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밤에 만나요.
(51/80)
51화. 밤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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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밤에 만나요.
2023.04.25.
“맨날 나 먹보 취급 하는 것도 화나구, 혼낼 때도 무섭고. 그런데도 옥 선생님, 아니 옥은우 씨만 보면 시선이 가요. 자꾸 보고 싶고, 같이 있으면 즐겁기도 하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이 그래요.”
처음, 그가 자신에게 고백했을 때부터인지. 아니면 은우와 키스했을 때부터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처음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얹어진 그의 손을 잡았다. 닿기만 했는데도, 뜨거운 것을 만진 것처럼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피하지 않았다. 화상을 입어도 좋았다.
은우가 해사하게 웃었다.
“정말?”
“응, 정말.”
그가 설희의 손을 끌어당겼다. 테이블 위로, 두 사람의 얼굴의 거리가 급격하게 좁아 들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손이 설희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손끝이 살짝 이마에 닿자 그곳에 잔잔한 물결이 퍼진다. 숨을 꾹 참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해도 기분 나쁘지 않아?”
“네.”
“후회하지 않아요?”
“지난번에도 후회 안 했어요.”
“…….”
“외삼촌 집이 아니고, 매니저님이 못 봤으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키스한 것 자체에 후회는 하지 않았다.
지금도 이렇게 마주 보고만 있어도 녹아내릴 것 같은걸.
그 말에 은우가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댔다. 그의 뜨거워진 숨결이 설희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아 정말.”
“…….”
“유설희 씨, 어디로 튈지 모르네.”
“그래서 이제, 내가 싫어졌어요?”
내 대답이 너무 늦었어요?
두려움이 섞인 설희의 질문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닌 걸 알잖아.”
“…….”
“설희 씨가 좋아서 미치겠어.”
그러니까.
은우가 천천히 말했다.
“나랑 사귀어요.”
“…….”
“너무 좋아서, 이렇게 바라만 보는 걸론 힘들어졌어. 기다리는 게 고통이야. 계약연애 따위 버리고, 나랑 연애해요.”
그렇게 제안을 한 그는 설희의 답변을 들을 생각도 없었다. 반쯤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흡.”
어쩌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눈을 감고 설희는 이미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으니까.
늦은 밤.
작은 방.
뜨거운 입술이 맞닿았다.
***
옥은우 선생님. 32살. 돌마래 동물병원 수의사.
그는 남자치고는 매우 속눈썹이 길다. 반듯한 이마 아래 쭉 뻗은 콧날, 그리고 도톰하고 붉은 입술.
말하지 않고 창가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햇살이 닿아 은우를 처음 보는 사람도 홀딱 빠져버릴 정도로 단정하고 아름다운 외모였다. 길가에서 봤다면 한 번쯤 흘깃, 쳐다봤을 정도로.
공부도 잘했다. 우리나라 최고 대학 한국대학교의 수의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지금도 머리가 총명했다.
매일 매일 하루에 1시간, 운동도 빠짐없이 해서 슬림하지만 근육질이다. 지난번에 원더풀랜드에서 의도치 않게 그의 위에 올라탔을 때 손 밑에서 느껴지던 갈라진 근육이 떠올랐다.
수술도 잘한다. 최 선생님이 1시간 걸리는 수술을, 그는 45분이면 잽싸게 끝내고 마무리까지 끝내고 나올 정도로. 그뿐이랴. 이 동네에서는 단연 보호자들에게 사랑받는 수의사였다.
오피스텔 두 개나 가지고 있으니 경제 관념도 좋은 것 같고.
그러니까 옥은우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게 완벽하다. 빼놓을 게 없이 퍼펙트, 그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렇지.
“으음.”
키스까지 잘하는 것은 너무하잖아.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설희의 잔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머리카락에 신경 따위 있을 리가 만무한데도 저릿저릿 달아올랐다. 은우와 입술을 겹치면서, 의자에 착 달라붙어 있던 설희의 몸이 조금씩 일어섰다.
조금 더, 조금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설희의 몸이 달았다. 예전에는 분명 싫었는데, 이제는 눈앞이 어질거려서 미칠 정도였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내 안에 이런 열정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아, 하아.”
그와 입술을 떼자 깊은숨이 튀어나왔다. 산소가 부족해 눈앞이 어질거렸다.
“설희 씨.”
“…….”
“하.”
잠시 잠깐 입술이 떨어졌을 때, 그가 내뱉는 소리가 더없이도 야릇했다. 순식간에 발갛게 달아오른 그 순간.
“멍!”
설희 발 근처에서 자던 곰곰이가 고개를 들고 작게 짖었다.
평소와는 다른 설희의 모습에 걱정이 되었나 보다.
“어머.”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여기는……
얼마 전 이사 온 내 방. 눈앞에 있는 것은 옥 선생님. 그리고 고개를 치켜뜨고 숨을 몰아쉬는 누나를 걱정하는 우리 곰곰이.
“곰곰아, 그…… 놀랐어?”
“멍!”
“아냐, 누나 아픈 거 아냐. 괜찮아.”
“끼잉.”
손을 내려 곰곰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제야 곰곰이는 안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집에 오면 방해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오랜 시간 마주 보고 있었던 것 때문에 흐트러져 있던 머리를 그가 쓸어올리며 읊조렸다.
“여기서도……. 방해꾼이 있네.”
쓰디쓴 웃음. 그 말에 설희는 병원에서처럼 자신도 모르게 꾸벅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했다가 뭔가 이상해 그녀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죄송할 건 아니지만. 원래 여긴 곰곰이 집이잖아요. 선생님이 손님이고.”
“뭐, 그렇죠.”
쓴웃음을 지으며 그가 픽, 웃었다.
어쩐지 그를 바라볼 수가 없다. 갑자기 덥게 느껴져서 바닥에 있는 곰곰이를 들어 올리며, 설희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부채질했다.
“그……. 옥 선생님, 할 말은 대충 다 끝난 거죠?”
“아, 네. 뭐.”
“그럼…….”
안 가세요? 라고 말할 수는 없어 대충 자리에서 일어서며 어색한 공기를 만들어보았다.
그가 집에 있는 게 좋으면서도 싫었다. 아니 싫다기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또 무너져내릴까 봐 걱정이 됐다.
그래서.
은우를 한번 바라보고, 또 문을 한번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키스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품에는 마치 자신을 구해 줄 구세주인 것처럼 곰곰이를 끌어안았다. 방어막으로 사용하는 거는 아니지만, 이러다간 자신이 그에게 또 뛰어들까 봐 두려웠다.
설희의 눈치에 은우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빨리 내쫓네요.”
“…….”
“남자친구가 돼서도.”
“남, 남자친구.”
설희가 말을 더듬자, 그가 손을 뻗어 젖은 설희의 입술을 엄지로 쓱 닦았다. 그리고는 또 비식, 소리 없이 웃는다.
“맞잖아요. 남자친구.”
그가 눈을 가늘고 길게 떴다.
“유설희 씨, 나랑 사귀기로 한 거 잊었어요? 그 짧은 사이에?”
설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그가 상처받은 얼굴을 할까 봐, 돌아설까 봐 설희가 그와 닿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잊진 않았어요.”
“…….”
“잊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남자친구라고 이야기를 들으니까.”
“왜요.”
“…….”
“떨려요?”
그가 또 웃는다.
세상에.
옥은우는 웃는 것을 금지 시켜야 한다.
평소에 그는 병원에서는 보호자를 대할 때를 제외하고는 도통 직원들이나 설희에게 웃지 않았다.
그런 은우는 사생활에서 설희와 둘이 있으면 표정이 많아진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가, 두 눈꼬리가 가늘고 보기 좋게 휘었다가.
그의 웃음에 면역력이 없는 설희는 이럴 때마다 심장이 덜컥 뛰었다.
“네……. 떨려요.”
“잘됐네요.”
그가 천천히 설희에게서 손을 떼면서 속삭였다.
“나도 떨리는데.”
아, 부정맥 온다.
그가 날카로운 인상과 어울리지도 않게 달콤한 말을 할 때면 심장이 불규칙하게 덜커덩거렸다.
설희가 미간을 찌푸리자, 은우가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사귀는 겁니다. 정식 연인이에요. 결혼하자는 거 아니니까, 부담 없이 사귀어요. 설희 씨가 따로 노력할 필요도 없고. 그냥, 지금 그대로.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되니까.”
“…….”
“노력은 내가 할게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귀다가, 아닌 것 같으면 내 탓하면 됩니다. 옥은우가 억지 부려 사귀었다고. 사귀기 싫은데 억지로 그런 거라고. 당신 탓은 하나도 없으니까.”
말에 뼈가 있었다. 왠지 가슴이 따끔했다. 오랫동안 그를 밀어낸 것에 대한 가시일까.
설희가 고개를 흔들었다.
“억지는 아닌데요. 저,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 아니에요.”
평소에는 조오금은 그럴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설희의 말에 옥 선생이 웃었다. 그 웃음이 왠지 헛헛했다.
“괜찮아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들 하니까.”
그리고 옥 선생이 일어서서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가며 읊조렸다.
“그리고 당신한테 지는 거라면 이상하게 난 그게 좋아.”
그 말을 남기고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다섯 발자국 걸어간 옆의 옆의 집으로.
***
남자친구가 생겼다.
첫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뭔가 전혀 다르다. 첫 연애 때도 처음은 이런 느낌이었을까? 병원에서 옥 선생을 보기만 해도 설희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키스도 하고, 고백도 받았다.
그러니까 사귀는 게 이상한 것은 아닌데.
이상하지 않은데, 이상하다.
진료 중. 오늘 설희는 옥 선생의 보조를 맡았다.
은우은 긴 손가락에 솜을 감아 아직 어린 슈나우저의 귀를 청소했다. 섬세하게 빙글빙글 돌리면서 귀를 청소하는 그의 손을 멍하니 바라본다.
이리저리 귀를 확인하던 은우는, 마치 설희의 시선을 눈치라도 챈 것처럼, 뒤를 흘깃 보았다.
“뭐 해요?”
“아, 저 귀 청소 방법을 보고 있었습니다.”
“……흐음.”
정말이냐는 듯, 잠시 낮게 말하고는, 그가 정리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설희 씨, 오늘은 발톱 깎아보죠.”
“아, 네.”
그의 말에 발톱깎이를 들고 걸어왔다. 은우가 슈나우저를 꽉 보정했다.
다행히, 오늘 내원한 슈나우저는 얌전한 아이였다.
설희가 앞발을 들어 들어, 하나하나 정성 들여 깎았다. 발 안쪽에 있는 발톱을 자르자, 발톱 끝에 방울방울 피가 맺혔다.
발톱이 색이 진해서, 핏줄을 보지 못하고 건드린 모양이었다.
“어, 피가 나오네.”
설희가 당황하며 손을 멈추었다.
“괜찮아요. 이 발톱 이름은 알죠?”
옥 선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며느리발톱이요?”
“응, 며느리발톱. 그런데 이 슈나우저처럼 산책을 많이 하는 개들은 다른 발톱은 다 바닥에 갈려서 괜찮은데.”
옥 선생의 손이 설희가 잡고 있는 슈나우저의 앞발에 닿았다. 자연스럽게, 설희의 손과 옥 선생의 손이 겹쳤다. 옥 선생의 손은 서늘하고 미동도 없었으나, 두 손이 겹쳐졌을 때 설희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스팔트 걸을 때나, 딱딱한 길 걸을 때. 요 앞발톱들은 다 갈려버리지만.”
옥 선생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슈나우저의 발톱 끝을 만지다가, 지혈해주는 약품을 다른 한 손으로 가져와 며느리발톱에 채워 넣으며 말을 이었다.
“며느리발톱은 지면에 닿질 않기 때문에 갈리지 않거든요. 보호자 분들도 그래서 깎아주는 걸 잘 까먹으니 혈관이 길어져 버려요. 그냥 깎으면 그러니까 혈관을 건드리게 돼서 피가 나오게 되고.”
“그렇구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옥 선생은 조용조용 설명했다.
왜 화를 안 내지? 평소 같으면, 피나게 했다고 또 뭐라고 해야 할 타이밍인데. 그런 그가 낯설어 설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옥 선생을 바라보았다. 발톱을 다 확인한 옥 선생이 슈나이저를 품에 안아 들었다.
“다 됐다, 또또야 엄마한테 가자.”
여전히 옥 선생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설희의 눈빛을 눈치채고, 보호자 대기실로 걸어가던 옥 선생이 고개를 휙 돌려 설희를 바라보았다.
“왜요?”
“뭐가요?”
“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렇게 쳐다보는데요?”
말할까 말까. 마음에 걸린 설희가 결국 입술을 열었다.
“화…… 안 내세요?”
“화를 왜 내요? 내가 늘 화내는 사람도 아니고.”
그래도 또또 손에서 피가 흘렀는데.
설희가 고개를 갸웃하고 숙이자 옥 선생이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모르는 건 어쩔 수 없고, 발톱 깎다가 피나는 건 일상이니 그렇게 풀 죽을 필요도 없어요. 또또는 오랫동안 발톱을 안 깎았는지 혈관이 원래 길어져 있었으니까.”
의외의 따스한 말에 설희가 안도감에 자신도 모르게 생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요?”
“아, 저. 네.”
“그럼…….”
그가 오늘 예약 상황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잠깐 만나요.”
“발톱 깎는 것, 연습할까요?”
“아뇨.”
설희의 질문이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그가 피식 웃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까. 만나요. 긴장하지 말아요.”
“…….”
“사적인 일이니까.”
사적인 일이 더 긴장이 되는 법.
설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