“아리스타랑 오늘 쇼핑하자고 약속했었어.”

아리스타를 대신하여 헤르윈이 대답했다.

둘이 같이 있는 걸 보고 설마 했는데 역시나 예상한 그대로였다.

하지만, 예상했음에도 생각보다 타격이 커서 루시아는 베른을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정직한 손과 달리 루시아의 얼굴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그래? 그러면 뭘 사려고 했나 보네?”

“응, 맞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대화인데 어째선지 분위기가 싸늘했다. 숨 막히는 공기 속에서 땀을 삐질 흘리던 아리스타가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다.

“우리도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던 참이었어. 괜찮으면 같이 둘러볼래?”

“난 괜찮지만…. 베른, 괜찮겠어요?”

베른이 웃는 얼굴로 루시아를 쳐다봤다. 루시아가 아리스타와 헤르윈의 눈치를 보며 그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불편하시면 다른 데로 가도 괜찮아요.”

의도한 게 아니어도 예비 약혼녀의 친구들과 함께하는 자리이니 그의 입장에선 불편할 것이 분명했다.

“괜찮습니다. 이번 기회에 루시아 친구들이랑 친해지면 좋죠.”

베른 특유의 부드러운 대답에 루시아는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편 두 사람을 쳐다보던 아리스타는 베른이 루시아를 많이 아끼는 모습에 흥미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헤르윈은 콧잔등을 찡그릴 뿐이었다.

네 사람은 본격적으로 매장을 둘러봤다.

“이거 괜찮다.”

각자 매대에 놓인 물건을 살피던 찰나, 아리스타가 한 귀걸이를 가리켰다.

화려하진 않지만, 심플한 것이 매력적인 귀걸이였다.

“너랑 잘 어울리겠네.”

“예뻐서 좋긴 한데, 블루 토파즈라 나랑 잘 어울릴지 모르겠네.”

아리스타가 눈까지 찡그리며 한참이나 귀걸이를 쳐다봤다.

결국 보다 못한 헤르윈이 직원을 불러 귀걸이를 꺼냈다. 그리고는 귀걸이 한쪽을 아리스타 귀에 가져다 댔다.

워낙 인물이 뛰어나서 그런지 아리스타와 잘 어울렸다.

“봐, 괜찮네.”

“그래?”

귀가 솔깃한 아리스타가 헤르윈 손에서 귀걸이를 가져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그래도 뭔가 석연찮은지 아리스타는 근처에 있던 루시아를 불렀다.

“루시아, 네가 봤을 땐 어때?”

저도 모르게 아리스타와 헤르윈을 계속 지켜보던 루시아가 퍼뜩 정신 차렸다. 공허했던 벽안에 빛이 돌았다.

“응?”

“나 이거 잘 어울려? 아무리 봐도 모르겠어.”

루시아는 잠시 아리스타의 모습을 살폈다. 평범한 셔츠에 해진 바지를 입고 있음에도 그녀의 미모는 빛이 바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그녀가 아름답게 보여 입안이 씁쓸해질 정도였다.

“응, 잘 어울려. 너는 아무거나 가져다 대도 전부 어울릴걸?”

“에이, 거짓말. 괜히 띄워주기는.”

“거짓말 아닌데? 아……!”

순간 무언가를 떠오른 루시아가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고 보니, 헤르윈. 너 저번에 아리스타 선물 사지 않았어?”

저번에 헤르윈과 이곳에 왔을 때, 그는 분명 여자 장신구로 추정되는 물건을 샀었다.

헤르윈이 루시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왜 저번에 나랑 여기 왔을 때, 여자 장신구 샀었잖아. 그거 아리스타 주려고 산 거 아니었어?”

그제야 루시아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헤르윈이 처음엔 놀라다가 서서히 얼굴을 굳혔다.

그 모습이 꽤나 냉랭하여 루시아는 제가 실수라도 한 건가 싶어 움찔 몸을 떨었다.

“내 선물을 샀었다고? 나 그런 거 받은 적 없는데.”

한편 경위를 모르는 아리스타가 어리둥절 하자 헤르윈이 입을 달싹였다. 이내 그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뒷목을 문질렀다.

“그런 거 아니야. 물론, 사긴 했지만…아리스타 주려고 산건 아니었어.”

“그래? 그러면 누구 주려고 산 건데?”

아리스타의 질문에 헤르윈이 루시아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헤르윈의 붉은 눈이 살짝 떨리다가 루시아에게 다가오는 베른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있어, 그런 게”

“싱겁기는.”

김빠진다며 금세 흥미를 잃어버린 아리스타와 달리 루시아는 남들 모르게 주먹을 꽉 쥐어 가슴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얼굴은 혼란 그 자체였다.

‘아리스타가 아니라고?’

헤르윈이 선물할 사람이라곤 그의 어머니인 스칼렛이나 아리스타밖에 없을 텐데, 대체 누구에게 선물하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루시아.”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루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다른 곳에 있던 베른이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잠시, 저랑 같이 가시겠어요?”

“네?”

루시아는 얼떨떨하게 그가 내민 손을 잡고 따라갔다.

그를 따라간 곳에는 각종 보석으로 만들어진 목걸이가 진열되어 있었다.

매대 맞은편에 있던 직원이 목걸이 하나를 건넸다. 그걸 받은 베른이 루시아의 목에 살며시 가져갔다.

“음, 역시 잘 어울리네요.”

“……저기, 이건.”

“마음에 드시나요?”

베른의 행동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루시아가 당혹스러워하자 베른이 피식 웃었다.

“오늘 저를 도와준 대가로 보답을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네?”

루시아가 화들짝 놀라 크게 소리 지르자 아리스타와 헤르윈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아, 아니에요. 이런 걸 바라고 한 게 아니라…….”

“압니다. 그저 제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루시아가 안절부절못하며 베른과 그의 손에 들린 목걸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래도, 이건 너무 과한데…….”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아니죠?”

베른의 물음에 루시아는 목걸이를 찬찬히 살폈다. 얇은 금줄에 깔끔하게 커팅된 에메랄드가 인상적이었다.

어느 때나 착용하기 좋은 디자인이었다.

“……네, 예쁘긴 해요.”

“그럼, 됐네요.”

말릴 새도 없이 베른이 직원에게 목걸이 포장을 부탁했다. 루시아가 발을 동동 굴리며 어쩔 줄 모르자 베른이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 정도는 받아주세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합니다.”

눈을 데구루루 굴리던 루시아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베른은 착하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계산대로 향했다.

덩그러니 남겨져 루시아는 차가운 손이 지나간 머리를 쓸었다. 그때, 아리스타와 헤르윈이 다가왔다.

“……방금 전에 뭐야?”

“뭘 사는 것 같던데.”

낮게 가라앉은 헤르윈과 달리, 아리스타는 궁금증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루시아는 아직도 베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목걸이 사 주셨어.”

“어머, 정말?”

환호하는 아리스타 뒤로, 헤르윈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처음으로 넋이 나간 루시아를 보고는 제 가슴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왜 이러지…….’

분명, 루시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답을 내렸고. 그녀가 캐스퍼 후작과 잘 될 수 있게 응원해줘야겠다고 결심도 했는데.

반나절도 가지 않아 그 마음이 흔들렸다.

뻥 뚫렸으리라 생각했던 가슴이 다시 조금씩 막히기 시작했다. 단순히 막히는 것뿐만 아니라 큰 바윗덩어리가 얹힌 기분이었다.

그저 지금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말한다면.

“……거슬려.”

“응? 지금 뭐라고 했어?”

헤르윈의 중얼거림에 루시아가 돌아봤다.

하늘처럼 푸른 벽안에 자신의 모습이 훤히 비치자 헤르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입을 달싹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베른이 계산을 끝난 것을 보고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떠나고, 아리스타는 옆에 있는 이를 훔쳐봤다.

헤르윈은 다정하고 수줍게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헤르윈의 말을 듣지 못한 루시아와 달리, 아리스타는 그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더불어 지금 그가 어떤 눈빛으로 루시아를 보고 있는지까지도.

아리스타는 헤르윈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루시아와 베른을 쳐다봤다.

어쩐지 그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얘들아, 우리는 다 샀는데. 너희도 샀어?”

루시아가 베른과 함께 다가왔다.

“아니, 나는 안 사려고.”

“나도 살 것 없어.”

아리스타와 헤르윈은 아무것도 안 사기로 결심했는지 고개를 내저었다.

모든 볼일을 마친 그들은 가게에서 나왔다.

어느덧 태양이 조금씩 기울어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러게 좀 있으면 6시지?”

이제 15분 뒤면 6시다. 여러모로 애매한 시간에 집으로 갈지, 어쩔지 고민하던 찰나 헤르윈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저녁이라도 먹는 건 어떠십니까?”

헤르윈이 베른에게 먼저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 베른을 좋아하지 않는 줄로만 알았던 그가 그런 제안을 하자 루시아와 베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떨떠름하던 베른은 곧 원래대로 돌아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베른!”

루시아가 황급히 베른을 부르자, 베른은 괜찮다는 듯 미소와 함께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헤르윈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상황을 살피던 아리스타가 말했다.

“그럼, 같이 자리를 옮길까요? 좀 있으면 저녁 시간이라 곧 사람들이 식당에 몰릴 거예요.”

모두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식당가로 향했다.

앞서 걷는 아리스타와 헤르윈을 보면서 루시아가 뒤로 살짝 빠져 베른에게 말을 건넸다.

“정말 괜찮겠어요?”

“안 괜찮을 건 뭐 있겠어요. 전에도 말했지만, 루시아 친구분이랑 얘기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잖아요. 설마, 제가 친구분들이랑 친해지는 게 싫으신가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아무래도…너무 갑작스럽지 않나 싶어서요.”

가게에서 마주친 건 우연이라고 해도, 이번에 같이 식사하는 것은 온전히 헤르윈의 제안 때문이다.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베른이 앞의 두 사람이 듣지 못하게 루시아에게만 속삭였다.

“사실, 이번 기회에 점수 좀 따려고요. 아무래도 저 친구는 저를 안 좋아하는 모양인 것 같아서.”

베른이 헤르윈을 슬며시 가리켰다. 역시나 그 또한 헤르윈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잘해보겠다며 베른이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루시아는 도통 안심하지 못했다.

꼭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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