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바람과 돌, 그리고 사랑의 섬 제주. (52/80)


52화. 바람과 돌, 그리고 사랑의 섬 제주.
2023.04.29.



“미안해요. 한 시간 정도 퇴근이 늦어질 것 같은데, 이따가 7시 반쯤에 만나겠어요?”

오늘 동물병원은 사람으로 혼잡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밀린 일이 있다며, 은우는 7시 반쯤에 만나자고 했다.


“도와드릴까요?”

“아뇨. 집에 가서 쉬고 있어요. 아, 저녁 같이 먹어요. 괜찮다면.”

“……아, 네.”

“그럼 그렇게 하기로.”

싱긋, 웃는 은우를 내버려 두고 설희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한 시간의 시간이 남으니 난감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곰곰이에게 밥을 주고 화장실을 치워준 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 앉았다.

어쩌지.

나흘 전, 그와 사귀기로 했다. 그러고 나서 병원이 바빠서 두 사람은 출퇴근 시간도 엇갈리고 뭘 한 적이 없었다.

오늘 옥 선생과 설희는 역 앞에서 7시 반에 만나기로 했다. 그것도…….


‘사적으로’.

그렇다는 것은 데이트라는 말인가.

설희는 한참 생각하다가 가만히 앞을 바라보다가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을 보았다.

오늘은 병원이 유난히 바쁜 일이 많아서 얼굴이 지쳐 있었다. 눈도 푹 꺼져 있고, 입술도 파리하다.

옷도 어차피 병원에 가면 갈아입기 때문에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

데이트를 하긴 했지만 계약 연애 때문이었지. 그리고 거기다가 사귀고 나서는……


“진짜진짜 처음인데. 이대로 나가도 되는 걸까.”

평소의 은우를 떠올렸다. 밉살스럽게도, 은우는 뭘 입어도 잘생겼다. 대충 티셔츠에 카디건을 입어도 단단한 체격 때문인지 아니면 그놈의 잘난 얼굴 때문인지 그럴싸해 보였다.

거울 속의 설희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설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장 문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청바지 차림으론 나갈 수 없어.”

자신도 모르게 호들갑을 떨며 왔다 갔다 하는 설희를 보고 귀여운 퍼그, 곰곰이가 짧고 뚱뚱한 목을 기웃기웃거렸다. 까만 눈이 반짝 빛났다.


‘지금 들어왔는데, 누나 또 옷을 갈아입네? 바쁘다아…… 누나는 도대체 뭐하는 거람……?’

 

***


 
7시 반 정각.

두 사람이 만나기로 했던 역 앞으로 설희가 나가자, 저 멀리 은우가 보였다.


“하아. 역시, 차려입고 오기 잘했다.”

달큼한 한숨이 설희의 잇새로 새어 나왔다.

너무 꾸며 입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막 나온 것 같지 않게 오늘 설희는 옷을 꾸미고 나왔다.

평소 대충 풀고 다니던 머리도 위로 묶었고, 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몸에 잘 맞는 원피스를 입고 나와 여름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하늘거렸다.

다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것이 영 귀찮았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귀차니즘을 다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멋졌다.

하얀 셔츠에 면바지. 그것뿐인데도.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일까?

면바지는 그의 단단하고 굵은 허벅지를 그대로 드러나게 했고, 공기의 방향이 이리저리 흔들릴 때마다 걸친 셔츠가 멋스러웠다.

아마 일 때문에 흐트러졌을 게 분명한 검은 앞머리도, 마치 미용실 가서 일부러 세팅한 것처럼 멋스러웠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손안의 종이를 바라보고 있던 은우가 설희의 물음에 서둘러 종이를 접어 주머니로 넣었다.


“아뇨. 지금 왔습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시간 맞춰 온건 설희 씨예요. 나야말로, 시간 붕 뜨게 해서 미안합니다.”

참 신기한 일이다.

병원에서의 옥 선생은 ‘미안하다’는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밖에서는 이렇게 다정하단 말야.

설희가 그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정도의 급변화에 놀라 그를 바라보자, 은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의 반응에 은우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속삭였다.


“근데 옷 갈아입고 왔어요?”

“아, 네.”

역시 티가 났나.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복장을 확인했다.


“이상한가요?”

“아니.”

은우가 입꼬리를 근사하게 끌어올리며 읊조렸다.


“그런 옷도 잘 어울리는구나 싶어서.”

“…….”

“설희 씨가, 예뻐서 쳐다봤어요.”

……역시 아까 낮에 수술이 조금 위험하게 돼서 내내 신경질적으로 굴었던 옥은우 선생과는 다른 사람인 것 같다.

뭘 잘못 먹은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에게서는 달달함이 묻어났다. 설희의 입안이 온통 달았다.

***



“어때요? 여기.”

“맛있어요. 초밥 오랜만에 먹는 것 같은데.”

카운터 석이 있는 스시집.

초밥은 어떠냐고 물은 옥 선생에게 “없어서 못 먹어요.”라고 잠시 내숭을 떠는 것을 잊고 말해버리자, 그는 근처의 일식 전문점에 데리고 갔다.

작은 규모였지만, 분위기가 꽤나 비싸 보인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뭐가 맛있어요? 저 뭐든 잘 먹어요.”

“그럼 오마카세로 시킬까요?”

“오마카세?”

“셰프가 주는 대로. 코스라고 생각하면 되어요.”

“좋아요!”

그렇게 식사가 시작되었다.

고급 스시집은 처음이라, 나오기 전에 그렇게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설희는 음식을 즐겼다. 처음에 나오는 흰살 생선부터, 성게알, 연어알에 마지막 참치까지.


“너무 맛있다.”

“많이 먹어요. 자.”

은우가 그의 몫인 참치 대뱃살로 이루어진 초밥을 설희의 앞 접시에 놨다.


“이거, 선생님 꺼잖아요.”

“괜찮아요. 여기 자주 오니까, 난 어떤 맛인지 알아요.”

“그래도…….”

망설이던 설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왜 이렇게 잘 먹이세요. 무섭게.”

“평소에도 늘 잘 먹이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가 씩 웃더니 티슈를 들어 붉은 입술을 톡톡 쳤다.


“하지만, 맞아요. 오늘 할 말이 있었거든요.”

“할 말이요?”

뭐가 있을까.

같이 식사를 시작하고 옥 선생 기분이 내내 좋았던 것을 보면 병원 일은 아닌 것 같고.

은우가 설희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흑심이 있어서. 내가 아는 집 중에서 가장 맛있는 곳으로 왔어요.”

흑심이라 하면.


“설희 씨. 나랑 가줄 데가 있어요.”

그리고는 은우는 무언가를 내밀었다. 얇은 종이 한 장.


“이게 뭐예요?”

왠지 열어보기가 무서워 설희가 그가 내민 종이를 받지 않고 묻자, 은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근사한 목 근육이 또렷이 떠올랐다.


 


“비행기 표.”

“……비행기 표요?”

“네. 나랑…….”

그답지 않게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제주도에 가죠, 유설희 씨.”

그 말에 설희는 숨을 멈췄다.

***



“옥 선생, 가만 안 둘 거야.”

어? 내가 아주 혼내줄 거야. 봐라.

그와 키스해서 설렜던 마음도 다 취소, 사귀자고 한 그의 말에 떨렸던 심장도 취소, 그리고 제주 가자는 말에 놀라서 먹으려다 벌어진 턱도 다 취소다.


“다 취소라고, 알았어?”

말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설희는 꿍얼꿍얼하며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오늘은 금요일 밤.

동물병원이 끝나자마자 집에 가서 여행 짐을 들고, 공항에 도착한 설희는 입술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갑작스러운 옥 선생의 제주도행 제안.
 


“나랑, 제주도에 가죠.”

 
그렇게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갑자기? 사귀고 나서 첫 데이트에서 2박 3일 일정으로 제주도를 가자는 남자의 말에 너무 놀랐다.

키, 키스 잘할 때부터 문란한 거 알아봤어.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설희의 귀는 발갛게 달아올랐다.

설희가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리는 것을 보고, 은우가 말을 이었다.
 


“걱정 말아요. 비행기 표랑, 숙소는 내가 다 예약할 테니까.”


“아니…….”

 
돈 문제를 떠나서, 너무 진도가 급하잖아.

그가 확인해 보라는 듯, 종이를 다시 내밀었다. 이미 예약한 걸까?

설희가 망설이자, 그의 강인한 손이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들겼다. 마치 유혹하는 듯한 손길. 짜릿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졌다.

결국, 더 버틸 수 없어 그에게서 손을 빼내어 종이를 확인했다.

종이에는

[대한 수의학회 하계 국제 학술 대회] 라는 안내가 써 있었다.
 


“이게 뭐…….”


“학회가 있어요. 주말에.”


“…….”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싶어 설희는 눈을 깜박였다.

은우는 그렇게 설희가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 상냥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2주 뒤, 제주도에서 수의학회가 열린다는 것. 그곳에서 지금까지는 ‘동물간호사’와 ‘수의 테크니션’이라고 주먹구구식으로 불렸지만, 곧 국가 자격증이 나오는 ‘동물 보건사’에 대한 발표와 설명이 있을 거라는 것.
 


“지금 설희 씨 열심히 하잖아요. 꼭 가서 들어봤으면 좋겠어요.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 내 욕심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옥 선생은 웃는 악마 같았다.


“결국은 일이었다는 거야.”

2박 3일이나 제주도를 가자고 하는 남자 때문에 짧은 순간 동안 온갖 상상을 다했던 설희의 얼굴은 창피함에 빨개졌다.


“설희 씨, 뭐 해요?”

비행기 체크인을 해야 하는데 설희가 오지 않자, 옥 선생이 뒤돌아보며 물었다. 설희는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렸다.


“네, 네 갑니다.”

가야죠. 가요. 가고 말고요.

그렇게 두 사람은 학회로 떠났다.

멀고 먼, 바람과 돌의 섬 제주로.

***



“막상 와보니까 좋네요…….”

주말에 학회에 끌려간다는 생각에 입이 댓 발이나 나와 있던 설희는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숙소로 가며, 제주의 바람을 즐겼다.

밤이라 풍경은 보이지 않았지만, 서울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짭짜름하면서도 상쾌한 공기에 저절로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제주도, 좋아해요?”

“좋아한다고 해야 할까…… 처음 와봐요.”

“그래요? 의외네요.”

“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이 제주도였는데, 제가 그때 갑자기 어울리지도 않게 볼거리에 걸려서 못 가고. 그 이후에도 몇 번 시도는 했는데 연이 닿지 않았어요.”

그리고 처음 온 여행이 학회라니.


“그래도 좋긴 좋아…….”

“좋다니 다행이네요.”

“선생님이야 오로지! 학회 때문에 오신 거겠지만, 전 조금 풍경이라도 즐겨보려고요.”

그 말에 옥 선생이 눈썹을 추어올렸다.


“오로지 학회 때문에 오고 싶다고는 안 했는데.”

“…….”

“난 제주도를 좋아해요. 학회 가자고 했을 때, 조금은 사심이 섞였는지도 모릅니다.”

나지막하게 그가 읊조렸다.


“그거…….”

무슨 의미예요?

우리가 단순히 학회로 온 게 아니라는 의미?

그렇게 설희가 물으려던 찰나.

은우가 운전하던 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벌써 숙소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설희는 바깥의 풍경을 보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숙소도, 비행기 표도 은우가 준비한 것이었다. 대충, 호텔을 예약할 거라고 생각해 어디 묵냐고 묻지 않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 도착해버렸다. 설희가 놀라 밖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깜빡 뜨자, 그가 웃었다.


“어때요. 마음에 듭니까?”

“마음에 드냐고요? 여기는…….”

생각지도 못한 곳이었다. 설희의 반응에 은우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학회도 참가하고 싶었고, 꼭 그 강연도 들려주고 싶었지만. 가장 큰 목적은…….”

은우의 큰 손이 설희의 어깨를 감쌌다.


“내가 좋아하는 이곳에서 설희 씨랑 같이 하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왔다.

바람과 돌, 그리고 사랑의 섬 제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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