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29)

<30화>

“파티 당사자가 왜 이렇게 죽상이야?”

“……형!”

“생일 축하한다, 헤르윈. 자, 여기 선물.”

헤르윈의 등을 때린 사람은 다름 아닌 루카스였다. 근사하게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루카스에게 선물을 받은 헤르윈이 처음으로 기쁜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 오랜만에 형한테 직접 축하받네.”

“내가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은 직접 축하해주지 못했지. 그래도 선물은 꼬박꼬박 보냈다고?”

“하하, 알아. 선물 잘 받았어.”

“이런, 나는 선물 준비 못 했는데. 이거 미안하군, 페네우스 공자.”

루카스 어깨로 누군가가 손을 올리며 나타났다.

“리디아 공자님.”

“루카스가 파티에 참석하자길래 그냥 왔더니 빈손이야. 생일인 줄 알았으면 선물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아닙니다,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레스가 씩 웃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이런 성대한 생일파티는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 아닌가?”

“네 생일 때도 저택을 빌리진 않았지. 앞으로 유행이 될 지도 모르겠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것도 잠시, 루카스가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루시아는? 같이 안 왔어?”

“글쎄, 아직 못 봤는데…….”

“좀 있으면 올 겁니다. 여자애들은 따로 오기로 했거든요.”

“어, 그러니까 너는…….”

에단이 대신 답하자 루카스가 어색해했다. 에단은 특유의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에단 벨루나입니다. 루시아랑 친한 친구죠.”

“아, 저번에 양호실에서 봤었지? 그때는 미안했어. 내가 동생과 관련된 일이면 이성을 잃어서…….”

저번에 양호실에서 멱살 잡았던 일을 말하자 에단이 손사래 쳤다.

“아니에요, 동생이 다쳤다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저는 브라이언 체르시스라고 합니다. 선배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루카스 아그네스다. 앞으로 루시아랑 헤르윈 잘 부탁한다.”

“나는 아레스 리디아야. 보아하니 아리스타랑도 친한 모양이던데.”

양호실에서 잠깐 만났던 이들이 서로를 소개하며 친분을 쌓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어색하게 서 있던 비앙카가 루카스와 아레스를 흘겨봤다.

루시아와 아리스타의 오빠 아니랄까 봐 두 사람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어쩐지 불편해진 기분에 비앙카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아! 여깄다!”

“하아, 한참을 찾았네요.”

“그러게. 사람 엄청 많아.”

지척에서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얘들아, 왔…….”

여자애들이 온 것을 안 에단이 뒤를 돌았다. 순간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른했던 붉은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인파가 조금씩 밀려나며 세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운데에는 아리스타가 제복을 입은 채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고, 그녀의 왼쪽으로는 크리스틴,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루시아가 있었다.

세 사람 모두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루시아!”

“어? 오빠!”

루카스가 한달음에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오빠가 여긴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헤르윈한테 초대받아서 왔지.”

루카스가 싱글벙글 웃으며 루시아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하아…….”

루카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는 곧 진지한 눈빛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내 동생 너무 예뻐서. 이러다가 웬 놈팽이 같은 놈들이 꼬이면 어떡해!”

루시아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힐끔 보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 너무 예쁘게 꾸민 거 아니야? 물론 우리 동생 미모가 세계 제일이지만, 오늘은 천사가 강림한 것 같잖아!”

“상당히 사랑받고 있군요, 루시아.”

크리스틴의 중얼거림을 듣고 루시아가 퍼뜩 정신 차렸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루카스의 팔을 꼬집어 비틀었다.

“그 이상 말하기만 해봐. 집에 가서도 오빠 얼굴 안 볼 거야.”

“넵.”

루카스의 팔불출이 멈추자 루시아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친구들이 자신을 빤히 보는 것이 느껴졌다.

“얘들아 미안. 오빠가 좀 과장이 심해서…….”

“아니야. 선배님 말씀대로 오늘 정말 예쁜걸?”

“맞아. 오늘 진짜 예쁘다. 크리스틴, 아리스타 너희도.”

브라이언과 에단이 예쁘다고 칭찬하자 루시아는 쑥스러워졌다. 괜히 고개를 숙인 그녀는 두 사람 뒤에 있는 헤르윈을 흘겨봤다.

붉은 눈과 마주치자 루시아는 치마 속에 숨겨진 다리를 배배 꼬았다.

“……예쁘네.”

헤르윈이 설풋 웃으며 말하자 루시아는 순식간에 열기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부채를 들고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루시아는 서둘러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제복? 어렸을 때도 그러더니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쳤어?”

“윽, 아레스…….”

아레스가 아리스타를 발견하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스타는 어깨를 좁히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누구 동생인지 정말 못 말린다니까? 안 그래, 루카스?”

아레스가 루카스를 들먹이자 한소리하려던 아리스타가 입을 다물었다. 루카스는 잠시 어색하게 눈을 굴리다가 씩 웃었다.

“왜. 잘 어울리는데.”

“그래도 사람이 장소를 가려야지. 여기서 드레스 안 입은 사람은 얘밖에 없을걸?”

“으르스, 일즐믄 흐르.(아레스, 일절만 해라.)”

아리스타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하고 나서야 아레스는 입을 다물었다.

원수 같은 오빠를 째려보던 아리스타는 루카스와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는 남들 모르게 바짓자락을 꽉 잡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가만히 지켜보던 비앙카가 두 손을 올렸다.

짝-

“이제 얼추 다 온 것 같으니 파티를 시작해 볼까?”

비앙카의 박수 소리를 들은 또 다른 주최위원이 악단에게 손짓하자 연주곡이 바뀌었다.

본격적인 파티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댄스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홀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가장자리로 붙어, 가운데를 비웠다. 그리고는 모두 헤르윈을 바라봤다.

“자, 파티 주인이 먼저 시작을 알려야지?”

비앙카가 판을 깔아주자 헤르윈은 난처한 듯 주위를 둘러봤다.

영 내키지는 않지만, 자신이 춤추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추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출 파트너를 골라야 했다.

헤르윈이 주위를 슥 둘러보자 근처에 있던 여성들이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헤르윈은 굳이 그녀들에게 시선을 머물지 않고 바로 근처에 있는 이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헤르윈의 시선이 네 여자에게 쏠리자 그 중 한 명인 아리스타가 두 손을 들었다.

“참고로 나는 춤출 생각 없어. 드레스를 입고 있지도 않고.”

그녀의 말대로 드레스를 입지 않은 아리스타에게 춤을 권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헤르윈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루시아.”

“……나?”

루시아가 얼떨떨하게 스스로를 가리키자 헤르윈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는 괜스레 주변 눈치를 봤다.

아리스타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싱긋 눈매를 휘었다.

루시아는 머뭇거리던 것도 잠시, 헤르윈의 손을 맞잡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나란히 손잡고 텅 빈 홀 가운데에 섰다.

그동안 배운 것을 토대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주에 맞춰 춤추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막을 올리자, 하나둘 짝을 지은 사람들이 나타나 빈 곳을 채우기 시작했다.

루시아는 꿈꾸는 것만 같았다.

만약 아리스타가 오늘 제복이 아닌 드레스를 입고 왔다면 헤르윈은 분명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나는 아리스타 대타겠지.’

그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루시아의 마음은 둥실 떠올랐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더라도 결국 오늘 헤르윈의 첫 춤 상대는 자신이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루시아.”

“어?”

“오늘 나한테 할 말 없어?”

할 말? 춤추는데 갑자기?

루시아는 당황하던 것도 잠시, 오늘 헤르윈에게 이 말을 전해주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푸른 벽안을 가진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생일 축하해, 헤르윈.”

여러 사람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그녀에게 가장 먼저 듣고 싶었다.

헤르윈은 충만해지는 감정을 느끼며 부드럽게 웃었다.

루시아는 잠깐, 아주 잠깐 넋을 잃었다. 자신에게 웃어주는 그가 여기에 오기 전에 했던 상상과 똑같았다.

어쩐지 오늘따라 느낌이 좋았다.

“아리스타, 너는 정말 춤 안 출 거야?”

사람들이 춤추는 것을 구경하고 있을 때, 에단이 아리스타에게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아리스타는 피식 웃으며 제 옷을 내려 봤다.

“이 차림으로 출 수는 없잖아?”

“설마, 이걸 노리고 제복을 입고 온 건 아니겠지?”

“아, 들켰다. 어떻게 알았어?”

아리스타가 장난스럽게 키득거렸다.

실제로 많은 남학생이 아리스타를 힐끔거리기만 하고 선뜻 다가오지 못했다.

아리스타는 제 작전이 잘 들어맞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냥 드레스를 입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미약하게나마 있었다.

“음?”

벽에 기대 무알코올 샴페인을 마시던 아리스타가 저 멀리 익숙한 인영을 보고 고개를 내밀었다.

“……비앙카?”

모든 이가 한창 춤추고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있을 때, 비앙카는 인적 드문 곳에 있었다.

그녀는 여학생들과 함께 진지하게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 *

“……대체 뭐 하는 거지?”

아리스타는 조용히 숨소리를 죽이며 누군가의 뒤를 밟았다.

그 누군가는 바로 비앙카였다. 방금 전, 홀에서 다른 여자애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영 신경 쓰여 저도 모르게 따라왔다.

가슴에 분홍색 꽃이 달린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주최자 같았다.

그렇다면 그냥 다음 일정을 위해 움직이는 걸 텐데 알 수 없는 직감이 자꾸만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육감이 곤두서며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런 느낌이 들 때면 꼭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아리스타는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닦았다.

비앙카의 뒤를 쫓아 도착한 곳은 저택 뒤편에 있는 정원이었다.

“……준비…됐지?”

“이제…설치…….”

저 멀리 비앙카와 주최위원 여자애들이 수군거리는 것이 보였다.

귀를 기울이려고 해도 거리가 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비앙카와 그녀들은 무언가 비밀 얘기를 나누는 듯하더니 동그란 무언가를 풀숲 사이에 숨겼다.

“……수정구?”

수정구처럼 보이긴 하는데, 대체 뭐에 쓰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준비하려는 건가 싶다가도 그 행동이 너무나도 수상했다.

눈에 띄게 주변을 경계했고, 혹시라도 누군가가 들을까 싶어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어차피 그녀들이 이 파티를 꾸민 건 누구나 다 알 텐데 저렇게까지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 볼까?’

아리스타가 기척을 지우며 그녀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바스락-

“리디아 공녀, 여기서 뭐 하세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리스타가 몸을 파드득 떨며 반사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꺄악!”

갑자기 날아오는 주먹에 한 여성이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리스타의 주먹이 그녀에게 닿기 전에 우뚝 멈췄다.

“……깜짝 놀랐네.”

“그, 그건 제가 할 소리예요!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는 경우가 어딨어요?”

“미안.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서…….”

괜히 머쓱해진 아리스타가 괜찮냐며 주저앉은 여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툴툴거리면서 아리스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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