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의뭉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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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의뭉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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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의뭉스러운
2023.03.28.
설희가 동물 테크니션으로 일한 것은 돌마래 동물병원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아는 수의사는 딱 세 명이다.
병원에는 거의 나오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가끔 대학 강의에 나가는 게 전부인 원장 선생님, 외삼촌.
늘 하늘하늘한 분위기에 부드러운 부원장, 최 선생님.
그리고 꼼꼼하고 깐깐한 옥 선생.
그녀가 네 번째로 알게 된 수의사, 최이현은 그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특히 가장 옆에서 진료를 오랫동안 지켜본 옥 선생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
외삼촌인 원장은 잘생긴 이현이 동물병원에 들어오면, 병원에서 일하는 미혼의 여성 직원들이 다 즐겁지 않겠냐며 농담을 했다. 그러나, 실제로 가장 즐거워하는 것은 수많은 애견 보호자들이었다.
“어머! 처음 뵙는 선생님이 계시네. 어머…… 어머.”
늘 오는 포메라니안의 보호자가 이현을 보고는 설희에게 눈썹을 찡긋찡긋 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작게 속삭였다.
“새로 오신 선생님도 미남이시네요.”
특히 아주머니 보호자들에게 그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좀 대강 대충 진료를 보아도, 이현은 넉살이 워낙 좋아서 진료가 끝이 나고 보호자들이 진료실에서 모두 입가에 웃음을 띠고 걸어 나왔다.
그러나 보호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것과는 달리, 설희는 그를 볼 때면 왜인지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딱 집어 무엇이라고 말할 순 없었지만.
그녀가 그의 보조로 들어갔을 때였다. 처음 내원한 슈나우저의 기초 검사를 하기 위해, 잠시 보호자가 진료실 밖으로 나가 있었다.
새로 내원하거나, 오랜만에 내원한 경우 옥 선생의 경우 늘 꼼꼼하게 검사를 진행했다. 이빨과 잇몸의 상태, 귀 안쪽 상태, 가슴에 멍울은 있는지, 피부 상태는 어떠한지, 항문은 깨끗한지 등등.
그러나 이현은 대충 슈나우저를 쓰윽 한번 훑고는 청진기를 심장 쪽에 잠시 대고, 금방 떼었다.
“됐어요. 설희 씨가 호흡수랑 심박수만 좀 재주세요.”
엥? 이걸로 끝이라고?
꼼꼼한 은우는 둘째치고, 최 선생님조차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본 일이 없는지라 잠시 당황해 슈나우저를 안은 채 망설였다. 오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설희를 보고 이현이 물었다.
“왜요?”
“아, 아니요…… 신체검사는 끝나신 건가요?”
“네.”
너무나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태도에 당황해 오히려 설희가 말문이 막혔다.
“왜, 더 할까요?”
“외람되지만…… 그게 좋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이 아이, 아직 3살이죠? 건강해 보이는데요, 뭘. 이번에 온 것도 발에 상처 난 것 때문에 온 거니까.”
“아, 네…….”
이현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을 넘겼다.
옥 선생이 자주 외우는 길고 긴 구호 중의 하나가 기초 검사 구호였다. 그래서 그게 기초 중의 기초라고 생각했는데.
“설희 씨, 따라 해봐요. 기초 검사는! 생명을 지키는 방패이다! 얼른, 기초 검사는!”
팔을 휘저으며 큰 소리를 외치도록 요구하던 은우를 떠올리며, 설희는 찜찜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현은 수의사였고, 자기는 고작 동물병원에서 일한 지 몇 달 안 된 직원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알랴. 이현도 행동에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싶어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석연찮은 표정으로 호흡수와 심박수를 차트에 기재하는 설희에게 이현이 다가왔다.
“설희 씨.”
“네?”
“너무 걱정 말아요. 어차피 보호자들은 몰라요.”
이현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설희를 바라보았다.
“혹시 알아요? 어떤 동물병원이 가장 잘되는지.”
“글쎄요…… 사실 전 경력이 길지가 않아서.”
그의 뜬금없는 질문에 설희가 고개를 젓자, 이현이 손으로 턱을 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잘생기거나, 예쁜 수의사가 있는 병원.”
수술을 잘한다거나, 설명이 꼼꼼한 병원일 줄 알았는데, 의외의 답에 설희가 되물었다.
“정말요?”
“정말이죠. 보호자가 뭘 알겠어요? 그냥 수의사가 이렇다. 하고 설명하면 그런 줄 믿는 거지. 동물병원도 서비스직이니까요.”
약간 보호자들을 바보 취급하는 느낌. 뭔가 불쾌한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강아지를 키우고, 보호자인 데다가, 수의사가 아니라서 괜히 예민하게 생각하는 걸까? 아니, 어쩌면 그의 말이 맞는지도 몰라.
병원에서 몇 개월 근무한 설희였지만, 아직 동물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런데 일반 보호자들은 수의사가 말하는 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확실히 눈앞의 슈나우저는 건강해 보이니까……
찜찜한 마음을 누르며 설희는 차트를 닫았다.
***
하루 중 가장 신나는 시간은 언제일까?
바로 퇴근 5분 전이지.
오늘은 동물병원이 한가했다. 최 선생님이 출산 때문에 병원을 완전히 그만두는 것은 다음 달이었고, 평소보다 수의사가 많아서인지 대기도 금방금방 줄어들고 퇴근 준비도 빨리 끝났다.
할 일이 없어진 설희는 대기실에 비치되어 있는 강아지 간식을 둘러보았다.
“곰곰이가 뭘 좋아하려나.”
코가 꾹 눌린, 설희의 강아지 곰곰이는 요즈음 디스크 증상도 사라지고 식욕도 좋아졌다. 사료만 줘도 좋아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간식이라도 사가 볼까, 싶었다.
“저건 관절에 좋다고 써 있네.”
선반 가장 위의 ‘글루코사민 함유’라고 써져 있는 녹색의 간식을 보고 설희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160이 되지 않은 설희의 키에는 너무 높은 곳이었다. 사다리를 찾아 고개를 돌린 순간.
누군가의 긴 팔이 쑥, 그녀의 뒤로 등장했다.
“이거 필요한 거예요?”
“아, 네…….”
순간, 옥 선생인가 싶어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한 손으로 설희의 어깨를 잡고 싱긋 웃는 남자는 예상외였다.
“최이현 선생님.”
“정리하려고요?”
“아, 아뇨. 저…….”
그의 손이 여전히 설희의 어깨에 닿아 있었다. 딱히 기분 나쁜 행위는 아니었지만, 너무 가까운 거 아닌가.
그녀가 가만히 손을 바라보니, 이현이 손을 떼고 마저 이야기하라는 듯 턱을 들어 보였다.
“저희 집 강아지가 좋아할 것 같아서 사가려고요.”
“오, 설희 씨 강아지 키워요?”
“네. 얼마 전부터. 병원에서 데려간 개예요.”
“진짜요, 무슨 종?”
“퍼그요.”
이현의 한쪽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나도 말티즈 키우는데. 설희 씨 그러고 보니, 어디 살아요?”
“저는 병원 근처에요.”
“오, 나도 이 근처 사는데.”
“그러시구나.”
심드렁하게 설희가 답했다. 벌써 퇴근 시간이었다. 어서 곰곰이가 기다리는 집으로 가고 싶은데. 그러나 이현은 설희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참. 일요일 날 설희 씨 뭐해요?”
“전 곰곰이…… 아, 저희 집 강아지랑 쉬려고요.”
“마침 잘됐네요.”
이현이 환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주에서 이사 와서 우리 강아지도 친구들이랑 떨어져서 심심해하는데. 같이 산책할래요? 일요일 날 낮에.”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면 점심도 같이 먹고요.”
“아, 저는.”
“이 주변에 강아지 데리고 갈 수 있는 식당이 있어요. 알아두기만 하고 안 가봤는데 잘됐네요.”
이현은 거절할 틈도 주지 않았다.
***
“귀찮아…….”
한숨처럼 설희의 입에서 말이 샜다.
일요일 오전.
한껏 늘어지고 싶은 날이다. 이번 주는 병원에 일이 적었지만 그래도 주말은 소중한 것이었다. 하루 종일 뒹굴거리다가 곰곰이랑 산책도 가고, 곰곰이의 포근한 배를 주물주물 하며 티브이나 보고 싶었거늘.
“최이현 선생이랑 산책이라니…….”
직장 사람과 주말에도 만나다니 최악이다, 최악.
머리를 한껏 흐트러뜨리며 설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거절할 것을 그랬다. 하지만 퇴근 전에 마치 습격당해서 방법이 없었다. 자리에서 꾸물꾸물 일어나 곰곰이에게 사료를 주며 쪼그려 앉았다.
“곰곰아, 너도 싫지? 모르는 개랑 산책은.”
설희의 말에 곰곰이는 그녀가 뭐라고 말하는지 고개를 갸웃갸웃거리며 필사적으로 이해하려 했다.
“엄마랑 둘이 있는 게 좋지?”
“끄응.”
곰곰이의 얕은 목소리에 설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냐, 곰곰아. 니가 뭘 알겠어. 밥 먹어. 그리고 나갈 준비 하자.”
약속은 약속이니 지켜야 했다.
***
결국은 일요일 전체를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 애견 동반이 가능한 식당에 가서 이현과 식사를 하고, 애견 동반이 가능한 카페까지 끌려가 차까지 마셨다.
“저 남자 잘생겼다.”
“그러게.”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는 이현의 모습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목소리를 들은 것은 설희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현의 눈동자가 슬며시 그쪽을 향했다. 뭐라고 할까, 의식하는 느낌?
그래서인지 그와 하는 대화도 설렁설렁 겉돌았다.
은우랑 다녀도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이현처럼 다른 사람들의 눈을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하건, 옥 선생은 그저 설희를 바라만 보았다.
‘옥 선생님이랑 나왔으면 좀 더 즐거웠을 텐데.’
예전에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그토록 무서웠건만, 같이 집을 구하고, 가구를 보러 다니고, 식사를 하면서 부쩍 가까워졌다. 병원이나 신변잡기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즐겁고 잠시 대화가 끊겼을 때도 침묵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이현은.
“저, 선생님. 죄송한데 벌써 3시라…… 제가 그, 4시에 누구 만날 약속이 있거든요. 집에 가서 곰곰이 들여놓고 가야 할 것 같아서요.”
익숙하지 않은 거짓말이 더듬더듬 설희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거짓말이지만,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아무래도 하루 종일 그와 함께 보내는 것은 정말 싫었다. 집에 가서 푹 씻고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설희의 말에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그럼 전 이만…….”
“제가 집에까지 데려다줄게요.”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우리 만두는 조금 더 걸어야 할 것 같아서요. 가는 길이니 겸사겸사 바래다줄게요.”
이현의 말에 그의 말티즈, 만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쩔 수 없는 그의 제안에 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입구까지만 데려다주세요.”
***
“오늘 즐거웠어요. 고마워요. 산책 메이트가 없어서 심심했는데.”
“아, 네…… 저도 만두 귀여웠어요.”
요 몇 시간 같이 있었다고, 이현의 강아지는 설희와 친해졌는지 그녀의 발목 주변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그 모습은 절로 미소가 터질 정도로 귀여웠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설희가 몸을 돌려 곰곰이와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설희 씨.”
이현이 설희를 불렀다. 설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어느새 한껏 가까워진 이현의 손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의 긴 손가락 끝이 설희의 뺨을 스쳤다.
“엇.”
생각지도 못한 접촉에 놀라 설희의 붉은 입술이 반쯤 벌어지는 순간.
스윽.
그녀의 등 뒤에서 오피스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 자리에는 익숙한 남자가 서 있었다.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가 운동으로 단련된 몸을 감싸고 있었고,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는 형형한 눈빛이 비쳤다.
“여기서 지금.”
“…….”
“두 사람, 뭐 하는 겁니까?”
비틀린 입술이 내뱉는 낮고 진한 목소리.
은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