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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이글거리는 눈빛 (44/80)


44화. 이글거리는 눈빛
2023.04.01.



“옥 선생님.”

여기서 만나다니.

은우가 이현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눈치가 없는 설희조차 알 정도였다. 그런 이현과 산책 갔던 것을 들킨 건 무언가 좀 그랬다.

잘못한 건 없지만서도 왜인지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은우의 시선이 설희의 뺨에 닿아 있는 이현의 손가락에 닿았다. 손가락이 쓸데없이 살결을 쓸어내렸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은우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은우의 등장에 당황한 설희와는 달리, 이현은 미동조차 없었다. 설희의 뺨을 살짝 톡톡 치고는 손을 뗐다.


“별거 아냐. 설희 씨 여기 지금 뭐가 묻었길래.”

“…….”

“근데 형은 무슨 일이야, 여기?”

이현이 고개를 기울이며 은우를 바라보았다.


“여기 사니까.”

“여기는 설희 씨 오피스텔인데?”

“우리 집이야.”

“유설희 씨랑 같이 산다는 의미야?”

여전히 이현의 목소리에는 농담기가 잔뜩 스며들어있었다. 그러나 은우는 반대로 미간을 꽉 찌푸리고, 이현과 설희 사이의 좁혀진 거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가 그런 말을 했지?”

“…….”

“같은 건물에 살아.”

“아, 그래? 몰랐네, 그건 또.”

은우는 분명, 이현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별것 아닌 사이일 뿐이라고.

하지만 지금 이현과 은우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은우는 명백히 그를 적대시하고 있었고, 이현은 그런 은우를 즐거운 듯 놀리고 있었다.

이현의 입꼬리가 다시 한번 올라갔다.


“전 그럼 가볼게요. 설희 씨도 약속 있다면서요. 아, 설마 그 약속이.”

이현의 눈이 은우에게로 향했다.


“은우 형이랑 만나는 약속이에요?”

아까 설희가 그에게 말한 것은 그저 집으로 가기 위해 만든 가짜 약속이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래요? 오늘 어쨌든 너무 즐거웠어요.”

다시 한번 이현의 손이 설희의 어깨를 잡았다. 꽉, 손가락이 어깨에 파고들었다.


“다음 주도, 설희 씨랑 이런 시간 보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뭐라 대답하기도 전, 이현은 멀어져갔다. 오늘 산책 약속을 정했던 것이 다분히 일방적이었던 것처럼.

***


 
이현이 사라지고 나자, 오피스텔 입구 앞에서는 산책을 끝내고 와서 힘이 빠진 곰곰이와 설희, 그리고 가만히 말없이 서 있는 은우만이 남았다.

은우는 가지도 않고, 말도 꺼내지 않고 가만히 설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이 숨 막혀서 설희가 안아달라고 보채는 곰곰이를 들어 올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어디…… 가세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한 기분이다.

질문당한 것도 아닌데 답해야 할 기분이고.


“네. 잠시 일이 있어서.”

“그러시구나,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인사를 하고,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단단히 굳은 은우의 표정이 마음 한구석을 콕콕 찍어서 설희가 몸을 돌렸다.


“선생님.”

“네?”

“……저, 오늘 최이현 선생님이랑 나간 거요, 그거…… 그냥 최 선생님이 강아지 친구가 필요하다고 하셔서 나간 거지.”

“…….”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꼼지락거리는 곰곰이를 안은 채, 필사적으로 웃어 보였다.


“왜 제가 이런 말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어쩌다 보니. 강아지 산책 때문에 만난 거예요.”

설희가 주절주절 말하자 은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단단한 목 근육이 비쭉, 떠올랐다.


“설희 씨.”

“네?”

“괜찮아요. 나한테 그런 이야기 할 필요 없습니다. 유설희 씨가 어디서 누굴 만나던, 그건 당신 자유니까.”

그가 손목을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했다.


“전 볼일이 있어서 그만.”

그리고 그렇게 떠났다.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

괜찮다고 한 것치곤 뭔가 이상한데.

타탁, 타탁. 고기가 타는 소리가 귀를 스쳤지만, 멍하니 설희는 고기가 구워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설희 씨, 괜찮아요?”

“……네? 네에.”

채린의 말에 설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너무 익다 못해 기름에 불이 붙어 활활 타는 고기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오늘은 워크숍 날.

말이 워크숍이지, 그냥 놀러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임신한 부원장, 최 선생님이 병원을 떠나는 기념으로 원장 선생님의 양평 별장으로 여행을 왔다. 1박 2일 동안 그냥 먹고 쉬고 하는 여행.

나이가 제일 어린 테크니션, 채린이 고기를 굽는다고 나서서 설희도 쫓아 따라왔다.


“아무래도 피곤하신 것 같은데, 들어가서 쉬세요. 오늘 워크도 많으셨잖아요. 제가 할게요.”

채린의 말에 설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좀 딴생각을 하느라.”

“괜찮으세요?”

“네, 이제 괜찮아요.”

도움이 되려고 나온 건데, 오히려 걱정을 시켜버렸다. 설희가 미안한 마음에 더욱 바지런히 채소와 고기를 철망 위에 올렸다.

오늘 워크숍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돌마래 동물병원에서 현재 일하는 사람들은 7명. 설희와 새로 들어온 최이현 선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3년 이상 같이 일해서 사이가 좋았다.

물론, 이현과 옥 선생을 제외하고.

은우는 오늘 유독 말이 적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특히나 그랬다.

저 멀리, 짐을 꺼내는 일을 마치고 서 있는 은우에게 시선이 갔다.

바람이 분다. 나무 밑의 그늘에 서 있는 그의 머리카락이 휘날려서 단정한 이마가 드러났다.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 중일까.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또 한번 생각에 젖었는데, 채린이 고기를 뒤적거리면서 속삭였다.


“근데, 있잖아요.”

“네?”

“새로 온 최이현 선생님 있잖아요. 좀 이상하지 않아요?”

“최이현 선생님이요?”

“네.”

채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아직 20대 초반의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씩씩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동물병원에 취직해서 진상 고객이 찾아와도 잘 대처했고, 응급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뒤에서 말하지 않는 게 채린이었는데.


“좀, 그렇더라고요. 일하면서도 설렁설렁하시구, 잡담만 많이 하시구, 지난번에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속삭였다.


“약 조제를 할 때, 잘못 오더를 내리신 거에요. 스테로이드였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 강아지 체중이랑 확인하신 거 맞냐고 제가 체크해보니 체중을 안 재보셨다고. 대략 맞지 않냐고 그러시고.”

“그건 위험하잖아요.”

“그렇죠.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요.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원장 선생님에게 보고는 했어요.”

“그렇구나.”

“잘생겼다고 우쭐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요.”

채린이 입술을 삐죽이면서 말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긴 그림자가 늘어섰다.


“뭐가 마음에 안 들어요?”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그 자리에 이현이 서 있었다. 누가 다가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설마 들은 건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느른하게 웃는 표정에 채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 오늘 고기 질이 마음에 안 든다고요.”

“그렇구나. 오늘 고기 한우 아니에요?”

“한……우긴 한데 뭔가 별로네요. 냉동인가? 저, 버섯 좀 들고 올게요.”

채린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자리를 떴다. 이현이 채린이 들고 있던 집게를 잡으며 눈썹을 끌어올렸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요?”

“별 이야기 안 했습니다.”

당신이 수상하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현은 넘어가지 않았다. 고개를 기울이고 물었다.


“설희 씨.”

“네?”

“은우 선배가 뭔 말 했죠?”

이현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뭔 말이요?”

“나에 대해 뭐 말 안 했어요?”

옥 선생이 이현을 멀리하는 분위기를 눈치채고, 이현에 대해 물어본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옥 선생은 별말 없었고, 처음에 단 한 번 “여우 같은 사람”이라고 한 것이 다였다.

욕은 아니었지만, 여우 같다는 말을 전하는 것은 좀 그래서 말을 아꼈다.


“없었는데요…… 같은 연구실이었다고. 그 정도…….”

“흐응, 그래요?”

이현의 눈이 설희를 훑었다. 진짜인지 맞는지 확인하는 것만 같았다.


“네, 그게 다인데.”

“그렇구나…….”

이현의 얼굴에 알쏭달쏭,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


“난 또, 뭐 이것저것 다 들었을 줄 알았죠.”

“뭐를요?”

이현의 눈이 여전히 약간은 의심스럽다는 듯 설희를 바라보았다.


“은우 형이랑 나랑 예전에 같이 살았다는 이야기라든지?”

“같이 사셨다고요?”

“그래요. 2년이나 같이 살았는데.”

같이 살 정도면 되게 친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이현이 나타나기만 하면 옥 선생 주변에서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데.

이현의 말에 설희가 정말 놀라워하자, 정말 그녀가 아무 이야기 못 들었다는 것을 확신한 이현이 중얼거렸다.


“그랬구나. 나는 은우 형이 설희 씨 좋아하는 것 같길래, 다 말해준 줄 알았죠.”

그 말에 설희가 한 발자국 더 뒤로 물러났다. 거짓말은 잘해도, 의표가 찔린 놀라움은 숨길 수 없었다. 누구한테 들었지? 아무리 그래도 온 지 몇 주 안 된 사람에게 들킬 일은 아니었다.

눈이 동그랗게 된 설희를 보고 이현이 말을 이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은우 형.”

“뭐를 조심해요?”

“설희 씨 같은 사람이랑은 잘 맞지 않아요. 차갑고 냉정하잖아.”

“……차갑다고요?”

일 할 때 엄격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차갑지는 않았다. 누구보다 상대에게 마음을 쓰고 다정한 수의사인데.


“차갑기만 해요? 음흉하잖아요. 설희 씨에게 숨기고 있는 게 많을걸요. 그 사람이랑 맞을 여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설희가 시선을 돌려 은우 쪽을 바라보았다. 짐을 정리하던 그의 시선과 닿았다. 차갑지 않은, 오히려 뜨거운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



“배부르네.”

저녁 시간. 원장 선생님이 쏜 고기를 거나하게 먹고, 설희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외삼촌이 가지고 있는 별장은, 설희가 어렸을 적 와보기는 했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는 처음이었다. 양평에 위치한 작은 단독주택 앞으로는 저 멀리 강가로 가는 산책로가 펼쳐져 있었다.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숨이 차다.


“좀 걸을까.”

천천히 걸어 나가는데, 자신 보다 앞에 10m쯤 먼저 걸어가는 남자가 보였다. 흘깃 보기만 해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옥 선생님…….”

흘리듯 말한 소리에 앞에 선 남자가 등을 돌렸다. 오늘 온종일 한마디도 못 했다. 왠지 어색해 먼저 다가갈 생각도 하지 못했고, 지금도 그는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고 있었다.

피할까. 하지만 산책로는 외길이었다. 망설이느니 피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 그의 곁으로 걸어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선생님. 오늘 저녁 식사 많이 안 하셨는데, 괜찮으세요?”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그러신 거면 다행인데. 표정이 안 좋으셔서.”

그 말에 은우가 눈썹을 비틀었다.


“별거 아니라면 괜찮고요. 제가 괜한 오지랖을 부렸네요.”

“아뇨.”

그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오늘 하루 종일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까만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사실은.”

“…….”

“괜찮지 않습니다.”

낮은 목소리로 그가 읊조렸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오며 은우가 그녀에게 말했다.


“괜찮다고 했는데, 괜찮지 않아.”

“…….”

“질투 같은 거,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팔을 들어 은우가 설희의 뺨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현이 만지던 뺨 위로 손가락을 대려다가, 조금 떨어져 팽팽한 긴장이 느껴졌다.


“질투가 나요. 유설희 씨.”

“…….”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 일이라면 이렇게.”

닿지도 않았는데, 그와 가까워진 살결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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