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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질투 (45/80)


45화. 질투
2023.04.04.



“질투가 나요. 유설희 씨.”

“…….”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 일이라면 이렇게.”

질투 같은 건 어울리지 않는 남자의 말이었다. 그가 눈을 느른하게 뜨고 속삭인 말에 설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초에 은우는 질투할 필요가 없었다. 이현과는 아무 사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같이 일하는 수의사와 직원, 그저 그뿐.

지난번에 산책을 간 것도 이현이 막무가내로 가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향했다. 물론, 그의 강아지는 귀여웠지만 같이 밥을 먹는 것도, 산책을 하는 것도 썩 즐겁지 않았다.

곰곰이와 둘이서만 걷는 것이 더 즐거울 정도로 시시했다.

설희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선생님, 최이현 선생님이랑은 아무 사이 아니에요.”

“알아요, 나도.”

선선하게 은우가 대답했다. 그의 눈이 가늘고 부드럽게 휘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

“최이현이랑 당신이 아무 사이인 것 다 알면서도.”

깊고 짙은 목소리.


“그러면서도 내가 질투를 하니까. 유치하잖아요. 바보 같고. 연애 같은 거에 목숨 거는 사람들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유설희 씨만 앞에 있으면 자꾸만 그렇게 되니까.”

정말로 그렇게 안 보였다. 지금도 표정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찡그리지도, 좁아지지도 않은 미간.

다만.

강렬하게 쏟아지는 올곧은 시선.

그 시선 때문에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지난번에 그렇게 그냥 가버렸어요. 내 마음을 나도 제대로 설명을 할 수가 없어서.”

“…….”

“미안하군요.”

마음에 남아 있었는지 그는 그렇게 읊조렸다.

바람이 한들한들 분다.

여름밤의 시골길에는 여러 가지 소리가 가라앉았다. 풀벌레가 찌르르 울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밤바람이 풀숲을 흔드는 소리.

그리고, 나지막한 은우의 숨소리.

설희가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사과하실 일 아니에요. 저, 정말 괜찮으니까.”

“…….”

“유치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오히려, 그의 말에 심장이 찌릿찌릿 울렸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렇게 감정을 쏟아낸 적 있었던가. 거기에, 그 상대가 평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았던 옥은우라는 사실이 더욱더 심장을 흔들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고민하던 순간.


“유설희 씨, 어디 갔어?”

“그러게요. 아까 산책 간다고 그러셨는데, 어디 빠지신 거 아닌가?”

저 멀리 별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

설희를 바라보던 은우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 지었다.


“가봐요.”

“…….”

“설희 씨, 찾는 사람들이 많네.”

“선생님은요?”

“나는.”

그가 잠시 길을 돌아보았다.


“조금만 식히고 갈게요.”

이 감정을.

그리고는 은우는 몸을 돌려 그렇게 걸어갔다.

***


 


“최 선생님. 몸은 어떠세요?”

밥을 다 먹고 난 후. 사람들이 정원에 모여 담소를 나눴다. 병원의 부원장이기도 한 최 선생은, 38살로 조금은 늦은 첫 임신 중. 이제 6개월이 넘어 배가 볼록 튀어나온 게 티가 났다.


“생각보다는 좋아요. 노산이라구 걱정 많이 했는데. 입덧도 거의 다 가라앉았거든요.”

“애기 성별은 여자랬죠?”

“네.”

“최 선생님 닮아 예쁠 것 같아요.”

“볼래요? 입체 초음파 찍었는데.”

그리고 그녀가 핸드폰 사진을 꺼내 보여줬다. 아이가 눈을 꼭 감고 있는 사진이었다.


“이렇게 보니까 최 선생님 닮은 것 같기도 하고요? 너무 귀여워요. 초음파가 이렇게도 찍히는구나.”

“귀여워요? 난 내 눈에만 귀여운 줄 알았어요.”

“아니에요, 너무 귀여워요.”

올망졸망하게 생긴 게, 그녀와 똑 닮았다.

설희는 최 선생님의 핸드폰을 돌려주고는 한숨을 쉬었다.

돌마래 동물병원 사람들이 좋았다. 엄격한 옥 선생과는 다르게, 최 선생님은 늘 다정하게 설희를 다독여줬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인지, 큰언니같이.

병원 생활이 힘들어서, 내가 정말 잘하는 게 맞나 우울할 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최 선생님이 그녀에게 다가와 토닥여주곤 했다.
 


“힘들죠? 원래 동물병원 생활이 회사랑 달리 좀 그래요. 그래도 잘하고 있어요. 조금만 힘내요, 응?”

 
그렇게 다독여 줄 때면 피로도 싹 잊히고 다시 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곤 했다.

그랬던 최 선생님이 떠난다니. 오래 같이 있지는 않았지만 서운함이 폭발했다.


“좋은 일로 나가시는 거지만, 너무 서운하네요. 조금 더 여러 가지 배우고 싶었는데.”

“그렇네요, 나도 서운해요. 설희 씨랑 일하는 거 재밌었는데.”

“저 때문에 힘드셨죠.”

“아뇨, 재밌었어요. 나 애기 낳고, 한 일 년만 쉬고 개업할까 해요.”

“정말요?”

“응. 원장 선생님이 휴직하고 다시 돌아오라 하셨는데, 이제 개업할 때가 된 것 같다고 거절했어요.”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이고 설희는 웃었다.


“잘하실 거예요. 최 선생님은.”

“그럼 그때 올래요? 설희 씨도 우리 병원으로.”

“앗, 스카우트 제의인가요?”

“맞아요. 혹시 돌마래가 싫어지면 우리 병원으로 와요.”

“정말요?”

그냥 지나가면서 하는 말이겠지만, 그냥 그런 말 자체가 너무 좋았다.


“감사합니다, 말뿐이라도.”

웃음이 자꾸 새어나갔다.

***

뒷정리 시간. 설거지를 하면서 설희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왜인지 기분이 좋았다.

아까 잠깐, 옥 선생과 걸었던 산책도 좋았고, 최 선생님과 함께 나눈 대화도 좋았다. 그래서 참 좋았는데.


“오, 설희 씨네. 설거지 도와줄까요?”

뒤에서 들린 소리에 설희가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좋은 기분을 망치려고 왔는지, 최이현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평소에 가진 이미지도 좋지 않았는데, 아까 채린에게 들은 말 때문인가 더더욱 그 얼굴이 밉상으로 보였다.


“아뇨, 괜찮아요. 그릇 몇 개 씻는 건데요.”

“그래요? 그럼 여기서 지켜볼게요.”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 그냥 가주지. 그러나 그런 설희의 마음과는 반대로 이현은 싱크대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종알거렸다.

병원에서 있었던 일, 자기 사생활 일. 듣고 싶지 않은 정보를 줄줄 쏟아냈다. 설희는 점점 말수가 적어진 채, 설거지에만 집중했다. 그러자 이현이 쓱, 설희 앞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설희 씨.”

“네?”

“은우 형이 뭐라고 했길래 나를 그렇게 미워하는 겁니까? 뭐라고 들은 거예요? 도대체.”

벌써 두 번째 질문이었다.

이 사람은 뭔가 단단히 착각한 것 같다. 마침, 설거지도 다 끝났다. 설희는 손을 따뜻한 물에 씻어 낸 뒤 탁탁, 손을 털었다.

그리고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최이현 선생님.”

“네?”

“미리 말해두는데요, 옥 선생님은 그런 말 안 해요.”

평소에는 설희의 말투는 더없이 부드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냉기가 가득 맴돌았다.


“몰래 숨어서, 그 사람 없는 데서 나쁜 이야기하고 그러지 않는다고요.”

마치 당신처럼.


“확실히 감정 표현을 잘 안 하고, 엄격한 분이시지만, 최이현 선생님에 대해서 나쁜 말은 한 번도 안 했어요. 제가 그런 걸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혹시라도 제가 최이현 선생님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옥은우 씨와 아무 상관도 없이 제가 최이현 선생님을 보고 판단한 걸 거예요.”

그가 싫다, 좋다 판단하기에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만약 그가 싫어졌다면 그것은 옥 선생 탓은 아니었다.

이렇게 숨어서 옥 선생님에 대해 험담을 하고, 대충 진료를 봐서일 것이다.

설희의 말에 이현의 표정이 유례없이 비틀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설희는 설거지한 자리를 행주로 말끔히 닦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더 이상 쓸데없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시간이 짧았다.

***

다 같이 놀러 온 여행이기는 했지만, 설희는 오늘 유난히 바빴다.

외삼촌은 호인이었지만, 허허 웃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타입이셨고, 그러다 보니 왠지 그의 조카이자, 이 별장에 그래도 와본 자신이 바지런히 움직이게 됐다.

그래도 이게 마음이 편했다.

병원에서는 가장 경력이 짧았기 때문에 늘 물어보기만 했는데, 이렇게라도 몸을 움직이니까.


“그러고 보니, 꼬치는 어디로 갔나.”

임신한 최 선생님이 드시고 싶다고 해서, 오늘 매니저가 사온 마시멜로를 굽기 위한 쇠꼬치를 찾아서 설희는 밖으로 나왔다.

외삼촌의 별장에서 조금 걸어가다 보면 별장 부지 가장 구석에 작은 창고가 하나 있었다. 외삼촌에게 물어보니 웬만한 잡동사니는 다 거기에 둔대서 바지런히 그곳으로 향했다.

걸쇠로 걸려 있는 창고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둑어둑하고 매캐한 실내가 보였다. 안에는 불이 없어, 핸드폰을 꺼내려 했지만 마침 핸드폰은 안에 두고 나온 모양이었다.


“대충 찾아볼까.”

다행히도, 작은 창문에서 들어온 희미한 달빛 때문에 곧 실내가 보였다. 고개를 들어 이곳 저곳을 살피는데, 저 위에 삐죽 튀어나온 쇠꼬치들이 보였다.

저건가?

어렸을 때 외삼촌이 저기에 이것저것 꽂고 캠프파이어에 구워줬던 생각이 났다. 반짝거리는 거 딱 저거 같은데.

문제는 설희의 키로는 도저히 그곳에 닿을 것 같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대니, 작은 의자 하나가 보였다.

그 의자를 두고 올라가 저 위의 꼬치를 꺼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아직도 잘 닿지 않지만.


“조금만, 조금만.”

“이거, 내려줘요?”

“어.”

누군가가 다가와 꼬치를 내려주었다. 자신보다 한참은 더 큰 남자. 은우의 등장.


“선생님.”

“그러다가 엎어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감사합니다.”

“내려와요.”

그가 손을 뻗어 설희에게 내밀었다. 은우의 손을 잡고, 의자에서 내려온다. 그러나 의자에서 내려왔는데도 불구하고, 은우는 설희의 손을 놔주지 않았다.

단단한 손이 부드럽게 설희의 손을 감싸 쥔다.


“선생님?”

꿀꺽.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손을 끌어당기자, 저절로 은우의 품에 안겼다. 어두운 창고 안에서 그에게 갇혔다.


“무, 무슨 일이세요?”

설희의 질문에 그가 정말 모르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일 것 같아요?”

여전히 안은 채 그가 속삭였다.


“왜, 싫어요?”

“싫진 않지만.”

“않지만?”

은우의 물음에 설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연애가 처음도 아니었다.

그다지 어린 나이도 아니었다.

근데 은우 앞에만 서면 뭐라고 해야 할까, 중학생 소녀가 된 것처럼 별것도 아닌 것에 가슴이 떨린다.

혹시 옥 선생님이 말했던 게 이걸까. 아까 전 산책길에서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무도 없는 오솔길에서 그가 이렇게 속삭였었지.
 


“자꾸만 질투해서 문제입니다.”


“…….”


“최이현이랑 당신이 아무 사이인 것 다 알면서도.”

 
깊고 짙은 목소리.
 


“그러면서도 내가 질투를 하니까. 유치하잖아요. 바보 같고. 연애 같은 거에 목숨 거는 사람들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유설희 씨만 앞에 있으면 자꾸만 그렇게 되니까.”

 
별것도 아닌데, 자꾸만 달라지는 것. 그와 자신의 마음이 같을지도 몰랐다.

그는 언제나 솔직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직진으로 자신에게 달려오기만 했다. 이제 나도 달려야 할 때일지도 지도 몰라.


“선생님.”

설희가 그의 딱딱한 팔을 잡고 숨을 들이켰다.

말을 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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