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근처에 있던 남자들이 벽에 기대있는 아리스타를 훔쳐봤다.
아리스타는 방금 전, 정원에서 본 아이들과 비앙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했다. 대체 그들은 정원에서 무슨 일을 꾸미려고 한 걸까?
곰곰이 그들에 대해 추측하고 있을 때, 앞으로 무알콜 샴페인 한 잔이 불쑥 나타났다.
“마실래?”
“아…….”
샴페인을 건넨 사람은 다름 아닌 루카스였다. 의외의 인물의 등장에 아리스타는 화들짝 놀랐다.
루카스는 아리스타에게 샴페인을 건네주고 바로 그녀의 옆에 기대섰다.
샴페인을 홀짝이는 그의 옆모습을 훔쳐보던 아리스타는 루카스와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하하, 부끄럼쟁이구나. 네 오빠랑 정반대네? 걔는 사람이 능글맞던데.”
“윽, 그 녀석이랑 비교하지 말아 주세요.”
“불쾌했어? 그랬다면 미안해.”
“불쾌하다기보다는… 원수 같은 사이라서요.”
아리스타가 뽀로퉁한 표정으로 저 멀리서 파트너와 춤을 추고 있는 아레스를 쳐다봤다.
아레스가 너무 멋있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리스타 눈에는 저보다 나이가 2살 더 많은 혈육,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레스와 눈이 마주친 아리스타가 눈으로 욕하자, 아레스 또한 그녀 못지않은 질색한 눈빛을 했다.
“우리 루시아랑은 잘 지내고 있어?”
“네?”
아레스와 한참 눈싸움하던 아리스타가 퍼뜩 놀라며 옆을 돌아봤다. 늘 장난기 가득했던 루카스가 사뭇 진지한 것을 보고 아리스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요! 엄청 잘 지내고 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사실, 루시아가 옛날부터 또래 여자애들이랑 그다지 잘 어울리지 못했거든.”
“루시아가요?”
“응.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헤르윈이랑만 어울려서 그런가 다른 애들이랑은 도통 어울리질 못하더라고. 여기서도 똑같은 상황일까 걱정이 되네.”
아리스타는 순간 루시아를 향해 속삭이던 여학생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루시아가 헤르윈과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는 했다.
“……우리 루시아 잘 봐줘. 애가 너무 착해빠져서 안 좋은 일이 생겨도 웃으면서 넘기려고 하는데, 속은 말이 아닐 거야.”
루시아와 똑같은 푸른 벽안이 걱정을 한가득 안고 있었다.
“네. 제가 옆에서 잘 챙겨줄게요. 루시아는 제 소중한 친구니까요.”
의외로 진지한 대답에 루카스가 잠시 놀라다가 피식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평소에 활짝 웃는 얼굴보다 진짜 미소처럼 보였다.
“이런 얘기 잘 안 꺼내는데… 네가 믿음직스러워서 저절로 나왔나 봐. 아레스 동생이라 그런가?”
“과, 과찬이세요.”
아리스타가 귓불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그때, 그녀의 시야에 무언가가 포착됐다.
‘……헤르윈?’
살짝 벌어진 커튼 너머로 정원에 들어서는 헤르윈이 보였다.
“저기는… 출입금지 구역인데?”
“응? 지금 뭐라고 했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리스타는 서둘러 얼버무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헤르윈이 대체 왜 정원으로 간 걸까? 그의 성격상 출입금지 푯말을 보면 걸음을 돌릴 터인데……?
“왜 그래?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아리스타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루카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저기 그러니까…….”
“여러분! 모두 파티는 재밌으신가요?”
아리스타가 말을 다 잇기 전에 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니 한 주최위원이 확성 마도구를 이용하여 말하고 있었다.
“저희가 이번 파티를 위해 특별한 이벤트, 불꽃놀이를 준비했습니다!”
홀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지금 저희 주최위원이 근사한 불꽃놀이를 준비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오오, 불꽃놀이라. 스케일이 꽤 크네.”
“……그러게요.”
폭죽을 쏘아 올리겠다던 주최위원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지직-
귀를 간지럽히는 소리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너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사, 샀어. 아직 선물은 못 줬잖아.]
이상한 소리 뒤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흘러나오는 거지?”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함께 루카스와 아리스타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이건……!”
“루시아 목소리인데?”
경악한 두 사람은 루시아의 목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 건지 찾으려 했지만, 이어지는 말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너를 좋아해.]
[너 이럴 때마저…….]
[홧김에 하는 말 아니야! 전에는 내 감정에 이기지 못해 고백했던 적 있지만, 오늘은 아니야.]
“대체 이 목소리는 누구죠?”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이긴 한데…….”
사람들은 저마다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다가 내용을 듣고 더욱더 떠들썩해졌다.
그도 그럴 게, 너무나도 열렬한 고백이었으니까.
“아리스타! 루시아 어디 있는지 알아?”
에단이 황급히 브라이언과 크리스틴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들도 목소리의 주인이 루시아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아니, 나도 몰라.”
“대체 어떤 자식이 이런 질 나쁜 장난을……!”
“이럴 게 아니라 우선 루시아부터 찾아요. 이러다가 큰 사달이 나겠어요.”
“분명 누군가가 꾸민 일일 거야. 이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부터…….”
[8살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너에게 진심이 아닌 적 없어. 너를 좋아해, 헤르윈.]
우왕좌왕하던 친구들은 물론이고 홀 전체가 정적에 휩싸였다.
[부디 나와 교제해줘.]
“설마… 이거 지금 페네우스 공자한테 하는 고백이었어요?”
“허, 대체 어떤 사람이 페네우스 공자한테…….”
헤르윈의 이름이 거론되자 홀은 다시금 술렁거렸다.
“지금 헤르윈이라고 한 거야?”
“루시아가……!”
얼떨결에 친구의 고백을 듣게 된 아이들은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잠깐 이럴 게 아니라……!”
촤악!
가장 먼저 정신 차린 아리스타가 황급히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갑자기 옆에 있던 커튼이 확 젖혀졌다.
그리고 그건 다른 창도 마찬가지였다.
당황하던 것도 잠시 아리스타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젖혀진 창 너머로 가제보에 나란히 있는 루시아와 헤르윈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설마…….”
두 사람도 깜짝 놀랐는지 당황한 눈빛으로 홀을 보는 것이 보였다.
목소리의 주인이 루시아라는 것을 알자 홀에는 큰 파문이 일었다.
처음에 당황하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리며 루시아의 고백을 비웃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 피식 웃는 것이 보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질수록 헤르윈과 루시아의 낯이 어두워졌다.
특히 루시아가 어깨를 파르르 떨며 큰 동요를 보였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뒤로 주춤 물러서다가 무언가를 보고는 눈빛이 공허해졌다.
그 모습을 포착한 아리스타는 루시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많은 사람 가운데에 루시아가 누구를 보는 것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비앙카!’
주위 사람들처럼 경악한 채 두 손으로 입을 가린 비앙카가 보였다.
하지만, 가린 두 손 사이로 그녀의 입가가 씩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아리스타는 그녀의 웃음을 보자마자 머리가 차가워짐과 동시에 어떻게 된 일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저택을 빌려 생일파티를 열자고 제안하던 비앙카. 그녀와 함께 정원에 무언가를 꾸미던 주최위원들. 그리고 갑자기 정원으로 나간 헤르윈.
의심스러웠던 모든 일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떨어졌다.
“루시아!”
루카스가 다급하게 루시아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루시아가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모서리가 구겨진 선물만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 * *
“뭐야, 지금 도망가는 거야?”
“제가 생각해도 창피한 거겠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공개고백 했는데.”
“페네우스 공자님 불쌍해. 친구 한 명 잘못 둬서 생일날에 이게 뭐람.”
“우리 앞에서는 좋아하지 않는 척, 친구 흉내를 낼 때는 언제고 뒤로는 음침하게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게 소름 끼치네.”
“맞아, 그동안 소꿉친구라는 명목으로 붙어서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이제는 그것도 못 하겠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잖아요. 딱 그 짝이네요.”
홀에 있는 모든 사람이 루시아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숨 막히는 조롱과 비아냥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재밌는 유희를 찾은 것마냥 입을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헤르윈, 너 괜찮아?”
“사람들 앞에서 공개고백이라니. 당분간 피곤하겠네.”
덩그러니 내팽개쳐진 선물을 보던 헤르윈 곁으로 다른 반 친구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난감한 상황에 처한 헤르윈을 위로했다.
“아그네스 영애가 옛날부터 너 좋아했던 거 알고 있었어?”
“야, 너 지금 상황파악 안 돼?”
하지만, 누군가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지금 물어서는 안 될 것을 물었다.
“아, 왜. 솔직히 너희도 궁금하잖아. 소꿉친구가 8살 때부터 나를 좋아해 왔다니. 그야말로 소설 속에서나 있을법한 이야기 아니야?”
“그건…….”
“게다가 루시아 아그네스라면 얼굴도 나름 귀엽고, 착하잖아. 나 같으면 좋을 것 같은데?”
좋을 것 같다고 말하는 말투치고는 비아냥이 가득했다.
헤르윈은 말없이 허리를 굽혀 망가진 선물상자를 집어 들었다.
“……! 너잖아……!”
“뭐지?”
“누가 싸우는데?”
“리디아 공녀랑… 로렌스 영애?”
“어우, 분위기가 살벌하다.”
“헤르윈, 저 두 사람 네 친구들 아냐?”
헤르윈이 그제야 그들 말에 반응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아리스타와 비앙카가 목소리 높여 다투는 것이 보였다.
헤르윈은 가만히 두 사람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래, 친구였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가제보 바로 옆에 있는 수풀이었다. 그 수풀 사이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 * *
“너 지금 장난쳐? 네가 한 짓 맞잖아!”
“꺄아악! 리, 리디아 공녀가……!”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그 손 안 놔?”
주변에서 여학생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아리스타를 뜯어말렸다.
현재 아리스타는 비앙카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헤르윈을 제외하면 검술학부 수석인 아리스타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꿈쩍도 안 하는 힘에 비앙카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아리스타를 노려봤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삐뚜름하게 웃었다.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이러면 안 될 텐데? 리디아 공녀님.”
비앙카가 피식 웃으며 주변에 쏠린 시선들을 훑어봤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제게로 쏠린 시선에 주춤 물러섰겠지만, 오히려 아리스타는 그녀의 말에 자극받았는지 멱살을 쥔 손에 힘을 더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