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이보다 더한 짓
(23/80)
23화. 이보다 더한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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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이보다 더한 짓
2023.01.17.
천천히 은우의 얼굴이 제 앞으로 다가온다. 입술이 스칠 듯 말 듯, 가깝다. 얼마나 가깝냐면, 그러니까 얼마나 가깝냐면.
설희 자신이 뱉은 숨이 그의 입술을 간지럽힐 정도로 가깝다.
왜 갑자기? 키스를? 여기는 길인데. 아니 길인 게 문제가 아니라.
설희의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막아야 하는데, 막지 못하고 그저 설희는 가만히 있었다. 당장이라도 닿을 듯한 그때, 은우가 속삭였다.
“미안해요, 조금만 이대로 있어요.”
미안하다는데, 조금만 이대로 있으라고 신사적으로 말하는데 뭐라 하나. 설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망설인 끝의 설희의 어려운 대답에 그가 싱긋 웃는다. 가까운 곳에 있는, 반듯한 남자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를 그린다.
이렇게 보니 참, 옥 선생님은 속눈썹이 길다. 눈두덩도 깊고.
피부도 좋네, 모공도 없어, 남자인데.
쓸데없는 생각에 심장 고동이 빨라진다. 두근두근, 제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리지 않을까. 그렇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자신에게 바싹 다가와 있는 은우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남자는 그대로 자세를 유지하면서 입술을 슬며시 움직였다.
“뒤에 이찬정인가 뭔가 그 남자가 있어요.”
“아.”
그래서.
그래서 갑자기 키스하려고 했던 거구나. 아까 모임에서 찬정이 했던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저 두 사람, 사귀지 않는다는 거 알아.”
“…….”
“정말로 사귀는 거면, 여기서 키스해보든가.”
그 말 때문에 확실하게 보여주려는 게 틀림없다.
은우는 뒤를 힐긋 보고는 설희의 귓가에서부터 목선을 훑어 천천히 손끝을 미끄러뜨렸다. 여린 살결을 그의 손가락이 훑고 지나가 짜르르한 감각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스쳐 지나간다.
“아.”
절로 얕은 숨이 샜다. 몸이 흔들렸다. 그러자 은우가 설희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아프다기보다는 견고하게 자신을 지탱해주는 감각.
그래, 그가 자신을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하마터면 발끝이 무너져내릴 것만 같다.
“괜찮아요, 조금만.”
달래듯, 그가 속삭였다. 그의 입술 사이로는 상쾌한 민트향이 난다. 또 다른 한 손으로는 그가 부드럽게 등을 쓸어내렸다. 점점 몸과 몸이 가까워진다.
괜찮아, 진짜는 아니야.
뒤에 서 있을 찬정이 보면, 진짜 키스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농밀한 스킨십이었지만, 실제로 닿진 않았다.
그러니까 괜찮아. 심장아 터지지 마.
그렇게 한참을 두 사람은 서 있었다. 바람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갈 때 즈음, 은우가 천천히 설희를 놓아주었다. 두 사람 사이에 갇혀 있던 온기가 흩어진다.
“갔어요.”
“아, 갔군요.”
발끝이 후들거려, 설희의 몸이 휘청거리자 은우가 그녀를 잡아주었다.
“같은 자세로 있느라 힘들었죠.”
“아, 아뇨. 이건…….”
같은 자세로 계속 있어서 힘들었던 게 아니라, 그건 옥 선생님 때문에.
그렇게 말하려다가 설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갑자기 다가와 놀랐습니까?”
“조금 놀랐어요.”
“미안해요.”
사과하면서도 남자는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이 또 병원에서와는 달라 묘했다. 배 안쪽이 간질간질하는 느낌.
아, 왜 자꾸 저렇게 웃어.
사람 심장 떨리게.
두 얼굴의 사나이도 아니고, 병원 밖과 병원 안의 그는 너무 다르다.
괜찮냐는 듯, 아까 자신을 안은 채 등을 토닥이던 그의 손가락에 시선이 갔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 그 손가락이 계속 저를 쓸어 내려주었다.
“오랜 시간 고생했어요.”
“고생은 옥 선생님이 하셨죠. 저 때문에 별짓을 다하고.”
아까도 하마터면 사람들 앞에서 키스할 뻔했다. 그가 단호하게 잘라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지금도 이런 자세를 취하고. 청문회도 당하고. 이게 다 그 문제아 이찬정이 아니었더라면, 당하지 않았을 일이다.
“죄송해요. 정말.”
설희의 사과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과할 필요 없어요. 별것 아닌데요.”
“생각보다 너무 많은 걸 해주셨어요. 옥 선생님. 감사합니다.”
조금 전까지 은우 씨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마법에서 깰 시간.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다행히 찬정이 그놈도 납득한 것 같고, 친구들도 즐거워했어요.”
은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잊었나 보네요. 이걸 먼저 시작하자고 한 사람은 나예요.”
“그랬죠, 하지만 오늘은 제가 감사해요. 할머님 뵈러 갈 때는 옥 선생님이 고마워하세요.”
그 말에 은우가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그럴게요. 그리고…….”
그가 말을 길게 늘였다.
“이 정도로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이보다 더한 것도 해줄 수 있으니, 걱정 말아요.”
그리고 은우는 톡톡, 설희의 어깨를 쳤다.
“이보다……. 더한 것?”
끌어안는 것보다 더한 게 뭔데? 뭐, 뭐 말하는 거지?
안는 것보다 더한 것이라면, 정말로 그…….
설희의 눈이 조금 전 까지 제 앞에 있었던 남자의 붉은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촉촉한 곳에 시선이 자연스럽게 머문다.
눈 앞에 펼쳐진 붉은색 상상에 설희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자, 은우가 피식 웃었다.
“유설희 씨.”
“……네?”
“무슨, 야한 생각해요?”
“제…… 제가요? 제가 야한 생각이요? 저요?”
“아니, 얼굴이 발갛길래.”
그의 손가락이 툭, 설희의 뺨을 건드렸다. 조금 전 놀라 흥분한 살결이 떨리자, 다시 한번 짜르르한 감각이 온몸으로 흘러갔다. 깜짝 놀라 그녀는 튀어 올랐다.
“제가 음흉한 상상을요?”
물론 했지만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거든요?”
“뭐가 아니에요?”
“야한 거는 선생님이 생각하시겠죠!”
억울한 마음에 설희가 소리치자, 은우가 눈썹을 찌푸렸다.
“음흉한 생각 하는 건 어떻게 알았죠.”
“……네?”
“설희 씨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네요.”
음흉한 생각을 했다고? 저 식욕도, 성욕도, 어떠한 욕구도 없어 보이는 옥 선생이? 나랑? 상대가 나인데?
은우는 말없이 가만히 설희를 내려다봤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린다.
웃음기를 띈 얼굴에 그제야, 설희는 그가 농담을 던졌다는 걸 깨달았다.
“옥 선생님, 농담하신 거군요?”
“농담 반, 진담 반.”
아니, 이 사람은 나 괴롭히려고 태어났나. 빙긋이 미끄러지는 미소에 설희가 주먹을 꽉 쥐고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얼른 집에 가요. 이상한 농담하지 마시구.”
설희는 은우를 흘겨보며 차로 향했다.
설희가 너무 미안해할까 봐, 은우가 일부러 농담으로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라는 걸 깨달은 건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서였다.
***
일요일. 인경이 시골에서 쪽파를 보내주셨다고 두 손 잔뜩 들고 집에 왔다. 그 때문에 신난 건 설희의 어머니였다.
“어머, 이게 뭐야. 다 다듬어서 보내주셨네.”
신문지 안에서 푸릇푸릇한 쪽파들이 쏟아졌다. 지금 밭에서 수확한 것처럼 싱싱한 채소들이었다.
“네, 시골에서 이번에 농사가 잘됐대요.”
“너무 맛있겠다. 저녁에 오징어 올려서 전 부쳐 먹으면 딱이겠는걸.”
“와, 맛있겠네요.”
“인경아, 너도 먹고 갈래?”
“그래도 돼요?”
“그럼, 그래도 되지.”
엄마와 인경이 소란스럽게 떠든다. 그러나 설희는 친구와 엄마가 떠들든지 말든지 소파 위에 늘어져 있었다.
피곤해도, 너무 피곤해.
엄마가 선물 받은 농작물을 손에 들고 설희를 바라보았다.
“설희야, 너도 전 먹을 거지?”
“몰라아.”
“왜 몰라? 쪽파 싫어해?”
“쪽파고, 전이고, 다 필요 없어.”
엄마가 신이 나서 쪽파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가자, 인경이 설희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설희야, 뭐 해.”
“……숨 쉬는 중.”
“힘들어?”
“응.”
“어제 잘해놓고 뭐가 힘들어.”
인경의 핀잔에 설희는 몸을 데굴 굴려 소파에 앉은 인경을 올려다보았다.
어제 모임이 상당한 스트레스였나 보다. 어제는 일도 안 했고 오후에 모임에 나갔다 온 것이 다이건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인경은 그렇게 늘어져 있는 설희의 다리를 툭 쳤다.
“와…… 괜찮대?”
인경을 올려다보았다.
“뭐가?”
도대체 무슨 쪽파길래 이 난리인가. 설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쪽파? 관심 없대두.”
“아니, 갑자기 무슨 쪽파야. 니 ‘남자친구’말야.”
인경이 남자친구란 말에 힘을 주었다. 설희와 가장 친한 친구인 그녀는 어제 모임 참가자 중에서 설희와 은우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두 사람의 관계가 가짜라는 것을 알았다.
아아, 옥 선생님.
어제의 그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마지막에 농담을 건네며 웃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자, 설희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연습 많이 했어. 그럴듯했지?”
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둘 사이도 좋아 보이고, 그냥 사람 자체가 괜찮아 보이던데. 근데, 그 사람…… 네가 예전에 그, 술 마시고 맨날 씹던 상사 아니야?”
“내가 그랬나?”
그리 얼마 되지 않은 기억인데도 희미했다. 인경이 뭔 소리를 하냐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 깐깐한 옥 선생, 옥깐깐쟁이라고 했었잖아.”
그랬던 것도 같다. 하긴…… 병원에서는 오죽 깐깐하던가. 안 그래도 전공과도 상관없고 처음 일을 해서 매번 긴장하던 설희에게 은우는 그야말로 염라대왕이었다.
“……응, 좀 무섭긴 했지.”
이 ‘계약연애’로 얽히기 전만 해도 사실 밥도 같이 먹기 힘들었다. 그가 자신을 부르면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싶어서.
하지만 이제는 그 정도로 무섭지는 않다. 병원에서도 남들에 비해 일을 잘한다는 기준이 높고 깐깐할 뿐,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지는 않았다.
“근데 네 말이랑 다르게 다정하기 그지없던데.”
“그건 네가 병원에서 안 봐서 그래. 하여튼, 맞아.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
나아졌다는 설희의 표현에 인경이 ‘오오.’하고 감탄사를 냈다.
“병원 안에서 연애 가능해? 진짜 괜찮던데, 난. 한번 잘 해봐.”
“그런 거 아냐. 말했잖아.”
이건 다 한 번의 연극이라고. 아니, 두 번이다. 그의 할머니 댁에 가는 거까지 하면. 그거까지 하면 다 끝날 일이었다. 단호히 자르는 설희의 말에 인경이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에는 그런 거 아니었어도. 안 될 이유는 없잖아.”
“있지. 나 사내연애 다신 안 할 거야. 그리고…… 옥 선생님도 나한테 관심 없을걸?”
설희의 말에 인경은 거울 너머로 설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안 하고, 빤히 쳐다만 본다. 시선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인경의 표정이 알 듯 말 듯 해서 설희는 왜 저렇게 바라보나 눈썹을 모았다.
“왜에.”
인경이 한숨을 쉬며 설희의 다리를 툭툭 쳤다.
“설희야.”
“응?”
인경이 자신을 부르자, 설희가 고개를 뒤로 젖혀 그녀를 바라보았다. 인경이 미간을 모으고 설희를 향해 고개를 쭉 뻗었다.
“유설희.”
“왜?”
“우리 설희는 참 눈치도 없지.”