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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갈증 (50/80)


50화. 갈증
2023.04.22.


어디 나갔다 오는 것인지, 살짝 흐트러진 그 옷매무새가 더욱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괜히 그를 보니 마음이 켕겼다. 오늘 일에 대해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너무 빨리 만나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못 본 척하자. 오늘 마음의 정리를 하고 내일 그에게 말하자.

문고리를 잡고 문을 닫으려는데, 은우가 성큼성큼 걸어와 닫히기 직전, 설희의 집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앞으로 1cm 면 닫힐 수 있었는데!


“유설희 씨!”

문이 열린 곳에, 늘 그렇듯 말끔한, 그러나 눈이 번쩍거리는 옥 선생이 있었다.


“네…… 네? 옥 선생님, 어디 다녀오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만나서 반갑기는 뭘 반가워. 헛소리가 튀어나오는데, 평소 같으면 그런 말에 웃을 은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날카로운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왜, 왜요?”

“지금 왜 나 보고 문 닫았습니까?”

역시 봤구나. 그래, 못 봤으면 인간이 아니지.

하지만 그를 보고 문 닫았다고 하기에는 그 또한 문제였다.


“제가요? 전 옥 선생님 못 봤는데요.”

“거짓말. 지금 내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설희 씨랑 눈이 마주쳤는데.”

옥 선생의 말에 설희가 고개를 저었다.


“저! 눈 나쁘잖아요. 그래서 그래요.”

그 말에 옥 선생이 손을 들어 설희의 오른쪽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1.6.”

그리고 다시 왼쪽 눈을 가리키며 읊조렸다.


“1.8. 인 거 다 알거든요. 평생 안경은 써본 적도 없고, 렌즈도 껴본 적 없는 것까지 다 알아요.”

그런 정보는 도대체 어디서 얻는 거니. 말해준 기억이 없는데.

설희는 자신도 모르게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은우의 손가락이 설희의 턱에 닿았다. 턱을 살짝 들어 올려 설희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맞췄다.

어디에도 도망갈 수 없게.


“유설희 씨.”

매니저 때문에, 아니 그놈의 키스 때문에 며칠간 피하다가 오랜만에 마주 보는 옥 선생인 것 같았다.

가슴 속이 일렁였다. 긴장되게, 또 왜 이러지.

그러나 평소와 달리 옥 선생의 눈동자에는 짜증이 담겨 있었다. 옥 선생이 입술을 비틀며 인상을 쓰고 말했다.


“내가 싫어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설희가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아니요…….”

하지만, 설희의 힘없는 대답에도 옥 선생은 납득하지 않았다.


“그럼, 왜 나를 피하는 건데?”

은우의 손끝에서 뛰는 심장이, 설희의 목선을 간지럽혔다.


“난 이렇게 당신을 원하는데.”

은우가 턱을 잡은 채 설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는 그의 얼굴은 사람의 심장을 뛰게 했다.

날카로운 콧날, 반듯한 입술. 그리고 까만 눈동자가 영혼을 꿰뚫어 볼 듯 자신을 향했다. 그에게서 시선을 피하려 눈동자를 굴렸지만, 그래 봤자 그의 손바닥 위였다. 어디에도 도망갈 곳이 없었다.


“제가 언제 피했어요.”

설희는 의미도 없는 저항을 한번 해보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옥 선생의 말은 나지막하고 차가웠다.


“집에도 같이 가기 싫어하고, 그냥 직장 동료들끼리 나누는 대화에서조차 피하고 있잖아요.”

옥 선생이 눈치를 챘구나. 그래, 못 채면 이상한 거지. 왜 나란 애는 이렇게 요령이 없을까.

그에게 제대로 설명했으면 좋았을 텐데.

미안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설희의 입술이 달싹이자, 자연스럽게, 은우의 손안에 갇혀있던 그녀의 얼굴이 빠져나갔다.

말을 망설이는 설희의 행동에, 옥 선생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간 사이에 깊은 주름이 잡혀 있고, 손가락이 흔들거리며 교차했다.


“유설희 씨.”

“네…….”

“쑥스러워요?”

나와의 관계가.


“그것도 아니면…. 후회됩니까?”

담담해 보이는 그의 표정. 그러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있다.


“나는 여자, 잘 모릅니다. 아니, 사람 마음 자체를 잘 모르겠어요. 어렸을 때부터 인간관계에 서툴렀고, 그래서 책이 제일 편하고 동물이 제일 편합니다. 근데.”

은우가 입술을 달싹였다. 말을 하려다가 말고 멈추고, 다시 입을 열려다가도 닫았다. 몇 번이고 반복하다가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짙게 깔려 있었다.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

“더 알 수가 없네. 유설희 씨는 너무 어려워. 손에 들어올 것처럼 하다가, 금방 토라져서 멀어져버리고…….”

그는 부드럽고 다정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말했다.


“말 안 하면 모르잖아. 다른 남자들은 다 알아줄지 몰라도, 나는 그런 거 몰라.”

입술을 깨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온통 설희의 안에 파고들어 휘저었다.


“난 그냥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단순한 인간이에요. 지금 설희 씨 보면, 내가 부담스럽고 싫은 걸로 보여. 설희 씨 향한 내 감정이 무겁고 피하고 싶은 걸로 보여요. 지금 말 안 해주면, 왜 나 피하는지 밝혀지지 않는다면, 난 계속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

“설희 씨 전 남자친구 있죠, 설희 씨가 좋다고 했는데도 계속 들러붙었잖아. 그렇게 되긴 싫습니다.”

“…….”

“말해줘요, 설희 씨 마음이 어떤지.”

그의 눈동자가 설희를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감았다 떠졌다. 여전히 설희는 말이 없었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은우가 결단을 내렸다.

설희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져 비뚜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알았어. 설희 씨 마음 잘 알았으니까. 지금까지 미안했어요.”

쿵.

지금까지 미안했다는 말에 설희의 심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미안했다는 말은 끝이라는 선언과도 같았다.

이제 다시는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겠다는 선언.

그리고 은우는 설희에게서 몸을 돌렸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와 설희의 방의 거리는 고작 5M. 그러나 그가 점점 멀어진다. 몸보다도 그의 마음이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옥은우랑 멀어진다. 옥 선생님이랑 멀어진다는 건…….


“그렇게!”

설희가 겨우 입을 열어 소리 질렀다. 자기 자신의 방문을 열려고 키패드를 올린 옥 선생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가늘고 길게 뻗어나갔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은우가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냥 이 관계가 끝나 버릴 것 같았다. 그것만은 싫었다.

가슴 안에서 무언가가 복받쳐 올라왔다.

설희는 눈물이 없었다. 슬퍼서 운 적은 거의 없었다. 전 남자친구인 찬영이 헤어지자고 했을 때도 울지 않았다. 아니, 딱 한 번 울었지만 결코 그가 헤어지자고 한 게 슬펐던 것이 아니었다.

전 팀장이 자기를 괴롭힐 동안 남자친구라는 놈이 모른 척했던 것이 화가 나서 분해서 울었던 거지, 결코 찬영과 헤어져서 운 게 아니다.

그런데 은우가 멀어진다고 생각하니 바보처럼 눈물이 나온다.

미련 없이 떠나보낼 수가 없다.


“제가 잘못했어요…….”

설희가 울먹이자, 몸을 돌린 은우가 멈칫했다. 설희를 바라보고는 눈에 띄게 당황해서 지금까지 흔들림 없던 눈동자가 떨렸다. 문을 열던 손이 멈추고, 성큼성큼 설희에게로 다가왔다.


“유설희 씨. 왜 울어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요. 이런 내가 싫어서.”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말하는 설희를 보고 은우가 난감한 듯 눈을 찌푸렸다.


“우선, 방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울지 마요, 응?”

옥 선생이 설희의 팔을 잡고, 그녀의 작은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다.

***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둘은 말이 없었다.

그를 불러세운 것은 좋은데,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설희의 입에서는 한숨만 빠져나왔다. 자꾸 눈물만 배어 나왔다. 티슈로 콕콕 물을 찍어댔다.


“이렇게 울 줄은 몰랐는데, 설희씨가.”

옥 선생이 잠시 설희를 바라보다가,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그의 손을 바라보니 손 위에 작은 사탕이 올라가 있었다.


“이게 뭐예요?”

“유설희 씨 당 떨어지면 예민해지잖아요. 이거 하나 먹어요.”

그 말에 설희가 두 손을 꼭 쥐었다.


“제가 언제 그랬어요!”

그러나 옥 선생은 사탕을 까서 설희의 입 앞에 가져갔다. 이 와중에도 먹을 거를 먹이려는 옥 선생의 행동이 당황스러웠다. 내가 먹을 거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잖아.

당 떨어져서 어지러워하는 것도 아니고, 우는데. 먹을 걸로 위로라니.


“그…… 그런 거 아니거든요! 놀리지마세요.”

“그럼 뭔데요.”

옥 선생의 말에 설희의 움직임이 멈췄다. 더 이상 피할 곳은 없었다. 결국 고집스럽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선생님.”

“네. 말해요.”

“아까 그렇게 말하셨죠. 여자를 잘 모르신다고. 사람을 잘 모른다고.”

그가 고개를 까닥했다.


“저는, 연애를 모르는 것 같아요.”

“…….”

“연애 고자라고 해야 하나.”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남자를 의식한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한 번의 연애 경험이 있었지만, 그 연애의 시작은 뭉근하고 따뜻한 것이었다. 그런데 옥 선생이랑 있으면 가슴이 덜덜 떨리고 절벽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하는 느낌이다.


“연애를 처음 하는 것은 아닌데, 선생님을 보면 잘 모르겠어요. 사실 누군가가 절 이렇게 좋다고 한 건 처음이고, 그리고 제가…….”

그가 손에 쥐여준 티슈에 젖어 들은 눈물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울 정도로 연애에 혼란스러운 것도 처음이에요. 옥 선생님이 다 처음이에요.”

“…….”

“그래서, 매니저님께 들키고 나서 쑥스럽고 창피했어요. 두 사람의 연애를 응원한다면서. 계속 사귀는 걸 전제로 말씀하시니까.”

은우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한쪽 입술을 끌어올렸다.


“안 사귄다고 말하지 그랬어요.”

“…….”

“안 사귀는 게 사실인데, 뭘 그렇게 고민했어요. 그날 그 밤의 일은 사고였다고.”

은우의 목소리는 가벼웠지만, 어쩐지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설희가 말이 없자, 그가 말을 이었다.


“옥 은우가 날 좋아하긴 하는데, 나는 옥 은우한테 관심 없다. 그렇게 말하면 되지. 그러니까 매니저님도 신경 쓰지 말라, 그러시면 되지.”

옥 선생의 말에 설희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이 왠지 마음에 콕, 꽂혔다.


“관심 없지는…… 않은데.”

설희의 말에 은우가 생긋 웃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보니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작은 오피스텔, 단둘이 마주 앉아 있는데 저렇게 웃는 건 반칙이다.


“그럼 나한테 관심 있어요?”

아까와 달리 약간 부드러운 말투에 설희의 입꼬리에도 살짝 웃음이 걸렸다.


“관심이 없어서 피했던 게 아니에요. 오히려…… 오히려…….”

숨을 크게 쉬었다가 설희가 내뱉었다.


“관심이 너무 많아서 문제예요.”

어느 날부터인가, 은우가 있을 때면 신경이 곤두섰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자신도 모르게 발돋움을 하게 되었고, 그가 오해하는 것이 싫어서 이현과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

오늘도, 그냥 그가 이제 그만하자고 하는 그 말에 생전 흘리지 않던 눈물까지 흘렸다.

설희의 모든 세포가 그를 향해 있었다.

은우가 픽 웃었다.


“유설희 씨가 내게?”

“네. 제가 옥은우…… 씨에게.”

이럴 때까지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진 않았다. 지난번에 그가 부탁했던, 이름으로 불러달란 말도 떠올랐고.

그러자 은우가 입술을 끌어올렸다.


“진짜?”

“전 거짓말 못해요.”

“알아. 그래도 묻고 싶고 확인하고 싶어졌어.”

“…….”

“한 번 더 말해봐요.”

평소에 늘 자신만만하고 딱딱하던 그의 목소리에 약간의 절실함이 섞여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갈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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