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29)
  • <31화>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나요? 분명 중간에 출입 금지 팻말을 두었던 것 같은데.”

    이제 보니 그녀의 가슴팍에는 비앙카처럼 분홍색 꽃이 달려있었다. 파티 주최위원 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네 친구랑 비앙카의 뒤를 밟았어.’라고 말할 수는 없기에 아리스타는 얼버무렸다.

    “화장실을 찾으려다 중간에 길을 잃었어. 내가 의외로 길치거든.”

    “흠, 아무리 길치라고 해도 화장실을 찾으러 여기까지 오다니…….”

    의심의 눈초리를 받자 아리스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지간히 길치인가 보네요.”

    휴우-

    무사히 넘어가자 아리스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여기에 들어와서는 안 돼요. 다음부터는 조심해주세요.”

    “응, 그렇게 할게.”

    화장실까지 안내해주겠다는 그녀를 아리스타는 순순히 따라갔다. 그러면서 뒤를 흘긋 돌아봤다.

    분명 저 멀리 어두운 풀숲에 있었던 몇 명의 인영이 사라지고 없었다.

    꼭 비밀을 들킬까 도망이라도 간 것 같은 모양새에 아리스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 친구들이 저기서 뭘 하고 있던데, 그건 대체 뭐야?”

    앞서 걷던 여성이 걸음을 멈췄다.

    “좀 있다가 생일도 축하할 겸 폭죽을 쏘아 올릴 예정이거든요. 아마 그걸 준비하는 걸 거예요.”

    “아…….”

    “궁금증은 다 풀렸나요?”

    아리스타가 말을 잇지 못하자 여자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너무 과대해석한 건가.’

    여전히 찝찝한 무언가가 목덜미를 간지럽혔지만, 아리스타는 하는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 * *

    헤르윈과 꿈만 같은 첫 춤을 추고 난 뒤에 루시아는 루카스와 에단, 그리고 브라이언과 함께 한차례씩 춤을 더 추었다.

    벌써 네 번이나 춤을 추자 조금씩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루시아는 춤을 권유하는 이들을 정중히 사양하며 파티 구석으로 빠져나왔다.

    친구들은 각자 새로운 파트너와 춤을 추거나 다른 이들과 즐거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헤르윈은 저 멀리서 크리스틴과 춤추고 있었다.

    절대 3번 이상 춤추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던 그의 말이 떠올라 루시아는 혼자서 작게 웃었다.

    루시아…….

    귓가로 작게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제 이름이 들렸다.

    “루시아, 여기야 여기.”

    홀 입구에서 비앙카가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루시아는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무슨 일 있어?”

    “너 오늘 고백할 거야?”

    생각할 여지도 없이 훅 들어오는 질문에 루시아는 입을 달싹였다.

    “빨리 말해줘. 그래야 내가 어떻게 할지 정하니까.”

    비앙카는 초조하게 발을 굴리며 시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일주일 전 잠시 이 저택을 확인했을 때부터 루시아는 비앙카에게 확답을 주지 않았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분명 그렇게 다짐했는데…….

    ‘어쩐지 오늘 느낌이 좋아.’

    헤르윈의 첫 춤 상대가 되었고, 예쁘다는 말을 들었으며, 그의 부드러운 미소까지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돌아가는 것만 같은 오늘. 헤르윈이 고백을 받아주지 않을까?

    “루시아, 할 거야 말 거야? 빨리 정해.”

    다시금 재촉해오는 말에 루시아는 굳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할게. 고백.”

    비앙카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그녀는 발을 동동 굴리다가 다른 사람이 들을까 싶어 주변을 살폈다.

    “잘 생각했어. 내 이럴 줄 알고 장소를 마련해 놨어.”

    루시아는 비앙카의 안내에 따라 저번에 봤던 정원에 도착했다.

    “자, 어때?”

    비앙카가 가리킨 곳에는 하얀 가제보가 있었다. 저번에 봤을 땐 밋밋했는데 꽃과 조명들로 꾸며져 있어 상당히 근사했다.

    “……너무 예뻐.”

    “그치? 내가 열심히 준비했으니 꼭 성공해야 해. 알겠지?”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루시아의 질문에 비앙카가 멈칫했다. 뒤를 돌아보자 루시아가 코끝이 빨개진 채 감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너한테 해준 게 별로 없는데… 너무 나한테 과분한 것 같아.”

    비앙카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피식 웃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어. 그냥 네가 헤르윈이랑 잘 됐으면 하는 거니까.”

    “비앙카…….”

    비앙카가 훌쩍거리는 루시아를 꼭 끌어안고 작은 등을 토닥였다.

    “꼭 최고의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빌게.”

    비앙카의 입꼬리가 환하게 올라갔다.

    * * *

    “하아…….”

    헤르윈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크리스틴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춤추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도저히 주변에서 가만두질 않았다.

    그래서 도망쳤다. 하지만 향수와 화장품 냄새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아직까지 그 잔향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자 헤르윈은 미간을 찌푸리며 사람이 없는 곳으로 대피했다.

    “대체 언제 끝나는 거지?”

    비앙카가 분명 적어도 3시간은 걸릴 것이라 하긴 했는데…….

    시간을 확인하자 9시였다. 아직도 1시간가량 남은 것을 보고 헤르윈은 기겁했다.

    “……그냥 도망칠까?”

    어차피 이후 일정은 자신이 없어도 멀쩡히 진행될 것 같은데 굳이 이곳에 있어야 할까?

    진지하게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어두웠던 주위가 확 밝아졌다.

    들켰다고 생각한 헤르윈이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뭐야… 너였어?”

    “어딜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나?”

    비앙카였다. 헤르윈은 안도하며 주변을 살폈다.

    “볼 일 없으면 좀 가줄래? 이러다가 다른 사람한테 들키겠어.”

    “사람들 피해서 숨은 거야?”

    헤르윈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비앙카가 풉-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미안, 미안. 네 평소 이미지랑 너무 달라서.”

    비앙카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던 것도 잠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정 사람들을 피하고 싶다면 내가 다른 곳으로 안내해줄까?”

    “……다른 곳?”

    “응, 아무도 못 오는 곳으로 안내해줄게. 사람들 출입을 막은 곳이 딱 한 곳 있거든.”

    잠시 눈을 굴리며 고민하던 헤르윈은 점점 더 가까워지는 사람들의 기척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가 어딘데?”

    * * *

    루시아는 도저히 진정할 수 없었다.

    매분 매초가 지날 때마다 심장 박동과 함께 긴장감이 서서히 커져만 갔다.

    괜히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손이 축축해졌다. 처음 하는 고백이 아닌데도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걸까?

    “……괜찮아. 괜찮을 거야.”

    바스락-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루시아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기다리고 기다렸던 이가 서 있었다.

    “어? 루시아.”

    “헤르윈…….”

    “뭐야, 너도 사람 피해서 여기로 온 거야?”

    주위를 둘러보던 헤르윈이 루시아에게 곧장 다가왔다.

    루시아는 지친 기색이 가득한 그의 모습에 잠깐 주춤거렸지만, 오늘처럼 근사한 날을 이대로 허비할 수는 없었다.

    헤르윈이 단정하게 채워진 셔츠 단추를 풀며 머리를 헝클어트릴 때,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헤르윈.”

    “응?”

    깔끔하게 정돈했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짐과 동시에, 코앞에 작은 선물상자가 나타났다.

    헤르윈은 잠시 놀라며 그것을 보다가 선물상자를 쭉 내민 루시아를 바라봤다.

    아름답게 치장한 루시아의 얼굴이 어느덧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건…….”

    “저번에 거리에 나왔다가 너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사, 샀어. 아직 선물을 못 줬잖아.”

    고개를 푹 숙였던 루시아가 퍼뜩 얼굴을 보였다.

    “너를 좋아해.”

    놀라던 헤르윈이 짐짓 얼굴을 굳혔다.

    “너 이럴 때마저…….”

    “홧김에 하는 말 아니야!”

    평소처럼 흘려 넘기려는 그를 보고 루시아는 서둘러 뒷말을 덧붙였다.

    “전에는 내 감정에 이기지 못해 고백했던 적 있지만, 오늘은 아니야.”

    그녀는 잔뜩 떨고 있음에도 굳게 무언가 다짐한 듯한 진지한 표정이었다.

    “8살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너에게 진심이 아닌 적 없어. 너를 좋아해, 헤르윈.”

    루시아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며 선물을 쭉 내밀었다.

    “부디 나와 교제해줘.”

    헤르윈은 저도 모르게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소꿉친구가 오늘 또다시 고백해왔다.

    하지만, 오늘은 이전의 고백과는 확연히 달랐다.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장난 같은 분위기도 아니었고, 루시아 또한 홧김에 내뱉는 말이 아니었다.

    이런 진지한 고백은 처음이었다.

    심장이 조금씩 두근거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하늘 때문에 주위가 어두웠지만, 곳곳에 놓인 조명 덕분에 루시아의 얼굴이 잘 보였다.

    질끈 감은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고, 입술은 앙다물려 있었으며 제게 선물을 내민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헤르윈은 입을 달싹이며 조심스레 제게 주는 선물에 손을 가져갔다.

    “나는…….”

    헤르윈의 입이 열리려는 순간 갑자기 환한 빛이 쏟아졌다.

    헤르윈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눈을 감고 있던 루시아도 마찬가지였다.

    빛이 쏟아져 나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헤르윈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하, 뭐야.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

    “세상에, 그렇게 아닌 척하더니. 뒤에서 저런 짓을 했단 말이에요?”

    “게다가 한두 번이 아닌가 봐. 8살 때부터 좋아했다잖아.”

    헤르윈과 루시아에게 환하게 쏟아진 빛.

    그건 바로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홀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홀은 거대한 유리문만 열면 이곳과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분명 홀에 있는 모든 창에는 커튼이 쳐져 있어서 밖이 보이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은 짜고 치기라도 한 듯 모든 커튼이 젖혀져서 정원이 훤히 보였고, 헤르윈과 루시아가 서 있는 가제보도 매우 잘 보였다.

    게다가 어떻게 된 일인지 홀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이쪽 정원을 보고 있었다.

    “풉, 푸하하하! 아무리 소꿉친구라고 해도 분수를 알아야지. 페네우스 공자한테 고백하다니 너무 안 어울리는 것 아냐?”

    한 사람이 터트린 웃음이 곧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모두가 재밌는 희극이라도 본 것마냥 헤르윈에게 고백한 루시아를 비웃었다.

    헤르윈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상황이 누군가에 의해 꾸며진 것임을.

    “이, 이게 대체…….”

    루시아가 경악과 공포가 서린 눈빛으로 홀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페네우스 공자를 소개해주지 않을 때부터 알아봤어!”

    “얌전하고 순수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엉큼한 사람이었네요.”

    “페네우스 공자가 불쌍해요. 소꿉친구라서 아무리 싫어도 쉽게 쳐낼 수 없었을 텐데.”

    “혹시 몰라? 옛날부터 페네우스 가문을 노리고 고백한 걸 수도…….”

    사람들과의 거리가 꽤 있음에도 그들의 음해 가득한 추측과 비아냥이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나, 나는…….”

    루시아가 바들바들 떨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녀의 푸른 벽안이 빛을 잃으며 점점 절망에 빠지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헤르윈은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루시아, 너…….”

    헤르윈이 루시아를 부르자, 메아리처럼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졌다.

    넋을 잃으며 덜덜 떨던 루시아가 고개를 홱 돌렸다.

    헤르윈과 눈이 마주친 루시아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리고는 크게 울려 퍼지는 사람들의 비아냥과 웃음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해…….

    푸른 벽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짐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선물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루시아!”

    누군가가 루시아의 이름을 있는 힘껏 불렀다. 하지만, 루시아는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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