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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호텔로 (49/80)


49화. 호텔로
2023.04.18.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채린은 가만히 한숨을 뱉었다. 그녀는 처음 와본 호텔방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정신없는 하루네.”

낯선 남자가 집에 찾아오질 않나. 그 때문에 호텔로 오질 않았나. 하지만, 호텔에 오기로 한 건 잘한 선택인 것 같다. 집에 계속 있었다면 밤새 불안했겠지.

진호는 호텔에 가자고 말하고, 채린이 짐을 챙기는 내내 그녀의 곁을 지켰다. 손이 벌벌 떨리는 채린에게 차분하라고 말을 걸어주고, 짐을 다 챙기고 나자 그 가방을 들고 같이 호텔까지 나서줬다.

가까운 호텔에 아는 사람이 있다며, 방을 잡아주고 그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 무슨 일 없어도 전화해도 돼요.”라고 말하고 방을 나섰다.

단 한 번도 싫은 얼굴을 하지 않고, 단 한 번도 다른 흑심을 드러내지 않고. 계속 걱정하는 얼굴로.

그는 그저 떨고 있는, 두려움에 찬 사람에게 대한 호의로 움직였다.

정말 좋은 사람이다.

채린은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남자는 처음 만나보았다. 전 남친도, 자신의 아버지도 그런 다정함은 전혀 없었다.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다, 는 생각을 해본 적 없는데.

똑딱, 똑딱, 똑딱, 똑딱, 조용한 방안에 시계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만 들린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 무슨 일 없어도 전화해도 돼요.”

 
그렇게 말했던 진호의 말이 떠오른다. 채린은 핸드폰을 들어 최신 목록에서 진호의 이름을 찾아냈다.

무심코 그 이름을 눌렀다.

통화연결음이 채 두 번도 울리기 전에, 핸드폰 건너편에서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아, 저, 진호 씨.”

-채린 씨.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뇨.”

무슨 일 없어도 전화하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무슨 일 없이 전화하는 건 이상했다.


“바쁘세요?”

-한가합니다. 지금 텔레비전 보고 있었어요.

“아, 재밌겠네요. 계속 보세요. 그럼…….”

-아뇨!

핸드폰 건너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텔레비전보다 채린 씨가 훨씬 재밌는데요.

“아, 전 재밌는 말 못하는데.”

-아니에요, 그냥 존재만으로도 재밌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말해주세요.

그의 말에 피식 웃어버렸다.

재밌는 것은 진호였다. 자신의 주위에 없던 신선한 타입.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점점 그에게 젖어 들어갔다.


“호텔에서 자는 건 처음인데.”

-그래요? 여행 안 가는 타입이에요?

“네.”

그런 습관이 없다고 해야 할까. 가끔 텔레비전에 나오는 풍광을 보면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막상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여행 좋아하세요?”

-네. 전 여행 엄청 좋아해요.

그렇게 보인다. 활동적이고, 활발하고. 정적인 자신과는 많이 다른 타입이었다.


“어디 어디 가보셨는데요?”

-어디 갔냐면요…….

그렇게 두 사람은 별거 아닌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벽 3시까지.

***


 
비교적 평온한 병원 생활이었다.

여름이 길어져 병원에는 환자들도 많았고, 설희도 바빠졌다. 실수하는 일도 거의 없어져서 누군가에게 혼나는 일도 없다. 딱 하나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설희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매니저였다.


“설희 씨, 저는 그날 정말 아무것도 못 본 거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어요.”

외삼촌의 별장에서 은우와 키스를 하다가 매니저에게 들켰다. 그 이후로 매니저는 설희를 볼 때마다 자꾸만 생글생글 웃으며 배려를 했다. 오히려 그게 더 마음이 불편했다.

미치겠어.

그래서 자꾸 설희는 병원 내에서 은우를 계속 피했다. 괜히 매니저에게 그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거기다가 설희 내의 감정의 문제도 있었다.

은우를 보면 속이 일렁인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전처럼 무섭거나 설레는 것을 넘어서서, 확연히 드러난 붉은 감정에 가끔은 병원에서 실수를 저지를까 봐 무서웠다.

일이 끝난 저녁, 건조한 눈을 깜박이면서 설희는 딱딱해진 어깨를 위로 들어 올렸다가 떨어뜨렸다.

뻐근한 감각이 목 근육을 타고 온몸으로 내려갔다.


“후우…….”

깊은 한숨을 쉬고 걸어놓았던 옷을 걸쳤다.

그때, 뚜벅뚜벅, 사람의 걷는 소리에 설희의 귀가 쫑긋, 섰다. 집에 가려고 준비하는 설희의 뒤에 은우가 있었다.

하얀 가운을 벗고, 일상복을 입고 있는 그는 눈이 부셨다. 떡 벌어진 가슴, 각이 잡힌 어깨. 얇은 티셔츠만 입고 있어서 그런지 단단한 근육이 오롯이 드러났다.

저 가슴에 손을 올렸드랬지.


“아냐아냐, 또 무슨 생각을.”

“무슨 생각을 했는데요?”

설희의 혼잣말에 은우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 자신보다 훨씬 작은 설희를 내려다본다. 입꼬리에는 느른한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아찔한 곡선이 눈에 박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까 일 처리 다 못한 게 있어서.”

그러자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설희 씨. 일 다 끝났어요?”

“아, 네.”

“그럼, 집에 갈까요?”

당연한 것처럼, 그가 제안했다.

하긴 그래.

직장도 같고, 집도 같으니까, 일반적인 직장 동료라고 해도 일이 같이 끝나면 집에 같이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설희의 눈에 옥 선생 너머, 열린 문 저편에 매니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설희와 은우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매니저가 두 손을 꼭 쥐고 파이팅을 외쳤다.


‘연애 파이팅이에요!’

악의는 없는 것을 알았지만, 얼굴이 달아올랐다. 둘이 농밀한 스킨십을 하다가 들킨 게 자꾸 떠오른다.

아, 창피해. 안 되겠다. 당분간 병원에서라도 옥 선생님을 멀리해야겠다. 그와 아무 사이도 아니었을 때는 오히려 같이 다니겠는데, 이제는……. 도저히.


“저, 죄송한데.”

집에 가자는 은우의 말에 설희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앞으로는 병원에서 같이 집에 못 갈 것 같아요.”

“왜요?”

“다른 사람들 눈도 있고 하니까요.”

설희의 말에 은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 누구요?”

“그게.”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붉고 진한 입술이 입에 들어왔다. 자신의 것을 물고 빨았던.


“매니저님도 그렇고, 그리고…….”

“그리고?”

이현도 둘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현의 이야기를 하면 그가 또 기분 상해할까 봐 말을 아꼈다.


“지, 지난번에…… 보호자 분이 둘이 걸어가는 거 봤다고, 그러시더라구요.”

있지도 않은 보호자 이야기를 하면서 거짓말을 했다. 옥 선생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뻔한데.


“진짭니까?”

“네, 네.”

그의 의심 섞인 말에 설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예요.”

“누가 그랬는데요. 누구 보호자님이 그러셨는데요?”

은우의 질문에 설희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무슨 사생활 보호…….”

그녀의 일자로 단단하게 닫힌 입술을 보고 옥 선생이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어이없다는 듯, 그러나 입꼬리에는 아직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재밌어하는 걸까. 아니면 답답한 걸까.


“그래요, 그럼. 따로 가죠.”

은우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대로 퇴근해버렸다. 돌아가는 은우의 넓게 딱 벌어진 어깨를 뒤에서 훔쳐보며 설희의 손가락이 꼬물꼬물거렸다.

왜 내가 가기 싫다고 했는데, 내가 아쉬운 걸까.

마지막 정리를 하는 설희의 손이 더없이 무거웠다.

***



“아, 피곤해.”

집에 오는 길에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돌아온 설희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가방을 던졌다. 설희가 낸 소리에 안에서 곰곰이가 탁탁탁탁, 신나는 듯 걸어 나왔다.


“끼잉.”

보고 싶었다는 듯 한 번 울면서 곰곰이가 고개를 한껏 들어 설희를 바라보았다. 설희는 손을 내려 곰곰이의 머리를 긁어주었다.


“잘 있었어?”

곰곰이는 기분이 좋다는 듯, 설희의 손짓에 눈이 가늘어지면서 작게 몸을 떨었다.


“밥 먹어야지.”

오늘 종일 근무에, 마지막에 은우를 거절한 스트레스에 몸이 지쳤다.

당장 바닥으로 녹아내려 버릴 것처럼 몸이 노곤했지만, 곰곰이 밥을 챙겨주는 것이 먼저였다.

곰곰이는 동글동글 말린 꼬리를 하늘하늘 흔들면서 설희를 쫓아왔다. 사료통에서 사료를 꺼내, 곰곰이의 식기에 덜어주었다. 곰곰이는 까만 눈을 반짝거리며 그런 설희를 바라보았다.


“얼른 먹어.”

식기를 쓱 밀어주자, 곰곰이는 복슬복슬한 꼬리를 파닥파닥 흔들며 고개를 숙이고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아…… 곰곰이라도 있었으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정말 힘들 뻔했어. 집에 돌아와서 위로해주고, 함께해주는 귀여운 곰곰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몰랐다.
 


“그래요, 그럼. 따로 가죠.”

 
그렇게 말을 내뱉던 옥 선생을 생각하자, 다시금 눈앞이 뱅글 돌았다.


“괜히 그렇게 말한 걸까.”

아무래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연애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도 쑥스러웠고, 그리고 무엇보다 매니저에게 들킨 게 쑥스러워서 조금 거리를 두려고 했는데.


“제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옥 선생님에게 말해야겠다.”

설희는 곰곰이가 밥을 먹는 모습을 쪼그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두 손을 불끈 쥐고 외쳤다.


“아자, 아자, 파이팅!”

혼자서 말하는 그 소리에 놀라 곰곰이가 꾸역꾸역 밥을 먹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열심히 오물거리던 입도 멈추고 멍하니 설희를 바라보는 모습에 설희가 미소를 지었다.


“너한테 화낸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 미안해, 큰 소리 내서.”

“끼잉.”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 나서야, 곰곰이는 눈을 다시 아래로 내리고 밥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밥을 냠냠 잘도 먹는 곰곰이를 사진 찍으려고 핸드폰을 뒤지던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쪼그려 앉아 있던 설희는, 방에 울리는 소리에 몸이 굳었다. 지금 시간 저녁 8시, 집에 찾아올 사람은 없다. 택배 시킨 것도 없었고.

옥 선생이다.

역시 아까 그 말이 마음에 걸렸던 걸까?

어쩌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몸을 움츠리고 있던 설희는, 다시 한번 벨이 울리자 그제야 몸을 일으켜 힘없이 현관문을 열었다.


“네…….”

옥 선생에게 또 뭐라 말을 들을지 몰라 우울한 표정으로 문을 열자 그곳에는 의외의 사람이 서 있었다.


“택배예요.”

처음 보는 택배 배달원이 커다란 택배 박스를 들고 서 있었다. 당연히 옥 선생이라고 생각했던 설희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택배요? 어, 어디서 왔지.”

택배 배달원이 설희에게 택배를 건네주고, 설희 질문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저 몸을 돌려 가버렸다. 그래도 좋았다.

하…… 다행이다. 옥 선생이 아니구나.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

택배를 누가 부쳤나 보려고 고개를 숙였던 설희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어디선가 설희를 빤히 쳐다보는 눈초리가 느껴졌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눈길의 주인은 뻔했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조심스레 들었다.

복도 끝, 엘리베이터 내리는 곳에 키가 큰 남성이 서 있었다. 체크셔츠에 면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고개를 살짝 기울인 그 남성.

느른한 눈초리가 자신을 향한다.

은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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